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가계

김유신(金庾信)001001 《삼국사기》의 열전 10권 가운데 3권을 김유신 1인에 할애하고 있고, 열전의 서두에 쓴 점에서 《삼국사기》 편찬자의 관심의 정도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열전의 기초 자료는 그의 玄孫 金長淸이 쓴 《(김유신)행록》 10권과 김유신 비문 등이었는데, 김유신의 연보를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595년(진평왕 17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
15세(609, 진평왕 31년) 화랑이 되어 龍華香徒를 거느림.
17세(611, 진평왕 33년) 고구려 백제 말갈이 침입함을 보고 혼자 중악 석굴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여 비법 방술을 체득하였다.
18세(612, 진평왕 34년) 열박산에 들어가 검술을 익히고 신비를 체험하였다.
35세(629, 진평왕 51년) 고구려의 낭비성(청주)을 공격하여 대세를 역전시켰다.
48세(642, 선덕왕 11년)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50세(644, 선덕왕 13년) 소판의 지위에 올랐다. 9월 상장군(본기에는 대장군)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 성렬성, 동화성 등 일곱 성을 쳐서 대승하여 加兮津까지의 길을 개척하였다.
51세(645, 선덕왕 14년) 정월 戰場에서 돌아와 왕에게 보고하고 나오자 백제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곧 바로 다시 나아가 2,000명을 목베었다. 3월 백제군이 공격하리라는 보고를 듣고 다시 戰場에 나갔다.
53세(647, 선덕왕 16년, 진덕왕 원년) 정월 대신 毗曇廉宗이 반란을 일으켜 궁성을 포위하자 이를 진압하였다. 10월 백제군이 茂山, 甘勿, 桐岑 등의 성을 공격하여 포위하니 김유신은 보병 및 기병 합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 丕寧子의 용투로 인하여 대승하여 3,000명을 목베었다.
54세(648, 진덕왕 2년) 3월 백제 장군 義直이 서쪽 국경을 쳐들어와 腰車城 등 10성을 함락하니 옥문곡에서 8명의 백제 장군을 사로잡고 1,000명을 목베었다. 8명의 장군을 돌려보내 품석 부부의 유골과 바꾸기로 하고 승세를 몰아 백제 땅을 공격하여 嶽城 등 12성을 빼앗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000명을 생포하였다. 그 공으로 이찬에 올랐다. 上州行軍大摠官이 되어 백제에 쳐들어가 進禮城 등 9성을 공략하여 9,000명을 목베고 600명을 생포하였다.
55세(649, 진덕왕 3년) 백제 장군 殷相이 石吐城 등 7성을 공격하자 유신은 장군 죽지(竹旨), 陳春, 天存 등과 함께 나가 방어하였다. 道薩城 전투에서 達率 정중(正仲)과 士卒 100명을 생포하고, 佐平 殷相, 達率 自堅 등 10명의 장수와 군사 8,980명을 죽이고 말 1만 필, 투구 1800개를 획득하였다. 백제 좌평 정복과 군사 1,000명이 항복하여 오자 모두 풀어주어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하였다.
61세(655, 태종 무열왕 2년) 태종 무열왕의 세째딸과 결혼하였다. 백제 도비천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66세(660, 태종 무열왕 7년) 정월 이찬으로서 上大等이 되었다. 대장군으로서 5만 정예군을 끌고 출정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7세(661, 문무왕 원년) 7월 평양 근처에 와있던 소정방의 요청에 따라 국왕의 명을 받고 지략을 발휘하여 고구려 강역을 통과하여 당군에게 식량을 조달하였다.
69세(663, 문무왕 3년) 7월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전. 11월 전지 500결을 공으로 하사받았다.
70세(664, 문무왕 4년) 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왕으로부터 机仗을 받았다.
71세(665, 문무왕 5년) 唐 高宗이 사신을 보내어 奉常正경(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에 봉하였다.
72세(666, 문무왕 6년)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김유신의 장남 三光을 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삼아 숙위하게 하였다.
