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가 땅을 올려줄 수 없음을 이야기하다 ( 642년 (음) )

[김춘추는] 국경을 벗어나자 바래다준 사람에게
“나는 백제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군사를 청하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땅을 요구하셨으니 이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지난 번 대왕께 글을 드린 것은 죽음을 면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이는 본기093093 《삼국사기》 正德本의 해당 부분은 ‘本言’이라고 刻字되어 있으나, ‘言’자가 지나치게 왼쪽으로 치우쳐서 부자연스럽게 판각되어 있으므로, ‘記’자의 결각(缺刻)이 아닌가 한하며 그 경우 本記는 신라본기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56쪽). 일설에는 이 本記가 《삼국유사》에 인용된 「國史」의 本記와 같다거나 《구삼국사》의 본기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김석형, 「구삼국사와 삼국사기」, 《력사과학》 1981-4호정구복, 「고려초기 삼국사의 편찬에 대한 일고」, 《국사관논총》 45, 1995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7쪽에서 재인용).닫기 진평왕 12년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은 사건이지만 [내용은] 조금 다르다. 모두 고기(古記)094094 「(김유신)행록」 혹은 「(흥무대왕)행록」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이강래, 「《삼국사기》 열전의 자료 계통」, 《한국고대사연구》 42, 2006, 156쪽).닫기에 전하는 것이므로 둘 다 남겨둔다095095 이 기사는 진평왕 12년이 아니라 선덕여왕 11년의 誤記이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7쪽), 아마도 分註를 가한 이의 오류일 것으로 짐작된다(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56쪽).닫기


註 093
《삼국사기》 正德本의 해당 부분은 ‘本言’이라고 刻字되어 있으나, ‘言’자가 지나치게 왼쪽으로 치우쳐서 부자연스럽게 판각되어 있으므로, ‘記’자의 결각(缺刻)이 아닌가 한하며 그 경우 本記는 신라본기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56쪽). 일설에는 이 本記가 《삼국유사》에 인용된 「國史」의 本記와 같다거나 《구삼국사》의 본기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김석형, 「구삼국사와 삼국사기」, 《력사과학》 1981-4호정구복, 「고려초기 삼국사의 편찬에 대한 일고」, 《국사관논총》 45, 1995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7쪽에서 재인용).
註 094
「(김유신)행록」 혹은 「(흥무대왕)행록」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이강래, 「《삼국사기》 열전의 자료 계통」, 《한국고대사연구》 42, 2006, 156쪽).
註 095
이 기사는 진평왕 12년이 아니라 선덕여왕 11년의 誤記이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7쪽), 아마도 分註를 가한 이의 오류일 것으로 짐작된다(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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