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10군을 점령하다 ( 551년 (음) )

[진흥대왕] 12년 신미(辛未, 551)에 왕이 거칠부 및 대각찬(大角湌)041041 대각간(大角干)의 별칭이다. 각찬(角湌)은 각간(角干)과 같이 1등급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신라 16관등 위에 설치된 비상위(非常位)의 관등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쪽).닫기구진(仇珍), 각찬(角湌) 비태(比台), 잡찬(迊湌)042042 신라시대의 3관등이다. 잡판(迊判)·소판(蘇判)이라고도 한다.닫기탐지(耽知)043043 신라 진흥왕대(眞興王代)의 장군이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 나오는 ‘豆弥智 佊珍干支’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 「眞興王代における新羅の赤城經營」, 《朝鮮學報》 93, 1979, 13쪽). 신라 진흥왕 12년(551) 거칠부 등과 함께 출전하여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고구려 10군을 점령하였고, 동왕 15년(554)에 이찬(伊湌)으로서 관산성(管山城) 전투에 참여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쪽).닫기,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波珍湌)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湌) 비차부(比次夫)044044 신라 진흥왕대의 장군이다. 단양적성비의 ‘阿干 比次夫’와 동일 인물인 듯하다. 탁부(啄部)출신이다. 관등은 대아찬(大阿湌)에 이르렀다. 진흥왕 12년(551) 거칠부 등과 함께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고구려 땅 10개 군을 탈취하였다.단양적성비에 그의 관등이 아찬으로 나오고 있는 점에서 신라의 죽령 이북 진출은 진흥왕 12년 이전에 이루고 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쪽).닫기, 아찬(阿湌)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045045 거칠부를 따라 진흥왕 12년(551)에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을 점령한 장군들이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조에 보이고 있는 장군은 탐지, 비차부 뿐이고 다른 장군의 명칭은 이곳에만 보이고 있다. 이들 중 단양적성비에서 확인되는 인물에는 노부(奴夫, 비문에는 內礼夫智), 비차부(比次夫), 서력부(西力夫), 비문에는 西夫叱智)의 세 사람 뿐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쪽).닫기에게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평양(平壤)046046 여기서의 평양은 이른바 남평양(南平壤), 곧 북한산성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44쪽).닫기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거칠부 등은 승리를 틈타서 죽령바깥, 고현(高峴)047047 이곳에 처음 나오는 지명으로 현재의 확실한 지명은 알 수 없다. 고현은 철원 북쪽의 황해도 곡산(谷山)에 있는 고개로 확인되어 혹 이곳이 아닐까 한다(《海東地圖》 하,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인본, 1995, 82쪽). 고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2 곡산군(谷山郡) 산천조(山川條)에 나오는 고달산(高達山)으로 생각되며, 이 산은 군 동쪽 오십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철령(鐵嶺)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44쪽). 죽령 이북의 10군을 생각할 때 철령은 적절하지 않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695쪽).닫기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048048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조에도 보인다.닫기

註 041
대각간(大角干)의 별칭이다. 각찬(角湌)은 각간(角干)과 같이 1등급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신라 16관등 위에 설치된 비상위(非常位)의 관등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쪽).
註 042
신라시대의 3관등이다. 잡판(迊判)·소판(蘇判)이라고도 한다.
註 043
신라 진흥왕대(眞興王代)의 장군이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 나오는 ‘豆弥智 佊珍干支’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 「眞興王代における新羅の赤城經營」, 《朝鮮學報》 93, 1979, 13쪽). 신라 진흥왕 12년(551) 거칠부 등과 함께 출전하여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고구려 10군을 점령하였고, 동왕 15년(554)에 이찬(伊湌)으로서 관산성(管山城) 전투에 참여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쪽).
註 044
신라 진흥왕대의 장군이다. 단양적성비의 ‘阿干 比次夫’와 동일 인물인 듯하다. 탁부(啄部)출신이다. 관등은 대아찬(大阿湌)에 이르렀다. 진흥왕 12년(551) 거칠부 등과 함께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고구려 땅 10개 군을 탈취하였다.단양적성비에 그의 관등이 아찬으로 나오고 있는 점에서 신라의 죽령 이북 진출은 진흥왕 12년 이전에 이루고 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쪽).
註 045
거칠부를 따라 진흥왕 12년(551)에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을 점령한 장군들이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조에 보이고 있는 장군은 탐지, 비차부 뿐이고 다른 장군의 명칭은 이곳에만 보이고 있다. 이들 중 단양적성비에서 확인되는 인물에는 노부(奴夫, 비문에는 內礼夫智), 비차부(比次夫), 서력부(西力夫), 비문에는 西夫叱智)의 세 사람 뿐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쪽).
註 046
여기서의 평양은 이른바 남평양(南平壤), 곧 북한산성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44쪽).
註 047
이곳에 처음 나오는 지명으로 현재의 확실한 지명은 알 수 없다. 고현은 철원 북쪽의 황해도 곡산(谷山)에 있는 고개로 확인되어 혹 이곳이 아닐까 한다(《海東地圖》 하,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인본, 1995, 82쪽). 고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2 곡산군(谷山郡) 산천조(山川條)에 나오는 고달산(高達山)으로 생각되며, 이 산은 군 동쪽 오십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철령(鐵嶺)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44쪽). 죽령 이북의 10군을 생각할 때 철령은 적절하지 않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4~695쪽).
註 048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조에도 보인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