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총관이 되어 평양성을 함락시키다 ( 668년 (음) )

총장(摠章)096096 당(唐) 고종(高宗)의 연호로 668~669년 2년간 사용되었다.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總章’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모두 ‘摠’자로 쓰고 있다. ‘摠’자는 ‘總’자와 상통된다. 이는 ‘총관(摠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1~702쪽).닫기 원년 무진(戊辰:668, 문무왕 8)에 고종(高宗) 황제가 영국공이적(英國公李勣)097097 583~669. 조주(曹州) 이호(離狐) 출신이다. 본성은 서씨(徐氏)이고 본명은 세적(世勣)이다. 당 태종의 휘(世民)에 걸려 이름을 적(勣)으로 사용하였다. 668년 요동도대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고구려 침략에 성공하였다. 그의 졸년과 나이에 대하여 《신당서》 권93 이적전에는 총장(總章) 2년(669)에 86세로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며, 《구당서》 권67 이적전에는 건봉(乾封) 2년(666) 76세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구당서》의 기록이 잘못이다. 당나라 고조(高祖)에 의하여 사성(賜姓)되고 당 태종 3년(629)년에 영공(英公)에 봉하여졌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공신이다. 《구당서》에서는 그가 영국공(英國公)에 봉해진 연대를 정관(貞觀) 11년(637)으로 기록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2쪽).닫기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또 [김]인문을 보내 우리에게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김]인문과 함께 군사 20만을 내어 가서 북한산성(北漢山城)098098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조에는 한산주(漢山州)라 했다. 본기가 옳을 것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47쪽).닫기에 이르렀다. 왕은 여기에 머무르고, 먼저 [김]인문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나라 군대와 만나게 하였다.
평양성을 공격한 지 한 달 이상이 지나, [고구려]왕 (臧)099099 보장왕의 이름으로, 이름을 쓴 것은 폄하(貶下)한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2쪽).닫기을 사로잡았다. [김]인문이 [고구려]왕으로 하여금 영공(英公) 앞에 꿇어 앉게 하고 그 죄를 헤아렸다. [고구려]왕이 재배하고 영공은 예로 그것에 답하였다. [영공은] 곧 [고구려]왕과 남산(男産)·남건(男建)·남생(男生)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100100 남산, 남건, 남생연개소문의 세 아들이다. 장남인 남생을 맨 마지막에 쓴 것은 보장왕 25년(666) 형제간의 불화로 인하여 당에 항복하였기 때문이며, 둘째인 남건은 평양성을 끝까지 사수하려다가 자살하려 하였으나 포로로 잡혔고, 셋째인 남산은 평양이 포위되자 왕명을 받아 수령(首領) 98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삼국사기》 권22 보장왕 27년 9월조). 그리고 이때 당나라에 잡혀간 고구려의 대신 등 모두 20만에 달하였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8년 9월 21일조 참조)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2쪽).닫기
문무대왕은 [김]인문의 영특한 재략과 용감한 공로가 보통의 예보다 뛰어났으므로, 죽은 대각간(大角干)101101 중종 임신간본과 성암본(誠庵本) 《삼국사기》에는 ‘大琢角干’으로 되어 있으나, 琢자는 빠져야 할 글자이다. 감교본에서는 삭제하지 않았으나 번역본에서는 이를 삭제하였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8년(668)조에는 10월 22일조에 대각간으로 기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2쪽).닫기박뉴(朴紐)의 식읍(食邑) 5백 호를 내렸다. 고종도 [김]인문이 여러 차례의 전공(戰功)이 있음을 듣고서 제서(制書)102102 황제의 글이다. 제후나 왕의 경우 교지(敎旨) 또는 왕지(王旨)라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3쪽).닫기를 내려,
“용감하고 훌륭한 장수요, 문무(文武)에 뛰어난 재사이다. 작(爵)을 제정하고 봉읍을 주고 그 위에 아름다운 명을 내림이 마땅하겠다.”고 하였다. 인하여 작록과 식읍 2천 호를 더하였다. 그 후로 [당의] 궁궐에서 시위(侍衛)하기를 여러 해 동안 하였다.

註 096
당(唐) 고종(高宗)의 연호로 668~669년 2년간 사용되었다.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總章’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모두 ‘摠’자로 쓰고 있다. ‘摠’자는 ‘總’자와 상통된다. 이는 ‘총관(摠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1~702쪽).
註 097
583~669. 조주(曹州) 이호(離狐) 출신이다. 본성은 서씨(徐氏)이고 본명은 세적(世勣)이다. 당 태종의 휘(世民)에 걸려 이름을 적(勣)으로 사용하였다. 668년 요동도대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고구려 침략에 성공하였다. 그의 졸년과 나이에 대하여 《신당서》 권93 이적전에는 총장(總章) 2년(669)에 86세로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며, 《구당서》 권67 이적전에는 건봉(乾封) 2년(666) 76세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구당서》의 기록이 잘못이다. 당나라 고조(高祖)에 의하여 사성(賜姓)되고 당 태종 3년(629)년에 영공(英公)에 봉하여졌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공신이다. 《구당서》에서는 그가 영국공(英國公)에 봉해진 연대를 정관(貞觀) 11년(637)으로 기록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2쪽).
註 098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조에는 한산주(漢山州)라 했다. 본기가 옳을 것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47쪽).
註 099
보장왕의 이름으로, 이름을 쓴 것은 폄하(貶下)한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2쪽).
註 100
남산, 남건, 남생연개소문의 세 아들이다. 장남인 남생을 맨 마지막에 쓴 것은 보장왕 25년(666) 형제간의 불화로 인하여 당에 항복하였기 때문이며, 둘째인 남건은 평양성을 끝까지 사수하려다가 자살하려 하였으나 포로로 잡혔고, 셋째인 남산은 평양이 포위되자 왕명을 받아 수령(首領) 98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삼국사기》 권22 보장왕 27년 9월조). 그리고 이때 당나라에 잡혀간 고구려의 대신 등 모두 20만에 달하였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8년 9월 21일조 참조)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2쪽).
註 101
중종 임신간본과 성암본(誠庵本) 《삼국사기》에는 ‘大琢角干’으로 되어 있으나, 琢자는 빠져야 할 글자이다. 감교본에서는 삭제하지 않았으나 번역본에서는 이를 삭제하였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8년(668)조에는 10월 22일조에 대각간으로 기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2쪽).
註 102
황제의 글이다. 제후나 왕의 경우 교지(敎旨) 또는 왕지(王旨)라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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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