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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근대여성연표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광무10년(1906) 고의준(高義駿) 등이 여자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양규의숙을 발기 창립한 다음 5월 중에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의 창설회의를 가졌다. 그후 11월 1일 여자교육회 발기인들이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취지는 한국이 점점 문명국으로 발전하려는 단계에 있어 여자교육이 제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이 문명한 사회를 성립하기 위하여는 남자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일반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얻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하여 교육은 시급함으로 뜻있는 부인 280여명이 이 취지에 찬동하여 이 회를 조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옥경(李鈺卿)이 총재가 된 후 여자교육회 활동은 주로 통상회(通常會)를 중심으로 외부강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토론회하는 활동이 주된 것이었다. 여자교육회는 여자보험과라는 부서를 두고 여성의 경제생활보장책을 세우는 데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후 정부의 인가를 얻어 계획대로 추진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또한 신학원을 여아들의 교육기관으로 창설하였다. 또한 언론사업의 하나로 1907년 6월 20일 통상회에서 ≪여자지남(女子指男)≫을 간행하였다. 이 ≪여자지남≫은 한국 여성잡지의 효시인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창간호만 발행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
1907년 최화사(崔花史)등이 주동이 되어 부인회를 발기하고 4월23일 제1회 총회를 갖으면서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가 조직되었다. 자세한 부서조직과 임원은 보도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6월 중 대사회적 큰 공개행사를 개최하여 부인회의 발족을 널리 알렸다. 이날의 행사를 보도한 기사에서는 이런 단체활동이 정숙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부인연사들의 연설이 시대에 적합한 ‘고명(高明)한’ 내용이었다는 찬사가 실렸다. 이 조직역시 일부 저명인사의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여자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후에 특히 양규의숙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여자의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일반부녀자들을 상대로 생활개선에 관한 계몽과 교양에 힘썼다. 진명부인회의 강령에서는 비교적 전통적 도의를 재강화하려는 보수적 입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여성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더욱 충실히 하려는 입장에서 취한 것이며 여기에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과 미신타파의 생활개선 운동을 첨가한 비교적 보수적이며 온건한 단체의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시키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그 후에 단체의 존속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자선부인회(慈善婦人會)
자선부인회(慈善婦人會)는 1907년 9월 4일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창립된 단체이다. 간부진의 명단을 보면 당시 친일 저명인사들의 부인이 중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고아 및 맹아들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에 뜻을 두었다. 이 부인단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다른 단체에 비해 회칙이 명문화되어 조직과 운영이 뚜렷하게 현대적이어서 단체조직상에 획기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기관지로 ≪자선부인회 잡지≫를 발행하였다. 서울의 경성고아원의 운영을 돕기도 하였으며, 고아원과 맹아원을 설립하기도했다. 그리고 후에 자혜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국가를 위한 자선사업의 큰 목적으로 발족하였으나 이후 기금이 없어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자선부인회에 관한 활동이 신문지상에 별로 소개된 바 없었고, 자선부인회잡지가 창간호를 발행한 뒤 중단된 것으로 보아 그 취지를 살려 활동을 계속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 뒤 정부의 고관부인들이 중심이 된 자혜부인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명의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자혜부인회(慈惠婦人會)
자혜부인회(慈惠婦人會)는 총재에 이완용 부인으로 주로 상류사회 부인들로서 구성된 간부진과 양반사회 부인을 망라한 회원들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취지가 자선사업이었으므로 경성고아원을 찬조하는 활동이 많았다. 하란사(河蘭史) 등을 포함한 사회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고 300원이라는 거액의 기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고관부인들에게서 양곡, 야채, 소금 등의 물품을 헌납받아 고아원의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혜음악회를 발기하여 개최하였다. 그리고 1909년 경에는 활동사진회를 개최하여 그 입장권을 보통과 명예입장권의 두 종류로 발행하여 판매함으로써 기금을 모금하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였다. 자혜부인회는 1909년 3월중에 단체명을 제국부인회로 개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6개의 부서를 두었고, 회원모집 1000명을 목적으로 세워 자선사업과 더불어 여자들에게 기예를 가프치는 사업으로 확장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후 활동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남녀청년회(男女靑年會)
독립협회의 새로운 애국운동이 고조되어가는 1897년 가을에 정동교회안에서 남녀청년들이 남녀청년회(男女靑年會)를 조직하였다. 10월 31일 배재학당 학생 25명과 이화학당 학생 11명이 남녀 별도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당시 혼성단체를 조직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서도 획기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교회청년회로서 조직했으나 이것은 순전한 전도의 목적이 아니었음을 교회청년회의 부서조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전도국, 인재국, 학문국, 다정국, 통신국, 회계국 등을 두었다. 남녀청년회가 따로 조직이 되었지만 이들은 토론회에 함께 참여하였다. 특히 남녀평등에 관한 문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며 여자회원들도 의사표시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해 12월 31일 오후 3시에 정동예배당에 청년회원들이 모여 회장 노병선의 사회아래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써 교육하여 동등권을 주는 것이 가하다>는 제목으로 좌우편으로 나누어 찬반의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이 월례행사로써 계속되었다. 다음해 1월 중에는 <우리 회우들은 형제자매 간에 내외하지 아니함이 가타>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가졌다. 이 제목을 미루어 보면 내외법의 전통을 타파하고 남녀간의 자유스런 접촉과 사회활동을 개척해 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하겠다. 그리고 이 토론회는 공개적이었다. 이로써 정동교회 청년회는 현대적 남녀청년 단체활동의 효시임을 충분히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찬양회(讚養會)
찬양회(讚養會)는 1898년 9월 조직된 단체로 순성학교부인회(順成學校婦人會)로도 불린다. 부인단체를 조직하는 첫 모임에 100여명의 회원이 모였다는데, 많은 수가 모였던 것이다. 이런 많은 부녀자들의 열렬한 참여로써 여성들의 개화에의 요구와 의식이 어느 정도 고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인회가 조직되는 날 회장은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施通文)>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회장 김소사(金召史)와 부회장 이소사(李召史)는 여성의 개화를 위하여 시급한 것은 교육이라 주장하고 각계인사들에게 여학교의 설시를 위한 후원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그 후 여성계를 움직여 공동의 노력을 펴지않을 수 없었다. 얼핏 듣기에 교회 찬양대의 조직인 것 같지만 활동의 내용을 보면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활동은 10월 7일 다시 모여 외부인사를 모셔다 연설을 들었다. 초빙된 이들은 서양부인 두 명과 중국부인 한 명, 그리고 당대의 개화신사 윤치호였다. 이들은 이처럼 진취적으로 비약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한국역사상 여자들의 힘으로 단체를 처음 조직하였고 여학교를 처음으로 창설 운영하는데 감격해 했다. 이들의 외침은 순전한 여성해방이 아니었고 나라사랑과 애국의 절규인 찬양회부인들은 순성학교를 해나가는 한편 정부의 여학교 설치에 대한 움직임에도 주시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반응은 무성의했다.

 여자지남(女子指男)
≪여자지남(女子指男)≫은 여자교육회에서 언론사업의 하나로 1907년 6월 20일 간행결정을 내리면서 그 창간호를 1908년 5월 발행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발행자는 여자교육회가 아니며 여자보학원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여자지남≫의 취지를 윤치호가 집필해 냈으며 여자보학원추대회를 발기한 남성들이 발행의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잡지에 기재된 주요내용의 논문 및 그들은 여자교육회총재 이옥경을 비롯하여 몇몇 간부들이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학교 어린학생들의 글들이 실렸었다. 하여간 남성들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여자지남≫은 한국여성잡지의 효시인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잡지가 겨우 창간호를 발행한 것을 중단되고 말았다. 이는 언론에 대한 관심이 극히 소수지도자에 한정되었음을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할 만한 능력을 갖춘 집단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지남≫에 기고한 글들은 여성들의 애국적 관념이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잘 알려준다. 그리고 부인들의 남녀평등론 및 교육론에 관한 논문에서도 애국적 사상이 일관하여 나타나고 있다. 총재 이옥경의 글에서도 구습타파에 의한 여성의 가정내 지위향상에 관련된 주장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이옥경은 내외법 폐지, 여자교육, 과부개가, 조혼폐지, 이혼허락, 재혼자의 지위향상을 주장하고 있다.

 민비(閔妃)
민비(閔妃)는 여덟 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라면서 고생했으나 예의 범절이 밝고 총명했다고한다. 친정이 보잘 것 없던 민비는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시달렸던 흥선 대원군에 의해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 입궁했다. 이후 대원군이 후궁 소생인 완화군(完和君)을 총애하여 세자로 삼으려 하면서부터 민비는 대원군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민씨 척족들을 정부 요직에 앉혀 세력을 키워가던 중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뒤 이른바 민씨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민씨 정권은 각종 부정부패로 얼룩졌다. 특히 개항으로 민중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민비에 대한 원성도 높아져 1882년 임오군란때는 민비의 처단이 주요 요구 사항이 되었다. 당시 대원군은 민비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민비는 궁궐밖에 피신하여 청에 도움을 요청하여 정권을 다시 장악했다. 이후 개화파와 대신정변때도 청에 개입을 요청해 개화파 정권을 무너뜨렸다. 민비는 청, 러, 일을 상대하면서 외교, 정치면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45세에 살해된 뒤 폐비로 강등되었다가 그 해에 복위되었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대되었다. 이조정랑 수의 후손이며, 문정공 유중(인현왕후의 아버지)의 6세 손녀, 충문공 진원의 5세 손녀, 순간공 치록의 딸, 충정곤 승호의 여동생, 판돈녕 영익의 고모이다.

 초등여학독본(初等女學讀本)
≪초등여학독본(初等女學讀本)≫은 1908년 이원경(李源競)이 59세에 저술한 저서이다. 그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1904년 조직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교육회는 애국계몽학회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여성교육은 덕육(德育)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교육을 모두 무익한 것으로 비판하고 당대의 여성 교육은 수신(修身)을 우선으로 하는 덕육을 기초로 하고 그 이후에 지육(智育)과 체육(體育)이 상보한다면 현재의 여권이 석방된 사회가 남녀 동권의 사회로 전환될 것이라 전망하였다. 이런 여성교육관에 입각하여 ≪초등여학독본≫을 저술하였다. 즉 이 책의 교육사상은 전통사회의 여성교육서를 이상적인 것으로 파악한 전근대적 여성관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이 책의 대상은 소학교에 입학한 첫 학기의 여학생들인 것으로 보이며 문장형식은 본문과 번역문이 병행 게재되었다. 본문은 한문 문장에 한글 조사를 붙였으며 번역문은 전통적 언문체이다. 따라서 한문 교육 배경이 없는 여햑생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비교적 폭 넓은 계층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전술임을 알 수 있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전근대 사회의 여성교육서들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간혹 남녀동등이며 동권을 언급하기는 하나 여성교육서 즉 수신서들이 전제하고 있는 역할분담에서 기인되는 불평등 등 문제 소재를 해명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회피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여자수신교과서(女子修身敎科書)
≪여자수신교과서(女子修身敎科書)≫는 1909년 노병선(盧炳善)이 저술하였으며 윤고라(尹高羅)가 감수한 여성용 교과서이다. 노병선은 진명여학교의 교사를 역임하였으며 협성회의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가정잡지의 찬성원으로서 여성계몽운동에 일익을 담당한 바 크다. 여자수신교과서에는 서문이 없어 그의 구체적 교육사상에 직접 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동교회 소속의 청년학원의 학교와 잡지사에서 교사를 역임한 것과 협성회의 부회장을 지낸 것을 미루어 근대식 교육에 적극 참여한 계몽사상가로서 일견 근대식 여성교육을 고무, 장려한 인물로 보여진다. 이 책은 순 한글로 간혹 옆에 한문을 곁들였다. 명실공히 소학교 여학생을 위한 교과서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었다. 전체 구성은 25과이며 19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순 한글의 여성교과서라는 점과 아울러 전체 구성이 기존의 여계류(女誡類)의 형식과 용어를 상당한 정도로 탈피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여성덕목을 강조하는 등 전통시대의 여성교육을 탈피하지 못한 한계가 노정되고 있다.

 가정잡지(家庭雜誌)
≪가정잡지(家庭雜誌)≫는 한국에서 최초로 간행된 여성종합지이다. 을사조약 이전의 잡지 유사물로서 국내에 대조선독립협회회보가 있었고, 해외에서는 일본유학생친목회보와 제국청년회보가 있었을 뿐 이렇다할 만한 잡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최초 잡지로서 수리학잡지가 1905년 12월에 발간되었다. 그 발행인은 유일선(柳一宣)이었다. 유일선은 이 잡지에 이어 ≪가뎡잡지≫의 발행인이 되어 여성계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가뎡잡지≫는 1906년 6월 15일 창간호의 발간을 효시로 하여 1907년 2월까지 그리고 ≪가정잡지≫로 제호를 바꾸어 1907년 8월부터 1908년 7월까지 2차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 잡지를 발행한 가정잡지사가 상동청년학원 내에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민회에 대중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여성종합지가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정잡지사의 사장을 비롯한 주요간부가 모두 신민회의 주요 간부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추측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 잡지의 창간호가 전하지 않으므로 간행 취지는 상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몇몇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일반부인의 학문을 수여하고 가정 교육의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 간행 취지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의 구성은 대체로 논설, 기서, 평론, 동서양가정미담, 위생, 백과강화, 잡록, 현상문예, 잡보 등의 형식을 취하였다. 가정잡지는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계몽지였다. 그래서 동시대의 대한자강회월보가 한문 교육을 받은 지식층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부유독습(婦幼獨習)
≪부유독습(婦幼獨習)≫은 정 3품 농상공부서기관 강화석(姜華錫)이 63세였던 1908년에 저술한 책이다. 강화석은 인천 출신으로 일찍이 청, 일, 영어를 익혔다. 특히 영어는 상해에서 익히고 귀국한 후 강화 수군영에서 영어 교사를 지낸 바 있으며, 또한 주일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재일(在日)하기도 했다. 그 후 농상공부 서기관에 이르렀다. 을사조약 체결 후 서우학회(西友學會)와 서북학회(西北學會)의 평의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교육상 남녀의 불평등과 구미(歐美)의 여성들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지는 여성의 현실을 비판하였다. 강화석의 여성 교육의 모델은 구미식 여성교육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자 대상은 제목 그대로 학교에 갈 수 없는 동몽과 부녀였다. 본서에는 기초적인 한자 2천여자의 뜻과 발음과 활용법을 수록하고 있다. 또한 이책의 실질적인 목표를 온갖 ‘국한문책이나 국한문신문’을 볼 수 있게 하는 정도에 두었으므로 신문에 자주 나오는 근대적인 용어를 익히는 것도 감안되었다. 애국계몽운동가 강화석(姜華錫)이 기존의 천자문 체제를 탈피하고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이 책을 저술한 것은 여성을 비롯한 학교 교육에서 소외된 계층에서 독학으로 글자를 깨우쳐 신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개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본서는 여성에게 교육 기회의 개방에 머물 뿐 여성운동에의 전기를 직접 제공하지는 못하였다.

 국문신찬가정학(國文新纂家庭學)
≪국문신찬가정학(國文新纂家庭學)≫은 가정과 교과서로 1907년 8월 정희진(鄭喜鎭)에 의해 발행된 책으로 박정동이 번역하고 김우균, 김풍호가 교열하였다. 총 5장 26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자녀양육시에 주의해야할 사항과 부모를 모시는 태도와 방법, 교제법, 하인 다스리는 법, 재난에 대처하는 법 등을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사적 영역과 재생산적 영역을 담당하는 여성에게 그 역할을 잘 수행하게 하기 위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전통시대의 여성용 교훈서와 마찬가지로 가정인으로서의 역할수행에 필요한 특성과 지식을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교육에서 여성에게 가정 안에서의 사적, 재생산적 영역의 역할수행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적합한 여성을 육성하고자 한 의도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성별이원론이 교과서의 내용에 강하게 깔려 있으며, 따라서 교육내용 속에서 여성은 주변적, 수단적 존재로 소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자계(女子界)
≪여자계(女子界)≫는 동경여자친목회의 기관지로 발행된 것이다. 1917년 봄에 등사판으로 처음 나왔다가 1917년 6월말에 당국의 인가를 받고 활판으로 공식적인 창간호를 낸 여성잡지였다. 편집부장 김덕성, 편집부원 허영숙, 황애시덕, 나혜석, 찬조원 전영택, 이광수를 임명하여 편집부를 구성하였다. 여자계는 처음에는 여자유학생들간의 간단한 소식지 형태로 나왔다가 유학생뿐만 아니라 조선 본국의 여성들에게도 발언하는 여성잡지로서 위상을 높이면서 당국의 인가도 받고 활판으로 만들어 공식적으로 발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등사판 ≪여자계≫의 창간호는 숭의여학교 출신 여자유학생들의 주도하에 발간하였는데, 제2호부터는 동경여자친목회의 기관지 형식으로 나왔다. 1917년 10월 임시 총회 이후 동경여자친목회가 전체여자유학생의 대표단체로서 위상을 강화하면서 ≪여자계≫의 발간을 맡았던 것이다. 여자계에 전영택, 이광수가 고문으로 참가한 사실은 잡지발간과정에 남자유학생들이 일정하게 참여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이 시기 신지식층이 주장했던 <근대화>를 여성에게 선전하고 현모양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참여한 것이었다. 여자계의 발행은 <근대화>를 위해서 가정개량을 주장할 필요를 느낀 신지식(新知識)층의 요구와 스스로 여자사회의 개혁을 담당할 선도자로 자임한 여자유학생들의 사명감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여자독본(女子讀本)
≪여자독본(女子讀本)≫은 상,하권으로 1908년 4월 장지연이 저술하고 광학서관(廣學書館) 명의로 발행한 국어 교과서이다. 저자인 장지연을 개명 유학자로서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가이다. 책은 순한글로 표기되어 있으며 명사의 경우 한자의 음과 뜻을 싣고, 한 과가 끝나는 곳에 한자의 음과 뜻을 달아줌으로서 내용의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의 저술 목적은 제1과 총론에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저자인 장지연 개인의 성향은 교과서 제작에도 반영되어 상권에는 우리나라 여성의 행실을, 하권에는 서양과 중국 여성들의 국가사회를 위한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치가자(治家者)로서의 여성에게 필요한 덕목을 가장 강조하고는 있으나 그와 관련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을 실어 1910년 11월 16일 출판법에 의해 발매금지를 당하였다. 이 책은 총 120개과이다.

 대구패물폐지부인회(大邱佩物廢止婦人會)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빌려 쓴 국가의 빚을 국민들이 스스로 모금하여 갚아버림으로써 국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구국운동으로 시작했다. 일제는 한국의 재정을 장악하고 식민지 지배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한국에 차관을 떠맡기다시피 제공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다 다네타로가 부임한 이후 차관은 더욱 늘어났다. 총차관액은 1300만원으로 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액수였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가던 중 서상돈, 김광제 등이 대구에서 제창한 국채보상운동은 곧 전국에 퍼져나갔다. 방방곡곡에서 금주, 금연운동이 일어나고 여성들이 폐물을 헌납하며 고종도 금연할 것을 밝히는 등, 전 국민이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운동을 주도하던 대한 매일신보의 양기탁을 성금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 그리고 1908년 초 2천만원의 차관을 반강제로 더 공급했다. 이에 따라 무력감이 커지면서 국채보상운동도 차츰 쇠태해졌다. 이 운동에서 자극을 받은 대구 남일동 부인들이 대구패물폐지부인회(大邱佩物廢止婦人會)를 조직하여 모금에 앞장섰다. 대구패물폐지부인회는 남성들이 담배 소비를 끊거나 절약하는 방법에 대응하여 여성들이 지닌 패물을 헌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런 그들의 실천방법은 전국여성에게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켜 여성의 형편으로써 가능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및 대한부인회 등은 이 운동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서울에서 여자들의 보상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끌던 조직은 대안동부인회였다. 여기에서 이일정(李一貞)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일부인회(韓日婦人會)
한일부인회(韓日婦人會)는 1906년 1월에 조직되었다. 총재는 엄비(嚴妃), 회장은 이정숙(李貞淑) 및 귀족부인을 회원으로 하고 있다. 이런 조직 구성은 이 부인회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따라서 부인회의 목적도 화족(華族)여학교 설립에 있었으나, 당시의 모든 부인회가 그렇듯 부인회원의 자체교육의 목적도 겸하고 있었다. 한일부인회는 일주 일회씩 정기적으로 회합하여여자교육 실시를 논의하고, 토론이나 저명인사의 강연을 들었다. 부인회에서 그 해 5월에 학부에 제출한 학교 인가 청원서를 보면 이 학교가 상류층의 여자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월 22일 보신여학관(普信女學館)이라는 교명으로 개교한 이래, 주로 일본인을 교사진으로 하고 초기에 한국인 여자는 김소사(金召史)라는 국한문교사 하나뿐이었다. 그 학교는 차츰 진용을 정비하여 교장에 이정숙이 취임하고, 1907년 교명을 명신여학교로 개칭하였다. 엄비의 사재를 재정적 기반으로 하여 튼튼히 발전하였다. 교장 이정숙은 한국 최초의 여교장으로 대개의 교육사에 공인되고 있다. 이 학교는 1910년 숙명여학교로 다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여자흥학회(大韓女子興學會)
대한여자흥학회(大韓女子興學會)는 1908년 5월 황후의 어지를 받들어 황족부인과 명대신부인이 운현궁에 모여 발기, 조직되었다. 이들의 임원구성은 고종(高宗)기의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의 구성과 흡사한 것이나, 비슷한 유형의 단체를 다시 조직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때문이었다. 첫째는 황제의 교체, 둘째, 대한부인회가 용산잠업강습소의 운영 이외의 활동이 전혀 없는점, 셋째,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을 위한 준비 등의 명분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898년 찬양회의 관립여학교 설립 독려에 의해 1899년 5월에 관립여학교 관제를 상정하였으나 실시되지 못하던 중 1908년에 이르러 칙령 제22호로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의하여 설립된 한성고등여학교를 후원하기 위한 여성단체로서 대한여자흥학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은 사립여학교 등 사학의 민족주의 교육을 탄압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대한여자흥학회의 활동이 여성교육 확충을 통한 여성지위향상운동으로 연계되기는 요원하였다.

 양정여자교육회(養正女子敎育會)
양정여자교육회(養正女子敎育會)는 판서 김구현(金九鉉)의 첩(妾) 김혜경(金惠卿) 등의 대관 첩(妾)의 발기로 1910년 5월 1일 설립되었다. 본 교육회의 발기 취지는 첩이 되어 천대받는 것이 원통하다는데서 동류 첩들을 연합하여 조직하였다. 이같은 취지로 설립된 양정여자교육회의 특색은 적실(嫡室)에 대한 평등권을 찾기 위한 항거운동이라는 데에 있다. 본 교육회에서는 동 5월 8일 총회를 개최, 동교육회에서는 양정여학교 설립을 결의하고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최성경(崔誠卿)을 교장으로 추선하였다. 최성경은 취임 즉시 학교 설립 기금으로 금화 100圓을 기부했으며 그외 임원도 동조하여 양정여학교를 후원하는 재정적 토대를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동 교육회의 첫 활동으로서 5월 15일한으로 8-18세의 여학생을 무시험으로 모집하였는데 25명의 학생이 입학하였다. 6월에는 학생수가 40여명으로 증가했다. 교사를 마련하여 양정여자교육회 회관을 정식으로 가졌다. 이 교육회는 양반고관첩실들의 활동이었던 만큼 재정적 여유가 있어 교사, 회관등을 회원재력으로 충당하였다. 당시 축첩제 철폐론이 여서인권회복의 중요한 한 쟁점이었는데 첩에 의해 설립된 여학교에 수십명의 여학생이 입학하였다. 그 입학 여학생의 신분 관계는 알 길이 없다.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는 1905년 7월경에 조직되었다. 그 설립취지는 대한부인회장정(大韓婦人會章程)으로 발표되었다. 그 장정의 내용은 대한부인회는 부녀의 덕을 함양하고 폐습을 개량할 목적으로 각종의 농공기예의 실업교육과 자선활동을 전개하며그 활동은 황실의 재정이 보장한다는 것이다. 단체의 임원구성은 총재 1인, 부총재 1인, 회장, 부회장 각 1인, 평의원 약간 명, 간사 2인, 서기 1인이었다. 임원 총재의 경우 황실의 여성에 한하여 임명되며, 그밖의 임원은 모두 고관현직의 부녀였다. 이 단체의 활동은 실업교육 그 중에서도 잠업장려활동에 국한되었지만 대한부인회의 조직이 계기가 되어 고관현직의 부녀자들이 각종 여성단체의 조직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여성운동의 확대에 기여한 바 크다. 그러나 임원 구성 내에 통감부 관리의 부인들이 편승한 것은 대한부인회의 한계를 들어낸 단적인 사실로 지목할 수 있다. 그것은 본래 대한부인회가 한일부인회 조직을 위하여 한국부인들의 부인회 조직의 기반이 전제되어야 하였으므로 일인 여성들이 적극 지원하였던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국미적성회(掬米積誠會)
국미적성회(掬米積誠會)는 인천에서 기독교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국미적성회는 1907년 3월 29일 발기하여, 박우리바, 여누이사, 정혜스터 등이다. 개회예식은 엄씨 누이 사택에서 개최되었다. 개최 당시의 회원수는 80여명이었다. 이 중 20명을 권고위원으로 결정하였다. 위원 두사람이 한 동리씩 맡아 국채보상운동에 여성참여를 권고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들 권고위원에 의해 매주일 곡물이 수합되었으며 회원수는 활동 수일만에 500여명으로 중가되었다. 적성회라는 명칭은 쌀 한술씩 모을 때마다 국채 갚기를 생각하며 국권 회복하기를 축수하고 정성을 쌓자는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적성회 취지서에는 외채를 진 국민이 태평히 앉아 있을 수 없으며 또 남녀권리에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평등적 국민권리와 의무수행을 위하여 여자라고 옛법만 지키며 평안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위국론에 입각하여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황성신문에서는 적성회의 번성하는 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부인감찬회(婦人減餐會)
부인감찬회(婦人減餐會)는 김일당(金一堂), 김석자(金石子) 등에 의해 1907년 2월 28일에 발기 조직된 단체로 서울에서 제일 먼저 조직된 국채보상 여성단체이다. 이 단체의 참여방법은 부인들이 조석 식사량을 반으로 감하고 그 감한 반을 석달간 국채보상금으로 내는 것이다. 실행기간은 3개월, 2개월, 1개월 등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실행하도록 함으로써 강제성에 의한 심리적 부담같은 것을 갖지 않게 하였다. 부인감찬회에서는 많은 부인들이 참여하도록 <부인감찬회경고문>을 발표하고 발기인들이 먼저 석달간의 감찬비를 내어 황성신문사로 보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3월 3일자에서 이들의 솔선적 실천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런데 부인감찬회를 발기한 3인이 모두 부실(副室), 즉 첩이다. 이들이 친일매국인의 부실인데도 구국사업에 솔선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들도 국채가 결과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멸망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점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동경여자친목회(東京女子親睦會)
동경여자친목회(東京女子親睦會)는 여자일본유학생들에 의해 1915년 4월 3일 결성되었다. 김필례, 나혜석 등 10여명이 발기하여 결성하였는데 설립목적은 <在京조선여자 상호간의 친목도모와 품성함양>이었다. 초대회장으로 김필례가 피선되었고 그밖의 임원구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동경여자친목회는 창립초기 친목모임의 성격을 가지면서 동경에 있는 여자유학생들의 단결과 지식교류를 도모하였다. 동경여자친목회의 창립은 이 시기 일본유학생 사회에 실력배양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남자유학생 중심의 통일단체가 결성된 상황 속에서 여자유학생들만의 성별조직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처한 특수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문제를 사회문제의 일환으로 제기하기 위한 여성주체세력이 형성될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7년 이후 동경여자친목회는 전체여자유학생의 대표단체로서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다. 1917년 10월 17일 임시총회를 계기로 동경여자친목회를 본부로 삼고 일본 각지방에 있는 여자친목회의 대표가 총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18년 3월 경에는 동경여자친목회의 전체 회원이 모두 40여명이라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전체회원 40여명이 동경과 지방에 있는 여자일본유학생 수를 모두 합쳐야 가능한 숫자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전체여자유학생단체로서 가지는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동경여자친목회는 기관지로 여자계를 발행하였다. 그 후 3.1운동 등 민족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여성 대중의 참여를 이끌기도 하였다.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脫環會)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脫環會)는 1907년 4월에 공씨(孔氏)와 엄씨(嚴氏)에 의하여 발기 조직되었다. 본회는 1천만 여자 중 지환(指環)이 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니 지환 매쌍에 2원씩만 셈하고 보면 1천만원이 여자 수중에 있는 것이므로 여자의 손가락을 속박하는 이 지환을 뽑아 국채를 갚자는 것이다. 본회에서는 국채의 상환 여부가 곧 민족적 생존의 심각한 문제임을 간파하였다. 국가와 민족 파탄의 위기의식은 국가사에 한번도 관여한 일이 없던 부녀들에게 국권회복을 여성의 힘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새로운 의무감을 갖게 하였다. 이것은 곧 부녀들이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게된 것이다. 즉 남자들보다 여성이 더 역량있는 민족사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자신감을 갖게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자신감은 여자 스스로의 힘으로 국권도 회복하고 남녀동권도 찾겠다는 적극적 의지로 확대 발전됨을 그들의 탈환회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국채보상탈환회는 금전의 패물과 금전의 다소를 가리지 않고 수합하며, 걷힌 물품을 기성회로 일단 보내어 사람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게재하기로 하였다.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三和港佩物廢止婦人會)는 평안남도 삼화항(三和港 현 鎭南浦)에서 1907년 3월 14일 김경지 부인 김씨(金氏) 등이 발기 조직하였다. 발기 당일 150량의 의연금이 각출되었다. 본회 취지서에는 쓰러져 가는 한민족의 운명을 1천만 여성의 손으로 건져 구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밝혔다. 또 빈한한 국가가 생산능력 없이 외국의 빚을 쓰게 되면 종국에는 경제적 노예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므로 국민의 힘으로 어서 속히 갚아야 함을 경고하였다. 여자도 2천만 동포 중의 한 사람이므로 남녀 구별없이 동포로서의 의무를 평등히 감당하여야 함은 물론, 멸망의 구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이 국가를 이번에만은 기어이 여성의 힘으로 구하고 또 여성의 힘으로 교육과 산업도 진흥시켜 국부민강을 이루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들에게는 국채보상만으로는 자주독립을 이룰 수 없으므로 식산자금을 유통시킬 은행과 국민교육을 담당할 학교까지 지어 명실 공히 국부민강을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또 이들은 국채보상운동의 최대의 목표를 “세계상 제1 상등국 국민”되는 데 두었다. 동(同)부인회에서는 이 원대한 포부를 조직적으로 실현화시키기 위해 회규칙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는 3.1 운동 후에 조직된 최초의 항일부녀단체이다. 3.1 운동 직후 국외로 미쳐 망명하지 못한 채 체포 투옥된 애국지사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생계조차 막연하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 대하여 누구보다 먼저 뜨거운 동포애적 관심을 기울인 것은 기독교적 근대교육을 받은 지식여성들이었다. 이들 중 대표적으로 명신여학교 선생 오현관(吳玄觀), 메리불덴 여학교 교사 오현주(吳玄洲-오현관의 妹)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 이정숙(李貞淑)이 주체가 되어 1919년 4월 서울에서 혈성단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단체 조직 후 이들을 중심으로 토옥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의 생계 후원을 목적으로 구체적인 사업을 진행시켰다. 그 후 그들의 사업은 확대되어 상해정부를 원조하기에도 이르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는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상해 임정대표 파견을 계기로 서로 1919년 6월 통합하여 건설된 단체이다. 이에 부서를 새로 정하고 임원도 선거하였다. 그러나 혈성단애국부인회는 구국사업을 위해 여성들 자신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조직 활동한 단체이므로 남자 측의 권유로 조직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보다 활동의식이 강했다고 추측된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통합후 그 조직을 지방으로 점차 확대시켜 나간다. 그들의 주된 활동은 독립운동의 윤활유인 군자금 모집에 있었다. 그래서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활동이었다. 군자금은 회원들이 만든 수예품의 판매로 얻어지는 수익금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회원들로부터 징수되는 회비로 충당되었다. 지부장은 회비를 징수하여 그 중 1/3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중앙본부에 송금하고 나머지는 지방 활동비로 쓰게 했다. 독립운동이 흐지부지 되면서 새로 김마리아가 회장에 선출되었는데 그 이후로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이 새로이 가다듬어졌다.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새로 출발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새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본부로 개칭하였다. 회원들의 인적 분석을 통해 볼 때 이 단체의 주동 역할자는 기독교계 여학교 교사들이었으나 독립전쟁 준비체제로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간호원들을 대거 규합하였다. 당시 이들의 조직력과 활동력은 남자들에 의하여 조직되었던 어떠한 항일단체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었다.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는 평양에 본부를 둔 평안도의 기독교계 부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항일부인단체이다. 본래는 평양 근처 기독교의 장로교파와 감리교파 여신도들이 각기 자기 교파의 부인신도들을 중심으로 1919년 5-6월에 애국부인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던 것인데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파견 요원인 김정목(金貞穆) 등의 권유에 따라 양교파의 부인회를 1919년 11월 통합하여 평양에 연합회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회를 두는 대한애국부인회로 개칭, 대규모의 비밀 결사로 재조직하게 된 것이다. 1919년 6월 하순에 북장로교파의 부인 신도인 한영신(韓永信, 34세)의 발기로 북장로교파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한영신은 인천에서 태어나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선친의 고향인 의주의 양실여자중학(養實女子中學)을 졸업한 뒤에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25세에 평양으로 이사하여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그는 애국부인회 조직 당시 북장로교의 반장이었다. 한영신은 이처럼 근대교육을 받은 지도적 위치의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같은 교인인 김보원(金寶源), 김용복(金用福) 외 수 명을 자기 집에 모이게 하고 항일애국운동참여를 강조하였다. 이런 이념이 곧 항일여성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이념에 근거해 이 단체는 동지 회원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대한독립부인청년단(大韓獨立婦人靑年團)
대한독립부인청년단(大韓獨立婦人靑年團)은 1919년 8월에 평안도 대동군에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평안도 대동군 북장로교파의 신도이며 교회보속 서당의 여교사인 21세의 젊은 여성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대한독립부인청년단은 14-5명의 젊은 기독교부인을 회원으로 규합하였고 활동목적은 독립운동자금의 모집과 상해에서의 독립요원에 대한 활동비용과 음식 등의 편의 제공 및 감옥에 있는 투사 가족에 대한 구호등이었다. 여신도들은 비신도의 부녀들보다 신뢰도나 신의감이 높은데다가 교회의 조직을 이용할 수 있어 항일부녀단체는 거의 모두 여신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채보상의무소(國債報償義務所)
국채보상의무소(國債報償義務所)는 김포군에 사는 한씨(韓氏) 등 여러 부인이 발기 조직한 것이다. 이들은 국내 각동에 다니며 발기 취지를 설명하므로써 부인들의 충절을 격발케 하였다. 의무소 설립 취지에는 충효의 윤리에는 남녀의 차가 없고 국채보상은 대한 흥망과 직결되는 것임을 역설하였고 나라가 위급한 때에 부인이라고 안연히 있는 것은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라고 하여 부인들의 뜨거운 충성심을 일깨워 주었다. 또 취지에서 돈뿐만 아니라 금은 패물이나 각종 곡식 등을 가지고 힘닿는대로 수취하자고 제시하였다. 수취 금품에는 패물, 곡물 등이 많이 있었는데, 김포군의 경우는 같은 패물 곡식이지만 그것을 수취하는 의식에는 다소 다른 곳과 다른 점이 있었다. 즉 돈이 없는 마당에 돈을 거두면 경제적으로더 큰 타격과 혼란이 올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이를 막기 위해서도 패물, 곡식으로 취합하자고 한 것이다.

 부인학회(婦人學會)
부인학회(婦人學會)는 1907년 1월에 조직되었다. 이 단체의 조직과 운영 실태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이 부인학회가 설립된 시기는 여자교육회 제1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여자교육회운동 제1기의 활동상에 관한 비판, 반성의 결과로 부인학회가 조직된 것이다. 즉 여자교육회가 행하던 토론, 연설회 등을 배우지 못한 여자들의 행사로 파악하고, 이들에 대해 학식있는 남성들이 강력한 제재와 지도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견해인 것이다. 따라서 부인회 구성원의 가장이 찬무원단을 구성한다는 가부장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여성단체를 구성한 것이 부인학회이다. 가장들은 부인학회를 조직하여 가정내에서 뿐 아니라 단체활동중의 처의 행동범절과 사교법을 감독하고자 한 것이다. 부인학회의 활동상에 대한 전모는 파악할 길이 없으나, 역시 주요 활동영역은 여성교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운현궁 맞은편 교동에 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후에 훈동 의학교로 이전하였다. 교육은 일요일마다 3시간씩 일본여학교 교사와 기타 유지 부인들이 담당하였다. 교육과정은 정치, 법률 등을 일체 거론치 않게 하고, 여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가사, 위생, 요리, 인체활동의 이치 등 만을 교수하였다.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는 평양의 숭의 여학교에서 교사 황에스터, 김경희(金敬喜) 및 숭의 출신의 독실한 신자인 박정석(朴貞錫) 등 3인이 거족적 항일운동의 시기가 도래할 것을 믿고 여성구국의식배양을 위해 결성한 단체이다. 당시 숭의여학교는 장로교와 감리교계 선교사가 합동으로 설립한 학교이므로 이 학교에는 장로교가 우세한 남한에서도 많은 학생이 유학을 와 있었다. 황에스터와 김경희는 학생들의 지역적 분포가 전국적인데 착안하여 독립사상을 전국여성에게 확산시킬 목적으로 2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사상 함양을 위한 집회를 비밀리에 행하였다. 송죽결사대는 비밀결사인 만큼 신입회원을 가입시키는 규정이 엄격하였다. 또 송죽결사대는 안전주의적인 중년층 여성과 활동적인 젊은 여성이 골고루 규합되어 그들의 활동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가면서도 그 조직이 경찰망에 잡히지 않았던 것은 회원 가입 규정이 엄격했으며 회원 동지가 투철한 구국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1운동 이전 그 회의 활동은 주 1회 회원의 생일 축하회의 명목으로 모여 애국가를 부르는 등 독립 쟁취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회원은 회비를 내고, 회비 이외에도 자수 등을 판매하여 특수회비를 마련하여 국외의 독립운동기지에 송금하였다. 1919년 2월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황에스터와 김마리아는 일본에서 국내로 잠입하여 두루 다니면서 만세시위를 독려했다. 특히 평양의 만세시위에서의 눈부신 여성참여는 이 송죽회의 조직에 의해서였으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이를 지원하고자 평양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대한애국부인회도 그 기본 조직의 배경은 송죽결사대였다고 한다.

 박에스터(金點童)
박에스터는 1876년 서울에서 김홍택(金弘澤)의 셋째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점동(金點童)이었다. 그의 부친이 아펜젤라 목사의 집에서 고용살이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화학당에서 영어, 성경 및 국한문을 배우게 되었다. 영어를 잘 하였기 때문에 셔우드(Sherwood)의사의 통역을 하다가 병원일도 배우고, 셔우드의사로부터 간호학을 배웠다. 그후 셔우드는 의료강습반을 조직하여 한국인 4인과 일본인 1인에게 의학강습을 하였다. 그 중 1인이 박에스터였다. 후에 셔우드의 소개로 박여선과 중매결혼을 하고 또 그의 주선으로 함께 유학을 떠났다. 남편은 아내의 학업을 돕다가 득병하여 귀국하기 직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귀국직전 독립문 건립에 관심을 보인 그들은 약간의 기금을 보태어 주기도 하였다. 그밖에 의료활동은 하던 중 한국 여성들이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보고 황해도 지역 순회 전도사로서 활약하는 한편 맹아학교를 개척하는 일에 조력하기도 하였다. 끝내 과로로 인해 1910년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일정(李一貞)
이일정(李一貞)은 이준(李儁)의 부실(副室)로 신소당(申簫堂)과 함께 여자교육회에 입회하여 부총무를 역임한 바 있으며 일찍기 1905년 6월부터 안현에서 만물상점을 경영하였고 신소당의 광동학교에서 교감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민족운동에 분망한 남편을 도우며 놀라운 활약을 하였다. 그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한 부인상회를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1905년 한입신협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침략이 점점 노골화하던 그 해 2월 서울의 요지인 안국동 가로변에는 <일정사회>라는 한 부인상회가 생겼다. 이 상회는 서양제 유리를 단 그 당시로서 가장 현대식 잡화상이었다. 양반층의 부인이 이런 상업을 자영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며 상점의 규모가 또한 새로운 것이어서 많은 손님들이 구경삼아 찾아 들었다고 한다. 이일정은 공진회의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남자들과 함께 종로에서 연설을 하는 대담한 활동도 하였다. 이일정은 이와같이 여성으로서 사회전통을 깨뜨려 가면서 자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한편 남성들과 같이 거리의 시위대열에 뛰어들어 외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란사(河蘭史)
하란사(河蘭史)의 본명을 현재 알 수는 없지만 영어 이름은 낸시(Nancy)였다. 남편의 성을 따라 河를 성으로 삼아 하란사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평양기생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여 소실인 하란사가 이화학당에 가서 공부하고 그리고 유학가는 일을 적극 찬성하고 도왔다. 그는 이웃에 사는 여선교사들의 떳떳하고 자유로운 활동에 자극을 받아 자신의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자비로 유학한 첫 유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출산 직후 어린딸을 두고 1896년 미국 오하이오 웨스리안(Ohio Weslyan) 여자대학으로 가서 영문학을 전공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고 1900년 귀국하였다. 그는 첫 여성 B.A학위취득자로서 1906년 이화학당에서 교사와 기숙사 사감을 지냈다. 그의 교직생활과 사회활동은 애국열로 충만해있었다. 여학생들에게 엄한 훈계와 매서운 꾸짖음으로 학생의 각성과 향학열을 촉구하였다. 여성단체를 위하여 자혜부인회, 진명부인회 등에서 교아를 위한 사회사업과 여성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연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9년 6월에여학교 교육을 발전시킬 목적으로 조직된 관사립여학교 연합장학회에 총무로서 활동하였다. 이상의 다양한 활동으로 보아 당시 여성지도자로서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1910년대에는 교회와 학교관계로 수차 미국을 방문, 학교 운영을 위한 모금운동도 전개하였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여성 대표로 참석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저지를 받아 실패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후 북경에서 병으로 객사하였다.

 이옥경(李鈺卿)
이옥경(李鈺卿)은 개화기의 여성단체 활동의 지도자이다. 그는 풍산홍씨(豊山洪氏) 집안의 삼남매 중 외딸로 1870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가정 배경 및 어린 시절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는 16세 때 이지용(李址鎔)과 혼인하여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일본인과 서양인을 가정교사로 두어 어학을 배웠으며 일어에는 퍽 유창하였다. 1906년에는 이지용 대신이 일본으로 특파대사가 되어 떠날 때 동행하였다. 특파대사가 공적으로 부인을 대동하였던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905년부터 부인회를 발기한 일이 있었지만 일본을 다녀온 후에 더욱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옥경이 단체활동에 관련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한국부인회의 발기인으로서이다. 후에 이 부인회의 회장이 되어 자기 사저에 회원들을 초청하여 회의를 가졌으며 이때부터 여학교 설립에 대한 의견들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생명보험과를 설치할 뜻을 보였다. 그는 여성단체의 지도자로서 여자보학원 및 양원여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직접 참여하여 교육사업을 하였다. 특히 관심을 가지고 개척한 분야는 여성의 실업교육과 경제적 지위 향상이었다. 후에는 부인경제회를 조직하려고 대관 및 실업가 부인들을 설득하는 활동도 하였다. 이옥경은 실업교육으로 양잠강습소의 소장이 되어 이를 발전시켜 나갔다. 양잠소의 경비를 확보하기 위하여 부인회 회원들과 노력하여 정부에 청원하여 3천여 원의 보조를 받아 예산을 충당해 나갔다. 이외에도 이옥경은 자혜부인회의 총무장으로 있으면서 자선사업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대한병원에서 부상병 치료하는 것을 위해 기부금을 보내며 여학생들을 거느리고 부상병을 방문하기도 했다. 많은 연설과 여자지남(女子指男) 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신소당(申簫堂)
신소당(申簫堂)은 1853년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딸로서 평안도 안주(安州)의 여성이다. 신소당의 남편은 청풍 김씨 김규홍으로 1861년 사마시(司馬試) 문과출신이다. 대한제국기 여성운동사상 신소당의 활약은 괄목할만 하다. 1898년 찬양회 회원이 중심이 되어 관립 여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 ≪제국신문≫에 수차에 걸쳐 기고를 하여, 여성들의 교육운동 방향을 제시하고 독립협회의 민권투쟁을 찬양, 고무하는 등의 사회운동에 관심을 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시기에 이미 국채문제의 중요성을 인식, 효율적인 재정집행을 건의한 바 있다. 을사조약 체결후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대안동에 광동소학교를 설립하여 자비로 운영하였고, 여자교육회의 여성교육 및 여성실업교육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승화시켜 여성 역량을 총합하여 세력화를 꾀한 바 있다. 이어서 진명부인회와 양정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만인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처첩동등권(妻妾同等權)을 주장하는 여성 신분해방투쟁을 전개하였다.

 엄비(嚴妃)
엄비(嚴妃)(1854-1911)는 고종황제의 비(妃)로서 정비(正妃) 즉 황후가 부재한 상황에서 최고위의 후궁이었으나, 한미한 가계출신의 여성이었다. 민비시해 직후 재입궁한 엄상궁이 1903년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된 것이다. 그 후 황실에서의 절대적 위치를 점하는 여성이 되었다. 엄비는 1906년 봄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와 양정의숙을 설립하였다. 엄비는 진명부인회와 양정부인회를 조직한 신소당과 각별한 관계를 맺어 나갔다. 엄비의 일련의 교육사업과 여성교육운동에의 참여활동은 신분상승 및 신분적 한계의 극복을 위한 여성의 교육운동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엄비는 진명부인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양정, 진명, 보신의 세 개의 남녀학교를 설립하여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여성교육에 관심이 높았다. 그 취지는 진명여학교는 서양식 교육을, 숙명여학교는 일본의 학습원과 같은 화족여학교를 그리고 양정의숙은 한국전통을 계승하는 여성교육기관으로 만들어 보기 위해서 였다.

 김해부인회(金海婦人會)
김해부인회(金海婦人會)는 1910년 1월 경상남도 김해 일대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회장은 허경임(許敬任)으로 김해군에 거주한 여성이었다. 이 단체의 총무, 찬성원은 모두 여성들로 구성되었다. 1910년 이 시기는 여성의 단체활동이 종식되어 가고 대체로 자선 활동에 치중하던 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방의 소도시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어 여성교육을 담당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한 일은 획기적 사실이었다. 단체의 발기문에는 조선유교주의 정치의 남성중심, 여성정절 이데올로기로 인한 여성의 질곡에 대한 자각이 잘 나타나 있다. 나아가서 사회의 폐습과 열등국으로 전락한 조선 사회의 병폐를 여성의 교육 부재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애국계몽가의 여성교육론의 영향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여성 질곡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자각은 아직 싹트지 않았다. 남녀불평등의 원인을 여성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다른 사회단체의 여성교육윤동 일반에서도 엿볼 수 있으나 특히 김해평야의 쌀 생산지라는 지역적 특수성과도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쌀 생산지에서의 여성의 노동력이 낮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가정선교회(家庭宣敎會)
가정선교회(家庭宣敎會)는 신교측 부인회 조직의 효시로, 평양에서 1897년 여자선교사들과 함께 시작한 단체이다. 이조시대 여성들이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가정생활 이외의 조직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의 선교를 통하여 일어난 교회부인회 활동이다. 가정선교회는 순전히 기독교의 전도 사업을 목적한 것이어서 사회단체로서의 의의를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규중에서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던 여성들이 교회라는 조직체에 소속하여 단체활동에 참가한다는 것은 새로운 개화의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한국여성 사회의 지도자들 중 기독교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교회를 통한 단체활동에의 참여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위한 중요한 훈련과 경력이 되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여성활동을 여성 개화사의 주요 측면으로 삼아 볼 때 이 단체의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고등여학교령(高等女學校令)
<고등여학교령(高等女學校令)>은 1908년 4월 발포되었다. 대한제국기 여성운동은 여성교육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계몽에 주력한 것이 특징이다. 초기의 찬양회가 순성여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한편 관립여학교설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래 대한제국 말기에 조직된 대부분의 여성단체는 여성교육계몽운동을 제1차 사업으로 하고 있었다. 운동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관립여학교설립은 불가결하다고 인식하고 관립여학교 설립은 누차 언론기관과 여성단체에 의하여 청원되었다. 당시 민족사학의 당면과제가 학교운영비의 조달이 학교의 존폐의 관건이었다. 여학교의 경우는 남학교보다 심각하였다. 그 타개책으로 관립여학교설립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학교 관제는 일찍이 1899년에 이미 제정된 바 있었다. 아울러 정부는 1899년도 예산에 여학교비를 상정하였다. 그러나 예산뿐 아니라 여학교 관제는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동도서기사상가이나 남녀의 신교육을 반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많은 부인회가 조직되고 여학교 설립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여성교육활동은 주로 민간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다 그 실현을 본 것이 1908년 학령 제22호 <고등여학교령>의 공포와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이었다. 여학교관제가 제정된지 10년만의 실현이었다.

 부인강습소(婦人講習所)
개화기 사회변화에 따르는 시대의 요구와 교육열에 따라 여학교가 당시 많이 설립되었으나, 그러한 교육기관에서 교육받기에는 너무 연령이 많거나 기회를 놓친 부녀자들을 위해 사회교육적 기능을 하는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에 설립된 일반여학교와 유사한 부인교육기관들이 설립되는데 부인강습소(婦人講習所)도 그 중 하나이다. 부인강습소에서는 “연령이 적당치 못함으로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부인들과 학교에서 수업한 것을 다시 연구, 복습하고자 하는 학생” 30-40명을 모아 가르쳤다. 그 교육과정은 한문, 산술, 어학 등이었다. 이와같이 개화기에는 다소간의 사회교육 기능을 갖는 여성교육기관이 설립되어 근대교육과정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런 부인강습소 이외에도 부인학교, 여학교특별과, 임시강습소, 야학교 등을 통해 구문, 한문, 영어, 일어, 산술, 지리, 위생 등을 교육하였으며 특수하게는 강습소를 통한 소학교 교사나 중학교 예비생을 위한 조금 높은 단계의 교육도 실시되었다.

 국민예복의정회(國民禮服擬定會)
국민예복의정회(國民禮服擬定會)는 前 여자교육회 회장 이옥경(李鈺卿) 등이 1908년 6월 설립하였다. 의복개량은 여자교육회의 통상회에서 수차례 토론되는 등 의제개량운동의 주장이 그 당시 모색되었다. 1906년 12월 6일 부인의 의관제도를 개량함이 가함이 토론되어 신소당(申簫堂)씨가 여자의관개량을 정부에 청원하여 인허한 후 실시하기로 동의하고 부회장 김운곡(金雲谷)씨가 재청하여 결의되었다. 이를 통해서 진정한 여성의 지식과 학문의 발달을 위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의복개량이며 이것은 행동의 자유와 남녀의 교제와 경제적 이익추구를 위한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여자의제개량안은 급선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중추원에서 부결되었다. 그러자 여자교육회는 여성의제가 교육에 방해되고 사회발전에 어긋남을 들어 의제개향을 허락하여 줄 것을 재청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여자의관개량안은 이후 여자교육회 관련기사에서 그 인허내용을 찾을 수없다. 다만 국민예복의정회를 만들어 협의하였다는 기사만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추원 의안으로서 허여되지는 않고 여자교육회 회원을 중심으로 우선 실천된 것으로 보인다.

 조산파양성소(助産婆養成所)
조산파양성소(助産婆養成所)는 1910년 여러 부인과 지석영(池錫永)이 회집하여 홍순관(洪淳寬) 대부인 박씨(朴氏)를 소장으로 윤고라씨(尹高羅氏)를 부소장으로 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조선에서는 이 무렵을 전후해서 조산부양성소가 설립되어 산파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이종문(李鐘汶)은 생산구호원을 설치하였고 1909년 9월에는 동물원장 유한성(劉漢性)이 일본여성산파 1명을 초빙하여 지원자를 모집 고수하기로 하면서 교육후 산파의 일을 하고 받을 수료금을 빈부의 차이에 따라 4등급을 나누어 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동 등지에 산파양성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지석영 등이 설립한 이 조산파양성소는 1910년 1월 29일부터 해부학과 생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부인들에 의한 이 조산소는 이 비용을 위해 연주회를 열기도 하고 대관부인들에게 찬성원을 의뢰하기도 하였으나 폐지할 지경의 상당한 재정적 곤란이 있었다.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施通文)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施通文)은 여성들의 개화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스스로 발표한 최초의 문헌으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1899년 9월 여성단체를 조직하는 첫모임이 100여명의 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회장이 된 양성당 이씨(李氏)와 부회장이 된 양현당 김씨(金氏) 두 부인에 의해 미리 마련된 여학교설시통문을 읽고 찬양회 조직의 취지를 공고하였다. 이들은 대한 제국의 개화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이때 규중에서 아직도 잠자고 있는 조선 여자들의 형편을 선진국 여성들에 비하여 안타깝게 생각하고 혁구종신(革久從新) 할 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여성개화의 시급함을 절감하여 여학교 설립을 위한 후원회를 조직해야 하며 이에 많은 부인들의 호응과 참여를 촉구하였다. 통문을 작성하고 찬양회의 조직을 주도한 여성들은 주로북촌에 사는 양반층 부인들이다. 그들은 개화를 추구하는 황제폐하의 정책에 부녀자로서 호응해야 하며 집안만을 지키고 있을 수 없다는 자세에서 분기한 것이다.

