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성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다 ( 629년 08월(음) )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년)060060 612년 기사 이후 629년 낭비성 전투 기사에 이르기까지에 김유신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이 기간 동안의 김유신과 관련한 기록이 신이하고 과장된 내용이 많아 김유신 열전을 찬술하는 과정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김덕원, 「신라 진평왕대 김유신의 활동」, 《신라사학보》 10, 117~118쪽).닫기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061061 이곳에 단 한번 나오는 인명이며, 낭비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51년(629)조에서는 任末里나 白龍, 大因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3쪽).닫기, 파진찬 [김]용춘(龍春)062062 신라 제25대 왕인 진지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이며, 진평왕의 사위이기도 하다. 龍樹라고도 하며, 진평왕 44년(622) 伊湌으로 內省의 私臣이 되어 大宮, 梁宮, 沙梁宮 등 三宮을 모두 관장하였으며, 선덕여왕대에 황룡사 9층탑을 창건할 때 이를 감독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文興大王으로 追贈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3쪽).닫기·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김]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063063 낭비성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청원군에 있는 토성리·광암리·부연리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으로 보는 견해(이원근, 「백제 낭비성고」, 《사학지》 10, 1976, 14쪽), 파주 칠중성으로 보는 견해(김윤우, 「낭비성과 낭자곡성고 -낭비성의 위치를 중심으로-」, 《사학지》 21, 1987, 275~284쪽), 포천의 반월산성으로 보는 견해(서영일, 「고구려 낭비성고」, 《사학지》 28, 1995, 31~35쪽)가 제시된 바 있으나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있는 上黨山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3쪽)를 비롯해 대체로는 청주 부근으로 비정하는 경향이 강하다.닫기을 공격케 하였다.064064 김용춘김서현이 함께 낭비성 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진지왕계를 대표하던 김용춘과 가야계를 대표하던 김서현의 정치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이 전투를 계기로 양자가 친교를 맺어 두 가문이 결합하는 단초가 되었고, 더구나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두 가문은 군사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어 이후의 새로운 시대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신형식, 「김유신가문의 성립과 활동」, 《이화사학연구》 13·14, 1983《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249쪽 | 김덕원, 《신라중고정치사연구》, 경인문화사, 2007, 138쪽).닫기 고구려인들이 군사를 출동시켜 역공하니 우리 쪽이 불리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움츠러들어 다시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註 060
612년 기사 이후 629년 낭비성 전투 기사에 이르기까지에 김유신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이 기간 동안의 김유신과 관련한 기록이 신이하고 과장된 내용이 많아 김유신 열전을 찬술하는 과정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김덕원, 「신라 진평왕대 김유신의 활동」, 《신라사학보》 10, 117~118쪽).
註 061
이곳에 단 한번 나오는 인명이며, 낭비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51년(629)조에서는 任末里나 白龍, 大因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3쪽).
註 062
신라 제25대 왕인 진지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이며, 진평왕의 사위이기도 하다. 龍樹라고도 하며, 진평왕 44년(622) 伊湌으로 內省의 私臣이 되어 大宮, 梁宮, 沙梁宮 등 三宮을 모두 관장하였으며, 선덕여왕대에 황룡사 9층탑을 창건할 때 이를 감독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文興大王으로 追贈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3쪽).
註 063
낭비성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청원군에 있는 토성리·광암리·부연리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으로 보는 견해(이원근, 「백제 낭비성고」, 《사학지》 10, 1976, 14쪽), 파주 칠중성으로 보는 견해(김윤우, 「낭비성과 낭자곡성고 -낭비성의 위치를 중심으로-」, 《사학지》 21, 1987, 275~284쪽), 포천의 반월산성으로 보는 견해(서영일, 「고구려 낭비성고」, 《사학지》 28, 1995, 31~35쪽)가 제시된 바 있으나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있는 上黨山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3쪽)를 비롯해 대체로는 청주 부근으로 비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註 064
김용춘김서현이 함께 낭비성 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진지왕계를 대표하던 김용춘과 가야계를 대표하던 김서현의 정치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이 전투를 계기로 양자가 친교를 맺어 두 가문이 결합하는 단초가 되었고, 더구나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두 가문은 군사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어 이후의 새로운 시대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신형식, 「김유신가문의 성립과 활동」, 《이화사학연구》 13·14, 1983《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249쪽 | 김덕원, 《신라중고정치사연구》, 경인문화사, 2007, 138쪽).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