《고전기》에서 전하는 백제

《고전기(古典記)》239239 《삼국사기》의 편찬 당시 존재한 한국계통의 고기(古記)의 일종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4쪽)닫기를 살피건데 동명왕240240 고구려 1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37~기원전19년이다. 성은 고씨(高氏). 본명은 주몽(朱蒙) 혹은 추모(皺牟), 상해(象解) 등으로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유인(誘引)하여 사욕을 채운 후 사라졌는데, 부여(扶餘)의 왕 금와(金蛙)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유화를 궁중에 유폐시켰더니 곧 큰 알을 낳았다. 이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 아이가 자라 활을 잘 쏘자 아이의 이름을 선사자(善射者)란 의미로 주몽(朱蒙)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주몽은 금와의 7형제들과 자라면서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마리(摩離)·오이(烏伊)·협보(陝父) 등과 도망하여 홀본(忽本)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37년이다. 주몽은 비류국(沸流國), 행인국(荇人國), 북옥저(北沃沮)등을 병합하여 국가기틀을 마련하였다. 재위 19년에 부여에서 도망온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고 사망하였다.(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및 역주 표영관)닫기의 셋째 아들인 온조241241 백제(百濟) 1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18~29년이다. 백제본기에 전하는 온조(溫祚)와 관련된 건국 설화는 두 가지이다. 먼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아들로 등장하는 설화이다. 즉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 졸본부여(卒本扶餘) 왕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라는 것인데, 이들 형제는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유리(琉璃)가 고구려로 오자 백성을 이끌고 남하(南下)한 것으로 기록된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하고, 둘째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 한 후 국호(國號)를 십제(十濟)라고 한 것인데, 비류가 정착에 실패하고 죽자 온조가 비류의 무리를 통합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들이 부여(扶餘)에서 출자하였음으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또 다른 설화에서도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등장한다. 이 경우 백제의 시조는 비류가 된다. 비류와 온조는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연타발(延陀勃)의 딸인 소서노(召西奴)의 아들들로 기록되었다.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내조(內助)한 바가 커서 주몽이 소서노를 비(妃)로 삼았으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太子)가 되자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남하하여 따로 건국하여 백제를 이루었다고 전한다.(백제본기, 제 1 시조온조왕 및 역주 표영관)닫기가 전한 홍가242242 전한(前漢) 성제(成帝)시기의 연호(기원전20~기원전17년 | 역주 이성호)닫기 3년 계묘년에 졸본부여(卒243243 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현종실록자본 《삼국사기》에서는 卒로 나와 이를 교감하여 따랐다.닫기本扶餘)에서 위례성(慰禮244244 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礼로 되어있으나, 현종실록자본 《삼국사기》에서는 禮로 나와 이를 교감하여 따랐다.닫기城)245245 백제의 초기의 수도로 지금의 서울 몽촌토성 또는 풍납토성으로 보며,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따로 구분하여 보는 설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닫기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246246 백제 13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346~375년이다.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 재위 24년(369)에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치양(雉壤)에 주둔하자 고구려군을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동진(東晉)에 사신(使臣)을 보내 조공하는 등 외교에도 노력하였다. 또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 최전성기의 왕으로 왕권 강하와 정복사업을 통해 강력한 고대국가의 기반을 확립했다고 이해된다.(백제본기, 제 2 및 역주 표영관)닫기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247247 지금의 서울특별시의 강북 중심지역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닫기을 취하고 한성에 도읍했다.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248248 백제 22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475~477년이다. 혹은 문주(文洲)라고도 한다. 개로왕(盖鹵王)의 아들. 비유왕(毗有王)이 죽고 개로왕이 재위한 이후 문주(文周)가 상좌평(上佐平)으로 이를 도왔다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죽자 즉위하였다. 고구려의 침공 당시 문주는 신라에 구원(救援)을 요청해 1만 군사를 이끌고 왔었다. 즉위 후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漢江) 이북의 민호(民戶)를 이주(移住)시켰다. 재위 4년 만에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의 자객에게 살해되었다.(백제본기, 제 4 및 역주 표영관)닫기이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63년이 지나고 26세 성왕249249 백제 26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23~554년이다. 본명은 명농(明穠). 무령왕(武寧王)의 아들. 