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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근대질병의료연표

 검역정선규칙
1876년 국교확대 이후 외국과의 무역이 확대되면서 콜레라 등 전염병의 전파가 우려되었다. 1883년 해관이 개설되었지만 본격적인 검역은 1885년 알렌이 해관 총세무사 부속 의사로 촉탁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86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개항장에 설치된 일본인 검역소에 조선 관리를 파견하여 검역 사무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886년 외국 선박을 검역할 수 있는 법규로서 <온역장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에서는 검역의 취지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병선의 검역 여부, 규제 대상이 되는 질병의 범위, 소독 행위의 시행 여부, 검역 착수를 위한 전염지 선포 등과 관련하여 이의를 제기하여 다소의 논란이 있었다. 1899년 본격적인 검역관련 법규로서 <검역정선규칙>이 마련되었다. 이 규칙은 지방 검역국의 설치, 검역국의 행정관리와 의사의 활동, 피병원의 설치와 운영, 소독 활동 등 제반 검역사무 기구 및 기관의 내용을 분명히 하였다. <검역정선규칙>의 반포는 1899년 일련의 전염병 관련 규칙의 반포와 함께 법률적으로 세균설에 입각한 세련된 전염병 예방 체계가 완성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 검역정선규칙은 검역항구를 개항장으로 국한하였고, 콜레라만을 검역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것이었다.

 제생의원(濟生醫院)
1876년 한일수호조약 체결 후 일본은 부산, 원산, 인천 등에 거주하는 자국의 거류민을 보호하는 동시에 조선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 의사의 파견을 추진하였다. 1877년 부산에 세워진 제생의원은 일본인이 세운 첫 번째 병원이었다. 초대원장으로는 해군 군의였던 야노(矢野義徹)가 임명되었다. 제생의원에서는 일본인 뿐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치료를 병행, 진행하였다. 1880년과 1881년 치료통계에 의하면 총 환자수 중 조선인이 점하는 비율은 19%였다. 1883년 4월 제생의원의 소관이 해군성에서 육군성으로 이관되었다. 이때 원장으로 파견된 사람이 육군 일등 군의 코이케(小池正直)이었다. 그는 부산에 재류하는 3년 동안 조선에 관한 자료와 제생의원에 관한 사항들을 모아 ≪계림의사≫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제생의원은 1885년 4월 30일 육군성에서 거류민단으로 이관되었고, 명칭이 공립병원(共立病院), 공립병원(公立病院), 민단립병원(民團立病院) 등으로 바뀌다가 1914년 부산부립병원이 되었다. 한편 지석영은 종두법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1879년 제생의원을 방문하여 종두법에 관련된 지식을 습득하고 종두침과 두묘(痘苗)를 얻었다.

 지석영(池錫永)
1876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던 박영선이 가지고 온 ≪종두귀감≫을 통해 종두법을 알게된 지석영은 18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의원인 제생의원을 방문하여 종두법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1880년 수신사에 참가하여 일본에 도착한 지석영은 내무성 위생국 우두종계소를 방문하여 두묘의 제작법, 저장법, 독우사양법(犢牛飼養法),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웠다. 1879년 처가인 충주에서 최초의 종두를 시행한 지석영은 1882년 전라도 어사 박영교가 설치한 우두국에서 종두를 시행하는 한편 종두법을 교육하였다. 1885년 우두법을 설명한 ≪우두신설≫을 저술하였고, 1891년에는 위생학이자 예방의학서인 ≪신학신설≫을 저술하였다. 1898년 학부대신에게 올리는 글에서 서양의학의 적극적인 수용을 위해 의학교 설립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자신이 의학교의 책임을 맡을 수 있음을 표명하였다. 1899년 학부 소속으로 의학교가 창립되자 의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1907년 대한의원으로 개편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교장으로 활동하는 동안에서 위생계몽에 노력하여 신문에 매독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양매창론(楊梅瘡論)>, 우두를 권장하는 <권종우두설(勸種牛痘說)> 등을 집필하였다.

 광혜원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1884년 갑신정변의 와중에서 부상한 민씨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국왕의 신임을 얻게 된 알렌이 근대식 병원 건립안을 국왕 고종에게 제출하였고, 이 제안이 채택되어 서울 재동 홍영식의 집을 고쳐 개원하게 되었다. 2주일이 지난 후 제중원으로 개칭하였다. 1886년 3월에는 부속으로 의학교가 설립하여 본격적인 서양 근대의학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1886년 제출된 보고서에 의하면 1년 동안 총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으며, 진료실 수술은 총 394번이었다. 제중원의 운영은 이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관리 임용권 등은 조선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의사의 임명 등 의료권은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운영구조는 1893년 제중원에 부임한 에비슨의 요구로 1894년 운영권이 모두 미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게 됨으로써 단일화되었다. 이후 제중원은 한국에 서양 근대의학이 수용되는 주요한 기관 중 하나로 활동하였고, 세브란스병원을 거쳐 연세대학교 의료원으로 발전하였다.

 제중원의학당
1886년 3월 29일 제중원 부속으로 의학당이 설립되어 16명의 학생이 교육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4개월간의 시험기간을 거친 후 성적이 우수한 12명이 선발되어 정규과정에 편입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과정 수료 후 주사의 직책을 제수 받을 예정이었으며, 군의로도 활동할 수 있었다. 제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알렌, 헤론, 언더우드가 교육에 참가하여 우선적으로 영어를 교수한 후 과학을 가르치고자 했다. 이후 제중원의학당의 의학교육은 알렌이 외교관으로 전직하고, 헤론이 사망하면서 축소되었다가 1893년 에비슨이 내한하면서 재개되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던 에비슨은 학사제도를 정비하고 해부학책을 비롯한 의학교과서를 편찬하는 등 의학교육을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하면서 본격적인 의학교육에 매진하였고, 그 결과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내부 위생국에서 발급하는 의사면허 1번부터 7번이 부여되었다.

 스크랜튼의 시병원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제중원을 통해 의료선교사업을 진행하는 가운데 미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튼이 1885년 5월 1일 내한하였다. 도착 후 한달 동안 제중원에서 알렌과 함께 일했던 스크랜튼은 1885년 9월 10일부터 자신의 사저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독자적으로 환자 치료를 시작하였다. 이 진료소는 1886년 6월 15일 정식으로 개원하게 되었는데 이름을 시병원(施病院)이라 하였다. 스크랜튼은 시병원을 민간병원으로 육성코자 하였고, 진료 대상도 하층민에게 역점을 두었다. 환자가 증가함에 따라 스크랜튼은 미 선교부에 의사의 추가 파견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887년 10월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여성환자의 진료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1889년 8월에는 맥길이 파견되었다. 스크랜튼은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 계층과 접촉하기 위해 궁궐과 외국 공사관이 있던 정동을 떠나 1894년 남대문 근처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사상의학(四象醫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는 진해와 고원 군수를 거쳐 퇴관한 후 함흥에서 개업한 한의사로서 1894년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4권을 편찬하고 여기서 사상의학을 제창하였다. 어머니가 잉태 중 제주도에 가서 좋은 말 한 필을 얻는 꿈을 꾸었다 하여 제마(濟馬)라 이름붙였다고 한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체질과 기질에 따라 네 가지 형, 즉 사상(四象)으로 나뉘는데 태양인, 소음인, 소양인, 태음인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류에 따라 같은 질병이라도 치료법이 다르다. 이 원리는 주역에서 도출된 것인데 그리스의 엠피토크레스의 사원소설이나 히포크라테스의 사체액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학설이 생리병리설이라면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치료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다. 사상의학이 언급된 ≪동의수세보원≫은 4권 2책으로 이제마가 사망한 후 제자들에 의해 1901년 함흥에서 간행되었다.

 의약관련 규칙 반포
조선 정부는 무자격한 의약인의 진료, 투약행위를 막기 위해 국가에서 의약 관리를 담당해야 한다는 요구를 수용하여 1900년 1월 내부령 제27호로써 의약인 관련 법규를 완성하였다. 총 32개 조항으로 구성된 규칙은 제1조에서 7조까지는 의사(醫士)를, 8조부터 22조까지는 약제사(藥劑士)를, 23조에서 24조까지는 약종상을 규정하였다. 의약 관련 종사자를 의사, 약제사, 약종상 등 셋으로 나눈 것은 진료 및 처방 행위인 의술과, 처방에 따른 조제, 투약 행위인 약무를 서로 구별하며, 이들 의약 행위를 단순한 약상(藥商) 행위와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의사규칙 7개조는 의사의 정의, 의사의 자격 획득, 인허 수속과 인허증 재발급 등을 규정하였다. 약제사규칙 15개조는 약제사의 정의, 약제사의 자격 획득, 약국 개설 관련 사항, 의사의 처방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업무, 외국약 취급사항, 극독약의 관리, 환자에 내주는 약제의 용기와 포장에 적어야 할 사항, 허가 없는 비방의 제조 및 판매의 급지 등을 규정하였다. 약종상규칙 2개조는 약종상의 정의, 약종상의 인허를 규정하였다. 이외에 약품순시규칙을 첨가하여 약국과 약품을 판매, 제조하는 장소를 순찰케 하였다.

 간호교육
1885년 광혜원이 설립되고 서양 근대의학에 입각한 의료가 시작되면서 의료업무를 보조할 간호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광혜원을 설립한 알렌은 어리고 총명한 기생들을 보조원으로 양성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90년대 접어들면서 각 선교부에서는 정식 간호사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1902년 미 감리교 여성선교회에서 간호사 에드먼드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그녀의 임무 중 하나가 조선에 간호사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커틀러(Cutler)가 책임자였던 보구녀관에 1903년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 양성기관을 설립했다. 초기에는 적당한 교육을 받은 젊은 지원자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고, 따라서 지원자들의 교육을 위해 수업 기한을 3년이 아닌 6년으로 정하였다. 1908년 제1회로 김마르사(Martha Kim), 이은혜(Grace Lee)가 졸업하게 되었다. 세브란스병원에도 간호사 양성기관이 1906년 쉴즈에 의해 만들어져, 1910년 제1회 졸업생으로 김배세(金背世)가 배출되었다.

 동제학교(同濟學校)
의학교에서 서양의학을 전공한 졸업생들이 배출되어 나가기 시작하자 한의사들은 한의학을 교육하는 기관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은 외국과 체질, 풍토가 다르기 때문에 한의학이 존재할 가치가 있으며 전문 한의학학교를 세워 능력 없는 한의사들을 배제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학교는 서양의 외과 전문기관으로, 한의학학교는 내과 전문기관으로 육성하여 서로 보완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한의사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고종의 후원에 힘입어 1906년 전의 출신들이 주동이 되어 동제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었다. 동제학교에서는 한의학 뿐 아니라 서양의학, 국한문, 산술, 외국어학 등의 과목을 교수하였다. 1906년 8월 교수로 김영훈(金永勳), 전광옥(田光玉)이 선발되었고, 그해 10월 한의학과, 서양의학과, 일어과 신입생의 선발시험을 치렀다. 설립 초기에는 학생들의 수가 증가하는 등 교육이 활성화되었으나 1907년 탁지부의 경비 지원이 끊기고, 같은 해 고종이 퇴위하면서 폐교되었다.

 동인의원(同仁醫院)
1902년 3월 동아동문의회(東亞東文醫會)와 아세아의회(亞細亞醫會)의 합동으로 발족한 동인회(同仁會)는 아시아의 맹주로 성장하고자 하는 일본의 국가시책에 부응하여 조선과 중국에 서양의학, 약학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에 동인회 의사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때는 1906년이다. 광제원 원장으로 사사키(佐佐木四方支)가 부임하여 광제원의 개편을 주도하였고 사토오(佐藤進)가 파견되어 대한의원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07년 4월에는 통감부와 철도 전역의 의사행정을 담당한다는 계약을 체결하여 동인회 의사들이 철도 촉탁의로 부임하게 되었다. 나아가 1906년에는 평양동인의원 1907년에는 대구동인의원을 개원하여 조선인 치료를 담당하였고, 부속으로 의학교와 간호부, 산파양성소를 설립하여 조선인의 의학교육을 시도하였다. 1910년 강점이 이루어진 후에는 병원 설비를 총독부에 이양하고 사업의 대상을 중국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한성위생회
도시의 거주 환경을 청결히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위생론을 제기하는 모든 논자들이 지적하는 사항이었다. 도로를 넓히고 개천의 흐름을 원활히 하며, 쓰레기나 인분을 일정한 장소에 모아 수거하는 등의 내용들이었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다소 활기를 띠면서 진행되었던 한성의 위생사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1906년 통감부 설치 후 일본은 한성 내의 위생사업을 시행하기 위한 기구로 한성위생회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한성위생회는 비록 조선인이 참가하기는 하지만 회장을 내부 차관인 일본인이 차지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인이 주도하는 기구였다. 한성위생회는 사업의 추진을 위해 위생비를 징수하였다. 위생사업으로 각 가호마다 쓰레기통과 분뇨통을 설치하도록 한 후 오물과 분뇨의 수집 및 처리를 시도하였는데 수거가 규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민들이 오히려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분뇨를 일본인 비뇨회사가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소규모의 조선인 분상(糞商) 뿐 아니라 농민들까지 불만을 표시하는 등 파행을 겪었다.

 대한의원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 나가기 시작한다. 의료부문과 관련하여 이토오 통감은 1906년 제3차 시정개선협의회에서 각 병원의 통합을 제안하였다. 대한제국의 의료기관인 광제원, 의학교 부속병원, 적십자병원을 하나로 합치자는 것이었다. 1906년 일본 군의(軍醫) 총감인 사토오(佐藤進)가 내한하면서 통합병원인 대한의원의 창설작업이 진행되었다. 새로 설치되는 대한의원은 치료, 의학교육, 위생을 포함하는 거대 기관으로 상정되었다. 1906년 8월 대한의원 건물의 기공이 이루어졌으며, 1907년 3월 13일 대한의원 관제가 반포되었다. 새로운 관제 반포에 따라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치려부장, 교육부장, 위생부장 등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1908년 1월 1일 상징적으로 내부 대신이 겸직하던 원장에 사토오가 취임하였다. 대한의원은 <대한>을 이름에 내걸었지만 통감부가 의료권의 효율적인 장악을 위해 창립을 추진했고, 외래 환자의 비율에서 일본인이 50% 이상을 차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 통치자를 위한 의료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자혜의원
1905년 보호조약 이후 조선의 식민지화를 진행하던 일제는 1909년 지방 민심의 융화를 목적으로 주요 지방도시에 국립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을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자혜의원의 설립에는 한국 주차군이 깊숙이 간여하였다. 자혜의원 설립에 필요한 설비, 약품을 주차군이 부담하였으며, 군의(軍醫)들이 의사로서 부임하였다. 군의들의 부임에는 의병전쟁이 약화되면서 필요성이 없어진 군의들에게 자리를 보장해준 측면도 있었다. 1909년 반포된 관제에 따르면 자혜의원은 무료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하였다. 무료 치료는 일본이 후진적인 조선민들에게 서양의술의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에 대한 반감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에서 시도한 것이었다. 특히 자혜의원에서 치료받은 환자에게 감사의 글을 쓰도록 한 것은 일제의 시혜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1909년 전주, 청주, 함흥을 시작으로 설치되기 시작한 자혜의원은 일제 전시기에 걸쳐 전국으로 확장되었으며, 1925년에는 각 도에서 운영하는 도립의원 체제로 변경되었다.

 위생국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보건의료의 전반적인 행정을 담당할 부서로서 내무아문에 위생국이 설치되었다. 위생국이 맡은 일은 크게 세 가지로, 전염병 예방 사무, 의약 관리 사무, 우두 사무 등이었다. 원칙적으로 위생국에는 국장으로 참의 1명, 주사 2명이 임명되도록 되어있었으나 출범 당시는 아무도 발령을 받지 않았다. 1895년 3월 의정부가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위생국의 사무는 전염병. 지방병의 예방과 종두 기타 일체 공중위생에 관한 사항, 검역, 정선에 관한 사항, 의사. 약제사의 업무 및 약품매약의 관리 및 검사의 관한 사항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1899년 5월 위생국이 위생과와 의무과로 분과되면서 기능이 더욱 분명해졌다. 1905년 2월 정부 조직의 개편과정에서 지방국 위생과로 행정적 지위가 낮아졌으며, 1906년 1월에는 일본인 경무고문이 활동하고 있던 경무국으로 이속되었다. 1907년 12월에는 내부에 위생국이 다시 부활하여 전염병 예방, 종두, 기타 공중위생에 관한 사항, 의사 및 약제사의 업무와 약품 및 매약의 감찰에 관한 사항, 병원 및 위생회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8년 1월 위생국 안에 보건과와 의무과를 두게 되었다. 1909년에는 대한의원의 위생시험소를 흡수하여 시험과를 증설하였다.

