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군과 싸워 승부를 내지 못하다 ( 648년 08월(음) )

[태화] 2년001001 원문에는 ‘太和’가 없으나 앞 권에 太和 원년(元年) 기사가 나오므로 추가하였다. 진덕왕은 즉위 2년에 太和로 개원하였기 때문에 태화 2년은 진덕왕 3년이 되므로 이 해의 전쟁 기사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모두 같은 해인 649년(진덕왕 3년, 의자왕 9년)조에 기술되어 있어 열전의 연대와 일치하고 있다. 이재호본에서는 진덕왕 2년(648)으로 오역하였고, 북한본과 신호열본에서는 다른 언급이 없이 2년 가을로만 번역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5쪽).닫기(648년) 가을 8월 백제장군 은상(殷相)002002 은상김유신 열전(상)에서 佐平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9년조에는 ‘左將’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의 직명은 백제본기 쪽이 보다 사료적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5쪽).닫기이 석토성(石吐城) 등 7성을 공격해 오니, 왕이 [김]유신죽지(竹旨)003003 《삼국유사》에는 그의 이름이 竹曼 또는 智官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 말년 무렵에 화랑으로 활약하였으며, 진덕왕 3년(649) 침입해온 백제군을 대장군 김유신과 함께 도살성 전투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후 진덕왕 5년(651) 2월 파진찬으로 집사부의 초대 중시에 임명되었고, 문무왕 원년(661) 백제 잔당의 소탕 작전에 참여하였고, 고구려 원정시에는 天存, 天品과 함께 貴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돕는 등 삼국통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죽지가 그의 낭도였던 得烏를 부역에서 구해준 일이 있었는데, 득오가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 「慕竹旨郞歌」가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5~666쪽).닫기·진춘(陳春)004004 陳純이라고도 하며,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원년 7월조에 나오는 眞純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진춘은 진덕여왕 3년(649) 8월에 김유신 휘하의 장군으로서 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여 백제의 장군 殷相의 공격을 막아냈고, 眞純은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는 河西州 총관이 되어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였으며,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京停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다시 참여하였다. 재상으로 있던 문무왕 16년(676) 11월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다고 한 점에서 이때 나이가 이미 70세가 넘었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5쪽).닫기·[김]천존(天存)005005 진덕왕 3년(649)에 石吐城 전투에서 백제군의 격파에 공을 세웠고 무열왕 7년(660) 소정방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왕을 모시고 南川停에 갔으며, 문무왕 3년(663) 2월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과 함께 居列城을 쳐서 전공을 세웠고 다음해 김인문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에서 화친을 체결하였다. 문무왕 8년(668) 6월 고구려 정벌시에는 각간으로서 죽지(竹旨)와 함께 귀당총관이 되었고, 문무왕 19년(679) 정월에 중시가 되었으나 그 해 8월에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6쪽).닫기 등의 장군에게 명하여 나가 그들을 막게 하였다. 3군(三軍)을 나누어 다섯 방면으로 하여 그들을 쳤지만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아 엎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고 흐르는 피가 절굿공이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註 001
원문에는 ‘太和’가 없으나 앞 권에 太和 원년(元年) 기사가 나오므로 추가하였다. 진덕왕은 즉위 2년에 太和로 개원하였기 때문에 태화 2년은 진덕왕 3년이 되므로 이 해의 전쟁 기사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모두 같은 해인 649년(진덕왕 3년, 의자왕 9년)조에 기술되어 있어 열전의 연대와 일치하고 있다. 이재호본에서는 진덕왕 2년(648)으로 오역하였고, 북한본과 신호열본에서는 다른 언급이 없이 2년 가을로만 번역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5쪽).
註 002
은상김유신 열전(상)에서 佐平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9년조에는 ‘左將’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의 직명은 백제본기 쪽이 보다 사료적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5쪽).
註 003
《삼국유사》에는 그의 이름이 竹曼 또는 智官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 말년 무렵에 화랑으로 활약하였으며, 진덕왕 3년(649) 침입해온 백제군을 대장군 김유신과 함께 도살성 전투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후 진덕왕 5년(651) 2월 파진찬으로 집사부의 초대 중시에 임명되었고, 문무왕 원년(661) 백제 잔당의 소탕 작전에 참여하였고, 고구려 원정시에는 天存, 天品과 함께 貴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돕는 등 삼국통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죽지가 그의 낭도였던 得烏를 부역에서 구해준 일이 있었는데, 득오가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 「慕竹旨郞歌」가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5~666쪽).
註 004
陳純이라고도 하며,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원년 7월조에 나오는 眞純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진춘은 진덕여왕 3년(649) 8월에 김유신 휘하의 장군으로서 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여 백제의 장군 殷相의 공격을 막아냈고, 眞純은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는 河西州 총관이 되어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였으며,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京停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다시 참여하였다. 재상으로 있던 문무왕 16년(676) 11월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다고 한 점에서 이때 나이가 이미 70세가 넘었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5쪽).
註 005
진덕왕 3년(649)에 石吐城 전투에서 백제군의 격파에 공을 세웠고 무열왕 7년(660) 소정방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왕을 모시고 南川停에 갔으며, 문무왕 3년(663) 2월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과 함께 居列城을 쳐서 전공을 세웠고 다음해 김인문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에서 화친을 체결하였다. 문무왕 8년(668) 6월 고구려 정벌시에는 각간으로서 죽지(竹旨)와 함께 귀당총관이 되었고, 문무왕 19년(679) 정월에 중시가 되었으나 그 해 8월에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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