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왕이 김춘추를 곤경에 빠뜨리다 ( 642년 (음) )

혹자가 고구려 왕에게
“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온 것은 아마 우리의 형세를 관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왕께서는 그 계책을 세우시어 후환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고하였다. 왕이 곤란한 질문으로 대답하기 어렵게 하여 그를 욕보이고자
마목현(麻木峴)082082 조령의 동북쪽 약 4km 지점에 위치하여 조령과 죽령 사이의 가장 낮은 지점에 해당하는 鷄立嶺을 가리키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연풍현 산천조에 따르면 鷄立嶺은 ‘俗云 麻骨岾’이라 하였고, 《삼국사기》 권45 열전5 溫達傳에서도 鷄立嶺과 竹嶺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어 이 기사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지금도 鷄立嶺 주변에는 많은 성지가 남아 있어, 당시 계립령이 상당히 중요한 교통로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6쪽).닫기죽령(竹嶺)083083 태백산맥의 큰 고개길로, 영주시와 단양군 사이의 고개길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6쪽).닫기은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084084 당시 고구려에서 김춘추에게 이와 같은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던 데에는 연개소문 일파의 정치적 포부에서 비롯한 면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실적인 정치적 고려가 동반되었던 듯하다. 즉, 대규모 유혈 정변으로 집권하였고 집권 후에도 안시성의 예에서 보듯 여파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대외적인 강경책을 구사해 정국을 긴장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고, 그것이 권력을 안정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하여 취한 조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 출판부, 2009, 76~77쪽).닫기 [김]춘추
“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신은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미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註 082
조령의 동북쪽 약 4km 지점에 위치하여 조령과 죽령 사이의 가장 낮은 지점에 해당하는 鷄立嶺을 가리키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연풍현 산천조에 따르면 鷄立嶺은 ‘俗云 麻骨岾’이라 하였고, 《삼국사기》 권45 열전5 溫達傳에서도 鷄立嶺과 竹嶺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어 이 기사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지금도 鷄立嶺 주변에는 많은 성지가 남아 있어, 당시 계립령이 상당히 중요한 교통로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6쪽).
註 083
태백산맥의 큰 고개길로, 영주시와 단양군 사이의 고개길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6쪽).
註 084
당시 고구려에서 김춘추에게 이와 같은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던 데에는 연개소문 일파의 정치적 포부에서 비롯한 면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실적인 정치적 고려가 동반되었던 듯하다. 즉, 대규모 유혈 정변으로 집권하였고 집권 후에도 안시성의 예에서 보듯 여파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대외적인 강경책을 구사해 정국을 긴장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고, 그것이 권력을 안정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하여 취한 조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 출판부, 2009, 76~77쪽).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사절활동
색인어
이름 : 춘추
지명 : 마목현,죽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