 김점동(박에스터)
1876년 태어나 1910년 사망한 한국 최초의 여의사이다.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선교사들이 여자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했다는 말을 듣고 김점동을 이화학당에 입학시켰다. 그녀는 정동 보구녀관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의 통역을 맡으면서 의학을 배웠고 수술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1893년 5월 24일 결혼하였고, 1894년 봄 셔우드와 함께 평양으로 옮겨가 의료활동을 펼쳤다. 1894년 셔우드의 남편인 의료선교사 홀이 사망하자 셔우드와 함께 미국에 들어가 1896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1900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정동 보구녀관과 평양 기흘병원에서 근무하였고, 1909년 5월 28일 여성교육협회와 여성기획협회 공동으로 대학 졸업여성에게 주는 표창장을 받기도 하였다. 1910년 4월 13일 폐결핵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종두의양성소
국교 확대 이후 종두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국가 차원에서 종두사업을 전개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우선 정부는 종두를 시술할 요원의 양성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1895년 11월 7일 <종두의양성소>규칙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정부가 직원 3명을 갖춘 1개월 과정의 양성소를 한성에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실제적으로 정부가 양성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시기는 1897년 6월경이었다. 그러나 이 양성소는 일본인 의사 후루시로(古城梅溪)가 운영하는 사립기관이었다. 양성소에 대한 정부의 관여는 학부에서 양성소 졸업자에게 우두의사 졸업장, 곧 우두의사 인정서를 내주는 정도였으며, 이외에 각처에 양성소 지원생 모집 공고를 내주거나 학부 편집국에서 후루시로가 양성소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집필한 ≪종두신서(種痘新書)≫를 출판해 주기도 하였다. 종두의 양성소는 1897년에 첫 졸업생을 낸 이후 1899년까지 총 3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897년 7월에 10명, 11월에 18명, 1899년 4월에는 53명이 졸업하였다. 이들은 졸업 후 전국 각지의 종두의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경우에 따라 보건의료의 다른 부분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방역본부
1909년 9월 상순 인천과 경성에서 여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10월 24일 일본 통감부는 한국 정부와 협의 후 임시방역본부를 설치하였다. 본부장은 내부 차관이 맡고, 부장(副長)으로 한국 주차군 군의부장, 내부 경무국장, 경성 이사관이 임명되었으며, 대한의원 원장, 헌병 대장, 제6사단 군의부장, 한성 부윤, 경성, 용산 거류민단장 등이 평의원이 되었고, 경시총감이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방역본부는 10월 26일부터 수도를 무료로 급수하는 한편 우물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이외에 콜레라 예방 및 박멸 방법으로 야채나 음식물, 식기 등을 물에 씻어 먹지 말 것, 파리, 모기를 잡을 것, 집회의 금지, 격리병사의 증설, 검진, 소독, 환자 및 사망자의 수송을 하나의 중앙기관에서 담당할 것, 수도 수원지의 보호, 민간인 중에서 예방위원 선임 등을 결정하였다. 이외에 순사 50인을 임시로 증원하였다. 방역 결과 환자 1,387명, 사망자 1,811명이 생겼으며, 10월 13일 더 이상 환자가 발생하지 않자 10월 15일 방역본부를 폐쇄하였다.

 전염병예방령
가 법에서 규정한 전염병은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천연두, 발진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페스트 등 9종이다. 이외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전염병은 총독이 지정하도록 하였다.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유행할 우려가 있을 때 경무부장은 전염병 유사증 또는 보균자에 대해 이 법령을 적용할 수 있고, 거리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해 교통 차단, 시민 격리, 집회 제한을 할 수 있다. 또한 선박, 기차, 제조소 등에 의사 고용을 명령하거나 우물, 상하수도의 신설, 개조, 변경, 폐지, 사용 금지와 함께 어로 수영의 금지, 물 사용의 제한을 명령할 수 있다. 이외에 쥐잡기, 건강진단서 제출, 사체 검안을 할 수 있으며, 청결, 소독 등 방역 사무를 명령할 수 있다. 또한 총독의 허가를 받아 병독에 오염된 건물에 대해 소독 이외에 특별한 처분을 내릴 수 있으며, 필요할 경우 토지를 사용할 수 있다. 총독은 방역상 필요할 경우 검역위원을 선정하여 선박, 기차, 여객의 검역을 시행할 수 있다. 전염병 환자가 죽었을 경우 신고, 전염병 환자의 격리, 병독에 오염된 가옥이나 장소의 차단, 전염병 환자나 병독에 오염된 물건의 처리, 규정이나 명령을 위반한 자에 대한 제제 등의 내용도 제시되어 있다.

 위생조합
위생조합의 역할은 쓰레기 청소, 상하수도 개선, 변소 개량, 공동 우물, 전염병 격리병사, 화장장 등 유지, 전염병 및 수역(獸疫)의 예방, 종두 보급, 전염병 발생 시 경무 관헌 원조, 위생법규 및 관청의 방침 보급 등이었다. 위생조합은 경무 관헌의 지도 아래 각 지역의 위생상태 개선, 전염병 예방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 경무부장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지역을 정해 위생조합을 설치하고 오물의 청소, 청결, 소독 방법, 기타 전염병 예방에 관한 일을 시킬 수 있었다. 또한 경무부장은 위생조합에 대해 조합 규약의 변경을 명령하거나 전염병 예방에 필요한 인원의 고용 및 설비의 설치를 강제할 수 있었다. 주민들이 위생조합을 설치하려할 때는 조합 규약, 임원 및 평의원의 선임, 조합의 예산 등에 대해 경무부장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경무부장은 위생사무와 행정사무의 긴밀한 연계를 위해 조합 일 중 임원 및 평의원의 선임, 예산의 허가 외의 다른 사항들은 모두 도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조선아편취체령(朝鮮阿片取締令)
아편이 주로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국경지대인 평안북도, 함경북도를 중심으로 아편 흡입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정부에서는 1905년 공포된 형법대전을 통해 아편 흡연 및 흡연기구의 수입, 제조, 판매를 금지하였다. 1912년 3월 조선총독부는 <조선형사령>을 발포하면서 조선에 형법을 적용하여 아편 취급을 통제하였다. 1914년 7월 조선총독부는 훈령을 통해 경찰 등 관리들에게 아편 감시 방법 등을 교육하였고, 아편 환자들을 강제적으로 수용, 치료하였다. 1914년 세계대전을 계기로 약품값이 급등하자 아편 재배가 갑자기 늘어나기도 하였다. 1919년 6월 발포된 <조선아편취체령(朝鮮阿片取締令)>의 내용은 의약용 아편 재배를 허가받은 자 이외에는 아편의 재배를 금지하고, 재배 지역을 한정하면 제조된 아편은 매년 총독부에 납품시켜 자유 판매를 금지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총독부는 납입한 아편에 대해 정해진 기준에 따라 배상한 후 특정 제약업자에게 불하하였다.

 생생의원(生生醫院)
1879년 8월 원산(元山)은 <원산개항의정서(元山開港議定書)>가 체결되면서 1880년 5월 개항되었다. 일본은 원산이 개항되자 이곳에 총영사관을 설치하고 부산 제생의원(濟生醫院) 원장을 지낸 해군 대군의 야노(矢野義徹)와 토다(戶田)를 파견하여 생생의원(生生醫院)을 개원하였다. 이 병원의 개원 의도 역시 한국인에 대한 회유와 일본인의 이주 장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총환자 수 중 1880년에 79.2%, 1881년에는 31.5%를 한국인 환자 치료에 할애함으로써 개항에 따르는 한국인의 반발을 감소시키려 했으며, 풍토병 등 환경 변화에 따른 건강을 염려하여 이주를 꺼리던 일본 상인들의 진료를 담당함으로써 일본인의 이주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원산 생생의원은 1884년 해군성 소관에서 육군성 소관으로 이관되어 육군 일등군의 코마쯔(小松運)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말마리아 등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이유로 시내에 버드나무를 심도록 하였고, 한국의 사정을 일본인에게 소개하기 위해 ≪조선팔도지(朝鮮八道誌)≫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생생의원은 1886년 일본 거류민에게 이관되어 공립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일본 공사관의원
1883년 1월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그는 1883년 6월 일본 공사관의원을 개설하고 의관인 일등군의 카이세(海瀨敏行)으로 하여금 한국인 환자 진료에 응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한국인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어 ≪한성순보(漢城旬報)≫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공사관에 1등 군의 해뢰민행(海瀨敏行)이 의료를 전담하고 있는데 ... 그 학설이 서양의 과학에 근거한 것이어서 치료를 받으면 기효(奇效)를 보는 이가 많으므로 현재도 거의 빈 날이 없이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의술도 그다지 세련된 것이 아니었음은 1884년 6월 한국소년 김팽경(金彭庚)의 손을 수술하다가 실수로 마취를 깨우지 못해 그 소년을 죽게 한데서도 알 수 있다.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士總合所)
대한의사총합소는 1909년 10월 24일 총회를 거쳐 설립되었다. 총재에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 부총재에 전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을 추대했다. 서병효(徐丙孝)는 규칙을 통과시키고 정재철(鄭在轍)은 회의 설립 목적을, 강영균(康永勻)은 운영방침을 설명하고 내빈 중에서 정운복(鄭雲復)과 오가키(大垣丈夫)가 축연을 했으며 김해수(金海秀)가 답사를 하였다. 대한의사총합소에서는 1909년 12월 21일부터 의학강습소를 개설하여 한의학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진료소를 부설하여 일반민들의 질병을 구제하는 사업도 시작하였다. 1910년 8월 1일 임원회에서 금전을 갹출하여 교사를 매입하고 성안에 있는 의사를 소집하여 동서의학 강의를 하기로 하고 한의학 강사로는 박준성(朴準成), 서병효(徐丙孝), 양의학 강사로는 안상호(安商浩), 유병필(劉秉珌)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월 29일 강점이 이루어지면서 설립인가가 승인되지 않았고 11월 폐지되어 사무장 김해수(金海秀)에 의해 채무 및 일반문서, 장부가 정리되었다.

 한대위(韓大衛)
한대위(韓大衛, David Edward Hahn: 1874.2.27-1923)는 한국에서 활동한 첫 번째 선교치과의사이다. 그는 중국에서 선교사업을 하다가 한국에 선교치과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한국에 와 1906년 1월 스크랜튼이 세운 시병원 옆에 치과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는 5개월 동안 선교치과의사로 활동하였는데 그동안 주일마다 무료진료소를 열었고 주중에는 세브란스병원, 이화학당, 영국교회의 고아원 등과 연계하여 치과진료를 하였다. 그는 1907년 북감리교 선교치과의사직에서 물러나 개업을 하게되는데 진료 내용은 치통치료(齒痛治療), 무통발치(無痛拔齒), 충치(蟲痔)급치근치료, 금치호모치(金齒護母齒), 세자치(細磁齒), 금브래잇, 호모브래잇 조작 등이었다. 한대위는 많은 한국인들이 구강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나 한국인 치과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한국인 청년들로 하여금 치과 교과과정을 이수케 하여 치과의사로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09년 한대위는 자기의 치과진료실에 치의학교를 병설하여 한국 학생을 교육하고, 향후 제중원과 연합하여 운영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한대위의 치의학교 설립계획은 일본 통감부 하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홀(William James Hall)
홀은 캐나다 출신의 미 감리교 선교사로서 1860년에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나 1894년 서울에서 죽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1887년 매사추세츠주 노드필드에서 개최된 무디여름수양회에 참가하였다가 국제의료선교협회 이사인 도우넛(G. D. Dowknott)을 만나, 그의 권유로 뉴욕 벨레뷰(Bellevue)병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889년 졸업한 그는 미 감리교에서 추진하는 뉴욕 빈민가 선교사업에 참가하여 메디슨가의 의료선교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 출신의 의사 셔우드(Rosetta Sherwood)를 만나 약혼하였다. 약혼녀 셔우드는 1890년 8월 한국 선교사로 출발하였고 그는 1년 후 미 감리교 선교부의 추천을 받아 1891년 12월 내한하였다. 그는 1892년 6월 셔우드와 결혼한 후 평양 개척선교사로 임명받았다. 1894년 1월 그는 가족을 데리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병원, 학교, 교회사업을 동시에 시작하였는데 학교는 후에 광성학교로 발전하였고 교회는 남산현교회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그는 부상자를 치료하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쓰러졌다. 그는 곧 서울로 호송되어 아내의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894년 11월 24일 죽었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고 1897년 2월 그의 유업을 기리는 <홀 기념병원>이 평양에 건립되었다.

 세브란스간호부양성소
세브란스간호부양성소는 1897년 10월 14일 에비슨 제중원 원장의 초청으로 내한한 간호선교사 쉴즈(Esther Lucas Shields)에 의해 1906년 9월 건립되었다. 개교 당시 입학자격은 기독교인이며 한글 및 기초 산수를 해득한 자로서 학교의 규칙을 지키기로 서약한 자에게 부여되었다. 그리고 2개월의 예비기간을 두었다. 그러나 한국 여성들을 간호사로 교육시키는데는 난관이 허다했다. 부녀자들의 심한 내외, 조혼 풍습, 현대식 병원에서의 새로운 생활양식의 적응, 여성 직업인에 대한 몰이해 등이었다. 1907년에 최초로 2명의 여성을 선발하여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8년에 7명의 학생을 입학시킬 수 있었다. 1908년 6월 12일 제1회 가관식(加冠式)을 거행하였는데 이때는 5명만이 가관 자격을 얻었다. 강의는 간호선교사들과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들이 담당하였는데 담당 과목으로는 해부와 생리, 중후관찰, 식이공급, 안과질환, 약물학, 세균학, 간호실무 등이 있었다. 병실 실습은 내외과 병실에서 실시하였고, 수술실, 부인과 진료실, 외래 진료실, 산부인과 및 간호보건 간호실 등에서 임상실습을 시행함으로써 실습 능력을 개발할 수 있었다. 1910년 제1회 졸업생인 김배세(金背世, Bessie Kim)를 배출하였다.

 왕실의료의 축소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설치된 개혁 추진기구인 군국기무처는 방만한 정부조직의 재정비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왕실을 담당하는 기관인 궁내부를 설치하여 정부를 담당하는 기관인 의정부와 구별지었다. 궁내부는 이전의 방만한 조직을 통폐합하여 14개 기관만을 거느리게 되었다. 전제적 형태의 권력구조의 약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보건의료기구에서도 단행되어 국가 보건의료제도의 중추를 이루었던 내의원, 전의감 중 전의감이 혁파되었다. 내의원 역시 기구가 축소되어 종래의 당상관 3명이 2명으로, 의관은 12명에서 8명으로, 침의는 12명에서 8명으로, 의약동참(醫藥同參)은 12명에서 3명 이하로 대폭 줄었다. 1895년에는 일본의 강한 영향 아래 국왕권의 제한에 대해 더욱 급진적인 조치가 취해져 궁내부의 규모가 더욱 축소되었다. 이전의 14개 기관체제가 6원 체제로 통폐합되었다. 의료업무는 시종원(侍從院)에 배속되었다. 시종원은 비서감과 함께 전의사(典醫司)를 관장하였는데 여기서 전의사란 이전의 내의원을 지칭하는 기관이었다. 궁내부의 의료제도는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후퇴하면서 1895년 11월 한차례의 개편으로 약간 회복되었지만 왕실의료 축소라는 경향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었다.

 호열자예방규칙
1895년 평안도 의주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조선정부는 콜레라 검역에 관한 정부의 방침을 담은 <검역규칙>을 발포하였다. 1895년 윤5월 검역규칙을 보충하는 세부규정이 <호열자예방규칙>으로 구체화되었다. 호열자예방규칙은 15개조로 구성되었으며 콜레라가 발생하였을 때 지방관이 해야할 일, 지방관청에서 해야할 일, 의사가 해야할 일, 콜레라에 감염된 집에서 해야할 일, 피병원(避病院) 설립에 관련된 일, 콜레라 사망자의 매장에 관한 일, 콜레라에 감염된 가구 및 지역 소독에 관한 일, 선박 검역에 관한 일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 규칙은 검역활동의 상세한 부분까지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후 전개된 조선정부 최초의 전국적 콜레라 방역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이 규칙에 입각하여 위생국의 지휘 아래 검역소와 피병원 등의 기구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각 지방 관아의 협조를 받아 전파 차단, 콜레라 사망자와 이환자 파악 및 그들에 대한 조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내부병원
1899년 한국정부는 대민 치료기관으로 내부 소속의 병원을 설립하였다. 흔히 내부병원으로 지칭되는 이 병원은 1882년 혁파된 활인서의 부활로 이해되었다. 내부병원은 1년 예산이 3천원 정도로 1896년 계획한 병원 예산에 비해 1/5로 삭감된 규모였다. 이전에 구상된 병원이 의학교와 그 부속병원으로 신의술을 학습하고 시술하기 위한 성격이 짙은데 비해, 내부병원은 한의술을 위주로 하는 구료병원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내부병원은 민의 질병 구료 뿐 아니라 소아 종도, 각종 가축의 질병 검사, 약품 매약의 관리 검사, 각종 약료의 검사와 제약법 및 화약법(化藥法)의 교육 등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1899년 4월 24일 병원관제가 반포되었고 4월 26일부터 27일 사이에 병원장, 기사, 의사 13명, 약제사 1명, 서기 1명이 임명되었다. 이중 의사는 모두 한의사로 대부분이 전의(典醫)를 겸직하고 있었다. 내부병원에는 입원실이 따로 없었으며 대신에 전염병 환자를 위한 피병원(避病院)을 설립하였다. 피병원은 염병, 콜레라, 폐창(廢瘡) 등 전염병이 타인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인가에서 50보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 내부병원은 1899년 6월 1일부터 의약을 갖추어 진료를 개시하였다. 진료 환자 중에는 입원환자나 중병환자는 없었고, 모두 외래환자로 약만 제공한 환자였다. 감옥의 환자나 전염병 환자, 무의무탁(無依無托)한 빈민 환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내부병원의 모습은 종래 폐지되었던 활인서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혜민서, 활인서 혁파
1876년 국교확대 이후 조선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의 설치를 통해 근대적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고종은 기무처를 설치하여 체제정비작업에 나섰는데 기무처에서는 전제통치기구에 대한 정지작업으로 감생청(減省廳)을 마련하여 제반 개혁작업을 진행하였다. 1882년 감생청은 혜민서와 활인서를 혁파하였다. <비용을 절약하고 검박한 것을 장려하며 쓸데없는 허비와 필요치 않은 관리를 제거하고 나라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백성들의 폐해를 없애버리고자>하는 의도였다. 혜민서와 활인서는 혁파되고 관리나 기능은 전의감에 귀속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조치는 전통적인 삼의사(三醫司) 체제 중 하나의 체제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조선 정부에는 전통적 의미의 대민의료기관이 없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후 조선 정부는 근대적 위생론에 입각한 서양 보건의료체체의 채택을 계획하게 되었고, 그 첫 결실은 1885년 설립된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이었다.