 김배세(金培世)
김배세(金培世)는 박에스터(金點童)의 동생으로 언니 신마리아와 함께 의료할동을 한 인물이다. 1910년 이후 일본으로 유학간 여학생들 중에서 의학을 전공하는 수가 늘어나면서 이에 따라 의료사업에 관련된 간호원과 조산원의 양성 교육은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1903년 마가렛 에드먼드(Magaret Edmund) 간호원이 한국에 와서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간호원양성소를 시작하여 1908년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에 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원학교를 1906년에 시작하였으며, 김배세는 바로 세브란스 간호학교 1910년 제1회 졸업생이다. 역시 언니의 영향으로 정규 간호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제1회에 끝까지 남아서 졸업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김배세는 한국 간호학계의 선구자이다.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은 여성의 법적 지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조선민사령> 제 11조는 1921년 11월 14일 제령(制令) 제14호로 개정하여 친권, 후견, 보좌 및 친족 회의 중 무능력자를 위하여 설치되는 친족회에 관한 일본 민법규정을 동년 12월 1일부터 새로 의용하기로 하였다. 1922년 12월 7일 제령 제 13호로 동 11조를 2차로 개정하여 혼인연령, 재판상이혼, 인지(認知), 친족회에 관한 잔여규정 전부, 상속승인에 관한 규정 및 재산분리에 관한 규정을 1923년 7월 1일부터 우리나라에 의용케하는 동시에 분가(分家), 절가재흥(絶家再興), 혼인, 협의상 이혼, 입양 협의파양(入養 協議罷養)에 관한 종래의 사실주의를 신고주의로 전환시켜 1923년 7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그후 1939년 11월 10일 제령 제 19호 조선민사령 제11조는 3차 개정을 보아 1940년 2월 11일부터 氏에 관한 규정, 재판상 이혼에 관한 규정등을 신설 추가하였다. 이 신설 규정에 의하여 우리나라 종래의 이성부양(異姓不養)의 철칙은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 개정들은 종래 관습법에 맡겨 두었던 부분을 축소하고 그 대신 일본구민법의 해당규정을 적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창기취체규칙(娼妓取締規則)
<창기취체규칙(娼妓取締規則)>은 일제시기 창기들을 완전히 지역적으로 격리시킨 상태하에서 집단적으로 모아 이 규칙하에서 창기들에 대한 수칙에 따라 철저히 감독받게 한다는 법령이다. 1916년 3월 31일 공포된 경무총감부령 제 4호에 의해서 일제시기 공창제는 시작되었다. 이전에 1904년 10월 10일 경성영사관령 제 3호 <요리점취체규칙>이 발포된 후 일본당국은 요리점 내에서 성행하던 매춘 행위를 효율적으로 단속하기 위해 종래의 요리점을 1, 2종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2종 요리점을 대좌부라 하고 이의 영업을 일본영사가 특별히 지정하는 구역에서만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대좌부(공창)영업은 시작되었다. 그 후 일본 당국은 1916년 3월 31일 경무총감부령 제4호 <대좌부창기취체규칙>을 공포함으로써 공인매춘업인 공창의 설치 및 영업과 단속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 규칙에 의해 종래의 2종 요리점 영업허가를 받아 영업중에 있는자들은 대좌부 영업자가 되었고 또 2종 요리점에서 영업하던 2종 기생은 허가받은 창기가 되었다.

 여자잠업강습소관제(女子蠶業講習所官制)
<여자잠업강습소관제(女子蠶業講習所官制)>는 1910년 1월 제6호로 반포되었다. 이어서 여자잠업강습소 규칙이 반포되었다. 잠업교육은 1900년을 전후로 하여 실시되었다. 1899년 지금의 서울 충무로 4가에 양잠강습소가 생겨 양잠, 제사 및 보통교육과정을 가르쳤으며 1900년에는 한성(漢城) 수동의 인공양잠소에서 인공법(人工法)을 가르쳤다. 1901년 11월에는 농상공부에서 잠업과 시험장을 필동에 설립하여 인공양잠소에서 가르쳤던 교사들과 왜국에서 양잠을 배워 온 부인을 교사로 1901년 5월부터 남학생 100여명 여학생 10여명을 가르쳤다. 이후 농상공부 잠업과에서는 여성의 재질 등을 들어 여성잠업을 장려하고 있으나 여성들이 남성과 같이 입학하는 것을 기피하여 극히 소수의 여성이 이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가운데 1905년 8월 용산대한부인회에서 잠업강습소를 설치하여 이를 중심으로 잠업교육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동대문 밖에 유지인사에 의한 부인양잠학교가 설립되어 교육하였다. 그 후 마침내 여자잠업강습소 관제와 규칙이 반포되면서 강습소는 관립으로 이관되어 교육하였다.

 신여자
잡지 ≪신여자≫는 1920년 3월 10일에 창간되었다. 발행인은 삘링스(B.W.Billings)부인이며 편입인은 김원주(金元周)였다. 김원주의 회고에 따르면, 창간 당시 방정환, 유강열의 자문을 얻었고 잡지가 출간되기 이전에 나혜석(羅蕙錫), 신(申)줄리아, 김활란(金活蘭) 등이「청탑회」를 조직하여 1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며 공부하고 서로의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편집인들과 필자들은 주로 이화학당 출신이며, 당시 이화학당측에서 재정적 도움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신여자≫의 주된 재정 담당자는 김원주의 남편 이노익(李魯翊)이었다. 3.1운동이후 지식층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실력양성우선론이 지배적이었다. 그 영향은 ≪신여자≫의 창간사에서도 「.....그러면 무엇부터 개조하여야 하겠습니까? 무엇할 것 없이 통틀어 사회를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먼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먼저 가정의 주인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라고 하여 사회개조의 기초로서 여자해방이라는 과제를 제기하였다. 이런 경향의 다른 축에는 「전세계의 사조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있는 차별은 철폐하자는 것이외다. 둘째로 남녀의 계급을 절대폐지하여야 할 것인줄 압니다」라고 하여 계급의 일종인 남녀의 차이도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논설은 여성의 해방을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천부인권설에서 찾는 개화기 여성 해방론과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여자를!>이란 논설에서 이동원은 당시 신여성들이 제대로 자각된 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를 여성자신에게만 돌리지 않고 당시 「현모양처」교육에 돌리고 있다. ≪신여자≫ 창간호에서 사회개조에서의 여성역할과 여성해방을 주장했음에도 남성의 타자로서 여성의 존재는 편집 고문인 양백화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현대의 남자는 어떠한 여자를 요구하는가?>에서 교육을 받아 서로 의사가 통하는 사이라야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실제로는 남성의 보조 역할을 할, 새로운 시대에 남성의 매력을 끌만한 여성상을 거론하고 있다. 남성과 대등한 인격으로서 동등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편의 원고를 대필해 줄 정도의 실력과 남편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을 정도의 사교술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는 당대 남성의 신여성에 대한 솔직한 요구였다. 여성은 정숙하고 아름다우며 남편을 즐겁게 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유지시키는 존재로 남성에게 의미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지원이 ≪신여자≫의 편집진을 포함한 1920년대 민족주의 여성운동론에 대해「부르조아 여권론의 핵심이었던 참정권, 연애, 결혼, 이혼의 자유, 재산권 등을 거의 다루지 않았음」을 비판한데 반해, 최혜실은 「≪신여자≫는 여성해방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 남성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던 ≪여자계≫와 다르게 이화학당 출신의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직접 집필하고 편집했으며 여성해방의 논리를 펴나간 본격적인 여성주도의 잡지였고, 1920년대 여성 담론을 형성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라고 평가했다.

 조선여자교육협회(朝鮮女子敎育協會)
1920년 3월말경 차미리사(車美理士)에 의하여 조직된 여성계몽교육단체이다. 개화기 이래의 여성운동은 주로 여성교육의 진흥에 두어졌다. 특히 1919년 3.1운동에서 여교사, 여학생, 여전도사 등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활약이 매우 커서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크게 일어났다. 1920년대에 오면 여성교육 희망자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한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과 신교육령에 의한 학령 제한으로 학령이 지난 여아와 신교육을 받기를 희망하는 젊은 주부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조선여자교육협회는 차미리사에 의해 1920년 4월에 ≪여자시론≫의 창간 동지들과 함께 발기하여 서울 염정동 예배당 아래층을 빌려 야학을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여자교육협회는 취학의 기회를 상실하여 정규학교교육을 받기 어려운 가정부인을 교육하기 위하여 야학을 개설했다. 개강초에는 수강생이 13명이던 것이 1주일 후에는 약 50명으로 늘어났고, 한 학기가 끝난다음 새학기 초에는 150명에서 160명의 부인학생들이 입학했으며,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유학생의 부인들이었다고 했다. 운동의 목적은 가정개혁 및 구가정에 있는 무식한 여자에게 상식을 가르치는 것이며, 운동방법은 야학강습소의 개설, 여자강연회, 토론회, 음악회, 연극대회, 순회연극무도단조직, 여자교육공로자 표창 및 월간 ≪여자시론≫의 간행 보급이었다. 그리고 가족제도의 개혁문제에 대해 양자제도, 호주상속제도, 재가문제 등을 다루었다. 조선여자교육협회는 1921년 6월 10일부터 10월 10일까지 전국 13도의 주요 도시 73개소를 순회하면서 생활개선과 여성교육에 관한 계몽 강연을 하였다. 강연단은 차미리사를 단장으로 하고 김선(金善), 이은(李銀), 백옥복(白玉福), 허정자(許貞子), 김순복(金順福), 김은수(金恩洙) 등 7명으로 구성되었다. 제목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여자>, <육아와 위생>, <현시 청년남녀가 고민하는 이혼문제 해결책>, <가정은 인생의 낙원> 등이었다. 또한 동(同)회는 여성의 생활개선을 위해서 「쓰개치마를 벗자. 굿을 하지 말자. 의복에 물을 들여 입자. 다듬이질을 폐지하자. 전가족이 일정한 시간에 한 상에서 식사를 하자. 화초를 가꾸자」는 등 생활의 실제적인 점을 들어 개선운동을 벌였다. 조선여자교육협회의 여성교육 계몽운동은 여성교육의 대중화운동으로 확산되었고, 그 영향으로 1921-1922년에는 지방에도 여성교육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했다. 이 단체의 출현은 이제까지 여성운동의 방향이나 그 주체세력이 대개 종교인이었거나 독립운동 위주였던 데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여자야학강습소가 자라서 근화여학교가 되고, 그 후신이 오늘의 덕성여고가 된 것이다.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조직된 항일여성 독립운동단체이다. 북장로파 전도부인 최영반(崔靈磐)과 사립학교 교사 안인대(安仁大)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선독립의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1920년 2월에 대한독립청년단 단장 조형신(曺亨信)과 총무 최봉주(崔奉周) 등으로부터 항일운동단체 조직을 권유받고 동지들과 함께 강서군 성대면에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국민향촌회여자부를 결성하여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무하는 격문을 배포하였다. 안인대, 최영반, 고유순(高有順) 등은 대한독립청년단 고문 김예진(金禮鎭)으로부터 국민향촌회여자부를 발전시켜 대한독립청년단여자부로 조직을 개편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같은 해 4월 강서군 반석면에 있는 북장로파 예수교회당 부속 반석학교 여학생 교실에서 이후배(李厚培), 노철남(盧徹南), 김용인(金用仁), 최풍원(崔風元), 노원효(盧元孝), 최능인(崔能仁), 송애사(宋愛思) 등과 함께 국민향촌회 여자부를 대한애국부인청년단으로 발전시켰다. 단장은 최영반, 서기는 안인대, 재무는 고유순이었고, 단원들은 대부분 북장로파 신도들이었다. 우선 단원들로부터 독립군자금을 모금하여 김예진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한편, 평양 등지의 부호들로부터 독립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21년 3월에 이 사실이 일제경찰에 탐지되어 안인대 등이 잡혔다. 1920년대 초 평안도지방에서 전개된 항일여성 독립운동의 양상은 기독교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군자금을 모금, 임정에 송달하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였다.

 차미리사(車美理士)
차미리사(車美理士)는 덕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근화여학교를 설립하기 전 소박데기 부인들의 구세주로 유명했다. 그녀가 1919년 9월 종교예배당 종각을 빌어 여자 야학강습소를 열고 중점적으로 모집한 학생이 당시에 소박데기 였던 유학생 부인들이었다. 차미리사는 1880년 8월 21일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18세에 결혼하여 딸을 낳았지만 곧 과부가 되었다. 26세에 상해를 경유하여 소주(蘇洲) 버어지니아 여학교에 입학, 4년만에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1913년 3월 미국 캔사스시 티스칼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하였고, 1917년 8월에 미국에서 한국에 파견하는 선교사 8인 중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조선여자교육회 회장인 차미리사는 여성의 현황에 대하여 「현재 해결해야 할 허다한 문제중 제일 큰 문제는 교육인데, 그중에서도 여자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라고 했으며, 1919년부터 칠판 하나만 걸고 야학강습을 시작하였다. 1921년 10월 10일부로 각종 학교 인가를 얻어 학원의 간판을 떼내고 근화여학교로서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자신이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항상 재정이 어려웠다. 그 타개책으로 그녀는 조선여자교육협회 주최로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노정일(盧正一)을 청하여 <세계일주 시찰 강연회>를 열어 그 입장료로 학교 운영비로 사용했다. 이후에도 일류 음악가들에게 음악회를 열어 그 수입을 기부받기도 했고, 남녀 현상토론회나 웅변대회를 열어 입장료로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수단으로 극성스럽게 모아들인 부정기 수입과 유지들의 희사를 받아 학교를 발전시켜 나가서 1934년 2월에 재단법인 근화학원의 늓?록을 마쳤다. 이후 차미리사는 덕성학원 초대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여 활동하였고, 1955년 6월에 임종하였다.

 조선여자청년회(朝鮮女子靑年會)
조선여자청년회(朝鮮女子靑年會)는 여성의 문화향상을 촉진하고 생활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1921년 4월 18일 조직된 여성단체이다. 발기인은 신(申)배알터, 손정규(孫貞圭), 성의경(成義敬), 임영신(任永信), 방무길(方戊吉) 등이며, 신배알터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회원은 16세 이상 40세가 되는 부인까지도 있었는데 25세 부터 35세까지의 가정부인들이 가장 많다. 직업별로는 교원이 학생 대다수를 차지하고, 각 여학교 재학생과 조선여자학원생들이 많다. 1923년 9월부터 조선여자학원을 설립하여 운동복, 와이셔츠 등의 재봉교육을 하였다. 부인들의 세상 견문을 넓혀주기 위하여 조선일보의 후원을 받아 1924년 가을부터 부인견학단을 조직하여 매년 봄 가을로 토요일마다 은행, 신문사, 전기회사, 조폐국 등을 견학하게 하였다. 이 부인견학단은 5,6년간 계속되었는데, 처음에는 200-300명으로 시작하여 가장 많을때에는 2,500여 명을 돌파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부인계몽교육을 위하여 양현여학교를 설립하여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무료 교육을 행하였다.

 부인
≪부인≫은 천도교에서 설립한 개벽사에서 부인들의 교양교육을 목적으로 간행한 월간 여성지로, 1920-1930년대 우리나라 여성사회를 계몽한 중요한 잡지이다. ≪부인≫은 1922년 6월부터 1923년 8월까지 통권 13권을 간행했다. ≪부인≫ 창간호를 준비하기 까지 ≪개벽≫지에 소개 선전된 내용은 생활개선, 가정의 낙원화, 미풍양속의 진작, 자녀교육 등 바람직한 가정생활과 더불어 여성의 취미 향상 등이었다. 창간사에서 ≪부인≫지 주간은「첫째, 고유한 도덕습관풍습을 근거하여 이 시대의 적합한 것을 추장권려(推獎勸勵)하고, 합당치 못한 것은 개량증보하여 신구사상의 충동을 조화하며, 둘째, 노소분쟁의 화해 및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연계로 올바른 자녀교육의 길을 알게 하며, 셋째, 시부모, 남편, 아내, 자녀 각각의 도리를 올바로 알게 하여 가정을 화락으로 이끌어 가며, 넷째, 학교에 가지 못하는 부인들은 반드시 이 잡지를 보아 문명한 사람이 되게 함에 있다」라고 강조했다. ≪부인≫에서 가장 빈번히 다루어진 내용은 창간사에서 강조했던 점들이었다. 즉 가정생활 속에서 서로 아끼고 이해하는 방법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강조이다. 아름다운 가정생활을 이루기 위해 옛날의 현덕한 부인의 사례 및 외국의 좋은 본보기 부인사례 등을 많이 소개하였다. 가정 밖에서의 여성사회를 소개하는 내용은 시내 각 여학교의 기숙사, 조선여자교육협회, 교육계 여성 등을 다루었다. 한편 1923년 8월호(마지막 호)에 <고무직공 동맹파업에 대하여>를 다루고 있다. ≪부인≫은 편집, 집필, 발행진이 거의 모두 남성들이다. 이들은 선각적인 남성이 여성을 계도할 책임을 느껴 이 잡지를 발행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부인≫지의 주 내용은 현모양처 꿈꾸는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토산애용부인회
물산장려운동이 가정부인들의 깨달음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는 자각아래 이도(李道), 박영자(朴英子), 최영아(崔永牙), 이숙(李淑) 등 중류이상의 부인 50여명이 1923년 2월 5일에 발기한 단체이다. 발기인은 가정부인, 창덕궁내인, 기타 각 사회활동 부인들이다. 물산장려운동이 주부의 책임이란 의미에서 회장에는 심정택(沈貞澤, 72세)을, 부회장에는 홍옥경(洪鈺卿, 53세)을 선출하였다. 임원을 이처럼 고령자로 선출한 것은 가정살림의 주관자가 연장자인 주부라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를 이끌어 갈 주도세력이 사회의 중류층에 있다는데서이다. 부인의 애국적 견지의 각성을 촉구하는 순박한 내용은 모든 여성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여 신구여성의 호흥을 받았다. 취지문은「첫째 거미나 개미나 까마귀도 제 살 경륜을 스스로 하는데 우리 조선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의복과 살림살이 모든 것이 남의 것이다. 둘째 이 책임은 첫째 우리 여성에게 있다. 우리 여성들은 나라꼴이야 어찌되던 철따라 능라주단을 몸에 두르고 있다. 셋째 우리(중류부인)가 생산에 직접 참여하고 가정경륜을 할 만한 지식 등은 없으나 우리의 토산은 입고 써야 한다. 넷째 우리여성은 토산을 애용하고 용도를 절약하여 민족을 일으키고 가정을 일으키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동년 3월 4일에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내살림 내것으로>, <자급자족> 등의 토산애용부인회 강연회에는 무려 2,500여명의 청중이 참석하였다. 이런 호응속에서 토산애용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 사업으로 유한책임조합인 토산애용부인상회를 1924년 5월에 개점하였다. 이와같은 여성들에 의한 토산애용운동은 우리의 것, 즉 우리가 만든 것을 우리가 소비해줌으로써 경제적인 독립을 기하고 질박한 생활의 실천에서 남는 여력을 가지고 민족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다는 목적이 내포된 동시에, 부녀생활문화의 자각적인 방향을 알려 주는 것이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1923년 8월 18일에 김활란(金活蘭), 김필례(金弼禮), 유각경(兪珏卿) 등에 의해 창설된 여성기독교단체이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탄생의 발단은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간 개최된 제1회 여자하령회이다. 이 하령회에서 전국 공사립 여학교 대표와 각종 여성단체 대표 약 70명이 초청되었는데 이들 중 65명이 참여하였다. 이들은「새로운 정신을 가지고 조선사회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여자들에게 일층 원기를 주고 자각을 주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마지막 이틀 동안에는 당시의 사회문제이자 여성문제의 현안인 축첩, 이혼, 공창 등의 문제의 토의제안과「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엽합회기성회」를 결성하였다. 기성회 결성과 더불어 지방순회 책임자를 김필례로 선출했는데, 김필례는 이후 일년간 마산, 부산, 대구, 청주, 신천, 평양, 인천, 함흥, 광주 등을 순회하여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기성회 가입을 독려하였다. 그 결과 1923년 8월 18일에 개최된 제2회 하령회에서 5개도시 11개 학교의 대표 70여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가 정식으로 창립 발족되었다. 회장 유각경을 비롯한 기독교 여성계의 대표인 김승라(金承羅), 신의경(辛義卿), 김성실(金誠實), 인복순(印福順), 김영순(金英順 이상 경성), 이선애(李善愛 대구), 채광덕(蔡光德 평양) 등이 임원 및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는 국제적인 최초의 여성단체였던 만큼 한국여성운동이 국제사회로 진출하여 새로운 문화교류를 함으로써 여성운동을 한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활동은 밖으로는 국제적인 문화교류와 친선도모를 행하고 안으로는 수양회, 하령회, 금주금연운동, 생활개선운동, 공창폐지운동, 물산장려운동, 여성지위향상을 위한 각종 사회운동과 아울러 지방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설치, 농촌계몽운동, 이재민구호 등의 사회사업 등 광범위한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여성
≪신여성≫은 천도교에서 설립한 개벽사에서 부인들의 교양교육을 목적으로 간행한 월간 여성지로, 1920-1930년대 우리나라 여성사회를 계몽한 중요한 잡지이다. ≪신여성≫은 통권 13권까지 간행된 ≪부인≫을 1923년 9월부터 고쳐 간행한 것이다. ≪신여성≫은 1923년 9월-1926년 10월까지 발행된 뒤 개벽사의 사정으로 1930년까지 ≪별건곤≫과 통합, 발간하다가 1931년 1월부터 다시 발행되어 1934년까지 지속되었다. 「신여성」이라는 제호는 구시대의 낡은 여성관을 벗어버리고 신천지를 개척하는 신시대의 발전적 여성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1920년대「신여성」이라는 용어 사용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신여성≫은 ≪부인≫에 비해 여학생에 관한 것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여성 필자를 상당히 동원하고 있어 젊은 여성독자를 흡수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또 소설, 수필, 만평, 동요, 예술과 운동계, 여성소식 및 취미 등을 실어 독자에 대한 계몽적 교육의 측면보다는 흥미를 돋우려는 측면이 두드러진다. 이런 경향때문인지 ≪신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기대는 대단하여 1923년 12월부터 1924년 3월까지 결간하게 되자 독자들의 재발행을 독촉했다고 한다. 거의 매호에 여학생을 주목하는 사회의 눈, 즉 여학생들의 행위, 자세 등을 다루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런 내용은 여자 독자뿐만 아니라 남자 독자들에게 더 흥미를 줄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신여성≫은 이러한 편집 제작의 문제를 제기하고 1925년 신년호부터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함으로써 여성지로서의 새로운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흥미위주의 내용을 지양하고 한국의 여성문제를 세계적 안목에서 비추어 보고, 여성의 삶의 질을 높여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가정란도 가정생활을 개선하는 차원에서의 내용들을 다루었으며, 문예란을 확충하고 있어 여성교양을 높이려는 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여성의 지위 및 여성의 권리 등을 심도있게 다룬 논설들도 게제했다. 그러나 1926년 중반 이후부터 다시 흥미위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조신성(趙信聖)
조신성(趙信聖)은 1874년 10월 3일에 평양북도 의주 비현역(批峴驛)에서 무남독녀 유복자로 태어났다. 16세에 결혼을 하였고, 22세에 남편이 아편을 먹고 자살하여 과부가 되었다. 24세에 이화여학교에 입학했고, 이화여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상동교원양성소에 입학했다. 28세에 이화학당의 사감으로 취임했고, 32세때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조신성은 학교 교사들과 함께 88명의 전 이화학생을 인솔하여 대한문 앞에 엎드려 통곡하고, 매일 오후 3시에 학교에서 구국기도회의를 가졌다. 이 활동은 그의 생애에서 최초의 구국운동이었다. 34세에 동경(東京) 횡빈성경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으로 졸업을 몇 달 앞두고 귀국하였다. 대성학교장 차이석(車利錫)은 조신성에게 폐교위기에 처한 진명여학교의 부흥을 간절히 권고하자 그는 스스로 교장에 취임하여 부인회를 먼저 부흥시키고 귀가한 학생들을 다시 모집했다. 이듬해 봄에는 학생수가 80여 명에 달하였다. 처음 40명이던 학생이 1년만에 100여명으로 늘어자 조신성은 교사를 확장하여 2층 양옥을 신축했다. 1918년 국외로 나간 조신성은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에 가담하여, 평안남도 맹산군 선유봉 호랑이굴을 평남지부 거점으로 삼고 영원 덕천 맹산군 등지를 중심으로 항일의열활동을 총지휘, 활동하였다. 1920년 11월 19일 독립군 2명과 함께 영원으로 가던 중 불심검문을 받자 독립군 2명을 도망가게 하고 자신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21일 평양지방법원은 조신성 2년 6개월, 나신택(羅信澤) 나병삼 사형, 이운서(李雲瑞) 예준기(芮俊基) 징역 5년 등 19명에 대해 형 언도를 했다. 1924년 출옥한 이후 교육사업과 사회사업 및 수양회 운동을 추진하였다. 근우회 평양집회 설치 준비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 1월 30일 지회 설립대회를 개최하였다. 거기서 조신성은 정치부 위원을 맡았다. 평양지부는 지도급 구성원이 철저하게 기도교인 일색이며 민족주의운동자들이었다. 1930년 근우회 전국대회에서 조신성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1934년 4월호 ≪신가정(新家庭)≫에 조신성론을 쓴 오기영은 ‘그는 오로지 그의 전 생애를 조선에 바쳣습니다. 아마 그가 얼마후에 세상을 떠날는지 모르지마는 그는 숨이 넘는 그 마지막까지 조선을 생각할 뿐 그가 두고 가는 친척, 자손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조신성의 일면을 서술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조신성은 여성교육운동과 항일의열활동, 민족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가이다. 해방이후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으로 재임하다가 1948년 대한부인회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52년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양로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조선여자흥학회(朝鮮女子興學會)
1915년 4월 동경유학생이었던 나혜석(羅蕙錫), 김정애(金貞愛)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든 친목단체였던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고문 田榮澤, 李光洙)를 1920년 3월 이를 조선여자흥학회(朝鮮女子興學會)라고 개칭하였다.(일명 학흥회) 주요 활동 회원은 유영준(劉英俊), 김(金)마리아, 현덕신(玄德信), 황애덕(黃愛德), 정칠성(丁七星), 박승호(朴承浩), 이현경(李賢卿), 김선(金善), 박순천(朴順天), 임효정(林孝貞), 이숙종(李淑鍾), 한소제(韓小濟), 황신덕(黃信德) 등이다. 이들은 방학 동안에 귀성하여 한창재(韓昌材) 등을 여자선전단으로 파견하여 경성, 평양, 부산, 마산, 대구 등을 돌면서 순회강연을 통해 신사상, 신지식 보급에 노력하였다. 이 회는 1927년 근우회 동경지부 결성으로 자연 소멸하였다. 기관지로 ≪여자계≫를 발간하였다.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
1922년 4월 1일에 정종명(鄭鍾鳴)의 주동으로 100여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다.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는 주로 여자고학생들을 위해 설립되었다. 1922년 10월 14일 종로청년회관에서 이선애(李善愛)의 <가치있는 생활>, 권경라(權慶羅)의 <현사회와 조선여자>라는 주제로 여자강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단체는 운영문제를 해결하고자 1924년 2월에 서북지방 순회강연을 가졌는데 특히 3월 6일 평양 천도교회당에서의 강연회에는 1,000여 명의 청중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연사로 나선 구옥산(具玉山)은 <여자의 해방과 경제조직>, 배혁수(裵赫秀)는 <여자고학생 상조회의 상황>을 설명하여 기부금이 답지하였고, 회장 정종명은 <우리 여자의 살림살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여 이 회에 대한 동정과 이해를 높였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이 회는 1,600여원의 동정금이 들어와 운영비에 쓰이게 되었고, 안국동에 시가 2,000원의 기숙사를 마련하여 재봉부를 두어 빈한한 여학생들로 하여금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였다. 수시로 여성계몽을 위한 전국순회강연을 개최하였다. 그 후에도 지방순회강연을 가져 여성들의 신지식 보급에 공헌하였다. 이 단체는 1924년 11월에 사회주의단체인 북풍회에 규합되었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2년 6월 기독교계의 여성지도자 김활란(金活蘭), 김필례(金畢禮), 유각경(兪珏卿)이 주동이 되어 김성실(金誠實), 김합나(金合拿), 신의경(辛義卿) 등이 동조하고 신흥우(辛興雨), 맥루런(Mcluren)부인 등이 협조하여 민족주의사상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된 단체이다. 회원으로 하여금 기독교정신을 함양케하고, 지덕체의 품성계발을 목적으로 한 기독교 바탕의 사회문화단체이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는 교회가 교회밖에서 사회의 기독교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사회복지건설에 이바지하는 점이 다른 사회단체와 비교해서 특색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의 시초는 1922년 6월 12일부터 22일까지 10일간 김활란(金活蘭), 김필례(金畢禮)가 전국에서 여성지도자 60여명을 여자성경학원에 초청, 하령회를 가졌다. 이들은 모두 15개 여성단체대표들과 개인자격으로 출석한 지도자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학교교사, 일반유지, 전도부인, 기독교신자 등 각계 각층의 여성이 모였는데, 이때 YWCA조직을 협의하자 만장일치로 조직할 것을 가결하였다. 이때 선출된 초대임원은 회장 방신영을 비롯한 기독교 여성계의 대표인 홍(洪)에스터(부회장), 김필례(총무), 김합나, 신의경(서기), 유각경, 박양무, 김활란 등이 임원 및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농촌계몽운동, 물산장려운동, 금연, 금주, 공창폐지 등의 활동과 오락 금지운동을 강령으로 제시하였다.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절제생활은 우리의 힘이라는 모토를 내세운 유각경(兪珏卿), 최활란(崔活蘭), 홍(洪)애스터 등이 주동이 되고, 김로득(金路得), 손몌레(孫袂禮), 이효덕(李孝德), 손매리(孫梅理), 홍은경(洪恩卿), 남궁합나(南宮合拿) 등이 동조하여 1923년 9월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朝鮮基督敎女子節制會)가 발족하였다. 처음에는 협성여자신학교 안에 회관을 두었다가, 설립 2년만에 독립된 회관을 설치했다. 절제회는 초기에는 주동이 된 3사람이 회장직을 돌려 가면서 맡았다. 여성의 지위와 권익을 옹호하며 나라를 좀먹는 술과 담배, 매소, 매음 등 불결한 생활의 정화 등 사회풍토개선과 물자절약, 국산애용을 목적으로 전국에 지부를 두어 활동하는 기독여성들의 단체로서, 1937년 세계기독교절제연합회에 가입하였다. 특히 금연, 금주, 물자절약운동은 일제에 착취당하던 빈약한 한국인에게 각성을 높이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절제회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와 같이 범여성운동의 성격을 지니지 못했으나 민족의 살길로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그 세력을 착실히 성장시켰다. 설립 3주년에 회원이 3천, 지회수가 무려 60여 개에 달했다.

 조선여성해방동맹(女性解放同盟)
1925년 1월 17일에 여성동우회의 중도파이면서 또한 친서울청년회계인 김현제(金賢濟), 김정숙(金貞淑), 최정숙(崔貞淑), 최화장(崔花將), 이도(李道) 등이 대한독립애국부인회 창립자의 한사람인 이정숙(李貞淑)을 끌어 들여 조선여성해방동맹(女性解放同盟)을 발기하였다. 여성해방동맹은 기존의 여성운동이 신여성에 한정되었던 것에 반하여 신여성, 구여성을 망라한 여성대중조직을 표방하여 신구여성, 각 계급을 망라하여 협동적으로 운동을 할 것과 구식부인의 자각과 교양에 힘쓸 것을 내걸었다. 여성해방동맹은 비사회주의계의 여성들을 포섭하여 여성동우회의 약점인 대중성의 결여를 타개하고 신구여성층에 폭넓게 접근하려는 구도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하나, 여성해방동맹은 발기총회만 마친 채 1925년 12월에 가서야 간판을 내거는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북풍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직된 사회주의여성단체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
서울파의 조선여성해방동맹 창립은 북풍파에 대한 도전이 되어, 북풍파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주세죽(朱世竹), 허정숙(許貞淑), 김필순(金弼順) 등 30여 명이 북풍계 여성사상단체로서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1925년 1월 21일 창립하였다. 대중조직을 발동시키는 핵심체인 여자청년조직으로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구상하였다. 경성여자청년동맹은「첫째, 무산계급 여자청년의 투쟁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함 둘째, 무산계급 여자청년의 단결력과 상부상조의 조직력으로 여성의 해방을 기하고 당면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이라는 강령을 내세웠다. 국제부인데이, 국제청년데이 기념간담회, 노동부인 위안음악회 개최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공장방문대 조직, 무산아동학원 설립을 계획하였다. 초대집행위원은 박정덕(朴貞德), 정달악(鄭達岳), 김필순(金弼順), 배혁수(裵赫秀), 김조이(金祚伊), 주세죽(朱世竹), 허정숙(許貞淑)이다.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
1924년 봄에 창립한 여성동우회 내부에는 북풍파의 세력에 대한 서울파의 박원희(朴元熙), 김보준(金甫準) 등의 반대세력이 혼합하였는데, 북풍파는 그 압력으로써 서울파를 구축하여 동우회를 자파 수중에 넣었을 뿐 아니라, 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서울파에 도전했다. 그리고 드디어 박원희(朴元熙), 김보준(金甫準) 등을 여성동우회에서 탈퇴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 때문에 1925년 2월 21일에 탈퇴한 30여명의 멤버는 대중조직을 발동시키는 핵심체인 여자청년조직으로서 서울파의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여자청년동맹에 대항한 것이다. 경성여자청년회는「첫째, 아등(我等)은 부인의 독립과 자유를 확보하며 모성보호와 사회상에 재한 남녀지위의 평등인 사회제도의 실현을 기함, 둘째, 아등(我等)은 부인해방에 관한 사회과학상의 교의를 분명케 하며 차(此)를 보급함을 도(圖)함」이라는 강령을 내걸면서 국제부인데이 강연회를 제외하고는 부인직업, 연애, 자유결혼 등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경성여자청년동맹 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초대 집행위원은 박원희(朴元熙), 김보준(金甫準), 문정애(文貞愛), 박춘자(朴春子), 박숙자(朴淑子), 이정숙(李貞淑), 김정숙(金貞淑)이다.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는 1924년 5월 10일에 정종명(鄭鍾鳴), 허정숙(許貞淑), 정칠성(丁七星), 박원희(朴元熙) 등 30여인의 사회주의 여성들이 발기인이 되어 「부인의 해방」을 기치로 내걸고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서울청년회, 화요회, 북풍회, ML당 등 4개 공산당계열 단체 등과 긴밀한 유대를 가진 단체이다. 같은 해 5월 23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선언문을 통해 「여자는 가정, 임금, 성의 노예일 뿐이며, 횡포한 남성들이 여성에게 주는 보수는 교육을 거절하고 모성을 파괴할 뿐이다.....우리도 살아야겠다. 우리도 잃었던 온갖 우리의 것을 찾아야겠다」라고 한국여성이 이중 노예상태에 있음을 지적하고, 여성의 인간적 평등권을 주장하였다. 동우회는「첫째 본회는 사회진화법칙에 의하여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에 입(立)할 일꾼의 훈련과 교양을 기함, 둘째 본회는 조선여성 해방운동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여성동우회는 각 지방에 40여개의 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문맹퇴치, 농촌계몽, 봉건사상타도, 농촌에 탁아소 설치 등과 순회강연, 토론, 교양강좌를 가질 뿐 아니라, 신문, 잡지를 통하여 여론을 환기시키도 하였다. 또한 여성동우회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입각하여 무산여성의 해방을 내걸고 조직된 최초의 여성단체인 만큼 여성노동자층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공장방문대의 조직, 노동부인 위안음악회를 열고 여성노동야학을 계획하였으며, 지역 노동총동맹의 여자부 확대사업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연구반을 조직해 자체 이론학습을 해 나가면서 조선여성의 현실을 알고자 각 계급, 계층의 여성에 관한 통계작성을 계획했고, 여성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기 위해 여성직업조합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동우회는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크게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국제무산데이 기념강연은 매년 금지당하였고 1926년 6.10만세사건 때에도 정종명, 조원숙(趙元淑), 주세죽(朱世竹), 심은숙(沈恩淑) 등이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여성동우회는 무산여성을 운동의 대상으로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원은 학생, 전문직업 여성이 주였으며 회원의 가입도 회원 2인 이상의 보천과 집행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입회케 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진적인 사회주의 여성들이 모인 사상단체적 성격이 더 강하였다. 이 단체는 한국여성단체활동 중 저소득여성의 노동자, 서민의 인권옹호는 물론 지도자들이 뚜렷한 여권의식으로 움직인 최초의 여성단체라 할 수 있다. 1927년 좌우합작의 여성단체통합을 시도, 보다 광범위한 조직운동을 전개하려는 근우회가 새로 조직되어 여성동우회는 해체되었다.

 안경신(安敬信)
안경신(安敬信 1887-?)은 20대의 청상 과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만주에서 활약하다가 국내에 숨어들어와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여장부였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인 그는 기독교 신자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를 2년 수료하였다. 1919년 평양으로 가서 서문동에 군중이 다수 집합해 있음을 보고 그들을 선동하여 독립만세를 절규케 하였다. 이로 인해 20여일 구류처분을 받았다. 평양의 기독교 신자 오신도(吳信道), 안정석(安貞錫) 등과 대한 애국부인회를 조직한 뒤 각 군에 지회를 설치하고 그는 강서지부의 재무원이 되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경 증산지회에서 상해 임시정부 연락원에서 자금 전달한 것이 경찰에 탐지되어 애국부인회 연합본부와 각 지회의 간부들에게 검거 손길이 뻗쳤다. 검거를 피해 안경신은 김행일(金行一)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대한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원 황병무(黃丙武)가 장덕진(張德震), 김창수(金昌洙), 문현철(文賢喆)과 안경신에게 「미국의원단이 동양시찰을 위해 한국에도 들린다고 하니 그대들은 지금 평양에 가서 큰 일을 하면 미국의원들이 한국인의 독립열의를 알 것이니 그렇게 되면 동정얻기가 쉽지 않겠소」하면서 폭탄과 권총 등을 주니 안경신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7월에 동지와 같이 상해를 출발 안주에 이르렀다. 동년 8월 3일 평안남도 신축 청사 안에 있는 제3부에 폭탄을 던지니 장벽은 폭격을 받아 파괴되고, 경관 2명이 폭살을 당했으며, 관서일대가 크게 격동하였다. 안경신은 일행과 헤어져서 8월에는 대한애국부인회 증산지회 재무부장 박치은(朴致恩)집에 피신하였다. 그후 안경신은 평양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평양지점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3월 함남 이원군 최용주(崔龍周)집에서 숨어있다가 대동경찰서 순사에게 체포되어 평양 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안경신은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여 10년으로 감형되었다. 안경신은 6, 7년간 복역하다가 가출옥하였다. 안경신은 여성으로서 투탄하여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내수단(內修團)
천도교는 내수도라고 하여 여성들의 종교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천도교의 중요한 종교의례라고 할 수 있는 청수 올리기와 성미뜨기는 여성의 일로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천도교에서는 여성들에게 교리와 의례를 가르칠 여성들을 양성하여 지방으로 순회시켰고 이러한 전도사업은 여성들의 문맹을 퇴치하는 부수적인 효과를 낳기도 했다. 천도교 내수단(內修團)은 주옥경(朱鈺卿), 손광화(孫廣嬅)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4월 5일 발회식을 거행하였다. 내수단이라는 명칭은 최시형이 지은 ≪내수도문≫에서 유래한 것이다. 내수도란 천도교에서 부녀자를 총칭해서 일컫는 말로서 특히 기혼여성이나 주부라는 개념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주로 기혼 여성 내지는 청장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체였다. 내수단은 그 목적을 「천도교의 종지에 들어 맞는 새 세상을 만들기」에 두고 있었다. 내수단의 강령에는 「단결을 굳건히 하여 일반여자의 지위를 향상케 함」이라는 조항이 들어 있으나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없는 것으로 미루어 천도교의 세를 확장하기 위한 여성조직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25년 8월에 교단이 신파와 민족좌파의 노선을 걷는 구파로 나뉘자, 구파측 여성교인들은 1927년 6월에 내수단에서 나와 천도교여성동맹을 조직하였고, 신파측은 내수단이라는 이름 그대로 존속시켜 사용하였다. 내수단은 1928년 4월 4일에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흰옷을 폐지하고 색복 입기 및 단추달기운동을 전개함과 아울러 여성들의 머리를 쪽찌도록 권장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의생활개선운동은 ≪시대일보≫ 1924년 10월 5일자에서「평양 천도교회는 수천명의 교도가 일제히 검은 옷을 입기로 작정하는 동시에 동 교회 여자로 조직된 내수단 단원 70여명을 위시하여 여자들은 전부 낭자를 쪽찌기로 하였는데」라고 했듯이, 창단 당시부터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여성계몽운동은 전국적으로 800여곳의 교리강습소를 운영하였고, 천도교 여자청년회라든가 청년여자회에서도 부녀자들의 계몽을 위해 많은 강습을 실시하였다. 내수단 본부는 부인야학을 개강하여 3개월 동안 수강생에게 교리, 조선어, 산술, 일어, 일반상식을 가르쳤다. 1929년에는 창단 이래 최대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아동보육 대강연회라고 이름 붙인 이 강연회 매일 저녁 8시부터 어린이를 올바르게 키울수 있도록 각계 전문가를 초빙하여 개최하였다. 어린이 보육법, 어린이 심리생활, 어린이 보육법, 어린이가 크는 여러시기, 소아병에 대한 가정지식, 꾸짖는 법, 칭찬하는 법 등이다. 1920년대 말 일제의 검거로 구파의 여성들이 많이 잡혀가서 구파의 세력이 약해지고 천도교 전체의 통합움직임으로 1931년에 내수단과 여성동맹은 천도교내성단으로 합쳐졌다. 그 뒤에 얼마 안 있어 교단이 다시 신, 구파로 분열하자 구파는 내성단에서 일탈하여 천도교부인회를 만들었다가 1939년에 천도교내수회로 통합되었다. 천도교 여성단체의 두 파는 활동에 있어서도 신파의 내수단은 단원교양에 비중을 둔 계몽활동과 조직확장에 주력하는 등 교단내의 활동에 치중한 반면 구파인 여성동맹은 근우회를 지지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지양했다.

 의복개량론
신여성들은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복식에 있어서도 개혁을 주장하고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된다. 우선, 김원주(金元周)는 <부인의복개량에 대하여>에서 의복의 3대 조건으로 위생, 예의, 자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조선옷은 예의 맞고 아름다우나 생리적으로 인간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주장한다. 흉부압박 때문에 늑막염과 호흡기병에 걸릴 우려가 있으므로 어깨옷을 지 입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전통을 지키되 세탁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흰옷을 피할 것을 등 실용성 위주의 의복개량에 치우치고 있다. 반면 나혜석(羅蕙錫)은 대체적으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면에는 찬성하나 김원주가 주장하는 검소, 질박함에 반박하고 있다. 간편한 옷으로는 서양옷이 있으니 굳이 우리옷을 개량하여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상실시키지 말자든가, 흰색은 세탁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니 금하더라도 지금의 여학생복처럼 검은색 일색으로 하지 말고 전통의 다양한 색을 응용할 것을 주장했다. 의복개량은 일단의 생활의 편리함, 건강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김원주와 나혜석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신여성들에게 어느 정도 보편화된 양상이었다.

 단발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것은 단발의 유행이었다. 1920년대에 일부에서 유행했던 단발형의 헤어 스타일이 점차 늘어나 단발미인, 모단걸(modern girl)이라는 신용어가 나올 만큼 단발이 오래 지속되었다. 신여성 중에서 최초로 단발한 소위 「단발랑 斷髮娘」의 효시는 기생출신으로 나중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한 강향란(姜香蘭)이었다. 그후 여자배우 이월화(李月華), 김명순(金明淳)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이 단발한 것은 기생으로서 정절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사회주의자로서 구제도에 대항하기 위해 허정숙(許貞淑)과 주세죽(朱世竹)은 단발을 감행했다. 이들은 투사적인 의지에서 비롯되어서 전통에 대한 반항으로 단발을 감행했다. 여성의 단발은 남성들에 의해 매우 비판적으로 받아졌음에도 <미스코리아여 단발하십시오>에서「보브(단발의 일종)는 노라로서 대표되는 여성의 가두진출과 해방의 최고의 상징입니다. 현대를 3S(스포츠, 스피드, 쎈쓰)라고 부른 일이 있었지만 나는 차라리 우리들의 세계의 첫 삼십년은 단발시대라고 부르렵니다. 단발의 여러 모양은 또한 단순과 직선을 사랑하는 근대감각의 세련된 표현이기도 합니다......,지금 당신이 단발하였다고 하는 것은 몇천년 동안 당신이 얽매여 있던 「하렘」에 아주 작별을 고하고 푸른 하늘 아래 나왔다는 표적입니다」라고 사회적 의미를 지적하고 있다. 투사적 의지이건 전통에 대한 반발이건 정절의 증명이건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서건, 단발은 당시 여성들에게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도전이요, 반항이었다.

 조선간호부협회
김금옥(金錦玉), 한신광(韓晨光), 정종명(鄭鍾鳴) 등 8명의 발기로 조선간호부협회를 발기하여 1924년 1월 26일 하오 7시 중앙예배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발기인들은「우리 조선간호부는 이때까지 병원의 고용사리를 하는 외에 아무것도 사회를 위하여는 일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천직을 하기 위하여 우리끼리 상당한 기관을 만들어 가지고 사회적으로 활동할 필요가 있다하여 이번에 간호부협회를 발기한 것이 올시다. 우리는 비록 크리미야의 여신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본받아 조금이라도 사회를 위하여 일하고자 합니다. 이번 모임은 처음되는 일이라 경향을 물론하고 간호부의 직책을 가진 사람은 모두 참석할 의무가 있으며 지방에서 참석하기 어려운 경우에라도 이 회에 입회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조직한 목적을 말하였다. 조선간호부협회는 현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으로 간호원 상호간의 친목과 간호원의 자질, 기술 및 지위향상과 권익 증진을 도모하여 조성된 단체였다.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는 직업여성단체로 1949년 국제간호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이것은 직업여성단체의 효시를 이룬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조선간호부협회의 창립일을 1923년 5월 12일로 보았는데, 1924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는 동년 1월 26일로 보도하였다.

 결백단(潔白團)
결백단(潔白團)은 평양 숭의여학교 1920년도 졸업생 중심으로 선배와 졸업생 중 장로교계에 속하는 동창을 규합하여 조직했다. 조직 명칭의 동기는 프랑스 크리미아 전쟁 당시 이와같은 이름의 여자단체가 조직되어 큰 활약을 한 바 있어 그 이름을 본딴 것이다. 결백단도 송죽회와 같은 비밀단체였다. 주 활동은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이었고 이 비밀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사업과 같은 기독교운동과 금연, 금주운동 및 여권운동과 같은 사회운동을 표면에 내세웠다. 그들의 활동은 치밀하고 활발하였으므로 1920년 3월 12일 결백단 주최로 장대현 교회에서 개최한 전도대회에는 1,000여명의 인원이 모였고 여기서 1,000여원의 의연금을 수금할 수 있었다.

 학생구국단
학생구국단은 휘문학교 학생 박선태(朴善泰) 등이 중심이 되어 수원에서 조직한 비밀단체이다. 박선태는 만세운동이래 조선독립을 결행할 믿을 수 있는 동지를 규합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그는 동지 이선상(李銑祥)과 기타 유력한 독립운동가 중진들과 회합한 결과, 중국 상해에 있는 김보윤(金甫潤)이라는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과 기맥이 통하여 수원에서 비밀리에 이를 조직한 것이다. 1920년 6월 20일 경 수원에 있는 차인재(車仁載)라는 여자의 주선을 얻어 수원교회의 학생 여신도 및 교원 여신도 임효정(林孝貞), 이선상, 최문순(崔文順) 등을 규합하고 남자 2명과 더불어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임원진을 구성한 후 독립운동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예수교 계통의 학교인 사립 수원 삼일학교에 비밀히 모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들일 방법을 협의하였다. 즉 이들의 주활동도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이었다. 동단체의 대표로 이선경(李善卿)를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하여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자 하여 박선태를 5월에 파견하였다. 이해 9월경부터 이듬해 7월까지 상해에서 송부한 독립신문, 애국가, 경고문 등을 비밀히 전달받아 이종상(李鍾祥)과 함께 이를 국내에 배포하면서 국민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에도 힘썼다.

 제2차 개정교육령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의 정책전환이 불가피해서 3.1운동이후 한국에 대한 교육정책을 다소 변경하였다. 즉 일제는 1921년 1월에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일본본토의 교육제도에 준거하여 학제(學制)의 개혁을 심의케 하드니, 1922년 2월에 교육령을 전면 개정하여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2차개정의 입법취지로 차별정책의 완화, 언어정책의 완화, 실과교육의 강화, 제한된 고등교육기회의 부여 등에 있음을 강조하였으나 이런 입법취지는 명목뿐인 유화책에 불과했다. 2차 교육령에 나타난 중등교육정책은, 첫째,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을 국어(일어) 상용자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로 어구를 수정하여 표면상의 이원성 극복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동화의 보다 심화된 형태로서 황민화교육의 진전일 뿐이었다. 둘째, 이 교육령의 개정으로 조선인도 사범교육,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대학은 조선인에게는 좁은 문이었고 더욱 여자에게는 개방되지 않아 공부를 원하는 여학생은 거의 일본유학을 떠났다. 다만 1925년 이화학당이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되어 그나마 신여성이 많이 나오게 되어 새로운 여성상을 배출하였다. 셋째, 학제의 변경은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고,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3년에서 4년(또는 5년)으로 연장하였다. 교과목은 일본중학교에 준하여 외국어를 가하여, 종래의 이과를 박물, 물리 및 화학으로 분리시켰으며, 실업 및 법제 경제를 나누어 실업, 법제 및 경제로 고치고 습자와 수공을 삭제하였다. 여자고등보통학교의 경우 우리말을 필수과로 하고, 한문을 수의과로 하였으나 조선역사나 지리의 수업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잡종 및 각종학교로 묶어 두었던 여학교들을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켜주었다. 그리하여 숙명, 진명, 이화, 호수돈, 배화, 정신, 동덕, 루씨, 영생, 정의여학교 등이 모두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조선여자강습회(朝鮮女子講習會)
서울 제동에 있었던 조선여자강습회는 1923년 9월 가정부인들과 들어갈 학교가 적당하지 않아 방황하는 여학생들에게 신지식을 보급할 목적으로 강좌를 열었다. 1924년 5월 12일부터 6월 5일까지 지방에 있는 부인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김현제(金賢濟), 차재정(車載貞), 한은숙(韓殷淑), 이(李)리다 등의 연사와 음악무도대를 이끌고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영난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었는데 유지들이 동년 8월 8일 서태관에서 회합을 갖고 조선여자강습회후원회를 만들어 그 회의 사업과 목적수행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후원회에 참여한 중요인사는 최규동(崔奎東), 조동식(趙東植), 고원훈(高元勳), 허헌(許憲), 강상희(姜相熙), 유성제(兪星濟), 임경재(任瓊宰), 정대현(鄭大鉉), 현상윤(玄相允), 이상호(李祥昊), 김용채(金溶埰) 등이었다.

 인형의 집
나혜석(羅蕙錫)은 1920년대의 조선의 신여성을 대표하는 여성계의 선구자요, 선각자인 여류 문학자였으며, 무엇보다도 당대를 너무 앞서간 희생화였다.
1925년 나혜석의 시 <노라>를 봄으로 그 일단을 엿 볼 수 있다.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이었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다고
높은 장벽(牆壁)을 헐고
깊은 규문(閨門)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비쳤네.

우리는 인형의 집하면 곧 <노라>를 연상한다. <노라>의 여권선언은 안락한 가정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생을 개척해 가려했던 것이다. 나혜석의 시 <노라>에서도 남성의 지배적 사회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몸부림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즉 그는 여성은 한낱 독립된 개체이며, 성의 유희물이나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화전도대
교육을 희망하면서도 이미 학령기를 초과한 부녀자들의 왕성한 교육열과, 이미 교육받은 여성들의 열렬한 계몽주의적 사상이 서로 결합하여 1920년대 이래 강습회, 야학, 전도활동 등의 붐을 일으키게 된다. 초기의 강습회나 전도활동은 그 본래의 사명 외에 민족정신의 함양이라는 또 하나의 사명을 공통으로 갖는다. 이리하여 당시 정규학교의 교육보다 오히려 효과적으로 애국적인 교육의 실천을 한 것이 이들 학교외의 교육기관이었다. 1920년대 전도대의 활동 중 가장 사회의 주목을 끈 것은 당시 이화학당의 교사였던 김활란(金活蘭), 홍에스터, 윤성덕(尹聖德) 등의 7인전도대였다. 1920년 6월 21일 Y.M.C.A에서 구령회를 가진 다음 6월 23일 평양, 신의주, 진남포, 해중 등 각 도회지를 순회 강연하며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과 여성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강연회에는 늘 일본경찰의 감시가 뒤쫓았고, 드디어 6월 27일의 강연회에서는 경찰의 제지로 강연이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이때의 사실은 당시 동아일보 지상에 크게 보도되어 사회의 물의를 자아냈다. 즉 「이화전도대 전도연설 금지, 안주에서 김활란양의 말에 성경구절이 위험하다 하여」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전도활동이 곧 애국운동과 직결된 것이었음을 입증한다. 그 이외의 지방에서도 경찰의 간섭이 있었지만 7월 20일 전도를 마치고 경성에 돌아왔다.

