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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고승전 > 卷第二 流通一之二 > 釋圓光 > 걸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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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平王三十年王患句高麗校勘 121121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최남선본, 소화2년 불교사간 대동선교고 합간본에는 句高麗는 高句麗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1에 의하면 高句麗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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屢侵封疆欲請兵以征敵國. 命修乞師表, 曰 “求自存而滅他非沙門之行也. 然貧道在大王之土地費大王之衣食, 敢不唯校勘 122122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최남선본, 소화2년 불교사간 대동선교고 합간본에는 唯는 惟로 되어 있다.닫기命是從.” 乃述以聞. 師性虛閑, 情多汎愛, 言常含笑慍結不形. 爲牋校勘 123123 최남선본, 소화2년 불교사간 대동선교고 합간본에는 牋은 箋으로 되어 있다. 닫기·表·啓書竝校勘 124124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최남선본에는 竝은 幷으로 되어 있다.
천견윤태랑본에는 竝은 並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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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自胸校勘 125125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최남선본에는 胸은 胷으로 되어 있다.
천견윤태랑본에는 胸은 𦚾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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襟, 擧國傾校勘 126126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에는 傾은 신출자로 되어 있다. 닫기奉. 委以治校勘 127127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천견윤태랑본에는 治는 詔로 되어 있다.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제50권, ≪대일본불교전서유방총서(大日本佛敎全書遊方叢書) 제2≫에는 註曰治原本作詔續傳十三改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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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乘機敷化垂範後代. 三十五年皇龍寺設百座會, 邀集福田講經爲上首, 常僑居加悉寺校勘 128128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5 원광서학(圓光西學)에는 加悉寺은 嘉瑟岬으로 되어 있다.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제50권, ≪대일본불교전서유방총서(大日本佛敎全書遊方叢書)≫제2에는 註曰寺號遺事四作嘉瑟岬注云或作加西又嘉栖皆方言也岬俗云古尸故或云古尸寺猶言岬寺也今雲門寺東九千歩許有加西岬或云嘉瑟峴峴之北洞有寺基臺是也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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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演眞詮.

校勘 121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최남선본, 소화2년 불교사간 대동선교고 합간본에는 句高麗는 高句麗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1에 의하면 高句麗가 맞다.
校勘 122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최남선본, 소화2년 불교사간 대동선교고 합간본에는 唯는 惟로 되어 있다.
校勘 123
최남선본, 소화2년 불교사간 대동선교고 합간본에는 牋은 箋으로 되어 있다.
校勘 124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최남선본에는 竝은 幷으로 되어 있다.
천견윤태랑본에는 竝은 並으로 되어 있다.
校勘 125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최남선본에는 胸은 胷으로 되어 있다.
천견윤태랑본에는 胸은 𦚾으로 되어 있다.
校勘 126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에는 傾은 신출자로 되어 있다.
校勘 127
규장각본, 조선총독부 중추원 필사본, 천견윤태랑본에는 治는 詔로 되어 있다.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제50권, ≪대일본불교전서유방총서(大日本佛敎全書遊方叢書) 제2≫에는 註曰治原本作詔續傳十三改之로 되어 있다.
校勘 128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5 원광서학(圓光西學)에는 加悉寺은 嘉瑟岬으로 되어 있다.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제50권, ≪대일본불교전서유방총서(大日本佛敎全書遊方叢書)≫제2에는 註曰寺號遺事四作嘉瑟岬注云或作加西又嘉栖皆方言也岬俗云古尸故或云古尸寺猶言岬寺也今雲門寺東九千歩許有加西岬或云嘉瑟峴峴之北洞有寺基臺是也로 되어 있다.
