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막성 전투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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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막성 전투에 참여하다 ( 602년 (음) )

眞平王校勘 045045 정덕본에는 자형이 불명확하나, 을해목활자본에는 建으로 되어 있다.닫기福十九校勘 046046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十九로 되어 있다.닫기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 一作莫校勘 047047 정덕본·성암본에는 莫, 을해목활자본에는 暮로 되어 있다. 조선사학회본·김종권본·이재호본에는 莫, 북한고전연구실본에는 英으로 나온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 권27 무왕(武王) 3년조에는 阿莫山城을 一名 母山城으로 기록하였다.닫기城. 王使將軍波珍千校勘 048048 정덕본에는 千, 을해목활자본에는 干으로 되어 있다.닫기乾品·校勘 049049 정덕본에는 한 획을 결각하였으나, 을해목활자본에는 武로 되어 있다.닫기梨屈·伊梨伐·級干校勘 050050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干으로 되어 있다.닫기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箒項並以少監赴焉.

校勘 045
정덕본에는 자형이 불명확하나, 을해목활자본에는 建으로 되어 있다.
校勘 046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十九로 되어 있다.
校勘 047
정덕본·성암본에는 莫, 을해목활자본에는 暮로 되어 있다. 조선사학회본·김종권본·이재호본에는 莫, 북한고전연구실본에는 英으로 나온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 권27 무왕(武王) 3년조에는 阿莫山城을 一名 母山城으로 기록하였다.
校勘 048
정덕본에는 千, 을해목활자본에는 干으로 되어 있다.
校勘 049
정덕본에는 한 획을 결각하였으나, 을해목활자본에는 武로 되어 있다.
校勘 050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干으로 되어 있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색인어
이름 : 眞平王, 乾品, 校勘 049049 정덕본에는 한 획을 결각하였으나, 을해목활자본에는 武로 되어 있다.닫기梨屈, 伊梨伐, 武殷, 比梨耶, 貴山, 箒項

아막성 전투에 참여하다 ( 602년 (음) )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135135 신라 진평왕대의 연호이다. 진평왕 6년(584)부터 선덕왕 2년(633)까지 사용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7쪽).닫기 19년 임술(壬戌, 602) 가을 8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136136 이 기록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602)조《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3년(602)조에 다 같이 수록되어 있으나, 백제본기의 기록이 보다 상세하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이때 백제는 좌평(佐平) 해수(解讐)가 보기(步騎) 4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진격했다고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7~748쪽).닫기 아막성(阿莫城)137137 현재의 전북 남원시 아영면 할미산성으로 비정된다. 아모성(阿暮城)으로도 기록되었다. 이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쟁탈전이 이루어진 접경 지역이다. 6세기 말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가 점유한 곳이다. 이 곳에서 5~6세기경의 대가야 고분이 발굴된 바 있다. 신라가 백제를 멸한 후 이 지역은 강주(康州)의 천령군(天嶺郡)의 영현(領縣)인 모산현(母山縣)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8쪽).닫기 막(莫)자는 모(暮)로도 쓴다.을 포위하였다. [진평]왕이 장군 파진간(波珍干)138138 신라시대 제4관등으로, 파진찬(波珍湌)의 다른 이름이다. 아진찬·파미간·해간으로 불리기도 했다.닫기건품(乾品)139139 신라 진평왕대의 진골 출신 장군. 그에 대한 기록은 달리 찾아지지 않는다. 진평왕 24년(602) 백제군과 벌인 아막산성 전투에서 신라측의 주장(主將)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8쪽).닫기·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 급간(級干)140140 신라시대 제9관등으로 급찬(級飡)의 다른 이름이다. 급벌찬, 급벌간(級伐干)이라고도 하였다.닫기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그것을 막게 하였다. 귀산추항은 함께 소감(少監)141141 대감(大監) 아래의 무관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8쪽).닫기으로 나갔다.

註 135
신라 진평왕대의 연호이다. 진평왕 6년(584)부터 선덕왕 2년(633)까지 사용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7쪽).
註 136
이 기록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602)조《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3년(602)조에 다 같이 수록되어 있으나, 백제본기의 기록이 보다 상세하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이때 백제는 좌평(佐平) 해수(解讐)가 보기(步騎) 4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진격했다고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7~748쪽).
註 137
현재의 전북 남원시 아영면 할미산성으로 비정된다. 아모성(阿暮城)으로도 기록되었다. 이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쟁탈전이 이루어진 접경 지역이다. 6세기 말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가 점유한 곳이다. 이 곳에서 5~6세기경의 대가야 고분이 발굴된 바 있다. 신라가 백제를 멸한 후 이 지역은 강주(康州)의 천령군(天嶺郡)의 영현(領縣)인 모산현(母山縣)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8쪽).
註 138
신라시대 제4관등으로, 파진찬(波珍湌)의 다른 이름이다. 아진찬·파미간·해간으로 불리기도 했다.
註 139
신라 진평왕대의 진골 출신 장군. 그에 대한 기록은 달리 찾아지지 않는다. 진평왕 24년(602) 백제군과 벌인 아막산성 전투에서 신라측의 주장(主將)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8쪽).
註 140
신라시대 제9관등으로 급찬(級飡)의 다른 이름이다. 급벌찬, 급벌간(級伐干)이라고도 하였다.
註 141
대감(大監) 아래의 무관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48쪽).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