74세(668, 문무왕 8년) 6월 21일 고구려 정벌에 大幢大摠管이 되었으나 병과 노쇠로 인하여 출전하지 못하였다. 고구려 평정 공로로 10월 22일 태대각간의 관등과 식읍 500호, 수레와 지팡이를 받았다. 당 고종이 김유신의 朝會를 청하는 조서를 내렸으나 중국에 가지 않았다.
79세(673, 문무왕 13년) 7월 1일 죽었다. 왕은 비단 1,000필과 조 2,000석을 주어 상사에 쓰게 하고, 금산원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담당관서에서 비를 세우고 수묘인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지소부인은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0~642쪽).
닫기
은 왕경인(王京人)002002 왕경인이란 지방인과 구별하는 뜻으로 왕도에 살고 있는 경주 사람을 지칭한 말이다. 丹陽赤城碑에 따르면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沙喙部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김유신 가문은 6부 가운데 사훼부(사량부)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경인은 京位를 가질 수 있었고 골품제에 편입될 수 있었던 일종의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다(이문기, 「금석문자료를 통하여 본 신라의 육부」, 《역사교육논집》 2, 1981, 120~122쪽 | 武田幸男, 「新羅の骨品體制社會」, 《역사학연구》 299, 1965, 10~12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2쪽).닫기이다. [그의] 12세조003003 북한본, 이병도, 《역주 삼국유사》, 동아출판사 1956, 이재호본, 신호열, 《삼국사기》 등에서는 12대조(代祖)로 번역하였다. ‘世’와 ‘代’는 한자의 原義上 같은 의미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족보상에서 자손을 가리킬 때에는 시조를 1세로 하여 세로 표기해 왔다. 아울러 선조를 칭할 경우에는 몇 대조, 후손을 칭할 경우에는 몇 세손으로 칭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러나 문집에서는 통용된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정구복, 「사학사에 있어서의 시대구분과 각시대의 특징」,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세’와 ‘대’를 구분하여 쓰는 경우를 살펴보면 ‘세’는 시조를 1세로 기록하고 자신까지 계산하며, ‘대’의 경우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고 아버지부터 1대로 계산함으로써 세대수에 있어서 1대의 차이가 있다. 즉 시조의 12세손이 자신의 시조를 칭할 경우 11대조가 되는 것이다. 조선조의 ‘세’·‘대’ 관념에 따른다면 수로왕김유신의 12대조라 할 경우 김유신은 수로왕의 13세손이 된다. 그러나 12세조의 경우도 김유신 자신을 1세로 계산하지 않은 듯하므로 의미상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서는 김유신보다 1대 후인 문무왕이 制書에서 자신의 15대 시조라고 하여 1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2~643쪽).닫기 [김]수로(首露)004004 가락국의 시조이며,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 의하면 부인은 阿踰陁國 공주인 許黃玉이라고 한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 신라의 파사왕 23년(102)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영토분쟁을 해결하였다는 기사가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조에 전한다. 그를 수로라고 칭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알 중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뜻(始現故諱首露)’(《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고, 이는 ‘聳出’, ‘湧出’, ‘增高’를 뜻하는 우리 고어의 ‘수리’·‘술’·‘솔’에 해당하는 말로, ‘高位’, ‘首位’, ‘神聖’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李丙燾, 「首露王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참조)가 제기된 바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3쪽).닫기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005005 이 구절은 번역본 마다 해석의 차이를 보인다. 이재호본정문연본에서는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신호열, 《삼국사기》에서는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로, 북한본에서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이병도, 《역주 삼국유사》, 동아출판사 1956에서는 (근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번역하였다(번역본마다의 해석은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3~644쪽 참조). 사전적으로 ‘何許’가 ‘어느 곳’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김유신을 왕경인으로 표현한 것처럼 수로의 출신 지역 내지 거주 지역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는 쪽이 무난할 것이다.