 김명순(金明淳)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상 여성으로서 작품을 처음 발표한 사람은 최남선(崔南善)이 발간하던 1917년 11월 ≪청춘≫지 현상모집작품에 입선된 <의심의 소녀>의 작가 탄실(彈實) 김명순(金明淳)이다. 김명순은 1896년 평양군 융덕면에서 김의경(金義庚 : 평남도참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소실인데다, 그의 아버지도 김명순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실부모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진명, 이화를 거쳐서 동경여자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학교를 마치지 못하였다. 이러던 중 18세에 청춘지 현상모집소설에 <의심의 소녀>가 입선되었다. 김명순이 <의심의 소녀>를 발표하던 1917년 전후의 우리나라 문학계의 형세를 살펴보면, 1906년 신소설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종합지 ≪소년≫이 발간되어, 거기에다 최남선이 신체시를 발표했으며, 1914년 역시 월간 종합지 ≪청춘≫이 창간되어 1917년에서부터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소설이 실리었다. 1918년에 들어서야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지 ≪태서문예신보≫가 발간되어 서구의 문학을 번역 소개하였고, 1919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순문학운동의 동인지로서 ≪창조≫가 창간되었다. 이렇게 문학사적으로 고찰할 때 1917년은 신소설이 구축되면서 이광수의 초기소설이 근대적인 면모로 등장했을 때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김명순은 최초의 여류문인일 뿐 아니라 한국현대문학사의 초창기 인물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상 여류의 처음 작품인 <의심의 소녀>는, 첫째 구사회를 비판한 신여성의 제1성이며, 둘째 3.1운동 전후의 여성의 사회적 표랑을 표현했으며, 셋째 신여성의 자화상이었다는 점에서 사회문제로서도 여권사상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체험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써 선악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시하여 자기의 체험을 리얼리틱하게 보여준 것은 한국현대소설의 전통이 여기서부터 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현대소설의 계보를, 또는 주류를 김동인에서부터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시정되어야 하며, 근대소설과 리얼리즘의 소설과 그리고 인생문제 제시소설은 김명순의 소설에서 부터이다. 김명순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시기는 주로 1920년에서부터 1927년 사이였으며, 그는 시, 소설을 위시하여 희곡 소품도 발표했으며, 그리고 외국작품을 번역하기도 하면서 많은 작품을 지상에 실었다. 1920년 7월 ≪창조≫지 7호부터 동인이 되어 <조로의 화몽> 등의 시, 소설, 수필을 발표하고 1925년에는 한국최초의 여류시집 ≪생명의 과실≫을 출간한다. 이밖에도 <칠면조> <꿈묻는 날 밤> 등의 단편을 발표했고 최학송(崔펼鶴松), 김명순 등 6명이 연작한 <남은 꿈>이 있다. 폐허의 동인이 되어 있었던가 하면 매일신보 기자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배우이기도 했다. 김명순은 우리 현대문학사의 선구적인 문학인이며,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문학이 싹틀 때 태어나, 여성을 용납지 않는 사회에서 남성들 틈에서 끼어 자유주의자로서 활약한 첫 번째 여성이었다.

 김원주(金元周)
1896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김원주(金元周)는 어린 시절 무척 어렵게 자라났다. 가난한 살림 탓에 어머니마저 벌이를 나가고 나면 철도 들지 않은 어린 몸으로 갓난 동생들을 달래가며 저녁 밥까지 지어야 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배우고 싶은 남다른 열의로 9세때 구세(救世)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11세엔 진남포 삼숭(三崇)보통여학교에 입학하여 정식교육을 받았다.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1916년 21세에 이화학당 대학 예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동대문 부인병원 간호원 강습을 수료하고 다시 일본에 유학하여 영어 공부를 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이화학(理化學)교수로 있던 이노익(李魯翊)과 결혼하여 남편 및 삘링스(B.W.Billings)부인의 재정 후원으로 1920년 3월 ≪신여자≫를 발간하고 주간이 되었다. 이때부터 시와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고, 동년 7월에는 ≪폐허≫가 창간되자 나혜석과 더불어 폐허의 동인이 되었다. 김원주는 1920년대 초기의 여성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해방의 선구적 역할을 가장 진취적으로 수행한 대표적 여성이다. 그는 1921년에는 ≪신민공론≫, ≪폐허≫의 동인으로도 활약하면서 ≪폐허≫지(1921년 1월)에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는 글을 싣고 남성에 공개적으로 도전했었다. 김원주는 또 <사랑>, <순애의 죽음>, <자각>, <단장> 등 여러 단편을 발표했는데, 특히 <사랑>은 남성전제의 풍토를 떨치고 나온 「해방된 여자의 정조론」을 취급하여 신문학 초창기에 나온 여류 중에서도 가장 과감한 투쟁을 하였다. 김원주는 <사랑>을 통해서 주장한 바는 「서로 사랑하면 그 뿐이다. 암만의 남자, 혹은 암만의 여자와 곤계를 했건 과거가 무슨 소용이냐? 현재 사랑하면 그로써 족하고 또 충분하다」,즉 육체적 정조론에 대해서 정신적 신정조론을 주장했다. <자각>은 여성의 자각과 해방을 강조한 소설이다. 여기에서도 남자의 전제에서 벗어나고, 자식과의 맺어진 정에서도 벗어나 완전히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속세를 떠나 출가의 몸이 되어 수덕사에서 불도에 귀의한지 수십년만인 1971년 이름 봄에 하직하였다. 저서로는 ≪청춘을 불사르고≫가 있다.

 이월화(李月華)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세」가 상영된 것은 1923년 4월 9일이었다. 그전에도 다른나라에서 들어온 활동사진과 일제의 소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19년 상연된 연쇄극 「의리적구투」 등이 있었으나 한국인의 손으로 영화다운 영화가 만들어지기는 「월하의 맹세」가 처음이었다. 「월하의 맹세」는 조선총독부가 자금을 댄 저축계몽영화이긴 했으나 당시의 연쇄극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였다는 점과 감독과 주연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무성영화시대의 붐을 열어준 획기적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한국 신극운동의 개척자 윤백남(尹白南)이 감독하고 이월화(李月華) 등 당시 쟁쟁한 연극계 인사가 출연했는데 사진이 팔딱팔딱 움직인다고 「팔딱사진」이라던 무성영화이긴 했지만 경성 호텔에서 열린 시사회에는 100여명이 초대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영화의 내용은 어느 시골의 한청년이 같은 마을의 아름다운 처녀를 사랑했으나, 청년은 술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다 빚에 몰려 비관하고 있는데 처녀가 나타나서 저금한 큰 돈을 내놓고 위로한다는 내용으로, 청년은 크게 감동하여 달빛 아래서 맹세하고 화투목을 쥐던 손에 호미와 낫을 쥐고 부지런한 농군이 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당시 민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아 특히 여주인공 이월화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월화(본명 李貞淑)는 서울출신으로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중퇴, 1919년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에 몸을 담고 있다가 윤백남이 민중극단을 조직하자 거기서 신파극에 출현했다. 이월화의 전성기는 윤백남 등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해 1923년 창설한 토월회에 가입해서 무대에 서면서부터였다 . 토월회의 제1회 공연은 버나드 쇼 원작의 <오로라>인데 이때 주연은 이월화와 박승희(朴勝喜)였다. 그런데 공연도중 이월화가 갑자기 대사를 잊어벼려 아무렇게나 말하여 공연이 중단되자 박승희는 입장료를 물려주어 부채를 졌다고 한다. 토월회의 제2회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톨스토이 원작 <부활>을 1923년 9월 18일 조선극장에서 막을 올렸는데 캬츄샤로 분한 이월화는 천재적인 연극소질을 보여 관중의 큰 인기를 끌고 관객을 사로잡아 「예원의 여왕」이라고 격찬을 받았다. 이월화는 그 해 「월하의 맹세」의 맹세에 주연으로 나간 후 「해의 비곡」「물빠진 황소」(1927년), 「지나해의 비밀」(1928년) 등 몇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28년 이후 이월화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박승희를 연모하여 방황하다가 일본에서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박화성(朴花城)
박화성(朴花城)은 1904년 전남에서 출생하여 정명여고를 나와 7년간의 교원 생활을 거쳐 일본여대 영문과 3년을 수료하였다. 박화성은 교편을 잡고 있던 1925년에 추천으로 ≪조선문단≫지에 <추석전야>를 발표하여 문학계에 첫발을 디뎠다. 1930년에 장편 ≪백화≫를 동아일보 지상에다 연재하는 한편 ≪동광≫지에 <하수도공사>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다. 어느 누구보다도 사상성이 강한 작가로서 신경향파에 속할 수 있는 작가였지만 카프 맹원은 아니었다. 그가 추구한 신경향파 문학의 특색을 백철은「다른 제재에서 볼때에 그것은 하나의 빈궁문학이다. 그 빈궁이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고 극도의 빈궁을 말한 것이니 예를 들면 며칠이나 굶은 인력거꾼, 극빈한 소작인, 비참한 매춘부 등등의 생활이 제재였다」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하층인물의 빈궁상태를 사실주의적인 수법으로 현실 그것을 객관적으로 확대하여 묘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처녀작 <추석전야>에서부터 여성노동자의 생활에 테마를 두었고, <하수도공사>도 그러하였으며, ≪동광≫, ≪신동아≫, ≪신가정≫을 통해 발표한 모든 단편과 ≪중앙일보≫와 ≪신가정≫에 발표한 장편 ≪북국의 정열≫, ≪비탈≫ 등에서 그러한 경향을 추구하였다. 작품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때는 1932년에서 1938년까지였으며, 해방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생명의 과실
김명순(金明淳)의 창작집 ≪생명의 과실≫은 1925년에 경성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으로 출판되었다. 이 창작집에는 시 24편과 감상문 4편, 소설 2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창작집의 <머리말>에는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판과 저주의 여름으로 세상에 내노음니다」라고 쓰고 있어 김명순 자신도 여기에 바친 애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생명의 과실≫은 우리나라 처음의 현대시집이 1923년 6월에 간행된 김안서(金岸曙)의 ≪해파리의 노래≫가 나온지 만 1년 좀 남짓해서 나온 것이므로, 그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의 과실≫이 나오기 이전의 시집이라곤 앞에서 말한 안서의 시집과 주요한(朱耀翰)의 ≪아름다운 새벽≫(1924년), 그리고 박종화(朴種和)의 ≪흑방비곡≫(1924년간)이 있었다. 따라서 김명순의 시집 ≪생명의 과실≫은 여류시집의 맨 처음이 되는 동시에 현대 시집의 원로인 것이다. 김영덕은 「김명순의 시를 비롯하여 문단의 추세가 한과 슬픔과 유폐된 현실 도피에서 시인들이 갈망하고 노래하는 것은 유미의 추구요 병든 몽상이었다」고 평가한데 반해, 신달자는 「그녀의 시는 허무의식과 행려(行旅)의식의 자발성의 영역이 뚜렷하며 어둠 속으로 명멸해 가는 자아의 파탄과 의지할 곳 없는 무서운 고독, 타인의 침해를 병적으로 두려워 했던 위기의식을 불가항력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명순의 문학계 진출과 그의 시집 간행은 우리나라 과거의 여성의 위치에서 볼 때, 또는 한국 근대사의 과정에서 볼 때 하나의 경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차순석(車純錫)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약학교(藥學校)가 설립된 것은 1918년으로서 조선약학강습소를 조선약학교(서울대 약대 전신)로 개칭하여 1920년 5월 첫 졸업생을 냈다. 이때 조선사람은 이호벽(李浩璧)외 10명 뿐이었고 모두 일본사람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24년 우리나라 여자로서 최초로 차순석(車純錫)이 조선약학교를 졸업하여 최초의 여약사가 되었다. 평양이 고향인 차순석은 숭의학교에 들어가서 결백대를 조직하여 항일운동 겸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내용으로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등 각지역을 순회 강연하기도 하였다. 1921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차순석은 경제적으로 독립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의학과 약학부문 중 여성의 미개척분야인 약학을 택하여 조선약학교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입학했다. 조선약학교는 1931년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하였고 그때까지 조선사람 졸업생은 모두 131명이었으나 여학생은 16명만 배출했을 뿐이었다. 졸업이후 차순석은 동대문병원(현재 이화여자대학교부속병원)에서 2년간 근무를 한 후 함흥 제2병원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7년간 더 약학공부를 했으나 약국은 개설하지 않았다. 1930년 이전에는 조선인, 일본일을 막론하고 약국은 몇 군데 없었고 여성이 약국을 개설하기는 해방이후의 일이었다.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이 자리잡은 곳은 조선시대 「이문안 대감집」혹은「순화궁」으로 불리다가 후에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명월관지점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사업운동기관으로 1921년 4월 4일에 공식적인 사업을 시작한 태화여자관은 1920년대에 다양한 사업들을 개척하였다. 태화여자관은 창설동기의 하나였던 서울 연합부인사경회와 그 결과로 나타났던 협성여자성경학원의 경우처럼, 남감리회와 미감리회, 그리고 북장로회 등 3개 여선교부 연합 사업으로 출발하였다. 즉 초교파 여성 선교사업의 구체적 결실로 태화여자관이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태화 창설과정에서 부지 매입 및 초기 조직과 운영은 남감리회가 주도하고 다른 두 선교부가 참여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태화여자관의 사업은 첫째 여성교육, 둘째 복음전도, 셋째 사회사업의 세 분야에서 전개되었는데 태화여학교, 태화유치원, 태화진찰소 등 3개 기구를 통해 주로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사업을 펼쳤다. 특히 태화여학교를 통한 기혼여성 교육과 태화진찰소를 통한 아동보건 및 공중위생사업은 일반사회에서도 실시하지 않았던 선구적인 사업들이었다. 초대관장 마이어즈(M.D.Myers)를 비롯하여 에드워즈(Laura Edwards), 와그너(E.Wagner)로 이어지는 태화여자관의 사업은 1920년대 사회의 소외계층이었던 여성과 아동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경성고무여자직공조합
전국규모의 노동단체에 여성노동자의 가입은 노조 창설부터였지만, 여성만으로 구성된 최초의 노동조합은 1923년에 조직되었다. 이때 경성부내 4개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여직공의 조직적 동맹파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7월 3일 여성노동자들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고무공업계에서 「경성고무여자직공조합」의 발기로 나타났다. 경성고무여자직공조합은 발기와 함께 규칙을 통과시키고 집행위원을 선거하는 한편 그 일로 조선노동연맹회에 가입하기로 결의, 사무소를 노동연맹회 안에 설치하였으며 조합원의 수도 200여명에 달하였다. 이 노조는 즉시 아사동맹(餓死同盟)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하여 여자직공인 이경하, 박반희 양 등이 노동연맹회 간부인 박일병, 여성운동계의 정동명 여사와 나란히 연사로 나서서 그들의 노동환경과 그들의 정동한 요구에 대하여 역설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이 최초의 여성노조는 그들의 조직된 힘과 각계의 동정과 격려로 파업을 성공으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2개월 후에는 노동연맹회에의 탈퇴운동이 벌어져 와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노조활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위험시하는 고용주측과 여성들 자신의 노조에 대한 신념이 부족했던 것과 연맹회 산하로서가 아니라 여직공만의 의견과 수단으로 유지하려던 의욕 등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은 직공조합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유지한다면 그 방침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토의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이 여직공노조의 탄생을 도왔던 연맹회 자체 내에서 간부들끼리 폭력을 써서 구금되는 사태까지 빚었다. 그후 많은 여성노동조직체가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하는 과정 속에서 생겨났다.

 원산여자노우회(元山女子勞友會)
원산여자노우회(元山女子勞友會)는 「자본주의의 횡폭한 권력에 대항함에는 연약한 여자들이나마 단결이라는 힘에서 더 큼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원산여직공 50여명의 발기로 1924년 7월 19일 원산노동회 누상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원산유지측으로는 김경식(金瓊植), 김대욱(金大郁), 한기수(韓璣洙), 강기덕(康基德) 등이 참석했고, 이용화(李龍化)여사의 사회로 규칙을 통과한 후 임원을 선출하였다. 한편 이날 한기수의 <단체조직에 대한 소감>, 김경식의 <노동운동발생에 대한 원인>, 김용호(金容浩)의 <노동자절약에 대하여> 등의 강연을 듣기도 하였다. 임원은 회장 이용화, 부회장 조효근(趙孝根), 재무 김춘경(金春景), 서기 서정호(徐正浩), 이후재(李厚載) 평의원 이상숙(李相淑)외 8인으로 구성되었다.

 인천선미여공조합
정미공장은 일제가 조선에 들어와 식량을 약탈하기 위하여 세운 초기공장으로서 인천, 군산, 진남포 등 각 쌀 집산지에 세워졌다. 여기에는 대체로 쌀에 뉘를 고르는 선미여공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여공들 중에서는 선미여공의 파업이 1920년대 여직공파업의 주류를 이루었다. 13개 정미공장 3,000여명의 여직공들은 상부상조, 자위를 목적으로 인천선미여공조합을 1924년 10월에 발기하였다. 이 조합은 곧 인천노동총동맹에 산하단체로 가맹하였다.

 평양처녀양말직공조합
평양처녀양말직공조합은 1925년 4월 11일 평양양말직공조합에서 중국인 노동자 고용과 임금 인하문제 등 5가지 요구를 가지고 파업을 했을 당시, 이 파업에 참가하였던 다수 처녀양말공들이 4월 14일 긴급총회를 열고 검속된 동료의 구제 및 그들 가족의 생활보장, 취업직공에 대한 구호 등을 결의하는 등 결속을 다짐하였다. 많은 여성노동조직체가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 과정 속에서 하나의 단합된 힘으로 생겨났다.

 인천 십천정미소 선미여공 동맹파업
인천 화방정 십천 정미소 쌀 고르는 여공 150여 명 중 80여 명이 1925년 2월 16일에 동맹파업을 하였다. 이유는 한 말 엿 되는 목함을 한 말로 계산하여 임금을 준 때문이었다. 공장측에서는 다른 공장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직공측과 강경히 맞섰으며 복업하지 않는 직공에 대하여는 선미기계를 설치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여직공 일부는 그 이튿날 17일에 일부가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갔는데, 공장측에서는 새로 만든 목함이 비록 크나 그 안에 그어 놓은 금으로써 하겠다는 교묘한 답변을 듣고서 불평이 있음에도 작업을 했다. 또한 이즈음 인천 각 정미소에서는 여공들 대신 기계를 설치하여 여공들이 실직의 위험에 당면하고 있던 터이라 노동회, 경찰의 중재로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경성고무여공파업
여자직공의 조직적 동맹파업으로 1923년 7월 3일 경성 광희문 밖에 있는 해동, 빈구, 경혜, 동양의 4곳의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여직공 100여 명은 일제히 동맹파업을 하였다. 파업의 직접적 이유는 남혜(男鞋) 1족에 7전, 여혜(女鞋) 6전, 아혜 5전을 주던 종래 임금 보다 2원 내지 3-4원을 깎아 지불하면서 억지로 일을 하라고 위협하며 여자의 팔을 끌어 강제로 일을 시켰던 것에 있었다. 여직공들은 노동연맹회 알선으로 수송동 각황사에 모여 선후책을 협의한 결과, 「첫째 현시 임금을 먼저와 같이 할 일, 둘째 여공에게 무리한 행동을 한 감독자를 해고할 일」등 2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공장측과 교섭하였다. 이러한 여공들의 요구에 고무공장 대표들은 「첫째 동맹 파업한 직공들을 각 공장에서 다 각기 절대로 고용하지 말 것, 둘째 금후로도 이미 고용된 직공이 동맹휴업에 가입하는 경우엔 다 같이 해고할 것」등 강경한 건의를 하여 여직공들을 위협하였다. 이에 여공들은 7월 5일에 새로 파업에 참가한 한성고무공장여공과 함께 「경성고무여직공조합」을 조직하고 조선노동연맹회에 가입하는 한편 아사동맹을 체결, 고무공장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며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였다. 경찰에서는 도로취체법과 치안경찰법을 내걸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편 조선노동연맹회에서는 여공대표로 하여금 공장측과 교섭하게 하는 한편 경성부 내의 여러 직공단체와 토요회, 서울청년회, 노동단체 중 수개 단체로 「경성고무여공파업 아사동맹동정단」을 조직하여 여론을 일으키고 동정음악회와 동정금을 모으는 등 각 방면으로 그들을 원조 격려하였다. 마산노동동우회에선 파업여공들을 위해 동정연설회를 개최하고 동정금을 모아 보냈으며 멀리 일본 노동총동맹관동대회와 대판의 조선노동동맹회에서도 격려 전보와 동정금을 보내왔으며, 기타 각처 노동단체에서도 공장주에게 맹렬한 항의서를 보내기로 협의하는 등 노동자들의 연대의식과 다수 민중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었다. 이 경성고무여공들의 투쟁과정에서 조선노동연맹회의 간부 몇 명이 검속되기도 하고 생활상의 많은 어려움도 받았지만 공장측은 7월 19일 4개 공장여공들의 요구를 완전히 수락하여 다시 취업하게 되었다. 경성고무여공파업은 우리나라 여성노동사상 최초로 전국적 내지는 일본에서까지 광범한 노동자들의 연대의식과 대중 속에까지 뿌리박은 노동쟁의로서 특기할 만하다.

 처의 무능력자로 규정
1921년 12월 1일 제령 제14호의 시행에 따라 능력에 관한 일본 구민법규정을 의용케 되어 처의 무능력에 관한 일본 구민법 제14조 이하를 적용함으로써 부(夫)의 허가를 얻어야 할 범위는 중요한 법률행위와 가정의 평화를 해치는 행위로 한정되었다. 처가 남편의 허가를 얻어야 할 수 있는 행위는 원본수령 내지 이용행위, 차재(借財) 또는 보증행위, 부동산 또는 중요한 동산에 관한 권리의 득실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 소송행위, 증여, 화해, 중재계약체결행위, 상속승인 내지 폐기행위, 증여 내지 유증을 수락하거나 거절하는 행위, 신체에 구속을 받을 계약을 맺는 행위 등을 말하고 이와같은 사항에 대하여 남편의 허가없이 한 행위는 남편이 취소할 수 있었다. 다만 종목을 특정하여 영업을 허가하면 처는 그 영업에 관하여 독립인과 마찬가지의 완전한 행위능력이 인정된다. 또한 부의 생사가 분명치 않을 때, 부가 처를 유기한 때, 부가 금치산자 또는 준금치산자인 때, 부가 정신병으로 병원 또는 사택에 감금된 때, 부가 금고 1년 이상에 처형되어 그 형의 집행중에 있는 때, 부부의 이익이 상반하는 때에 만은 처는 부의 허가없이 할 수 있다. 남편이 미성년자인 때에는 그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처의 행위를 허가할 수 있다. (일본구민법 제14조-18조) 처의 무능력의 결과 부는 처에 대하여 거소를 지정하고 특히 그 동거를 강요할 수 있으며, 이같은 부의 처에 대한 권리는 부가 호주이든 가족이든 처가 부가에 입적하든 처가에 부가 입적하든 하등의 차이가 없다.

 이혼제도
일제시대 초기에도 협의이혼의 관습을 인정해 왔다. 이러한 관습을 전제로 1922년의 제령 제 13조에 의한 조선민사령 제2차 개정때에는 협의이혼은 당사자의 이혼의사의 합치에 의하여 부모의 동의를 얻어 계출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부부쌍방의 자유의사에 따라 합의가 성립되어야 하므로 부부 양자중 어느 일방의 의사만으로서는 협의이혼은 되지 않으며, 처가 이혼을 승낙할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처 모르게 인장을 위조 또는 부정 사용하여 이혼신고는 이를 취소할 수 있다. 또 남편의 감언이설이나 제3자의 사기에 의하여 동의한 경우에도 이의 취소를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부부쌍방이 이혼하려는 의사에 합의를 보았다할지라도 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현행 관습법상 협의이혼은 무효라고 해석하며 연령 여하를 불문하고 동일한 호적에 있는 남편의 부모 외에 처의 친가부모의 동의도 있어야 한다. 한국의 구관습상 남자는 임의로 처와 이혼할 수 있어도 처가 남편을 상대로 이혼을 청구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으나 조선민사령개정이전부터 처로부터 제기하는 이혼청구를 인정하여 주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1921년 조선민사령 제11조의 1차개정으로 일본 구민법의 제813조에 규정된 재판상이혼제도를 채용함으로써 여성의 지위는 한층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혼의 원인 및 그 제거사유는 배우자의 중혼, 배우자의 간통, 배우자가 위조, 뇌물, 절도, 사기, 취재 등의 죄로 형법 제175조, 260조에 의한 죄로 인하여 경죄이상의 형에 처해 지거나 중금고 3년이상의 형에 처해진 경우, 배우자로부터 학대 또는 중대한 모욕을 당한 경우, 배우자로부터 유기를 당한 경우, 배우자의 직계존속으로부터 또는 배우자의 직계비속에 대한 학대 또는 중대한 모욕이 있는 경우,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미분명한 경우, 서양자(壻養子)파양 등이었다. 여자에게도 이혼청구권이 인정되므로 부 또는 그 존속으로부터의 모욕 학대에 항거하여 처가 이혼을 청구할 수 있고 여자가 이혼을 당하더라도 그 이혼사유는 종래의 칠거삼불거의 원칙에 의하지 않고 좀 더 합리적인 기준에 바탕으로 삼는 유책(有責) 사유가 있을 때에 한하여서만 이혼이 허용되었고 또한 처로서 호적에 기재되면 중혼을 불허하며 첩이 공인되지 못하는 것 등 여성의 처지는 종래에 비하여 표면상 일단 향상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처의 무능력과 처의 고유재산에 대한 부의 관리권을 인정하고, 재판상 이혼원인도 종합적으로 고찰하면 그 원인은 한정적이며 유책적이고 남녀에게 현저한 차별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부부당사자 이외의 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사유를 이혼의 원인으로 인정하였다.

 친권자로서의 여성의 지위
친권에 관하여도 조선민사령 제 11조의 1차개정으로 일본구민법을 의용하게 되었다. 이에 관한 일본구민법 제886조, 제887조에 의하면 모(母)가 미성년자를 대리하여 영업, 차재, 보증, 부동산 내지 중요한 동산에 관한 권리상 실행위와 화해 내지 중재계약, 상속폐기, 증여 내지 유증거절행위를 허거나 미성년자가 이러한 행위를 스스로 하는 데에 동의하려면 친족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친족회의 동의를 얻지 아니한 행위는 일절 취소할 수 있었다. 또한 계부모, 적모는 친권행사를 함에 있어서 후견인이 후견권을 행사할 때와 같이 후견감독인 및 친족회의 감독을 받도록 하였다. 이처럼 모의 친권행사에 대하여는 父의 경우와 달리 제한을 가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모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일정초기 관습법 시대에는 모의 친권은 그 순위에 있어서 부가 제일차적이고 부가 없는 경우에 모가 제2차적으로 친권을 행사하기는 해도, 일단 모가 친권을 행사함에 있어서는 부가 행사하는 경우와 그 내용과 범위에 있어서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친권자로서의 여성의 지위는 관습법시대보다 오히려 후퇴하였다.

 노라
입센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한국어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반이었다. 극웅(極雄)의 <문예에 대한 잡감>을 비롯해서 현철의 <근대 문예와 입센>과 김한규의 <팔대문호약전>이 있고 양백화가 ≪노라≫를 번역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을 통하여 입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1920년에 다카야스 겟쿄(高安月郊)에 ≪사회의 적≫이 번역되었고 ≪사회극≫에 <인형의 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1911년 가을에 문예협회가 입센의 문제극 <인형의 집>을 상연하여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노라 역을 맡은 여배우는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일본 최초의 여성 문예잡지 ≪청탑≫은 창간호부터 입센의 극에 대해 언급했고 2권 1호에 <부록 노라>를 게재하였다. 양모현처주의를 여자 교육의 지표로 삼았던 시대에 노라의 자각은 부덕(婦德)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었다. 일본유학생들은 이런 글들과 연극을 통하여 입센의 영향을 받았다. 나혜석(羅蕙錫)은 <인형의 집>에서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다. 또한 염상섭(廉尙燮)의 <너희는 무엇을 어덧느냐>에서도 신여성이「노라」의 사상을 찬양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엘렌 케이
당시 신여성들은 주로 엘렌 케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엘렌 케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개조를 주장했으나 누구보다도 빨리 그리고 적절하게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녀는 당시 기독교의 성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고 인간의 발전을 저해해 온 그릇된 철학, 윤리, 도덕, 습관 등을 깨뜨리는 데 적극적이었고 이 사상은 여성의 권리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녀의 사상은 영국과 미국의 여성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상황은 당시 일본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청탑≫에 엘렌 케이의 소개가 실려 있었고,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한국의 문단에도 그녀의 견해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광수(李光洙)의 ≪무정≫에도 페스탈로치와 더불어 엘렌 케이가 교육가로서 등장하고 있고 <김연실전>, <너희는 무엇을 어덧느냐>에서는 여권론자의 대명사로 인용되고 있다. 1920년대 초반부터 그녀의 사상은 본격적으로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노자영(盧子泳)의 <여성운동의 제1인자 엘렌 케이>, 이경숙의 <여자해방과 우리의 필연적 요구>, 철보산인의 <엘렌 케이의 연애관>, 권명빈의 <엘렌 케이 여사의 별세일을 당하여 그 사상을 소개한다> 등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노자영의 글은 생전의 엘렌 케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글의 앞 부분은 엘렌 케이 저의 ≪연애와 결혼≫의 서문 부분과 일치하고 있어 당대 지식인들이 그녀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인론
1923년부터 여성운동계에도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의 삶은 계급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가진다고 파악하고,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무산여성들의 완전한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유입으로 여성들은 직업여성의 모성보호정책, 가사노동의 사회화, 3.8국제무산부인데이의 기념 등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국제적 이론을 통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보급에 힘썼다. 주로 엥겔스의 ≪가족, 국가 및 사유재산의 기원≫과 베벨의 ≪부인론≫의 체제와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수준이었다. 베벨의 ≪부인론≫은 1925년 11월에 조선지광사에서 배성룡(裵成龍)에 의해 ≪부인해방과 현실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모든 사회적 종속과 억압은 피압제자와 압제자에 대한 결론적 종속에 기인한다」고 한 베벨은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근본적 조건으로 여성의 모성적 기능인 생물학적 기능을 말하고 있다. 여성동우회의 선언문에서는 베벨이 제시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보편적인 여성해방사상으로서의 「가정, 임금, 성의 노예론」과 「교육의 거절 및 모성의 파괴론」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계급해방과 여성해방을 동일시하고 기존의 여권론에서는 소외되어 있던 대다수의 무산여성들의 삶을 중시하여 그들을 여성문제 해결의 주체로까지 격상시켰다. 그러나 이 시기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반자본주의 계급해방론을 여과없이 도입, 천명함으로써 반봉건의 과제조차 해결되지 못한 식민지 한국의 여성문제 해결에는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었다.

 태화진찰소사회봉사부
감리교 여선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을 통한 여성전도 뿐 아니라, 모성역할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한 계몽에 주력하였는데 3.1운동 직후부터는 가정 복지 및 사회관을 통한 사회사업의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태화여자관은 어린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기관이 없었던 시기에 태화진찰소사회봉사부를 만들었다. 태화진찰소사회봉사부는 일주일에 5번씩 오후에는 5살 미만의 어린이의 건강을 무료로 진찰하였고, 오전에는 일반가정을 방문하여 가정위생과 어린이 기르는 법을 이야기하여 어린이 건강에 노력하였다. 일반가정에서 해산할 때 신고하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구호했으며 순산한 어린이는 그 진찰소 영아부에 사진을 찍어 두었다가 그 이듬해 봄까지 건강하면 어머니와 어린이에게 상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토요일에는 어린이 진찰을 폐지하고 일반부인에게 위생강연을 했다. 이들 전도산파의 산모관리사업은 가정의 닫혀진 문을 여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1920년대 전반기에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1924년 태화진찰소는 583건의 가정방문을 했으며, 육아강습회를 통해 「아이기르는 법, 우유만드는 법」등을 계몽하였다. 이들 아동보건사업의 원리는 위생과 건강에 대한 서구적 보건의료의 기준에 철저히 따른 것이었다. 과학적 양육의 주요한 특성은 위생생활의 습관화와 건강의 기준의 수량화, 표준화로 점차적으로 일반가정에 침투해갔다.

 경성여자공제국
이효민(李孝敏)과 여러 부인들은 빈민 여성을 조금이라도 구제하기 위하여 황금정 이정목에 경성여자공제국을 설립하였다. 공제국은 생활이 곤란한 가정부인이나 또는 침모(針母)로 가고자 하되 부모와 자녀가 있어서 가지 못하는 부인들을 모아 가지고 바느질을 시켜서 수입이 있게 하는 동시에 하루에 1시간씩 언문, 한문, 산술, 주산, 일어, 이과 중에서 한 과목만 지원대로 가르쳐 주었다. 공제국은 지나간 음력 4월 3일에 개업하였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부인들이 지금 10명이며 하루 수입이 대략 50전 가량이라고 한다. 일하는 사람들은 갑조, 을조, 병조 등 3반으로 나누어 갑조에서는 남자의 두루마기와 마고자 등을 만들고, 을조에서는 남자바지를, 병조에서는 노동복과 어린이의 의복을 만든다고 한다. 이곳에서 매일 지원하는 자가 10여 명씩이나 되나 수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내외법(內外法)
여성의 공간을 규문(閨門)내로 제한하는 내외법(內外法)은 남녀유별주의 윤리의 한 폐습이므로 애국계몽운동기에 특히 내외법 철폐론이 신문 등을 통해 널리 주장되었다. ≪만세보≫는 1906년 8월 24일자 논설에서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내외법을 범한 「내정돌입죄율(內庭突入罪律)」의 불평등성을 지적하고, 정과 상열의 마음은 남녀가 다 같은 것인데 내외법으로서 여자를 심규(深閨)에 가두어 놓고 남자만을 치죄함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논설은 내외법을 철폐하여 남녀동등권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수백년을 지켜온 내외법 관습을 하루아침에 철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제국신문≫에서는 시의에 맞는 내외법의 개혁을「여자가 문 밖 출입할 때 부모형제나 아주 가까운 친척이나 신임하는 하인의 동행이 없을 때는 나가지 않는다. 출가한 부인은 친정, 시집의 부모 형제나 남편 또는 가까운 친척이나 신임하는 하인의 동행없이는 나가지 않는다(단 위의 두 경우 외출시에는 절대로 교자를 타거나 장옷을 입지 않는다). 집에 손님이 올 때에 남편이 있으면 내실이건 사랑이건 어디든지 청하여 들여 부인도 함께 대하고 웃고 말한다(단 남편이 없을 때는 찾아간 손님도 당에 올라서는 안되고 주인된 부인도 영접해서는 안된다)」라고 제시하였다. 이것은 오랜 사회관습이었던 내외법을 일시에 철폐시키기 어려워 제한된 범위안에서 내외법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의제개혁론
의제개량론(衣制改良論)은 1905년 이후 활발하게 논의되어 1906년 11월에는 ≪만세보≫에서 의제개정법제제정론을 제시하였다. 그 제정론에는 장의 착용 폐지를 위해 모자착용론을 제시하였다. 모자착용론은 장의폐지의 최선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져 1906년 7월에 이홍래(李鴻來)는 자본금 2천원으로 여모제조회사를 설립하고자 농상공부에 청원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모자보급은 용이하지 않았다. 1910년 전후에 우산보급율이 크게 증대되었는데 이것은 우산이 장의에 대체되어가기 때문이었다. 한말에 유행하였던 치마 저고리를 보면, 치마는 자유롭게 걷기 어려울 만큼 길고 저고리는 허리와 젖을 감추기 어려울 만큼 짧아 거동에 불편하였다. 그러므로 한복과 서양복을 절충한 원피스형의 활동하기 편한 개량 한복을 고안하여 착용하기도 하였다. 즉 저고리 기장을 길게 하고 치마는 주름을 잡아 저고리 도련에 연접시킨 것이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전제로 하는 의제의 개량론은 개인적으로 시간절약, 위생관념과 여성교육론에 귀착되는 것이었다.

 근화회(槿花會)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던 여성 중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했었다. 1928년 2월 12일 뉴욕시에서 김(金)마리아, 황(黃)에스터, 이선행, 우영빈, 이헬른, 윤원길, 김애희, 박인덕, 김매리 등의 발기로 근화회(槿花會)가 조직되었다. 회장은 김마리아이며, 그 목적은「첫째, 조국광복 대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재미 한인 사회의 일반운동을 적극 후원한다, 둘째, 여성동포의 애국정신을 고취하여 대동단결을 이루고 재미한인 사회운동의 후원세력이 되게한다, 셋째는 재미 한인의 선전 사업을 협조하되 특별히 출판과 강연으로 국내 정세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는 일의 일부를 담책하기로 한다」라고 하였다. 이 회는 조국광복 운동을 후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었으나, 경비조달의 곤란으로 기대했던 사업을 행하지 못하고 다만 여학생간의 연락과 친목을 꾀하는데 불과했다.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
1919년 음력 8월 평안남도 순천에서 조직되었다. 대한국민회 총무인 박승명(朴承明)으로부터 평양 경창리 예수교 신학교 기숙사에서 향촌회 조직의 권유를 받고 동지를 규합하여 음역 10월 9일 조직의 완성을 보았다. 이 부인회의 조직활동의 목적은 상해 임시정부를 원조하는 일이었다. 임원 진용은 모두 전도사 등 교회 중진이었고 회원으로는 여신도 14명을 규합하였다. 회원에게서 4원씩의 회비를 징수하고 또 군자금을 모집하여 1920년 음력 3월 23일 16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 요원인 차경신에게 전달하였다. 회장 윤찬복(尹燦福, 전도사), 회계 최복길(崔福吉 교회역원) 정찬성(鄭燦成, 교회간사), 회원 김화자(金花子) 외 13명이다.

 부인관찰단(婦人觀察團)
부인관찰단(婦人觀察團)은 1920년 9월 평안남도 안주에서 조직되었다. 대한청년단연합회의 부총재인 김찬성(金燦星) 등의 권유를 받고 부인회원 30명을 규합하여 조직을 한 후 부서와 임원진을 갖추어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활동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하여 빈민구제를 부인회 활동의 목적으로 내세우면서 회원들로부터 거둔 회비(각 1-5원)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송달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하였다. 조직 후에 곧 독립운동 자금으로 100원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그 임원진용은 단장 김찬성(金燦星), 부단장 노대근(盧大根, 여 47세), 총무 겸 재무 윤소산(尹笑山 여 57세), 서기 안신덕(安信德, 여 30세) 통신원 차명조(申明朝, 여 47세)

 여학교 관제 13조
대한제국은 1899년도 예산에 여학교비 3,750원을 넣고 또 학부는 동년 5월에 여학교 관제 13조를 제정하여 각의에 상정시켰다. 여학교관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여학교는 계집아의 체신 발달함과 살림에 반드시 긴요한 보통 지식과 재조를 가르치는 것으로써 본 뜻을 삼는 일. 제2조 여학교에 쓰는 경비는 국고에서 지출할 일. 제3조 여학교에 심상과와 고등과를 논아 둘 일. 제4조 여학교의 수업연한은 심삼과인즉 3개년이고, 고등과인즉 2개년으로 정할 일. 제5조 여학교의 심삼과의 과목은 몸을 닦고 글을 읽고 글씨 익히고 산술하고 글 짓고 바느질 하고 지리학 배우고 역사 배우고 잇과학 배우고 그림 그릴 일. 제6조 여학교 서책은 학부에서 편집한 외에도 혹 학부대신의 검정함을 지낸 자로 쓸 일. 제7조 여학교의 계집아이의 나이는 아홉 살 이상으로 열다섯까지로 정할 일. 제8조 여학교의 가르치는 과목의 加除와 편급과 구별과 교수의 시한과 일체 세칙은 학부대신이 정할 일.제9조 여학교 교장은 교원이나 혹 학부 판인관이 겸임도 할 일. 제11조 여학교에 지금은 혹 외국 여교사도 고용할 일. 제12조 각 지방에 여학교를 공립으로 실시하고 사립으로도 설시하는 것이 마땅한대로 허락할 일. 제13조 본령은 반포하는 날로부터 시행할 일.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 관제로 작성되었던 동 관제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이것이 발포되어 그대로 실시되었다면 우리나라의 관립여학교 설립은 관립한성여자고등학교에 10년을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제는 사유불면한 채 발포되지 않았고 ,책정된 예산도 집행되지 않았다.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대한청년외교단 총무인 이병철(李秉澈)은 임창준(林昌俊) 등과 의논하여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기독교 신앙이 깊은 여성들을 규합하여 부인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최숙자(崔淑子), 김원경(金元慶), 김희옥(金熙玉) 등을 규합하여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1919년 4월경에 조직하고, 이병철은 이 부인회의 고문이 되었다.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는 조직 당시부터 활동의 주목적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이었다. 이럴즈음 임시정부에서는 부인단체의 대표자를 파견해 달라는 교섭이 와 이병철과 임창준의 알선에 따라 김원경을 파견키로 하였다. 부인단체 대표자 파견교섭은 혈성부인회측에도 왔다. 그러므로 김원경은 혈성부인회측의 대표직도 수락하고 4월 중순경 서울을 떠나 상해로 향하였다. 이를 계기로 두 부인회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통합을 결의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활동을 위해 국내기반이 필요하였다. 정부요원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기밀문서를 전달 배포하고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에 송금하는데 있어서 부인단체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러한 목적으로 이 당시에는 많은 부인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안정석(安貞錫)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평양의 대시위운동에는 한 부인의 정성어린 후원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안정석(安貞錫)으로 어린 두 남매를 둔 젊은 과부였다. 그녀의 큰 시숙은 대동군수로 또 작은 시숙은 충추원참의로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의 집이요, 손꼽히는 부호였다. 그러나 세칭 박과부로 통하는 남산현 예배당 권사 안정석은 기독교사상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오히려 일제의 학정에 반대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안정석은 김찬흥목사의 지시에 따라 그녀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판으로 인쇄하는 데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다. 3월 1일을 1주일쯤 앞두고 시작한 이 일은 주로 숭의여학교와 광성학교의 학생들이 작업했는데, 그 경비는 모두 안정석이 부담하였다. 그 뒤 안정석은 이 사건으로 3월 21일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돈 40원을 내어준 일 밖에는 아무일도 참여한 일이 없다고 버티었다. 그래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의 인쇄사실을 종내 탄로나지 않았으며, 이에 관련된 수십명의 학생이 무사하게 되었다. 그녀는 일경에 체포된지 한달 만에 대동군수로 있던 큰 시숙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다. 평양의 대한부인회 중앙본부 회장과 교통부장의 중직을 맡았다. 또한 그는 송죽결사대조직 당초의 3인 중의 하나로 그는 교회에 남아 송죽회의 조직을 비밀리에 확장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유관순(柳寬順)
유관순(柳寬順)은 1904년 3월 15일(음력)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의 빈한한 가정에서 유중권(柳重權)과 이소제(李小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주에 있는 미국 선교사 부인에게 신앙이 든든한 소녀로 알려져 그녀의 학비부담으로 1917년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3.1운동당시 그녀는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으로 16세였다. 3.1운동이 터지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울에서 항쟁하다가 3월 10일 오후 각 중등학교 이상에 대해 임시휴교령이 내려졌으므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고향으로 내려와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에서 공작하여 봉화신호로 음력 3월 1일 수만의 군중을 천안군 동면 아내장터로 모이게 하였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놓고 열렬한 일장연설 끝에, 선언문을 읽고 시위에 나섰다. 이것을 계기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일본헌병대를 거쳐 공주재판소로 넘어갔다. 유관순은 검사국에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그 후 재판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일인의 재판을 거부하였다. 끝내 3년형의 언도를 받았다. 다시 경성복심법원에서도 판결을 거부하고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일인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모욕적인 발언을 하자, 법정에서 유관순은 걸상으로 검사를 쳐서 7년형으로 증가되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자 조석으로 만세를 연창하여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오랫동안 계속된 악형과 불굴의 투쟁과 영양실조로 1920년 10월 12일 17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짧은 생애를 마쳤다.

 개성 호수돈여학교 만세시위운동
개성 호수돈여학교학생들은 3월 1일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어윤희와 접선하여 3월 3일에 거사하기로 했다. 이들은 예배당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수기를 제작하였다. 3월 3일에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독립가, 찬미가,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다가 전원 구인되었다. 이에 반발한 수천 군중은 경찰서를 포위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 본 일인군수 산기(山崎)는 단상에 올라와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즉 「어린 여학생들이 자기 나라를 위해서 이와같이 열렬히 운동을 벌인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고, 따라서 나로서는 감격을 금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내가 어린 여학생들을 위해서 만세를 선창할테니 다같이 만세를 삼창하고 돌아가라」고 제의하였다. 이와같이 해서 군수의 선창에 따라 여학생들과 군중도 다같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호수돈여학교 학생의 만세시위운동은 개성지방 3.1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각 학교와 민중의 운동이 잇따라 일어났다.

 부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3월 11일에 부산에서 사립 일신여학교와 부산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나서서 시가를 시위하며 만세를 불렀는데, 부산진 근처에서는 오후 늦게까지 시위가 계속되었다. 부산만세운동의 주동인물은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朱敬愛)였는데, 그는 동교학생들과 비밀히 거사를 준비하였고, 또한 여학생들은 치마의 옥색물을 탈색하여 5,000개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1일 오후 10시경 이들 여학생들은 태극기를 가지고 기숙사를 뛰쳐나와 거리에서 일반시민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준 후, 목청이 터져라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운동은 동래에서 최초로 행해진 단독시위였다. 동래 좌천리의 여성들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여성의 개화가 일찍 된 곳이며, 여성들의 조국애도 남달리 강한 곳이었다. 이미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에도 「좌천리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여 외채상환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가 있었던 곳이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긴급출동한 일경에게 저지됨으로써 불과 20분만에 끝났다. 그리고 이날 주경애, 박연이(朴蓮伊), 박정수(朴貞守), 송명진(宋明進), 김순이(金順伊), 김응수(金應守), 김복선(金福善), 김봉애(金奉愛), 임운이(林雲伊) 등 수많은 여학생들이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상과 같이 부산 동래에서의 첫시위는 불과 20분만에 끝나 버렸으나, 이들 여학생들의 장거는 화약에 불을 지르는 구실을 하였다.

 수피아여학교 여학생 만세운동
광주에서는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과 각계 대표자가 3월 8일 모임을 갖고 3월 8일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담당부서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3월 8일의 거사계획은 준비부족으로 3월 10일로 연기하였다. 3월 10일 오후 2시가 되자 수피아여학교의 여학생들과 숭일학교 남학생들은 광주천을 끼고 시장으로 나왔다. 이날 시장에는 5,000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남녀 학생들을 선두로 한 시위대는 광주경찰서 앞을 지나 우편국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일군과 충돌하였다. 잔인한 일경들은 닥치는 대로 어린 여학생들을 후려갈김으로써 수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많은 여학생을 체포하였다. 이때 체포되어 나중에 기소된 여성들로는 박순애, 진신애(陣信愛), 최경애(崔敬愛), 박영자(朴永子), 이남채(李南彩), 김화순(金華順), 민성숙(閔成淑), 임진실(林眞實), 고연홍(高蓮紅) 등이었다.

 기생들의 만세운동
3.1운동을 전후하여 기생 중에는 애국기생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기생을 당시 사상기생이라고 불렀다. 수원에서는 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가던 기생들이 도중에 만세운동을 벌였고, 통영, 진주 등에서도 기생으로 검거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당시의 치안책임자 천엽료(千葉了)의 <조선독립운동비화>에「1919년 9월 우리들이 처음으로 부임했을 때의 서울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는 그런 놀아나기만 하는 눈치는 조금도 볼수 없었다. 약 800명의 이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라기 보다 독립투사였다. 이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기고 놀러오는 조선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러 일으켰다. 화류계에 출입하는 조선청년치고 불온한 사상을 가지지 않은 자 없게 되고, 서울 시내 100여 군데 요정들은 어느덧 불온한 이들의 음모를 위한 소굴로 화하였다. 간혹 우리 일본인들이 기생집에 놀러가는 일이 있어도 그 태도는 냉냉하기가 얼음같고, 이야기도 않거니와 웃지도 않는다. 더구나 노래와 춤을 청해도 바라보지도 않는다. 잔을 내밀면 묵묵히 술을 따를 뿐 때가 되면 묵묵히 사라지고 만다. 그 분위기야말로 유령들이 저승에서 술을 마시는 기분이다. 독립만세 후의 서울 장안 화류계는 이처럼 불온했고, 험악한 공기는 이리하여 더욱 조성되었다. 총독부가 아무리 좋은 정치를 하고 군대와 경찰이 아무리 호령을 해도 사회의 이면에 이와같은 불온한 소굴이 남아 있는 한 조선사회의 치안유지는 성공될 듯 싶지가 않다」고 하여 조선기생들이 얼마나 애국정신에 불타고 있는가를 고백하고 있다.

 과부재가허용
과부재가 허용은 유교적 억압하에 있는 여성해방의 첫 과제이다. 1894년 갑오농민군의 폐정개혁안도 이를 규정했고, 갑오경장 초에는 과부재가의 자유화를 법제화하였다. 즉 1894년 6월 28일(음력) 부(附) 군국기부처 개혁의안 10조 중, 제2조에 「과부재가 무론귀천 임기자유(寡婦再嫁 無論貴賤 任期自由)」라고 하여 과부재가를 허가한다는 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의안이 채택됨으로써 과부재가금지법이 이루어진 지 실로 400여년만에 비로소 폐기취소되었다. 그러나 과부재가의 자유화가 실제로 시행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과부는 재가할 의사만 있으면 재가할 수 있도록 법적 조처가 이루어졌으나 사회성습은 이를 용납지 않고 있었다. 이를 완화하는 방법으로 1900년 12월에 회계원경 민치헌(閔致憲)은 국왕에게 <과부개가상소>를 올려 개가시행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즉「자기 집에 소년과부가 있으면 반드시 택일하여 폐백을 드리는 정식 혼인예법을 갖출 것이며 15-20세까지는 초취례로 하고, 30-40세까지는 재취 삼취례로 하되, 부모와 이웃이 아무리 권하여도 종시 맹서코 개가하지 않는 자는 구태여 탈지(奪志)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갑오개혁에 참여하였던 유원표(劉元杓)는 1908년에 과부재가의 허가와 더불어 이를 실행치 않는 자에 대한 처벌법을 더불어 공포하기 전에는 시행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강경론자도 대두하였다. 과부재가제 시행을 위해서는 선각한 사대부가에서 솔선으로 실행되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실제로 사대부가에서 솔선하기도 했다. 재가법이 준수 시행되어야 하는 법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고 또 정열관의 예속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조혼폐지
우리나라 혼인제도의 가장 큰 폐해의 하나가 조혼이었는데 이를 폐지하지 않고는 가정의 기틀이 튼튼해질 수 없고 아울러 국가와 사회가 발전할 수 없다는 논의가 1894년부터 일어났다. 1907년 10월 17일자 ≪제국신문≫에서는「우리나라에서는 12-13세만 되면 부모가 임의로 결혼을 시키니 어린 것들은 결혼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또 지각이 난 뒤에는 이미 서로 뜻이 맞지 않아 후회하는 일생을 지내는 부부가 많다」고 하고 이러한 결혼을 「압제결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조혼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노력은 갑오경장 의안중에 남자 20세, 여자 16세 이상을 혼인연령으로 정한다는 의안을 채택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1907년 8월 15일에 순종은 다시 「조혼의 폐로 국민의 병원이 막심한 고로 부득불 옛법과 지금 풍속을 참작하여 남자는 만 17세, 여자는 만 15세이상이라여 가취(嫁娶)할 수 있다」는 조서를 내렸다. 조혼금지 조서가 다시 반포된 배경에는 조혼폐해에 대한 논의를 대한자강회가 정부에 정식으로 건의하고 그 실행을 촉구한 데 있었다. 그럼에도 조혼금지 조서는 그 후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고위관리들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식민지개화에 대한 민족적 저항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화정책이 강화되었던 1909년과 1910년에는 조혼의 풍조가 더욱 더 성행했다. 이즈음하여 일본이 한국인을 강제 동화시키기 위하여 모종의 혼인법령을 제정 중이라는 소문이 국내에 돌고 있었고, 충북에서는 앞으로 혼인세를 징수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이어린 자녀를 다투어 성혼시켜 심지어 8-9세된 여아를 성례시켜 9세의 과부가 생기는 예까지 있었다. 이것은 일제측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민중의 항거였다. 그러므로 일제측에서는 이같은 항거자들을 야만적이고 몰상식한 자들이라고 비난하였고, 신문을 통하여 사생영아의 살해와 유부의 살해 등 사건을 낱낱이 보도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조혼에서 기인하는 사회악임을 독자들에게 인식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순성여학교
관립여학교의 설립은 황제의 비답(批答)만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대신회의를 통과한 의안에 대해서만 황제가 칙령을 발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정책 결정 절차를 제대로 알지 못한 찬양회회원들은 비답실행을 독촉하는 청원을 학부대신 상대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정부측에서의 설립 준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는 2월 말경이면 대개의 학교가 개학을 했다. 찬양회에서는 황제의 비답이 있었던 터이므로 늦어도 개학시기인 1899년 2월말까지는 여학교 설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어 여학생을 이미 선발하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찬양회측에서는 하는 수 없이 1899년 2월 26일 서울 어의동에서 여학생 30명으로 관립여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될 때까지라는 조건 아래 순성여학교를 개교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해 특히 한국여성에 의해 설립된 초초의 여학교였다. 여학생의 연령은 7.8-12.3세였고, 교육정도는 초급과정이며 교과서는 학부에서 제정한 것을 채택하였다. 갑자기 문 연 여학교라 개교 당초에는 교과과정도 마련되지 않았고 교사도 확보되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처럼 교사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찬양회는 동 부회장 김양현당(金養賢堂)을 교장에 임명하고, 동 서기 고정길당(高貞吉堂) 및 약간의 외국부인들을 교원으로 임명하였다. 순성여학교 개학 초에는 고정길당에 의하여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태서신사≫ 등이 교수되었고 또 재봉침을 구하여 기계화 재봉교육도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태서신사≫의 교수와 재봉틀사용법 교수는 당시로서는 실상교육을 목표한 교과목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순성여학교의 교육내용은 전통적 윤리관 위에 서구의 기술문명을 수용케 하는 동도서기적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여성교육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근대적 남녀평등의 여성교육 확립에 있어 상당한 한계성을 주었다. 1900년초에 찬양회는 사실상 해체된 바나 다름없어 재정적 후원없는 학교경영을 김양현당 혼자서 이끌어갔으나 1903년 2월에 병사하였다. 김양현당 사후, 이자현당(李慈賢堂)이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이미 학교는 지탱할 수 없었다.