 하워드
하워드(Howard, Meta)는 미 감리교 선교사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1887년 10월 31일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와 함께 미 감리교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한 의료선교사로서 내한하였다. 미 감리교에서는 1885년에 스트랜튼(W. B. Scranton)이 설립한 시병원(施病院)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녀유별의식으로 여자환자의 치료가 곤란한 상태였다. 난관을 타개하고자 스크랜튼부인은 본국에 여성 의료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하워드가 파견된 것이었다. 그녀는 정도에 보구녀관을 설립하고 여성환자의 치료를 시행하는 한편 이화학당 학생들의 보건을 책임지고 있었다. 1889년 건강을 해친 그녀는 귀국하게 되었고 1890년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녀의 후임으로 보구녀관에 부임한 이가 홀(Sherwood Hall)이었다.

 서재필
서재필(徐載弼)은 19864년 1월 17일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82년 별시(別試) 문과에서 병과(丙科) 3등으로 급제한 후 국방을 충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옥균의 권유에 따라 일본에 건너가 군사학을 배울 것을 결실하였다. 케이오(慶應)의숙을 거쳐 1883년 토야마(戶山)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국내의 정치적인 사정과 재정적 이유로 소환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 참가하였다가 정변의 실패 후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892년 2월 3년제인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1895년 12월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근대적 위생개혁론을 피력하였다. 그는 주권재민 사상을 바탕으로 정부가 공중 보건 및 환경위생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정부의 시혜가 아니라 세금을 내는 국민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1880년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되고있었던 우두보급운동을 돕고자 지석영의 우두론을 논설란에 게재하였으며, 도로의 개선, 식수문제의 해결을 통한 환경위생사업의 추진을 주장하였다.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근대적 국가개혁을 추진코자 했던 서재필은 1898년 4월 러시아 및 일본의 견제로 인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다시 의사로서 활동하는 가운데도 조선의 독립에 계속적인 관심을 표명하였으며, 1947년 미군정의 초청으로 미군정 고문과 과도정부 특별의정관을 맡아 다시 귀국하게 되었다.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병원에서 생애를 마쳤다.

 의학교(醫學校)
근대의학을 교육하는 의학교 설립에 대한 청원은 이미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었지만 의학교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는 1898년 11월 지석영이 학부대신에게 올린 청원서에 있었다. 청원서에서 지석영(池錫永)은 의학교 개설 장소, 의학교 교사, 의학교 학도, 의학교 확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기하였다. 1899년 3월 24일 <의학교 관제>가 반포되었는데 의학교 성격에 대해 <내외 각종 의술을 전문으로 교수하는 3년 연한의 국고로 지원되는 학부 직할의 학교기관>으로 규정하였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모두 배우는 교육기관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관제 반포 후 학교 교직원으로 교장에 지석영, 교관에 경태협(景台協), 남순희(南舜熙), 서기에 유홍(劉泓)이 임명되었다. 교장과 교관이 임명되었지만 이들은 한의사로서 서양의학을 교습할 능력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일본인 의사 후루시로(古城梅溪)를 고빙하여 서양의학을 교육시키고자 하였다. 1899년 7월 5일 <의학교 규칙>이 반포되어 입학, 휴학, 재학, 퇴학, 출학(黜學), 처벌, 시험, 졸업 등 전체적인 의학교 운영규칙이 마련되었다. 본래 9월 1일로 정해졌던 개교 날짜가 늦어져 1899년 9월 4일 개교를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한달 뒤인 10월 2일 개학식을 거행하였다.

 약령시(藥令市)
약령시란 대체로 조선 효종(孝宗) 이후 약재의 중요 산지인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의 물산 집합지인 대구, 원주, 전주 등에서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약령시가 개설되면 먼저 관청에서 청나라에 조공할 약재를 매상하였는데 주로 인삼이 주 대상이었다. 인삼의 매상은 각 도의 심약(審藥)이 담당하였고, 기타 주요한 약재는 상인단체를 대표하는 접장(接長)이 심사 후 매수하였다. 관청의 매상이 끝난 후 일반인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약령시는 도 관찰사가 관리하였으므로 감영(監營)에서 치안, 청송(聽訟), 재판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약령시의 개시(開市)는 약재를 채취하는 시기에 따라 1년에 몇차례 이루어지다가 후에는 봄 가을 두차례, 나중에는 가을에만 열리게 되었다. 약령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대체로 중국 조공에 의한 발생설, 일본의 한약재 수용에 따른 발생설, 대동법에 의한 발생설 등이다. 약령시의 령(令)에 대해서도 두가지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관의 명령(命令)에 따라 개시가 이루어지는 것에 미루어 의미에서 령(令)을 사용했다는 주장과 약재 채취 시기를 의미하는 월령(月令)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대한적십자사 병원
대한제국이 본격적으로 적십자 활동에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0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적십자 관련회의에 주 프랑스 및 벨기에 특명전권대사인 민영찬(閔泳瓚)이 참가하면서부터였다. 1905년 대한제국은 적십자병원을 개원하고, 대한적십자사를 공식 창설하였다. 적십자병원을 설치한 동기는 작고참금(酌古參今)에 있었다. 즉, 기존의 혜민서, 활인서의 전통을 잇고, 적십자 정신이라는 국제 외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두 측면을 만족시키고자 함이었다. 병원은 1905년 10월 중순경 완성되었으며, 10월 27일 병원의 운영을 규정한 <대한적십자사규칙>이 반포되었다. 규칙에 따르면 한성에 설립된 병원은 빈곤한 상병자와 천재지변이나 사변에 따른 피해자 구료를 설립목적으로 했으며, 설립자는 정부기관이 아닌 지존지인(至尊至仁)한 황제폐하였다. 이 규칙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기관이 황실 직속기관이라는 점과 황실에서 직접 시료표(施療票)를 내려 환자를 구료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적십자병원의 특징은 고종 또는 황실이 병원 창설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민들에게 보이고,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자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
한국 민간에서 이루어진 의사단체 결성 시도는 1908년 5월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관립의학교 졸업생들과 한성에서 개업하고 있던 의사들을 대상으로 의사연구회를 조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직 사업은 11월 초까지 계속되어 11월 8일 의사들은 연구회 조직 방침을 협의한 후 회장에 김익남(金益南), 부회장에 안상호(安商浩), 총무에 유병필(劉秉珌), 간사에 최국현(崔國鉉), 장기무(張基茂)를 선출하였다. 의사연구회의 활동으로는 회원의 정례 토론활동과 의료제도 개선활동이 있었다. 1909년 4월에는 의사연구회에서 의사법(醫師法) 제정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사연구회에서는 <의사법의 반포가 아직 없은 즉 여하한 자격이 있는 자라야 의사됨을 얻을는지 의문일 뿐 더러 이를 이용하여 의학상 소질이 없는 자도 의연히 의사의 명칭으로 개업하여 의술을 펼쳐 인명을 해치는 일도 있으며 그에 따라 의업이 부진한 원인이 되는 까닭>에 위원을 선출하여 의사법을 기초하고 그 안을 내부에 청원하였다. 의사법 제정청원은 정부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지만 근대적 의미의 이익단체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표출한 행위였다. 의사연구회는 1909년 5월 전후 해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의사회(京城醫師會)
1905년 7월 경성 영사관 구역에서 개원하고 있는 일본 의사들이 모여 경성의회(京城醫會)를 결성하고 회장에 와다(和田八千穗), 간사에 사카이(坂井義明), 후루시로(古城菅堂)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일본인 거류지의 의사위생(醫事衛生)의 개량 발달을 도모하고 한국에 일본의학을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의사위생에 관해 일본 영사의 자문에 응하거나 건의하고자 하였다. 또한 진찰료, 수술료, 약가(藥價) 등을 규정한 <경성의회 약가규약>을 정하여 과도한 경쟁을 사전에 방지코자 하였다. 경성의회는 치료행위에 있어 관립병원과 일정한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총독부에 대해서 대한의원 의원이 자택에서 개업하는 것을 금지할 것과 일본인에 대한 진찰료, 약가, 입원료는 자신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결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성종두사
한성종두사는 한성 5서(署)내의 종두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내부대신 직속기관이었다. 한성종두사의 사장(司長)은 위생국장이 겸직하였으며 사장 아래에 의사 5명, 기수 2명, 서기 1명이 배속되었다. 의사는 종두사무를, 기수는 두묘(痘苗) 제조를, 서기는 문첩 보관 및 재용(財用) 회계를 담당하였다. 1900년 9월 7일 <한성종두사 세칙>이 반포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한성종두사는 5서뿐 아니라 13도 1목에 설치된 종계소(種繼所)를 관장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종두사무가 확장되는 경우에는 약값 수입금>을 확정한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종래 무료로 접종되는 우두 시술을 유료로 할 것을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종두소(種痘所)
1897년 종두의양성소에서 2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자 정부에서는 1895년 반포된 <종두규칙>에 의거하여 종두법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1898년 4월 19일 <종두소 세칙>이 반포되면서 한성을 대상으로 한 종두사업이 개시되었다. 그 내용은 내부 본부에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를 두어 의사 2명으로 하여금 접종액을 제조토록 하였고, 서울 전 지역을 5서(署)로 나누어 각 곳에 종두소(種痘所) 1곳씩을 두어 종두의사 1인으로 하여금 우두를 시술토록 하는 것이었다. 우두접종은 국가 재정부담을 전제로 한 무료접종이었으며, 종두의사는 실적에 따라 정부에서 월급을 지급받았다. 종두의사는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까지 접종을 하였으며, 자신의 실적과 소요 경비를 매달 말 내부에 보고토록 되어 있었다. 1899년 4월 내부병원이 개원하자 한성 5서의 종두소는 그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병원의 업무와 종두 업무가 중복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자 위생국과 같은 수준의 한성종두사(漢城種痘司)를 설치할 것이 계획되었다. 결국 1900년 한성종두사 관제와 세칙이 반포되기에 이르렀다.

 지방의 종두사업
한성에서는 1898년 <종두소 세칙>이 반포되면서 종두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지방의 종두사업은 한해 늦은 1899년에 시작될 수 있었다. 6월 27일 <각 지방 종두세칙>이 반포된 것이었는데 이 세칙에 따르면 지방의 종두 사업은 한성의 국가 부담원칙과 달리 접종자 부담이었다. 그 외 내용을 보면 각 도에 접종액을 생산할 종계소가 설치되었고, 내부에서는 종두위원을 이곳에 파견하여 도 차원의 종두사업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종두위원의 지휘, 감독을 받아 각 지방이 종두 실무는 종두 인허원이 담당하였다. 1899년 7월 한 도에 2명씩, 전국에 26명의 종두위원이 정식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들은 9월 초 각 지방에 내려가 종두사업을 시작하였다. 종두위원이 도착하자 각 도 관찰사는 내부 훈령에 따라 종계소를 설치하고 종두세칙을 각 군에 전칙(轉勅)하는 한편 종두 인허원을 선발하여 각 군에 파견하였다. 내부에서는 지방 13도의 종두 사무를 지원하기 위해 우편제도를 이용하여 두묘(痘苗)를 보냈다.

 광제원(廣濟院)
1900년 종래 내부병원에서 담당하던 종두사업이 한성종두사(漢城種痘司)로 이양되면서 내부병원은 구료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이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칭되었다. <병원>이라는 말은 단순히 병을 고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적극적인 구료의 뜻은 담고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02년 여름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유행하자 광제원은 콜레라 방역을 위한 제반 조치를 취해 나갔다. 9월부터 임시 방역위원이 임명되어 각 지방에 파견되었으며, 10월부터는 상시적인 형태의 사무위원이 임명되었다. 1905년 관제 개편과정에서 광제원의 조직도 변화를 보이는데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1900년 분리되어 나갔던 종두사무가 광제원에 다시 흡수되어 종두사업을 관장하던 한성종두사의 인원, 즉 의사 5명, 기수 2명, 서기 1명이 광제원 종두소(種痘所)로 흡수된 점이었고, 둘째는 한의사로만 운영되던 조직에 서양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배치된 것이었다. 이들은 광제원 양약소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 수는 4명이었다. 이 숫자는 한약소 보다 1명이 적은 것으로, 이제 광제원이 한방을 주로 하고 양약을 부수적으로 간주하던 이전 시기와 달리 양쪽이 서로 대등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육군위생원(陸軍衛生院)
1894년 6월 갑오개혁 과정에서 군부아문 내에 의무국이 설치되어 육해군부 내의 의무와 약제 등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895년 일본 군의를 초빙하려는 계획도 아관파천 등 정치적 변화과정에서 실현되지 못하다가 1897년 러시아 군의가 파견되게 되었다. 1897년에는 조선인 군의도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한의사였다. 1904년 대대적인 군제개편 과정에서 의무국의 위상이 격상되고, 의무국장으로 의학교 교관인 김익남(金益南)이 임명되었고, 의관으로는 관립의학교 졸업생 10명이 배정되었다. 즉 의무국에 일본 또는 관립의학교에서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이 임명되었던 것이다. 의무국의 설치와 함께 군대병원의 개원이 계획되어 1898년 2월 초 고종은 군대병원의 설치를 재가하였다. 육군병원으로 불린 이 병원은 1901년 11월 착공되었고, 1902년 8월 창경궁 앞 옛 비변사 자리로 이전하였다. 1903년 2월 10일 육군병원은 육군위생원이라는 독립기관으로 승격되어 대한제국 육군의 의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육군위생원에는 의관 산하에 간호와 병원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조호장, 조호수 등 13명이 있었다.

 1909년 콜레라 유행
1909년 8월 중순 콜레라가 발병한 이래 유행이 거의 가신 10월까지 환자 1,652명이 발생했고, 그 가운데 1,218명이 사망하였다. 콜레라 최대 피해지역은 한성으로 전체 환자와 사망자 수의 2/3에 이르렀다. 한성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경시청에서는 9월 15일 질병 환자 신고에 대한 영(令)과 콜레라 예방법에 대한 고유(告諭)를 발표하였다. 고유는 끓인 음료수를 먹고 식기 세척을 깨끗이 할 것, 파리 모기 등을 구제(驅除)할 것, 풋과일과 어류 그리고 채소를 익혀 먹도록 할 것, 폭음 과식을 삼가고 배를 내놓고 자지 말 것 등을 규정하였다. 경시청령은 환자 신고를 규정하면서 “본령을 위반한 자는 10일 이하의 구류 또는 1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벌칙을 담고 있다. 이후 경시청은 파출소 순사들을 콜레라 예방사무에만 전념토록 하여 교통차단, 환자색출, 청결법 시행 등의 업무를 담당토록 하였다. 9월 24일에는 <방역본부 규정>을 반포하였다.

 1907년 콜레라 유행
1907년 9월 2일 평안도 의주지방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한 이래 유행이 종식될 때까지 콜레라 환자는 한성 43명, 인천 81명, 부산 135명, 평양 96명 등 전국적으로 376명이었다. 1907년의 콜레라는 종래에 비해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지만 이해에 일본 황태자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일본 통감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방역작업이 진행되었다. 한성에 콜레라 유행이 보고되자 경시청에서는 검역위원부를 설치하여 방역에 나섰다. 일본 황태자의 방한이 가까워지는데도 콜레라 유행이 계속되자 통감부에서는 하세가와(長谷川) 주차군 사령관에게 방역을 지시하였고 하세가와는 오카자키(岡崎生三) 사단장을 방역총장으로 하는 방역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방역위원회에서는 한성과 인천 등 일본 황태자의 행로와 관련된 모든 지역을 분할하고 각 지역마다 일본군 감시원을 배치하여 방역사무를 집행토록 하였다. 방역활동으로는 청결법과 소독법의 시행, 음식물 단속과 개인위생 강화(講話), 판매 음식물 제한, 검역, 환자 및 시체 처리 등이었다. 1907년 콜레라 방역활동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엄청난 물량이 투여되고 일본군의 삼엄한 방역 분위기 아래 진행되었으며, 과잉 방역의 성격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수백 건의 단속 결과가 빚어졌다.