닫기 [김수로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유리이사금 19년, 42년] 구봉(龜峯)006006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는 ‘龜旨’라고 되어 있는데, 가락국기에 따르면 거북이가 엎드린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龜旨’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닫기에 올라 가락(駕洛)의 9촌007007 가락국을 세운 김해 지방의 아홉 마을이며,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는 수로가 나타나기 이전 이 지역에 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 등 9干이 있어서 이들이 100戶 75,000명을 통솔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가락 9촌은 아마도 이들 9간이 다스리던 각각의 촌명을 총칭한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4쪽).닫기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008008 가야는 ‘加耶’·‘伽耶’·‘伽倻’·‘加羅’·‘加良’·‘駕洛’·‘伽落’·‘狗耶’·‘南加羅’·‘南加耶’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데 넓은 의미로는 고대 낙동강 중·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諸國에 대한 총칭이라 할 수도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지금의 김해지역에 위치하였던 金官加耶를 지칭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김해도호부 연혁조에 따르면 김해는 본래 駕洛國이었는데 혹 加耶라 하기도 하였으며 뒤에 金官國으로 고쳤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4쪽).닫기라고 하였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009009 가야연맹 가운데 하나인 본가야(김해)를 지칭하는 국호이며, 진흥왕 19년(532)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즉위년조, 파사이사금 23년조, 법흥왕 19년조《삼국사기》 권34 잡지 지리지 김해소경조에 金官國이라는 국명이 더 나오고 있으나 탈해·파사이사금의 경우는 모두 수로왕과 관련된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경우는 멸망 당시의 국호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拘邪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늦어도 3세기까지는 그 국호가 가야였음을 알 수 있는데 ‘拘邪國’은 가야국의 중국식 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금관국은 건국 초기부터의 국명이 아니라 후기의 국명이라는 주장(김태식, 「가야의 사회발전단계」, 《한국고대국가의 형성》, 민음사, 1990)이 제기되었던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4~645쪽).닫기으로 고쳤다.010010 금관국으로 칭해진 때는 680년 이후라는 주장이 있으나(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49, 237쪽) 대체로는 김해가야가 멸망한 후인 6세기부터 7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김해가야가 멸망한 후 신라에서는 南加耶로 칭하였고, 《일본서기》 권20 敏達紀 4년(575)조에 ‘素那羅’, 推古紀 8년(600)조에는 ‘南加羅’, 繼體紀 23년(529) 4월조에 ‘金官村’이란 이름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에서 국명을 금관국으로 고쳤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어렵다는 견해(김태식, 「대가야의 세계와 도설지」, 《진단학보》 81, 1996, 8~10쪽)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쪽).닫기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김]구해(仇亥)011011 가야의 제10대 왕으로 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521년에 즉위했다가 532년(법흥왕 19년)에 나라를 들어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후 가야왕족의 일부는 김유신 가문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진골로 편입된 듯하다. ‘亥’자를 ‘充’자의 誤刻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13쪽) 이는 이곳 외에도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권34 잡지3 지리1 양주 김해소경조에도 나오고 있으므로 오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쪽).닫기에 이르렀는데, 혹 구차휴(仇次休)012012 《삼국유사》 왕력편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는 ‘仇衝’ 또는 ‘仇衡’으로 되어 있다.닫기라고도 하며 [김]유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013013 소호금천씨는 중국 상고시대의 제왕으로 이름은 玄囂 혹은 挈이라고 하며, 논자에 따라 그를 黃帝의 맏아들로 보기도 하고 손자로 보기도 한다. 太昊로 불리던 伏羲(犧)氏의 법을 이어받았다고 하여 小昊라 불렸으며, 金德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여 金天氏라고 하였다(이기동,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363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쪽 | 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49쪽 | 권덕영, 「〈대당고김씨부인묘명〉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한국고대사연구》 54, 2009, 401쪽).