무령왕(武寧王)에 이어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에 조공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재위 16년에 도읍을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하였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성왕(聖王)은 난병(亂兵)에게 해를 입어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전 551년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탈취하였으나, 2년만인 553년에 신라(新羅)가 백제를 반(反)하여 이 지역을 다시 탈취하였는데, 이때 나제동맹은 깨지고 성왕이 신라를 침공하다가 전사한 것이다.(백제본기, 제 4 및 역주 표영관)닫기이 도읍을 소부리250250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扶餘)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닫기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251251 백제 성왕(聖王)이 부여(扶餘)로 도읍을 옮긴 후 표방한 국호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닫기로 하였다. 31세 의자왕252252 백제 31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641~660년이다. 무왕(武王)의 원자(元子).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성이 있었다. 효도와 우애(友愛)가 있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음을 받았다. 즉위 직후 의자왕(義慈王)은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키며 승승장구했다. 또 전왕인 무왕에 이어 당(唐)에 지속적으로 조공(朝貢)하였으며 재위 13년에는 왜(倭)와 우호(友好)를 통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의자왕은 재위 15년 이후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꾸미고, 향락에 빠지는 등 정사(政事)를 등한시 했다고 한다. 660년에 나당(羅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 사비성(泗泌城)이 포위되자 의자왕은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다가 항복한 후 당(唐)으로 압송되었다가 곧 사망하였다. 이것으로 백제가 멸망하였다.(백제본기, 제 6 의자왕 및 역주 표영관)닫기에 이름에 122년이 지나고 현경(顯慶)253253 당(唐) 고종(高宗)시기의 연호(656~661 | 역주 이성호)닫기 5년에 이르러 의자왕 재위 20년 때에 신라 유신(金庾信)254254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 595년(진평왕 17)~673년(문무왕 13).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 증조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그의 누이동생이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673년 가을 79세로 죽었다.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거기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신라본기, 제22 문주왕, 열전 김유신전 및 역주 이성호)닫기(唐)의 소정방(蘇定方)이 함께 토벌해 평정하였다.

註 239
《삼국사기》의 편찬 당시 존재한 한국계통의 고기(古記)의 일종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4쪽)
註 240
고구려 1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37~기원전19년이다. 성은 고씨(高氏). 본명은 주몽(朱蒙) 혹은 추모(皺牟), 상해(象解) 등으로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유인(誘引)하여 사욕을 채운 후 사라졌는데, 부여(扶餘)의 왕 금와(金蛙)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유화를 궁중에 유폐시켰더니 곧 큰 알을 낳았다. 이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 아이가 자라 활을 잘 쏘자 아이의 이름을 선사자(善射者)란 의미로 주몽(朱蒙)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주몽은 금와의 7형제들과 자라면서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마리(摩離)·오이(烏伊)·협보(陝父) 등과 도망하여 홀본(忽本)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37년이다. 주몽은 비류국(沸流國), 행인국(荇人國), 북옥저(北沃沮)등을 병합하여 국가기틀을 마련하였다. 재위 19년에 부여에서 도망온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고 사망하였다.(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및 역주 표영관)
註 241
백제(百濟) 1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18~29년이다. 백제본기에 전하는 온조(溫祚)와 관련된 건국 설화는 두 가지이다. 먼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아들로 등장하는 설화이다. 즉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 졸본부여(卒本扶餘) 왕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라는 것인데, 이들 형제는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유리(琉璃)가 고구려로 오자 백성을 이끌고 남하(南下)한 것으로 기록된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하고, 둘째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 한 후 국호(國號)를 십제(十濟)라고 한 것인데, 비류가 정착에 실패하고 죽자 온조가 비류의 무리를 통합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들이 부여(扶餘)에서 출자하였음으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또 다른 설화에서도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등장한다. 이 경우 백제의 시조는 비류가 된다. 비류와 온조는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연타발(延陀勃)의 딸인 소서노(召西奴)의 아들들로 기록되었다.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내조(內助)한 바가 커서 주몽이 소서노를 비(妃)로 삼았으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太子)가 되자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남하하여 따로 건국하여 백제를 이루었다고 전한다.(백제본기, 제 1 시조온조왕 및 역주 표영관)
註 242
전한(前漢) 성제(成帝)시기의 연호(기원전20~기원전17년 | 역주 이성호)
註 243
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현종실록자본 《삼국사기》에서는 卒로 나와 이를 교감하여 따랐다.
