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이름을 내려주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015015 대가야의 귀족 세력들이 충주로 옮겨진 점으로 보아 任那加良을 高靈의 대가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林炳泰, 「新羅五小京考」, 《역사학보》 35·36, 1967). 이에 대해 신라가 진흥왕 18년(557)에 國原小京(현재의 충주시)을 설치한 이후 貴戚子弟와 六部豪民을 옮겼는데, 당시의 수도 경주에는 법흥왕 19년(532)에 항복한 금관국왕 및 그 일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强首는 금관가야 출신으로 국원소경 설치 당시에 그들의 일족과 함께 경주로부터 충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金泰植, 「廣開土王陵碑文의 任那加羅와 安羅人守兵」, 《한국고대사논총》 6, 한국고대사회사연구소, 1994, 65~66쪽)(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56~757쪽).닫기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016016 강수의 본래 이름이다. 훈독하여 ‘쇠머리’로 읽혀졌을 것이다. 중종 임신간본 《삼국사기》에는 「字頭」로 기록되어 있으나 誠庵本에는 「牛頭」로 되어 있어 이병도가 이미 교감한 바 있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5 태종왕 원년 조에도 「牛頭」로 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57쪽).닫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017017 이는 牛頭(쇠머리)를 좋은 한자로 바꾼 것으로 센 머리 즉 기억력이 센 머리라는 뜻으로 이를 훈독하면 「牛頭」와 같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57쪽).닫기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하였다.


註 015
대가야의 귀족 세력들이 충주로 옮겨진 점으로 보아 任那加良을 高靈의 대가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林炳泰, 「新羅五小京考」, 《역사학보》 35·36, 1967). 이에 대해 신라가 진흥왕 18년(557)에 國原小京(현재의 충주시)을 설치한 이후 貴戚子弟와 六部豪民을 옮겼는데, 당시의 수도 경주에는 법흥왕 19년(532)에 항복한 금관국왕 및 그 일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强首는 금관가야 출신으로 국원소경 설치 당시에 그들의 일족과 함께 경주로부터 충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金泰植, 「廣開土王陵碑文의 任那加羅와 安羅人守兵」, 《한국고대사논총》 6, 한국고대사회사연구소, 1994, 65~66쪽)(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56~757쪽).
註 016
강수의 본래 이름이다. 훈독하여 ‘쇠머리’로 읽혀졌을 것이다. 중종 임신간본 《삼국사기》에는 「字頭」로 기록되어 있으나 誠庵本에는 「牛頭」로 되어 있어 이병도가 이미 교감한 바 있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5 태종왕 원년 조에도 「牛頭」로 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57쪽).
註 017
이는 牛頭(쇠머리)를 좋은 한자로 바꾼 것으로 센 머리 즉 기억력이 센 머리라는 뜻으로 이를 훈독하면 「牛頭」와 같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57쪽).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
이름 : 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