 종두사무 변화
1907년 3월 15일 이후 대한의원 위생부에서 종두사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의원 위생부는 한국 위생행정의 최고 기구의 성격을 지녔으며, 전염병 관리 등 공중보건 업무 가운데 하나로 종두행정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1908년 1월 1일 내부에 위생국이 신설되자 대한의원이 맡았던 종두행정 사무가 위생국으로 이관되었다. 대신 대한의원에 시험, 연구를 담당할 위생시험부가 신설되어 그 동안 동인회(同仁會)에서 맡았던 두묘(痘苗) 제조사무가 위생시험부로 이관되었다. 1909년 2월 1일 대한의원 위생시험부가 내부 소속의 위생시험소로 바뀜에 따라 두묘 제조사업이 내부 위생국 소관으로 옮겨졌다. 대한의원은 위생행정, 시험, 연구기관이 아니라 순수한 진료기관이 되었으며, 종두 접종 또한 진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시에 내부 위생국과 경무국의 종두 사업체제가 강화되었다. 내부 위생국은 종두사무를 담당할 종두 사무위원과 종두 인허원의 인사 관리, 두묘와 종두 기구 등의 지원을 담당하였으며, 경무국은 다른 위생 감시활동과 함께 종두 접종을 감독, 단속, 장려하는 업무를 맡았다. 특히 전국 각 지역에 파견된 경찰의(警察醫)는 지방 종두 사무위원과 인허원을 감독하고, 강제적인 종두접종을 시술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함흥 제혜병원
함흥에서의 의료사업은 1903년부터 시작되었다. 1901년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에서 파견한 여의사 맥밀란(K. McMillan, 孟美蘭)이 원산에 머물다가 함흥에 파견되어 작은 한옥 한 채를 구입하고 시약소로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선교부가 개설된 후 선교사 주택들이 있던 신창리(新昌里)에 좀더 큰 한식 가옥을 매입하여 개조한 후 정식으로 개원한 것이 1905년 11월 6일이었다. 맥밀란은 의학상식이 거의 없는 한국인 소년 몇 명을 데리고 병원을 운영하면서 하루에 70-100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1910년대에는 관북지방 서양의학의 개척자로 알려진 박성호(朴聖浩), 유칠석(劉七石), 모학복(毛鶴福)이 모두 이 병원의 의사로 활동하다가 개인병원을 차리기도 하였다. 맥밀란은 1922년 건강을 해쳐 사망하였다. 맥밀란이 죽기 1년 전에 머레이(F. Murray)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지만 마침 용정 제창병원에서 근무하던 마틴(Martin)이 안식년으로 귀국함에 따라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1924년 제혜병원에 올 수 있었다. 1924년 8월 1일 머레이가 부임하면서 제혜병원은 문을 다시 열게 되었고 1925년 3월에는 간호부로 카드웰(V. E. Cardwell)이 부임하여 그의 주관 하에 여자 2명, 남자 3명으로 정규 간호부양성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1942년 7월 1일 일제의 선교사 추방정책에 따라 머레이가 출국하게 되면서 제혜병원은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스코필드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1889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1907년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1910년 캐나다 토론토 소재 온테리오주 보건국 소속 세균학연구소에서 조수를 근무하였고, 1911년 토론토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16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교장 에비슨의 초청으로 내한하여 세균학, 위생학 등을 강의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발생하자 제암리, 수촌리 등을 방문하여 현장을 촬영함으로써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을 세계에 알렸으며, 신문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항의문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20년 계약 만기를 이유로 강제 추방당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1958년 한국을 방문한 후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수의 병리학을 교수하였으며, 195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1970년 사망 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해주 구세병원
1909년 해주가 감리교 선교구역으로 설정되자 11월 초 켄트(Edwin W. Kent)가 해주 진료소를 창설하였다. 병원은 처음부터 외래 진료 뿐 아니라 입원환자를 받을 수 있도록 입원실, 수술실, 부엌, 세탁실 등 4개의 방을 갖추었다. 1910년까지 평균 입원환자는 하루 2-3명이었으며, 1910년 2월까지 999명을 진료하였다. 켄트는 1910년 귀국하였고 후임에 영변에서 근무하던 노튼(A. H. Norton)이 부임하여 1910년 11월 1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1912년 노튼은 거액을 희사하여 새 병원을 신축하기 시작, 1913년 10월 10일(노튼 모친의 생일) 봉헌식을 올림으로써 미 감리교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세워졌는데 병원의 이름은 노튼 모친을 기념하여 <노튼기념병원(Lovisa Holmes Norton Memorial Hospital)>이라 하였다. 한국사람들은 그것을 해주 구세병원(Salvation Hospital)이라 불렀다.

 개성 남성병원
1907년 9월 미국 남감리교 한국 선교책임자였던 클레렌스 리드의 아일인 와이트만 리드(Wightman T. Reid)가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마치고 개성의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왔다. 그는 1907년 병원 건축을 시작하여 1910년 40병상으로 이루어진 아이비병원(The Ivey Memorial Hospital, 南星病院)이 개성 만월동에 완공되었다. 남성병원의 의료사업 중 특징은 아편 치료사업이었다. 당시 개성에만 4천여 명의 아편 환자가 있었는데 1911년 보고서에 의하면 1910년 162명의 환자를 치료하여 반 이상을 완치했다고 한다. 남성병원의 명성이 알려지자 서울에서까지 환자들이 찾아왔다. 병원 조수와 교회 지도자들은 아편퇴치운동을 위해 아편중독에서 완치된 사람들로 하여금 반아편연맹을 조직케 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부터 1910년 8월까지 남성병원에서는 총 6,176명을 진료하였으며, 입원 환자는 312명, 왕진은 712차례, 큰 수술은 42번 시행하였다.

 춘천에서 선교의료사업
1909년부터 시작된 춘천 지역에서의 미 감리교 의료사업은 병원이 폐쇄된 1926년 가을까지 마이어즈(W. C. Mayes), 바우만(N. H. Bowman), 앤더스(E. W. Anderson), 힐(P. L. Hill) 등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간호사로는 퍼리(Alice Furry)가 1922년에 임명되어 1926년까지 근무하였다. 1914년부터 한국인 의사 1명이 계속 근무하였다. 춘천병원은 1926년 가을 선교부의 재정난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병원 폐쇄에 따라 힐은 본국으로 귀환하였고, 10년 간 조수로서 활동하던 남궁건은 개성의 남성병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의료 장비는 원산과 개성으로 나누어졌다.

 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기성회
1926년 10월 22일은 로제타 셔우드 홀(R. S. Hall)이 조선에 와서 의료선교사로 근무한지 30주년이 되는 날로서, 회갑연을 겸하는 기념식이 명월관에서 개최되었다. 홀은 이 자리에서 “현재 조선에 있어서 여자의사가 얼마나 필요할 것입니까. 그런즉 우리 조선 안에 여자의학전문학교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여자의학전문학교의 필요성과 설립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였다. 1926년 12월 1일자 기독신보에 동대문병원 여의사 현신덕(玄信德)은 <조선에 여병원이 필요한 이유>라는 제목으로 조선에는 여자만을 취급하는 부인병원만이 조선여성을 구호하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어 12월 8일자에는 이화학교 교의인 유영준(劉英俊)이 <조선의 여의학교>라는 글을 게재하여 여의사를 양성하는 여의학교의 설립이 시급함을 강조하였다. 1928년 홀이 다시 내한하자 5월 15일 여의사들은 여의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고 서기에 정자영(鄭子英), 차순석(車純錫), 간사에 안수경(安壽敬), 김순복(金順福)을 지명하였다. 기성회는 5월 19일 서소문동 김의원(金醫院)에서 여자의학전문하교 창립발기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창립기성회를 조직하고 이사를 선출하였는데 이사로는 홀, 정자영(鄭子英), 허영숙(許英淑), 최동(崔棟), 김순복(金順福), 이은라(李恩羅), 김탁원(金鐸遠), 백인제(白麟濟), 안수경(安壽敬), 김영섭(金永燮)을 선출하였다.

 해주 구세요양원
해주 구세요양원은 1910년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김점동)이 결핵으로 사망하는 것을 지켜본 당시 17세의 청년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한국민을 폐결핵에서 건질 결핵 전문의가 될 것을 결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1926년 7월 해주에 도착하여 해주 구세병원의 원장으로 근무하였다. 1928년 3월 전 평양감사의 손자를 고쳐준 것이 계기가 되어 요양원 설립을 반대하는 지방민들의 움직임이 수그러들었고, 요양원의 건축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감리교는 영변, 공주, 원주의 병원들을 재정난을 이유로 폐쇄한 상태였으므로 해주 구세요양원 건립을 위한 별도의 예산을 지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버버그(Verburg)의 유산이 공중위생사업을 위해 기증된 것을 계기로 그 중 일부를 지원 받아 1928년 4월 13일 기공식을 거쳐 10월 27일 근대식 건물의 폐결핵 전문 요양원을 건축할 수 있었다. E자형의 중앙 건물에는 엑스레이실, 암실, 병리실, 조제실, 치료실, 대기실, 의무 집무실 등이 있었으며, 일광욕실도 있었다. 특별히 요양원 입원실은 만주식 온돌 침대를 설치하여 난방 효과도 얻고 온돌에 익숙한 환자들의 편의도 도모하였다.

 원산 구세병원
1901년 작은 진료소로 출발한 원산 구세병원은 북 감리교 맥길과 공동으로 운영되다가 1903년부터 남 감리교 로스(J. B. Ross)에 의해 단독으로 운영되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개성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있었던 로스가 1905년 원산에 정식으로 임명되면서 구세병원의 의료사업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07년 로스는 병원에서 2마일 떨어진 마을에 진료소를 신설하였다. 마을 진료소에서는 일반 진료를 하였고, 구세병원에서는 중환자, 외국인 및 세관 관련 업무를 하였다. 1908년부터 메이즈(W. C. Mayes)가 로스와 함께 의료사업에 참가하였으며, 조수로는 최승현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원산은 개항장이었던 관계로 중국인, 일본인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1922년 10월 병원을 대확장하여 좀더 넓은 병원건물을 사용하였다. 1915년부터는 캐나다 장로교와 연합의료사업이 결정되어 캐나다 장로교의 맨스필드(T. D. Mansfield)가 로스와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 맨스필드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가면서 원산의 의료사업은 다시 남감리교에서 단독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원산 구세병원에는 앤더슨(E. W. Anderson), 데마르(E. W. Demaree) 등이 번갈아 가면서 원장을 맡아 근무하게 되었다.

 순화원(順化院)
1909년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당시 전염병 환자 수용소로는 광희문 밖 피병사(避病舍)와 일본인 경성민단(京城民團)에서 세운 청파전염병원(靑坡傳染病院)이 있었으나 수용 능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따라서 용산, 독도(纛島),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소재 경유궁(景裕宮) 등지에 임시로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한성위생회(漢城衛生會)에서는 전염병원의 건설을 위해 1909년 9월 1일 평의원회를 거쳐 사업비의 임여금으로 병원 건설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장소로는 탁지부 소관의 경우궁(景祐宮)을 빌려 종래의 온돌 외에 병실, 소독실을 갖추고 1911년 7월 병원을 준공하였다. 수용 인원은 1백여 명이었으며 순화방(順化坊)에 위치한 관계로 순화원(順化院)이라 명명하였다. 1911년 8월 16일 개원식을 가졌다.

 순회진료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근대의료의 시혜를 넓힌다는 의미에서 순회진료를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의료기관 및 료속(療屬) 분포는 해마다 보급되어지고 있지만 그 분포가 미처 널리 되지 않아 벽추(僻陬) 거주자 중에는 의사의 치료를 받지 못해 병고에 시달리는 자가 많은 상황이어서 이들 무고(無告)의 궁민을 구제하고 의료기관의 불비(不備)함을 보족(補足)하는 일조(一助)로서 종래의 각 의원에서 의료기관이 없는 벽추지(僻陬地)에 순회 진료를 시행>하고자 한다는 것이 일제가 내세운 의도였다. 순회진료의 수는 1917년까지 증가하여 한해 12만명에 이르렀지만 1920년에는 1만 7천명으로 떨어졌고, 1937년까지 그 수준을 유지하였다.

 공의(公醫)
공의는 한지의사와 비슷하에 산간 벽지, 국경 지방 등 비교적 인구가 많으나 의료기관이 전무한 곳에 배치되어 공적인 의무를 담당하는 의사로서, 자유 개업도 병행할 수 있었다. 한지의사와 다른 점은 공적인 업무를 주로 하며 총독부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공의의 임무는 전염병 예방, 지방병 조사, 종두 시행, 학교위생, 공장위생, 예기(藝妓), 창기(娼妓), 작부(酌婦) 등에 대한 건강진단, 사체검안, 행려병자 및 빈민환자 진료, 기타 공중 위생 및 의사에 관한 특명(特命) 사항 등이었다. 공의의 수는 1930년 현재 217명, 1929년에는 228명으로 각 도마다 10-23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었다. 공의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함에 따라 총독부에서 봉급을 지급 받았는데 1923년 현재 연 1,200원이었다.

 의사규칙(醫師規則)
의사규칙은 의사의 자격과 면허취득 방법을 규정한 법령이었다. 이 의사규칙은 조선에서는 처음 공포되는 의사에 대한 규칙이었다. 1900년 1월 2일 내부령 제27호로 <의사규칙(醫士規則)>이 반포되었지만 이 의사규칙은 한의사에 대한 규칙으로 서양의학을 교육받은 의사에 대한 규칙은 아니었다. 따라서 세브란스의학교, 대한의원 의육부 혹은 부속의학교를 졸업한 자들에게는 의사면허가 아닌 의술개업을 위한 의사들의 자격인 의술개업인허증을 발급하였다. 의사규칙에 따르면 의사의 자격을 규정하는 제1조 제1항에서 <의사법 제1조 제1항 제1호 제2호에 해당하는 자> 또는 <의술개업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의사법이란 일본의 의사법을 근거한 것으로 문부대신이 지정한 의학전문학교 졸업자에 해당되는 일본 의학교육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제2항의 <조선총독이 지정한 의학교를 졸업한 자>는 당시 조선에서 의학교육을 지적한 항목으로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행당하는 것이었다. 1914년 3월 7일 의학강습소가 조선총독부 고시 제63호로 의사규칙 제1조 제1항 제2호에 의해 지정되어 3월 31일에 졸업한 38명의 졸업생에게 의사면허증이 교부되었다. 총독부 의사면허증을 교부받은 최초의 조선인 의사는 6번 이후경(李厚卿)이었다.

 치과의사규칙
치과의사규칙은 치과의사의 자격과 면허취득 방법을 규정한 법령이다. 치과의사규칙에 따르면 치과의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치과의사법 제1조 제1항 제1호, 제2호에 해당하는 자 혹은 치과의술 개업시험에 합격한 자, 조선총독이 지정한 치과학교를 졸업한 자 등이었다. 일본의 치과의사법 제1조는 문부대신이 지정한 치과의학교를 졸업한 자와 치과의사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내무대신이 치과의사면허를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치과의학교도 없었고 총독부 치과의사시험제도도 없어 치과의사가 되는 길은 일본의 치과의학교로 유학가는 길뿐이었다. 이후 8년이 지난 1921년 2월 14일 조선총독부령 제27호로 조선치과의사시험규칙이 공포되었고, 10월 9일 제1회 시험이 실시되어 40명의 지원자 중 6명이 합격하게 되었다.

 의생규칙(醫生規則)
종래 한의사들은 1913년 의생규칙(醫生規則)의 반포에 따라 의생(醫生)으로 명칭이 바뀌고 규칙에 의해 자격을 인허 받아야 하고 명시된 한도 내에서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의생이란 자격 미달의 의료인이었으며, 의사에 비해 낮은 신분적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 의료계에서 상층 지위를 점하던 <유의(儒醫)>는 의료계에서 퇴장하였고 한의학의 수준 역시 전반적으로 저하되었다. 의생규칙의 반포에 따라 1914년 4월 4일까지 등록한 의생 수는 1,466명, 위생과에 제출되어 전형을 받고 있는 서류는 1,000여매, 벽지에 수송 중인 것은 7-800매였으며, 전국의 의생 수는 3,000여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1914년 12월 11일까지 만 1년간 등록한 의생 수는 5,879명이었다.

 해항(海港)검역에 관한 건
해항 검역을 실시하기 위한 근대적인 법규는 이미 대한제국시기에 마련되어 있었다. 1899년 9월 13일 대한제국정부에 의해 <檢疫停船規則>이 발포된 것이었다. 모두 22조로 구성된 <검역정선규칙>은 지방검역국의 설치, 검역국의 행정관리와 의사의 활동, 피병원(避病院)의 설치와 운영, 소독 활동 등 제반 검역사무 기구 및 기관의 내용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세균설에 입각한 세련된 형태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공식적인 검역 관련 법규를 서둘러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로 인해 1879년 일본에서 반포된 <검역정선규칙>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였고, 따라서 대한제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시켰다고 보기 어려운 규칙이었다. 더구나 이 규칙은 검역대상을 콜레라에 한정하고 있었고, 검역 장소 역시 세관 지역에 한정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일제는 자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해항검역법시행규칙(海港檢疫法施行規則)>을 모방하여 <해항검역에 관한 건>, <해항검역수속> 등 새로운 검역규칙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규칙들은 검역 대상을 콜레라, 성홍열, 페스트, 황열(黃熱)로 확대한 점은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검역정선규칙(檢疫停船規則)> 보다 소략하다.