註 244
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礼로 되어있으나, 현종실록자본 《삼국사기》에서는 禮로 나와 이를 교감하여 따랐다.
註 245
백제의 초기의 수도로 지금의 서울 몽촌토성 또는 풍납토성으로 보며,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따로 구분하여 보는 설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
註 246
백제 13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346~375년이다.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 재위 24년(369)에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치양(雉壤)에 주둔하자 고구려군을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동진(東晉)에 사신(使臣)을 보내 조공하는 등 외교에도 노력하였다. 또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 최전성기의 왕으로 왕권 강하와 정복사업을 통해 강력한 고대국가의 기반을 확립했다고 이해된다.(백제본기, 제 2 및 역주 표영관)
註 247
지금의 서울특별시의 강북 중심지역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
註 248
백제 22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475~477년이다. 혹은 문주(文洲)라고도 한다. 개로왕(盖鹵王)의 아들. 비유왕(毗有王)이 죽고 개로왕이 재위한 이후 문주(文周)가 상좌평(上佐平)으로 이를 도왔다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죽자 즉위하였다. 고구려의 침공 당시 문주는 신라에 구원(救援)을 요청해 1만 군사를 이끌고 왔었다. 즉위 후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漢江) 이북의 민호(民戶)를 이주(移住)시켰다. 재위 4년 만에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의 자객에게 살해되었다.(백제본기, 제 4 및 역주 표영관)
註 249
백제 26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23~554년이다. 본명은 명농(明穠). 무령왕(武寧王)의 아들. 무령왕(武寧王)에 이어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에 조공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재위 16년에 도읍을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하였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성왕(聖王)은 난병(亂兵)에게 해를 입어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전 551년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탈취하였으나, 2년만인 553년에 신라(新羅)가 백제를 반(反)하여 이 지역을 다시 탈취하였는데, 이때 나제동맹은 깨지고 성왕이 신라를 침공하다가 전사한 것이다.(백제본기, 제 4 및 역주 표영관)
註 250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扶餘)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
註 251
백제 성왕(聖王)이 부여(扶餘)로 도읍을 옮긴 후 표방한 국호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
註 252
백제 31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641~660년이다. 무왕(武王)의 원자(元子).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성이 있었다. 효도와 우애(友愛)가 있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음을 받았다. 즉위 직후 의자왕(義慈王)은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키며 승승장구했다. 또 전왕인 무왕에 이어 당(唐)에 지속적으로 조공(朝貢)하였으며 재위 13년에는 왜(倭)와 우호(友好)를 통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의자왕은 재위 15년 이후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꾸미고, 향락에 빠지는 등 정사(政事)를 등한시 했다고 한다. 660년에 나당(羅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 사비성(泗泌城)이 포위되자 의자왕은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다가 항복한 후 당(唐)으로 압송되었다가 곧 사망하였다. 이것으로 백제가 멸망하였다.(백제본기, 제 6 의자왕 및 역주 표영관)
註 253
당(唐) 고종(高宗)시기의 연호(656~661 | 역주 이성호)
註 254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 595년(진평왕 17)~673년(문무왕 13).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 증조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그의 누이동생이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673년 가을 79세로 죽었다.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거기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신라본기, 제22 문주왕, 열전 김유신전 및 역주 이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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