 청북강계부인급수보상회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방법은 패물폐지, 감찬(減餐), 감식(減食)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유교사회의 검소절용사상이 바탕이 된 것이라 하겠다. 이에 관하여 청북강계부인들의 부인급수보상회에서는 두 동이 쓸 물을 한동이만 쓴다고 하는 급수비의 절용이 아니라 부인들이 직접 물을 길어 씀으로써 급수군에게 지불했던 급수비를 국채보상금으로 연출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이긴 하나 생산수단에 의한 국채보상 참여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급수군이란 가장 천한 직업인데 이것을 부인들이 스스로 당해 내겠다는 것은 인민평등의 실천이기도 하다. 이같은 직종의 일을 국채보상을 위해 부인들이 일시적이나마 담당하겟다는 것은 동부인회의 발기취지에 밝혀져 있는「국민된 의무를 다같이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은 근대적 인민평등의식의 성장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급수보상부인회는 현직 관인의 부실 3인(김씨, 한씨, 이씨)이 중심이 되어 12인이 발기하였다. 이들의 발기취지는 「국민된 의무는 남녀가 일반이라. 가장이 열심하여 단연보상(斷煙報償)하는데 가인이 그 열심을 이어받지 아니하면 도시 국민된 의무를 실할 뿐 아니라 열행에 손함이라」라고 하였다. 급수보상부인회는 첫째 남녀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는 국민의식에서 출발되었으며, 더 나아가 상하신분의 화합으로 발전되었다.

 연안이씨일문부녀회(延安李氏一門婦女會)
일문족의 부인들을 규합하여 국채보상부인회를 발기 조직한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에 발표된 지역별 국채보상의연자 명단에는 일문중 부인들이 집단으로 의연 참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연안이씨일문부녀회를 조직한 이는 도사 이현규(李鉉奎)의 대부인 하동 정씨(鄭)이다. 정씨는 연안이씨일문의 연장부인이다. 그는 평소 명행절의가 뛰어나 이웃의 칭송받음이 높았다. 시국 변화에도 관심이 높아 아침마다 자손들에게 신문을 읽게하여 들었다. 마침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를 청취하고 감격하여 즉시 일문 부녀들을 모두 모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 결과 내외제족이 일제히 찬동하여 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의연참여 방법은 식량미의 절약에 의하였다.

 어윤희(魚允姬)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서강감리교회 마당에는 개성의 만세시위를 이끈 어윤희(魚允姬)기념비라는 조촐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녀는 1878년 6월 30일에 충북 충주군 서태면 덕근리에서 어현중(魚玄仲)의 무남독녀로 출생하였다. 그녀는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6세에 출가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3일만에 남편이 동학의 의병으로 나가 전사하였다. 18세때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고 1908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그녀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자기가 좀 더 배우지 않고서는 남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34세에 개성 미리흠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졸업후 개성 북부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1919년에는 개성 성경학교의 사감일을 보았다. 한편 호수돈 여학교 학생 조숙경(趙淑景), 권명범(權明範) 등은 1919년 2월 28일에 독립만세 시위에 관한 계획과 실천 문제에 대하여 어윤희에게 자세히 이야기 하고 그녀의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호수돈여고보 학생들과 3월 3일 오후 2시로 거사 시간을 정했다. 그녀는 보따리 장사를 가장하고 대낮에 독립선언서를 집집마다 돌리며 다녔다. 어윤희의 대담한 행동에 사감 신관빈(申觀彬)과 전도부인 심명철(沈明哲)도 따라 나섰는데, 이 세부인의 손으로 독립선언서가 개성 시내 곳곳에 전달되었다. 오후 2시 정각에 어윤희는 왼편 팔에 선언서를 걸쳐 매고 남문 쪽부터 중앙지대로 연설을 하며 올라왔고, 그 뒤를 따르던 부인들과 청년들은 유인물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경찰은 3월 3일 시위주동자를 여성으로 단정하여, 그날 밤 어윤희, 권애라(權愛羅), 신관빈, 심명철 등 4명을 검거하였다. 어윤희는 경찰조사를 마치고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압송, 기소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어윤희는 징역 2년, 그밖의 3인은 징역 6개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석방뒤에도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되는 밀사들에게 여비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왜경의 눈을 피하도록 골방이며 다락에 감추어 주기도 했다. 만약 그들의 소지품 중에 탄환이 있으면 새로 기워서 쌓아둔 버선 속에 조금씩 나누어 넣어 장롱 속에 간직했고, 육혈포는 종이에 싸서 깡통 속에 넣어 위에 모래를 덮고 조화를 만들어 꽃아 책상 위에 화분을 번갈아 상비함으로써 공급하는 방법을 썼다. 개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어윤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녀는 민족의 계몽과 구국투쟁으로 젊은 시절을 조국에 바쳤다.

 평양기휼병원 간호부 동맹파업
우리나라 간호사업은 기독교의 전래와 더불어 서양식 간호법이 전래되어 1906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최초로 간호부양성소가 생겨났다. 이후 간호부와 조산부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는 각 병원 부속의 양성소와 각도 위생과 소속의 양성소 그리고 사립양성소가 있었다. 각 병원 부속 간호부와 조산부 양성소 졸업생들은 졸업후 대개 그 병원에 취직하였다. 그런데 간호부는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했으며, 여기에 성차별과 민족차별, 간호부와 의사의 차별, 간호부장과의 문제 등으로 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평양기휼병원 간호부의 동맹휴업도 간호부장과의 마찰에서 일어났다. 평양 기휼병원은 장로파와 감리파의 단합으로 설립한 병원이었다. 간호원 중에 정월라(鄭月羅), 김오선(金悟善)을 제외한 김순정(金順貞), 장돈화(張敦化), 오인호(吳仁浩), 고유순(高有順) 등은 병원장에게 동맹 휴업을 제출하였다. 그 이유는 현재 간호장으로 병원장의 누이동생인 이디손양과 정월라, 김오선 간호부의 말만 듣고서 여러 간호원을 천대하므로 전기 두 간호원을 내보내지 않으면 병원문을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원장은「여러 간호원이 나가는 것도 좋으며 간호원으로 사용할 조선 여자가 얼마든지 있다」고 단언하며 만일 병원에 다시 들어오기를 원하자는 자는 사죄장을 제출하라고 요구하였다.

 가등정미소 동맹파업
인천부 궁정 가등(加藤)정미소에는 남녀 노동자 500여 명이 취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등은 중국인 노동자 18명을 중국에서 데려와서 저임금으로 일을 시켰다. 가등은 마침내 조선노동자들에게 「너희들은 중국인보다 일을 못하고도 임금은 그들보다 더 비싸니 임금을 10전씩 깎을 터이다」고 경고를 하자 남자 직공 150명은 항상 분하게 여겼다. 그래서 가등은 중국인을 바깥 일만 시켰는데 1923년 8월 26일 밤에는 비가 내려 하는 수 없이 중국인 노동자도 조선 노동자와 함께 공장 안에서 일을 시키게 되자 두 나라 노동자 사이에는 큰 싸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조선인 노동자 일동은「도저히 이같이 문명치 못한 공장에서는 사람 노릇을 못하겠으니 단일코 취업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동일 하오 8시경에 일제히 기계에서 손을 떼고 각각 분연히 돌아갔다. 29일 오전에 주모자들이 골목골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장으로 가는 일부 노동자에게 큰 경계를 주어 마침내 29일부터 300여 명의 남녀직공은 완전한 동맹파업을 하였다. 이에 공장 주인 가등은「결코 조선 노동자를 배척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노동자를 데려다가 노동에 충실한 표본을 삼자한 것이요, 임금을 10전씩 깎는다 하는 것도 결코 사실상 깍으려고 하던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면 일을 좀 부지런히 할가 한 것이네 마침내 뜻밖에 파란이 나서 정신이 없소」하는 애매한 변명을 했다.

 순천 안력산 병원 간호부 동맹파업
전라남도 순천군 미국인이 경영하는 안력산 병원에서는 사무원과 간호부가 단결하여 1924년 1월 9일에 동맹파업을 하였다. 그 원인은 병원에서 사무원과 간호부를 사용하되 월급은 8원으로부터 최고가 23원이므로 그렇게 적은 월급을 받고서는 1개월 동안에 생활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출근시간에 조금만 늦게 오면 무조건하고 퇴직을 시키는 일도 종종 있었으며 기구를 사용하다가 파손되면 그 물품값을 월급 중에서 제감하는 일과 미국인 간호부의 학대가 심하였다고 한다. 특히 1923년말에 상여금이라는 미명하에 1원씩을 주었는데, 인격을 너무나 무시하여 일동은 분하게 여기있었다. 이에 1월 9일에 사무원과 간호부가 서로 회의하여 매월 13-14원의 월급으로는 생활할 수가 없기 때문에 병원장 노제세(魯濟世)을 찾아가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병원장과 미국인 간호부는「당신들에게 월급을 더 줄 수가 없으므로 월급을 더 받으려고 생각하면 다른데로 가서 근무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여 일동은 동맹하고 병원을 하직하게 되었다. 간호부공제조합은 1920년에 간호부의 대우개선과 품성의 향상을 위해 간호부규칙을 일부 개정했는데, 종래 월급이 46원 80전이었던 것을 70원으로, 38원 80전이었던 것을 50-60원으로 증액하였던 것과 비교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저임금으로 노동했는지 알 수 있다.

 인천 제등정미소 동맹파업
인천 만식정에 있는 제등 정미소에 다니는 조선 여성 300여 명은 그날 벌어 그날을 간신히 지냈는데,「삯전을 올려야 살겠다 조선여자라고 하여 냉대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1924년 3월 10일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이 정미소에 다니는 여자는 7-8세된 어린아이로부터 30-40세에 가까운 여자까지 합하여 300여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정미소의 쌀 고르는 방을 자기의 생명으로 알고 해가 뜨면서부터 해가 질때까지 잘 고르는 여자는 20-30말로부터 어린여자와 늙은이는 6-7말 가량을 고르는데 그 삯전은 한 말에 3전씩으로 한 사람 평균 40여전을 받았다. 동맹파업의 이유는, 첫째 쌀에 뉘와 티끌이 많아서 한 말에 3전씩을 받아 가지고서는 40전 벌이도 못되기 때문에 임금을 인상해달라는 것, 둘째 재전(在前)감독의 여직공에 대한 성폭력 문제였다. 이에 대해 정미소 주인 재등은「쌀에 뉘와 티끌이 많을 때에는 전례에 의하여 한말에 2리씩 더 주기로 하였으며 감독 제전의 품행이 좋지 못한 것이 드러나는 때에는 그 감독을 면직시킬 터이니 하루바삐 복업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번 문제는 임금인상 보다 재전감독의 행위가 좋지 못하다는 문제이었다. 그래서 여직공들은 감독을 내보내지 않는다면 복업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공장 주인측에서는 개별방문을 하며, 불량한 감독을 갈아주며, 뉘가 많은 쌀은 임금을 올려 줄 것을 약속하여 15일부터 복업을 시작하였다.

 원산 고무공장 여직공 동맹파업
1924년 8월 원산고무공장의 여직공 60여 명은 동맹파업을 하였다. 그 요구조건은「대우개선, 임금인상, 파상품에 대하여 파상된 물품의 임금만을 무효로 할 것」인데 직공 편의 태도는 강경하였다. 원산고무직공이 동맹파업을 한 것은 직공 감독이라는 일본 사람이 직공 취급하기를 마치 개, 돼지와 같이 하여 걸핏하면 「빠가」니, 「요보는 할 수 없다」는 등 말을 하며 심지어 손찌검을 하는 일도 있어서 직공들은 항상 불평 중에 있었다. 근래에는 기계가 새로 와서 전에 하던 방법을 전부 고쳤는데 전에 40켤레를 만들던 직공이 15켤레 밖에는 만들 수가 없음에도 삯전은 여전히 한 켤레에 4전씩 밖에 주지 아니하여 하루에 30-40전 벌기가 어렵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30전 이상을 받기 힘들었다. 따라서 직공들은 종래 4전을 6전으로 올려 달라고 주장하면서 최후의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자본주는 대우개선문제는 시인했지만 임금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파업은 원산노동회와 원산청년회의 조정으로 해결되었는데, 요구조건 세가지 중에 대우개선과 파상품 문제에 대하여는 직공들의 요구대로 채용되고 임금문제에 대하여도 회사측과 충분한 합의를 하여 올리기로 하였다.

 재등고무공장 여직공 동맹파업
남대문 밖 삼판동 재등(齋藤)고무공장은 1924년 6월 30일경부터 새로이 영업을 시작하여 약 130여 명의 여자 직공들을 수용하여 일을 시켰다. 7월 15일은 일반직공들에게 삯전을 지출할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문서 정리 중이라는 구실로 그 날 하루를 넘기고 또 그 이튿날은 공휴일이라는 것으로써 또 주지 아니 하였으며 17일에 이르러서도 또다시 문서 정리라는 구실 밑에서 의연히 지불을 거절하였다. 아침부터 밥을 싸 가지고 몇푼 안되는 품팔이를 간 여성들은 주인의 이같은 무리한 행동에 대해는 참을 수 없다하여 5-6명의 대표자를 정해 주인에게 삯전 지불을 요구하였다. 주인은 이것이 정당한 요구임에도 불구하여 불온하다 하여 아침부터 이 공장 문을 굳게 닫고 10여 명 견습생 외에 일반 직공들을 공장에 들여 보내지 않았다. 노동총동맹에서는 위원 두 사람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는 동시에 주인의 부당함을 교섭한 결과 임금은 모두 지불이 되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는 별안간 방침을 변경하여 18일 아침에 직공들을 모두 문밖에 세워 놓고「오늘까지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여 왔으나 오늘부터는 사람을 줄일 터인 고로 이 중에서 누구는 두고 누구는 나가라고 할 수가 없으니 모두 각각 제비를 뽑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제비를 한 줌 가지고 나와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나누어 주어서 결국 50여 명을 하루 아침에 떨어 버리고 나머지 50여명은 모두 안으로 들고 들어 가서 일을 시켰다.

 인천 가등정미소 여직공 동맹파업
1924년 11월 17일 오후 3시에 인천부 궁정 가등(加藤)정미소에 종업하는 쌀고르는 여직공 약 400여 명은 결속하여 동맹파업을 하였다. 17일 오전 8시경에 여직공 중 이씨(40세)가 고른 쌀을 검사원인 룡야구(龍野久)라는 일본 여자에게 가져다가 검사할 때 뉘가 섞였느니 아니 섞였느니 말다툼이 생겨 결국은 룡야구가 이씨를 때리기까지 하였다. 일반 직공은 그 검사원의 행동에 분개하여 공장주인에게「저런 패악한 검사원 아래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검사원을 바꾸지 아니하면 우리가 동맹파업을 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그 주인측에서는 오히려 이씨의 잘못을 언급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인천노동총동맹회에서는 위원이 공장에 가서 사실 조사를 하려 한즉 공장 주인의 말은 구타 당한 여직공이 좋지 못 한 사람이라 하며 또 노동회위원에게 대하여도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말하여 동위원도 분개한 태도로 돌아와 피해자를 중앙의원에 치료를 받게 하였다. 그 동안 노동회와 경찰측에서 조정에 협력한 결과, 공장측에서는 검사원 일본여자 룡야구를 해고함으로써 여공측 요구를 들어 주어 19일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하였다.

 마산 조면공장 남녀직공 동맹파업
마산 조면공장 남녀 직공 120여 명은 지나간 7일부터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그날 오전 10시경에 구락부 회관에 회합하여 구체적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주림과 추위를 무릅쓰고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 8시가 넘도록 고역을 하나 삯전은 최고 1원 20전으로부터 최저 75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여직공은 보통 35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 몇번이나 공장주측에 교섭을 하였으나 아무 동정이 없으므로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들은 주인측에「1. 남녀 직공의 임금은 현재보다 4할을 증가할 것 1. 임금 외에 면화 30근 해면에 한하여서는 현재 임금 1전 2리를 2전으로 증가할 것 1. 식사시간을 매회 30분씩 2회를 정하여 줄 것 1. 남녀 직공에게 마스크를 줄 것(기타 위생설비를 충분히 할 것) 1. 공장 내에 직공 전용의 목욕탕을 설비할 것 1. 과실의 유무를 물론하고 해고할 때에는 직공단의 승인을 얻을 것 1. 공장의 사정에 의하여 해고할 때에는 2개월 이상 근속자에게는 일급 10일 분을 지급할 것 1. 자기의 사정에 의하여 퇴직할 때에는 4개월 이상 근속자에게는 일급 20일 분을 지급할 것 1. 매월 공휴일 2회를 여하되 일급은 지급할 것 1. 금번 사건에 절대로 희생자를 내지말 것」등을 요구하였다. 공장주인은 여러 가지 수단으로 파업한 직공을 정원에 모으고 대표될 만한 3명을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위협하여 내일부터 일을 하겠다는 승낙서와 도장을 받았다.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직공의 도장을 받던 중 여직공 황석운(黃石雲, 15세)란 처녀의 손을 서기 윤모가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하는 등 갖은 수단으로 일시는 취임하게 하였다. 그 후 동맹파업하였던 직공 중에 윤은주(尹殷周), 송태옥(宋泰玉) 두 사람이 갊?기로 출연치 못한 것을 이유로 퇴직시키고 그 밖에도 황재원(黃在源), 이원봉(李元鳳) 두명을 퇴직시켰다. 남녀직공 80여 명은 11일 다시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1.임금은 4할을 증가할 것 1. 윤서기를 해고할 것 1. 식사 시간을 정하여 주되 1회 30분씩 2회로 할 것 1. 퇴직 직공을 복직시킬 것 1. 금번 사건에 희생자를 내지말 것」을 요구하였다.

 평양 대동염직소 여직공 파업
평양 상수리 대동 염직소의 여직공 36여 명은 1925년 1월 1일에 돌연히 동맹 파업을 하였다. 파업원인은 연말 상여금의 미지불과 임금인상이었다. 본래 그 염직소는 관사, 비단 등속만 짜는 곳으로 재작년까지는 해마다 약간의 연말 상여금이 있어 왔으나 작년에는 예년에 비하여 상당한 이익이 있었음에도 주인측에서는 상여금을 주지 않았다. 일반 직공들은 기다리다 못하여 1924년 12월 31일에 주인측에 상여금을 달라고 청구했으나 상여금을 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1월 1일에도 여전히 출근하였는데, 주인측에서는 다소 태업하는 기분이 있다 하여 먼저 직공들에게 「다니기 싫으면 모두 그만 두고 가도 좋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일반 직공들은 여기에 더욱 분한 마음을 품고 그날 오전으로 곧 그 염직소 문을 나와서 상수리 김옥화라는 직공의 집에 모여 동맹파업하기를 결의하였다. 임금은 비단 한필 짜는데 종래 1원 받던 것을 갑자기 65전으로 내려 이에 대하여서도 불평이 많았으나 지금까지 참아 왔었다 한다. 만약 동맹에 참가한 직공 중에 누구든지 먼저 동맹의 결의를 무시하고 임의로 복직하는 이가 있다면 단독 행동을 막기로 했다고 한다.

 부산조선방직회사 남녀직공 파업
방직여공파업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부산조선방직을 들 수 있다. 부산조선방직회사에서는 남자 직공 200명과 여자 직공 500명이 작업을 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직공을 학대하여 매일 12시간이나 노동을 시키며 임금은 25전부터 30전에 지나지 못하여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불평이 많았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압박 수단으로 직공들을 억제하여 500여 명의 남녀 직공들은 크게 분개하여 1922년 3월 11일부터 동맹 파업을 하였다. 남자직공일부는 회사 부근에 모여서 격렬한 연설과 시위운동을 하며 요사이 준공한 회사 안에 있는 순사 주제소를 파괴하였다. 부산경찰서에서는 일본인 순사를 파견하여 진압하였다. 회사측에서는 직공에 대한 선후책은 언급하지 않고 강경 수단을 써서 무조건 굴복하지 않으면 모두 내보낸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1923년 8월 6일 2,500여 명의 여직공들은 동맹파업을 하였다. 그 원인은 일요일에도 여직공의 문밖 출입을 금지하고, 여감독의 여직공들에 대한 구타, 장시간 노동과 임금인상 등이었다. 이때의 파업도 부산경찰서의 진압으로 주모자 3인과 관계자 20여 명이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으로 끝났다.

 이화학당
1886년 5월에 근대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이 스크랜튼(Mary F. Scranton)에 의해 설립되었다. 여성교육기관이 전혀 없던 시기에 이화학당은 의식주를 제공하고 무상교육을 실시해도 학생을 얻기가 어려웠다. 1886년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1899년에는 47명, 1909년에는 174명으로 학생수가 증가했다. 1906년을 전후하여 숙명, 진명을 비롯한 많은 사립여학교가 세워지는데 당시 한 학교당 학생수는 평균 7,8명 내지 2,30명이었다. 이화학당은 1910년에 대학과를 설치하였다. 1912년 5월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대학과 설치의 인가를 받았으며 학제는 4년 졸업으로 보통과, 고등과, 중등과로 나누었다. 1915년에는 유치원 사범과가 설치되어 우리나라 유치원교육의 효시를 이루었다. 1925년 제2차 교육령 개정으로 전문학교로 전환했고 문과와 음악과를 두었다. 초창기에 여자를 학생으로 만드는 일에만 고심했던 사실에 비하여 전문적인 지도자 양성학교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화학당의 모든 활동은 한국여성교육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한국 최초의 여교사 이경숙(李慶淑), 최초의 여의사 박(朴)에스터, 최초의 학사학위 취득자 하란사(河蘭史)를 위시하여 수많은 여성을 배출함으로써 개화기 여성사회의 근대화에 공헌하였다. 당시의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다. 선교사들은 서구에서 교육의 모형을 구했다. 이처럼 서구를 모형으로 하여 구곡(舊穀)을 탈피하려는 정신과 설립의 기본목적인 기독교 신앙이 초창기 이화학당의 지도이념이었다.

 정신여학교 기숙사생도 동맹휴학
연지동에 있는 예수교 장로파 정신여학교의 기숙사 생도 일반학생은 서명날인하여 그 기숙사 사감 최명복(崔命福)이 완고한 구습의 사상을 가지고 기숙사 생도를 너무나 압박함으로 7,8개 조건을 내걸고 결의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1923년 8월 14일 동맹휴학을 하였다. 그 원인은 사감 최명복은 친척의 면회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했고, 통학생은 일반강연회에 청강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음에도 기숙사생도에게는 강연회 청강을 엄금하고, 자기 편의만 도모하고, 몇몇 교사들의 불친절한 수업방식 등이었다. 주동학생들은 통학하는 학생들을 각 도로변에서 지키고 있다가 통학을 금지시켰다. 이에 학교측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18일 정오까지 등교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단호한 처벌을 한다는 통지를 보냈다. 19일에 등교한 학생은 별로 없었는데, 이후에라도 사과하는 학생에게 정학처분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기숙사생 46명을 정학처분하였다. 그리고 학교측은 20일부터 말일까지 10일간 휴학을 시작했고, 사감 최명복과 1명의 교사가 사표를 제출하였다.

 대구제사공장 여직공 동맹파업
대구조선제사공장 여직공 450여 명은 노동시간의 단축을 요구할 것을 결의하고 공장측과 1924년 4월 20일 교섭하였다. 공장측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70여 명의 직공은 동맹파업을 하는 동시에 대구정거장 앞에 모였다. 대개 13-18세 가량의 소녀들이 공장주인에게 대항하여고 동맹파업을 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그 고통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데, 그들은 하루 13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었고, 거처하는 방안은 불결하고 음식물도 가끔 몇끼씩 먹을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작업환경에서 생활하였다. 이에 대해 공장 지배인인 신산(神山)은「12시간이란 것은 절대로 할 수 없소. 일본내지에서 공장법이 있는데도 13시간 노동은 제사공장에 한해서 묵인을 받고 있소. 우리공장의 직공에 대하여는 될 수 있는대로 사랑을 하고 대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소」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동맹파업했던 당일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다.

 북장로교 애국부인회
북장로교 부인 신도로 조직된 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하순에 한영신(韓永信)의 발기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한영신은 인천에서 태어나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선친의 고향인 의주의 양실여자중학을 졸업한 뒤 모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25세에 평양에 이사와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애국부인회 조직 당시 북장로교의 역원(반장)으로 있었다. 한영신은 같은 교인인 김보원(金寶源), 김용복(金用福), 김신희(金信喜) 이외의 수명을 불러, 「금일의 시세는 남자에게만 독립운동을 맡기고 부인이라 해서 수수방관함은 동포의무에 반할 뿐 아니라 남자에 대하여도 수치이다. 고로 우리 부인은 애국부인을 조직하여 조선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그의 주장은 모인에 사람에 의하여 찬동을 받았고, 한영신은 회장으로 추대되고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의 주장은 독립운동은 남녀가 똑같이 행하여야 하며, 그 이유는 남녀는 다같은 대한의 국민이므로 그 국민된 의무를 행하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에 의하여 조직된 북장로교 부인중심의 애국부인회의 구체적인 활동방향은, 첫째 뜻을 같이 하는 동지 회원의 규합 및 회원으로부터의 회비징수와 독립운동 자금인 군자금의 모집이었다. 회비와 군자금은 국내의 독립결사대나 독립단 등의 독립운동 요원을 비호하고 원조하는데와 임시정부에 대한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졌다. 그 다음의 중요활동은 국민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일이었다.

 광주학생운동
1929년 11월부터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단순히 광주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와 이에 맞서는 조선 민중 사이에서의 민족적 계급적 모순을 바탕으로, 192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발전해온 학생운동을 기반으로 1929년 말부터 1930년 초까지 광주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민족해방운동이었다. 1927년 이후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 또한 단순한 학교내의 문제를 넘어서 식민지 피압박자로서의 현실에 대한 근본문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교사배척이나 시설설비에 대한 요구만이 아니라 “조선어를 교수용어로, 조선역사 지리교수, 학우회 자치권 획득, 식민지 교육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확립” 등의 구호가 보편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광주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조직력과 지속성을 가지고 반년 가까이 전개된 수 있었던 원동력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바탕으로 성장한 <성진회(醒進會)>와 그 후계조직인 <독서회 중앙부>라는 비밀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7년 3월, 성진회는 비밀유지를 문제로 형식상 해산을 결의하고 광주고보 장재성, 광주농고 문승수, 광주사범 임종근(林種根), 광주여자보고 장매성(張梅性)을 조직책으로 학교별 독서회를 조직하여 이론적으로 훈련,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광주고보의 조선인 학생들과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의 우발적인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날의 충돌사건은 투쟁대상을 일제로 바꾸어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생들간의 충돌은 이제 일본인 학생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닌 일제에 대한 반일투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서울계 신파에 의한 조공재건 야체이카 성원들이었던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세력은 반제투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광주에서의 반일학생시위는 12월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전개된 맹휴 학생시위운동의 배후에는 조선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청년회의 지도를 받고 있던 조선학생전위동맹이 있었으며, 특히 1930년 1월의 시위투쟁에서는 여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근우회의 허정숙(許貞淑), 박차정(朴次貞) 등은 이화여고보의 최복순(崔福順), 경성여자상업학교 송계월(宋桂月) 등과 협의하였고, 1월 15일의 시위에는 이화여고보, 배화여고보, 동덕여고보, 숙명여고보 등 여학교를 비롯하여 15개교 3천여 명이 투쟁에 참여하였다. 전국적으로 전개된 광주학생운동은 내용으로도 학내문제 또는 광주학생사건, 식민지노예교육문제에 그치지 않고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일본제국주의 자체를 타도하자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광주학생운동 과정에서 학생들은 단순한 학교내의 문제를 넘어서 민족해방운동으로까지 그 성격을 발전시켜 나갔다. 광주학생운동 과정에서 살포된 격문에는 “교내 경찰침입반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획득,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노예교육제도 철폐, 검속자 석방” 등 일상적 요구뿐만 아니라 일제에 대한 정치투쟁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의 동맹휴학투쟁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이미 조선의 근본적 모순을 볼 수 있는 인식이 성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광주학생운동>이라는 계기에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
1927년 이후 학생들의 동맹휴학투쟁은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 또한 단순한 학교내의 문제를 넘어서 식민지 피압박자로서의 현실에 대한 근본문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일제의 고등경찰(高等警察)은 이시기에 일어난 많은 동맹휴학의 기본성격에 대하여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민족적 감정이 원동력이 되고 있으며 일반의 뇌리에 식민지교육, 즉 노예교육이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인상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1927년 5월에 일어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의 동맹휴학 또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며 일어난 운동이었다. 당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는 20명의 교원 가운데 조선인 교원은 5명에 불과하였고, 기숙사 사감도 일본인으로 일본의 생활풍습을 강요하는 등 민족적 차별이 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7년 5월 27일 400여 명의 학생들은 학교당국에 “중도(中島) 사감을 면직시킬 것, 제등(齊藤) 교무주임을 퇴직시킬 것, 학생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것, 재봉선생을 조선인으로 대체할 것, 조선인 교원 채용을 증가할 것, 인격 있는 교원의 대우를 개선할 것” 등의 요구사항을 내놓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의 동맹휴학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부형들과 각 사회단체의 지지가 있었다. 학부형들은 학생들의 동맹휴학 이유를 인정하고 학교당국에 대항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근우회(槿友會)는 6월 11일 현덕신(玄德信), 황신덕(黃信德), 김선(金善) 등을 조사위원으로 결정하였으며,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또한 심은숙(沈恩淑) 등 2명을 조사위원으로 선출하여 동맹휴학의 원인과 문제점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은 9월 27일에 이르러 제등(齊藤)이 물러나고 재봉담당 교사로 조선인이 부임하면서 일단락 되었다.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은 1926년 조직된 사회주의 여성운동조직이다. 중앙여자청년동맹은 당시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던 사회주의 여성조직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조직되었다. 북성회(北星會)를 중심으로 경성여자청년동맹이, 서울청년회계를 중심으로 경성여자청년회가, 그리고 이에 속하지 않는 여성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프로여성동맹이 결성되어있었다. 그러다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는 기운 속에서 경성여자청년동맹과 경성여자청년회가 제휴하여 12월 5일 중앙여자청년동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중앙여자청년동맹은 김수자(金壽子), 신기숙(辛基淑), 심은숙(沈恩淑), 강정희(姜貞姬;강아그니아), 여영숙(呂英淑), 박원희(朴元熙), 곽형숙(郭亨淑), 노승준(盧升俊), 김성인(金成仁), 김수준(金繡準), 조원숙(趙元淑) 등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결의사항으로 “1). 본회가 한양청년연맹과 경성청년연맹의 통일을 위하여 조선청년동맹에 직접 가맹함을 3개월간 연기하고 두 단체의 동맹을 촉진키로 하고 촉진위원으로 김수준, 조원숙, 심은숙, 박원희, 신기숙 5명을 선정함 2). 부인의 교양목적을 위해 연구반을 시급히 실시함 3). 명년 1월 중순에 조선여성단체연합 대강연회를 열기로 함 4). 명년 3월 신학년을 기하여 무산아동학원을 설립키로 하고 그 준비위원은 집행위원에 일임하기로 함 5). 본회 발회식은 12월 21일로 정함 6). 사무소는 당분간 조선여성동우회관을 사용함”을 채택하고 “무산계급의 권리 및 여성해방을 위하여 청년여자의 단결과 분투를 기함,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한다”는 강령을 제정하였다. 중앙여자청년동맹은 1927년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자 조직을 해체하고 근우회를 통하여 사회주의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프로여성동맹
1926년 1월 3일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들은 여성해방동맹의 창립대회를 조선노동회관에서 개최하였다. 여성해방동맹은 그 이전 1925년 1월 17일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50명이 모여 창립준비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이 창립준비 토론회에서 여성해방동맹은 창립의 취지로 “종래 여성단체는 신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편벽한 폐해가 적지 않았으므로 구식 가정여자의 자각과 교양을 힘쓰자”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이때 신여성 중심의 폐해란 일본 유학생 중심의 운동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한 국내에 기반을 가진 서울청년회파의 북풍회파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식 창립대회를 1926년 1월 3일 개최하고 이 창립대회에서 여성해방동맹을 프로여성동맹으로 개칭하여 조직하였다. 총회는 프로여동맹으로 개칭하면서 운동노선을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분명히 하였다. 프로여성동맹은 서무, 교양, 경제, 보건의 4부를 조직하고 현애라, 목불송치(木不松治), 김정옥, 김영신, 장보화, 송혜국 등 6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프로여성동맹은 실행의 안으로 1). 여성운동 노선통일에 관한 건 2). 남자의 전제압박에 대한 건 3). 여자교육 및 혼인에 관한 건 4). 부인노동자의 임금에 관한 건 5). 기관지 발행의 건 6). 직업부인 조사의 건 7). 미신 타파의 건 등을 결의하였다.

 인천지역 정미소 총파업
인천지역 각 정미소 남녀 직공 3천여 명이 1926년 3월 23일 오전부터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인천지역 정미소들의 파업의 발단은 3월 21일 인천부 빈정(濱町) 역무(力武)정미소에 남녀 직공 1백 63명이 공장 측의 일방적인 임금인하에 반발하여 파업을 단행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어 화방정 원전(園田)정미소에서도 3월 22일부터 여직공 50여명도 임금인하에 반대하여 파업을 단행하였고 마침내 23일 인천 각 정미소 남녀직공 3천여 명이 총파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동맹파업에는 조선정미주식회사, 재등(齋藤)정미소, 직야(直野)정미소, 역무정미소, 마야(馬野)정미소, 유마(有馬)정미소, 십천(十川)정미소, 원전정미소, 오전(奧田)정미소, 길전(吉田)정미소, 가등(加藤)정미소 등이 참여하다. 각 직공단 대표자들은 선후 방침을 정하여 선언서와 요구조건을 발표하는 등 체계적인 파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요구조건은 “1. 임금에 관한 건으로 임금은 종전의 정액을 절대 인하할 수 없을 것, 임금은 일정한 시간에 지불할 것을 1. 직공대우에 관한 건으로 용어는 절대 평등으로 쓸 것, 작업 중 긴급사항은 면회를 허락할 것을 1. 노동시간에 관한 건으로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정할 것, 시간이외의 노동은 시간 비례로 임금을 지불할 것”을 내세웠다. 인천지역 각 정미소 직공들의 총파업은 체계적이고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선미직공들을 다시 모집하겠다는 엄포를 놓던 각 공장 측은 26일부터 요구조건에 응하기로 함으로써 파업은 마무리되었다.

 광주학생운동: 서울의 여학생 시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와 이에 맞서는 조선 민중 사이에서의 민족적 계급적 모순을 바탕으로, 192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발전해온 학생운동을 기반으로 1929년 11월 3일 광주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광주학생운동은 12월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서울에서의 시위운동은 1929년 12월의 제1차 시위운동 이후 다시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조직적으로 준비해 나갔는데 이때 중심이 된 것은 여학생들과 여성단체였다. 1930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되었다. 새학기 시작과 함께 1월 8일 광주고보의 백지동맹을 비롯하여 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에서는 제2차 시위투쟁이 전개되었다. 일제는 서울에서의 제2차 시위투쟁의 발생 배경에 대하여 “경성시내 선인(鮮人) 여학생의 사상을 동요시키고 전선인 회원 5청을 가진 근우회를 책동하여 ....서무부장 허정숙(許貞淑), 출판부원 박차정(朴次貞)이 개인적으로 선동을 지시하고 여학생들을 운동에 참가시키며”라고 지적하고 있다. 근우회의 허정숙(許貞淑), 박차정 등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최복순(崔福順)과 회합하여 운동을 계획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장홍염 등은 경성여자상업학교의 송계월(宋桂月) 등과 협의하여 15일 연합하여 시위를 결정,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시위투쟁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경신고등통학교보,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보성전문학교을 비롯하여 15개교의 학생 3천여 명이 투쟁에 참여하였고, 이날 하루동안의 검거자만도 3백여 명이나 되었다.

 근우회(槿友會)
근우회는 1927년 5월 조직된 항일여성조직이다. 통일전선체로서 사회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여성계도 여성운동의 통합론이 일어나 조직된 것이다. 근우회는 기독교계열의 김활란(金活蘭), 유각경(兪珏卿), 유영준(劉英俊) 등과 사회주의계열의 심은숙(沈恩淑), 허정숙(許貞淑), 황신덕(黃信德), 백신애(白信愛), 김영희(金映姬), 정종명(鄭鍾鳴), 조원숙(趙元淑), 김필수(金弼壽), 이현경(李賢卿), 강정희(姜貞熙) 등이 창립의 주요인사로 구성되었다. 근우회는 5월 28일 창립총회에서 “1). 조선여자의 견고한 단결 2). 조선여자의 지위향상 도모”라는 강령을 채택하고 운동목표는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여성 자신의 해방과 일제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양방향을 제시하였다. 근우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 각지 및 일본, 만주 등 국내외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각 지방의 70여 근우회 지회를 통하여 여성의식을 개발하는 교양강좌, 부인야학, 남녀차별 철폐에 관한 토론회 등을 전개하였으며, 부산 등 여성노동자가 많은 지역에서는 여공조합조직, 부녀노동자보호문제 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근우회의 회원은 만18세 이상의 여성으로 회원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 입회할 수 있었으며, 1929년 5월에는 총 40여 개의 지회에 회원수가 2971명으로 가정부인 1256명, 직업부인 339명, 학생 194명, 미혼여성 181명, 노동여성 131명, 농촌여성 34명이 가입하였다. 그러나 근우회는 좌우파의 사상적 이질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단일한 지도체제나 행동체계를 갖기는 어려웠다. 일제 정보문서에는 “제3,4차 조선공산당이 근우회조직과 활동을 통하여 당의 정책을 구현할 목적으로 근우회 안에 야체이카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근우회 야체이카는 조원숙을 책임자로 강정희, 김필수 등을 회원으로 하여 조직된 이래 계급의식의 훈련과 교양에 힘써왔으나 내부알력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좌우파의 이념적 갈등으로 1928년부터 YWCA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여성운동가 등이 근우회에서 탈퇴하였으며, 1931년 2월 주을(朱乙)지회를 시작으로 해체론이 제기되었으며 일제의 탄압 등으로 정식 해산발표도 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안주 염직여성노동자 동맹파업
1926년 11월 29일 평안남도 안주(安州)의 안흥염직소를 비롯하여 일신, 유산 등 세 곳의 염직소 여공 100여명은 그들이 조직한 <공녀조합(工女組合)>을 고용주 측에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노동자를 감금, 공녀조합 가입을 방해하자 이에 항의하여 파업과 동정파업을 일으켰다. 안주지역의 <공녀조합>은 1926년 10월 30일 발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노동단체에는 안주지역 염직공장의 여성노동자 30여명이 가입한 상태였다. 안흥염직소의 고용주 측은 11월 29일 여성노동자를 한 사람씩 세워놓고 공녀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하고는 공녀조합을 탈퇴하겠다는 증서에 도장을 찍어야 채용할 것이라고 하자 이에 여성노동자들은 반발하여 일제히 파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의 단결이 더욱 세어지고 문제가 확대되자 안주노동조합동우회, 사상연구회, 살수(薩水)청년회 등 각 사회단체에서는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공녀조합을 적극 후원하는 동시에 파업자금을 지원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용주들은 “공녀조합에 상관치 않는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율산, 일신, 안흥이 차례로 파업을 철회하게 되었다.

 경성방직 노동쟁의
1928년 5월 9일 경성방직 직포부 여성노동자 60여 명의 주도로 파업이 단행되었다. 경성방직의 노동쟁의는 기계 개량과 함께 임금지급 체계를 변화시켜 임금을 감하시킨 것과 함께 직공을 해고시키는 것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발생되었다. 경성방직은 1928년 새로운 직기를 도입하는데 새 기계는 재래기계보다 같은 시간대에 2-3배의 생산능률을 발생시켰다. 그렇게 되자 경성방직은 임금을 생산 작업량에 따른 소수제(疋數制)로 지급하던 방식에서 지난 3개월간의 급료를 날수로 평균하여 일급제(日給制)로 바꾸어 지급한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하루에 두 필을 짜고 1개월에 21원을 받던 것에서 이제는 네 필을 짜고 18원밖에 받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반대하여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경성방직 측에서는 생산능률의 향상에 따라 직공 60여명을 해고하였으므로 노동안정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작업량은 늘어났으므로 이것이 파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경성방직의 파업은 구식기계 4대와 개량된 신식기계 8대를 동일 임금으로 한다는 선에서 6월 6일 마침내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경성방직에서의 파업은 기계의 생산성은 증가하였으나 노동자에 대한 노동강도의 강화와 실질적 임금인하를 꾀하려는 고용주 측의 행태를 보여준 사례이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소녀회(少女會)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光州女子高等普通學校)의 <소녀회(少女會)>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쟁취,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일제는 소녀회의 조직 배경에 대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 중 광주로 돌아온 장재성(張在性)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정에 침투하는 것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누이인 장매성(張梅性) 등 13명을 사주하여 조직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소녀회는 1928년 11월 초순 장재성의 누이인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장매성을 비롯하여 박옥련(朴玉蓮), 박계남(朴繼男), 장경례(張慶禮), 남협협(南俠俠)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되었다. 소녀회는 사회주의사상을 학습하고 민족의식을 고양시킨다는 목적에서 매월 1회씩 연구회를 갖기로 결의하였으며, 학생소비조합을 조직할 때는 30원(圓)을 출자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소녀회의 주도적 여학생들은 이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30년 1월에도 백지동맹(白紙同盟)을 벌이는 등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였다. <소녀회>의 주동자들은 1930년 1월 15일 검거되어 1930년 10월 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장매성은 징역 2년, 그 이외의 여학생들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소녀회의 주동학생들은 장매성, 박옥련, 박계남, 고순례(高順禮), 장경례, 암성금자(岩城錦子: 李錦子), 남협협, 박채희(朴采熙), 박현숙(朴賢淑), 김금연(金錦淵), 김귀선(金貴先) 등이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17세에서 20세 사이였다.

 신일선(申一仙)
1920, 1930년대 대중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영화였다.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민중들은 영화를 통해 고달픈 현실에서 잠시 떠날 수 있었다. ≪조광≫에는 <50전 혹은 40전으로 세시간 동안 어여쁜 여배우의 교태와 소름끼치는 자극과 노래와 음악과 춤을 실토록 맛보고......>라는 글이 실려있기도 한데 그처럼 특히 여배우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은 상당한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인기있었던 여배우는 이월화(李月華), 신일선(申一仙), 그리고 김신재(金信哉)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신일선은 일제시기 뛰어난 미모로 큰 인기를 얻었다. 신일선이 출연한 첫 작품은 1925년 나운규(羅雲圭)가 감독한 <아리랑>이었다. <아리랑>에 출여할 당시 신일선은 16세의 어린 나이였다. 이후 양성환과 결혼한 신일선은 전라남도 능주에서 7년간 영화를 떠나 가정생활을 꾸렸다. 그러나 남편이 본처를 실가(實家)에 보내고 재산을 탕진한 후 남편에게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자 다시 경성으로 올라와 영화계로 컴백하였다. 신일선은 <아리랑> 이외에도 <장한몽(長恨夢)>, <봉황의 면류관>, <청춘의 십자로(十字路)> 등에 출연하면서 젖먹이는 어린 부인, 요리집에서 장구치는 여인, 부자집 마님 등 어떤 역할이나 자연스럽게 소화하였던 조선영화계의 대표적인 여배우였다. 신일선은 <먼동이 틀 때>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박경원(朴敬元)
민간비행사로 일본에서 활약한 박경원(朴敬元)은 1926년 일본 동경의 가마다(蒲田) 자동차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 일본 다찌가와(立川) 비행학교를 수석으로 나와 2등 비행사가 되었다. 1901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개화된 부농의 막내딸로 태어난 박경원은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며, 일본의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입학해 신문학을 배우기도 하였고 귀국 후에는 대구의 자혜의원(慈惠醫院)의 조산부 및 간호과를 마쳤다. 박경원은 25세 때인 1926년 다찌가와 비행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미국과 일본, 대구 등지에서 생활하였는데 가마다 자동차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기도 하였다. 미국유학과 일본유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삶을 개척할 기반을 닦은 박경원은 1922년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조선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키워왔다. 1924년 비행사의 예비훈련과정으로 동경 가마다 자동차학교에 지원한 후 1925년 4월 다찌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한 박경원은 유일한 조선사람이었으며, 식민지 모국인 일본에서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 박경원은 1926년 3등 비행사 자격증을, 1928년 7월 조선여성 최초로 2등 비행사 자격증을 땄으며, 3년간의 비행학교 과정을 마칠 때는 수석졸업생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박경원은 1933년 8월 7일 아침 10시 경 하네다(羽田) 비행장에서 고국방문을 위해 비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경원은 당시 최신형으로 꼽혔던 살무손 2A2형(型)의 “청연호(靑燕號)”를 비행하던 도중 이륙 50분만에서 안개에 시계(視界)를 빼앗기고 하꼬네(箱根) 봉우리에 부딪쳐 추락, 사망하고 말았다.

 천도교여성동맹(天道敎女性同盟)
천도교여성동맹(天道敎女性同盟)은 1927년 6월 2일 천도교 구파측 여성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천도교여성동맹의 전신인 천도교내수단(天道敎內修團)은 천도교의 발전과 조선여성의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는데, 1925년 8월 대회를 계기로 종통문제로 인해서 신,구 양파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구파측 여성들은 <천도교여성동맹>을, 신파측 여성들은 <내수단>으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중앙대교당에서 개최된 <천도교여성동맹> 창립총회에서는 집행위원으로 박명화(朴蓂嬅), 홍종희(洪鍾姬), 김상화(金尙嬅), 박정자(朴貞子), 김숙(金淑), 박호진(朴昊辰)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그 창립목적은 천도교의 인내천사상을 신앙의 기조로 하는 여성계몽이며, 그 가운데 특히 비합리적 가정생활을 개선을 통한 여성의 여성해방과 지위향상, 사회진출이었다. <천도교여성동맹>은 1928년 4월 5일 제1회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전국 대표 63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의장으로 박호진을 선출하고 의결사항으로 회원교양에 관한 건, 회원친목에 관한 건, 아동보호에 관한 건, 근우회(槿友會) 지지에 관한 건, 선전 조직에 관한 건 등을 결정하였다. 강력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던 <천도교여성동맹>은 신간회(新幹會)와 근우회의 창립이념을 지지, 창립 초기부터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또한 <천도교여성동맹>은 전국대회를 통하여 회원교양과 강연, 부인강좌, 여자야학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조직기반이 신파측에 비해 사대적으로 열세였던 이유로 실질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었다. 대내적인 활동이 부진했던 <천도교여성동맹>은 <근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대외적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천도교여성동맹>은 이후 신파와 구파가 합동하여 1930년 12월 합동대회를 계기로 교단조직을 하나로 합치고 1931년 <천도교내성단(天道敎內誠團)>으로 조직적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구전(久田)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평양 구전(久田)고무공자의 파업은 1930년 5월 10일 시작되었다. 구전고무공자의 여성노동자 92명은 임금인하와 보증금 제도, 그리고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도에 반대하여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공장주측은 고무구두 한 켤레에 6전하던 임금을 5전으로, 5전하던 것을 3전으로, 그리고 10전하던 것을 6전으로 일방적으로 임금을 인하하였으며, 불량품에 대하여도 다른 공장에서는 한 켤레에 3전씩 받는 것을 구전고무공장에서는 처음 켤레에 5전, 둘째 켤레에 10전, 세째 켤레에 45전씩 받음으로 다른 공장에 비해 높은 벌금의 누진제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보증금의 경우도 다른 공장이 3원이었던 것에 비해 13원이라는 높은 금액을 제도화하였던 것이다. 구전고무공장의 노동자들은 회사측과의 교섭을 통해 보증금문제와 임금인상문제는 노동자측에서 양보하고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도는 회사측이 양보하라는 타협조건을 제출하였으나 회사측은 이에 불응함에 따라 노동자들은 파업을 전개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하여 회사측은 11일 직공을 모집한다는 포스터를 붙이는 등 전혀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자본가측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구전고무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파업투쟁의 실패는 자본가측의 완강한 저항에도 그 이유가 있었으나 파업 노동자들이 복귀한 가장 큰 원인은 이 시기가 고무공업의 한산기로 휴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본가에게는 거의 타격을 주지 못하는 반면 생활난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 평양지역 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1930년 평양지역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1930년 8월 6일 평양지역 각 자본가들이 모여 노동자들의 임금을 각각 1원씩 내리기로 결정한 데 대하여 평양지역 13개 고무공장 남녀노동자 1800여명이 이에 맞서 총파업을 단행한 것이다. 평양지역 고무공장의 자본가들은 공동의 태업을 결정하기도 하였으며, 노동자들의 파업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6일 밤, 협의하여 임금 1할을 평균적으로 인하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14일까지 공장으로 돌아오지 않는 노동자에 대해서 해고결정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하여 7일부터 국제(國際), 구전(久田), 정창(正昌), 평안(平安), 대동(大同) 등 5개 공장 노동자들이 연합하여 파업을 단행하였으며, 금강(金剛), 내덕(內德), 동양(東洋), 세창(世昌) 등 고무공장도 태업 상태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13개 고무공자 노동자 대표들은 10일 오전 9시 백선행 기념관에 회합하여 대책을 논의, 총파업을 결정하였다. 파업노동자들은 <우리의 무기는 오직 단결이다>라는 등 격문과 삐라를 살포하면서 노동연맹에 쟁의단 본부를 설치하고 합숙소를 설치하면서 파업을 전개해 나갔다. 평양지역 고무공자노동자들은 자본가측에 대하여 19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임금 감하 절대반대, 무리한 해고 반대와 수당지급, 대우개선, 일요일과 기타 휴업일 임금 지급, 야간 작업 폐지, 징벌제와 벌금제도 철폐, 산전 산후 3주간 휴양과 생활비 지급, 수유시간(授乳時間)의 자유, 파업 중 노동자 모집 반대, 기계 수선과 수선비 노동자 담당 철폐, 연말 상여금 지급> 등이었다. 이러한 평양지역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자본가측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가측은 노동자들의 19개조 요구조건의 일부를 승인하고 타협안을 신간회, 상공협회을 통해 제시하였고 노동자측은 교섭전권위원 12인을 선출하여 자본가측과 교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8일 경찰에서는 상공협회 등의 조정을 금지하고 자본가측의 타협안보다도 불합리한 조건의 승인을 강요, 전권위원들은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교섭결과를 비난하며 극렬하게 항의하였으나 경찰은 모든 집회를 금지시켰으며, 공장들도 23일부터 조업개시를 결의하였다. 무장경관의 계엄령이 발표되는 등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경찰서 습격을 감행하는가 하면, 기계 파손 등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 파업 기간이 장기화됨에 따라 노동자들은 점차 공장으로 복귀하기 시작함으로써 파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동아일보≫는 노동자들의 파업 실패 이유로 <자본주의 단결의 공고함, 정세(政勢) 관찰의 부족, 통제력의 불충실, 지도이론의 불통일>을 제시하였다.