 지방병(地方病)
조선에서 주요한 지방병으로는 폐디스토마, 십이지장충, 말라리아, 재귀열(再歸熱) 등이 있었다. 1928년 지방병 환자는 총 17만 2천 5백여명으로 전체 인구 100명당 1명의 높은 유병율을 부였다. 특히 만연했던 질병은 폐디스토마, 십이지장충 등 장내 기생충이었는데 폐디스토마의 경우 치사율이 25%, 십이지장충은 10%정도였다. 1925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학생 및 농촌생활자의 8-90%가 기생충에 이완되어있었고, 지방의 경우는 90%를 훨씬 상회했다. 일제는 지방병 퇴치를 위해 중간 숙주인 게 등 민물고기의 생식을 금지시키고 하수의 사용 제한, 에방방법 강화(講話) 등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기생충은 감소되지 않고 증가하기만 했는데 그 이유는 일제의 기생충 관리사업의 규모가 적었고 민들의 민도 역시 낮았기 때문이었다. 말라리아나 재귀열에 대해서는 조사사업에 착수했다는 언급이 있을 뿐 구체적인 사업내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중앙위생회
조선중앙위생회는 조선에서 공중위생에 관한 사항에 대해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출하는 기관으로 회장 1명, 위원 20명 내외로 이루어졌다. 회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으며 위원은 조선총독부나 관련 부서의 고등관 혹은 학식과 겸험이 있는 자로부터 조선총독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회장 이외에 서무를 관리하는 간사 1명을 두었는데 간사 역시 조선총독부 사무관 중에서 조선총독이 임명하였으며, 간사 밑에 서기를 두어 서무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조선종두령(朝鮮種痘令)
조선종두령에 의하면 종두는 3번에 걸쳐 시행되었다. 첫 번째는 출생후 1년 내, 두 번째는 6세, 세 번째는 12세였다. 각 시기마다 종두는 1회씩 시행하고 만일 반응이 없으면 1년 내에 다시 종두를 시행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조선종두령에서는 종두 시행을 강제화하는 규정을 설정하여 종두를 받지 않거나 종두를 받은 증거가 없는 사람은 연령에 관계없이 종두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조선종두령이 반포됨에 따라 종래 종두규칙은 폐지되었고, 조선종두령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일본의 종두법(種痘法)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마약류 중독자 등록규정
조선총독부에서는 <마약류 중독자 등록규정>을 만들어 마약 중독자에 대한 정기적인 치료와 관리를 시도하였다. 규정에 따르면 도지사가 지정한 부면(府面)에 거주하는 마약 중독자는 도지사가 지정한 시일까지 본적, 주소, 직업, 성명, 성별, 생년월일, 중독된 약품의 이름 등을 기록하여 관할 경찰서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등록을 마친 후에는 관할 경찰서장의 지시에 따라 의사의 치료를 받도록 하였는데 도립의원이나 도(道)의 직원인 의사, 공의(公醫) 등이 치료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치료를 담당한 의사들은 중독자에게 이상이 생겼을 때 중독자 등록번호, 주소 및 성명, 치료했거나 사망한 연월일을 기재하여 10일 내에 관할 경찰서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종 규정을 어겼을 경우 백원 이하의 벌금이나 과료(科料), 구류에 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병
나병은 만성 전염병으로 접촉으로 전염되는데 한번 전염되기만 하면 좀처럼 치료하기가 어렵고, 환자는 털이 빠지고 살이 썩어 그 형태가 심히 추해 보임으로서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질병이었다. 이 병은 접촉에 의해 전염되지만 전파력이 치열하지 않기 때문에 환자가 격증하지는 않지만 한번 걸리면 낫지 않는 병, 가장 보기 흉한 병이었기 때문에 급성 전염병인 콜레라나 페스트보다 무서워했던 질병이었다. 일제시기 나병 환자 수용기관은 조선총독부 직영의 소록도 갱생원, 미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대구, 부산, 여수의 3개 요양소가 있었지만 환자 수용능력은 1932년 현재 2,531명에 불과했다. 당시 나병 환자들은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하고자 요양소가 있는 소록도, 대구, 부산, 여수 등지로 집중하였으나 수용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요양소 앞에 거적을 쓰고 들어갈 자리를 기다리는 참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소록도 자혜의원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었던 테라우찌는 나환자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구료기금으로 제생원(濟生院)에 보관된 356만원의 일부를 사용할 것을 결정하고, 부지 선정을 군의감(軍醫監) 요시가(芳賀)에게 명하였다. 요시가는 1915년 10월 기후가 온화하고 수량이 풍부하며 육지와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여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소록도를 선정하였다. 1916년 2월 24일 소록도 자혜의원이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설립되었고 7월 10일 초대 원장으로 아리가와(蟻川亨)가 임명되었다. 1917년 4월부터 나환자 100명을 정원으로 하여 각 도(道)로부터 송치된 환자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
1932년 12월 2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이케다(池田淸), 위생과장 니시끼(西龜三圭) 등 설립위원 9명을 포함한 100여명이 조선호텔에서 발기인대회를 열고 재단법인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를 설립하였다. 조선나예방협회는 나(癩) 예방 및 구료에 관한 시설을 설치하고 그 근절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나(癩) 예방과 구료에 관한 모든 사업의 후원과 연락, 나(癩) 예방 및 구료에 관한 시설, 나(癩) 예방 및 구료에 관한 조사 연구 및 홍보, 나환자 위안에 관한 시설, 기타 나(癩) 예방 및 구료에 필요한 사항을 시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나예방협회는 나병환자 수용 확충을 위한 기부금 모집에 착수하여 1934년 12월말까지 1,076,488원을 모금하였다. 당초 61만원의 재원 확보를 목적으로 했던 조선나예방협회의 기부금 모집은 예상액을 초과하였고, 협회에서는 당초 2천명 수용 계획을 3천명으로 증원하였다. 나 요양소 부지 선정작업 결과 자혜의원이 위치한 소록도가 최적지로 선정되어 종래 요양소의 확장사업을 시작하였고, 1935년 10월 21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사립병원취체규칙
<사립병원취체규칙>은 병원 건설과 관련된 각종 요건을 규정한 법령으로 그 목적은 환자의 안정, 환기(換氣), 채광 등 기타 위생상 요구에 적합한 시설을 갖춘 병실을 갖추도록 하고, 비상 재해시에는 피난 장치를 필요로 하며, 특히 전염병 발생시에는 병독의 전파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특수 구조 설비를 갖추도록 하는데 있다고 말해졌다. <사립병원취체규칙>의 각종 설립요건을 만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병원(病院)>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병원이 아닐 경우에는 환자 1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없었고, 전염병 환자는 1명도 수용할 수 없었다. 특히 전염병실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병상, 벽면, 목욕탕, 소독실, 취사장, 시체실, 변기, 하수구 등에 대한 까다로운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전염병실이 있다 해도 경찰관서의 허가 없이는 페스트, 콜레라, 발진티푸스, 성홍열, 천연두 환자를 수용할 수 없었다. <사립병원취체규칙>을 위반했을 경우는 2백원 이하의 벌금이나 과료(科料)를 부과할 수 있는 처벌조항이 부수되어 있었다.

 조선나예방령
나환자 문제가 사회문제화되고 도지사회의에서 환자 수용문제와 더불어 단속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환자관리가 곤란하다는 내용이 자주 제기되는 가운데 1935년 4월 <조선나예방령>이 반포되었다. 조선나예방령은 나환자의 강제 수용, 소독, 예방 방법, 기타 나 예방상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였고, 환자의 강제 수용에 대한 새로운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도지사는 나환자에 대하여 업무상 병독 전파가 우려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일을 금지하고 나요양소에 입소시킬 수 있으며, 경찰서장은 나병이 의심되는 자의 검진을 시행하고 나환자에 대하여 시장, 극장 등 대중 집합장소에 출입을 금지하고 고의(古衣), 음식물에 의해 병독이 전염될 우려가 있으면 그 물건의 소독 또는 폐기를 명할 수 있고, 요양소장은 입소환자에 대하여 징계(견책, 대일 이내의 근신, 7일 이내 식량의 1/2의 감량 등) 또는 검속(30일 이내로 감금시키거나 정황이 중한 경우에는 총독의 인가를 받아 60일까지 감금)등을 시행할 수 있다 등이었다. 그리고 소독, 검진 등 나예방령에 따른 조치에 필요한 비용은 도비(道費) 부담으로 하고 지출액의 반액은 국고에서 보조하도록 하였다.

 재단법인 결핵예방회 조선지방본부
1939년 당시 일본에서는 결핵은 사망 원인 중 첫 번째 꼽혔으며, 매년 10만여명이 사망하고 있었다. 일본 황후(皇后)는 1939년 4월 28일 내각 총리대산을 불러 50만엔의 하사금을 전달하고, 결핵예방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히라누마(平沼)내각에서는 관민일체로 결해계방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결핵예방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지찌부노미야비(秩父宮妃)를 총재로 추대하는 결핵예방회를 발족시켰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도 결핵예방회 조직이 추진되어 1939년 11월 30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오노(大野錄一郞)을 본부장으로 하는 재단법인 결핵예방회 조선지방본부가 창립하였다. 조선지방본부에서는 결핵예방사상의 보급, 결핵예방 직원 및 지도자 양성, 결핵에방 모범시설 및 지구의 선정, 건강상담과 집단 검진, 결핵요양소 신축 등을 추진하였다. 요양소는 226만엔의 예산으로 경기도 의정부 금오리(金梧里)에 부지 10만 7천평을 확보하고 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착공하였다.

 한성의사연찬회(漢城醫師硏鑽會)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士總合所)에서 소외된 홍종철(洪鍾哲), 조병근(趙炳瑾) 등은 1910년 3월 25일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師總合所)를 따로 창립하였다. 양 단체는 같은 내용의 사업, 즉 위생에 관한 사업, 의약에 관한 사업, 의학강습에 관한 사업 등을 경쟁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師總合所)는 한의학과 양의학을 조화하여 의계의 면목을 주출(做出)할 목적으로 한성의사연찬회(漢城醫師硏鑽會)라는 명칭의 강습회를 설립하고 12월 초 내무부에 인허를 청원하였다. 한성의사연찬회는 1911년 의학교육을 위한 신구의학강습소(新舊醫學講習所)를 부설하고 강습생을 모집하여 9월 20일 개학하였다. 이곳에서는 신의학으로 해부, 생리, 병리, 내과, 외과, 진단, 세균, 약물, 부인, 산과를 강습하였고, 구의학으로 대인, 소아, 부인, 외과, 침구 등을 교습하였다. 구의학 강사로는 홍종철(洪鍾哲), 서병림(徐丙琳), 원용삼(元用參), 김현정(金顯貞), 김해수(金海秀), 장기학(張起學), 이완규(李完珪), 신의학 강사로는 최국현(崔國鉉), 박용남(朴容南), 김수현(金守鉉), 강원영(姜元永), 지성연(池成沇), 강병옥(康秉鈺), 박계양(朴啓陽), 강창오(康昌悟) 등이 활동하였다. 강습소장은 이해성(李海盛), 감독은 조병근(趙炳瑾)이 담당하였다.

 산파
조선에는 분만을 도와주는 산파라는 직업이 없었다. 1876년 개항 후 일본인 이주자들이 증가하면서 소수의 일본인 산파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식민이주정책에도 큰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1914년 7월 4일 조선총독부령 제108호로 <조선산파규칙>을 반포하였다. 산파는 경무총장의 면허를 받아야 했는데 조선 산파의 면허는 일본과 약간 달랐는데 일본의 산파들은 각 부현(府縣)에 등록하는 등록제도를 채택하였으나 조선에서는 면허제도를 택하여 조선 내에서는 자유로이 개업을 할 수 있었다. 산파 면허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조선 산파시험에 합격한 자, 조선총독부의원 혹은 도 자혜의원의 조산부과를 졸업한 자, 도 자혜의원의 속성 조산부과를 졸업한 자로서 자혜의원장이 발급한 조산부 적임증(適任證)을 소지한 자, 조선초독이 지정한 학교 또는 산파양성소를 졸업한 자였다.

 이출우(移出牛) 검역
조선에서 일본에 수출하는 소의 경우 일본에서 세밀한 검역이 시행됨에 따라 수출에 지장을 받는 예가 많았다. 그후 협의 결과 조선에서 일본에 수출하는 소는 부산에서 검역을 행하고 이상이 없는 것은 수출을 허가하며, 일본에서는 다시 필요한 정도만을 검역하도록 하였다. 검역은 190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5동(棟)에 그쳤던 우사(牛舍)가 수출 소가 증가됨에 따라 1917년에는 16동으로 늘었다. 본래 검역 일수는 부산에서 9일, 일본에서 9일이었으나 일본으로 이동하는 기간동안 9일이 지나는 경우가 많아 1915년부터는 부산검역소에서만 18일 내지 20일의 계류(繫留) 검역만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출우 검역은 조선총독이 관장하도록 되어있었고, 실무 집행은 경찰관서에서 행하였다. 따라서 검역에 종사하는 직원 역시 관할 경찰관서의 직원이었다.

 콜레라
콜레라는 쥐통, 쥐병, 괴질(怪疾), 회질(恢疾), 진괴(珍怪), 괴질(乖疾), 호열자(虎列刺) 등으로 불리며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에 전파되는 병이다. 전파는, 압록강 연안은 중국 안동현(安東縣)을 통해, 황해도, 경기도는 중국을 통해, 경상도, 전라도는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개 5, 6, 7월, 즉 이른 여름에 발병하여, 7, 8, 9월에 창궐하고, 10, 11, 12월까지 유행했다. 콜레라가 월년(越年)이나 월동(越冬)하는 경우는 없으며, 2년에 걸쳐 계속 발병하는 경우는 칩입 경로나 균형(菌型)이 다른 것이다. 20-40대의 환자가 많으며, 1912년부터 1946년까지 발생한 환자 중 치명율(致命率)이 62%에 달했다. 잠복기는 3일이며 8일 이내에 발병한다. 전염 경로는 환자 접촉, 유행지 여행, 가족 감염 등을 들 수 있고, 매개물로는 환자 음식물, 시장 식품, 야채 해초 생식, 생선 어패류, 음료수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즉 콜레라 균에 감염된 음식물, 음료수를 통해 전염되는 것이다. 콜레라는 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경우이므로 해항검역(海港檢疫)이 가장 중요했다. 이외에는 교통 차단, 환자 조기 발견 및 격리 수용, 검병적(檢病的) 호구조사, 보균자 검색, 해하수(海河水) 사용 금지, 어물 청과물 시장에 대한 단속, 파리 잡기, 예방 접종 등이 시행되었다.

 단발령
단발령은 1876년 국교확대 이후 위생의 논리가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을 시행하면서 내부대신 유길준은 “이번에 단발함은 생(生)을 위(衛)함에 이릅고, 사(事)를 작(作)함에 편하기 위하여 우리 성상 폐하께옵서 정치 개혁과 민국 부강을 도유(圖猷)”하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단발이 정치개혁과 민국부강을 위한 개혁의 논리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상투는 남성, 성인, 결혼 등을 뜻하는 관념, 그리고 사회적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중국인이나 일본인과는 다른 조선인의 수백년 또는 수천년의 역사성이 응축된 상징물이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상투를 자르는 행위를 위생을 증진시키고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행위로 인식하기보다는 사회적, 역사적 정체성을 허물기 위한 사악한 의도로 파악하였다. 결국 단발령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지방 곳곳에서 봉기하였고, 이들은 단순히 단발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단발을 자행한 정부와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단발령은 거두어졌지만, 이제 위생의 논리는 수백, 수천년 동안 내려오던 관습을 일거에 쓸어내리고자 하는 일의 전위를 맡을만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장티푸스
장티푸스는 일제시기 이래 전국에 걸쳐 만연되면서 많은 환자를 내어 임상의사들이 진료시 원인불명의 열성 질환에 대해서는 먼저 장티푸스가 아닌가 의심하였다고 한다. 장티푸스 감염은 질병 통계가 이루어진 후 해마다 그 수가 증가하였으며, 1940년부터는 매년 1만명을 초과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세균학적 지식이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발진티푸스, 재귀열, 말라리아 등을 모두 오진(誤診)한 경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2년부터 1941년 사이에 조사된 방역통계에 의하면 장티푸스는 계절적으로 극성하는 시기가 따로 없지만, 그중에서는 5월이 가장 이환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치명율(致命率)은 위의 시기 동안 14.7%였으며, 연령별로는 소아가 낮고 성인이나 노인이 높았다. 장티푸스는 주로 상수도 감염에서 발병되는 경우가 많은데 1922년 9월 1천여명의 환자가 발생한 평양 유행, 1928년 2, 3월 사이에 역시 1천여명의 환자가 발생한 서울 유행, 1935년 서울 유행 등이 모두 상수도 오염에서 발생했다.