닫기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으로 한다고 하였고014014 현존하는 금석문 가운데 文武王陵碑, 金仁問 墓碑, 大唐 故金氏夫人 墓銘, 王昷 妻 壽寧翁主 金氏 墓誌銘 등에 소호금천씨의 후예이기 때문에 김씨 성을 사용한다는 구절이 있다.닫기유신비(庾信碑)015015 유신비는 薛因宣이 찬하였다는 김유신비(9세기 전반에 건립)와는 다르며, 7세기 후반에 건립된 김유신의 묘비와 동일한 것이다(이문기, 「신라 김씨 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논집》 23·24, 1999, 662~667쪽 | 이현태, 「신라 중대 신김씨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42, 2006, 238~242쪽).닫기에 또한 “헌원(軒轅)016016 軒轅은 黃帝의 이름이며, 중국 상고시대의 전설적인 제왕이다. 그가 軒轅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하는 데, 蚩尤 등 포악한 제후를 정벌하고 神農氏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고 한다(이기동,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363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쪽 | 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49쪽).닫기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017017 이 구절은 김유신 가문이 신라 중대 왕실과 더불어 동일한 소호금천씨 출자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결국 중대 왕실과 김유신 가문이 同姓인 혈족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이문기, 「신라 김씨 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논집》 23·24, 1999, 665~667쪽 | 이문기, 「금관가야계의 시조 출자전승과 칭성의 변화」,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5, 2004, 11쪽).닫기라고 하였으니018018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김씨를 칭한다고 하는 관념에 대해서는 이문기, 「신라 김씨 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논집》 23·24, 1999에서 상세히 논의한 바 있다.닫기, 곧 남가야(南加耶)019019 남쪽 가야라는 뜻으로, 금관국을 의미한다. 아마도 고령의 대가야를 기준으로 하여 남가야라고 칭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646쪽).닫기의 시조 [김]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020020 이처럼 가계의 연원을 중국의 전설적 인물에 붙이는 예는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일종의 慕華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96, 342쪽). 기왕에는 가야 출신의 김씨들이 신라의 김씨 왕족들과 구별되어 ‘新金氏’를 칭하였던 것으로 이해해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김유신가문이 ‘신김씨’를 칭하였던 것이 아니라 금관가야의 멸망 이후 계속 김해에 거주하고 있던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들이 통일기에 접어들면서 ‘신김씨’를 賜姓받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김유신 가문에서 ‘신김씨’를 사용하였으리라는 기존의 이해는 재고를 요한다(이현태, 「신라 중대 신김씨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42, 2006).닫기

註 001
《삼국사기》의 열전 10권 가운데 3권을 김유신 1인에 할애하고 있고, 열전의 서두에 쓴 점에서 《삼국사기》 편찬자의 관심의 정도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열전의 기초 자료는 그의 玄孫 金長淸이 쓴 《(김유신)행록》 10권과 김유신 비문 등이었는데, 김유신의 연보를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595년(진평왕 17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
15세(609, 진평왕 31년) 화랑이 되어 龍華香徒를 거느림.
17세(611, 진평왕 33년) 고구려 백제 말갈이 침입함을 보고 혼자 중악 석굴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여 비법 방술을 체득하였다.
18세(612, 진평왕 34년) 열박산에 들어가 검술을 익히고 신비를 체험하였다.
35세(629, 진평왕 51년) 고구려의 낭비성(청주)을 공격하여 대세를 역전시켰다.
48세(642, 선덕왕 11년)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50세(644, 선덕왕 13년) 소판의 지위에 올랐다. 9월 상장군(본기에는 대장군)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 성렬성, 동화성 등 일곱 성을 쳐서 대승하여 加兮津까지의 길을 개척하였다.
51세(645, 선덕왕 14년) 정월 戰場에서 돌아와 왕에게 보고하고 나오자 백제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곧 바로 다시 나아가 2,000명을 목베었다. 3월 백제군이 공격하리라는 보고를 듣고 다시 戰場에 나갔다.
53세(647, 선덕왕 16년, 진덕왕 원년) 정월 대신 毗曇廉宗이 반란을 일으켜 궁성을 포위하자 이를 진압하였다. 10월 백제군이 茂山, 甘勿, 桐岑 등의 성을 공격하여 포위하니 김유신은 보병 및 기병 합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 丕寧子의 용투로 인하여 대승하여 3,000명을 목베었다.