 부산지역 고무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1929년 7월의 부산지역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은 부산부내(釜山府內) 5개 공장의 자본가측이 7월 20일 노동자들의 임금을 2전 이상 3전5리까지 인하하기로 결정한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하여 도변(渡邊)공장에 있던 여성노동자 60여명이 일영(日榮)공장을 습격하여 하여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격렬한 항의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일영(日榮)공장의 여성노동자 80여명이 합세하여 환대(丸大) 공장을 습격하고 여기에 대화(大和)공장과 영남공장의 남녀노동자들이 합세하여 300여명의 남녀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시위투쟁에 대하여 경찰은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노동자들을 해산시켰다. 파업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측의 간청에도 전연 동요하지 않고 공장에 들어갈 때 맡긴 보증금과 일한 임금까지 전부 찾아가는 등 강경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24일 도변(渡邊)공장의 2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복업을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파업단이 도변(渡邊)공장을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고무공장 파업시위의 주동자로 일영(日榮)공장의 안금춘(安今春), 강순이(姜順伊), 김명득(金命得), 권점이(權鮎伊), 황달수(黃達守), 김금출(金今出), 대화(大和)공장의 유구년(劉具年), 도변(渡邊)공장의 박충회(朴充會) 등 8명의 여성노동자를 검거, 구속하였다. 이들 노동자에 대한 검거에 대항하여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계속적인 검속자 석방을 경찰에 요구하였다. 노동자들의 강경한 투쟁에 당황한 자본가측은 경찰에 파업단측과 원만한 해결을 협의할 것이니 8명의 구속 노동자의 석방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1929년 7월의 부산지역 고무공장 남녀노동자들의 파업은 자본가와의 직접 교섭을 통하여 임금 인하폭을 감하한다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배구자(裵龜子)
배구자(裵龜子)는 식민지시대 신무용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무용사의 기초를 닦았던 무용가이다. 배구자는 1905년에서부터 1908년으로 출생연대가 사료마다 정확하지는 않다. 배구자의 출생에 대하여 배구자가 그녀의 고모이며 구한말 요화(妖花)로 일컬어진던 배정자와 이토우 히로부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것은 배구자가 이토우의 수양딸로 총애를 받았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그녀는 배석태의 딸로 경성에서 태어났다. 배구자는 1916년 내한한 덴가쯔(天勝)예술단의 공연을 관람한 후 덴가쯔예술단에 입단하기를 희망하던 중 고모인 배정자의 집에 드나들던 종로경찰서 형사인 하시모토(橋本)의 소개로 덴가쯔 예술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덴가쯔예술단은 1900년대 초 조직된 예술단체로 무용, 음악, 곡예, 연극, 가극 등을 공연하는 단체로 노래와 춤, 연기력을 모두 갖추어야 했다. 또한 덴가쯔 예술단은 일본과 조선은 물론이고 남북 미주지역과 만주, 러시아 유럽까지 순회공연을 다닐만큼 유명한 예술단이었다. 덴가쯔예술단에서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던 배구자는 덴가쯔의 후계자로까지 인정받게 되었으며, 덴가쯔의 남편의 성을 받아 노로가메코(野呂龜子)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1921년 배구자는 소천승(小天勝)이라는 별명으로 덴가쯔의 상대역으로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해외순회공연을 통해 서양무용을 많이 접하게 되었던 배구자는 그러는 동안 민족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일본인 예술단원들의 질시와 학대 속에서 배구자의 민족적 자각을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되었다. 결국 배구자는 1926년 6월 3일 덴가쯔예술단의 평양순회공연 중 예술단을 탈출, 조선에서의 예술활동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공연단을 탈출한 배구자는 2년 동안 은둔생활을 마치고 미국유학을 준비하며 1928년 4월 20일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고별 음악무도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고별공연에서 배구자는 <유로레스크>, <집시댄스> 등 서양무용을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작무용 <아리랑>을 공연하였다. <아리랑>은 재래의 전통무용을 현대적으로 개량한 것이었다. 미국유학이 어렵게 된 배구자는 1929년 탈출을 도운 홍순언과 결혼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무용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6월, 배구자는 전통무용을 개량한다는 목적으로 <배구자무용소>를 개설, 12명의 인재를 모아 무용가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1929년 9월 영락정 중앙관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개최하였다. 한국무용사상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발표회를 개최한 이날의 무용발표회에서는 배구자 자신의 창작신무용과 연구생들의 합동무용,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의 독주, 피아노 독주, 그리고 서양영화까지도 공연하였다. 소설가 심훈은 이날의 공연을 <진지하고 학구적이었다는 점, 순수한 우리 춤을 개발창작하였다는 점, 배구자의 춤이 민요적이고 서정적이며 소야곡적인 예풍을 가졌다는 점> 등이라고 평가하였다. 1930년 배구자는 무용연구소를 가무극단 성격으로 재편성, 단성사에서 대대적인 창립공연을 개최하였으며, 1935년에는 서대문 로타리에 650여석의 무대예술 전문극장인 <동양극장>을 개관하였다. 신축개관공연에서 배구자는 배구자악극단으로 단체를 개명하고 만극(漫劇) <멍텅구리 제2세>, 촌극 <월급날>, 무용극 <급수차>, 소녀관현악단의 무대연주, 무용 5종, 조선무용 <아리랑>, 독창, 합창, 악극 <피리의 기적> 등 다양한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피리의 기적> 마지막 장면에서 배구자가 작은 태극기를 흔든 것이 경관에게 발각되어 그녀는 1주일간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으며, 다양한 공연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공연을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활발한 공연활동을 전개하던 이후 배구자는 남편의 죽음으로 공연활동을 중단하고 극장경영에 몰두하였으나 무리한 경영으로 동양극장에서 손을 떼고 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배구자는 신무용을 창조하여 민족무용사의 토대를 확립하고, 악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장르를 개척하였으며, 무대예술 전문극장인 <동양극장>을 건립, 대중적인 연극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한 신무용의 개척자였다.

 경성제사(京城製絲)공장 노동자 파업
1926년 4월 20일부터 시작된 경성제사(京城製絲)공장의 여성노동자 1백 60여명의 파업은 임금의 중간착취문제와 임금인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경성 행촌동에 소재한 경성제사공장은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는 경기도에서 경영하던 공장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반 공장과 달리 도 특별 예산에서 계산하여 그해 표준 가격에 의하여 <고치> 한 관을 실로 만들기까지의 임금을 얼마씩 정하여 지불하는 규정인데, 이전에는 고치 한 관을 실로 만드는 데 임금이 20원 내지 12,13원까지 되던 것이 현재는 7,8원에 불과하므로 노동자들은 그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임금이 줄어든 이유가 중간 착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파업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4월 21일 공장노동자들은 모여서 합의한 후 태업을 하면서 당국자의 반성을 촉구하며, 임금의 중간 착취에 대한 의혹을 해결하고 임금을 인상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당국자인 이등(伊藤) 주임은 도리어 횡포가 더욱 심해지자 노동자들이 분개, 21일부터 본격적인 동맹파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담당서인 서대문시에서는 고등계원과 보안계원이 연합하여 현장을 엄중히 경계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을 뿐 아니라 21일 아침 8시경에는 파업의 선동자로 신명복(辛明福), 이기희(李奇姬) 등 2명을 파출소로 연행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당국과 공장측의 태도에 분개하면서, 이번의 동맹파업은 전체 노동자들의 생활과 직결된 문제로 몇몇 개인의 선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서 파출소로 가 항의투쟁을 전개하였다.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에 대하여 공장측은 21일 오후 2시 즈음에 이르러 노동자들을 모두 작업장에 몰아넣고 문을 밖으로 걸어잠그고 나오지 못하게 하고 이에 항의하던 7명을 선동자라고 하며 공장에서 내쫓고 억압적으로 복업을 시키는 등 강압적으로 대응하였다.

 조산부양성소(助産婦養成所)
조산부(助産婦)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 처음 설치된 것은 1908년 2월이었다. 경성(京城)의 남촌에 사는 이종문이라는 사람이 「산파교육이 없어 생산(生産)할 때 쉽게 목숨을 잃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외국의 산파를 고용하여 산파원을 세우기 위해 내부(內部)에 청원을 낸 것이 시초였으나 산파양성소에 관한 소식이 이후 신문에 전혀 나오고 있지는 않아 그 구체적 진행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후 1909년 11월 전 부령(副領)인 윤치성이 중부 교동 등지에 <조산부양성소(助産婦養成所)>를 세운 기사가 여러 번 보이고 있다. 이 조산부양성소는 1910년 1월 9일 지석영(지석영) 등이 참석하여 발기회를 열고 임원을 뽑아 소장에 고 홍순관(홍순관)의 부인인 박씨(朴氏), 부소장에 윤고라, 총무에 최선경을 뽑았다. 그후 이 양성소는 1910년 6월 소장에 최선경, 감독에 서광전, 총무에 오구영, 학감에 유병필, 찬성장(贊成長)에 김임화가 선임되는 등 조직개편이 이루어졌다.

 박차정(朴次貞)
박차정(朴次貞)은 일제시기 항일독립운동과 여성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여성이다. 박차정은 1910년 5월 부산의 동래에서 태어났는데, 박차정의 아버지는 일제에 의한 강제합방 이후 1918년 민족적 울분으로 자결하였으며 그의 오빠인 박문희는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통일전선운동과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가족적 배경과 함께 박차정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東萊日新女學校)에 입학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우며 본격적인 여성운동과 항일투쟁에 나섰다. 박차정은 1929년 3월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으며, 동래청년연맹(東萊靑年聯盟)의 부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21세 때 서울 근우회(槿友會)의 선전부장이 되어 전면적인 운동에 투신하였다. 여성운동의 통일전선체인 근우회에서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 투쟁을 목적으로 활동한 박차정은 1930년 1월,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에 근우회 간부가 조직 지도에 관여되었다는 이유로 허정숙(許貞淑), 정칠성(丁七星), 박호진(朴昊辰) 등과 함께 체포, 구금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수감생활 후 출옥한 박차정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한달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후 박차정은 중국으로 망명한 박문희의 뒤를 따라 상해(上海) 인육시장(人肉市場)으로 팔려가는 여성들 사이에 숨어 인천에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북경의 화북대학을 졸업하고 의열단(義烈團) 단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했던 김원봉(金元鳳)과 결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박차정은 여자 의용군(義勇軍)의 대장이 되어 곤륜산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윤심덕(尹心悳)
윤심덕(尹心悳)은 1920년대 대중문화를 꽃피운 신여성이었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926년 8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이다. 당시 신문에 난 윤심덕의 사망 관련기사를 보면,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도쿠주마루(德壽丸)가 8월 4일 오전 4시경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명과 중년신사 한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연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情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라고 기사화되어 있다. 기독교 가정의 둘째딸로 태어난 윤심덕의 집안은 아버지가 가계 점원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고 전도사인 어머니가 외국인 병원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등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윤심덕은 1918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일선융화(日鮮融和)정책에 따라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일본에 유학,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에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윤심덕은 동아부인상회 창립3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소프라노 성악가로 첫선을 보였다.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선생으로 근무하며 음악회에 출연하여 성악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탈리아나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를 희망하던 윤심덕은 유학이 어려워지자 1925년 극단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925년부터는 <토월회(土月會)> 배우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2월 <카르멘>의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토월회>의 배우로서의 활동은 2회 공연으로 마치고 <토월회>를 탈퇴하여, 유행가수로 전향하였다. 특히 1925년 일동(日東)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취입한 24곡을 비롯, 1926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왈츠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사(死)의 찬미>는 조선민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사카(大阪)의 일동레코드에서의 취입을 마치고 관부연락선편으로 귀국 도중 윤심덕은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정사하였던 것이다.

 근우회 평양지회(槿友會 平壤支會)
1927년 중앙에서 근우회가 창설되자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근우회의 지회조직이 진행되었다. 개화운동 이래 평양지역은 경성과 더불어 근대 여성운동이 기독교 계통의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지역이다. 근우회 평양지회(槿友會 平壤支會)는 1928년 1월 30일 조직되었다. 조선여성운동의 중심지였던 평양에서 근우회 지회가 근우회 창립 반년여만에 설립되었다. 1927년 12월 24일 평양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근우회 평양지회 설치준비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조신성(趙信聖), 박현숙(朴賢淑), 한영신, 백덕수(白德秀) 등이 중심이 되어 개최된 설치준비위원회는 중앙에서 파견된 유영준이 근우회에 대한 취지를 설명, 평양지회를 승인함을 설명하였다. 이날 대회는 임시의장 조신성의 사회로 창립대회준비위원으로 박현숙, 박승일(朴昇一), 김선경(金善卿), 조신성, 김경옥(金敬鈺), 백덕수 등 6명을 선출하였다. 그후 설립준비를 거쳐 1928년 1월 30일 오후 7시부터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청년회관에서 평양지회 설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대회는 준비위원 조신성의 개회와 백덕수의 근우회의 취지설명과 각부 집행위원 선거로 이루어졌다. 1930년 4월 3일 개최된 제3회 평양지회 정기대회에서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1). 여성교육단체 2).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정치적 일체 차별 철폐 3).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4). 조혼 폐지 및 결혼 이혼 자유 5). 인신매매 및 공창폐지 6). 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7).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사후 휴양과 임금지불 8). 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업 철폐 9).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10). 노동자 농민의 의료기관 및 탁아소 설치>를 결정하였다. 근우회 평양지회에서 활동한 여성들은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평양지회를 전체적으로 우파 민족주의적 성격을 나타냈다. 근우회 평양지회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목적으로 1930년 12월 여자실업장려회(女子實業業勵會)를 조직하고 실업여성을 위하여 메리야쓰공장 설립을 기획하기도 하였으며, 부녀자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1930년 12월 평양지회관에 부인야학회를 설립하는 등 여성교육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근우회 경성지회
근우회 중앙집행위원회는 1928년 2월 1일 경성지회 설치안을 제기하고 경성지회 설립촉진위원 5명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2월 20일, 근우회 본부회관에서 30명의 발기인이 모여 경성지회 발기회를 개최하고, 2월 24일 설립준비위원으로 정종명(鄭鍾鳴), 한신광(韓晨光), 권봉주, 김필수(金必壽), 심은숙(沈恩淑), 강석자(姜石者), 김영희(金瑛禧), 강정희(姜貞姬), 조원숙(趙元淑), 허정숙(許貞淑), 김영순(金英順), 김수준(金繡準), 유각경(兪珏卿), 황신덕(黃信德), 이현경(李賢卿) 등 15명을 선정하였다. 마침내 경성지회는 1928년 3월 24일 오후 7시 30분부터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경성지회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300명의 회원 가운데 50여명만이 출석하자 창립대회는 유회(流會)되고 말았다. 준비위원회는 전국대회에 대한 준비도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유각경, 이현경, 황신덕 3명을 건의작성위원으로 위촉하여 근우회 창립 초의 행동강령을 수정한 건의안을 작성하였다. 행동강령은 <1). 남녀의 정치적 사회적 절대평등 2). 결혼의 자유와 직업의 자유 3). 인신매매의 철폐 4). 여자교육의 확장, 현교육제도의 개선, 문맹퇴치 5). 모성보호 6). 무료탁아소 및 육아소 설치 7). 여공의 보호, 노동조건 및 공장시설의 개선 8). 농촌부인을 보호하는 각종 시설 9). 집회 결사 언론 출판의 자유>이었다. 연기된 경성지회 설립대회는 3월 31일 천주교기념관에서 1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축문 5통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낭독되지 못하였으며, 여자교육 기회균등과 신간회지지 등 2개조도 경찰의 금지로 토의되지 못하였다. 근우회 경성지회(槿友會 京城支會)는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낮은 편이었는데, 그러한 이유로 경성지회의 운영사업 중 큰 문제가 회원확보와 관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성지회는 1931년 근우회의 해소가 있기 전 1930년 3월 15일 마지막 정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회원모집, 선전조직, 야학설치, 부인직업소개소 유지, 월례회, 재정방침, 노동부인 및 ≪별건곤≫에 실린 기사문제 등이 결의되었다. 전체적으로 경성지회의 실행사업들은 근우회가 해소될 때까지 미미한 수준에서 진행되었다. 경성지회의 인적 구성을 보면, 경성지회 창립자들은 대부분 근우회 본부 창립자들이며, 사회주의적 성향의 여성들이 대다수였다.

 교사
식민지시대 근대식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활동한 주요한 직업은 교사였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 교육방침을 개선하여 남자보통학교에서도 여자 교원(敎員)을 채용하기로 하였다. 총독부는 여자교원 채용에 대한 이유로 <여자가 남자보다 아동의 심리상태를 더 잘 이해하며, 어린 아이들은 남자보다도 여자교원을 좋아하며, 여자는 남자보다 친절한 자태와 성질이 풍부함으로 아동교육에는 여자교원이 낫다>는 것이었다. 교사직에서의 여성 수요의 증가와 더불어 여성의 교육이 증가하고 문맹퇴치운동으로 인하여 1915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사범과가 신설되는 등 교육기관이 증설되게 되었다. 당시 교직은 여성이 자녀를 교육시키는 가정주부의 역할과 비슷하므로 남자보다도 오히려 여자의 직업으로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당시 여학교 졸업생들이 희망하는 직업의 첫째가 교사였다. 1912년에서 1945년 사이 국민학교의 경우 교사의 총수가 증가하는데 여교사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전교사의 수에 대한 여교사의 비율도 1928년에 11.5%이던 것이 1938년에는 14.0%, 그리고 1945년에는 12.9%를 차지하였다. 여교사는 대부분 보통학교와 유치원에서 아동의 초기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1934년 여성 교원 수는 모두 1,716명이었으며 그중 59%가 공사립 보통학교의 교원이었고 22%는 공사립 유치원의 교원이었다. 또한 여교사들이 담당한 과목은 자수, 재봉, 가정 등 가사 관련 과목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교원들의 보수 또한 민족별, 성별에 차이가 있었다. 공립 보통학교의 경우 1939년 일본인 남자 교원은 105원, 여교원은 79원의 보수를 받았으며, 조선인의 경우 남자 교원은 55원, 여교원은 48원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은 승진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관립학교 교장은 남성들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직종에 비해 남녀교원의 월급차이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으며, 안정적인 직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여성직업으로 인기가 많았다. 또한 여교사는 미혼보다 기혼여성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이었다.

 근우회(槿友會)의 인적구성
1927년 5월 27일 기독교계 여성이 중심인 우파 여성들과 사회주의계 좌파 여성들이 연합하여 근우회를 조직하였다. 창립 당시 주요한 참여자들은 종교적, 자유주의적 사상의 민족주의 우파세력과 비종교적, 사회주의적 사상의 좌파세력의 연합이었다. 1927년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21명은 거의 근우회 발기 초기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거의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으며,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텔리 여성들이었다. 민족주의 우파계열은 YWCA 등 기독교계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인물들과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김활란(金活蘭), 차사백(車士百), 유각경(兪珏卿), 방신영(方信榮), 김선(金善), 김영순(金英順), 홍애시덕(洪愛施德) 등 7명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들은 이현경(李賢卿), 박신우(朴新友), 박원희(朴元熙), 조원숙(趙元淑), 정칠성(丁七星), 정종명(鄭鍾鳴), 우봉운(禹鳳雲), 황신덕(黃信德), 유영준(劉英俊), 이덕요(李德耀) 등이다. 초기 근우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주의 좌파세력이 기간을 이루었다. 근우회의 사상적 위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 비개량파 사회주의 세력인 민족주의 좌파로 대표되었다. 1928년 근우회 임시전국대회 회의는 목포지회 분규문제로 소란을 일으켰으나 파쟁 쌍방의 무조건 합동으로 일단락짓고, 중앙집행위원 및 중앙검사위원이 선출되었다. 집행위원으로 차사백, 이현경, 정칠성, 정종명, 황신덕이 선출되었으며, 김활란, 유각경, 최은희(崔恩喜), 우봉운은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날 선출된 38명 가운데 9명이 집행위원으로 위임되었는데 이 가운데 차시백을 제외한 나머지는 열렬한 사회주의 여성활동가였다. 1928년도의 집행위원은 사회주의계 여성들이 전년에 비해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29년 총회에서는 집행위원장을 비롯하여 위원은 14명이었다. 위원장은 정칠성이 선임되었으며, 허정숙(許貞淑), 백덕수(白德秀), 한신광(韓晨光)과 새로이 박차정(朴次貞)과 김선이 선임되었다. 이때가 되면 근우회에는 민족주의 계열이 거의 퇴진한 상황이 되었다. 1929년 대회에서는 무산여성대중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신념이 강하게 대두되면서 이념적 강령을 행동적 강령으로 수정하는 등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 대회에 이르러서는 민족주의 우파계열의 조신성(趙信聖)이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하여 지방대회 대표들이 다양하게 선임되었으며, 황애시덕(黃愛施德), 손몌례(孫袂禮) 등 민족주의계열 여성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허정숙(許貞淑)
허정숙은 함경북도 명천(明川)에서 허헌(許憲)의 큰딸로 태어났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허정숙은 일본 고베(神戶)신학교로 유학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허정숙은 조선여자교육협의회에 참여하여 인습타파와 여성계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상해(上海)로 건너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하였다. 귀국하여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였으며, 수가이(秀嘉伊)라는 필명으로 여성문제에 글을 쓰는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1월에는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26년 5월 허헌과 함께 미국 컬럼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5월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허정숙은 근우회(槿友會)에 가입,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7월 근우회 전형위원 및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허정숙은 1928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 ≪동아일보≫에 <부인운동과 부인문제-조선여성 지위는 특수>라는 연재를 게재, 여성운동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이 글은 당시 조선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조선민중 전체가 무산계급화한 상황과 결합하여 분석, 마르크스 사회이론으로 여성문제를 파악한 것으로 허정숙의 사회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는 글이다. 1929년 7월 근우회 제2차 전국대회를 통해 중앙집행위원 및 서무부장으로 선출된 허정숙은 그해 12월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서울지역 항일학생 동맹휴학 시위를 주도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을 기도한 혐의로 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투옥 상황인 1930년 5월 감옥 안에서 셋째 아들 영한을 낳고 늑막염에 걸려 보석되었던 허정숙은 다시 1년만에 재수감되었다. 1932년 출감한 후 신간회, 근우회 등 합법적인 사회운동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허정숙은 태양광선치료소를 운영하면서 활동방향을 모색하였다. 그후 허정숙은 최창익과 함께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허정숙은 해방 때까지 공산주의 단체인 조선독립동맹 소속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북한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는데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선전부장, 1948년 제1차 내각 문화상, 사법상, 1957년 대외문하연락위 위원장, 1959년 최고재판소장, 1972년 조국전선 서기장, 제5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1980년 당대회 당중앙위원, 1981년 비서국 비서 등을 담당하여 88살까지 공식행사에 모습을 나타냈다.

 버스 차장
버스 차장(안내양)은 소위 <여성직>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이 독점하는 직업이었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서비스산업은 발전하였으며 그만큼 수요도 늘어났다. 버스 차장은 타를 타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 여성들에게는 선망의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1928년 3월 대구부영(大邱府營)에서 버스 차장을 24명 모집하였는데, 그 조건을 보면 만 16세 이상 25세 이하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여성이 모집 대상이었다. 대구부영뿐 아니라 대체로 버스차장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16세에서 20세 정도의 미혼녀로 독본(讀本), 산술, 상식, 신체검사, 구술시험 등을 통해 채용되었으며, 30일 내지 40일 정도의 견습기간 동안은 하루 40전을 받고 10시간 정도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버스 차장의 보수는 노동시간 8시간에 보수 70전, 매시간 초과할 때마다 7전이 부과되어 초급이 약30원이며 매일 매상액 10원당 수당금으로 8전이 더붙어 평균 매월 40원 정도의 수입을 받고 있었다. 이 정도의 수입은 웬만한 남성들보다 나은 수입이었다.

 일제시기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성노동자 모집은 1900년 초 전환국에서 최초로 지폐를 만들게 될 때 15명의 여성노동자를 모집하였는데 응모자의 25배가 몰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 여성노동자는 자본주의화가 진행될수록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경제의 침략과 함께 공장의 수도, 종류도 다양해졌다. 1906년 경성 동아연초회사(東亞煙草會社)와 목포 조면회사(繰綿會社)가 창립되었는데, 노동자의 자격규정으로 <국문 약해자(略解者)에 한함>이라고 하고 있다. 1910년 공장수 151개소에 노동자 8,203명이었던 것이 1922년에는 2,900여 개의 공장이 있었으며, 10인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은 664개소에 노동자수 48,043명이며, 이중 여성노동자는 9,870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20.5%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후 1930년대부터는 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여 여성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3할이 넘었다. 이러한 여성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최저의 임금으로 착취당하고 있었다. 일제하 전반을 통해서 노동자 파업의 주된 원인은 임금문제로 도급제도와 벌금제도를 통한 유인 위협전술은 노동자들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 마산의 조면공장의 파업시 요구조건은 <1). 식사시간은 매일 30분씩 2회 허락해 줄 것 2). 남녀직공에게 마스크를 줄 것 3). 공장내에 직공 사용의 목욕탕을 설비해 줄 것>으로, 먼지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조면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마스크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남성노동자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 1929년 남성노동자의 임금은 여성노동자의 1.7배였으며, 1937년에는 거의 2배 가까이 되었다. 1929년 11월 3일자 ≪동아일보≫의 <어느 여공의 하소연>이라는 기사에 보면, <......임금은 매일 10전씩이나 3주의 견습동안에는 하루에 6전씩 한달에 30여전으로 감독이나 순사에게 아양을 부리면 하루가 곱게 넘어가고 비위를 거스르면 종일 욕먹고 온갖 고초를 받아 겨우 20전에 불과......또 남공들의 무서운 색에 주린 무서운 유혹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퇴사할 시는 경찰서에서 죄인 다루듯이 일일이 몸을 검사하지요.....>라고 하여 식민지하 여성노동자의 비참한 노예적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기숙사제도
일제의 무력을 앞세우고 들어온 일제의 자본은 조선의 노동자들을 소위 근대적 노동자로 훈련시키고 길들이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기숙사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기숙사는 여성노동자를 여러 지역으로부터 모집해오고 여성노동자의 이동이나 도망을 방지하여 노동력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면방직 공장의 경우 기숙사제도의 도입은 규칙적인 시간의 강제를 위한 유효한 도구였다. 일제시기 기숙사는 복지제도가 아니라 여성노동자의 자유를 속박하는 강제적 감옥소의 하나로 묘사되고 있다. 면방직 공장의 일반 노동자의 경우 남성노동자는 통근을 하거나 기숙사를 이용하는 것이 자유로왔던 것에 비하여 여성노동자는 미혼일 경우 거의 전원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하였다. 기숙사는 주야 2교대제, 12시간의 규칙적인 노동으로 운영되는 면방직 대기업에서는 지각이나 결근 등을 방지하여 작업을 통제하에 두는 데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기숙사는 대부분 유년의 미혼 여성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방 크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많으면 20여명이 한 방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기숙사의 환경은 열악한 편으로, 기숙사 거주 여성노동자는 <이불에 빈대가 한되, 벼룩이나 이가 드글드글하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기숙사의 관리는 일본인 여성 사감장이 맡았는데, 사감의 경우 작업시간에 따라 기상과 취침을 점검하는 것은 물론이고 청소, 목욕, 훈계와 여성노동자의 외출, 저금관리까지 일상생활 전반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작업시간 이외에도 기숙사에 묶여 자유로운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은 기숙사제도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은폐시키고 노동자들을 공장에 묶어놓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벌금제도
일제시기 공장들은 식민지 여성노동자들을 공장 규율에 복속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징벌체계를 제도화하였다. 특히 벌금제도는 일제하 방직공업이나 고무공업 등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높았던 부분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1927년 10월 21일 ≪동아일보≫에 실린 <여공의 눈물 생활-벌금이 임금을 초과>라는 기사에는 「......임금은 불과 20전 내지 40전입니다. 매일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 10시간 이상 노동하여 오게 되는데 아침에 출근이 좀 늦으면 5전씩 벌금을 받고, 점심시간에 좀 늦으면 10전, 작업 중의 과실을 범한 사람을 말하지 아니하면 5전 내지 10전, 한번 잘못 들어도 5전 내지 10전, 너무 곤하여 잠간 조는데는 으레히 15전씩.......」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있으며, 광주의 도시제사의 경우에도 9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명목의 벌칙이 자행되고 있었다. 또한 한 공장의 벌금체제를 보면, 시간표 분실이나 조작시 일당의 10%, 시간표를 찍기 위해 줄을 서지 않은 경우 일당의 10%, 예고없이 결근을 할 경우는 일당의 40%, 빈번한 지각이나 일주일에 2번 이상의 지각을 할 경우는 일당의 50%를 벌금으로 물어야만 했다. 이와같은 벌금제는 벌금이 임금을 초과하거나 때로는 여성노동자가 회사측에 빚을 지는 경우까지 존재하였으며, 일제시기 신문기사에 벌금제도의 문제가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방직공업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는 벌금제 철폐와 관련된 요구조건이 제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1926년과 1931년의 경성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파업과 1930년 조선방직 파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같이 노동자들이 벌금제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데 대하여 공장측은 「벌금은 본시 직공을 체벌할 의사와 또는 배상의 이유가 아니라 직조를 정밀히 하게 위한 독려의 의미이니 결코 이 제도가 무리하지 않다」라는 기만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파급-개성지역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후 서울에서의 학생들의 시위투쟁은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개성지역은 12월의 시위투쟁에 이어 1930년 1월 초 개학이 되자마자 각 학교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 개성에서의 학생들의 시위투쟁이 전개된 것은 1월 9일이었다.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 240여명이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고 일제히 가두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 대열에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 여학생 250여명이 참가하여 검거된 학생의 무조건 석방과 식민지노예교육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미리흠여학교(美理欽女學校)의 경우 학교당국의 강력한 방해로 참여하지 못하자 여학생들은 교내에서 통곡을 하였다. 이날 남녀 학생들은 개성 남대문까지 진행하면서 경찰과 충돌, 90여명의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개성지역 학생들의 시위투쟁은 그 다음날인 1월 10일에도 계속되었다. 미리흠여학교 학생 20여명과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20여명은 시민 100여명과 함께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 20여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길정희(吉貞姬)
길정희(吉貞姬)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東京女子醫學專門學校)로 유학하였다.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길정희는 로제타 홀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수인 최동박사의 소개로 길정희를 찾은 로제타 홀은 조선에 여의사가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정희는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동대문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홀을 찾아갔다. 그후 길정희는 우선 조선총독부 병원 소아과에서 1년간 수련한 후 동대문병원에서 산부인과와 소아과 일을 하게 되었다. 6년간 동대문병원에서 일하면서 길정희와 홀은 여의사 양성의 중요성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러던 중 홀은 1928년 9월 4일 경성여자의학강습소(京城女子醫學講習所)를 설립하였다. 경성여자의학강습소의 설립으로 이제까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등으로 유학해야만 했던 여성들은 이곳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총독부가 주관하는 의사면허 시험을 거쳐 정식 의사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창신동 채석장 근처에 2층 양옥으로 건설된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홀이 소장을, 길정희가 부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운영비 일체는 홀의 사재(私財)로 충당하고 강의는 경성에 있는 전문의들이 무보수로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1941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192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세운 후 홀이 68세로 은퇴하자 1933년 9월부터는 길정희와 그녀의 남편인 한성의사회 회장인 김택원(金澤元)이 인계받아 경영하게 되었다.

 정종명(鄭鍾鳴)
정종명(鄭鍾鳴)은 식민지시기 여성운동, 사회주의운동의 역사 속에서 항상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1895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정종명은 1922년 4월 1일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공부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부터 정종명은 사회주의 사상을 체화하였는데, 코민테른의 조선조직인 공산청년회의 유일한 여성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정종명은 1924년 5월 박원희(朴元熙), 허정숙(許貞淑), 정칠성(丁七星), 주세죽(朱世竹) 등과 함께 최초의 여성사회주의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결성하여 여성문제의 해결을 무산계급의 해방에 두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6년 12월에는 망월구락부(望月俱樂部)를 조직하였다. 정종명의 사회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통일전선체적 성격을 띤 전국적 여성조직인 근우회(槿友會)의 결성이다. 근우회는 김활란(金活蘭), 유영준(劉英俊), 현신덕(玄信德), 유각경(兪珏卿) 등 민족주의 계열과 황신덕(黃信德), 박원희, 허정숙, 주세죽 등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들이 좌우합작과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민족해방과 여서해방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근우회에서 정종명은 집행위원을 역임하는 등 그 중심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11월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특히 서울지역에서 여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투쟁이 일어나자 이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이유로 정종명은 허정숙, 유덕희(劉德姬), 박차정(朴次貞), 박호진(朴昊辰) 등과 함께 검거되었다. 신간회와 근우회가 민족개량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자 이들 단체 내에서는 이러한 개량적 조직을 부정하고 노동자, 농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것은 신간회와 근우회의 해소로 이어졌다. 사회주의자 정종명 또한 이러한 계급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근우회 해소 이후 정종명은 비합법 투쟁으로 들어갔다. 정종명은 1930년 8월 전위당 재건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31년 4월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았다. 1935년 7월 만기 출옥한 후 10여년 동안 정종명의 활동은 명확히 그 행적을 알 수는 없으며, 1945년 12월 결성된 조선부녀총동맹(朝鮮婦女總同盟)의 함남대표자로 중앙위원에 선출된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3.1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전민족적 운동으로 전개된 독립시위운동은 1년여에 걸쳐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1908년 관립 한성고등여학교(漢城高等女學校)로 시작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의 최정숙(崔貞淑), 최은희(崔恩喜), 김일조 등은 2월 28일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비밀리에 독립선언문을 받고 동지를 규합하여 운동의 계획을 세웠다. 3월 1일이 되자 최은희를 비롯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파고다 공원으로 가 선언식에 참여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그 가운데 32명이 일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학교측에서는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움직임을 방지하기 위해 휴교를 실시하고 주동자들에게 퇴학처분을 내렸다. 또한 휴교를 풀고 10일 이후부터 수업을 개시하려고 하였으나 결석학생수가 1/3에 달하자 수업을 개시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따라 학교측은 4월 18일 학부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나 학부형 120명 가운데 참석한 학부형은 50명에 불과하였다. 학교를 결석한 학생들의 주장은 <남학교도 개교하지 않았는데 여학교만이 미리 개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라는 것이었다. 학교와 일제당국의 탄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학생인 이선경이 수원에서 혈복단(血復團)이라는 비밀결사체를 결사한 후 상해로 망명하다 일제경찰에 검거되자 가까이 지냈던 동료 7명을 무조건 퇴학시키기도 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파급-부산지역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반일반제(反日反帝) 시위투쟁으로서의 광주학생운동은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투쟁 이후 12월 28일 보도금지가 해제되어 광주를 비롯한 서울에서의 시위투쟁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부산 제2상업학교는 1930년 1월초부터 교내에 격문이 붙기 시작하여 1월 9일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맹휴를 단행하였으며, 13일에는 시위투쟁 계획이 발각되어 다수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또한 부산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1월 14일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며 식민지노예교육 철폐를 요구하면서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이 일로 부산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장실은 형사실로 변할 정도로 일제 경찰의 간섭이 심하기도 하였다. 부산상업실천학교의 여학생들은 구속된 광주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1월 16일부터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진주지역의 경우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진주보통학교 학생들 약 1천여 명은 1930년 1월 17일부터 <노예적 교육 폐지, 경찰침입 금지, 광주학생석방> 등의 내용을 담은 격문을 배포하면서 일제히 시위투쟁을 감행하였는데, 이날의 학생들의 시위로 29명이 검거되고 11명이 퇴학당하였으며, 246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하였다.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의 경우 1월 17일 진주고등보통학교와 함께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무기동맹휴학투쟁에 들어갔는데, 1월 25일 다시 시위투쟁을 계획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파급-평양지역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1930년이 되어서도 그 시위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평양지역에는 1930년 1월 19일 오후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 숭인학교, 광성고등보통학교, 정의여학교,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 평양사범학교 등 9개 학교에 <삼천 평양 남녀학생 제군에게>라는 격문이 뿌려졌다. 그리고 1월 21일 대규모의 연합시위가 전개되었다. 숭의여학교의 여학생 200여명은 21일 오전 숭실중학교 학생 400여명과 숭실전문학교 학생들, 그리고 광성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명과 함께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시위투쟁에는 오후에 이르러 평양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명과 평양사범학교 학생 200여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와 정의여학교 학생들 수백여 명도 시위투쟁을 시도하였으나 학생들은 경찰의 폭력적 저지당하기도 하였다. 1월 21일의 대규모 연합시위투쟁에는 모두 2,400여명의 시위 학생들이 식민지노예교육철폐와 광주학생운동의 구속 학생들 전원 석방을 외치며 투쟁에 합류하였다. 시위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평양시내의 9개 학교는 23일부터 4일간 휴교에 들어갔으나 23일에도 숭의여학교, 광성고등보통학교, 남산여자보통학교 등의 학생들은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양에서의 시위투쟁에는 기생들의 조합인 기성권번(箕城券番)의 기생견습생 200여명도 참여하여 수업을 거부하였다. 1930년 1월의 평양지역에서의 대규모 시위투쟁으로 170여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으며, 150여명이 구류처분을 받았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파급-전주지역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광주지역과 거리가 가까웠던 전주지역 역시 학생들의 시위투쟁이 전개되었다. 1930년 1월 20일 전주에는 <힘있는 동포여,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적 총독정치는 동포의 피를 흡취(吸取)하고 불쌍한 동포는 철창에 있다. 동포의 해방을 위해 백절불굴(百折不屈)로 돌진하라. 식민지교육은 사기적 아편주사이다>라는 내용의 격문이 살포되었다. 전주지역의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전주공업보습학교의 학생들은 시위투쟁을 준비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주동자들 수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0년 1월 24일에는 기전여학교 학생 100여명이 태극무늬로 수를 놓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투쟁을 전개, 그 가운데 수십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기전여학교의 기숙사 학생들 70여명은 광주학생운동과 학생들에 대한 미국인 교장의 태도에 분개하며 27일부터 단식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흥학교도 1월 25일 70여명의 학생들이 깃발과 격문을 뿌리며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여성노동자의 임금문제
일제시기 노동자들의 임금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민족별, 성별, 연령별에 따른 임금의 격차가 매우 크다는 것이었다. 임금 수준을 보면, 일본인 남성노동자의 임금이 가장 높고 일본인 여성노동자는 조선인 남성노동자의 임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반면에 조선인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 여성노동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다. 제사(製絲) 부문의 여성노동자들의 1개월 평균 소득은 12원 59전 정도이며, 유년인 경우는 7원 38전이었다. 고무 부문의 경우 여성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12원 70전, 유년 노동자의 경우는 7원 3전을 받았다. 특히 제사부문의 경우 노동자의 42% 정도가 유년 노동자였음을 추정한다면 평균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훨씬 열악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임금형태는 일본인 남성노동자의 97.2%, 일본인 여성노동자의 85.9%가 정액급을 받는 데 비해서 조선인 남성노동자는 82.5%, 여성노동자는 58.8%가 정액급을 받아 청부급의 비율이 조선인 여성노동자의 경우 그 비율이 상당하였다. 당시 물가로 쌀 두되 정도가 50전 정도로 일제하 여성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기아임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일본 독점 자본의 이윤획득의 주요한 원천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종연방적에서 일하였던 한 여성노동자는 <좋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응모하였지만 실제로 매일 12시간 노동에 겨우 25전의 임금을 받았고 식비 등을 제하고 나면 7전에서 8전을 손에 쥐기도 힘들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조선일보≫ 1926년 10월 26일자에는 산십조제사공장(山十組製絲工場)의 경우 대우가 잔혹할 뿐만 아니라 작업한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는 여성노동자의 하소연을 싣고 있기도 하였다. 여성노동자뿐만 아니라 일제하 노동자의 낮은 임금 수준은 여기에 벌금제와 강제저축제도 등에 의해 그나마의 임금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군시제사(製絲)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충청남도 대전 본정 삼정목에 있는 군시 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 4백 50여명이 1929년 4월 4일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의 파업 이유는 공장에서 여성노동자에 대하여 임금의 1할씩을 떼어 의무적으로 저축을 강요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강제저축은 만 3년이 될 때까지는 찾을 수 없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이에 대하여 여성노동자들은 저축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과 기숙사에서 공장을 직통할 수 있도록 기숙사 뒷문을 통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그리고 노동조건의 향상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파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강제저축은 원칙적으로 고용기한인 3년이 만기되어 퇴사할 때 찾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가족의 특별한 사정을 제외하고는 여성노동자의 임의대로 찾을 수 없었다. 이 강제저축은 강제적인 임금인하의 한 방법이기도 하였으며, 또한 여성노동자를 만기 때인 3년까지 공장에 강제로 묶어둘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여성노동자의 요구에 대하여 군시공장측은 의무저금에 관해서는 회사의 규칙이므로 변경할 수 없으나 1년 이상 저축한 노동자에 한해서 노동자 자신의 혼인비용이나 기타 부모의 장례비용에 한하여 인출할 수 있도록 해주며, 기숙사 뒷문의 통행은 가능하다는 답변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군시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는 자본가측의 답변을 수락하여 복업(復業)하였다.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 파업
1930년 1월 10일 부산진(釜山鎭)에 위치한 조선방직공장의 남녀노동자 2,200여명이 대규모 파업을 전개하였다. 조선방직에서의 파업은 불경기를 이유로 회사측에서 노동자를 감축하고 임금을 2할 인하한다는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파업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30전을 80전으로 임금을 인상할 것, 8시간 노동제를 확립할 것, 승급제를 확립할 것, 해고제를 폐지할 것, 공수(工手)작업 도구는 무료로 지급할 것, 취업 중의 부상자에게 위자료를 확정할 것, 벌금제를 폐지할 것, 식사에 대한 개선건, 노동자가 사던 공구비를 지불할 것, 조선인 일본인 대우 차별을 철폐할 것, 여공의 출문권(出門權)을 폐지할 것>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조선방직 공장에서 같이 일하고 있던 일본인 횡산(橫山)과 송원(松原)은 1월 15일 파업에 가담하면서 공장의 노동조건을 지적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12세의 소녀공에게 12시간 노동을 시키고도 임금은 25전밖에 지급하지 않았으며, 이들 소녀들이 장기근속하여 임금이 50전 이상으로 오르면 회사측은 그들을 해고하고 12,13세의 소녀를 새로이 모집하였다. 또한 승급문제에서도 일본인에게는 연 3회씩 올려주면서도 조선인에게는 1년이 지나야 몇 푼씩 올려줄 뿐이었다. 여성노동자의 출문권 폐지 요구는 인신구속적인 기숙사제도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조선방직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기 대부분의 방직공장에서는 여성노동자의 외출은 자칫 도망으로 연결된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값싼 노동력의 안정적인 확보를 목적으로 여성노동자의 외출의 자유를 박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파업요구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대우, 특히 감독의 비인격적 대우와 구타의 문제였다. 일본인 감독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거나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구타가 관행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업의 전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보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강인하고 결속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방직에서의 파업은 공장안 기숙사의 여성노동자와 공장 밖의 남성노동자가 분리된 상황에서 전개되었는데, 회사측은 여성노동자들을 기숙사 안에 감금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기숙사에 감금되어 있던 여성노동자 7백 74명은 경찰에 주동자로 검거된 4명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4일간의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통근 여성노동자들 또한 18일 여공단 사무소를 설치하여 그들의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행동에 대하여 회사측은 검속자를 석방시키기는 하였으나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등 핵심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지 않음에 따라 파업은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회사측은 파업강경자를 하나씩 해고하기 시작하여 100여명의 노동자를 해고하였으며, 장기간의 파업에 지친 노동자들 가운데 파업을 중단하고 복업(復業)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나면서 파업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는 1927년 2월 14일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여성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이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원들 10여명은 은 2월 14일 서대문의 길정희(吉貞姬)의 집에 모여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던 당시 여성운동의 단일화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황신덕(黃信德)은 한 글에서 <......여성동우회 계통의 소위 부인운동자에 대하여 보수적 태도를 엄수하고 있던 기독교 중심의 지식계급 여성들도 단연 이에 호응하여 조선여자 전체운동의 총본영을 만들어보자는 기운으로 가득차게......근우회 출생의 산파역을 무난히 했다>라고 하며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의 의의를 설명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1).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상설기관을 조직한다, 2).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발기하여 미국, 중국 등에 유학한 이를 합하여 여자외국유학생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실행위원으로 정자영(鄭子英), 진숙봉(秦淑鳳)을, 실행위원으로 유영준, 현덕신(玄德信), 황신덕(黃信德), 이현경(李賢卿) 등 4명을 선출하였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근우회(槿友會)를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것은 초기 통일전선체로서 신간회에는 여성계에서도 참여하였으나 여성의 특수문제들을 신간회 내에서 해결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의 각성과 여성의 힘에 의해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직을 요구하였고,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가 그 토대를 제공한 것이었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27년 4월 16일,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주최로 모인 각국의 여자 유학생 60여명과 함께 범여성적 전국적 여성단체를 조직하자는 데 합의하고 준비위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근우회 창립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혼(離婚)
일제시기는 조혼(早婚)과 강제결혼으로 인한 이혼율이 상당히 높았다. 특히 당시의 신여성(新女性)들에게 있어서 이혼은 연애, 결혼문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었다. 종래의 칠출삼불거(七出三不去)라는 라는 부측의 일방적인 기처제도(棄妻制度)에서 이혼의 자유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1918년의 일이었으며, 1921년 처음으로 부인이 남편을 상대로 재판상 이혼이 성립된 예가 나온다. 그러나 당시 축첩(蓄妾)상태는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없었고 처의 부정은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었으나 남편의 부정만으로는 이혼이 안되는 점에서 여성의 실질적 이혼권은 보장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925년 서울 지방법원에서는 하루 5,6건의 이혼소송이 제기되었으며, <개벽>의 한 통계는 1925년 1월부터 8월까지만 서울에서 이혼이 150여건으로 결혼 900여건에 1할 정도가 이혼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혼은 남성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진 일도 상당하였다. 자녀가 많이 있는데 남편이 아내를 부양할 능력이 없을 때 아내가 이혼을 청구하는 경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식여성을 버리는 남성에 대해서는 동정을 표시하거나 이혼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반면,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는 그 이유가 어찌하던지 가정비극을 초래하며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신여성들은 불행한 결혼을 했다면 <용감하게 그 희생에서 벗어나기를> 권고하였으며, 자신의 결혼과 이혼에 있어서 희생을 강요당했던 굴레를 벗어나 잃어버린 자아를 찾도록 격려하며, 결코 이혼이 인생최후의 길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지방별로는 경기도, 황해도, 평안남도 순으로 이혼이 많았으며, 연령별로는 20세에서 24세가 전체 이혼의 31.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이혼문제는 조혼, 자유결혼 등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사회문제이자 여성문제로 등장하고 있었다.

 서비스직 여성
일반적으로 직업여성은 대체로 남성과 여성이 함께 종사였으나 일제시기 여성만이 독점하는 직업이 있었다. 전화교환수, 미용사, 엘리베이터 걸, 극장접수원, 백화점 점원, 버스차장 등이 그러한 직업군이었다. 1926년 여자사무원의 수입은 일본인의 경우 최고 124원이었고, 특히 전신국과 철도국이 임금이 높은 편이었으나 15원을 받고 일하는 여성들도 존재하였다. 여성사무원은 전화국에 319명, 철도국 234명, 저금관리소에 153명, 경성우편국 60명, 조신은행 40명 등이 일하고 있었으나 조선여성은 몇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전화교환수가 등장한 것은 1920년 경성우편국에서 일어가 가능한 보통학교 졸업 조선여성을 채용하면서부터였다. 전화교환수의 응시요건은 목소리가 명랑하고 듣기 좋아야 했으며, 키는 약 4척 7촌 정도로 143센티미터 정도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채용시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과목은 국어, 산술, 작문과 적성시험을 보아야 했다. 전화교환수의 대체적인 나이는 15세에서 18세 사이였는데, 가장 바쁜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2시까지의 시간이었으며, 이들의 임금은 5,6년 정도 일해야 30,40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근무시간은 9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였으며 3일마다 야근하고 다음날 쉴 수 있었다. 1928년 중앙전화국 광화문 분국에는 40명의 교환수가 있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여성은 11명이었다. 미용사의 경우 최초의 미용학교는 1928년 11월 경성에 설립된 <경성미용학교>였다. 당시 미용실은 요금이 비쌌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이 다니기는 무리가 있었으며, 주요 고객은 기생과 여염집 부인, 여교사 등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이화학당의 학생들의 단발이 유행하면서 미용실에 출입하는 여성층이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

 여성노동자의 소극적 저항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저항 가운데 하나는 공장에서의 도주였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30일자에는 평안남도에 있는 산십조제사(山十組製絲) 공장에서 여성노동자 300여명을 모집하였는데 노동자들이 매일 밤마다 몇 명씩 공장담을 넘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이렇게 여성노동자들의 공장 탈출은 이 공장만의 일이 아니라 식민지 기간 내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의 공장으로부터의 탈출은 대부분 과다한 노동강도와 낮은 임금, 그리고 인격적 모독에 대한 불만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은 민족적, 성적 차별뿐만 아니라 여성노동력을 가계보충적 성격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생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공장에서의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여성노동자들은 기본적 인권은 물론이고 공장주나 감독의 위협적인 행동과 성적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와 같은 여성노동자들의 공장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하여 자본측은 <공장 담벽에 6개의 도망을 감시하는 망루를 설치>하거나 외출 자체를 금지하는 등 강압적인 감시와 통제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노동환경 속에서 탈출한 여성노동자들은 탈출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공장 부근을 헤매거나 역 부근에서 일본 순사에게 잡혀 강제로 공장으로 되돌려 보내졌으며, 이렇게 붙잡혀온 노동자들은 이전보다 더욱 참기 힘든 폭력이나 모욕을 당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의 이러한 도망, 탈출은 일제와 자본측의 노동통제가 강한 당시의 상황에서 소극적인 대응이기는 하였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기도 하였다.

 개성 호수돈여학교 애국가창운동
1916년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과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에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애국적 가창(歌唱)들이 배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이후 무단통치(武斷統治) 아래서 모든 항일투쟁이 제대로 전개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민족적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시도들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애국가창운동(愛國歌唱運動)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한영서원의 교사인 이상춘과 신영순이 편찬한 이 애국창가집 서문에는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정신에 있고 국민의 정신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가곡이 제일이다>라고 하여, 애국심 고취라는 창가집 편찬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 애국가창집에 실린 한 가사를 보면,

닭장의 개가 되어도 / 일본의 시민이 되지 않는다고 /
한번 죽기 결심한 박제상의 충성 / 우리들의 모범이 된다

우리의 조모인 옛 영웅에게 묻노니 / 너의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리라 / 너 독립국의 영웅을 부러워하지 않느냐 / 우리들도 또한 너를 계승할 것을 맹서하노라

등 식민지로 전락한 청년들에게 민족적 긍지와 애국심을 고양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애국가창집은 1916년 12월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75명이 검거 취조되었으며, 그 가운데 호수돈여학교의 교사 윤공량(尹公良), 오입아(吳立娥)와 학생 오연희(吳蓮姬)를 비롯하여 29명이 형사소추되었다.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비밀결사 사건
1929년 7월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全州女子高等普通學校)에 비밀결사 조직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 당국은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비밀결사인 반회가 조직되고 <뉴스>라는 격문을 배포했다는 혐의로 1929년 7월 23일 전주여자고등보통하교 4학년 학생인 임부득(任富得)과 전주청년동맹(全州靑年同盟)의 간부인 정우상(鄭遇尙) 등을 체포하고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김순자(金順子), 유부흥(柳富興), 김영자(金英子), 최숙영(崔淑英), 박동례(朴東禮), 박보배(朴寶培), 최명순(崔明順), 심복림(沈福林), 서경순(徐敬順) 등을 불구속 심문하였다. 이 사건은 임부득과 정우상 등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비밀결사인 반회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을 학습하였다는 것이 일제당국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일제 당국은 배포된 격문이 단순히 여자의 작성문이 아니라는 단정 아래 전주지역의 사회운동단체들을 수색하고 전주에 귀향온 학생들을 체포, 심문하였던 것이다. 주동자로 체포된 임부득은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인 김철주(金鐵柱)의 아내로, 이 사건으로 1929년 8월 17일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전주지방법원검사국으로 송치되어 9월 3일 예심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임부득을 제외한 나머지 관련자들 20명은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측은 관련 학생들에 대하여 퇴학처분을 내렸는데, 이러한 학교측의 처사에 대하여 근우회는 9월 23일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사회교양을 위한 반조직(班組織)에 관한 것으로 퇴학처분을 내리는 것은 부당한 것이므로 학교측에 퇴학처분 해제권고문을 보낼 것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 권고문의 발송으로 정칠성(丁七星), 허정숙(許貞淑)은 종로경찰서에서 3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철원(鐵原)사건
1910년 일제에 의한 조선의 강제합병 이후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학대와 만행은 일제시대 전시기를 통해 계속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특히 1927년 6월 26일 강원도 철원(鐵原)지역에서 일어난 어린아이에 가혹한 폭력사건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사건은 1927년 6월 26일 철원에서 일본인 등택(藤澤)이 운영하는 과수원에 8살된 여자 아이 오순덕(吳順德)이 들어가 오디를 따먹었다는 이유로 과수원 주인이 이 여자아이의 넙적 다리의 살을 도려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철원군민들은 일본인의 가혹한 비인간적 처사에 분개하여 군민성토대회(郡民聲討大會)를 개최하였으나 이 대회 또한 일제 경찰의 금지령으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근우회는 이 사건에 대하여 1927년 7월 1일 정기집행위원회에 토의의안으로 제시하고 위원회를 개최하였으나 경찰의 금지명령으로 토의되지 못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가혹한 행위에 대한 민족적 분개는 사회적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 당국의 폭압적 대응 앞에서 조선의 각 사회단체들은 무력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東京朝鮮女子靑年同盟)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은 1927년 1월 16일 삼월회(三月會)의 후계조직으로 건설되었다.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은 근우회(槿友會) 동경지회의 창립에 앞서 일본지역의 조선인 공산주의계 여성운동 조직의 중심이었다. 40여명의 구성원으로 초대 집행위원장은 강평국(姜平國)이 맡았다.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은 동경조선청년동맹(東京朝鮮靑年同盟)에 단위단체로서 민족과 사회문제를 남성과 같은 위치에서 해결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삼월회 해체 이후 조직된 단체로서 삼월회의 해체에 따른 조직의 분산을 방지하기 위해 조직 되었다기 보다는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한 사회주의 단체였다.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은 계급적 입장을 분명하게 하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은 <조선인단체협의회(朝鮮人團體協議會)>,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동맹(朝鮮總督暴壓政治反對同盟)> 등에 참가하는 등 일제에 반대하는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후 1928년 2월 22일 임시총회에서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은 근우회 동경지회의 설립 이후 해체하였는데, 이 임시총회에서는 1. 본 동맹의 해체선언을 내외 각지에 발표할 것 2. 본 동맹원은 근우회 동경지회에 가입할 것 3. 본 동맹위원으로 재동경조선청년동맹 부인부에 가맹 자격이 있는 자는 속히 가맹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근우회 동경지회(槿友會 東京支會)
근우회 동경지회의 창립대회는 1928년 1월 21일 동경대학교(東京大學校) 기독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60여명의 회원과 박화성(朴花城)의 개회사로 시작된 이날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으로 박화성, 서무부 이완구(李玩句), 김순실, 김현실(金顯實), 변현자(邊賢子), 선전조직부에 양봉순(梁鳳順), 이남향(李南香), 김정희(金正希), 김원주(金元珠), 정치문화부에 강평국(姜平國), 김길례(金吉禮), 김영애(金瑛愛), 재무부에 김분옥(金粉玉), 김은준(金隱俊), 김제봉(金濟鳳), 이정수(李正守), 출판부에 윤성상(尹聖相), 전유점(田有漸), 김봉희(金鳳熙), 조사정보부에 지경숙(池景淑), 최동희(崔東嬉), 임일규(林一圭) 등이 선출되었다. 계급적 입장을 분명히 했던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東京朝鮮女子靑年同盟)의 후계조직적 성격을 가졌던 근우회 동경지회 역시 사회주의적 성격이 컸던 단체였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조직원이었던 김순실, 양봉순 등이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아 근우회 동경지회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지도를 상당정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 5월 25,26일 개최 예정이었던 근우회 정기 전국대회가 일제당국에 의해서 의안과 참석인물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명령을 당하자 근우회 본부는 의안토의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임시 전국대회를 7월 14일 개최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근우회 동경지회와 신간회 동경지회는 이 문제는 근우회에 국한된 탄압이 아니므로 탄압국면에 대항하여 정치적 해금의 일시적 국면에서 대회를 지켜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선동내용을 보면, 1. 모든 반대세력과 대항하면서 대중투쟁의 힘으로 대회를 지켜낼 것 2. 전민족적 정치전선을 엄수하는 정신 아래 신간회에 대한 적극 옹호할 것 3. 일제타도를 결의하고 계급적 대립문제 해결을 통해서 조선여성의 독자투쟁을 전개할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근우회 본부는 7월 12일 집행위원회를 통해 본부를 무시한 행동이라고 하여 동경지회를 무기정권 처분시켰다. 이것은 단순히 근우회 본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중앙 신간회와 근우회의 정치노선에 대한 근우회 동경지회의 비판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근우회 동경지회는 1928년 2월 20일 상무위원회를 통하여 <신간회 전국대회금지에 관한 건, 대회금지에 대하여 전중(田中)수상과 조선총독에 항의할 일, 신간회에 격려문을 보낼 것>등을 결의하였다. 근우회 동경지회는 1929년 6월경부터 내부의 노선문제로 분열을 보이다가 신간회 동경지회의 해산과 함께 근우회의 해산 이전에 일본 각지의 지회와 함께 해산하였다.