 이질(痢疾)
이질은 여름마다 유행하여 피해를 입혔던 전염병으로 너무나 보편적인 까닭에 오히려 경시하는 분위기 마저 있었다. <이질(痢疾)>이라는 문구가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1202년 고려 신종(神宗) 6년 9월 <前王患痢疾>이 처음이었다. 1913년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이질이 많은 이유는 위생사상의 부족, 파리가 많은 것, 우물의 불비(不備) 및 수질 불량, 음식, 세수, 양치질, 세탁 등에 개천물을 사용하는 것, 대소변 및 오물 처리의 부전(不全), 생수 식용, 신체 불결, 보균자가 많은 것 등에 있었다. 이질은 매년 발생하지만 6월부터 유행의 전조가 보이고, 7, 8월에 창궐하며, 9, 10월 이후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감소하여간다. 대개 1-9세 사이 어린 아이들의 이환율(罹患率)이 높으며 나이가 많아질수록 환자 발생수는 줄어든다. 1912-1941년 방역통계에 의하면 치명율(致命率)은 25.9%였다.

 디프테리아
디프테리아가 우리나라에서 언제 처음으로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서양의학 도입 이전에 인후병(咽喉病)으로 불리던 병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프테리아가 대개 편도선, 인두, 후두, 비강(鼻腔) 등에 병변을 일으키는 급성 세균성 질환이기 때문이다. 디프테리아는 1년 중 겨울에 빈번히 발생하는 것으로, 10월부터 환자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12월부터 4월 사이에 극성기를 이루며, 5월 이후부터 감소한다. 공기 전염이므로 밀폐된 공간에 밀집된 조건에서 가장 전파가 유효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주로 10세 이하 어린이, 특히 1-4세 사이의 어린이가 환자의 60%를 이루는 소아성 전염병이다. 치명율(致命率)은 1912-1941년 사이의 통계에 의하면 27.5%였고, 병소(病巢)별로는 인두형(咽頭型)이 낮고 후두형(喉頭型)이 높다.

 발진티푸스
우리나라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매우 큰 유행을 일으켰던 발진티푸스는 DDT와 린데인 등 살충제의 도입과 테트라사이클린과 같은 유효한 항생제가 들어오고,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목욕과 세탁을 자주 하게됨에 따라 점차 소멸하여 1967년 이후에는 더 이상의 발생이 보고되지 않고 있다. 발진티푸스는 몸이를 통해 전파되는데 발진티푸스 환자를 흡혈한 몸이가 다른 사람을 물 경우 그 부위를 긁어 생긴 상처에 감염된 몸이의 대변이 묻으면서 감염된다. 대개 3월에서 6월까지 많이 발생하고 8, 9, 10월에는 가장 적다. 1912-1941년 통계에 의하면 치명율은 11.5%에 달했다.

 성홍열(猩紅熱)
성홍열은 1876년 국교확대 이후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특히 그 발생수가 증가하여 1931-1932년에 최절정에 달했다가 그후 감소하였다. 전종휘는 일본인에게 발생수가 더 높았던 이유를 본래 한국에 존재하고 있던 용연구균(溶連球菌)에 대하여 면역력이 없던 일본인이 이 구균(球菌)에 감염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이외에 성홍열이 일반 가정에서는 발진(發疹) 질병, 특히 홍역과 동일시되어 통계상으로 환자 발생수가 적어진 이유가 아닌가 해석하고 있다. 성홍열은 11월부터 환자수가 많아지기 시작하여 다음 해 5월에 절정에 이르고 그 이후 점차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는 대개 1-4세의 어린이기 40% 이상을 차지하며 나이가 들수록 그 이환율(罹患率)은 떨어진다. 1912-1941년 사이의 통계에 의하면 치명율(致命率)은 34%였다.

 천연두
천연두는 1977년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발병하였고, 세계보건기구에서는 1980년 천연두가 사라졌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인류가 처음으로 소멸시킨 전염병이 천연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연두의 속명(俗名)으로 <제구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질병이었으며 질병통계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1920년 대유행이, 1933년과 1941년에는 작은 유행이 있었다. 해방 후 1946년에 2만여명의 환자가 발생하는 대유행이 있었고, 1948년을 거쳐 1951년에는 보고된 환자수만 해도 4만여명에 이르는 대유행이 있었다. 이후 계획적인 종두접종으로 환자수가 적어져 1959년에 마지막 환자가 보고되었다. 천연두는 2월부터 5월 사이에 극성기를 보이며, 8월 이후 점차 소멸되어 간다. 환자는 5세 미만이 가장 많은 소아성 질병이며, 1912-1941년 사이의 통계에 의하면 치명율(致命率)은 27.8%였다.

 성누가병원(낙선시병원(樂善施病院))
1890년 9월 29일 코프 주교와 함께 제물포로 내한한 랜디스(E. B. Landis)선교사는 전세낸 집 방 한칸을 임시진료실로 개조한 후 10월 11일 첫 환자를 보았다. 1891년 성누가의 날인 10월 18일 외국인 거류지 외곽에 정식으로 입원환자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개원 한 것이 성누가병원이었다. 1897년 안식년을 마치고 선누가병원에 복뒤한 랜디스는 새 병원 건축을 추진하다가 과로로 1898년 4월 16일 죽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였다. 2대 원장으로는 1898년 9월 7일 내한한 카덴(Carden)이, 3대 병원장으로는 피크(S. J. Peake)가 부임하였다. 1904년 1월 4대 원장으로 웨어(H. H. Weir)가 부임하였는데 다음해 간호사 제퍼슨과 라이스가 부임하여 상임 간호사와 함께 진료를 진행할 수 있었으며, 1904년 11월 병원 증축공사를 시작하여 1905년 6월 12일 4개 병동을 갖춘 병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성누가병원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외국인 의사들이 모두 사임함에 따라 폐쇄되었고, 건물은 성미가엘대학(St. Michael's College)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성베드로병원
1891년 10월 내한한 영국 성공회 소속 여의사 쿠크(Cooke)와 간호사 헤드코트(Headcoth)는 1892년 3월 어린이와 부인을 위한 진료소로 성베드로병원을 열었다. 1895년 7월 2일 병원을 확장, 개원하였다. 1896년 10월 쿠크가 왕실 전의로 가면서 후임으로 알렌(K. M. Allen)이 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알렌은 1900년 성마태병원의 의사 발덕(Baldoc)과 결혼하여 함께 의료사업에 헌신하였다. 성베드로병원의 진료활동은 1893년부터 1901년까지 진료환자수가 1,188건에서 13,673건으로 증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꾸준한 성장을 보였으나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의료사업이 축소되면서 진료환자 수 역시 감소하였다. 성베드로병원에는 처음에 서민층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찾아오다가 1894년부터 상류층 부인들이 내원하기 시작하였다. 성베드로병원의 특징 중 하나는 병원에 버려진 아이들을 성베드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보호, 양육하면서 일종의 고아원을 운영하였다는 점이다. 1904년 영국 성공회에서 의료사업을 제물포에 집중한다는 정책을 결정하면서 성베드로병원은 6월 폐쇄되었고, 교회는 한국인 교회로 사용하게 되었다.

 광주 기독병원
광주에서의 의료사업은 미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윌슨(R. M. Wilson)에 의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1912년 1월 3층으로 이루어진 새 병원이 완공되었고, 가을에는 나환자를 위한 수용시설이 설치되었다. 1911년 이미 외래 환자 수가 1만명을 돌파하였고, 190건의 수술이 이루어졌다. 1912년 현재 5명의 학생들이 병원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한명은 처방전을 작성하고, 한명은 환자를 진찰하며, 두명은 붕대를 감는 것이나 이빨을 뽑는 것 혹은 간단한 수술을 하고 있었다. 1914년부터는 한국인 의사 최주현이 근무를 시작하였고, 1916년에는 윌슨의 조수였던 최영욱이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기도 하였다. 광주 기독병원은 1910년대, 20년대를 거치면서 꾸준히 의료실적이 증가하여 거의 두배에 달했다. 1930년에는 브랜드(L. C. Brand)가 부임하여 병원의 운영을 담당하였다. 1933년 병원이 화재로 인해 전소하는 바람에 큰 곤경에 처하였으나, 광주 주민들의 모금과 미국에서 보낸 기부금으로 병원을 재건할 수 있었다.

 안동 성소병원
1909년 안동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한 미 북장로교 선교사 플레쳐(A. G. Flether)는 1911년 큰 기와집을 구입하여 대기실, 입원실, 응접실, 목욕실, 진찰실 등을 갖춘 진료소로 개조했다. 1914년에는 미국 뉴욕의 쇼플러(A. F. Schauffler)가 기부한 1만불에 힘입어 30*70피트 규모의 2층 벽돌 건물인 성소병원(Cornelius Baker Memorial Hospital)을 건축할 수 있었다. 20개 병상과 남녀로 분리된 진료실, 대기실을 갖춘 성소병원은 당시 미 북장로교 최고의 시설을 갖춘 선교병원이었다. 그러나 플레쳐, 존슨(W. O. Johnson), 언즈버그(Emma Ernsberger), 스미드(R. K. Smith) 등 잦은 의사 교체와 재정 적자로 인해 시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였다. 의사의 부재로 인해 1922년부터 4년동안 폐쇄되었던 성소병원은 1926년 버코비츠(Z. Bercovitz) 부부가 부임하면서 재개되었다. 가을에는 선교사 2세대인 샤록스(E. J. Sharrocks)가 간호사로 임명되어 오고 1927년 전기시설과 엑스레이기가 설치되면서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에는 바우(H. T. Baugh) 부부가 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에서는 종래 대한의원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 10월 1일 통감부 위생부 촉탁이며 원장서리를 맡아왔던 육군 현역 후지타(藤田嗣章)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1년 2월 20일 의육기관으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의 규칙이 반포되었는데 이 강습소에는 의과와 조산과, 간호과를 두고 약학과는 제외되었다. 생도로는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생도 전원을 승계하였고, 평양과 대구의 동인의원(同仁醫院)이 자혜의원(慈惠醫院)으로 편입됨에 따라 이 학교 생도 역시 희망자에 한해 받아들였다. 신입생의 경우 의과는 고등학교 4년을 수료한 자로 한문, 산수, 일본어의 입학시험을 거쳐 75명의 정원을 선발하였고, 연 42주의 수업으로 4개년의 수업을 받도록 규정하였다. 교관으로 전 평양 동인의원 부속의학교 교장 사토(佐藤剛藏)을 의육과장에 임명하였고, 교원 겸 서기에는 사카이(酒井謙治)를 임명하였다. 기초의학교육에는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당시에 초빙되어 해부학을 담당하던 구보(久保武)가, 세균학의 사이토(齊藤謙次)가 각가 해부학과 세균학을 계속 담당하였고, 생리학과 의화학은 사토(佐藤剛藏)이, 수신은 후지타(藤田嗣章)이 담당하였으며, 병리학과 기타 기초 의학은 새로 채용된 현역군의관인 임상의관들에게 부탁하여 강의를 하게 하였다. 임상과목은 조선총독부의원 각 과의 의관들과 신임 현역군의관들이 분담 교육하였다. 1912년 3월 24일 졸업생 6명에게 조선총독부의원에서 의과를 수업했다는 원장 명의의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총독부 지정 의학전문학교
1913년 11월 15일 의사규칙이 공포되면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총독부 지정 의학교를 졸업하거나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의사시험에 합격하여야 했다. 이 규칙은 1914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는데 총독부의 지정을 받지 못했던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출신 졸업생들은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의사시험을 치뤄야 했다. 1921년 신설된 학감직에 임명된 오긍선(吳兢善)은 학칙을 개정하고 교과과목을 개편하는 등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운영을 혁신시켜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문학교령에 부합하는 시설, 교수진, 교수과목, 시간표 등을 구비하고 조선총독부에 대한 교섭에 나서 1923년 2월 24일 사립학교로는 처음으로 조선총독부 지정 학교로 만들었다. 이로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은 의사규칙 제1조 제1항 제2호에 의거하여 무시험 면허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1926년 3월 30일 경성제국대학 총장으로 핫도리(服部宇之吉)가, 의학부장에는 총독부의원 원장이며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시가(志賀潔)가 임명되었다. 의학부에는 해부학 제1강좌 교수 우에다(上田常吉), 제2강좌 조교수 이마무라(今田豊), 제3강좌 교수 즈자키(津崎孝道), 생리학 제1강좌 교수 나카니시(中西政周), 제2강좌 교수 오즈카(大塚藤吉), 의화학 제1강좌 교수 사토(佐藤剛藏), 약물학 제1강좌 교수 오자와(大澤勝), 제2강좌 교수 스기하라(杉原德行), 병리학 제1강좌 교수 도쿠미즈(德光美福), 제2강좌 조교수 고스기(小杉虎一), 미생물학 제1강좌 교수 와다비키(綿引朝光), 제2강좌 교수 고바야시(小林晴治郞) 등 모두 12강좌에 11명의 교수와 2명의 조교수가 일본인으로만 임명되었다. 1924년 예과 입학 당시 정원 80명 중 17명이었던 조선인 중 15명이 1926년 예과 2년 과정을 마치고 의학부 1기로 진학하게 되었다.

 사립의학강습회
1923년 1월 평양 자혜의원에 <사립의학강습회>가 설치되었다. 강습회는 자혜의원 원장인 우치무라(內村安太郞)가 의사시험 준비자를 대상으로 야간에 설립한 것이었다. 강습회는 1923년 4월 지방비로 운영되는 2년제 <도립 평양의학강습소>로 승격되었다. 1926년부터 평양에 의학전문학교를 설치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고, 기성회가 조직되어 조선총독부와 교섭을 계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1929년 4월 30일 교명은 <도립 평양의학강습소>로 하되 입학 자격, 수업 연한 및 내부 시설 등은 전문학교에 준하는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1930년 3월에는 총독부 지정을 받아 조선에서 통용되는 무시험 의사면허 학교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의학전문학교에 준하는 내용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1931년 9월 임상 강당 마저 준공되자 학생들은 <평양의학강습소 의전 승격 학생위원회>를 조직하고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결과 1933년 3월 6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의학전문학교의 개교를 인가하였다.

 평양의학전문학교
1933년 3월 8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76호로 평양의학전문학교의 개교가 이루어졌다. 평양의학전문학교의 입학자격은 중학교 혹은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전문학교 입학자 검정규정에 의한 시험검정에 합격한 자,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규정되었고 수업연한은 4년이었다. 교장에는 평야의학강습소 소장이었던 오이가와(及川邦治)가 임명되었고, 교수로 18명이 임용되었는데 이들은 거의 자혜의원 의관이나 의원이었으며, 기초학 교수 역시 평안남도립 의학강습소로 승격되면서 초빙된 교수들이 재임용되었다. 1933년 3월 28일 평안남도립 의학강습소시절부터 교육받은 학생들이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되었다.

 대구의학전문학교
1933년 3월 6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76호에 의해 대구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장으로는 도립 대구의원장 야마네(山根政治)가 임명되었고, 대구의학강습소의 대지, 건물, 기구 등 일체를 인계받았으며, 대구의학강습소 강사들이 의학전문학교의 해당직에 임명 발령되었다. 그리고 개교식과 제1회 졸업식을 1933년 3월 8일 거행하게 되었다. 임상 각 과에 교수들이 임명되는 가운데 나고야(名古屋)의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박태환(朴泰煥)이 생리학 교수로, 도립 대구의원 외과에 근무하던 서승해(徐昇海)가 외과학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1932년 11월 23일 기공식을 한 교사는 1933년 11월 27일 준공되어 기초학의 각 교실과 사무실이 자리하게 됨으로써 의학전문학교로서 교수진과 교사를 갖추게 되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1928년 5월 15일 조선에 여자의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미 감리교 의료선교사 홀(R. S. Hall)의 제안을 실현하기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기성회는 5월 19일 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발기회를 가지고, 홀을 비롯한 10명의 의사로 이사진을 구성하였다. 이사들은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이전에 강습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강습소장에 홀, 부소장에 길정희(吉貞姬)를 임명하였다. 1928년 9월 4일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개교하였고, 교사는 감리교 선교사 루이스(Ella Lewis)의 집을 이용하였다. 1933년 홀이 귀국하게 되면서 강습소의 운영은 길정희와 김탁원(金鐸遠) 부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김탁원은 미 북감리교의 지원이 없어지는 가운데 강습소 유지를 위한 방안으로 재단법인 설치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을 모색하게 되었다. 1937년 전남 순천 출신의 부호인 김종익(金鍾翊)이 사망하면서 자신의 유산 중 65만원을 여자의학전문학교 설치를 위해 사용할 것을 유언함에 따라 본격적인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1938년 4월 8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 인가가 조선총독부 고시로 공포되었고, 5월 15일 개교식을 가졌다.