54세(648, 진덕왕 2년) 3월 백제 장군 義直이 서쪽 국경을 쳐들어와 腰車城 등 10성을 함락하니 옥문곡에서 8명의 백제 장군을 사로잡고 1,000명을 목베었다. 8명의 장군을 돌려보내 품석 부부의 유골과 바꾸기로 하고 승세를 몰아 백제 땅을 공격하여 嶽城 등 12성을 빼앗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000명을 생포하였다. 그 공으로 이찬에 올랐다. 上州行軍大摠官이 되어 백제에 쳐들어가 進禮城 등 9성을 공략하여 9,000명을 목베고 600명을 생포하였다.
55세(649, 진덕왕 3년) 백제 장군 殷相이 石吐城 등 7성을 공격하자 유신은 장군 죽지(竹旨), 陳春, 天存 등과 함께 나가 방어하였다. 道薩城 전투에서 達率 정중(正仲)과 士卒 100명을 생포하고, 佐平 殷相, 達率 自堅 등 10명의 장수와 군사 8,980명을 죽이고 말 1만 필, 투구 1800개를 획득하였다. 백제 좌평 정복과 군사 1,000명이 항복하여 오자 모두 풀어주어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하였다.
61세(655, 태종 무열왕 2년) 태종 무열왕의 세째딸과 결혼하였다. 백제 도비천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66세(660, 태종 무열왕 7년) 정월 이찬으로서 上大等이 되었다. 대장군으로서 5만 정예군을 끌고 출정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7세(661, 문무왕 원년) 7월 평양 근처에 와있던 소정방의 요청에 따라 국왕의 명을 받고 지략을 발휘하여 고구려 강역을 통과하여 당군에게 식량을 조달하였다.
69세(663, 문무왕 3년) 7월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전. 11월 전지 500결을 공으로 하사받았다.
70세(664, 문무왕 4년) 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왕으로부터 机仗을 받았다.
71세(665, 문무왕 5년) 唐 高宗이 사신을 보내어 奉常正경(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에 봉하였다.
72세(666, 문무왕 6년)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김유신의 장남 三光을 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삼아 숙위하게 하였다.
74세(668, 문무왕 8년) 6월 21일 고구려 정벌에 大幢大摠管이 되었으나 병과 노쇠로 인하여 출전하지 못하였다. 고구려 평정 공로로 10월 22일 태대각간의 관등과 식읍 500호, 수레와 지팡이를 받았다. 당 고종이 김유신의 朝會를 청하는 조서를 내렸으나 중국에 가지 않았다.
79세(673, 문무왕 13년) 7월 1일 죽었다. 왕은 비단 1,000필과 조 2,000석을 주어 상사에 쓰게 하고, 금산원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담당관서에서 비를 세우고 수묘인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지소부인은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0~642쪽).
註 002
왕경인이란 지방인과 구별하는 뜻으로 왕도에 살고 있는 경주 사람을 지칭한 말이다. 丹陽赤城碑에 따르면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沙喙部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김유신 가문은 6부 가운데 사훼부(사량부)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경인은 京位를 가질 수 있었고 골품제에 편입될 수 있었던 일종의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다(이문기, 「금석문자료를 통하여 본 신라의 육부」, 《역사교육논집》 2, 1981, 120~122쪽 | 武田幸男, 「新羅の骨品體制社會」, 《역사학연구》 299, 1965, 10~12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2쪽).