 근우회 경도지회(槿友會 京都支會)
근우회는 일본지역에 동경지회(東京支會), 대판지회(大阪支會)와 함께 경도지회(京都支會)를 두고 있었다. 근우회 경도지회는 1928년 2월 12일 수평사(水平社) 청년회관에서 창립식을 개최하였다. 이날 창립식에서는 회장에 최복희(崔福熙), 부회장에 김명순(金明順), 서무부에 황인경(黃仁京), 박기열(朴基烈), 박정숙(朴貞淑)이 선전조직부에 표경상(表景祥), 최경열(崔景烈), 김옥경(金玉卿), 진인업(陳仁業)이, 조사정보부에 김복희(金福熙), 김성철(金聖哲), 안이숙(安利淑)이, 재무부에 고봉경(高鳳京), 유수혜(柳誰惠)가, 교육부에 문남식(文南植), 김동옥(金東玉), 이찬보(李燦寶)가 출판부에 한유순(韓有順), 김윤숙(金潤淑) 등이 선출되었다. 또한 의안토의에서는 <1). 부인노동에 관한 건, 2). 인신매매에 간한 건, 3). 교육방침에 관한 건, 4). 신간회 지지에 관한 건, 5). 관서부인동맹 지지에 관한 건, 6). 회 유지에 관한 건, 7). 재만동포구축(在滿同胞驅逐)반대에 관한 건> 등을 결의하였다. 계급적 성격이 강하였던 근우회 경도지회는 이외에도 1928년 3월 20일 경도지역 우의단체와 공동주최로 부성(婦性)동지회 송별회 개최, 각 우의단체의 연합연설회와 민중대회 등의 투쟁에 적극 참가 원조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
1927년 6월 중국 모아산시(帽兒山市)에 일제가 안동현 일본총령사관분관(安東縣 日本總領事館分館)을 설치하려는 데 대하여 중국인이 조선인과 일본인을 동일시하여 배일운동(排日運動)의 일환으로 조선인을 몰아내겠다는 구축시위운동(驅逐示威運動)이 일어났다. 이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구축시위운동으로 만주지역에 이주해 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농토와 거주지를 빼앗긴 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국내에서는 많은 사회단체들이 상설기구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여기에는 신간회(新幹會)와 근우회(槿友會)를 비롯하여 99개의 단체들이 참가를 희망하였다. 근우회는 1927년 12월 27일 상무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1).재만동포옹호동맹을 적극 지지하며, 각 지회에 지령을 하여 동정사업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케 할 것, 2).연하장을 중지하고 그 경비를 재만동포옹호동맹에 기부할 것, 3).재만동포 동정음악대회를 개최할 것>을 의결하였다. 근우회는 그 구체적인 방침으로 재만동포를 위한 의연금(義捐金) 마련을 목적으로 음악회를 개최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금지 당하였다. 근우회는 음악회의 명칭을 자선음악회로 고치고 다시 허가를 받아 1928년 1월 28일 YMCA강당에서 음악회를 개최, 수익금 100원을 재만동포옹호동맹에 기부하였다. 이밖에도 근우회는 국내에서 재해가 있을 때마다 수해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전국 지회에 수재의연금과 물품을 수집하게 하여 수재민 구제책을 강구하였다.

 직업의 성별분업(性別分業)
일제시기 경제활동의 양상에서는 성별의 뚜렷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직업의 분류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특정 직업에 집중적으로 고용되고 있었다. 여성이 50%를 넘기고 있는 직종으로는 농업부문의 잠업(蠶業)과 축산, 공업 부문의 방직(紡織)공업과 목죽초잠제품(木竹草蠶製品) 제조업, 상업 부문의 접객업, 기타업의 가사사용인(식모) 등이었다. 특히 잠업과 방직공업, 축산업, 그리고 가사사용인의 경우 여성의 비율이 전체의 2/3를 넘을 정도로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직종들은 대체로 가내부업(家內副業)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10%도 안 되는 직종은 대체로 관공리(官公吏), 육해군, 법무종사자 등 공무업(公務業)에 해당하는 직종과 임업, 채탄, 채광업, 제염업(製鹽業), 토목, 건축업, 운수업 등 육체노동의 강도가 높은 직종, 그리고 금속, 기계기구공업, 정교공업, 전기, 가스, 수도업 등 근대적 기술을 요구하는 직종과 인쇄업, 교육종사자 등이었다. 또한 일제시기의 직업 가운데 고학력을 요구하는 직종 가운데 여성은 일본인 여성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다. 관공리 종사자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0.3%인데, 이 가운데 87.2%가 일본인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서기직(書記職)의 경우도 여성의 비율은 3.3%였고 이 가운데 83.3%가 일본인 여성들이었으며, 통신업, 의료직, 저술가, 예술가, 금융보험업, 근대적 기술을 요구하는 직종 등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일제식민지 과정에서 전개되었던 자본주의화는 조선인 여성을 배제한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와 노동조건이 기대되는 직종은 일본인, 그리고 남성노동자에 의해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미(精米) 여성노동자의 비율
식민지 시기 공업 가운데 여성노동자가 집중적으로 몰렸던 직종 가운데 하나가 정미업(精米業)을 비롯한 정곡업(精穀業)이었다. 식료품공업에 포함되는 정곡업은 식료품공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 5,172명 가운데 91.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중은 식민지 시기 후반기로 갈수록 점차 감소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1925년에 86.3%였던 것이 1930년에 이르면 급격하게 감소하여 57.3%로 떨어졌다. 이렇게 정곡업의 비중이 줄어든 원인은 통조림업을 비롯한 다양한 식료품공업으로 여성노동자의 진출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정곡업에서의 여성비율은 남녀노동자 전체 비율 면에서 높은 편이 아니었다. 정곡업에서의 여성비율은 1921년에 42.8%, 1925년에 26.2%, 1930년에 17.0%, 1935년에 15.0%, 1940년에 26.6%를 나타냈는데, 이렇게 정곡업에서의 여성비율이 줄어들게 되었던 원인은 정곡업이 1920년 전반까지 일본에 대한 미곡(米穀) 수출을 위하여 항구를 중심으로 도정(搗精)공장을 설립하였으나 일본의 농업공황 이후 쌀수출이 용이하지 않게 되면서 도정공업은 소규모 경영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곡업에서의 여성노동력은 주로 수출미(米)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선미(選米)노동자로 대량 고용되었기 때문에 쌀수출이 줄어들게 됨에 따라서 정곡업에서의 여성노동자의 비중은 점차 감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서울에서의 1차 시위투쟁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광주학생운동은 12월에 들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의 결정적 계기는 12월 초부터 시작된 서울에서의 학생들의 시위투쟁이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투쟁이 서울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광주지역과 중앙과의 사이에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와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2일부터 시작하여 13일까지 전개된 대규모의 시위와 동맹휴학투쟁에는 모두 1만 2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 이들 가운동 1,400여며의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12월 5일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의 300여명의 학생들이 <학우회를 자치회로 할 것, 조선역사 조선문법 및 조선작문을 교수시간에 편입할 것, 일본인 선생을 배척할 것, 비인간적 대우의 철폐>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2월 6일에는 중동학교 학생들이, 12월 9일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명, 제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150여명,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명의 가두시위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2월 11일에는 이화여자상업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하교, 실천여학교 등에서 동맹휴학이 단행되었고, 12월 13일에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정신여학교 등에서 동맹휴학이 단행하다 20여명이 검거되었다. 12월 9일, 제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면서 교실 안에서 일제히 울었으며, 12월 10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조회 후 수업을 거부하였다. 근화여학교 학생들도 같은 날 시위투쟁을 전개하며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조열녀(趙烈女)의 일본경찰 살해사건
함안 조씨(趙氏) 부인은 이인구(李寅九) 지사의 아내로, 조씨는 1882년 함안군 가야읍에서 태어나 스무살에 이인구에게 시집갔다. 이인구는 1919년 3월 19일 함안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로서 기다무라(北村) 경찰서장과 오하야시(大林) 순사부장에게 만세시위운동을 강요하고 구타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한 인물이었다. 1924년 2월 19일 일본경찰에 의해 조선인 처녀가 농락당하고 주재소(駐在所)로 연행되자 이인구는 경찰서를 찾아가 일본경찰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그러자 일본경찰은 이인구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가 칼로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남편 이인구와 일본경찰을 미행하던 조씨 부인은 이 상황을 목격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로 일본경찰의 뒤통수를 치고 돌로 쳐서 일본경찰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조씨부인은 자결(自決)하려고 하였으나 2개월밖에 안된 아들을 생각하고는 자결하지 못하고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살인죄로 구속, 재판을 받았다. 조씨부인은 재판 과정에서 <내 남편과 내 나라의 원수를 갚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며 항변하였으나 징역 4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씨부인은 출옥 이후 아들이 병들어 죽고 일제 경찰의 극심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1948년 4월 15일 일생을 마쳤다. 함암군민들은 조씨부인에 대하여 군민의 성금으로 열녀비를 세웠다.

 최사라와 하와이 이민노동
공식적인 하와이 이민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2년이었다. 1902년 12월 22일 제1차 하와이 이민단 121명은 제물포를 떠나 한달 동안의 항해 끝에 하와이에 도착하였으며, 1905년까지 65척의 배로 7천 2백 26명이 하와이 이민노동자가 되었다. 원주민 노동력만으로는 일손이 모자라자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주들은 백인노동자에 비해서 1/4의 비용밖에 들지 않는 아시아인을 고용, 중국인, 일본인에 이어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였다.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금지시킬 때까지 약 7천여명의 하와이로 떠난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혼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사진신부>이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떠난 조선인 여성은 대략 1천여명이었으며, 최초의 사진신부가 1910년 11월 28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조선인 남성노동자 이래수와 결혼한 최사라이다.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떠난 조선여성들은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일제에 의한 경제적 착취로 생계를 유지하지 어렵게 된, 그리고 가부장제 아래서 딸을 희생물로 팔았던 현실때문이었다.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와이로 떠난 여성들은 낡은 사진 한 장만 믿고 하와이에 도착하였으나 신부들은 늙고 초라한 모습의 신랑감을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진결혼 한 부부들의 나이차이가 많고 남편이 먼저 죽어 과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탕수수농장의 가혹한 노동조건과 중노동, 민족적 차별대우는 사진신부들에게는 참기 어려울 정도의 현실이었다. 조선인 신부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탁아시설의 전무로 인한 자녀양육까지도 여성들의 몫이었다.

 정칠성(丁七星)
정칠성(丁七星)은 식민지시기 여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에서 계급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활동한 여성이다. 1897년 대구에서 출생한 정칠성은 기생출신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이 일어난 후 기생의 신분을 버리고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체화시켰다. 1924년 5월 4일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을 목적으로 박원희(朴元熙), 허정숙(許貞淑), 정종명(정종명), 주세죽(朱世竹), 김필애(金弼愛)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정칠성은 일본의 동경기예학교(東京技藝學校)에 유학하면서 1925년 같은 동경 유학생이었던 이현경(李賢卿), 황신덕(黃信德) 등과 함께 조선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조직, 사회주의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후 1926년 봄 귀국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정칠성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통일전선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신간회(新幹會)와 자매단체격인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여 그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정칠성은 1927년부터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전개하였다. 또한 정칠성은 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일제에 검거, 투옥되었으며, 1930년에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후 1945년 이전까지 정칠성은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1945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朝鮮婦女總同盟)에서 중앙집행위원과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상임위원과 조직부장으로 활동, 월북하였다. 월북 후 정칠성은 북한정권 성립 과정에서 중요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58년 남로당(南勞黨)계로 숙청당하였다.

 망월구락부(望月俱樂部)
1924년 이후 여성운동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직업여성의 경제적 독립의식과 직업여성 사이의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직 여성단체의 조직이었다. 망월구락부(望月俱樂部)는 조직 초기에는 직업여성 사이의 단순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1926년 12월에 조직된 소규모의 모임이었다. 망월구락부의 조직에는 황애시덕(黃愛施德), 김활란(金活蘭), 손메례(孫袂禮), 방신영(方信榮) 등 YWCA계의 여성과 정종명(鄭鍾鳴), 황신덕(黃信德) 등 사회주의계 여성이 연합하여 직업여성의 친선도모를 목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다 1927년 12월 15일(음력) 조직 1주년을 기념하여 모인 자리에서 <사교모임을 벗어나 더 의의있는 회합>으로 발전시키자는 움직임 속에서 조직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때의 발기인으로는 황애시덕, 김활란, 유현숙, 곽성실(郭誠實), 백경순, 이계영, 황신덕, 방신영, 정종명, 김명순, 김영순(金英順), 이은경, 최은희(崔恩喜) 등 20여명이 참여하였으며, 발기총회 준비위원으로 김활란, 황애시덕, 황신덕, 허성실, 최은희 등 5명이 선출되었다. 망월구락부에는 기독교계열의 여성들과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일어나게 된 이후 사회주의 여성들과 기독교 계열의 여성들이 같은 목적으로 위해 함께 조직운동에 참여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파급-함북 지역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광주학생운동은 12월 서울을 거쳐 1930년 초가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함경북도 지방의 경우 학생들의 시위투쟁은 경성(鏡城), 회령(會零), 청진(淸津)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경성지역의 경우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 500여명이 1930년 1월 25일 경성농업학교 학생 500여명과 연합하여 시위투쟁을 전개, 102명이 검거되었고 26일에는 검거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경성시민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또한 어랑(漁浪)보통학교 남녀학생 300여명은 2월 5일 <약소민족만세, 광주학생운동만세>등의 내용이 담긴 격문을 뿌리면서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회령지방의 회령여학교에서는 1월 20일 휴교조치가 내려지자 기숙사 학생 수십여 명이 단식투쟁을 전개하면서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회령상업학교 학생들과 보흥여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이 1월 21일과 22일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70여명의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당하였다. 회령청년동맹과 근우회 간부 등은 가택을 수색당하고 검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근우회 회령지회의 간부인 윤선녀(尹仙女)와 근우회 청진지회의 간부인 윤천녀(尹天女)는 한일공학인 청진고등여학교 학생들을 만나 시위를 권유하고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시위투쟁을 계획하여 2월 11일 대대적인 시위를 거행하기로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 검거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당하기도 하였다.

 잠업강습소(蠶業講習所)
조선을 침략한 일제는 미곡(米穀), 면화(棉花), 잠사(蠶絲)를 증산하여 일본 공업의 원료 공급원으로 만드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가운데 일본 견직생산의 초과이윤을 보증하기 위하여 조선에 대하여 1910년대부터 공업원료인 누에를 약탈하여 양잠업을 강요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 <조선잠업령(朝鮮蠶業令)>을 공포, 양잠을 장려하였으며, 1925년에는 15개년간 누에생산 100만석, 뽕나무밭 10만 정보, 양잠호 수백만 호를 목표로 한 <산견(山繭) 증수계획>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양잠에 종사하는 인구가 1927년에는 5만 8천여 호, 1930년에는 72만여 호로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1930년에는 잠견(蠶繭)의 생산고가 55만석이나 되었고, 그 가운데 20만석은 일본으로 저가에 수출되었다. 일제 식민지 전시기를 거쳐 이러한 양잠업 장려 정책 속에서 양잠(養蠶) 교사들은 농촌여성의 선망이 되었던 직업이었다. 양잠교사는 1919년 본격적인 잠업 장려정책 속에서 국내 제사(製絲)공장의 대부분이 일본재벌에 의해 독점되는 과정에서 양성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대한부인회로 하여금 1906년 최초의 양잠강습소를 설치하게 하여 여성들에게 잠사업의 이론과 기술을 가르쳤으며, 1911년에는 용산지장(支場)을, 1914년에는 수원에 여자잠업강습소를 증설하였다. 일반적으로 잠업강습소의 입학은 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이나 이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였으며, 1937년까지 모두 780여명의 여성이 잠업강습소를 졸업하였다.

 황애시덕(黃愛施德)
황애시덕(黃愛德 또는 黃에스더)은 1892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의 정진여학교(正進女學校)에 입학한 후 황애시덕은 15세에 다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유학, 1910년 졸업하였다. 여성의 계몽이 조선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황애시덕은 졸업 이후 평양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로 부임하여 여성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황애시덕은 민족정신의 고취가 학교에서만 행해지는 것은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1913년 김경희(金敬喜), 안정석(安貞錫)과 함께 비밀결사대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였다. 송죽회를 조직한 황애시덕은 박현숙(朴賢淑), 황신덕(黃信德), 최의경(崔義卿) 등을 회원으로 입회시키고 애국심 함양과 국권회복을 목표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비밀결사체인 송죽회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그 정체가 발각되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사업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후 1918년 황애시덕은 조선민중에게 의술을 전파할 목적으로 선교사인 홀(Hall)의 권유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 앞에서 의학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황애시덕은 현덕신(玄德信), 유영준(劉英俊), 김마리아, 등과 함께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 유학생간의 친목도모를 표면적 이유로, 배일사상의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동경여자유학생회>에서 활동하던 1919년 황애시덕은 2.8독립선언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다. 2월 8일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으로 황애시덕은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황애시덕은 일본 여성으로 변장하여 2월 중순에 경성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황애시덕은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3월 19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8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 10월 19일 황애시덕은 이혜경(李惠卿), 김영순(金英順), 이정숙(李貞淑), 백신영(白信永) 등과 함께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를 재조직였다. 애국부인회는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이혜경을 부회장에, 그리고 황애시덕을 총무에 선출하였다. 애국부인회의 활동으로 황애시덕은 다시한번 일제 경찰에 체포, 3년형의 징역형을 얻도받고 수감되었다. 출옥 후 황애시덕은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1925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으로 유학, 교육학석사를 받았으며, 1928년 10월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성교육과 농촌계몽에 힘썼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의해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힌 황애시덕은 학교에 계속 남아있기 어렵게 되자, 1930년 남편과 함께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재만동포들에 대한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권기옥(權基玉)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權基玉)은 1901년 1월 11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숭의여학교에 입학한 권기옥은 독립운동가 박현숙(朴賢淑)을 만나 독립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권기옥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순복(金順福), 차진희(車鎭姬), 최순덕(崔順德)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투쟁으로 3월 4일 권기옥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경찰서에서 3주의 구류처분을 받게 되었다. 경찰서를 나온 권기옥은 다시 상해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공채(公債)를 파는 일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제령(帝令)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러나 출옥 이후에도 권기옥은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상해에서 평안남도 도청폭파계획을 도와달라는 전갈을 받고는 숭현학교 지하실 석탄창고에서 폭탄을 제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된 권기옥은 경찰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권기옥은 운남(雲南)공군사관학교에 지원, 비행기 조종사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운남공군사관학교에 독립운동을 한 조선인 여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조선인 청년을 매수하여 권기옥을 암살하도록 하였으나 이 사실을 미리 눈치 챈 권기옥은 동료들과 함께 조선인 청년을 사살(射殺)하였다. 운남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비행사가 된 권기옥은 중앙공군으로 개편한 후 10여년 동안 반군 소멸작전, 반공작전, 2.28대일작전 등에 참가하여 맹할약을 하였다. 또한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에는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1948년 귀국한 권기옥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방위전문위원으로 1955년까지 활동하기도 하였다.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맹휴학
1928년 4월 10일 경성여자상업학교에서는 송계월(宋桂月), 오옥녀(吳玉女), 이은희(李恩嬉), 김근원(金槿媛) 등 30여명이 주동이 되어 신시철(申時徹) 교무주임(敎務主任)의 유임(留任)을 요구하면서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경성여자상업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에 대하여 일제 경찰은 동맹휴학에 협조적인 학생과 교내에서 폭력을 행사한 여학생 27명을 검거함으로써 5월 10일 동맹휴학은 수습되었으나, 검거된 여학생 가운데 5명은 검찰에 넘겼으며, 그 가운데 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경성여자상업학교의 동맹휴학이 일어나자 동경의 조선인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신흥과학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서는 학교장 앞으로 항의문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 가운데는 <식민지 노예교육정책의 집행자이며 그 주구(走狗)의 역할을 담당하는 소위 조선의 학교당국자 등의 반동적 태도는 참으로 오늘의 조선인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지하며 학교당국의 처사를 비난하고 있다. 또한 소년군(少年軍) 단장이었던 전백(全栢)은 동맹휴학의 배후조종 혐의로 취조를 받기로 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파급-원산지역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광주학생운동은 서울에서의 시위투쟁 이후 1930년으로 넘어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1929년 12월 14일 한일(韓日)공학인 원산고등여학교(元山高等女學校)의 조선인 여학생 10여명은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일제는 원산고등여학교에서의 동맹휴학을 중시하여 원산지역 각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이 원산지역에 알려지자 원산지역의 학생들의 시위투쟁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 1월 17일 원산청년학관(元山靑年學館)과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학생 300여명과 원산고등여학교의 조선인 여학생들은 격문을 뿌리면서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시위투쟁으로 누씨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11명과 원산청년학관 학생 20여명이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원산지역의 학생들의 시위투쟁에는 청년단체의 지도가 있었다. 덕원청년동맹의 남상완(南相完)은 원산청년동맹의 남상효(南相孝), 김영섭(金永燮)과 함께 전국희생자학생옹호동맹(全國犧牲者學生擁護同盟)의 명의로 격문을 작성하여 원산청년학관의 김이봉(金利鳳)에게 400매, 원산고등여학교 이정숙(李貞淑)에게 200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최경술(崔庚戌)에게 400매를 나누어주고 1월 17일의 대규모 시위투쟁을 전개한 것이었다. 이날 뿌려진 격문에는 <검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교내학생자치권을 옹호하라, 일절 식민지교육에 항쟁하라, 학원에 경찰간섭절대반대, 전국동맹파교로써 모든 요구를 관철하라,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라>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담양 대화제사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전라남도 담양의 대화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 40여명은 1929년 9월 29일 작업을 중지하고 파업을 단행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의 파업 이유는 작업 시간이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13시간인데 회사측에서 시간을 더욱 연장하여 일하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작업을 느리게 하였기 때문에 시간을 연장한다고 속이고 노동시간을 연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자본가측의 간교한 술수에 대항하여 파업을 단행한 대화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은 회사측에 임금인상과 임금 지불에 있어서 이전에는 불규칙하게 지불되었으나 일정한 날에 지불해 줄 것, 노동시간을 정확히 지켜줄 것, 그리고 일본인 감독의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구타 금지 등을 요구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해서 회사측은 모든 것은 요구를 들어줄 수 있으나 임금인상은 어렵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화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은 회사측의 대책안을 받아들어 10월 1일부터 작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오마니(어멈)
<어멈>이라고 불리운 가정부(식모, 유모, 안잠자기 등)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의 일로서, 1920년대 후반에는 조선인의 높은 실업률 가운데 인기있는 직종이었다. 1923년 이미 경성에서만도 7천여명의 구직자가 있었으나 그 가운데 겨우 1천여 명밖에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성인사상담소(京城人事相談所)의 1924년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 구인수(求人數)는 482명인 데 비해 구직인수(求職人數)는 1,580명으로 구인수가 구직인수의 30.5%에 지나지 않은 데 비해서 일본인은 구인수가 674명에 구직자수가 587명으로 오히려 구인수가 더 많았다. 이렇듯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구직문제는 민족적 차별이 심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근대적 산업기술을 갖지 못한 여성들의 경우 직업을 구한다는 것은 남성들에 비해 그 폭이 훨씬 더 좁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이 없는 가난한 조선인 여성들이 고용주의 집에 입주하여 부엌일, 세탁, 어린이 보기 등 가내잡역(家內雜役)의 직종에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가난한 부인들이 남편과 자식을 두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 가정이나 부유한 조선인 가정에 살면서 집안살림을 도와주던 직종으로 주로 불리던 것이 <어멈> 또는 <오마니>이다. 이들 중 8할은 농촌출신이며 도시출신은 2할 정도였다. 1929년 3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인사상담소의 구직상황을 보면, 구인수가 남자 124명, 여자 237명인데 비해서 구직자수는 남자 298명, 여자 464명이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취직자수는 남자 74명, 여자 121명으로 그 중 제일 좋은 성적으로 취직된 직업의 종류는 일본집 <오마니(어멈)>로 취직한 여자로 119명이었으며, 1928년에도 취업자 114명이 일본집 <오마니>로 취직한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인 가정을 원하였는데, 그것은 조선인 가정보다는 일본인 가정에서 일하는 것이 부끄러움도 덜하고 조선인 가정보다 월급이 2배 이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여성의 취직률이 높아져가고 있었던 것은 조선인 여성의 일본인 가정에의 이른바 하녀로의 취업률이 높았기 때문이며, 이밖의 직종의 취업사정은 나빴으며 특히 1930년대를 전후한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조선인 여성들의 실업률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군산지역 정미소 여성노동자 파업
군산에 있는 조선정미소 여성노동자 1천여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1926년 10월 10일부터 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번 조선정미소의 파업에는 특석정미소의 노동자들과 함께 군산지역 정미소도 동맹파업을 전개하였다. 이번 파업의 발단은 조선정미소의 노동자 3백 여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6월부터 다른 정미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교섭하였다. 그리고 10월 10일, 군산 정미인습공동조합의 부조합장인 차주상(車周相)이 각 공장의 임금 통계표와 노동자 경제 상황 통계표를 가지고 군산 미곡 무역상 조합장인 삼국오태랑(蔘菊五太郞)을 방문하였다. 차주상은 쌀 한가마니에 3전 3리를 주던 것을 4전 3리로 인상할 것을 가지고 삼국오태랑과 교섭하였으나 삼국오태랑은 기계장치가 이전에 비하여 좋아졌기 때문에 임금을 오히려 1전 5리를 깎자고 주장하므로 이에 대하여 군산지역 정미 노동자들이 10월 10일 새벽부터 파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하여 반전용길(半田龍吉)을 통하여 각 공장주와 경찰서에까지 그 중재를 교섭하는 등의 행동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결국 이번 군산지역 정미노동자들의 파업은 군산경찰서 도빈 서장의 입회로 임금을 종래대로 3전 3리로 하고 인천지역 각 정미공장의 임금에 따라 그에 비례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마무리되었다.

 인천 가등정미소 노동자 파업
인천 빈정(濱町)지역에 위치한 가등정미소(加藤精米所)의 남녀노동자 3백여 명이 1930년 1월 11일 파업을 단행하였다. 가등정미소는 인천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미소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 대한 임금은 인천지역의 다른 정미소에 비하여 저임금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임금에 대하여 가등정미소의 남녀노동자들은 불만을 품어오던 중 정미소의 주인인 가등평태랑(加藤平太郞)에 대하여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가등정미소의 노동자들은 회사측에 <최하 임금은 80전으로 할 것, 현재 임금에서 3할을 인상할 것,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차별을 없앨 것, 십장은 노동자 가운데서 선정할 것, 노동자의 위생시설을 완비할 것, 8시간 노동제를 실행할 것, 작업으로 인한 부상자와 사망자에 대하여 위자료와 치료비를 지불할 것, 해고자에 대하여 90일 분의 임금을 지불할 것, 해고한 노동자를 복업케 할 것>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회사측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하여 완강하게 거부하며 대응하였다.

 통조림 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함경남도 신포항의 일본인 창택(倉澤)이 운영하는 통조림공장 여성노동자 2백여 명이 1930년 1월 24일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통조림 공장에서는 매일 평균 2백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1신간에 최하 평균 5전의 임금을 지불하다가 지금에 와서는 겨우 4전 미만만을 임금으로 지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성노동자 3백여 명이 1월 23일에 일급을 받았으나 그 임금이 최저생계에도 미치지 못하자 노동자 전원이 동맹파업을 단행한 것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회사측에 <임금인상, 대우개선, 전표(錢票)의 사용 금지>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 1930년 3월 3일에는 함경남도 흥원지역에 위치한 덕흥통조림 공장에서도 파업이 단행되었다. 덕흥통조림 공장의 여성노동자 60여명은 공장주인 박영석(朴永錫)에 대하여 <......우리 60명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서로서로 손을 마주 쥐고 추워서 밤을 밝혔습니다. 박선생도 사람이라면 이런 정상을 동정하여 속히 임금을 지불하여 주시오>라며 파업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덕흥통조림 공장의 자본가는 노동자들에 대하여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노동환경 또한 최악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공장주인 박영석은 임금을 1원50전씩 주겠다고 원만한 해결을 보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박영석은 노동자들을 안심시켜 놓은 후 공장의 여성노동자 60여명을 모두 해고시켜버렸다. 해고된 여성노동자들은 공장 문 앞에 드러누워서 항의하였으나 공장주는 노동자들에 대하여 공장 구역 밖으로 추방하는 등 사태는 더욱 암담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경찰측은 여성노동자들을 주재소로 인치하고 더 이상의 분란을 일으키지 말 것을 촉구하는 등 노동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흥원노동조합에서는 이 사태를 조정하려고 하였으나 공장주는 이러한 중재마저도 거절하였다. 이에 대하여 흥원노동조합은 3월 10일 각 사회단체들이 모여 이번 사태에 대한 비판연설회 개최를 계획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금지당하고 말았다.

 미주(美洲)지역 여성단체의 결성
미주(美洲)지역으로 조선여성들이 이주한 것은 1910년 이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단체의 조직이 미약하였으며, 여성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한 것은 1918년이 지나서면서 부터이다. 초기 미주지역에 조직된 부인단체는 <한국부인회(韓國婦人會)>였다. 한국부인회는 1908년 5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마리사 등이 중심이 되어 자녀들의 국어교육의 장려와 교회사업의 후원, 동포 사이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조직되어졌다. 이후 미주지역에는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 부인친애회(婦人親愛會), 멕시코 대한부인애국회(大韓婦人愛國會) 등이 조직되었다. 그러다 1919년 3월 1일 전민족적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받은 미주지역의 여성들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응원할 목적으로 각 지방에 있던 부인회들을 통합하여 하와이에 대한부인구제회(大韓婦人救濟會)를 결성하고 미국에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미주지역의 조선인 여성들의 체계적 여성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1919년 8월 5일 미주지역 조선인 단체의 최고기관이었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의 인준을 얻어 조직되었다. 양제현, 박순애, 김혜원 등이 중심이되어 조직된 대한여자애국단은 <1).조국독립운동에 관하여 대한인 국민회와 동심동력(同心同力)함, 2). 가정의 일용사물을 절약하여 독립우동 후원금을 판비하며 국내 동포구제사업에 노력함, 3). 가정에서 일화(日貨)배척을 단행함, 4). 부녀동포의 독립사상을 고취함>이라고 그 조직목적을 밝히고 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중앙위원회를 딴유바지방에 설치하였는데, 1923년부터는 샌프란시스코 지방에, 그리고 1933년에 로스앤젤레스 지방으로 이전하였으며, 11개 지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1919년 8월 2일 재미한인여성을 단합하여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자금을 모아 조국광복을 지원한다는 목적으로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이 조직되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다뉴바의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그리고 윌로스 지방 부인회 대표 등이 다뉴바 지방에 모여 미주지역 최초의 통합된 여성단체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에 인준 청원서를 제출하고 1919년 8월 5일 인준장을 받아 공식 단체로 결성된 것이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결성목적을 <대한 여자를 단합하여 애국정신을 고취하며 근검절약하여 돈을 모으며 때를 따라 의연금을 모집하여 대한독립단을 응원하기로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한여자애국단은 1934년 개정한 규칙에서 <대한의 애국여자를 단합하여 이상생활을 계도하며 실력을 준비하여 대한독립운동을 힘써 진행함>이라고 그 목적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결성 초기의 목적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현실생활을 이상적인 생할이 되도록 계도하고, 대한독립을 위해 실력을 양성하는 데 그 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이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교포사회의 통합과 여성의 실력양성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은 이민생활을 하는 교포사회를 결속하고 집회를 통해 민족의식과 문화 창조를 높이는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는 임시정부의 독립활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운동이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서 대한여자애국단은 일본물화 불매운동, 무육일(無肉日) 등의 절약을 통해 모은 절용금(節用金)과 회원의 회비인 연례금(年例金), 또는 기부금과 수익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대한여자애국단은 1923년까지 2회에 걸쳐 총 1천여 달러를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하였으며, 독립신문사에도 300달러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항일중국군과 광복군에 의연금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적십자회원권 발매운동 등을 펼쳤으며, 조선인 출전군인에 대한 위문활동을 전개하는 등 애국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의사(女醫師)
조선에서 여성의사 양성을 위한 근대 의학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0년 외국인 선교사 홀(Hall)부인이 이화학당 졸업생 5명에게 의학을 가르치면서부터이다. 1928년 9월 4일 경성여자의학강습소(京城女子醫學講習所)가 생기기 이전에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일본 등으로 유학을 해야만 했었다. 유학은 보통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東京女子醫學專門學校)에서 이루어졌는데, 김명석(金命錫), 김복인(金福仁), 길정희(吉貞姬), 유영준(劉英俊), 허영숙(許英淑), 현덕신(玄德信) 등이 그 곳의 졸업생들이다. 그러나 경성여자의학강습소의 설립으로 조선내에서의 여의사 양성을 위한 공식적인 의학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곳을 졸업한 여성들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의사면허 시험을 거쳐 정식 의사가 되었다.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홀부인이 경영하다가 1933년부터 길정희와 그의 남편인 김택원(金澤元)이 경영하였는데, 입학자격은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자로 입학 후에는 예과 1년, 본과 4년의 과정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1934년부터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1941년 7월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로 정식허가를 받아 여성의사 양성을 위한 교육이 체계화되게 되었다. 여성의사들이 담당했던 진료과목은 보통 산부인과와 소아과였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출산과 아이의 건강을 보살피는 것은 여성의 영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여성환자들은 여성의사가 진료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사들의 의료과목 역시 산부인과와 소아과가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국내외에서 의학을 공부한 여성들은 관립이나 공립 병원에서 일정기간 수련을 마친 후 경성이나 고향으로 돌아가 개업을 하였으며, 특히 지방에는 여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각 지방에서 여성과 아동의 보건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여의사였던 이영실(李永實)은 <꾸준히 연구에만 전념하기에는 조선의 가정제도가 여자에게 주는 질곡이 과중하다>고 말했듯이 결혼 후 가정과 의사로서의 일을 병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인식으로 의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화여학교의 만세시위운동
1919년 3월 1일이 되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당국과 서양교사들의 저지를 뿌리치고 거리로 나가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3월 5일 다시 한번 학생들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은 미국인이었던 교장을 비롯한 학교당국의 방해를 뿌리치고 거리로 달려나갔다. 이날의 시위 배후로 지목된 교사 박인덕(朴仁德), 신준려(申俊勵)는 일제 경찰에 의해 검거, 투옥되었으며 학생들도 28명이 검거되었고, 그 가운데 5명의 학생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3월 5일 전개되었던 만세시위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고등과(高等科) 1학년이었던 유관순(柳寬順)이 있었는데, 유관순은 동료 6명과 함께 기숙사담을 넘어 파고다공원으로 가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후 3월 10일 서울지역 각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해 임시휴교령(臨時休校令)이 내려졌는데, 이때 유관순은 고향인 천안(天安)으로 내려가 장날에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경기도 남양군 부인의성회
1907년 2월 대구에서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에 국권이 침탈되어가던 식민지 현실에서 조선인이 단결된 힘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민족적 자주의식의 발로였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전국의 국채보상을 위해 조직된 여성단체는 약 30여 개에 달하였으며, 공식적인 조직체 없이 조직된 것까지 합한다면 50여 개에 가까운 단체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경기도 남양군의 기독교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1907년 4월 부인의성회를 조직하였다. 부인의성회는 김희경, 김혜경, 안마리아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남양군의 각 유지부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부인의성회의 첫 의연금 모금 운동에는 116명의 참여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때 모인 의연금은 총 43원 6전에 이르렀으며, 이 의연금은 제국신문사로 보내졌다. 부인의성회에 참여한 부인들은 의연금 모금을 위해서 패물과 곡물 등을 모금하는 등 생활 속에서 근검, 절약정신을 구국운동에 연결시켰던 것이다. 부인의성회는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의연금 활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교육을 목적으로 여자교육회를 설치하여 여성계몽에 앞장서고 있었다.

 허성숙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이후 많은 조선인들은 만주, 간도 등지로 이주하여 격렬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이후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면서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조선인들의 항일무장투쟁에는 많은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항일운동가 가운데 ≪연변인민의 항일투쟁≫에 게재된 희생자는 남자 1,096명, 여자 13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항일유격대의 명사수로 <여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허성숙은 1915년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1931년 16세의 나이로 중국공산당청년단 계통의 조직으로 혁명인 양성을 목적으로 조직된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였다. 허성숙은 소년선봉대에서의 활약이 인정되어 공산청년단 응구구위의 작식대원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공산청년단에 가입, 연길현 유격대의 여전사(女戰士)가 되었다. 여성의 경우 유격대에 가입하면 대개는 작식대(作食隊)와 재봉대(裁縫隊) 등에 배속되었으나 허성숙은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전투사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1935년 21세가 되어서 허성숙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의 기관총수가 되었으며, 193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허성숙은 림강전투, 안도전투, 간삼봉전투, 반석전투 등에 참가하여 큰 전과(戰果)를 올렸다. 또한 1937년 작식대에 배속되자 여전투사로 활동할 것을 간청하여 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1퇀 1련의 첫 여성기관총 반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전투상황에서 허성숙은 1939년 8월 23일 경계보초 중 100여명의 특설부대가 7대의 트럭을 타고 추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혼자서 엄호 사격을 하다 다리와 복부에 총탄을 맞는 중상으로 다음날 사망하였다.

 고무공장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
고무공업은 비교적 중소규모의 생산설비에 의한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제사공업(製絲工業), 정미공업(精米工業)에서와 같이 여성노동자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노동자수의 남녀비율은 1930년대 이전까지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대체로 1:2를 정도였으나 1930년대 이후가 되면 여성노동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증가하여 남성노동자의 3배의 비율로 여성노동자가 많아졌다. 이것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고무를 붙이거나 손으로 깎는 등의 수작업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세계공황의 여파와 고무공장의 수가 증가하면서 고무공장 사이의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값싼 여성노동력이 선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5년 이후가 되면 대규모 자본설비에 따라 수공부분이 감소하면서 여성노동자의 수가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고무공장에서 작업하는 여성노동자의 연령은 대체로 20세에서 40세 사이가 가장 많았으며, 기혼여성노동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임금의 경우 1족(足)당 1929년에서 30년 경 5전 정도였던 것이 1933년에서 1935년이 되면 2에서 3전 정도로 인하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 정도의 저임금도 불량품 배상제도나 벌금제도, 또는 보증금제도 등으로 노동자에게 불리한 제도가 일반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불량품 배상제도는 제조과정에서 불량품이 나올 경우 1족의 임금을 깎는 제도로 이것은 노동자를 해고시키려는 의도로 공장주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임금문제 못지 않게 요구되었던 것이 불량품 배상제도의 철폐와 감독의 배척이었을 만큼 이 제도는 노동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증금 제도는 고용될 때 기구대(器具代) 등의 명목으로 일정금액을 징수하는 것으로 이것은 금액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해고되었을 때 반환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의 가부장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장주나 감독에 의해 물리적, 성적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파업투쟁시 감독의 배척이나 해고요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근우회 제1회 전국대회
전국 주요도시에 지회 설치를 마친 근우회 중앙본부에서는 1928년 5월 26일, 27일 양일에 걸쳐서 경성(京城)에서 정기전국대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사전에 이 대회의 토의사항의 제출을 요구한 뒤 토의사항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대회의 준비를 중지시켰다. 일제의 탄압으로 중지된 1928년의 전국대회 토의안은 1).중심슬로건 2).반전결의 3).민족운동에 관한 결의 4).조직문제에 관한 결의 5).선전사업에 관한 결의 등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중심슬로건에 관한 내용에서는 조선여성 각계각층의 단일협동전선으로서 그 중심슬로건은 부르조아-데모크라시운동, 봉건제도 타파에 알맞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 구체적 슬로건은 조선여성은 민족운동의 유력한 부대가 되자, 전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자, 조선민족운동의 통일전선을 굳게 결성하자,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자, 일체 봉건제도의 타파, 결혼 이혼의 자유, 여자재산권의 설정, 남자와 동등권의 획득,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전쟁의 반대, 인신매매 및 공창의 폐지, 교육제도의 개선 및 문맹퇴치, 운동선상 희생자의 구호, 실업자의 방지, 재만 동포의 입적(入籍) 주장 등이었다. 두 번째 토의안인 반전결의의 내용에서는 제국주의 열국과 노농러시아 간의 모순, 제국주의 열국과 식민지 및 예속국가간의 모순 등은 세계위기를 첨예화시키고 있는데 때문에 조선여성은 세계대중과 함께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토의안인 민족운동에 관한 결의에서는 농민의 빈궁화 및 이산, 노동자의 극도의 수난, 수공업자의 파멸, 부르조아의 무전도(無前途), 인텔리겐차의 비애 등이 현조선사회의 모습이라고 전제한 후 이러한 조선의 객관적 정세는 조선 인민대중에게 부르조아민주주의의 획득을 당면문제로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민족적 단결이라는 강령을 낳게 하는 사회적 근거로 민족의 역할, 반봉건적 역할을 갖는 모든 계층이 민족적 통일단체에 결합, 당면임무수행에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조직문제에 관해서는 조직사업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지점이 노동부인대중과 또한 학생문제라고 전제하면서 봉건유제의 가정압박, 사회적 압박, 교육제도의 불만 등은 필연적으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노동부인동원 슬로건과 학생에 대한 슬로건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선전사업에 관한 결의에서는 선전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지식계층 여성을 상대로 하던 이전의 경향을 극복하고 대중여성의 선전을 강조하고 있다. 1928년 근우회 전국대회의 토의안은 전반적으로 좌익적 색채가 강하였다. 창립당시 기독교계열의 우파 여성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근우회의 내용에서는 비종교적이고 사회주의적 사상의 좌파세력이 중요 기반이었던 것이다.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
1929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의 예정으로 천도교기념회관에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제2회 전국대회는 1925년 계획되었던 전국대회가 일제 당국에 의해 최종단계에서 중지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준비되었으며, 7월 22일 일제 당국에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 개최를 제출, 사전 검열하는 형식으로 받아 일제로부터 대회개최를 허용 받았다. 제2회 전국대회는 가 지회별 출석대표자 55명이 참석하였으며, 이 대회를 통하여 중앙집행위원장에 정칠성(丁七星)을 선출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우봉운(禹鳳雲), 정종명(鄭鍾鳴), 박호진(朴昊辰), 허정숙(許貞淑), 황신덕(黃信德) 등이 선출됨으로써 사회주의 세력이 중앙을 형성하였다. 7월 28일 회의에서는 대의원 45명이 출석한 가운데 목포지회의 재조직문제와 동경지회의 복권(復權)문제를 논의하였다. 목포지회문제는 지회 내에 파쟁발생의 원인을 물어 해체를 결정하였는데, 이번 대회를 통해 지회를 재조직하기로 하고 박차정(朴次貞)에게 전권을 부여하였다. 동경지회의 정권문제는 동경지회가 근우회 중앙본부의 목포지회 해체결정을 규탄하면서 본부의 태도를 제국주의의 소굴 또는 반동분자라고 하는 등 임의로 성명을 발표하자 정권처분을 내렸었는데 동경 대의원인 유순선(劉順善)이 대회에 출석하여 사과하는 과정을 거쳐 동경지회에 복권조치가 내려졌다. 대회 3일째인 29일에는 규약수정위원회에서 제출한 수정안을 수리하였다. 신강령은 1). 조선여성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함, 2). 조선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전적 이익의 옹호를 기함으로 창립대회때의 강령에 비하여 목적의식을 좀더 명백히 내세우고 있다. 또한 수정된 행동강령은 1). 교육의 성별 차별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2). 여성에 대한 봉건적 사회적 법률적 일체 차별철폐, 3).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4.) 조혼폐지 및 결혼 이혼의 자유, 5). 인신매매 및 공창폐지, 6). 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의 옹호, 7).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철폐 및 산전산후(産前産後) 2주간의 휴양과 임금지불, 8). 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간작업폐지, 9).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로 여성노동자, 농촌여성 등 기층민중에 대한 이해를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파극(新派劇)에 나타난 여성
신파극은 일본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걸쳐 전성기를 이루었고 이것이 일제에 의해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일제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도입되게 되었다. 체제순응적인 저급문화의 양산이라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신파극은 식민지 당시 대중과 연극을 통해 호응을 받았다. 일제시기 동안 신파극이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1935년 신무용을 창조하여 민족무용사의 토대를 확립하고, 악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장르를 개척, 대중적인 연극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한 신무용의 개척자였던 배구자(裵龜子)가 설립한 동양극장이 개관하고 난 이후였다. 조선에서 상연되었던 신파극 가운데 조선민중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작품은 <이수일과 심순애>로 알려진 <장한몽>이었다. 이것은 일본 신파의 고전 <황금도깨비(金色夜叉)>을 조일재가 번안하여 신파극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작품 속에서 심순애는 머리 속으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죄의식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수일과의 굳은 약속을 저버리고 물질로 대표되는 김중배를 선택한다. 이것은 타율적이고 강제적 힘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자주적인 근대화의 좌절이라는 식민지 상황에서 대중의 비극적 정서가 심순애와 동질감을 확인한 것이었다. 또한 <동백꽃>에서는 흥단이라는 여주인공이 빚더미를 진 아버지와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경성의 술집에 팔려간다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이것은 식민지의 가난이라는 현실의 억압구조에 체념하고 고향을 떠난다는 신파비극의 정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배구자의 동양극장에서 상연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작품에 이르러서는 신파극은 대중적 친화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기생 출신으로 학생인 광호와 열애 끝에 결혼한 홍도가 봉건적 가부장제하의 며느리로 변모하게 되나 시어머니와 남편의 약혼녀였던 혜숙의 모함을 받고, 홍도가 혜숙을 살해하게 된다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홍도는 관객에게 신파적 비극성으로 공감을 얻었는데 이것은 홍도가 비극적 조건에 놓여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의 신파극이 조선민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라는 억압적 현실에서 반일적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에서는 체제에 순응하여 비극적 삶을 살아야만 했던 조선민중의 심리가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여성농민
일제의 조선에서의 농업정책은 조선의 농촌을 일제의 항구적인 식량공급지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식민지 농업정책은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거치면서 중소지주, 자작농, 자소작농 등 농촌의 중간층을 몰락시켜 조선 농민의 대다수를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이런 조건 속에서 조선농민들은 빈민으로 전락하였으며, 특히 농촌여성들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처참하였다. 농촌빈민들에게 식생활 실정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일제의 한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자료에는 <장수지방에서는 세민(細民)들이 궁한 나머지 심곡산(深谷山)에서 나는 백토(白土)를 식용으로 하여 이 때문에 마을사람 다수가 변비에 걸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조선농촌의 현실 속에서 일제는 경제 수탈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농촌 여성들에게 옥외 노동을 장려하였다. 여성농민들은 품앗이로 김매기, 밭갈기, 벼베기 등을 하였으며, 끼니걱정은 거의 여성들에게 전가되었고 다른 집일을 해주고 품삯으로 해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농촌여성들은 가사일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식생활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다. <이고 지고 들고, 농촌 여자는 소보다도 쓸모있고 소보다도 힘세고 소보다도 끈기있다>는 표현은 농촌여성들에게 부여된 노동의 강도가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일제는 농가부업이라는 미명 아래 양잠(養蠶)을 장려하였는데, 1930년 조사에서 잠업(蠶業)인구는 전 농업인구의 3%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95.6%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었다. 농촌여성들에게 있어서 특히 심각하였던 것 가운데 하나가 출산과 육아문제였다. 여성만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출산과원아는 도시의 생활에서보다 훨씬 심각했던 문제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1930년이 되면 청년회나 부인회 등 각종 여성, 사회단체에서 농번기에 탁아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탁아소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으며, 1941년 조선총독부는 탁아소 설치 장려 통첩을 내렸으나 그 시설이나 보호책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여성(女性)
조선일보사에서 ≪조광≫의 자매지로 발간되었다. 1936년 4월 창간되어 1940년 12월 폐간되었다. 통권 58호,매호 100페이지 내외로 출간되었다. 동아일보에서 발간된 ≪신가정≫과 함께 1930년대 중반 이후 여성지를 대변한다. ≪여성≫은 의식주를 비롯해 개인의 신변잡기를 다루는 요즈음 여성잡지의 전범을 보이지만 거기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전체 책의 체재를 보면 생활에 필요한 정보뿐만 아니라, 당시 논점이 되는 사안을 다룬 좌담회를 비롯하여 시평, 월평, 논문 등의 전문적인 글들도 다수 실렸다. 또한 당시 문학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크게 축소되었던 상황에서 작가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필진들의 면면을 보면 이광수, 김남천, 최재서, 김문집, 백철, 김광섭, 함대훈, 박태원과 같은 남성 문사들과 근대적 교육을 통해 배출된 전문직 여성과 남성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이 잡지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을 다수 수록하고 있어 당시 여성 문학의 면모를 가늠케 한다. 각 작품들은 공사 영역에서 여성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리얼리즘적으로 그리거나(강경애, 박화성), 여성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백신애) 여성문학이 현실과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하려 했음을 예증한다.

 여성조선(女性朝鮮)
1930년 8월 창간되어 27호로 1932년 11월에 폐간되었다. 38면. 목차가 따로 없고 편집 겸 발행인 김희철(金熙哲), 정가는 10전이었다. 본래 ≪여성휘보≫ 였다가 ≪여성조선≫이 된 후 국판(菊判)이던 것이 4*6배판으로 되었다. 창간호의 내용을 보면 독서와 교양과 상식없이는 살기 어려운 사회이니 만큼 세월을 독서로 보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독일여성의 생활을 소개했고 현대어사전이라고 해서 “웨이트레스-여급” 등 영어단어풀이를 보였다. 비교적 쉽고 흥미본위처럼 꾸며진 잡지지만 산아제한에 대한 얘기가 처음 나오고 여성들의 교육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조선여성계의 성장적 언론기관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여인(女人)
1932년 6월부터 간행되어 1933년 10월까지 통권 16호로 폐간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 송봉필(宋奉瑀), 정가 20전이었다. 목차에 역삼각형, 동그라미 등 많은 기호가 들어갔고 활자도 다양했으며 내용은 계몽적이고 말하는 여인들의 사진이 많이 들어갔다. 창간사 <인형의 치마를 벗어버리자!>에서 “이 소리는 낡은 세기의 때묻은 부르짓음이다. 조선 여성은 두겹세겹의 모든 합리치 못한 쇠사슬에 얽매여 있는 그들 자신을 새로운 세계에 안주시키려는 소리를 외치며 몸부림친지 이미 10여년의 길고 오랜 세월을 흘려보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여인(女人)≫에서는 조선여성들이 빨리 인형에서 벗어나 활발하게 일해주기를 바라며 이 ≪여인≫을 교과서 삼아 열심이 읽고 또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다.

 만국부인(萬國婦人)
창간호가 1932년 10월 1일 간행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 김동환(金東煥), 발행소 삼천리사, 정가 20전이었다. 여학생과 가정의 좋은 동무가 되겠다고 시작한 ≪만국부인(萬國婦人)≫은 목차가 보여주듯이 잡지다운 면모를 갖추었으며 내용이 많고 알차다. 그리고 편집과 원고의 선택에도 많은 신경을 썼고 특히 외국의 여성들과의 비교가 많아 잡지의 제목인 ≪만국부인≫을 살리고 있다. 김동환의 창간사를 보면 “스콧틀랜드 각시들은 아침마다 일어나면 서북풍이 잘 불어와 하늘 높이 달아논 풍차가 소리치며 어서 돌아가기를 고대한다는데 나의 이 반도의 모든 각시와 색시들은 아침마다 일어나 무엇이 오기를 기다리시는고? 금가마인가 은교자(銀轎子)인가? 그렇지도 않으며 님의 편지물고 오는 제비떼인가, 기러기떼인가, 모두 아니고 오직 자유의 새, 오기를 원(願)한다데 ”라고 쓰고 있다. 또한 이광수는 신여성의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1). 건강하도록 위생, 운동, 생활의 규율에도 주의하시기, 2). 조선역사, 조선어, 조선문학, 조선사정, 조선의 장래에 관하여 배우고 생각하시기, 3). 첫사랑을 남편에게 라는 주의를 확수(確守)하시기, 4). 사치(奢侈)를 엄계(嚴戒)하시고 일신(一身)에나 가정에나 수지(收支)예산을 세워 절약 제일주의를 가지시되 민족경제에 유의하시기, ....... 8). 신문, 잡지, 서적을 보시기, 9). 처녀애들 배우자선택에 아내애들 일하는 남편을 정신적협조를 주기에 힘쓸것”

 부인공론(婦人公論)
1936년 5월 창간되어 통권 4호로 폐간되었다. 창간사를 보면 <몇 해 전만 하여도 부인의 깨인이는 너무도 첨단을 걷고 있고 어두운이는 너무도 퇴영적임으로 결국사회 전면으로 볼때에는 자못 공허와 혼돈을 면치 못하며 도리혀 오월참상(吳越參商)의 감이 없지 아니하여 한갓 기형적 변태적 현상임을 탄식안할 수 없다.>라고 쓰고 있다. 이상의 글은 여성잡지의 시대변천을 느끼게 한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한 것은 좋지만 기형적으로 될까봐 염려한 글로서 내면적 확충에 치중한 발달을 원한다고 되어 있다. 교양과 흥미가 반반 섞인 것으로 재미있게 꾸밀려고 노력한 잡지이다.