주제분류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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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30년039039 본문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30년조의 “王患高句麗屢侵封埸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二月 高句麗侵北境 虜獲八千人 四月 高句麗拔牛鳴山城”에 의한 듯하다. 한편 ≪삼국유사≫ 권4 義解5 圓光西學조에도 ≪殊異傳≫의 인용으로서 “法師始自中國來 本朝君臣敬重爲師 常講大乘經典 此時 高麗百濟常侵邊鄙 王甚患之 欲請兵於隋(宜作唐) 請法師作乞兵表 皇帝見以三十萬兵親征高麗 自此知法師旁通儒術也”라 되어 있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197~198쪽).닫기(608)에 왕은 고구려가 자주 신라의 국경040040 領土를 말한다(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4쪽).닫기을 침범하는 것을 근심하여 나라에 군사를 청해 적국(고구려)을 치고자 하였다. 이에 왕은 스님에게 명하여 걸사표(乞師表)041041 援兵을 청하는 글이다(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4쪽).닫기를 짓게 하였더니, 스님은 “스스로 살기를 구하기 위해 남을 멸하는 것은 사문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빈도042042 도를 닦음이 아직 부족하다는 뜻으로 스님네들이 자기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 梵語의 沙門을 번역한 말이다(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쪽).
스님들이 자신을 낮추어서 일컫는 칭호. 도를 닦음이 아직 모자란다는 뜻으로서, 범어 沙門을 번역한 말이다(각훈, 한국고전연구회 편, ≪해동고승전≫, 지하철문고, 1981, 79쪽).
沙門을 낮추어 말한 것이다(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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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대왕의 영토에 살고 대왕의 옷과 밥을 허비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그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곧 지어 올렸다.
스님은 성품이 깨끗하고 고요하였으며,043043 본문은 ≪속고승전≫ 권13 釋圓光傳의 “光性在虛閑 情多汎愛 言常含笑慍結不形 而牋表啟書往還國命 並出自胸襟 一隅傾奉皆委以治方 詢之道化 事異錦衣請同觀國 乘機敷訓垂範于今”(大正 50, 524上)에 의한 듯하다. 한편 ≪삼국유사≫ 권4 義解5 圓光西學조에도 위의 ≪속고승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198쪽).닫기 정이 많이 두루 사랑하였고, 말씀에는 항상 웃음을 머금었으며 결코 성낸 빛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牋)·표(表)·계(啓) 등의 글을 쓸 때는 모두 다 가슴 깊숙한 속에서 나왔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 떠받들었다. 고을을 다스리도록 맡기면 사람들의 근기에 맞게 불교의 교화를 펴서 모범을 후대에까지 남겼다. 35년(613)에 황룡사044044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의 동쪽에 있던 절이다(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닫기에서 백좌회045045 獅子座를 백 개를 마련하고 높은 중들을 초치하여 설법하는 큰 법회(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쪽).
큰 법회. 獅子座를 1백 개 설치하고, 고명한 스님들을 초치하여 설법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각훈, 한국고전연구회 편, ≪해동고승전≫, 지하철문고, 1981, 79쪽).
백 개의 獅子座를 만들고 高僧을 모셔다 설법하는 큰 法會(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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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베풀고, 복전(福田)046046 법력이 있는 여래나 비구 등에게 공양하면, 복이 됨이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린 다음에 수확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일컫는 말이다(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쪽).
부처·비구에게 供養하면 얻어지는 無限의 福德을 말한다(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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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맞아들여 경전을 강의할 때에 스님이 그 우두머리047047 한 좌석 중에서 우두머리 좌석에 앉는 이를 말한다(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쪽).닫기가 되었으며,048048 위의 내용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35년조의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 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 說經”에 의한 듯하다. 한편 ≪삼국유사≫ 권4 義解5 圓光西學조에도 위의 ≪삼국사기≫의 기사를 인용하여 “又建福三十年癸酉(卽眞平王卽位三十五年也)秋 隋使王世儀至 於皇龍寺設百座道場 請諸高德說經 光最居上首”라 되어 있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198~199쪽).닫기 스님은 항상 가실사(加悉寺)에 거처하면서 진리를 강의하였다.049049 ≪삼국사기≫ 권45 열전5 貴山조에 “時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라 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4 義解5 圓光西學조에도 ≪삼국사기≫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지만, 여기서는 “加悉寺”를 “嘉瑟岬”이라 칭하고, “或은 加西 또는 嘉栖라 하는데 모두 方言이다. 岬은 俗言으로 古尸(곳)이라 하므로 혹은 古尸寺라 하는데 마치 岬寺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雲門寺 동쪽 九千步 가량 되는 곳에 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嘉瑟峴이라고도 한다. 峴의 北洞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라고 註記하고 있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199쪽).닫기

註 039
본문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30년조의 “王患高句麗屢侵封埸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二月 高句麗侵北境 虜獲八千人 四月 高句麗拔牛鳴山城”에 의한 듯하다. 한편 ≪삼국유사≫ 권4 義解5 圓光西學조에도 ≪殊異傳≫의 인용으로서 “法師始自中國來 本朝君臣敬重爲師 常講大乘經典 此時 高麗百濟常侵邊鄙 王甚患之 欲請兵於隋(宜作唐) 請法師作乞兵表 皇帝見以三十萬兵親征高麗 自此知法師旁通儒術也”라 되어 있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197~198쪽).