 전선의회(全鮮醫會)
1915년 10월 23일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창덕궁에서 개최되자 의생(醫生)들은 전선의생대회(全鮮醫生大會)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의생들이 단합하여 의학회(醫學會)를 조직하고 회보를 발간하며 약재의 수급을 개선할 것을 결의하였다. 11월 7일에는 전선의회(全鮮醫會)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지석영(池錫永), 부회장에 최동섭(崔東燮), 총무에 김수철(金壽哲) 등을 선출하였으며, 12월 28일에는 회보인 <동의보감(東醫報鑑)>을 발간하였다. 1916년 2월 21일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임원의 개선이 단행되었는데 이때 창립 임원들이 전부 배제되자, 창립 임원들이 2월 25일 전선의생회(全鮮醫生會)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통일된 의생들의 조직을 표방했던 전선의회는 창립 4개월만에 전선의회와 전선의생회를 분열된 것이었다. 이후 이들이 심각한 상호 고발을 계속하자 총독부에서는 안녕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양 단체의 해산을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대구 제중원
대구에서 의료사업은 1898년 초 미 장로교 선교사 존슨(W. O. Johnson)이 부임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해 대구제일교회 구내에 <제중원>이라는 진료소를 열었다. 1899년 7월 기구와 의료품이 도착하자 그는 10월 1일 새로운 진료소를 동산동에 마련하고 본격적인 의료사업을 개시하였으니 이것이 대구 동산병원의 전신이다. 대구 제중원에서는 1900년 여름까지 1,756명이 진료를 받았으며 그중 수술은 50건이 이루어졌다. 존슨은 건강이 악화되어 1903년 귀국하였고, 이어 눌(M. M. Null)이 병원의 운영을 담당하게 되었다. 점차 환자수가 증가하자 1903년 4월부터 새 병원을 위한 건축이 시작되었고, 라이트(M. H. Wright)의 헌금으로 1904년 대구동산병원, 즉 라이트기념병원(Wright Memorial Hospital)이 완공되었다. 대구동산병원은 설립 이후 잦은 의료진의 교체로 병원운영이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의사들은 평균 4.3년, 간호사들은 평균 3.2년을 근무하였다.

 광혜여원(廣惠女院)
평양에서 여성 의료사업은 1894년 5월 15일 홀(R. S. Hall)이 남편 홀의 병원 한쪽을 빌어 설립한 부인진료소에서 비롯되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귀국했던 홀이 1898년 다시 내한하여 6월 18일 광혜여원(廣惠女院, Women's Dispensary of Extended Grace)를 개설하였다. 홀은 1899년 죽은 딸을 애도하는 뜻에서 어린이 병동을 개설하였고, 그 한켠에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를 개설하여 맹인들을 위한 치료와 점자교육을 시작하였다. 잠시 서울 보구녀관(保救女館)에서 일하던 홀은 1902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에스더와 함께 광혜여원으로 돌아갔다. 1912년에는 커틀러(M. M. Cutler)가 부임하여 근무하였는데 그녀는 버스나 앰블런스에 약품을 싣고 지방을 순회하는 자동차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녀는 여의사 양성에도 착수하여 1914년 3명의 졸업생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진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미 북감리교 해외여성선교회에서 단독으로 운영하던 광혜여원은 1923년 기홀연합병원과 통합하여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군산 야소교병원
미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는 1895년 5월 군산에 도착한 후 순회 진료를 실시하였고, 1896년 자신의 집에 진료소를 개설하여 환자를 진료하였는데 그해 진료 2,700여건, 간단한 외과수술 600건을 시행하였다. 과로로 귀국한 드루에 이어 1902년 알렉산더(A. J. Alexander)가 부임하였다가 부친의 별세로 귀국하였고, 1904년 다니엘(T. H. Daniel)이 병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05년 미 남장로교 최초의 간호사 케슬러(Ethel Kestler)가 부임하여 의사와 간호사를 갖춘 체제로 운영되게 되었다. 1906년 알렉산더의 기부로 프랜시스 브리지 앳킨슨 기념병원(Francis Bridges Atkinson Memorial Hospital)을 신축하였는데 이 병원은 미 남장로교 최초의 병원급 진료기관이었다. 1907년에는 알렉산더를 따라 미국에 가 루이빌 의대를 마친 오긍선(吳兢善)이 귀국하여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다. 군산이 미곡 수출항인 까닭에 군산 야소교병원에는 다른 선교병원과 달리 일본인 환자들의 비율이 높았던 것이 특징 중 하나였다.

 전킨기념병원
부산에서 의료사업은 1891년 2월 미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 M. Baird)가 상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료사업은 1891년 11월 브라운(H. M. Brown)이 진료소를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브라운이 건강 악화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1894년 어빈(C. H. Irvin)이 부임하여 메리 콜린스 화이팅 진료소(Mary Collins Whiting Dispensary)를 세웠다. 어빈은 환자를 입원시킬 병원 설립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선교부에 지원을 요청한 결과 1901년 새 병원 건축이 시작되어 1904년 전킨기념병원이 준공되었다. 어빈은 스미스(W. E. Smith)와 함께 1910년 나병환자를 위한 수용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09년 부산이 호주장로교 선교지역으로 결정됨에 따라 미 북장로교는 의료사업의 철수하게 되었고 1911년 어빈의 사임을 계기로 전킨병원은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캐롤라인 에이 래드병원(Caroline A. Ladd Hospital)
평양에서 의료사업은 1985년 6월 내한한 미 북장로교 선교사 웰즈(J. H. Wells)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4년 귀국했던 웰즈는 병원 건립 기금을 모집하여 1906년 10월 16일 래드(W. S. Ladd)의 기부금에 힘입은 캐롤라인 에이 래드병원(Caroline A. Ladd Hospital)을 준공할 수 있었다. 평양에는 북장로교의 래드병원과 북감리교의 기홀병원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 병원은 거의 연합기관처럼 운영되어 각 병원의 의사들이 상대방의 진료활동을 도와주고 있었다. 1915년 웰즈가 사임한 후 재정문제로 인해 병원을 폐쇄할 수 밖에 없었던 미 북장로교는 기홀병원과의 합병을 모색하였고, 1919년 8월 1일 통합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1923년 미 북감리교 해외여성선교회에서 단독으로 운영하던 광혜여원이 기홀연합병원에 통합되면서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미동병원(美東病院)
선천에서 의료사업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 샤록스(A. M. Sharrocks)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901년 11월 작은 초가집을 구입하여 임시 진료소로 사용하였다. 1905년 11월 샌프란시스코 청년회에서 보낸 기금으로 새 병원인 미동병원(In His Name Hospital)이 준공되었다. 샤록스는 1919년까지 미동병원에서 근무하다가 건강 악화로 귀국하게 되었고, 후임으로 팁톤(S. P. Tipton)이 부임하였다. 그 역시 건강악화로 1924년 귀국하였고, 3대 원장으로 치솜(W. H. Chisholm)이 부임하여 근무하였다. 초대 원장인 샤록스는 한국인 의사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905년 병원 준공 이래 진료가 계속될 수 있었던 데는 한국인 의사들의 공이 컸다.

 재령병원
미 북장로교 선교사 파이팅(H. C. Whiting)에 의해 1906년부터 시작된 재령에서 의료사업은 1908년 병원 건물이 준공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916년에는 구슬포에 분원을 개설하고 한국인 의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19년 파이팅이 사임한 후 1922년 스미스(R. K. Smith)가 운영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사이 생긴 공백에는 한국인 주태영이 담당하였다. 그는 샤록스(A. M. Sharrocks)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1930년대까지 재령병원에서 근무하였다. 1934년 스미스가 평양으로 이임하자 재령병원은 한국인 의사가 책임 운영하는 체제로 변경되었다.

 덩컨병원(Duncan Hospital)
1907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 눌(M. M. Null)이 청주에 부임하여 의료사업을 전개함으로써 청주 지역의 선교 의료사업이 시작되었다. 눌이 건강 악화로 귀국한 후 1908년 8월 퍼비안스(W. C. Purviance)가 청주로 부임하여 의료사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1909년 뉴욕의 덩컨(J. P. Duncan)이 기부한 금액으로 새 병원을 위한 건축을 시작하였고, 1912년 7월 20일 덩컨병원(Duncan Hospital)이 준공되었다. 20병상 규모로 우물과 수도시설, 수위실을 갖춘 병원이었다. 퍼비안스가 1913년 귀국한 후 1914년 팁톤(S. P. Tipton)이 내한하였지만 일본정부로부터 의사면허를 얻기 위해 일본에 시험 여행을 하는 관계롤 1916년 1월부터 병원에서 진료 업무를 개시할 수 있었다. 1919년에 팁톤이 선천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 후임자인 말콤슨(O. K. Malcolmson)이 부임한 때는 1922년이었다. 그는 그해 11월 소민의원(蘇民醫院)을 개원하다가 1924년 평양으로 임지가 변경되어 청주를 떠났다. 소민의원은 1929년 로우(D. S. Lowe)가 부임할 때까지 의사가 부재한 채 운영되었다. 로우는 1941년 2월 강제소환될 때까지 소민병원을 운영하였다.

 계례지병원(桂禮知病院)
강계에서 의료사업은 1909년 5월 2일 미 북장로교 선교사 밀즈(R. G. Mills)가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나무 창고를 개조하여 진료소를 만들고 첫해 여름동안 300여명을 치료하였다. 1910년 뉴욕의 케네디(J. S. Kennedy)의 헌금으로 동문 밖에 병원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1911년 2월 계례지병원(桂禮知病院)이라는 이름으로 개원을 하게 되었다. 1911년 9월 밀즈가 세브란스의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난 후 비거(J. D. Bigger)가 후임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9월 평양연합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바이램(R. M. Byram)이 근무하였고, 그후 한국인 의사인 박성희가 1945년까지 소민병원을 운영하였다. 박성희의 원장 부임은 한국인 의사들의 역량이 종래 선교사들의 순회진료에 조수로 참가하던 수준에서 병원을 독자적으로 운영할만큼 증대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순안병원(順安病院)
제칠안식일 교회의 의료사업은 1908년 러셀(Riley Russel)이 평안남도 순안에 먼저 내한했던 스미스(W. R. Smith)의 집에 진료소를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09년 서울로 부임하는 샤펜버그(Scharffenberg)의 집을 매입하여 진료소를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1913년, 1920년에는 안식일 교회의 헌금으로 병원의 개축할 수 있었다. 러셀은 1922년까지 순안병원에서 근무하였으며, 1923년 후임으로 숄즈(H. E. Scholes)가 부임하여 하루에 18회의 수술을 하는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숄즈는 부인의 신병으로 귀국하고, 1926년 1월 후임자 헤이즈머(C. A. Haysmer)에 의해 병원 업무가 재개되었다. 헤이즈머는 1926년 6월 자신의 과수원에 사과를 따먹으러 들어온 12살 짜리 소년 김명섭의 이마에 염산으로 <됴뎍>이라는 글씨를 써넣어 흉터를 남김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는 불씨를 제공하였다. 이후 왓츠(R. S. Watts), 버트카(L. H. Butka) 등이 병원의 운영을 담당하다가 1929년 루(G. H. Rue)가 부임해왔다. 그의 재임 기간동안 순안이 북쪽에 지우쳐 의료사업과 선교사업에 불리하다는 안식교 평의원회의 결정이 내려졌고, 1932년 9월 루는 서울로 이주하여 경성요양원을 개원하였다. 이후 순안병원은 한국인 의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조선총독부의원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9월 30일 칙령 제368호로 통해 종래 대한의원을 폐지하고 조선총독부의원을 개원하였다. 초대 원장으로는 일본 육군 군의감(軍醫監) 후지타(藤田嗣章)이 임명되었고, 외과 및 의육과(醫育課) 조교인 강원영(姜元永), 오일상(吳一相)을 제외하고는 의관, 교관, 사무관, 약제관, 의원, 서기, 교원, 조제수, 조수, 통역생 등 병원의 주요 직원이 모두 일본인으로 임명되었다. 총독부의원의 관제에 따르면 직원은 원장, 진료를 담당하는 의관(醫官)과 의원(醫員),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과 교원, 사무를 담당하는 사무관과 서기, 약품 및 의료기기를 관리하는 약제관과 조제수(調劑手)로 이루어졌다. 임상 진료과로는 내과, 외과, 안과, 산과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피부과의 7개 과를 두었다. 총독부의원에서 이루어진 진료는 크게 보통환자 진료와 시료환자(施療患者) 진료로 나뉘었으며, 한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등 수가제를 실시하였다.

 치과의사 시험규칙
치과의사 시험규칙의 내용은 치과의사시험을 매년 1회 시행하고, 시험과목은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 제1부에서는 해부학(조직학 포함), 생리학, 약리학, 병리학(세균학 포함), 구강외과, 치과치료학, 치과기공학 등의 필답시험을 치르고, 제2부에서는 구강외과학, 치과치술학, 치과기공학에 대한 실기시험을 실시하며, 제2부 시험은 제1부 시험에 합격한 자에 한한다는 것이었다. 시험 자격은 3년 이상의 치과학교를 졸업한 자, 5년 이상의 치과의술을 수업한 자로 제한하였다. 치과의사 시험규칙이 공포된 후 1921년 10월 9일 제1회 시험이 실시되어 40명이 지원자 중 6명이 합격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중 조선인은 고상목(高相穆)이 합격하여 등록번호 제16호로 치과의사면허를 발부받았다.

 특별의학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은 교육연수에서 차이가 있었다. 당시 일본인은 5년제의 중학교를 졸업한 자들이었고, 조선에서 중등교육은 4년제 고등보통학교였으므로 1년의 수학연수 차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수학연수의 차이는 일본인 학생들이 불만을 가지게 하는 요인이었으며, 조선총독부에서는 그 불만을 해소하고자 일본인 학생을 위한 특별의학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교과 과목 및 교수 시간표 역시 조선인 학생에게는 <시간표 갑>을, 일본인 학생에게는 <시간표 을>을 적용하였는데 시간표 갑과 시간표 을은 독일어, 수학, 물리학, 해부학, 조직학 등에서 2-4시간의 차이를 보였다. 이 차이는 1920년 8월 조선인 학생들이 수학과 물리학 시간을 일본인 학생과 동등하게 적용해달라는 요구를 하게되는 요인이 되었다.

 유행성뇌척수막염(流行性腦脊髓膜炎)
1924년 법정 전염병으로 고시된 이후 1934-1935년 사이에 유행하였고, 1944-1945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대유행이 되었다. 페니실린 등 각종 항생제가 사용된 이후에는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통계에 의하면 대개 2-5월 사이, 즉 봄에 유행한다. 전체 환자 중 15세 이하가 69.4%, 5세 이하가 41.4%를 차지하는 소아 질환이다. 1924-1941년 통계에 의하면 치명율(致命率)은 52.5%에 달한다. 특히 5세 이하와 노인의 치명율이 높았다. 1976년 전염병 예방법 개정시 수막구균성 수막염으로 개칭되었다.

 경성치과의학교(京城齒科醫學校)
1914년 3월 21일 내한하여 조선총독부의원 치과에서 근무하던 나기라(柳樂達見)는 1921년 8월 20일 치과의사시험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나기라는 경성에서 개업하고 있던 일본인 치과의사들로부터 치과의사시험 준비자를 위한 치과의학강습소의 설립을 권유받던 때였다. 나기라는 1921년 11월 22일 경성치과의사강습소 설립원서를 가지고 경기도청을 찾아가 협의한 결과 당국에서는 치과의학교 설립신청서로 변경하여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나기라는 자신과 도미타(富田儀作)을 창립자로 하는 경성치과의학교 설립인가 신청서를 1921년 12월 26일 제출하였다. 1922년 4월 1일 경성치과의학교가 인가를 받았고, 그로부터 2주일 후인 4월 15일 60명의 신입생을 놓고 개교식을 겸한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경성치과의학교는 야간수업 2년제로 주 20시간에서 22시간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상에서 강의를 진행했으며, 강사는 모두 경성의학전문학교 내지 총독부의원의 의관들로 충당하였다. 교장인 나기라 역시 총독부의원 치과를 겸직하고 있었다.

 도립의원
1922년 일본 정부의 재정 긴축 방침에 따라 도 자혜의원 신축비 30만원이 삭감되고 의원 확장계획이 3년 연기되는 상황에서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으로 인해 사업공채(事業公債)가 중지되고 확장계획 역시 중단되었다. 1924년 일본 정부는 행정 및 재정 정리에 따라 도 자혜의원 중 나요양소인 소록도 자혜의원을 제외한 25개 의원, 1개 출장소를 1925년부터 도 지방비로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조선의원 및 제생원 특별회계법> 역시 1924년에 한해 폐지하였다. 그 결과 1925년 4월 1일 조선도립의원관제가 공포되고 도립의원 규정이 반포되어 종래 도 자혜의원이 모두 도립의원으로 개칭되게 되었다. 이전까지 사용되던 도 자혜의원의 토지, 건물, 물품은 모두 도(道)로 이양되었으며, 조선의원 및 제생원 특별회계법 중에 포함된 유지자금 4,766,000원 역시 양도되었다. 이후 도립의원은 유지자금으로부터 생긴 이자, 의원 수입,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되게 되었다.

 화평당약방(和平堂藥房)
화평당약의 설립자 이응선은 본래 서울 사람이었으나 한약업에 뜻을 두고 당시 청국과의 한약재 무역이 활발하던 인천으로 내려가 중국인과 무역을 하는 한편 한약 건재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1908년 서울 종로로 이사하여 화평당약방을 세웠다. 화평당약방에서 내놓은 약들은 팔보단(八寶丹), 자양환(滋陽丸), 태양조경환(胎養調經丸), 회생수(回生水), 소생단(蘇生丹), 하리산(下痢散), 급체쾌통산(急滯快通散) 등 40여종으로 주로 가정 상비약이었다. 이 중 조양환과 태양조경환은 화평당의 기초를 쌓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태양조경환은 자궁 냉증, 월경불순에 대한 약인데 이 약을 먹으면 아이없는 부인이 아이를 낳게 된다고 하여 급속히 팔려나가기도 하였다.