 신가정(新家庭)
1933년 1월 1일-1936년 9월 1일 통권 42호로 폐간되었다. ≪신동아≫의 자매지로 창간된 ≪신가정≫은 경성 신동아사 발행으로 편집 발행인은 양원모(梁源模), 인쇄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 인쇄인 김진호, 정가 20전이었다. 잡지가 다채롭게 신년특집형식으로 여성종합교양지다운 느낌이 들며 어머니와 소년을 위한 면이 많고 사진과 그림도 많다. 송진우는 창간사에서 <혹 세상이 가정주부의 지위와 그 사회적 가치를 잘못 인식하여 남자에 대한 한 개의 종속적 존재로만 말하는 이가 있으나 그는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만일 조선이라는 사회를 2천만이라는 개인분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하면 꼭 같은 이론으로 450만이라는 가정분자를 떠나서도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 물론입니다> 라고 밝히면서 내용에 있어 가정의 실제문화와 그 상식 자녀의 교육과 방법 등 가정부인의 필수지식와 상식을 구비케 함이 잡지의 목적이라고 적고있다.

 여성(女聲)
창간호가 1934년 4월 간행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에 오영철(吳影哲), 정가 15전이었다. 여급을 주제로 하여 처음 나온 잡지로 화려하고 사진도 많이 실렸다. 오영철은 창간사로서 <여급들은 환경때문에 활동을 하고 있을 뿐 인간 일분자임에 틀림이 없고 정신에 참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성을 발간해서 오해를 받고 있는 여급자신의 상호부조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은 주저말고 직업전선으로>라는 글에서 R회관의 백장미 生은 <깨어라! 여성들이며 그리하여 용감스럽게 직업전선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말자, 싸우자 뭇 직업 여성들이여 남성의 힘센 그것과 신랄한 사회의 모든 난관과 몸을 회생하여 힘껏 싸우자 이것이 우리의 앞길을 유리하게 인도하는 방책인 동시에 허영과 공상으로 번민하는 뭇 여성들에 대한 행복스러운 양식이며 나침반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여성들의 직업을 권장하고 있다.

 위자료청구소송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는 한편 1934년 9월 19일 소완규 변호사를 통해 최린을 상대로 처권을 침해한 과실을 물어 1만 2천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었다. 소송의 핵심은 최린이 나혜석을 강제로 성폭행했다는 점과, 나혜석의 이혼소동이 터졌을때 나혜석과 함께 간통죄에 몰릴 위기에 처한 최린이 나혜석더러 이혼하고 나오면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해놓고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생활비를 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묻고자 함이었다. 나혜석이 변호사를 통해 제출한 제소장에는 최린의 비리가 다음과 같이 나열되어 있다. 1. 그런데 피고는 비상히 흥분한 기분으로 원고에서 **를 요구하므로 원고는 이에 거절하였으나 피고는 자기의 지위와 명예로써 원고를 유인하고 원고에 대한 장래는 일체 인수하기로 굳게 약속할 뿐 아니라 만약 피고의 명령에 복종치 않는 때에는 위험한 상태를 보일 기세이므로 원고는 부득이 **를 허락하고 이래 피고의 유혹에 끌리어 수십 회 정조를 **당하였다. 1. 그런데 원고의 전기 행위가 남편인 김우영에게 발각되어 이혼 요구를 당할 때에 원고는 타인의 유혹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죄가 만번 죽어도 부족하지 않으나 가련한 장래는 피고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다고 하여 피고에게 상의한 결과 소외 이광수를 시켜 원고의 장래를 인수하기로 약속하고 또 김우영의 청구한 협의이혼에 응할 것을 전하기에 원고는 전혀 피고인격을 신뢰하고 김우영과 이혼을 하였다. 1. 그런데 그후 피고는 언제든지 원고의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수년간 말을 좌우로 청탁하고 한푼의 원조도 없는 고로 원고는 경제적 비상한 고통을 받아 현재는 전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1. 금년 4월경에 원고는 부득이 자기의 정도를 개척하려고 프랑스 유학을 하기로 하여 피고에게 여행권과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여 여비로 1000원의 지급을 청구하였던 바 피고는 의외에도 냉혹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1. 피고는 원래 자기의 일시적 **를 만족시키기 이하여 유혹 수단을 써 가지고 원고로 하여금 **의 희생이 되게 하였는데 원고는 남편에게서 이혼당하고 사회로부터 배척받아 생활상 비상한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받아 이것이 원인으로 현재 극도의 신경쇠약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피고는 전혀 고의로 원고의 전부(前夫) 김우영에 대한 처권을 침해하여 원고로 하여금 일생에 막대한 손해를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위자료 1만 2000원을 상당하다고 생각하므로 청구한다. 이런 명목으로 최린을 제소했다는 기사가 1934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기사 말미에 담당 변호사는 이것이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라고 밝혔다. 당시의 법률용어로 「정조유린」이란 <부녀에 대하여 본인이 불응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폭력을 가하여 강간하거나 본인이 저항할 힘이 없는 것을 기회로 하여 강제적으로 성적 욕구를 채울 때에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나혜석은 자신과 최린 사이의 불균형, 조선사회의 왜곡된 정조관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으로 소송을 택했을 것이다. 소송건이 가시화되면서 최린은 서둘러 사건 무마에 나서 우선 동아일보사에 압력을 넣어 문제의 기사를 빼게했고, 나혜석에게는 얼마간의(수 천원) 돈을 주었다. 나혜석은 소를 취하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나혜석은 사회적으로 크게 비난을 받았다. <이혼고백장>발표와 최린 제소사건으로 사회적 비난을 한 몸에 받았지만 나혜석은 오히려 이를 계기로 정조관념의 허구성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정조관념에 기반한 결혼제도의 문제점을 논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혼고백장
1934년 8월-9월 ≪삼천리≫에 헤어진 남편 김우영에게 자신의 반생과 특히 연해, 결혼, 이혼 과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형식의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고, 파리 시절 같이 연애를 했건만 조선에 돌아와서는 나혜석이 겪는 풍파를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최린에게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다. 이 글에서 나혜석은 연애시절부터 김우영과 만나서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내면의 심경을 정리하면서 여성의 독자적 개성을 용납하지 않는 완고한 조선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넣은 김우영과 최린, 그리고 그들 남성을 멀쩡하게 행세하게 하는 사회에 대한 나혜석의 솔직한 비판과 항의는 당시 사회의 통념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에 대한 사회의 비난은 더해갔고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점차 소외당했다.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이 ≪삼천리≫에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한 가정 안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만천하에 공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일차적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정조에 대한 남녀 평등의 주장이었다. 조선사회의 일방적인 남성중심주의 정조관을 비판하면서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한 정조관을 주장하여 당시의 통념에 도전했고 기성 사회의 분노를 샀다. <이혼고백장>이 불러일으킨 파문은 당시 1934년 10월 ≪신가정≫에 <평양 일 여성>명의로 실린 반박문에서 그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반박의 초점은 다음 세가지였다. 첫째, 자연주의 말기의 노악(露惡: 사회의 추악한 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임) 취미의 <소설>이 아닌 이상, 자기 가정, 더욱이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만 가정의 내막을 들추어 보일 필요는 없다. 이는 저널리즘에 놀아난 결과이고 <노출증적 광태>였다. 둘째, 여성은 천부의 매력과 신비성을 자각하고 의식적으로 발휘만 하면 구태여 남녀 평등을 위하여 노력하거나 주장치 않더라도 자연히 문명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한 것은 여성 개인의 성적 매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반여성적 주장이다. 세째, 구미의 풍습을 예로 들어 자신의 자유로운 성생활을 변호하려는 것은 조선 현실에서 벗어난 궤변이다.

 충북 군시제사 파업
청주 군시제사(郡是製絲)공장 여공 290명은 임금 인상 상담중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청주 군시제사공장에서는 지난 해 불황이래 일반여공에게 임금을 인상시켜 주지 않고 있었다. 이에 9월 7일밤 8시경 기숙사의 각 실장이 서로 모여 임금인상을 공장측에 요구하기로 합의한 사실을 교부(사감)가 탐지하여 이를 공장측에 고했는데 여공 290명은 교부의 소행에 분개하여 마침내 파업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공장측에서는 올해는 여공측의 요구에 응할 수 없고 내년에는 고려해 보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대전 군시제사 공장 파업
1936년 8월 대전 군시제사(郡是製絲) 공장 여성노동자 500여명이 일으킨 파업. 여성노동자 500여명은 감독의 욕설과 구타 등의 야만적 행위에 분개하여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대우개선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8월 18일 파업에 들어갔다. 여성노동자들은 일본인 악질감독을 포위하고 부근 파출소까지 대시위 행진을 했는데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여성노동자 7-8명이 부상당했다. 이어 여성노동자들이 2일간에 걸쳐 동맹파업하자 일제 경찰은 그들을 공장에 감금하고 주모자를 회유하고 협박하였다. 한편 파업투쟁은 다른 부분 노동자들의 동정은 물론 농촌에서 온 부모와 친척들의 응원까지 받았다. 부모와 친척들은 공장문 앞에서 투쟁을 응원하였다. 경찰은 부모친척들의 면회를 거절하는 한편, 파업주모자 18명을 체포하였다. 결국 8월 22일 공장주는 일본인 감독 3명을 해고하고 감독이 다시는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여 파업은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대전 군시노동자들의 파업은 다른 방직부문 노동자들의 혁명적 진출에 커다란 자극을 주어 9월 부산방직공장 취사부 노동자들의 파업, 인천 방직공장 1500여명의 파업이 일어났다.

 부산 희성고무공장 파업
부산진 희성 고무공장 여직공 50여명은 19일 아침부터 일제히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공장에 출근하지 않았다. 이유는 일전에 부산고무동업조합에서 협정한 결과 임금을 25%나 감하하여 실시함으로 그것에 불만을 품은 때문이다. 또 같은날 오후 1시에는 대화고무공장에서도 여직공 100여명이 일제히 파업을 할 계획으로 대지 공원에 소풍하러 간다고 빙자하고 떼를 지어 시위행렬을 해 가다가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주모자로 인정되는 장선념(24세)외 4명은 경찰서에 검속되었다. 이렇게 채 파업도 하기 전에 직공 5명을 경찰서에서 자동차로 싣고가게 되자 일반 여공들은 같은날 오후 6시 반경, 그 공장 여공 50여명이 부산경찰서로 가서 <검속한 동무를 즉시 내노아라 만약 내어 놓을수 없거든 우리들까지 전부 검속하라>고 강경하게 항의하였다. 경찰서에서는 2명을 즉시 석방하였다. 그들 50명 가운데 6,7명은 만일의 경우 경찰서 유리창에 던지려고 치마에 자갈을 싸 가지고 간 이도 있었다고 한다.

 상속법상 지위
조선시기에 상속에는 제사상속, 재산상속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제사상속에서는 여자가 배제되었으나 재산상속에서는 조선 후기 제사상속자에게 주는 상속분이 강화되었으나 원칙적으로 남녀균등 상속되었다. 그러나 일제때에는 피상속인이 호주나 호주의 장남일 경우 여자에게 재산상속권이 없었다. 피상속인이 호주일 경우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이 동시에 되어 호주상속하는 장남이 유산을 일단 독점상속하였다가 다른 아들이 분가할 때 장남의 반의 비율로 분배되었다. 여기서 전호주의 딸과 처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피상속인이 호주가 아니고 가족일 경우에는 남녀공동 상속되었으나 그 경우도 피상속인이 장남일 경우는 여자는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딸이 결혼했을 때는 상속권이 없었다. 그런데 1933년 판례에선 관습상 모의 유산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녀가 상속하고 동일가적에 있건 없건 구별 않는다고 하여 약간의 변화가 보였다. 처는 남편이 사망해도 원칙적으로 재산상속권이 없었다. 단지 남편이 아들 없이 사망한 때만 상속권이 있었는데, 1933년 딸 우선주의가 채택되기 이전에는 딸에 우선하여 상속권이 있었다. 그리고 첩은 어떠한 경우에도 재산상속인이 될 수 없었다. 이처럼 재산상속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조선시기보다 확연히 후퇴하였다. 이렇듯 일제시기의 친족상속법, 즉 가족법은 조선 전래의 가부장적 요소를 근대법화하고, 일본의 민법을 적용함으로써 상속법이나 친권행사의 면에서는 조선시기보다 오히려 후퇴하여 가부장제를 더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에서는 부모의 권한이 매우 컸었는데 여기에 일본식 호주제를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혼과 협의이혼에서 일본과 달리 나이를 불문하고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게 한 점 등은 일본보다 호주나 부모의 권한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개인의 자유보다 가족단위의 통제를 우위에 놓음으로써 식민지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자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여성의 활동영역은 넓어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여성에 대한 법률들이 질곡이 되어 여성은 가정에서의 공헌도와 관계없이 의무만 있을뿐 권리는 제약당하였다. 여기에 주권이 없었던 관계로 조선민족 전체가 공법상 권리보호부분이 없었던 점이 여성을 더욱 가혹한 법적 상태에 놓이게 하였다.

 여자추진대
일제는 여성 노동력 동원을 위해 관제운동 부문에서 1942년 가을부터 국민총력 경기도연맹에서 여자추진대를 조직하였다. 여자추진대는 총력운동의 별동대로서 20세 이상 30세까지의 국민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을 가진 부인들을 선발하여 읍, 면단위로 편성하였다. 주요한 활동은 주부들의 저축활동, 부인 개로(皆勞)운동, 부인 국어보급운동, 체위향상을 위한 영양식 강습 등을 철저히 지도하는 것이었다. 1944년 개성의 부인추진대원들은 가정을 방문하여 저축을 권장하였다.

 여자근로동원촉진에 관한 건
일본에서의 여자정신대 결성방침이 결정되자 조선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면서 여자근로정신대를 통한 여성 동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43년 2월 21일 결정된 노무조정령의 발동과 여자근로동원촉진요령 두 가지는 조선 실정을 충분히 참작하여 시행하겠다고 하였는데, 여자근로동원촉진 방침에 중에 처음으로 여자근로정신대의 조직에 대한 것이 설명되었다. <여자를 동원할 직종은 여자의 특성에 적응한 것을 선정할 것은 물론이나 특히 항공기 관계 공장같은 금후 다수한 근로요원을 필요로 하는 곳, 남자취업의 제한, 금지로 여자의 보충을 요하는 곳에 대하여 우선 충족하기로 하는 동시에 정부작업청과 금후 상당수의 남자노무자를 징용하기로 된 관청 등에서는 솔선하여 이를 채용하기로 하였다 ..... 여자동원 촉진의 방법으로서는 종래의 방법에 의하는 외 시정촌장을 중심으로 정내회(町內會), 부락회(部落會), 인조(隣組), 부인회, 여자청년단 등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협력케 하였다. 그리고 금회 새로히 여자근로정신대도 자주적으로 결성시켜 상당한 지도자아래 단체적으로 장기간(당분간을 1년 내지 2년) 출동시키는 제도를 채용하기로 되었는데 ....... 여자근로자의 처치(處置)에 대해서는 황국 본래의 가족제도와 여자의 특성을 고려하고 특히 풍기의 견지, 품위의 향상, 보건 등에 대하여 심심한 유의를 하여 유감없기를 기하고 있다> (≪매일신보≫ 1943년 9월 23일자) 이러한 여자근로동원촉진 방침에 기초하여 1943년 10월 경성부 사정국 노무과장은 <중류계급의 유휴 노력을 전면적으로 동원할 예정>임을 알리고 있다. 여기에는 여자근로정신대라는 말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내용은 여자근로동원촉진방침에 나오는 여자근로정신대와 유사하다. 그 대상은 구체적으로 국민학교, 여학교 또는 여자전문학교 출신자로서 연령 14세 이상 미혼여자와 아직 자녀가 없고 여가가 있는 부인 또는 관공청 기타 상점, 회사의 정리로 말미암아 생기는 여직원 등을 들고 있다. <특히 조선에서는 중류계급이사 가정에서는 학교출신자로서 결혼하기까지 놀고 있는 여자수가 상상외에 다수하므로 이 여자층에 대한 기대가 크다. 따라서 여자동원의 방법은 대상이 주로 학교출신의 유한층인 만큼 그 모교의 교장에게 알선을 도모하도록 위탁하고 또 애국반, 부인단체 등 총력연맹과 관계가 깊은 방면으로도 활동을 하겠다>(≪매일신보≫ 1943년 10월 7일자.) 동원대상이 중류층이 되는 것은 도시의 하층 출신 여성들은 가사사용인이나 여공으로 이미 고용되었고 농촌여성들은 남성들의 강제동원으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여야 하기 때문에 동원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방직업 중에서 15-22세 미혼의 나이어린 여공을 주로 고용했던 제사업의 경우 여공이 전체 노동자의 92%였다. 이들은 1930년대에는 인근 농촌에서 공급되었는데 농촌 경제의 파탄으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발되었다. 그러나 1938년이후 농촌에서 남자가 많이 끌려나가 여자가 농사일을 전담하게 되어 여공을 구할수 없게 되자 제사 공장끼리 여공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여자정신근로령
종래 정부 당국의 지도에 의해 남성을 대신해서 총후(銃後) 근로를 인수하기 위해 여자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증산에 정신하고 있지만 금번의 조치는 그것에 법적 근거를 부여 수시 필요가 있는 경우는 지방장관이 소요인원에 대해 영서를 교부하여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자를 정신대를 편성하여 출동시켜, 영서를 받는 것은 원칙적으로 1년간 근로정신의 의무를 지는 것이다. 여자근로령은 조선에서도 실시되었다. 여자근로정신대의 대상은 국민등록을 한 여성이었고 학도동원령의 적용을 받는 자는 제외되었다. 조선에서 여성에 대한 국민 등록은 기능자만 하도록 되어있었다. 즉 12세이상 40세 미만의 기능자로서 중등학교 정도의 광공계학교 졸업자 또는 실력과 경험에 의하여 광산 기술자, 전기 기술자, 전기통신 기술자, 기계 기술자, 항공기 기술자, 조선 기술자, 화학 기술자, 요업 기술자, 목공 기술자, 토목 기술자, 건출 기술자, 기상 기술자 등으로서 현직에 취업하고 있는자 또는 일찌기 일한 적인 있던 자만을 요신고자(要申告者)로 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에서 여자정신근로령이 실시되어도 실질로 적용될 대상자는 극히 적은 범위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지원할 때는 법령상 대원이 되었다.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기 이전 관알선에 의한 여자근로정신대의 근로 기간은 2년이었는데 법령 공포후에는 1년이 되었다. 이 법령 발표후에 여자정신대의 동원을 선전하고 부추기기 위해 정신대 노래까지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주체가 되어 가사를 모집한 다음 작곡을 의뢰해 만들어진 여자정신대노래는 악보와 가사가 ≪매일신보≫(1944년 8월 23일자)에 보도되었다. 전시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져 1944년부터 동원이 강제성을 지니면서 본격화한 여자근로정신대 제도는 정부가 학교, 여성단체, 지역단체 등을 통해 미혼여성을 군대식으로 대(隊)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으로 동원하게 한 관알선 성격의 제도이다. 여자정신대를 받아들이는 공장측에서 지켜야할 노무 관리 규칙을 보면, 대상자로 가정의 근축인 자를 제외한 미혼자를 설정한 점 등으로 볼때 가족제도를 어느 정도 고려하고 있으며 미혼 여성이기 때문에 특히 풍기와 보건에 대한 유의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조선민사령 개정
1939년 조선민사령 개정으로 양자(養子)법상의 여성의 지위가 달라졌다. 조선시대 양자제도는 남계 남자손에 의한 제사를 단절시키지 않을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딸이 있어도 아들이 없는 경우에 양자를 들이도록 하였다. 입양의 주권자는 양가(兩家)의 부이며 부가 죽은 후 사후양자 경우에만 여성이 입양 주권자가 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가본위 입양제도는 일제 때에도 계속되어 양부가 될 자는 처의 동의를 얻지 않고도 양자를 둘 수 있었고 양자가 될 자에게 처가 있어도 처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1939년 조선민사령 개정으로 <조선인의 양자연조(緣組)에 양자가 양친과 동성임을 요하지 않는다. 단 사후양자인 경우에는 차한(此限)에 부재한다>라고 하여 이성(異性) 양자, 즉 서양자(庶養子)제가 도입되었다.

 근우회해소문제
근우회 해소론의 논의 1931년 2월경부터 시작되어 단천, 북청, 홍원, 신의주, 용정, 이원, 성진, 동래, 경성지회 등 많은 지회에서 해소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해소결의를 한 것은 신의주지회와 용정지회 정도로, 나머지 지회들은 대개 논의는 하되 결정은 전국대회 때까지 보류하는 입장을 취했다. 신의주지회에서는 “노동부인 문제의 전적인 해결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해소 이유로 들었고, 용정지회는 “현 근우회는 그 조직체와 기본방침으로는 특수한 투쟁을 전개할 수 없다”고 해소이유를 밝혔다. 동래 지회에서는 해소 결정은 당분간 보류하되, 앞으로는 노동여성의 조직화에 주력하자는 결의를 했다. 근우회내의 대표적 해소론자는 정종명은 “과거에 있어서 여성 따로의 조직으로만이 능히 조선여성을 유력하게 지도할 수 ...... 있다고 근우회의 조직을 규정한 것은 부녀운동 조직상 중대한 과오였다 ...... 종래까지 노력대중운동단체와 조직적 합류가 규정되지 아니하고 각 계급의 부녀들만을 합동하여 구성한 전 민족적 단일여성단체 근우회는 조직상 성별 대립의 중대한 결함으로 인하여 조선의 노동부녀의 모든 차별과 학사(虐使)에 대한 자기적 해결을 수행할 수 없는 단체가 되어 있다”고 하여, 근우회의 조직 자체를 과오로 보았다. 이렇게 성별 조직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김추산(金秋山)에 의해 더욱 분명히 제시되었다. (조선여성운동의 중대위기, ≪삼천리≫, 1931.9) 그는 첫째, 노동부인과 농민부인은 노동자계급, 농민계급의 일부분으로서 노동조합, 농민조합에 조직되어야 하며, 그 조직체내에서 성적 차이를 초월하여 남성과 같이 협동하여 정치적 무대에까지 충분히 진출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노동부인이 부인이기 때문에 따로 근우회에 조직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은 계급적 역량의 분할이며 역사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았다. 현재 노동부인이 조합 내에 극히 적은 것은 그에 따르면, 결코 성적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조합운동이 부진상태에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일 뿐이었다. 둘째, 운동의 대상과 목표가 동일한 이상 하필 여성운동이 별개의 조직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셋째, 성적 차이에 대한 봉건적 관념이 민중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독자조직밑에서 <관념의 고취>에 의한 <훈련>, <교양>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고, 남성대중과 동일한 조직 밑에서 함께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실로 극복될 수 있다. 대중의 <교양>, <훈련>, <계몽>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공장에서, 농촌에서, 또는 가두에에서의 남성대중과의 공동행동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지였다. 그에게 있어 근우외는 애초에 잘못된 조직관에 의해 탄생한 것이고, 운동을 분열시키는 오류를 범한 <기형적인 조직체>로서, 해체가 당연한 것이었다. 신간회 해소과정에서도 맹활약한 해소파 정칠성은 처음에는 “근우회는 조선사회의 특수성과 그 필요에 의해 발생 존재한 것으로 ...... 노농부인들의 각 부문운동이 충분히 격화할 시기에는 ..... 당연히 해소함에 이르리라. 그러나 금일과 같이 각 부문운동의 분야에 대하여 일반 조선여성은 당연히 투입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성전유의 분야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시기에 있어서는 일반 여성의 의식을 촉성시키기 위한 계몽운동 같은 방면이 크게 의의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해소반대의 편에 섰으나, 이후 입장을 바꾸어 “진개의(참된-필자) 여성운동은 근우회를 버리고 새로운 딴 길을 찾는 곳에서만 전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해소반대론자들의 논지는 신간회와 달리 근우회는 아직까지 성별조직으로서의 존재의의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진지회 출신이며 당시 중앙집행위원으로 있던 김정원(金貞媛)은 신간회 해소에는 동의하나 근우회 해소에는 반대입장을 취했다. 그는 “근우회가 신간회와 동일선에서 논평될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근우회의 지도(부-필자)는 계급적 의식을 가진 전위분자들”이며, 조선여성의 현실에서 “성별적 운동의 의의가 확연히 존재”하고 있고, “조선여성운동의 발전상 근우회가 아직까지는 훌륭한 계단이 되고 있는 동시에 다른 계단으로 옮길만한 조건이 객관적으로 미비되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입장은 역시 신간회 해소를 찬성한 남성 사회운동가 이인호(李仁浩)로 부터도 제기되었다. 해소반대파인 중앙집행위원장 조신성은 신간회 해소에 대해 “조건없이 준비 없이 해소 운운함은 해소란 것보다도 분리라고 생각되며 분리란 것은 약자의 제일 금물”이라고 지적하였다. 근우회 해소문제는 전국대회에 회부되어 지회의 총의에 의해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순서였다. 본부는 해소문제 등을 다룰 1931년도 전체대회를 6월로 예정했으나, 준비가 부족하고 정종명이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의 사유로 7월 4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대회는 지회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몇 차례에 걸쳐 대의원이 정족수에 미달되는 일을 거듭한 끝에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평원고무공장파업
1931년 5월 17일 평양 평원고무공장에서 <임금인하 반대, 검사원 축출>등을 조건으로 여성노동자 47명이 파업을 단행하였다.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 가입하지 않은 평원공장에서 임금인하를 시도하자 다른 자본가들은 이에 동조하며 은밀히 지원하는 한편, 이에 맞선 노동자들은 직공조합을 통한 대응책을 강구함으로써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었다. 고무직공조합에서 5월 22, 23일 소집한 직공대회에는 여성노동자 100여명이 모였고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김취선이 의장으로 등단했다. 여성노동자들은 공장을 점령하고 단식동맹을 조직하는가 하면 그중 한명인 강주룡은 을밀대 옥상에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고용주측의 무리를 타매하는”연설을 했다가 9시간만에 끌려내려와 검속되었다. 평원고무공장에는 1930년 9월 조선에 들어왔던 정달헌이 1931년 4월 하순 이주하와 함께 평양노동연맹 좌익위원회를 조직하고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근우회 평양지부 서기였던 조영옥을 획득하여 평원과 정창고무공장에서 반조직에 착수하고 있었다. 정달헌은 평원고무공장의 파업이 일어나자 파업지도자 강주룡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격문을 배포했다. 여성노동자의 완강한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인근공장에서 동정파업이 일어나고 조선노동평양연맹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 노동단체가 적극원조를 결의하자 공장측은 여성노동자 49명을 전부 해고하고 노동자 18명을 새로 모집하였다. 이에 파업노동자들은 작업개시를 막기위해 새로 모집한 노동자들이 전차를 타고 가려고 하자 일제히 전찻길 위에 엎드려 전차를 정지시켰고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려고 함에 신작로 위에 드러누웠고 심지어 오물을 끼얹는 등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검속된 강주룡은 80여시간 단식투쟁을 하다가 6월 1일 석방되지 선교리 파업단본부로 가 단식을 계속하면서 해고 여성노동자들을 지휘했다. 고무직공조합 집행위원회는 평양지역의 고무공장 노동자 모두에 관련된 중대문제라고 인식하고 6월 7일 백선행 기념관에서 고무공업노동자 2,300여명을 소집하여 <공동단식투쟁준비단체대회>를 개최하고 공동전선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자측의 완강한 투쟁이 진행되면서 한편으로 자본가측과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신직공에게 종전임금을 지불하라고 하여 임금인하를 취소시킨 후 2단계로 희생자를 한명도 내지 않도록 회사측에 요구하였다. 회사측에서는 임금인하 철회와 파업노동자와 모집노동자의 비례채용을 제안했지만 파업노동자들은 이 타협안을 거부했고 경찰은 파업단의 대표들을 구속했다. 파업단 대표가 구속되고 여성노동자들이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는 한편, 당시 평양지역에 살포된 격문으로 검거선풍이 일어나자 파업단의 기세는 급격히 약화되고 파업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강주룡은 평원고무공장파업을 배후조종한 정달헌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신경쇠약으로 보석 출옥 중 1932년 6월 13일 사망했다. 파업은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끝났으나 그후 노동자본위의 생산조합 설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931년 12월 평원고무공장에서 해고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본위의 주를 모아 자본금 2만원을 조달하여 생산조합 평화고무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생산기관의 사회화, 노동생활의 합리화, 이윤분배의 균등화를 목표로 전국 각지의 소비조합, 협동조합을 주주로 모집하는 등 판로 확보에 노력했다. 그러나 공장이 세워진 지 일년쯤 되는 1932년 12월 자금난과 함께 조합원과 조합장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 공장은 다른 고무공장에 매도되었다. 1930년대 전반 여성노동자의 투쟁력은 양적,질적인 면에서 고양되고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공장을 습격하기도 하는 등 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들의 폭발적인 힘을 분출시키면서 일제와 자본에 반대한 투쟁전선에 확고히 나섰다. 이러한 투쟁력의 고양을 기반으로 해서 여성노동자의 특수요구, 모성보호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파업투쟁의 요구조건으로 명확히 제시되기 시작했다. 특히 모성보호는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안고 있는 기혼 여성노동자의 노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요구였는데, 여성노동자의 많은 부분이 기혼여성노동자였다는 점에서 여성들을 노동운동으로 전취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구였다.

 해녀투쟁
1930년 9월 해녀투쟁은 정의면 성산포산 석화채를 조합서기가 경쟁입찰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해녀에게서 매수하려던 것이 원인 되어 일어났다. 천여명의 해녀들은 해산물 수매가인상 및 수매시 부정행위에 대해 반대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은 당시 제주도의 사회운동가들을 자극하였다. 그들은 1930년 11월에는 해녀조합에 대한 격문을 뿌리는 등 해녀운동에 관심을 크게 갖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해녀조합은 해산물 수매가격을 인하하고 등급을 부당하게 산정하는 행위를 계속하였다. 1931년 하도리에서는 생복과 감탯재 판매에서 생복은 지정매수인이 매수를 거절하고 조합에서 처치를 해주지 않아 다 썩고, 감탯재는 지정등급변경, 지정가격 인하로 판매가 중지되어 손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해녀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고 1931년 말부터 구좌면 하도리의 선진적인 해녀들이 중심이 되어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구좌면은 정의면과 더불어 제주도 해녀가 집중(1932년 3,381명으로 전 도의 약 42%)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전부터 해녀어업조합에 대해 불만을 품어왔던 해녀들은 이 때문에 격노하여 일차로 항의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조합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해녀들은 해녀조합의 정체를 폭로하고 요구조건을 관철하자는 입장에서 세화장날을 기해 대중적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1월 7일 정조부터 300여명의 해녀가 그들의 생산도구인 호미와 비창을 들고 어깨에는 양식보자기를 메고 하도리에서부터 세화시장까지 시위행렬을 이었다. 세화주재소의 저지를 뚫고 부근 리에서 모여든 해녀들은 이 행렬에 합세하여 장을 보러 온 수천 군중들에게 해녀조합의 문제를 폭로하였다. 부근의 마을민들도 이들에 합세하여 해녀조합 본부를 습격하려고 행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세화주재소는 중재를 자청하였고 해녀들은 주재소에 쇄도하여 현장에서 대표를 뽑고 그들과 협상에 임하여 해녀들의 요구에 대한 책임있는 답변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시위대는 다시 행렬을 지어 평대리 해녀조합 지부사무소에 가 면장 겸 조합지부장의 책임으로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얻어냄으로써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12일 1932년도의 해산물 중 포패류에 대한 지정판매를 한다는 광고문을 널리 붙였다. 이에 자극받은 해녀들은 이번을 기해 일체의 지정판매를 절대로 반대하자는 의견이 높아져 각 리 연합투쟁을 벌이기로 비밀리에 계획하였다. 각 리에서 해녀회의가 열려 해녀가 가장 많았던 구좌면,정의면을 중심으로 제주도 동부가 단결하였다. 지정판매일인 12일은 세화장날이었고 마침 제주도사 겸 제주해녀조합장이 구좌면을 통과할 예정임을 알아내고 해내들은 구좌면의 하도리,세화리,종달리,연평리, 정의면의 오조리,시흥리, 합하여 6개 리에서 해녀조합에 대한 일대 시위를 하고 도사(島司)와 직접 담판을 계획하였다. 1월 12일이 되어 종달리,오조리 해녀대 약 300명, 하도리 300여명, 세화리 40여명, 시흥리와 연평리 해녀 300여명이 동납북으로 모여 들어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며 만세로 서로 호응하면서 세화장을 점령하였다. 해녀들은 대표를 뽑아 각 리 공동 7개 요구조건과 하도리측의 11개 요구조건을 들고 곧 해결해달라고 요구해, 도사로부터 5일내에 요구대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해녀들은 그 자리에서 5일 이내 완전한 해결이 없으면 더한층 맹렬히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이때 해녀들이 요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일제의 지정판매 절대반대. 2). 일제의 계약 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 3). 미성년과 40세 이상 해녀 조합비 면제. 4.) 병 기타로 인하여 입어(入漁) 못한 자에게 조합비 면제. 5). 출가증 무료급여. 6). 총대는 리별로 공선. 7). 조합재정공개. 8). 계약 무시하고 상인 옹호한 마쓰다(升田) 서기 즉시 면직. 9). 위선적 우량조합원표창 철폐. 10). 악덕상인에게 금후 상권을 절대 불허. 11). 가격등급은 지정한 대로 할 것. 기타 약(略) (≪조선일보≫ 1932.1.14-24.)이상과 같은 요구조건에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해녀조합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녀조합이 해녀들의 요구에 아무런 성의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1월 24일 주모자로 파악된 해녀 20여명과 그외 청년들 수십명이 검속되었다. 이에 해녀들과 동민들은 검거자 탈환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26일에도 800여명의 해녀들이 무장경관대와 충돌하는 등 투쟁이 계속되었으나 다수의 검거자를 내고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사건으로 다수 검속되었으나 곧 많은 이들이 풀려나고 최종적으로 검거된 사람들은 해녀 3명(이들도 실형을 받지는 않았다)이었고, 그외는 모두 제주도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제주도 야체이카) 관계자들이었다. 그러나 해녀들의 요구는 부분적이나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 지정판매제는 폐지하고 경쟁입찰에 의한 공동판매를 부활했으며, 부정조합서기 및 지정상인을 10년간 조합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50세 이상의 해녀와 미성년자에게는 출가시 조합에 내는 수수료를 면제하였다. 1932년 해녀투쟁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일어났던 어민투쟁 중 최대의 것이었으며 최대의 여성투쟁이었다.

 제3차조선교육령개정
1938년 제3차로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었다. 내용을 보면 <국어상용자>와 <아닌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한,일 공학(共學)이 명목상 가능해지며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신민>육성의 교육으로 통일되었다. 중일전쟁은 대륙침략기지로서의 한국의 중요성을 더욱 증가시켰고,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일 차별을 철저히 은폐하여 한국인의 적극적인 협력을 구하려고 한 것이 교육령 개정의 의도였다. 학교명칭이 일본과 동일하게 되어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는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개칭되었다. <조선어>로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어가 수의과(隨意科)로 떨어져 사실상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교과과정은 명목상의 조선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과 동일해졌다. 이 경향은 1941년 일부 개정으로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개칭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학원전시비상조치방책
1943년 교육의 전시체제를 강화한 것이 학원전시비상조치방책(學園戰時非常措置方策)이다. 학생을 생산과 방위의 중심적 담당자로 하여 <근로 즉 교수(敎授) 즉 훈련(訓練)>이라는 학교교육의 실질적인 해체를 초래하였다. 모든 학교를 교육의 장에서 노동력편성과 공급의 장으로 전환시켜갔다. 그 방법은 학생을 학교에서 생산현장으로 옮기는 것 즉 수업년한단축의 비상조치(1941) 및 학도근로령(1944)에 의거한 것과 학교제도를 문과계 축소, 이공과계 편중으로 하여 전시하의 노동력 구성에 맞도록 한 것이다. 1944년 이후로는 이공과 전공자는 각각 전문공장으로 가고, 문과계 학생은 징병으로 나가거나, 식량증산, 국방시설사업 등의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여학생 역시 학교를 공장화하여 <내일의 졸업보다 오늘의 동원>을 강요하였다. 1938년부터 실시되어 오던 지원병제도가 1944년 징병제도로 강화되자 남자교육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징병제 실시에 대비하여 이미 1943년 비상조치방책에는 이화,숙명의 두 전문학교를 수업년한 1년의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교양기관으로 전환시켰다. 모든 여자교육은 남자를 대신하여 사무직 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노동에 동원하는 것으로 대치하였다. 그간 지원자에 한하여 여자정신대로 동원되어 오던 것이,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여 징병제와 동일한 강제동원을 법제화했다. 이로서 여자교육역시 완전 부재상태가 되며, 정신대를 피하는 수단으로 여학생의 갑작스런 조혼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선여자청년연성소규정
여성은 국민학교 취학률이 남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자청년단, 국어강습회의 시설을 이용해서 황민화 교육을 실시하였지만 <황국여성>으로 만들기가 어려웠다. 이에 일제는 여성 교육 시설을 강구하여 1944년 2월 조선여자청년연성소규정을 제정하여 4월부터 전국 국민학교에 부설시켰다. 연성소 대상은 만 16세로 국민학교 초등과를 수료하지 못한 여성이었고, 연성기간은 1년, 연성항목은 수련, 국어(일본어), 가사 등이었다. <여자청년연성소의 취지를 오해하여 여자징용의 전제조치라는 등 허무한 소리>가 있고 이는 <근거없는 곡해>고 일제가 일부러 밝힐 만큼 그 의도가 명백한 것이었다.

 현모양처론
현모양처의 관념이 하나의 사회적 사상으로 형성된 것은 일본과 조선, 그리고 중국에서 20세기초의 개항기에 근대국가의 형성과 그 기반이 되는 국민의 양성이라는 목표 아래 여성을 국가로 통합시키는 과정에서였다. 개화기부터 여성의 규범으로 현모양처 사상을 추진한 조선과 일본에서 그러한 도구적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 시기는 피식민지가 되거나 전쟁이라는 국가 존속을 좌우할 대목표가 세워진 20세기 전반부터 1940년대, 특히 전쟁이 심화된 제2차 세계 대전에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하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에 의한 동원체제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적용되어, 여성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총동원 체제로 흡수되어 갔다. 그 당시 공교육이나 가정 교육은 황민화 정책 아래 모든 측면이 체제의 통제하에 놓여져 있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의 규범으로 조선 여성에게 강제된 것이 현모양처 사상이었다. 총동원체제의 확립과 함께 1938년 3월 공포된 조선교육령개정은<내선공학(內鮮共學)의 일원적 통제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인과 똑같은 교육 방침 아래 내선일체화 방침에 따라 황국신민의 훈련을 진행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종래의 국어상용과 상용하지 않는 학교제도의 구별을 철폐하고 일본 내와 같이 초학교령, 중학교령, 고등여학교령에 의한 <완전한 일본인>을 만들기 위해 획일적 정책이 행해졌다. 또 조선어는 선택(隨意)과목으로 되어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 교육령 개정에 따라 교등여학교 규정도 동시에 개정되었다. 고등여학교규정개정 취지를 보면 여성은 <부덕(婦德)의 함양(涵養)>을 통해 현모양처로서의 자질을 얻을 수 있으며, 여기서 현모양처 사상을 적용하는 목적은 <충량(忠良)지순(至醇)한 황국(皇國)여성(女性)>을 만드는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모양처 사상은 교육을 통해 여성의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을 어느 정도 가능케 하고 국가나 사회의 목적 수행을 위해 여성을 이용하면서도, 여성이 주체성을 가지고 체제를 뒤흔들 만큼의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여, 최종적으로는 여성을 사적영역, 즉 가정으로 제한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현모양처 사상은 전시하 일본의 대외침략을 수행하는 도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급
우리나라에 카페가 보급된 1930년대를 전후로 까페의 수효가 늘어나면서 여급의 수효도 늘어났으며, 이러한 여급의 등장은 새로운 생활모습과 풍속의 변화를 몰고 왔다. 여급이라는 당시의 명칭은 까페 여급이외에 끽다점(다방) 등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자 급사>라는 의미로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까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말로 추정하고 있으며, 신문과 같은 대중지를 통해 그 실상이 지면에 널리 보도되기는 1931년 가을이다. 당시 신흥 술집으로 등장한 까페는 근대문명의 산물이며, 까페 여급 역시 문명이 낳은 새로운 직업으로서 여성만의 전문직종이었다. 당시의 여급은 적어도 일반 사람들에게 서구 문명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 도시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모던걸>이라는 일군의 여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도시에 출현한 새로운 직업 여성과 신식 교육을 받은 여학생들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 중 특히 까페나 빠에 근무하는 여급들이 일명 모던걸이라는 대명사로 총칭되었는데, 그만큼 그들은 복장과 사고에 있어서 유행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들은 여급이 되기 이전 기생이었거나 배우인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여학교 출신의 학력을 가진이도 많았다. 그러니 만큼 까페에서 술과 애교를 파는 까페 여급에 대한 부정적 통염에도 불구하고 당시 까페 여급들은 그곳을 출입하는 지식인들과 한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지식을 소유한 지적 여성들로서, 지식인들의 호감을 얻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여급은 당시 유입된 근대문명의 체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이들은 까페 폐점 이후의 호객행위를 통한 순이윤 창출이라는 직업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폐점이후 호객행위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야말로 여급들에게 동거하는 가족, 혹은 남자를 부양할 수 있는 순수익이 되는 만큼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둘째, 당시 여급들은 육체와 정신이 이분화된 생활을 하고 있다. 즉 이들의 몸은 비록 돈을 쫓아 황폐화되고 고갈되어 있을지라도 이들의 정신이 높은 이지(理智)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지 위해 이들은 지식인 남자를 동거생활 혹은 공동생활의 상대자로 선택하고 있다.

 까페
1934년 당시 까페 전문잡지 ≪여성(女聲)≫과 안내서 ≪대경성(大京城)≫에 의하면 서울의 유명까페는 명동과 회현동의 일인(日人) 거리를 중심으로 국수(菊水), 명치헌(明治軒), 라디오, 바론, 엔젤, 왕관(王冠), 백마(白馬)가 있으며, 종로를 중심으로 종로회관(鐘路會館)과 낙원회관(樂園會館) 정도가 있다고 소개한다. 여기에 근무하는 당시 여급들의 정확한 수효를 잘 알 수 없으나, 1937년 신문기사에 의하면(≪동아일보≫, 1937년 11월 5일자) 1936년말 까페와 빠의 여급은 4060명으로 전년에 비해 726명이 증가되었다고 집계하고 있다.

 여성직종
1930년대 당시 발간된 여성잡지에 소개된 여성들의 전문 직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근무시간 및 보수를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사직공(製絲職工) (근무시간 오전 6시 30분-오후 7시/보수 일급 20전-30전, 숙련공일 경우 1원) 연초(煙草)공장 여직공 (근무시간 12월-3월 오전 8시-오후 6시, 4월-11월 오전 7시-오후 5시/ 보수 월급 9원-17원) 서울대륙고무공장 직공 (근무시간 오전 6시-오후 6시/보수 일급 15전-50전) 백화점 여직원(근무시간 오전 9시-오후 10시 30분/일급 15원-30원) 전화 교환수(근무시간 하루 평균 8시간-12시간/월급 25원-26원) 간호부(근무시간 하루 평균 8시간 이상/월급 25원-62원) 이러한 전문직종은 그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의 기회가 희박할 뿐 아니라, 보수가 많은 우수 직종은 일본인들의 차지였으므로 대다수의 여성들은 단순 노동 위주의 제조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순 노동 위주의 제조업은 그 일이 고될 뿐 아니라, 보수가 상당히 취약했다. 당시 제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평균 임금은 59전 1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미혼여성의 임금은 성별, 연령별 차별을 이용한 저임금 수준에서 1개월 식비와 매월 임금에서 일정액을 공제하는 강제 저축 및 공장내의 규율 강화와 노동 강도의 증가로 생산성 및 품질향상을 위해 채택한 벌점에 의한 벌금제의 벌금까지 삭제하면 그들의 손에 들어오는 돈은 극히 적었다. 예컨대 1932년 조선제사 공장의 경우 1일 13시간 노동하여 벌금, 기숙사비를 제하고 난 뒤 그들에게 한 달에 겨우 1-2만원만이 남았다.(≪동아일보≫, 1931년 9월 1일자) 그러므로 다수의 여성들은 지독한 생활난을 타계할 양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여급이라는 신흥 서비스업에 가담하기 쉽상이었다. 물론 기생들이 권번에 빚과 몸값으로 저당잡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급 역시 까페 주인에게 얼마간의 빚이 있었다. 그런 즉 그들의 하루벌이 다수는 까페 주인에게 반환되기 일쑤이므로, 그들은 자신의 집이나 여관에서 실질적인 영업 행위에 더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여급의 보수에 관한 자료는 잘 찾아볼 수 없으나 이상 작품을 근거로 살펴보면 1936년 6월에 발표된 <지주회시>에서 돈 잘버는 여급 <마유미>는 하룻밤 <3-4원>의 돈을 번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같은 해 9월 발표된 <날개>에서 <나>는 아내에게 각각 <5원>, <2원>을 주고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하룻밤 평균 2원 이상의 돈을 벌어들인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른 직종의 일당에 비해 그 수익이 대단히 큰 것이 아닐 수 없다.

 생산증강노무강화대책요강
1943년 10월 8일 총독부에서 발표한 생산증강노무강화대책요강의 골자는 국민징용령, 노무조정령, 근로보국협력령 등 기존 법령을 전면적으로 발동하여 유휴불급노무의 전면적 동원을 기하는 외에 종래 원칙적으로 통제외에 둔 여자 노무를 적극적으로 통제 동원하는 것이다. 이중 여성에 대한 노무 배치 대책은 “여자의 특성에 적응하는 직종을 선정하여 신규학교 졸업자 및 연령 14세 이상의 미혼자 등의 전면적 동원체제제를 확립할 것(≪매일신보≫, 1943년 10월 8일자)이라고 하여 주요 대상이 여자근로정신대와 유사하다. 여자 유휴노동력의 적극적 활용을 위한 실시요강 중에는 접객업, 오락업 등에 여자청소년(대개 연령 12세이상 25세 미만의 자)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도 있다”

 강습소
학교외 교육으로 강습소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강습소나 야학의 성격은 점차 변화한다. 1927,8년대부터 1930년대 초는 주로 재봉 수예 일본식 염색법 등 일본화 해 가는 생활양식에 맞추기 위한 생활강습회가 전체 강습회의 약 80%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전운이 급박해지가 강습회는 전시체제강화를 위한 도구화로 전락한다. 이때부터 강습회는 주로 어용화되어 부녀자에게 일어의 보급과 황민화정신을 고취하였다. 장소는 대부분 관공립학교의 기존시설을 이용하는 야학의 형식이 많다. 1939년 회원 30만의 조선애국부인회와 회원 2만의 조선국방부인회는 공동주최로 가정부인을 위한 일어보급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는데, 16-60세 노파까지 강습을 받게 했다. 또한 일제말기에는 생산증강을 위한 한 방법으로 농촌 부녀지도자 양성이 단기로 행해졌다. 이러한 일제말기의 모든 강습회는 일본의 전쟁수행의 한 방편으로 동원되었던 것이다. 정규학교 이외의 각종 교육시설 및 조직을 통한 학교외의 교육활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어, 실질적으로 보다 중요한 교육의 일면을 담당했던 것이다.

 국민근로보국대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을 공포함에 따라 국민근로보국대가 조직되었다. 만 14세부터 40세 미만의 남자와 14세이상 25세 미만의 미혼여자는 1년중 특정의 기간 국가, 공공단체의 사업, 기타 민간의 중요사업에 참가하고 근로봉사할 것이라는 실천사항에 근거하여 근보국대에 남자부와 여자부를 설치하도록 근로보국대 조직요강을 작성했다. 근로보국대는 14세 이상 20세 미만의 미혼여자를 동원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여자의 조혼경향이 강화되었다.

 애국부인회
1901년 내무성과 후생성의 후원 아래 먼저 일본에서 조직되었다. 조선에서는 병합 후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여자, 일제에게 작호를 받았던 조선인 귀족부인들로 구성되었으나 별 활동은 없던 단체였다.그런데 1937년 이후 급속히 그 조직과 활동범위를 확대하였다. 이때 애국부인회 총재는 시가시 후시미 궁비(東伏見宮妃), 조선본부의 고문은 미지로(南次郞) 총독 부인, 조선본부장은 오노(大野) 정무총감 부인이었다. 조직은 조선본부 아래 도지부, 군부(郡府) 분회 및 분구, 반을 두었다. 처음 지방으로 조직이 확대되었을 때는 조직 당시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중심이 되어 지방분회에서는 경찰서장(주로 일본인)부인과 군수부인 등 경찰이나 행정계 우두머리의 부인이 간부가 되고 지방거주 일본인 부인이나 말단 관공리 부인들이 주구성원이었다. 그런데 점차 조직이 확대되어 1939년 6월경 회원이 30만, 충남지부의 경우 회원이 19,198명으로 도내 부인의 2.56%의 조직률을 보였다. 그리고 함흥,진주,안악,하동 등 몇군데의 군 단위 조직에서는 1000명 이상의 회원이 있었다. 애국부인회의 활동은 주로 전쟁협력을 위한 국방헌금 및 위문품 납부와 출병(出兵) 장려 그리고 출병한 군인가독 및 유가족 위안 등이었다. 이를 위해 시국강연, 영화회, 위안방문, 표창 등을 행하였는데 특히 3월 6일 일본 왕비의 생일인 지구절(持久節)을 즈음한 시기에 <부인보국주간>으로 정하고 한 활동은 이들의 활동전모를 알 수 있다. 즉 <부인보국주간>의 첫째날은 생활쇄신 소비절약의 날로 잡아 폐품회수, 절미, 혼식, 연료절약을 강조하고, 둘째날은 부인보국의 날이라 하여 00기원, 시국강연, 영화회, 위문 등의 활동을 하고 다음날은 애국저금일로 삼아 부인들이 절약하여 모든 것을 털어놓도록 하였다. 그 다음날은 직접 군인 유가족 및 병원요양소 방문, 위문품 발송 등을 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애국부인회에 소속된 부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고 나아가 전조선 여성에게 강요된 것이었다.

 국방부인회
일본에서 1932년 육군성 후원으로 조직되었으며, 조선에서는 조선에 주둔한 19,20사단 특히 20사단의 지휘아래 193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조직은 부도(府道)지부,군 분회로 구성되어 있고 임원은 회장,부회장,이사,감사,평의원,간사,고문,총무부장 등으로 되어 이 시기 경쟁적으로 활동하던 애국부인회에 비해 자못 체계적이었다. 국방부인회가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시기는 1937년부터인데 지방조직이 설립될 때면 행정,경찰관서장뿐 아니라 군사단장이나 군(軍) 대표가 반드시 참석하였다. 애국부인회에 비해 창립은 늦었지만 조직은 급격히 확대되어 1937년 6월말 단체수 73개, 회원수 29,500여명이던 것이 1937년 9월 154개, 62,427명, 1938명 5월 지부 321분회 87,000명으로 증가하였다. 활동면에서 국방부인회는 애국부인회와 큰 차이가 없었고 애국부인회와 계속 마찰을 일으켰다. 이 두 단체는 1942년 일본에서 대일본부인회가 발족되면서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로 통합되었다가 다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산하단체가 되었고 1945년에는 국민의용대에 소속되었다.

 애국금차회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시국을 인식시키기 위해 각종 시국강연반을 구성되고 국방헌금모집을 위한 각종단체가 설립되었다. 애국금차회는 이런 시국에 만들어진 단체로 금비녀 금반지를 국방헌금으로 내기 위해 귀족부인과 사회 중견여류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1937년 8월 20일 경성고보 강당에서 “금비녀 금가락지를 뽑아서 헌납하자”라는 목적으로 발회식을 갖고 정식 출범했다. 발회식날 금비녀 11개 금반지 3개 금귀개 2개 은비녀 1개 현금 890원 90전을 거두어 바치는데 이러한 헌납과정은 김은호가 미나미총독에게 그려바친 <금차헌납도>의 주제가 되었다. 회장은 윤덕영의 처 김복수(金福綏)였고 간사로는 고황경, 송금선, 김활란 등이었다. 이후 애국금차회는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의 위문 격려, 총후가정의 조문, 전 각항 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황군 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다.