註 040
領土를 말한다(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4쪽).
註 041
援兵을 청하는 글이다(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4쪽).
註 042
도를 닦음이 아직 부족하다는 뜻으로 스님네들이 자기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 梵語의 沙門을 번역한 말이다(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쪽).
스님들이 자신을 낮추어서 일컫는 칭호. 도를 닦음이 아직 모자란다는 뜻으로서, 범어 沙門을 번역한 말이다(각훈, 한국고전연구회 편, ≪해동고승전≫, 지하철문고, 1981, 79쪽).
沙門을 낮추어 말한 것이다(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4쪽).
註 043
본문은 ≪속고승전≫ 권13 釋圓光傳의 “光性在虛閑 情多汎愛 言常含笑慍結不形 而牋表啟書往還國命 並出自胸襟 一隅傾奉皆委以治方 詢之道化 事異錦衣請同觀國 乘機敷訓垂範于今”(大正 50, 524上)에 의한 듯하다. 한편 ≪삼국유사≫ 권4 義解5 圓光西學조에도 위의 ≪속고승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198쪽).
註 044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의 동쪽에 있던 절이다(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
註 045
獅子座를 백 개를 마련하고 높은 중들을 초치하여 설법하는 큰 법회(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쪽).
큰 법회. 獅子座를 1백 개 설치하고, 고명한 스님들을 초치하여 설법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각훈, 한국고전연구회 편, ≪해동고승전≫, 지하철문고, 1981, 79쪽).
백 개의 獅子座를 만들고 高僧을 모셔다 설법하는 큰 法會(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5쪽).
註 046
법력이 있는 여래나 비구 등에게 공양하면, 복이 됨이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린 다음에 수확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일컫는 말이다(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쪽).
부처·비구에게 供養하면 얻어지는 無限의 福德을 말한다(김달진 역, ≪한국의 사상대전집≫ 2, 동화출판공사, 1972, 405쪽).
註 047
한 좌석 중에서 우두머리 좌석에 앉는 이를 말한다(각훈, 이병훈 역, ≪해동고승전≫, 을유문화사, 1975, 103쪽).
註 048
위의 내용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35년조의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 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 說經”에 의한 듯하다. 한편 ≪삼국유사≫ 권4 義解5 圓光西學조에도 위의 ≪삼국사기≫의 기사를 인용하여 “又建福三十年癸酉(卽眞平王卽位三十五年也)秋 隋使王世儀至 於皇龍寺設百座道場 請諸高德說經 光最居上首”라 되어 있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198~199쪽).
註 049
≪삼국사기≫ 권45 열전5 貴山조에 “時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라 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4 義解5 圓光西學조에도 ≪삼국사기≫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지만, 여기서는 “加悉寺”를 “嘉瑟岬”이라 칭하고, “或은 加西 또는 嘉栖라 하는데 모두 方言이다. 岬은 俗言으로 古尸(곳)이라 하므로 혹은 古尸寺라 하는데 마치 岬寺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雲門寺 동쪽 九千步 가량 되는 곳에 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嘉瑟峴이라고도 한다. 峴의 北洞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라고 註記하고 있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199쪽).
주제분류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이름 : 진평왕
국명 : 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