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의 청병을 당태종이 허락하다 ( 648년 (음) )

진덕왕 태화 원년128128 태화는 신라 진덕여왕대의 연호인데,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에서는 진덕여왕 원년(647)에 개원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기》 권31 연표(하)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진덕여왕 2년(648)에 개원한 것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태화 원년이 무신년이라고 하여 진덕여왕 2년의 개원설을 따르고 있으므로, 신라본기의 서술이 잘못인 듯하다. 이 연호는 진덕왕 4년(650)에 중국 연호인 永徽를 공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폐지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2쪽).닫기 무신(648년)에 [김]춘추는 [앞서] 고구려에 청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요청하였다. 태종황제가
“너희 나라 [김]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하냐?”라고 말하였다. [김춘추가]
“[김]유신은 비록 조금 재주와 지혜가 있지만 만약 천자의 위엄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찌 이웃한 근심거리를 쉽게 없애겠습니까?”라고 대답하니, 황제가
“진실로 군자의 나라로구나.”라고 말하며 이에 [청병을] 허락하고는 장군 소정방에게 군사 20만으로 백제를 정벌하러 가라는 조서를 내렸다.129129 이때(648) 당나라 太宗은 김춘추의 청에 겉으로만 허락하였을 뿐이고, 소정방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정작 소정방에게 출동령을 내린 것은 高宗 顯慶 5년(660)이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21쪽).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2년조에는 군사 출동의 약속을 받았다고만 쓰여 있다. 따라서 태종이 소정방에게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러 가라는 조서를 내렸다고 한 것은 문맥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2쪽).닫기


註 128
태화는 신라 진덕여왕대의 연호인데,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에서는 진덕여왕 원년(647)에 개원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기》 권31 연표(하)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진덕여왕 2년(648)에 개원한 것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태화 원년이 무신년이라고 하여 진덕여왕 2년의 개원설을 따르고 있으므로, 신라본기의 서술이 잘못인 듯하다. 이 연호는 진덕왕 4년(650)에 중국 연호인 永徽를 공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폐지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2쪽).
註 129
이때(648) 당나라 太宗은 김춘추의 청에 겉으로만 허락하였을 뿐이고, 소정방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정작 소정방에게 출동령을 내린 것은 高宗 顯慶 5년(660)이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21쪽).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2년조에는 군사 출동의 약속을 받았다고만 쓰여 있다. 따라서 태종이 소정방에게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러 가라는 조서를 내렸다고 한 것은 문맥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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