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현과 만명부인이 야합하다

일찍이 [김]서현이 길에서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032032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準王과 같은 존재로, 왕족 및 왕비족·왕모족의 독립된 씨족이나 가계의 장에 해당하는 남성이 책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역사학보》 58, 1973《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입종법흥왕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데, 일반적으로 울주 천전리서석울진봉평신라비에 보이는 ‘徙夫智 葛文王’과 동일 인물로 이해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8~649쪽).닫기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033033 진흥왕의 동생이며,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에 나오는 ‘△△葛文王’을 숙흘종으로 보기도 한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역사학보》 58, 1973《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3쪽).닫기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눈짓으로 그녀를 유인하여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정을 통하였다. [김]서현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034034 萬奴郡은 지금의 충북 진천군으로 비정되며, 太守는 군의 행정관이라고 할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9쪽).닫기가 되어 장차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김]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서 이를 미워하여 별제(別第)에 가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035035 숙흘종김서현만명의 결혼을 탐탁찮게 생각하였던 이유를 두 사람의 신분적·가문적 지위가 달랐기 때문으로 보고(末松保和, 「新羅三代考」, 《史學雜誌》 57, 1949「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1~15쪽 | 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1956《한국고대사회연구》, 서울대 출판부, 1990, 250쪽)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서현이 만명과 야합한 까닭을 신라사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한 데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신형식, 「김유신가문의 성립과 활동」, 《이화사학연구》 13·14, 1983《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249쪽 | 김영하, 「신라 중고기의 정치과정 시론 -중대왕권 성립의 이해를 위한 전제-」, 《태동고전연구》 4, 1988「한국 고대사회의 군사와 정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2, 257쪽 | 박순교, 「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1999, 58~59쪽 | 김덕원, 「신라 진평왕대 김유신의 활동」, 《신라사학보》 10, 2007, 101쪽). 이와 달리 숙흘종이 김서현과 만명의 혼인을 반대하였던 이유를 김서현이 낮은 관등을 가지고 있었고 김무력진지왕의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에 동조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선석열,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2001, 535~536쪽).닫기 [그런데] 느닷없이 벼락이 옥문(屋門)을 쳤고 지키던 자가 놀라 우왕좌왕하자 만명은 뚫린 구멍을 따라 빠져나와 마침내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에 다다랐다.036036 만명김서현과 야합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신라 왕실의 일원이었던 만명이 보수적인 골품 세력의 반대로 말미암아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인 김서현과의 혼인이 순탄하게 진행될 수 없게 되자, 야합이라는 일종의 묵인 방법을 사용하였으리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정중환, 「김유신(595~673)론」, 《역사와 인간의 대응 -한국사편-》, 고병익선생회갑기념사학논총간행위원회, 1985, 17~18쪽).닫기

註 032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準王과 같은 존재로, 왕족 및 왕비족·왕모족의 독립된 씨족이나 가계의 장에 해당하는 남성이 책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역사학보》 58, 1973《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입종법흥왕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데, 일반적으로 울주 천전리서석울진봉평신라비에 보이는 ‘徙夫智 葛文王’과 동일 인물로 이해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8~649쪽).
註 033
진흥왕의 동생이며,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에 나오는 ‘△△葛文王’을 숙흘종으로 보기도 한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역사학보》 58, 1973《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3쪽).
註 034
萬奴郡은 지금의 충북 진천군으로 비정되며, 太守는 군의 행정관이라고 할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49쪽).
註 035
숙흘종김서현만명의 결혼을 탐탁찮게 생각하였던 이유를 두 사람의 신분적·가문적 지위가 달랐기 때문으로 보고(末松保和, 「新羅三代考」, 《史學雜誌》 57, 1949「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1~15쪽 | 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1956《한국고대사회연구》, 서울대 출판부, 1990, 250쪽)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서현이 만명과 야합한 까닭을 신라사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한 데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신형식, 「김유신가문의 성립과 활동」, 《이화사학연구》 13·14, 1983《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249쪽 | 김영하, 「신라 중고기의 정치과정 시론 -중대왕권 성립의 이해를 위한 전제-」, 《태동고전연구》 4, 1988「한국 고대사회의 군사와 정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2, 257쪽 | 박순교, 「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1999, 58~59쪽 | 김덕원, 「신라 진평왕대 김유신의 활동」, 《신라사학보》 10, 2007, 101쪽). 이와 달리 숙흘종이 김서현과 만명의 혼인을 반대하였던 이유를 김서현이 낮은 관등을 가지고 있었고 김무력진지왕의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에 동조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선석열,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2001, 535~536쪽).
註 036
만명김서현과 야합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신라 왕실의 일원이었던 만명이 보수적인 골품 세력의 반대로 말미암아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인 김서현과의 혼인이 순탄하게 진행될 수 없게 되자, 야합이라는 일종의 묵인 방법을 사용하였으리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정중환, 「김유신(595~673)론」, 《역사와 인간의 대응 -한국사편-》, 고병익선생회갑기념사학논총간행위원회, 1985, 17~18쪽).
주제분류
사회>의례>관혼상제>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