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이라 이름짓다 ( 595년 (음) )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정하고자 함에 [김서현이] [만명]부인에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경진일 밤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로써 이름을 지어야 하오.042042 별과 관련한 사료에 대해 후대의 윤색으로 판단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김유신(595~673)의 정신세계」, 《청계사학》 16·17, 2002, 596쪽). 그것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을 별이 주관하고 특히 무인에게 별의 설화가 관련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靈星에 대한 관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에 28수의 이름을 붙이거나 어느 별이라 표현한 것은 윤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서현의 태몽 이야기에서 별자리와 관련한 부분은 후대에 「(김유신)행록」을 저술하면서 부회된 것으로 보았다닫기 그렇지만 《예기(禮記)》에 따르면 날짜로써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043043 「禮記」권1 曲禮 上篇에 실려 있는 이름짓는 법(取名之法)에 따르면 國名이나 日月名, 隱疾名, 山川名 등으로는 이름을 짓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이기동,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86쪽).닫기고 하니, 곧 ‘경(庚)’자는 ‘유(庾)’자와 서로 비슷하며 ‘진(辰)’과 ‘신(信)’은 소리가 서로 가깝고 하물며 옛 현인(賢人) 중에도 유신(庾信)044044 庾信(512~580)은 남조의 梁과 北周에서 벼슬하였던 문인이며, 자는 子山이다. 徐陵과 함께 시문으로 이름을 날려 ‘徐庾體’라고 일컬어졌다. 候景의 난 때 江陵으로 도망갔다가 양의 元帝가 즉위하자 武康縣候에 봉해졌다. 그 후 북주에 사신으로 가 장안에 머무는 동안 양나라가 멸망하였는데, 북주에서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등의 중책을 맡겼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庾開府’라고 통칭하였다. 문집으로 「庾子山集」을 남겼고, 「周書」권41 열전33과 「北史」권83 열전71에 그의 전이 실려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96, 343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0쪽 | 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50~751쪽).닫기이라는 이름이 있으니045045 이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庾信의 시집이 이미 김유신이 출생할 무렵에 신라로 들어와 통용되고 읽혔다고 볼 수 있다(김태식, 「방사로서의 김유신 -도교교단으로서의 화랑 탐구를 겸하여-」, 《신라사학보》 11, 2007, 79쪽).닫기 어찌 그렇게 이름 짓지 않겠소?”046046 김서현이 유교 경전인 「禮記」에 대해 언급한 것이나 작명 과정에서 중국 故事에 나오는 賢人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중국문화에 대한 일정한 이해와 상당한 수준의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이문기, 「금관가야계의 시조 출자전승과 칭성의 변화」,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5, 2004, 24쪽).닫기
마침내 [김]유신(庾信)이라 이름 지었다. 만노군은 지금의 진주(鎭州)047047 漢州 黑壤郡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 해당한다. 黑壤郡을 고려 초에 降州라고 칭하였다가 뒤에 鎭州로 고쳤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8쪽).닫기이다. 본래 [김]유신의 태는 높은 산에 묻었으므로 지금[고려]까지도 이 산을 일컬어 태령산(胎靈山)048048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은 김유신이 태어난 곳으로 전하며 ‘담안밭(장군터)’·‘군자터’·‘蓮寶井’ 등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갖고 있는 곳들이 산재되어 있다. 계양마을의 뒷산은 지금도 胎靈山으로 불리고 있는데, 태령산 정상 부근에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고 하는 태실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김유신의 탄생지와 태실은 현재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진천 지역에 남아 있는 김유신과 관련 유적에 대해서는 정영호·조익현, 「진천 김유신장군사적 학술조사 보고서」, 한국교원대 박물관, 1999조익현, 「진천지역의 김유신사적에 대한 재검토」, 《고문화》 55, 2000을 참고할 만하다.닫기이라고 한다.

註 042
별과 관련한 사료에 대해 후대의 윤색으로 판단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김유신(595~673)의 정신세계」, 《청계사학》 16·17, 2002, 596쪽). 그것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을 별이 주관하고 특히 무인에게 별의 설화가 관련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靈星에 대한 관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에 28수의 이름을 붙이거나 어느 별이라 표현한 것은 윤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서현의 태몽 이야기에서 별자리와 관련한 부분은 후대에 「(김유신)행록」을 저술하면서 부회된 것으로 보았다
註 043
「禮記」권1 曲禮 上篇에 실려 있는 이름짓는 법(取名之法)에 따르면 國名이나 日月名, 隱疾名, 山川名 등으로는 이름을 짓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이기동,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86쪽).
註 044
庾信(512~580)은 남조의 梁과 北周에서 벼슬하였던 문인이며, 자는 子山이다. 徐陵과 함께 시문으로 이름을 날려 ‘徐庾體’라고 일컬어졌다. 候景의 난 때 江陵으로 도망갔다가 양의 元帝가 즉위하자 武康縣候에 봉해졌다. 그 후 북주에 사신으로 가 장안에 머무는 동안 양나라가 멸망하였는데, 북주에서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등의 중책을 맡겼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庾開府’라고 통칭하였다. 문집으로 「庾子山集」을 남겼고, 「周書」권41 열전33과 「北史」권83 열전71에 그의 전이 실려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96, 343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0쪽 | 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50~751쪽).
註 045
이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庾信의 시집이 이미 김유신이 출생할 무렵에 신라로 들어와 통용되고 읽혔다고 볼 수 있다(김태식, 「방사로서의 김유신 -도교교단으로서의 화랑 탐구를 겸하여-」, 《신라사학보》 11, 2007, 79쪽).
註 046
김서현이 유교 경전인 「禮記」에 대해 언급한 것이나 작명 과정에서 중국 故事에 나오는 賢人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중국문화에 대한 일정한 이해와 상당한 수준의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이문기, 「금관가야계의 시조 출자전승과 칭성의 변화」,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5, 2004, 24쪽).
註 047
漢州 黑壤郡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 해당한다. 黑壤郡을 고려 초에 降州라고 칭하였다가 뒤에 鎭州로 고쳤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8쪽).
註 048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은 김유신이 태어난 곳으로 전하며 ‘담안밭(장군터)’·‘군자터’·‘蓮寶井’ 등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갖고 있는 곳들이 산재되어 있다. 계양마을의 뒷산은 지금도 胎靈山으로 불리고 있는데, 태령산 정상 부근에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고 하는 태실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김유신의 탄생지와 태실은 현재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진천 지역에 남아 있는 김유신과 관련 유적에 대해서는 정영호·조익현, 「진천 김유신장군사적 학술조사 보고서」, 한국교원대 박물관, 1999조익현, 「진천지역의 김유신사적에 대한 재검토」, 《고문화》 55, 2000을 참고할 만하다.
주제분류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색인어
이름 : 유신,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