註 003
북한본, 이병도, 《역주 삼국유사》, 동아출판사 1956, 이재호본, 신호열, 《삼국사기》 등에서는 12대조(代祖)로 번역하였다. ‘世’와 ‘代’는 한자의 原義上 같은 의미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족보상에서 자손을 가리킬 때에는 시조를 1세로 하여 세로 표기해 왔다. 아울러 선조를 칭할 경우에는 몇 대조, 후손을 칭할 경우에는 몇 세손으로 칭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러나 문집에서는 통용된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정구복, 「사학사에 있어서의 시대구분과 각시대의 특징」,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세’와 ‘대’를 구분하여 쓰는 경우를 살펴보면 ‘세’는 시조를 1세로 기록하고 자신까지 계산하며, ‘대’의 경우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고 아버지부터 1대로 계산함으로써 세대수에 있어서 1대의 차이가 있다. 즉 시조의 12세손이 자신의 시조를 칭할 경우 11대조가 되는 것이다. 조선조의 ‘세’·‘대’ 관념에 따른다면 수로왕김유신의 12대조라 할 경우 김유신은 수로왕의 13세손이 된다. 그러나 12세조의 경우도 김유신 자신을 1세로 계산하지 않은 듯하므로 의미상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서는 김유신보다 1대 후인 문무왕이 制書에서 자신의 15대 시조라고 하여 1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2~643쪽).
註 004
가락국의 시조이며,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 의하면 부인은 阿踰陁國 공주인 許黃玉이라고 한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 신라의 파사왕 23년(102)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영토분쟁을 해결하였다는 기사가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조에 전한다. 그를 수로라고 칭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알 중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뜻(始現故諱首露)’(《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고, 이는 ‘聳出’, ‘湧出’, ‘增高’를 뜻하는 우리 고어의 ‘수리’·‘술’·‘솔’에 해당하는 말로, ‘高位’, ‘首位’, ‘神聖’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李丙燾, 「首露王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참조)가 제기된 바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3쪽).
註 005
이 구절은 번역본 마다 해석의 차이를 보인다. 이재호본정문연본에서는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신호열, 《삼국사기》에서는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로, 북한본에서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이병도, 《역주 삼국유사》, 동아출판사 1956에서는 (근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번역하였다(번역본마다의 해석은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3~644쪽 참조). 사전적으로 ‘何許’가 ‘어느 곳’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김유신을 왕경인으로 표현한 것처럼 수로의 출신 지역 내지 거주 지역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는 쪽이 무난할 것이다.
註 006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는 ‘龜旨’라고 되어 있는데, 가락국기에 따르면 거북이가 엎드린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龜旨’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註 007
가락국을 세운 김해 지방의 아홉 마을이며,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는 수로가 나타나기 이전 이 지역에 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 등 9干이 있어서 이들이 100戶 75,000명을 통솔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가락 9촌은 아마도 이들 9간이 다스리던 각각의 촌명을 총칭한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4쪽).
註 008
가야는 ‘加耶’·‘伽耶’·‘伽倻’·‘加羅’·‘加良’·‘駕洛’·‘伽落’·‘狗耶’·‘南加羅’·‘南加耶’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데 넓은 의미로는 고대 낙동강 중·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諸國에 대한 총칭이라 할 수도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지금의 김해지역에 위치하였던 金官加耶를 지칭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김해도호부 연혁조에 따르면 김해는 본래 駕洛國이었는데 혹 加耶라 하기도 하였으며 뒤에 金官國으로 고쳤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4쪽).
註 009
가야연맹 가운데 하나인 본가야(김해)를 지칭하는 국호이며, 진흥왕 19년(532)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즉위년조, 파사이사금 23년조, 법흥왕 19년조《삼국사기》 권34 잡지 지리지 김해소경조에 金官國이라는 국명이 더 나오고 있으나 탈해·파사이사금의 경우는 모두 수로왕과 관련된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경우는 멸망 당시의 국호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拘邪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늦어도 3세기까지는 그 국호가 가야였음을 알 수 있는데 ‘拘邪國’은 가야국의 중국식 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금관국은 건국 초기부터의 국명이 아니라 후기의 국명이라는 주장(김태식, 「가야의 사회발전단계」, 《한국고대국가의 형성》, 민음사, 1990)이 제기되었던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4~645쪽).
