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이 죽고 태종무열왕이 즉위하다 ( 654년 (음) )

영휘(永徽) 5년010010 영휘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5년은 태종무열왕 원년에 해당한다. 진덕왕 4년에 ‘비로소 중국의 영휘란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연표에 나오는데, 김유신 열전의 경우 이 시기 이후부터는 대부분 중국의 연호에 따라 연대를 표기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6~667쪽).닫기(654년) 진덕대왕이 승하하였는데, 후사가 없었다. [김]유신과 재상011011 재상이란 직함은 당나라에서는 3품 이상의 평장사급에 붙인 통칭에 불과하였으나, 신라에서는 현전하는 기록상 毗曇, 廉宗과 정치적 권력투쟁을 벌였단 김춘추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재상직은 권력 장악의 중요한 관직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따라서 上大等, 侍中, 兵部令, 私臣 등의 직에 있는 사람이 겸해지기도 하였지만, 이 직에 있다고 하여 반드시 재상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재상직이 上宰相(大相), 次宰相(二宰), 第3宰相 등으로 등급 지워진 것은 신라 재상제도만의 특징이며, 이는 7세기 후반에 생겨 신라말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木村 誠, 「新羅の宰相制度」, 《(東京都立大) 人文學報》 118, 1977). 재상에 있던 알천의 당시 관직은 上大等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7쪽).닫기알천(閼川)012012 선덕왕 5년(636) 5월 이찬으로서 장군 弼呑과 함께 獨山城에 침입한 백제의 장군 于召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동왕 6년 7월에 大將軍이 되었으며, 진덕왕 원년(647) 1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춘추·김유신 세력에 의하여 진압되고 처형된 毗曇의 뒤를 이어 上大等이 되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 다르면 진덕왕이 죽자 화백회의에서는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자신은 늙고 덕이 없다며 사양하였고 김춘추를 천거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는 남산 亏知巖에서 화백회의를 할 때에 나타난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땅에 쳐 박살을 냈다고 하여 그의 용맹함이 서술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7쪽).닫기 이찬이 논의하여 [김]춘추 이찬을 맞이해 즉위케 하였으니, 이 분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이다.

註 010
영휘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5년은 태종무열왕 원년에 해당한다. 진덕왕 4년에 ‘비로소 중국의 영휘란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연표에 나오는데, 김유신 열전의 경우 이 시기 이후부터는 대부분 중국의 연호에 따라 연대를 표기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6~667쪽).
註 011
재상이란 직함은 당나라에서는 3품 이상의 평장사급에 붙인 통칭에 불과하였으나, 신라에서는 현전하는 기록상 毗曇, 廉宗과 정치적 권력투쟁을 벌였단 김춘추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재상직은 권력 장악의 중요한 관직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따라서 上大等, 侍中, 兵部令, 私臣 등의 직에 있는 사람이 겸해지기도 하였지만, 이 직에 있다고 하여 반드시 재상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재상직이 上宰相(大相), 次宰相(二宰), 第3宰相 등으로 등급 지워진 것은 신라 재상제도만의 특징이며, 이는 7세기 후반에 생겨 신라말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木村 誠, 「新羅の宰相制度」, 《(東京都立大) 人文學報》 118, 1977). 재상에 있던 알천의 당시 관직은 上大等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7쪽).
註 012
선덕왕 5년(636) 5월 이찬으로서 장군 弼呑과 함께 獨山城에 침입한 백제의 장군 于召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동왕 6년 7월에 大將軍이 되었으며, 진덕왕 원년(647) 1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춘추·김유신 세력에 의하여 진압되고 처형된 毗曇의 뒤를 이어 上大等이 되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 다르면 진덕왕이 죽자 화백회의에서는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자신은 늙고 덕이 없다며 사양하였고 김춘추를 천거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는 남산 亏知巖에서 화백회의를 할 때에 나타난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땅에 쳐 박살을 냈다고 하여 그의 용맹함이 서술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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