 김활란(金活蘭)
1899년 인천에서 태어나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1922년 미국에 유학하여 1925년 귀국,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2년 김필례, 유각경과 더불어 조선여자기독청년회(YMC)를 만들었고 1927년 한국여성운동의 통일조직인 근우회에 참여하여 요직을 맡았었다. 그러나 이념상의 차이를 이유로 일년 후에 근우회에서 탈퇴하였다. 1930년 다시 미국에 건너가 1931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아펜젤러가 교장으로 있는 이화여전에서 학감 및 부교장으로 재직했다. 일제가 외국인에 의한 공공기관 운영을 금지하여 교장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1939년 4월 이화여전 7대 교장이며 이화 역사상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교장이 되었다. 종교계와 교육계에 걸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지만 식민지 말기에 친일적인 행위를 하여 오점을 남겼다. 1937년 국방비헌납을 목적으로 조직된 친일단체인 애국금차회가 조직될 때 관여하였고, 1938년에는 내선일체라는 이름하에 조선여자기독청년회를 일본의 기독교여자청년연맹에 통합시키는 작업에, 당시의 중심적인 기독교 여성들과 함께 앞장섰다. 일제가 한국어를 말살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며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식민지시대 말기에 아마키 활란(天城活蘭)이라고 창씨개명을 하고 전시복장인 몸빼를 입었다. 학교경영자로서는 선교사명을 띠고 세워진 학교의 건물에서 십자가를 지우고 찬송가와 성경을 금지시키고 기숙사에 가미다나(일본이 숭배하는 신의 위패를 두는 곳)을 설치해 학생들로 하여금 그 앞에 꿇어앉게 하라는 일제의 명령에 따랐다. 교육자로서 김활란(金活蘭)은 이화여전과 이화보육학교 학생 400명을 조직하여 총후 보국의 내조적 역할을 할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으며, 방송선전협의회에서 부인강좌를 맡아 조선부인들에게 일제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라고 말하였다. 이외에도 부인총궐기 촉구강연회, 시국부인회강연, 학병권유 부인계몽독려반 순회강연 등에서 연사로 활약하였다.

 이숙종(李淑鍾)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8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하였다. 1936년 태화여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페교하자 그 학교를 인수하여 성신여학교를 세우고 이사장과 교장을 맡았다. 그는 여성교육자로서 해방 후에 성신여대 학장과 이사장, 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박정희 정권 때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김활란과 함께 방송과 순회강연회를 통해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고 참여를 선동하였다. 「국민총력임전보국단」,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참여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지도위원을 지냈고 1943년에는 인천, 개성, 수원 등지에서 학병을 권유하는 부인계몽독려반으로 활동하였다.

 황신덕(黃信德)
언니 황애덕과 더불어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에 남을 중요 인물이다. 황애덕이 김마리아와 함게 애국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기독교 신자로서 농촌계몽운동에 주력한 반면, 그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헌신하였다. 1910년 평양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1915년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항일비밀조직인 송죽회의 일원이었다. 1920년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1926년 일본여대 사회사업부를 졸업, 귀국 후에는 시대일보와 중외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회 근우회 집행위원을 하는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근우회가 해산되고 일제의 탄압으로 합법적인 사회운동이 어렵게 된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1938년부터 여성단체연합 시국강연에 연사로 활동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경성가정의숙(현 중앙여고의 전신)을 창설하여 숙장에 취임한 1940년 이후에는 친일단체와 친일강연활동에 가담하여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경력을 가진 자로서는 드물게 친일파의 반열에 끼였다.

 박순천
1899년 9월 경남 동래군 기장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명련(命連)이다. 동래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의신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삼일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피신생활중 일본으로 유학을 가 요시오까(吉岡)여자의학 전문학교에 편입해 약 1년간 다니다가 검거되어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기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로 옮겨 1926년 3월 졸업과 동시에 귀국했다. 가정여숙을 설립해 교육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1947년 9월부터 독립촉성 애국부인회 회장직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감찰위원에 임명되고, 다음해 대한부인회 총본부 회장에 피임되고 이어 대한여자청년단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부터는 2,4,5,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였으며 민주당 총재,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신민당 고문 등 야당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유각경(兪珏卿)
1892-1966. 서울출신.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협화(協和)여자전문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14년 귀국하여 정신여학교에서 교원을 하면서 스승인 겐조(Genso.M)의 지도하에 김필례, 김활란 등과 YWCA창설의 기초를 닦았다. 1922년 3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기성회를 결성하고 제1대 총무를 지냈다. 그해 4월에는 북경 청화대학에서 열린 만국기독교학생청년회 총회에 감리교 여성대표로 참석하였다. 1927년 신간회가 조직되자 여성대표로 참여하였으나 여성의 독자적 조직요구에 따라 1927년 4월 근우회 창립에 참여하여 회원모집부문을 담당하였으며, 제1회 집행위원회에서 선전조직부를 담당하였다. 1929년 신간회가 해소되자 이후 YWCA운동에만 주력하여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해방후 1936년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 1950년 사회부 부녀국장, 1952년 감찰위원, 1953년 대한부인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여자청년단
여자청년단은 농촌진흥운동 하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성들의 교유과 동원을 위한 것이었다. 여성노동력의 수탈을 위한 조직으로, 여자청년단의 단체와 단원수는 1936년 6월말 현재 74개 단체에 단원 3,695명이었다. 여자청년단은 초등학교 졸업생 중심의 조직이었는데 1939년 9월 1일 학무국장 통첩으로 장려, 강화되면서 그 대상자는 기혼, 미혼 구분없이 15세부터 25세까지로 정해졌다. 일제가 왜 기혼자를 제외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다만 이후 일제가 여자근로정신대 등을 조직하는 것에서 보이듯 주로 미혼여성의 노동력 수탈정책을 펴 나간 것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44년 4월에 결성된 평양여자정신대는 평양 각지의 여자청년대(즉 청년대 여자부) 단위로 조직되었다. 이후 청년단 여자부로 통합되면서 그 범위는 14세 이상 25세까지의 미혼자로 바뀌었다.

 농촌중견부인양성소
일제는 마을단위의 강습소 외에 좀더 일제의 의도대로 교육시키기 위해 농촌중견부인 양성소를 증설하였다. 1930년까지 도나 군농회에 의해 설치된 장기농촌중견부인양성소만 10군데, 연 수용인원 275명이었다. 이들은 관내 군수, 면장, 농회장의 추천을 받고 강습소장의 전형을 받아 입소하였는데,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자에 준하였고 대부분 자작농가출신이었다. 이들이 받은 교육은 잠업 및 기업(機業)과 같이 종래의 전통적 여성노동에 관한 전문기술에 대한 지도뿐 아니라 농사전반, 수신 등의 과목을 넣어 종래 기술지도자 정도가 아니라 여성농민의 생활전반에 걸친 지도자 양성에 목적이 두어졌다.

 배상명
1906-1986. 1923년 동덕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동경고등기예학교를 졸업한 후 동년 12월 서울시 종로구 중학동에 상명고등기예학원을 설립하였다. 당시 학제는 단기기술교육으로 본과 6개월, 전공과 6개월, 연구과 6개월로 편제되었다. 1939년 2월 상명실천여학교로 인가를 받아 본과 3년, 전수과 2년으로 편제하였다. 1945년 7월 재단법인 상명학원을 설립하고, 1951년 9월 상명여자중, 고등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1965년 2월 상명여자사범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민심작흥시설실행강목
총독부는 1932년 11월 <민심작흥시설실행강목>을 발표하였는데, 여성에 관한 내용을 보면 「부인의 사회적 지위의 개선향상, 부인의 옥외활동의 장려, 가족제도의 미풍고조, 현모양처로서의 부인교육 철저, 부인교양시설 조장」 등이 있다. 부인의 야외노동을 1930년대에 와서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첫째로 공황의 영향으로 미곡중심의 농업정책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게 됨으로써 전작물, 특히 여성노동이 많이 투하되고 있던 면작, 기타 전작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여성농민, 특히 중농층 여성의 노동을 강조하게 되었다. 둘째로 공황으로 농업을 계속할 수 없는 농가의 유랑,이주로 농촌인구가 감소하였고 일제에 의한 북부지방의 공업화로 남부지방에서 인력동원을 하게 된 때문이다. 특히 1934년부터 지역간 노무수급조정책이 본격화하여 남성노동력이 많이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농촌의 최소한의 수입확보, 노동력 조달을 위해서 여성농민의 경작노동의 강화는 그만큼 더 필요하게 되었고 농산물의 수탈을 위해 일제는 여성의 야외노동을 강조하게 되었다.
농촌경제갱생계획 수립시 성인 여성농민은 성인 남자를 1로 할때 0.8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여성농민의 경작노동에 대한 평가는 곧 일제의 여성동원으로 나아갔고 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공동경작, 탁아소 설치가 정책적으로 시도되었다. 이때 공동경작은 대부분 부인회에 의해 동원되는 공동모내기, 공동면포경작이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공동경작된 논밭의 비중은 보잘것 없고 전시용 정도였다.

 임영신(任永信)
1899-1977 충남 금산출생. 교육자,정치인. 1909년 심광학교(心光學校), 1914-1918년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후 광산촌인 충남 천안군 양대면 양대국민학교 교사로 있던 중 삼일운동에 참여하여 체포, 1919년 6월 대구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를 1921년 졸업한후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23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1년 9월 미국 남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한국 불교도들의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란 논문으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933년 귀국하여 YMCA총무로 활동하는 동시에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였다. 1937년 학교가 운영난에 빠지자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한순교와 결혼한후 40년 5월 귀국했다. 미국시민권을 가진 미국시민이었으므로 총독부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조선임전보국단부인대에 참여하고 임전보국단 주최 방송에 나가 「가정생활에도 결전체제를 바란다」는 강연을 했다. 하지만 미국을 비방하는 방송을 하라고 요구했을 때는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고 특히 불쌍한 한국인을 도와주는 미국을 자기는 욕할 수 없다」고 버텼다고 한다. 해방 후 8월 여자국민당을 창당해 이승만을 대통령에 추대하기도 하였으며, 1946년 9월 유엔파견 민주의원 대표로 임명되어 한국문제의 유엔상정을 목표로 구미위원부 의장 임병직과 함께 활동했다. 1949년 1월 안동 민의원 보궐선거에 당선, 최초의 여자국회의원이 되고,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실시된 제2대 정부통령선거에 여자국민당 대표로 부통령에 출마했다. 1961년 5.16쿠데타가 터지자 「왜 나는 군사혁명을 지지하는가」라는 성명을 발표, 박정희를 지지했고 그 후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 당 총재고문을 맡았다.

 박마리아
1906-1960 교육자. 강원도 강릉출신이다. 1923년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1928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8년 개성호수돈 여고보 교사로 있다가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주 마운트 홀리 대학, 1932년 미국 테네시주 수카릿 대학, 동년 미국 피바디대학 사대 대학원 등을 졸업. 1933년 이화여전에서 윤리학을 강의하다가, 1935년 이기붕과 결혼함과 동시에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다. 해방후 이기붕이 대통령의 비서로 정계에 진출하는데 조력하였다. 1954년 이대 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정권이 붕괴되자 남편 이기붕과 함게 경무대로 피신, 5월 28일 아들 강석의 권총으로 가족이 집단자살하였다.

 모윤숙(毛允淑)
1909-1990.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은 어려웠지만 기독교신자였던 관계로 장학금을 받고 개성 호수돈여고와 이화여전 영문과에서 공부하고 졸업 후 간도로 갔다. 1년 정도 간도에서 교편을 잡다가 건강이 나빠져 서울로 돌아온 모윤숙은 경성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이광수가 서문을 쓰고 김활란이 발문을 썼다. 1937년 <렌의 애가>를 발표, 문단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1940년 <조선의 딸>, <이 생명을>을 같은 시를 써서 경찰에 구류되기도 하다가 임전보국단부인대에 들어가 김활란, 이숙종, 배상명, 고황경, 박인덕, 송금선 등과 함께 일본을 찬양하는 강연을 하고 다녔다. 대표적 친일시로 1943년 12월 ≪신시대≫에 발표한 강제동원된 항공병을 찬미해 지은 시 <어린 날개> 등이 있다. 해방후 미군정청 학무과에 취직, 여학교에 적당한 인물을 배치하는 일을 하다, 이승만이 임영신, 모윤숙을 자신의 정치노선을 실현하기 위한 외교활동에 기용, 임영신은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상정시키도록 하고 모윤숙은 유엔 한국위원단장 메논에게 접근하여 이승만을 지지하도록 하였다. 이후 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류문인협회장, 서울 세계펜클럽대회 준비위원장을 역임하고 1971년에는 공화당 전국구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제5공화국에서는 문학진흥이사장이 되고, 1980년 삼일문화상을 받았으며 1990년 6월 사망,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노천명(盧天命)
1911-1957. 황해도 장연출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 5학년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조선중앙일보 학예부기자로 근무하다가 3년뒤 신문사를 사임하였다. <여성>의 편집부와 매일신보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이화여전을 다닐때부터 시를 발표하였다. 1935년 <시원 詩苑> 동인으로 시 <내 청춘의 배는>(1935년 2월)을 발표하였다. 1938년 간행된 첫번째 시집 <산호림 珊瑚林>에 실린 49편중에서 대표작이 <사슴>이다. 두번째 시집 <창변 窓邊>은 1945년 매일신보사에서 간행되었다. 세번째는 1953년 <별을 쳐다보며>, 네번째는 사후인 1958년 <사슴의 노래>로 간행되었다. 수필집으로 <산딸기>와 <생활백서>가 있다.

 최정희(崔貞熙)
함남출생.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중등보육학교 졸업. 1931년 부터 삼천리와 조선일보 기자를 지내면서 쓰기 시작한 <정당한 스파이> <성좌> <가버린 미례(美禮)> <후른 지평선의 쌍곡선> 등의 작품을 연달아 내놓았지만 이들 작품은 신경향파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36년 <곡상(穀象)>, 1937년 <흉가>, 1938년 <정적기(靜寂記)> 등의 단편에서부터 일기체, 또는 고백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인맥>, <지맥> , <천맥>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 작품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일제말기에 버림받은 여인이 지원병훈련소를 견학하고 강한 군국의 어머니가 된다는 내용의 소설 <야국초>, 아내의 애국반장 활동을 반대하던 남편이 싱가포르 함락에 감격하여 아내의 시국활동을 승낙한다는 요지의 <12월 15일의 밤>을 일본어로 써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58년 서울시문화상 수상하였다.

 덕혜옹주
고종과 복녕당(福寧堂) 양 귀인(梁貴人) 사이에서 11912년 5월 25일 출생했다. 옹주가 8살되던 해 12월 고종이 타개하고, 옹주는 1925년 14살때 영황처럼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옹주는 일본에서 오빠인 영왕과 함께 지내지 못했으며, 순종의 장례에 참석하고자 잠시 귀국했으나 어머니와의 상면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 1929년 어머니 양 귀인이 죽은 후 옹주는 신경쇠약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옹주의 병은 조발성 치매로 밝혀졌다. 1년의 치료끝에 차도를 보이자 일본정부는 옹주의 결혼을 서둘렀다. 옹주의 나이 20살, 상대는 쓰시마 섬(對馬島) 심주(瀋主)의 아들 소다케시(宗武志) 백작이었다. 이로 인해 다시 우울증에 걸린 옹주는 3년여의 결혼생활에서 정혜(正惠)라는 딸 하나를 낳고 끝내 정신병 환자가 되고 말았다. 딸 정혜의 생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소다케시는 덕혜옹주와 1955년에 이혼했고, 옹주는 도쿄 교회 마쓰사와(松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1962년 1월 26일 50살의 나이로 귀국했다. 낙선재에는 1966년까지 순종의 부인 윤 황후가 살고 있었으며 유모 변씨가 죽기 전까지 옹주의 뒷바라지를 했다. 창덕궁 낙선재 동쪽 가강재(嘉康齋)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 타계했다.

 이화림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춘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 교원학교에 다닐 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역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사상을 익히고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 성진, 안주 등으로 다니면서 주로 학생, 종교인을 대상으로 당활동을 하다가 1930년 3월 압록강을 건거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 도착한 이화림은 이름을 이동해라고 바꾸고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에 자원했다. 1932년 4월 29일 애국단의 주요 멤버로 윤봉길과 일본인 부부로 가장하여 함께 거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김구의 간곡한 만류로 윤봉길의 신변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윤봉길 의거 후 김구와 결별, 1932년 가을 의열단의 추천을 받아 광주 중산(中山)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법률학부에서 2학기 동안 공부한 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 병원 견습간호사로 일하였다. 1936년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남경으로 가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여성의 조직화, 중국여성들과의 통일전선 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선동활동을 폈다. 1939년 3월 조선의용대 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부녀대 부대장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약 300명의 대원이 3대 지대와 부녀대, 3.1소년단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부녀대의 주된 활동은 선전사업이었다. 1941년 조선의용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자, 조선인 간부들을 위한 훈련반에 들어가 중국혁명사, 중국공산당의 항일방침 등을 공부하고 1942년 부녀대 대장이 되었다. 1943년 봄부터 병원에서 일하다가 그해 말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이동하자 1944년 4월 연안으로 가 다음해 1월 연안 의대에 입학하여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1947년 하얼빈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북경 교통부 위생부 간부를 지내는 등 공직생활을 하고 은퇴하였다.

 정정화
1910년 가을 11살의 나이로 안동 김씨가문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1919년 10월 시아버지 김가진이 아들 의한과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 김가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0년 1월 중순 상해로 들어가 임시정부의 살림살이에 관여하였다. 그해 3월 신규식의 지도로 임시정부의 비밀통신연락망인 연통제를 따라 국내에 잠입 20일 가량 머물면서 자금모금을 하였다. 그후에도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임정의 밀사로 잠입하였다.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이 창립되자 국민당에 가입하여 처음으로 독립운동단체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1938년 가을부터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았다. 그러나 다른 임정요인 부인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주부역할 외에도 공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1940년 6월 창립된 한독당 산하 단체 한국여성동맹의 간사로 취임, 임정의 크고 작은 행사마다 총책임자가 되어 여성당원을 이끌었으며, 방학 때면 아이들을 모아 국사, 국어, 노래, 춤 등을 가르치고 유치원도 만들었다. 1943년에는 애국부인회 집행위원회 겸 훈련부 주임직을 맡았는데, 이 애국부인회는 한독당이니 민족혁명당이니 하는 당파를 초월한 여성단체였다. 해방후 남편과 함께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노선에 반대하였으며, 남편 김의한은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한국전쟁때 남편은 납북되었으며, 1.4후퇴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던 그는 부역죄로 구속 기소되어 5년 구형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1991년 사망하였다.

 최용신
1909년 8월 원산의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1928년 루씨아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농촌계몽에 뜻을 품고 1931년 10월 YWCA 농촌부 사업지로 선택한 수원 샘골로 파송을 받았다. 예배당을 빌어 계몽사업을 시작하고, 한글, 산술, 간단한 재봉, 수예, 가사 , 노래 등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마련하였다. 1934년 봄 보다 진일보한 새로운 농촌운동을 전개할 필요를 느껴,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일본유학의 길에 올랐다. 고오메(神戶) 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 적을 두고 새로운 농촌운동을 구상하던중 병을 얻고 귀국, 샘골에서 요양하는 한편 계몽사업을 계속하였다. 과로한 농촌운동으로 무리를 거듭한 생활에서 온 병이 악화되어 경기도립 수원병원에서 장중첩증으로 1935년 1월 26세로 숨을 거두었다.

 평양제사공장파업
1938년 7월 평양 제사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에서는 집단탈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투쟁형태를 만들어냈다. 평양 제사공장노동자들은 임금을 제때에 지불할 것, 합숙조건을 개선할 것, 일본인과 조선인간의 식사 차별대우를 철페할 것, 일본인 악질감독을 축출하고 조선인 여성노동자에 대한 희롱을 엄금할 것, 일요일에는 휴식을 보장할 것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태업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자본가는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을 강제로 취업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이에 격분한 여성노동자들은 짐보따리를 싸들고 평양역을 향하여 집단적인 탈주를 개시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인 기업주도 할 수 없이 요구조건의 일부를 승인하였다.

 최승희(崔承喜)
1911년 서울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소학교를 월반해서 졸업하고 12세의 나이에 숙명여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졸업, 학교의 추천을 받아 동경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입학을 거절당했다. 1926년 3월 일본의 유명한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서울 장곡천정 공회당에서의 공연을 보고 문하생이 되어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6년 10월 <금붕어>라는 작품으로 첫 데뷔, 다시 6개월 후 이시이무용단 두번째 서울공연에 참가, 독무 <세레나데>로 성공을 거두었다. 1929년 이시이를 떠나 서울 적선동에 무용연구소를 열고, 이듬해 2월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경성일보> 주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레퍼토리는 모두 최승희(崔承熙)의 창작품으로 이때 최초로 조선무용 <영상무>를 선보였다. 1931년 5월 카프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안막과 결혼하였다. 1932년 6월 일본으로 가 다시 이시이의 제자가 되었다. 1936년 자서전을 출판, 그를 기초로 만든 자전적 무용영화 <반도의 무희> 주연을 맡았다. <반도의 무희>는 3월 1일 개봉되어 동경에서만 4년간 상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으며, 조선에서는 4얼 8일부터 닷새동안 서울 중앙관에서 상영되었다. 1937년 12월말 미국으로 떠나, 동양인으로서는 세번째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섰다. 1939년 파리로 떠나 1월 31일 상프레지엘에서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가진후 이어 벨기에, 칸, 스위스, 이탈리아 등 순회공연을 하였다. 제2차 대전으로 유럽순회공연을 중단하고 이후 미국의 카네기홀 공연을 비롯해 남미 공연을 마치고 1941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후 1944년까지 두 차례의 중국주둔 일본군 위문공연, 수차례의 일본 및 조선공연 그리고 공연 수익금을 헌금하였다 . 1944년 12월 군부대 위문공연차 중국으로 출발해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북한에 정착하여 무용극 창작에 몰두, <해방의 노래>, <춘향전>, <반야월송곡>을 발표하는 한편 북조선 인민위원회 총선에 출마, 평야지구 동 위원회 대의원이 되고 1948년 4월에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온 김구일행을 위한 모란봉 경축연극회에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공습하자 북경으로 가서 창작에 몰두해, 이 무렵 그가 주연한 무용영화 <사도성의 이야기>는 북한 최초로 제작한 컬러 영화로 동유럽에 수출되었으며, 무용극 <조선의 어머니>는 1951년 베를린 세계청년학생축전 춤 부문 1등상을 탔다. 1967년 북한이 추구하는 주체예술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숙청당한다.

 나혜석(羅蕙錫)
1896-1948. 1896년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수원 삼일여학교와 진명여학교를 거쳐 1913년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입학, 서양화를 공부했다. 동경에서 김마리아 등과 같이 조선인 여성 유학생들과 모임을 갖고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 등에 글을 쓰기도 했다. 졸업 후 영생중학교와 정신여학교 등에서 교사를 하던중 삼일운동에 참여, 구속되었다. 한국최초의 여류화가로 1921년 개인전을 열었는데, 서울에서는 처음 열린 서양화 개인전이었다. 1927년부터 2년여에 걸친 유럽여행 동안 최린과 연애를 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남편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오히려 조선의 미개함을 개탄하기도 하였다. 이후 불우한 여생을 보내다 부랑아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강경애(姜敬愛)
1907-1944. 1907년 황해도 송화출신이다. 1911년 아버지를 여읜 후 가난 때문에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의부 아버지 최도갑 밑에서 이복형제들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머니와 딸>, <채전>, <나의 유년시절>, <인간문제> 등에 표현되어 있다. 10살이 되어서야 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돈이 없어 월사금은 물론 학용품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다. 15살때 의붓아버지가 죽은 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한 그는 독서회, 친목회 등에 참가하여 계급의식과 반일사상을 갖게 되었다. 1923년 10월 「심한 간섭과 기숙자 안에서의 규칙 제일주의의 생활에 반기를 들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1924년 봄 양주동을 따라 서울로 상경, 동덕여학교에 편입하고 <금성>이란 잡지에 <책 한권>이란 시로 입문한 뒤, 단편 <황혼의 설움>을 계기로 소설로 전환하였다. 1929년 겨울 간도로 떠나 용정 일대에서 교원생활을 하는 등 많은 체험을 한 뒤 1931년 고향으로 돌아와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 26살때 수원농림학교 출신 장연군청 서기 장하일과 결혼한다. 장하일은 모종의 지하활동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결혼후 간도로 이주, 남편 장하일은 용정 동흥중학 교사로 일했다. 1935년부터 안수길, 박영준 등과 <북향>을 만들어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지내다가 건강이 나빠져 1942년 귀향했으나 1944년 사망하였다.

 오정모
1904-1947.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4차례에 걸쳐 투옥되었으며 네번째 투옥 후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부인이다. 평남 용강 출생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를 거쳐 마산 문창교회로 시무하러 주기철 목사와 1931년 만났다. 당시 교회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던 중, 1933년 주 목사의 아내 안갑수가 사망하자 2년후 목사와 결혼하였다. 주기철목사가 재직하던 평양 산정현교회는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본거지였다. 남편 주기철의 신앙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남편의 투옥과 죽음 이후에도 평양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들과 따로 예배를 하고 체계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해방후 북한정부에서 주는 기념비와 토지를 모두 사양했으며, 1947년 사망했다.

 강주룡(姜周龍)
1901-1931. 1901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여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20살에 통화현에 사는 15살의 최전빈과 결혼하였다. 1년뒤 남편이 백광운을 수령으로 하는 항일무장단체 대한독립단 제2중대에 가입하자 부대에서 함께 활동하던중 6개월만에 돌아왔다. 22살때 남편이 전사하자, 24살때 서간도에서 집으로 돌아와 처음 1년간 사리원에서 그뒤 해고와 검거로 노동자생활을 중단할때까지 5년간 평양에서 고무공장 직공생활을 하였다. 1931년 5월 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에서 파업이 시작되자, 대동강변 누각 12미터 높이 을밀대 지붕위로 올라가 9시간 반 동안이나 연설하며 일제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고발했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76시간 동안 단식으로 대항하다 검속기간 만료로 일단 풀렸다. 그후 파업단 대표로 계속 활약하다 공장 습격사건으로 다시 구금되어 57시간 단식하며 항의하였다. 구속 뒤 또다시 옥중단식을 벌인 뒤 보석되었다가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졌다고 한다.

 남자현(南慈賢)
1872년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서 태어났다. 19세에 같은 면에 사는 김영주와 결혼하였는데, 결혼 6년만에 남편이 을미의병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919년 3월 9일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 여자대원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 각 단체와 독립군 기관과 농촌을 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북만주 일대에 12개의 교회와 10여개 이상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성계몽에 앞장섰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잡혀갈때 극력 항거하였고 감옥까지 따라서 간호를 하며 이들의 석방에 노력하여 성공하였다. 1932년 9월 국제연맹 조사단 릿톤경이 조사차 할빈에 왔을때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韓國獨立願>이란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1933년 2월 이규동 등과 일본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격살할 계획으로 혼자 신경(新京)으로 잡입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었다. 60이 넘은 나이에 6개월동안 갖은 고문을 받다가, 15일간의 단식항쟁으로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33년 8월 세상을 떠났다.

 애국자녀단
1938년 6월 20일 발단식을 올린 애국자녀단은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교복처녀들로 이른바 총후보국의 내조적 역할을 다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임원으로는 단장에 김활란, 부단장 김호직, 간사 김상용, 김성래, 김신실, 김쾌례 박원규 서은숙 윤성순 장초원 조두연 등으로 구성되었다.

 여자농촌진흥위원
총독부 농림국에서는 농촌진흥운동의 제일선에 여자위원 3백명을 배치하기로 3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운동원 설치는 3개년 계속진행되며 3년후에는 3백명을 배치시켜 각군 1명의 비례로 설치하려는 것으로 예산도 이미 재무국의 사정을 마쳤다. 대개 소학교 교원정도의 지식을 갖춘자를 선발하여 단기훈련을 시켜, 각 도의 주관하에 진흥운동과 특히 생활개선운동의 제1부대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자농촌진흥위원 설치에 대해 총독부 농촌진흥과장은 남자로는 가정과 여성의 세계에 침입할 수 없고 특히 농촌진흥운동은 농촌의 여성이 움직여야 되는 것며, 농촌가정으로 부터 진흥되지 않고는 참된 농촌진흥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설치배경을 밝혔다.

 탁아소설치장려통첩
농촌 탁아소 설치는 이미 근우회에서 제기되었고 농촌진흥운동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오면 노동력 부족이 한층 심각해지면서 여성노동력 수탈을 어떻게 용이하게 하는가가 일제의 농업생산물 증산책에서 중요한 문제로 되었다. 특히 농업공동작업반이 강조되면서 그 필요는 더욱 절실해졌다. 그리하여 일제는 탁아소 설치를 적극 장려하였다. 총독부에서 도지사에게 보낸 탁아소설치장려통첩은 1). 봄가을 농번기에 동리 또는 부락을 단위로 국민총력연맹 등의 단체로 하여금 계절탁아소를 설치토록 할 것, 2). 계절탁아소 설치장소는 부락집회장, 공동작업장, 학교 등 이미 설립된 장소를 이용하든지 토지 상황에 따라 장소를 정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각 도에 개설할 것, 3). 계절탁아소의 개설 일수는 농번기 중 될 수 있는 대로 20일 이상으로 할 것, 4). 계절탁아소에서 맡은 아이의 보육시간은 노력부족의 완화상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아침 일찍(早期)부터 저녁 늦게(夕暮)까지 할 것, 5). 종업원 탁아소에서는 주로 3,4세 이상의 유아만을 맡고 있지만 부인노력의 동원상 필요한 것은 3세 미만의 유유아(乳幼兒)의 보육이므로 계절탁아소에서는 이들 유유아도 맡을 수 있도록 고려할 것, 6). 보육종사자는 될 수 있는 한 봉사적으로 종사할 것, 7). 탁아소 개설 전에 주지를 철저히 하고 기간 중에도 극력 이것을 지도하고 그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할 것 등이다. 농번기 탁아소는 모내기, 보리베기, 밭 중간갈이 시기인 봄 6-7월과 벼베기 시기인 10-11월에 주로 설치되었고 지역에 따라 여름인 7,8월에도 설치되었다. 그 경영 주체는 주로 국민총력부락연맹(부인회)이었는데, 예외적으로 애국부인회 산하 부락부인회나 경찰관 주재소에서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소는 고정적으로 설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동의 어머니가 작업하는 장소에 따라, 즉 부인공동작업반이 일하는 곳에 따라 옮겨다니는 이동식 탁아소였다. 이동탁아소는 도에서 추천한 탁아소의 실태를 통해 보아도 설비라고 해야 자리나 천막이 있는 정도이고 그것도 없을 경우 나무그늘이 곧 탁아소였고 주전자나 컵, 간단한 약품조차도 전혀 구비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보육시간은 1930년대 전반기와는 달리 실질적으로 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시간으로 조정하였는데 노동력 부족 정도가 심했던 철원군 가칠탁아소처럼 아침 6시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운영되는 경우도 있었다. 보육아동의 범위도 이 시기는 유아(乳兒)에까지 확대되어 1941년 탁아소 38개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수탁아 중 유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57.7%에 이르고 있다. 그 중에서 18.8%가 걷지 못하는 유아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탁아소 평균 탁아수는 37.5인이고 보육종사자가 담당하는 유아(幼兒)의 수는 11.3인이었다. 그런데 보통 나이많은 부인 한명이 주보호자였고, 12,3세 어린이가 보조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수로는 시설이 없는 개방된 장소에서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으나 학교에 가야 할 8,9세 아이들이 학교에 갈 처지가 못되어 동생을 돌봐주러 나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유아를 겨우 다룰 수 있는 정도였다. 탁아소 운영에 가장 중요한 비용조달에 대해서는 통첩에 언급이 없다. 1930년대나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국고나 지방비 보조는 미약했고 대부분 마을 주민의 부담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비교적 우량탁아소인 도 추천 탁아소의 1개소 1일 평균 경비는 1,405원이었고 유아 1인 1일 경비는 0.037원 정도였다. 1934년 전남의 농번기 탁아소가 149개, 4,343명정도였던 것이 1940년 봄, 여름, 가을에 설치된 전국의 탁아소 총수가 11,779개, 탁아수 167,653명이었고 1942년에는 탁아소 34,711개, 탁아수 915,003명으로 급증하였다. 이것은 반강제적인 공동작업반 구성에 의해 탁아하지 않을 수 없던 사정이 작용하였고 여성들도 농업생산활동을 위해 탁아소 설치의 필요성이 그만큼 컸던 상황을 잘 반영해준다. 농번기 탁아소는 주로 농촌진흥회 산하 부인회가 중심이 되어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3년 56개소가 개설된 경기도의 탁아소 운영실태를 보면 운영경비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은 거의 없고 주로 공동경작의 이익금이나 독지가의 기부금등에서 조달되었다. 탁아의 표준연령은 3-7세 정도로 비교적 늦고 개설 일수도 15일정도로 짧았다. 아동들이 먹는 주식이나 간식은 대부분 지참케 하고 탁아소에서 만들때는 재료를 각 가정에서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는 여성농민의 육아노동,가사노동을 크게 감소시켜준 것이 아니었고 탁아소에 맡기는 일자체가 오히려 번거로워 탁아소를 이용한 여성농민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지는 의문이다. 이 시기 일제의 탁아소 설치의도는 여성농민의 노동강화를 통해 피폐해진 농가경제를 부분적으로 보완한다는 차원에 있었기 때문에 탁아소가 강력한 국가정책으로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임숙재(任淑宰)
1891-? 교육자. 충남 출생.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가사과를 졸업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유, 1931년 숙명여자전문학교 조교수, 1937년 동 교수, 1943년 기독교 조선감리교단 부인회 연합회장, 1945년 숙명여자전문학교장, 1948-1958년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장덕조(張德祚)
1915-? 작가. 경북출생. 배화여고를 나온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중퇴하였다. 1932년 개벽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해 7월 <제1선>에다 <저회(低徊)>를 발표한 것이 처녀작이었다. 이후 <자장가> <해바라기>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자리잡게 되었다. 초기작품인 <자장가>의 여주인공은 남자에게 버림받은 미혼처녀인 학교 선생이, 그 남자의 아이까지 낳아 직장도 없이 궁색한 생활 속에서 아이를 남자에게 떠맡기지도 않고 식모살이로써 생의 새로운 방면을 개척하는 내용이다. 이는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기 위한 새로운 윤리성의 탐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표작으로 <약혼>, <처>, <부(夫)>, <여자의마음>, <여자삼대기>, <누가죄인인가>, <광풍> 등이 있다.

 김말봉(金末奉)
1901-1962. 부산출생. 정신여학교를 졸업한후 재령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동경 송영(頌榮)여고를 거쳐 동경 동지사대학(同志社) 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나왔다. 귀국하여 중외일보 부인부 기자로 일년간 근무하였다. 1932년 보옥이라는 필명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라는 단편소설로 응모,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1935년 단편 <고행> <편지>를 신가정에 발표하였다.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 <밀림>을 연재하면서 작가로서 기반을 잡았다. 해방후 공창폐지운동에 나서 1946년 13단체의 협력을 얻어 공창이 폐지되도록 하였다.

 이선희(李善熙)
1912년 함흥에서 출생. 1928년 원산 루씨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문과를 3년 수료하였다. 신문사와 <신여성> 기자가 되면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처녀작은 <오후11시>였지만 그후 <계산서(計算書)> <매소부(賣笑婦)>와 중편 <여인명령>을 신문에 연재한 일도 있다. 문단에 지위를 얻은 것은 <계산서>를 1937년 발표하고 나서부터였다. 해방직후 고향인 북한에서 별세하였다고 한다.

 임옥인(林玉仁)
작가. 호는 은옥(隱玉), 함경북도 길주출생. 일본 나라(奈良)여자고등사범학교 문과졸업하고,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유를 지냈다. 원산 루씨여고에 있을 대 그 학교의 교지에다 처녀작 <봉선화>를 투고했지만 교지가 나오지 못하게 되나 그것을 다시 <문장>에다 낸 것이 1939년 8월 추천으로 발표가 되어 작가활동을 시작하였다. 두번째 작품 <고영(孤影)>, 세번째 작품 <후처기>가 세차례 추천에 의해 <문장>에 발표되자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1955년 이화여대 및 덕성여대 강사, 1959년 건국대학강사를 지냈으며, 1956년 장편소설 <월남전후>로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지하련(池河蓮)
보통학교 졸업. 오빠인 이북만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상당기간 동경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임화와 결혼하였다. 처녀작 <결별>은 겉으로는 원만하기 짝이 없는 부부관계가 얼마나 허위의식으로 은폐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남녀의 비극적 만남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40년대 일제의 암흑기, 폐쇄된 현실을 소설에 담고 있다. 두번째 작품인 <체향초(滯鄕抄)>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어떤 일로 산으로 들어가 화초를 기르고 짐승을 치면서 사는 오라버니의 삶을 그린 것이다. 40년대에 주로 쓰여진 소설들은 40년대의 현실인식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설사적 의의가 크다.

 동명여자실수학원(東明女子實修學院)
무의 무탁한 여성을 위해 실수여학원(實修)을 설립하고자 호주선교회에서 설립하였다. 빈곤한 여성과 가련한 여성에게 지식을 주고 직업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동래읍 칠산동에 4천평을 정하고 약 1만원 예산으로 교사를 신축, 보통학교 정도의 학과를 가르키는 동시에 실업부(實業部)를 두어 농업, 축산, 가사 등에 관한 실제 지식을 교수하여 졸업 후 자립적 생활을 충분히 하도록 지도하고자 하였다. 학생들의 수학 기간내에 식사, 의복, 교과서 등 일체를 학교에서 부담했다.

 성신여학교
1936년 4월 28일 이숙종에 의해 창립되었다. 권동진, 이종린의 알선으로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을 빌어 임시교사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60명 학생으로 시작했는데 1937년 본과 이외 보수과가 특설되어 공식적인 정원은 90명이었으며 학생수의 증가로 교사를 1937년 8월 시천교 소유의 건물로 이전함으로써 학교 교사를 가지게되었다. 1938년 3월 고등과가 특설되었으며, 1939년 3월 29일 성신가정여학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1940년 9월 성북구 돈암동 173번지에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1942년 5월부터 학교를 짓기 시작해 1944년 여름 이전했다. 1945년 3월 재단법인 강제학원을 설립하고 일제의 강요에 의해 성신여자상업학교로 체제를 바꾸었다. 해방후 1945년 11월 다시 인문학교로 학칙을 바꾸어 성신고등여학교로 전환하였다. 1946년 9월 교육법 개정에 따라 6년제 성신여자중학교로 개편하였다. 1963년 1월 성신여자실업초급대학을 설립했다.

 숙명여학교
1906년 엄비로부터 용동궁지와 경비조조를 받아 명신여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정경부인 이정숙이 취임하였다. 1908년 명신고등여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09년 5월 숙명고등여학교로 개칭,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숙명여전 설립모금운동>을 벌이는 한편 1938년 9월 조선총독부에 숙명여자전문학교 설립인가신청서를 제출, 12월 설립인가를 받아 1939년 4월 개교하였다. 일제의 비상조치하 전시교육에 따라 1940년 1학기부터 <조선어와 한문>이 폐지되고 <일본학>이 개설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국민성 대의 및 부도(婦道)의 일본적 성격>이 신설된 것이다. 1944년 2월 조선총독부는 여자전문학교 교육의 전시비상조치령을 내려 고등여학교 졸업정도의 학생을 입학시켜 수업년한 1년의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과를 부설하였다. 해방후 1948년 5월 숙명여자대학으로, 1955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
1937년 1월 하순경 학무국장 도미나가(사회교육과장), 사회교육과장 김대우 등이 열석하여 창설회합을 가졌다. 1937년 2월 24일 대일본애국부인회 인보관에서 부인으로서의 자각심 환기 등을 의제로 제2차 회합을 가진후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직하였다. 신진여성을 총망라해서 생활개선, 부인수양 등을 연구,토의,실천,계몽을 주활동으로 하고 매월 최종 토요일을 정례 회합일로 하였다. 이사 아래로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었다. 간부로 상무이사에 김활란, 손정규, 서무간사에 조은홍, 기타 송금선(덕성여자상업학교장), 고황경(전서울여대총장) 서은숙(이화보육학감), 이숙종(성신가정여학교장)등이 활동했다.

 국민생활의 기본양식 제정
1938년 9월 일제는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 제정하였다. <주제>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 <의례> 매월 1일 가정에서 황거요배, 축제일의 국기게양, 총독부 의례준칙의 준수 혼상례의 간소화, 누습타파 세찬 기타 증답, 푸닥거리 필요없는 잔치 등의 폐지화 매사의 시간엄수, 근로보국정신의 앙양 집안청소를 통한 근로정신 함양, 주부의 직접 시장보기, 자녀의 근로정신 함양, 의식주 색옷입기, 환경청소, 국 한그릇 찬 하나의 식사 간소화 등이다. 이상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서 동 연구회는 11명으로 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였다. 1938년 9월 12일부터 13도를 순강한 강연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경기 송금선, 전남북 고황경, 송승원, 경남 김활란, 경북 서은숙, 강원 김현실, 황해 조은홍, 평남북 손정규, 함남북 이숙종, 차사백 등이다.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
1941년 12월 27일 오후 2시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연설회를 가졌다. 박인덕의 사회와 개회사로 열린 연설회의 연사, 연제 그리고 내용이다. 개회사는 박인덕이 하였으며, 연제 및 연사는 다음과 같다. <미동에서 깨자>, 임효정, <군국의 어머니>, 최정희, <여성의 무장>, 김활란, <가정의 신질서>, 임숙재, <총후여성의 각오>, 허하백, <여성도 전사다>, 모윤숙 등이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출발한 부인대는 부녀자, 여학생을 대상으로 전시행동과 총후보국을 강조하는 각종 활동을 했다. 1942년 2월 3일 이후 부인대 주최인 근로봉사운동을 전개하여 각정, 애국반원, 임전보국단 부인대 및 부내 실천부 회원들로써 군복수리작업을 시작한 후 동년 12월 경까지 연중 무휴로 이 작업을 계속하였다. 간부를 보면 지도위원에 고황경, 김활란, 박마리아, 박순천, 박승호, 박은혜, 박인덕, 배상명, 서은숙, 송금선, 손정규, 유각경, 이숙종, 임숙재, 임영신, 차사백, 최이권, 황신덕, 홍승원 등이 망라되었다.

 방송선전협의회
내선일체의 선각자들을 총동원해서 사회교화의 일선역할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미나미 총독의 지시로 총독부 사회교육과에서 주동해 발족시킨 어용단체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와 조선문예회도 있다. 제2부 방송인 조선어의 방송강좌를 통해서 대중의 일본적 교화, 계몽을 실현하려 하였다. 제1차 협의회는 1937년 1월 13일 관계관, 방송관계자 및 총독부의 위촉을 받은 강사들이 열석하여 조선호텔에서 개최하여 방송강좌 강사진을 위촉한다. 강사진명을 살펴보면, 수양강좌에 권상로, 안인식, 주종선, 한규복, 오꾸야마(학무국) 부인강좌에 김활란, 고황경, 김분옥, 김현실, 서은숙, 송금선, 손정규, 안수경, 이숙종, 상식강좌에 강원수, 김성호, 김영상, 김병욱, 박종준, 서춘, 송문헌, 송찬식, 안동혁, 윤태빈, 이응준, 장용진 등으로 구성되었다.

 여자사범교육기관
현재여자교원이 매우 부족하여 여자교원이 담당할 보통학교의 여자반을 남교원이 담당하고 있으며, 현재 경성사범학교에 여자연습과가 있어 100명씩 모집하고 있으나 모두 여자고보와 고등여학교 출신을 수용하는 것이어서 정식으로 사범교육을 받은 교원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이에 따라 여자사범교육기관의 확충책으로 평양과 대구 양 사범에 여자연습과를 새로 두어 각각 50명씩을 수용하여 교원양성을 하는 동시에 경성사범의 여자부를 독립시켜 경성여자사범학교로 하고 수업년한을 5개년으로 하여 사범교육을 받을 여교원을 양성할 계획이며, 여자사범에는 현재의 여자연습과를 그대로 복속시키고자 하였다.

 청소년고입제한령
전시 생산력 확충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기 위해 총독부에서는 9월 1일부터 청소년고입제한령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청소년고입제한령의 내용은 시국산업 평화산업을 막론하고 16세 이상 40세까지의 남자를 고용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관할 도지사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데 만일 이에 위반하면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상당한 벌금은 물론 구류에 처하게 된다. 청소년의 고용을 제한하는 까닭은 시국관계산업에 대해 노동력을 조정하여 생산력 확충에 지장이 없도록 하고자 노무자원의 편재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요리점, 음식점, 카페, 백화점, 잡화상, 여관 등 시국과 관계가 없는 방면에는 여자나 노인을 고용하도록 하고 능률을 많이 낼 수 있는 청소년은 되도록 시국산업에 돌려서 고용하도록 하려는 방침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3월 1일부터 이것을 실시하기로 결정된 일본에서는 청소년 여자까지 고용을 제한하여 평화산업 방면에 젊은 여자를 채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기로 되었으나 조선에서는 여자만은 이 제한에서 제외하기로 하였다. 조선에서는 여자는 청소년고입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시국과 관계없는 방면에는 여자를 고용할 수 있었다. 조선은 군수산업기관이 그다지 많이 않을 뿐 아니라 남자청소년이 비교적 일본보다 넉넉하기 때문이라고 총독부 내무과장이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는 제한령이 실시되는 3월 1일부터 젊은 여자가 창기, 카페, 여급, 여관, 하녀 등의 직업도 전부 금지되었다.

 농촌노동력조정요강
1940년 12월 <농산촌 생산보국 지도방침>을 발표하여 새롭게 <부락생산확충계획>을 수립하여 개별농가 단위로 이루어지던 농업생산을 농촌부락 단위로 재편성하고 계획생산 완수를 기도하였다. 이러한 일제 농업증산책의 방향과 구체적 내용을 잘 보여주는 것이 1941년 4월에 시달된 농촌노동력조정요강이다. 각도 지사에게 시달된 이 요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방침> 1). 근로보국정신의 앙양강화를 도모할 것, 2). 전 가정의 노동력의 철저를 기할 것, 3). 농업 공동작업을 확충할 것, 4). 부분적 공동경영을 확충할 것, 5). 영농 공동실시를 확충할 것, 6). 경지 및 경작권의 조정을 도모할 것, 7). 농업노동력의 경합을 완화할 것, 8). 농촌노동력의 이동을 촉진할 것. <부인에 대한 방침> 1). 가사 공동시설을 확충할 것, 2). 부인작업반을 편성할 것, 3). 부인공동작포(作圃)를 확충할 것, 4). 부인지도원의 활동을 촉진할 것 등이다. 이상의 여성농민에 대한 일제의 조치를 살펴보면 첫째, 가사공동시설의 확충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되어왔던 여성 특수문제의 대응이다. 여성농민의 경작노동을 하는데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시기 탁아소와 공동취사 이외 부분에서 가사의 공동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공동취사도 농번기에 공동작업반 단위로 작업할 때 시간절약을 위해 일하는 곳 부근에서 돌로 솥을 밭치고 불을 때어 즉석 취사하는 정도였다. 다만 주목할 만한 것은 탁아소였다. 둘째, 부인공동작업반 편성과 부인공동작포 확충은 부인노동력을 직접 수탈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공동작업반은 전시하 부락연맹 애국반을 단위로 작업별 편성되는데 여성농민들은 부인공동작업반이 남녀혼합작업반으로 편성되어 모내기, 보리베기, 벼베기에 집중 동원되었다. 이 공동작업반의 임금은 협정임금에 기초하여 정산되었기 때문에 노임 등귀가 계속된 이 시기에 빈농에게는 매우 불리하였다. 세째, 부인지도원의 활동을 강조한 일제의 방침은 이미 중일전쟁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여성의 힘이 더욱 필요해지자 1938년 총독부 농림국에서는 여자농촌진흥위원을 촉탁키로 하고 각 군에 배치할 계획을 세워 1941년 완료하였다. 이들을 훈련 육성하여 여성농민의 노동력 동원과 황민화 교육 및 생활개선에서의 핵심요원으로 이용하였다. 일제는 ‘우리 가정도 전장이고 우리 일터도 전선이오. 여자도 남자에게지지 않도록 이 전선에 나서지 않으면 안돼오.....잘 일함으로 인하여 심신을 단련하여 황국 군인의 어머니로서 또 황국 군인의 처로서 부끄럽지 않은 부인이 됩시다’ (황해도, <전시농민독본>, 1943년)라고 하여 일제시책에의 순종을 강요하였고 황민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자 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농산어촌의 중견인물을 양성하는 시설을 통해 여성지도원이 배출. 중일전쟁 후 여성의 노동력이 더욱 필요해진 상태에서는 여성농촌진흥위원을 각군에 배치하여 <여성의 정식작흥과 생활개선에 대한 지도>를 담당케 하였다. 이것은 여성의 활동의 중요성을 간파한 일제의 정책으로 볼 수 있다.

 부녀자의복개선구체안
1938년 7월 총독부에서는 전시하 부녀자의 복장 양장, 양발(洋髮)개선을 단행하고 미장원 양재봉소를 엄중 피체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독부에서는 각 주요도시의 부녀자 의복개선에 대해 연구하던 중, 7월 19, 20일 양일간 총독부에서 각 도 사회교화담임관회의를 개최하로 이를 협의결정하였다. 구체적 내용을 보면 부녀자의 양머리(洋髮, 파마넨트)에 일년에 돈백원 가까이드는 현상, 기타 양복, 구두 등에 호화로운 물건을 사용을 금하였다. 이에 따라 총독부 당국에서는 각 관계방면에 양장의 근간인 양재봉소, 미장원, 데파트 미용부 등을 적극적으로 엄중히 취체하여 생활개선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각 백화점에 유행품 제조를 금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밀양여자고등기예학원
밀양읍 장로교회에서 밀성유치원 보모 김보배(金寶倍)의 명의로 밀양여자고등계에 학원 설치허가원 제출. 학원의 전임강사는 경성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출신 탁복실(卓福實), 경성고등기예학교 연구과 출신 임정희(林貞嬉) 를 전임강사로 하고 소학교 졸업을 하고 중등교육을 받고자 하는 여학생 150명씩 모집하여 졸업기간은 실천과는 2개년 전수(專修)과는 1개년으로, 학과는 일반 가정부인이나 직업부인이나 누구나 일용생활에 필요한 학과를 선택하였으며 동학원은 기숙사 설비도 되었으므로 다른 지역 학생도 기숙가능.

 유산상속신판결
가적(家籍)이 다른 딸도 어머니 유산을 상속할 수 있다는 조선유산상속의 획기적인 판결이 고등법원에서 나왔다. 가족인 어머니의 유산을 딸도 아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상속할 수 있다는 신판례를 내려 조선가족제도에 일대 변화를 일으킨 고등법원에서는 다시 딸도 설혹 다른 집에 있을지라도 가족인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다는 판결을 33년 11월 8일 오전 민형사 연합부 판결로 결정을 내렸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장근흥(張根興)이 대정 13년 남편 오태영(吳泰泳)과 부첩(夫妾)관계를 취소하고 친정인 관철동 장현호의 집에 복직을 하였다가 지난 8월 7일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 오태영과 장근홍의 사이에 난 오경숙(吳慶淑)은 오태영에 호적이 있으면서도 모친이니 상속할 수 있다하여 경성지방법원에 유산상속에 의한 토지이전등기신청을 하였는데 등기소에서 이를 기각하였다. 이에 대해 오경숙은 항고하였으나 <항고인은 장근흥의 집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해, 고등법원에 이를 재상고 하였다. 이에 고등법원에서는 <오태영이 생전에 부채가 많아서 장근흥과 표면적으로 관계를 끊고 자기 토지 전부를 장근흥의 명의로 이전하고 내연관계를 계속하다가 소화 3년 정월 사망하였다. 장근흥의 딸 오경숙과 같이 지내면서 하나뿐인 혈육이므로 당연히 딸에게 상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럼에도 등기신청을 각하한 것은 위법이다>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근로보국대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전조선 학생들에게 하기휴가동안 근로보국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위해 27, 28일 양일간 총독부 제2회의실에서 각도 학무과장회의를 소집하여 근로보국대의 활동계획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1). 동일한 사업을 각학교간 교대제로 하는 것도 좋으나 지금부터는 전체 학교가 모두 실시하도록 할 것, 2). 특히 여자중등학교는 해당 학교 또는 기숙사를 숙소로 하고 지리관계에 따라 자택에서 다니는 것도 좋음, 3). 사업의 종류는 남자는 주로 각도내의 토목사업에 종사케 하고, 여자는 공익에 관한 일로 여자에게 적당한 것을 선택할 것(예를 들면 교정 실습지 실습림의 손질, 신사 등의 청결, 공원운동장 기타 공공설비에 관한 간이한 일, 군용품의 간이한 보조작업, 관공립병원 또는 읍군병원의 간이한 보조작업 등) 등이다.

 부인계발운동25개조실천사항
국민총력조선연맹 지도위원회에서는 1942년 2월 부인계발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25개조 실천사항 등 운동요강을 결정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부덕(婦德)의 함양을 위해 1). 국체(國體)의 존귀함을 감명(感銘)할 것, 2). 신명(神明)을 공경할 것, 3). 내선일체에 철저할 것, 4.) 모든 것이 폐하(陛下)를 위한 나라를 위하여 힘쓰는 것이라는 마음을 기를 것, 5). 부모에게 효도하는 동시에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 6). 여자다운 지조와 씩씩한 기풍을 기를 것, 7). 예의를 키킬 것, 8). 지식을 향상시킬 것. 둘째, 자녀의 육성을 위해 1).나라의 보배인 자녀를 잘, 기를 것, 2).자녀를 바르고 굳세게 기를 것, 3).자녀에게 모범을 보일 것, 4).자녀의 몸을 깨끗하게 할 것, 5).학교와 충분히 연락을 할 것. 셋째, 생활의 쇄신을 위해 1).시국을 철저히 인식할 것, 2).경절(慶節)에 관한 지식을 기를 것, 3).의식주 등 살림살이를 개선할 것, 4).물자를 애호하고 활용할 것, 5).저축에 힘쓸 것, 6).온 집안 식구가 부지런히 일할 것, 7).가정에서는 단란하게 지내도록 힘쓸 것, 8).일본어를 반드시 사용할 것, 9).묵은 구습을 버릴 것, 10).가정위생에 주의할 것, 11).국방훈련에 힘쓸 것, 12).군사원호에 힘쓸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