註 010
금관국으로 칭해진 때는 680년 이후라는 주장이 있으나(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49, 237쪽) 대체로는 김해가야가 멸망한 후인 6세기부터 7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김해가야가 멸망한 후 신라에서는 南加耶로 칭하였고, 《일본서기》 권20 敏達紀 4년(575)조에 ‘素那羅’, 推古紀 8년(600)조에는 ‘南加羅’, 繼體紀 23년(529) 4월조에 ‘金官村’이란 이름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에서 국명을 금관국으로 고쳤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어렵다는 견해(김태식, 「대가야의 세계와 도설지」, 《진단학보》 81, 1996, 8~10쪽)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쪽).
註 011
가야의 제10대 왕으로 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521년에 즉위했다가 532년(법흥왕 19년)에 나라를 들어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후 가야왕족의 일부는 김유신 가문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진골로 편입된 듯하다. ‘亥’자를 ‘充’자의 誤刻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13쪽) 이는 이곳 외에도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권34 잡지3 지리1 양주 김해소경조에도 나오고 있으므로 오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쪽).
註 012
《삼국유사》 왕력편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는 ‘仇衝’ 또는 ‘仇衡’으로 되어 있다.
註 013
소호금천씨는 중국 상고시대의 제왕으로 이름은 玄囂 혹은 挈이라고 하며, 논자에 따라 그를 黃帝의 맏아들로 보기도 하고 손자로 보기도 한다. 太昊로 불리던 伏羲(犧)氏의 법을 이어받았다고 하여 小昊라 불렸으며, 金德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여 金天氏라고 하였다(이기동,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363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쪽 | 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49쪽 | 권덕영, 「〈대당고김씨부인묘명〉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한국고대사연구》 54, 2009, 401쪽).
註 014
현존하는 금석문 가운데 文武王陵碑, 金仁問 墓碑, 大唐 故金氏夫人 墓銘, 王昷 妻 壽寧翁主 金氏 墓誌銘 등에 소호금천씨의 후예이기 때문에 김씨 성을 사용한다는 구절이 있다.
註 015
유신비는 薛因宣이 찬하였다는 김유신비(9세기 전반에 건립)와는 다르며, 7세기 후반에 건립된 김유신의 묘비와 동일한 것이다(이문기, 「신라 김씨 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논집》 23·24, 1999, 662~667쪽 | 이현태, 「신라 중대 신김씨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42, 2006, 238~242쪽).
註 016
軒轅은 黃帝의 이름이며, 중국 상고시대의 전설적인 제왕이다. 그가 軒轅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하는 데, 蚩尤 등 포악한 제후를 정벌하고 神農氏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고 한다(이기동,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363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쪽 | 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49쪽).
註 017
이 구절은 김유신 가문이 신라 중대 왕실과 더불어 동일한 소호금천씨 출자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결국 중대 왕실과 김유신 가문이 同姓인 혈족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이문기, 「신라 김씨 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논집》 23·24, 1999, 665~667쪽 | 이문기, 「금관가야계의 시조 출자전승과 칭성의 변화」,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5, 2004, 11쪽).
註 018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김씨를 칭한다고 하는 관념에 대해서는 이문기, 「신라 김씨 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논집》 23·24, 1999에서 상세히 논의한 바 있다.
註 019
남쪽 가야라는 뜻으로, 금관국을 의미한다. 아마도 고령의 대가야를 기준으로 하여 남가야라고 칭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5~646쪽).
註 020
이처럼 가계의 연원을 중국의 전설적 인물에 붙이는 예는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일종의 慕華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96, 342쪽). 기왕에는 가야 출신의 김씨들이 신라의 김씨 왕족들과 구별되어 ‘新金氏’를 칭하였던 것으로 이해해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김유신가문이 ‘신김씨’를 칭하였던 것이 아니라 금관가야의 멸망 이후 계속 김해에 거주하고 있던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들이 통일기에 접어들면서 ‘신김씨’를 賜姓받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김유신 가문에서 ‘신김씨’를 사용하였으리라는 기존의 이해는 재고를 요한다(이현태, 「신라 중대 신김씨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4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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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