 사립 피병원(避病院) 설립기성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에서 발병한 대표적인 전염병은 콜레라였다.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이 이루어진 후에도 콜레라는 계속적으로 발병하였고, 1919년, 1920년은 연이은 콜레라의 발병으로 일제의 통계만으로도 수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전염병이 유행하면 몇 가지 병들은 혈청요법으로 치료할 수 있었지만, 그 밖의 대부분의 질병들은 대증(對症)요법이나 자연 치유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염병 대책이란 환자치료 보다는 격리수용에 주안점을 두어, 전염병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는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首都에는 전염병 치료병원으로 1911년 콜레라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건립된 順化院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순화원은 수용시설 부족, 수용환경, 무단적(武斷的)인 경관의 태도 등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적절한 전염병원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1919년에 이어 1920년 다시 콜레라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유일한 전염병원인 순화원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私立 避病院 設立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 10월 7일 서울에 거주하는 인사 300여 명은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私立 避病院을 설립하기 위한 京城府民 私立避病院 設立期成會를 결성하고, 회장에 朴泳孝, 부회장에 閔丙奭, 池錫永, 총무에 鄭應卨 등을 선출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해부학교수 구보(久保武)의 조선인 무시 발언
1921년 6월 1일, 그 전날 해부학교실에서 분실된 두개골 문제를 학생들이 상의하는 가운데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학생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등 다툼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마침 교실에 나타난 구보는 “조선 사람은 원래 성격이 흐릿하고 야만인이라서 분명히 조선인 학생의 행위”라고 폭언을 하고 나갔다. 구보는 해부학시간마다 “조선사람은 해부학상으로 야만인”이라는 취지의 강의를 해서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는데 이런 사건이 터지자 조선인 학생들은 1학년 교실에 모여 두개골 분실이 조선학생의 행위라는 증거와 조산사람의 흐릿한 성격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이 문제는 도리어 학생들의 학칙위반이라는 학교측의 판단으로 퇴학 9명, 무기정학 180명이라는 징계가 내려졌다. 학생들은 억울한 사정을 진정하기 위하여 총독부를 찾아갔으나 현관에 접근도 하지 못하고 도리어 옥외집회라는 이유로 경찰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후 이 문제는 동창을 위시한 학부형들의 적극적인 중개운동과 당국의 여론 조사 결과 감정대립으로 일어난 분요(紛擾)로 규정되어 학교가 퇴학, 정학처분을 취소함에 따라 마무리되었다.

 전조선치과의사회(全朝鮮齒科醫師會)
1916년 10월 19일 일본인 치과의사들로 이루어진 경성치과의사회(京城齒科醫師會)가 창립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 치과의사들만이 참가하였지만 후에는 한국인 치과의사인 함석태(咸錫泰) 등 한국인 치과의사들 역시 참가하게 되었다. 1921년 10월 2일 경성치과의사회의 발기로 전조선치과의사회의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경성치과의사회의 회장과 창립위원, 각 도 대표자 등 23명이 출석하였고 총도굽에서는 무라다 경무국 위생과장 등이 참석하였다. 당시 조직은 각 도의 치과의사회를 통합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참여에 의한 치과의사모임을 조직한 것이었다. 이후 1930년에 이르러 각 지방에 조직된 치과의사회를 단위로 하는 전선치과의사회(全鮮齒科醫師會)가 조직되었다. 이 회는 의사회법에 따라 조직되어 1940년에는 조선치과의사회로서 법적 단체가 되었다.

 한성의사회(漢城醫師會)
한성의사회는 회원 자격을 개원의로 한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경성에 거주하는 조선인 의사들의 친목, 이익단체였다. 이러한 성격은 1935년 창간된 한성의사회보에 실린 <의업에 관한 좌담회>라는 글에서 잘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왕진에 관한 문제, 경쟁관계에 있던 관공립병원에 대한 불만, 병원 경영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이야기되었고 나아가서 의료보험에 관한 문제, 의료 국영화문제까지 논의되었다. 한성의사회가 기본적으로 개원 의사들의 친목, 이익단체이기는 했지만 사회활동도 병행하였다. 회원들은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봉사활동을 하곤 하였다. 특히 1927년 함남 영흥에서 에메틴 주사에 의한 중독사건이 일어났을 때 회원을 파견하여 진상조사를 벌인 일은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일제는 한성의사회를 일본인 의사단체인 경성의사회와 통합시키려 여러차례 시도를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한성의사회는 전시체제가 강화되어가던 1941년 11월 16일 일본인 의사단체와 함께 해산되었다.

 배돈병원(培敦病院)
진주에서 의료사업은 1906년 9월 30일 호주 장로교 선교사 커렐(Hueh Currell)이 진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전도에 주력하면서 진료를 소규모로 진행하였지만 환자가 많아지면 의료사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1911년 11월 북장로교 선교사 맥라렌(C. I. McLaren)이 진료에 동참하였다. 1910년 6월 입원실을 갖춘 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계획안이 선교부에 의해 인가를 받았고, 1913년 6월 50병상 규모의 배돈병원(培敦病院, Margaret Whitecross Paton Memorial Hospital)이 준공되었다. 1915년 커렐이 귀국하고 1917년 맥락렌 역시 군의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8년 여의사 데이비스(E. J. Davis)가 내한했으나 일제로부터 공식적인 면허를 취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통영의 테일러(Taylor)가 배돈병원에서 근무하였고 데이비스가 보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8년 테일러가 일본 휴양 중 사망하면서 데이비스가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전시체제기에 돌입하면서 선교병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데이비스는 병원장을 사임하고 1941년 4월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그 이후 병원의 운영은 한국인 의사가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의사협회(朝鮮醫師協會)
조선의사협회는 1930년 2월 21일 조선인 의사, 치과의사들을 성원으로 하여 창립되었다. 창립 총회에는 경성과 지방의 의사 70여명이 참석하였고, 조선의학계의 발전, 조선민중의 위생사상 향상 및 보급, 지식 교환과 상호 친목 등을 회의 목적으로 정하였다. 간사장에는 박계양(朴啓陽)을 선출하였고, 이외에 서무부, 경리부, 사회부의 간사들을 임명하였다. 1930년 3월 6일 간사회를 통해 일반 위생사상 보급과 기관지 발행에 대해 토의한 결과 의학잡지 ≪조선의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의보는 1930년 1권 1호를 발행한 이래 1937년까지 7권 4호를 발행하여 조선인 의사들의 연구 업적 발표와 학술 진흥에 기여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진료소
1921년 3월 내한한 부츠(J. L. Boots)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부임하여 치과학교실의 운영을 담당하였다. 그는 1925년 여름 치과학교실 건물을 따로 건축하고 <치과센터>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치과의사회의 도움으로 기금을 확보한 부츠는 1930년 9월 건축을 시작하였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진 치과 진료실은 1층에 종합접수대, 서무실, X-선과, 현상실, 대학원생실, 재료창고, 특별대기실, 남자화장실, 격리된 시료환자 치료실, 2층에 종합치료실, 대기실, 2개의 치료실, 소독실, 구강외과수술실,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 박물관, 도서실, 여자화장실, 3층에 최식식 장비와 기구를 갖춘 특별 약속환자 치료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츠는 이 신축 건물에 최신 치과 치료대 10대와 27명의 직원을 갖춤으로써 치과질환으로 고통받은 환자를 위해 금은방이 아닌 치과의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했다.

 전라남도 소록도의원 수용 환자 충돌
1932년 초 소록도 수용환자의 도별 분포는 전라도 출신이 384명, 경상도 출신이 366명, 기타 14명이었다. 전라도 환자는 개원 초기부터 있었던 환자가 많았고, 환자 자치기관도 전라도 출신인 최영화(崔英華)가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상도 출신 환자들은 모든 병원 운영이 전라도 출신들에게 유리하게 처리된다고 하여 불신을 품고 있었다. 1931년 초가을 경상도 출신 권종희(權鍾熙)가 병원 규정에 금지된 밀주를 몰래 담근 것이 최영화의 측근에 의해 발각되어 권종희가 강제 퇴원 당하면서 양 지역 환자들의 대립은 깊어져 갔다. 1932년 1월 13일 전라도 출신 김창옥(金昌玉) 등이 노는 방에 경상도 출신 강갑수(姜甲壽) 등이 칩입하여 격투가 벌어져 중경상자가 14명이 생기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원장이었던 야자와(矢澤俊一郞)과 직원들은 양측의 화해를 종용했으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갔고 병원 당국은 결국 주모자들을 강제 퇴원시키기 되었다. 환자들은 이 사건을 주동 인물이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인 것에 비유하여 <경전(慶全)싸움>이라 불렀다.

 최명학(崔明鶴)
최명학은 1898년 3월 15일 최봉익(崔鳳益)의 장남으로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중존리 6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신보통학교(永信普通學校), 영생학교(永生學校)를 졸업한 후 1917년 4월 함흥 제혜의원(濟惠醫院)의 서기로 근무하였다. 1922년 4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별과(別科)에 입학하였고, 1925년 2월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본과로 편입한 후 1926년 3월 26일 졸업하였다. 졸업 후 해부학교실 조수로 근무하던 그는 1928년 4월 쿄토(京都)제국대학 의학부 해부학교실로 유학을 떠났다. 1930년 8월 27일 귀국 후 1931년 1월 강사로, 9월 조교수로 승진하였고 1932년 4월 18일 쿄토(京都)제국대학에 제출한 논문이 통과되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출신으로는 최초의 의학박사였다. 1930년대 후반 학내 사정으로 사임한 그는 함흥에서 최명학 외과의원을 개원하다가 해방 직전 함흥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8년 9월 함흥의학대학장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북한 의학과학원의 원사(院士)가 되었다.

 박정양의 복명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박정양은 일본의 보건의료, 위생제도를 상세히 조사하였다. <일본 내무성 직장(職掌) 사무>라는 보고서에서 박정양은 인구 관리를 목표로 한 일본 중앙의 위생국 조직 및 전국 차원의 위생조직과 함께 그 조직을 규정한 법령과 활동을 상세히 조사하여 복명하였다. 거기에는 환경위생사업, 전염병 관리, 의료인 면허, 약의 제조와 판매, 병원, 사회구호사업 등 근대 보건의료의 거의 모든 측면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시행된 보건의료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을 포괄한 것이었다. 이후 박영효, 김옥균 등은 단순히 제도 소개에서 나아가 보건의료제도개혁과 관련된 자신들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제영신편(濟嬰新編)
이재하(李在夏)는 1889년 강영로(姜永老), 강해원(姜海遠), 조인하(趙寅夏) 등과 함께 대구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우두서를 간행하였는데 그 책이 ≪제영신편(濟嬰新編)≫이었다. 그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이 거의 지석영의 ≪우두신설≫을 발췌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서문에 의하면 그는 1875년 평양에서 계득하(桂得河)와 교류하면서 영국 제너의 우두법에 대해 들었는데 그후 지석영은 일본에서, 최창진(崔昌鎭)은 청(淸)으로부터 그 법을 학습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이재하는 제물(濟物)의 마음을 가지고 이 법을 배워 기호지방에 시술하니 그 수는 거의 일만이었으나 인명을 손상시킨 적은 없다고 적었다. 그리고 다시 교남(嶠南)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우두법을 널리 시술코자 한다고 하였다.

 경무국
1894년 내부에 설치된 위생국이 국내 보건의료행정을 전담하는 최고 기구로서 보건의료, 위생과 관련된 법령의 초안, 보건의료 활동에 필요한 기술과 기구의 지원, 의학교나 종두의양성소와 같은 인력양성기관의 관장을 주업무로 하였다면, 실질적인 보건의료, 위생과 관련된 감시 및 감독활동을 맡았던 기관은 경무국이었다. 민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목적 아래 전염병의 예방과 소독, 검역, 종두, 음식물, 음료수, 의약, 가축, 도살장, 매장지 등의 관리와 감시 등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경찰규정은 마련되었지만 경찰 업무가 제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순검을 포함한 경찰 직원의 배치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위생경찰업무는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이는 새로 설치된 경찰이 주로 정치활동과 관련된 치안업무에 주력했기 때문이었다.

 종두규칙
1895년 10월 7일 <종두규칙>이 반포되었는데 그 내용은 종두 접종자, 종두 시술자, 두묘(痘苗)의 품질 보증과 가격, 종두증명서 작성, 종두기피자에 대한 처벌, 불법 종두 시술행위에 대한 처벌, 종두 종사자의 태만에 대한 처벌 등을 담았다. 구체적으로 소아의 경우 생후 70일부터 1년 이내에 종두를 시술받아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고, 종두 접종 후 8일 이내에 종두의 검진을 받도록 하였다. 만일 종두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1년 안에 재접종을 받아야 했고, 그 다음에도 좋지 않을 경우 3년 이내에 3종(種)을 받아야 했다. 종두를 시술하는 자는 반드시 소정의 졸업증서와 내부에서 치른 시험을 통과한 인허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제한하였다. 두묘와 관련해서는 반드시 내부 위생국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 혹은 내부 위생국의 검정을 거친 것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세브란스병원
1899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제중원장 에비슨(O. R. Avison)은 서울에 40병상 규모의 현대식 병원의 건립을 구상하였다. 1900년 에비슨은 뉴욕에서 열리는 만국선교회의에서 의료선교사업단체간의 우의에 대해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강연에서 “현재 서울에 있는 각 교파에서 파견된 7명의 선교의사가 협동하여 한 병원에서 일한다면 적은 7개 병원에서 하는 일의 몇 갑절을 더 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때 강연을 들은 클리브랜드의 부호 세브란스(L. H. Severance)는 에비슨에게 1만불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에 돌아온 에비슨은 곧 대지 선정과 병원 건립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대지 선정을 방해하는 정부 관리, 기부금의 반을 복음전도사업에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평양 지역 선교사 등에 의해 병원 건축은 지연되었다. 러일전쟁의 발발로 자재 값이 폭등하면서 건축에 어려움이 생겼으나 세브란스의 계속적인 기부로 극복하고 1904년 11월 16일 개원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재선졸업간호부회(在鮮卒業看護婦會)
선교 간호사의 수가 증가하면서 조직체 구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08년 3월 20일 홀먼(Sarah Hallman), 에드몬즈(Margaret Edmunds), 라이스(Maud Rice), 모리슨(Inez Morrison), 쉴즈(Esther Shields)가 다른 다섯명의 간호사와 함께 이화학당에 모여 <간호과업을 촉진시키며 조선간호부양성소의 교육사업을 실효적으로 진행할 방법을 강구>한다는 목적으로 <재선졸업간호부회(Graduate Nurses' Association in Korea)>를 조직하였다. 첫 회장으로는 쉴즈가 선출되었다. 1911년 10월에 <재선서양인졸업간호부회(在鮮西洋人卒業看護婦會)>로 개칭하였다.

 조선간호부회(朝鮮看護婦會)
1922년 4월 개최된 <재선서양인졸업간호부회>는 조선인과 서양인 간호부들의 연합 조직을 결성할 것을 결의하여 1923년 <조선졸업간호부회(朝鮮卒業看護婦會)>를 조직하였다. 회원은 약 50명이었다. 첫 회장으로는 평양연합기독병원의 버츠(Ehtel Butts)가 선출되었다. 연합 조직이 탄생하였지만 재선서양인졸업간호부회는 3년 동안 지속되다가 1926년 4월 완전한 통일에 이르게 되었다. 서양인 간호부들은 자신들의 조직의 <해산이 조선인 간호부들로써 그들의 것인 이 간호부회에 더 많은 취미를 가지게 하겠다는 인식>하에 해산을 결행하였다. 단체의 통일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는데 그것은 국제간호부회에서 회원권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조선졸업간호부회의 모임은 조선어와 영어가 병용되었고, 회록 역시 조선어와 영어로 각기 기록되었다. 통일 조직의 첫 회장으로는 쉐핑(E. J. Shepping)이 선출되어 1933년까지 활동하였다.

 보구녀관 간호부양성소
1902년 미 북감리교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한 에드몬즈(Margaret Edmunds)가 내한하였다. 그녀는 조선에 간호부양성소를 창설할 목적으로 파견되어 1903년 보구녀관(保救女館) 내에 간호부양성소를 창립하였다. 양성소의 입학자격은 부모의 승낙, 의사의 건강진단, 교회의 추천서, 소액의 입학금, 주야간의 겸행, 학과에 방해되는 가무(家務) 불허 등이었다. 연령은 21세부터 31세까지로 한정하였다. 1906년도 보고에 의하면 양성소에서는 이론적으로는 간호원론, 해부학, 생리학, 위생학, 자양학(滋養學), 중독과 해독법, 열성병, 산과학, 외과, 전염병학 등을 학습하였고, 실습으로서 병실과 진찰소, 수술실에 관한 실습, 개인 간호법, 붕대학, 목욕법, 안마술, 전기학(電氣學), 간호복제법(看護服製法) 등을 배웠다. 학생들의 기숙비와 세탁, 간호복, 책 등은 양성소에서 제공하였다. 처음에는 간호학에 대한 인식 부족, 외출을 꺼리는 여성의 풍속 등으로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창립 후 3년째인 1906년 1월 25일 대관식을 거쳐 1908년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평양 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1906년 12월 1일 평양에 동인의원(同仁醫院)이 개원하였는데 부원장으로 부임한 나카무라(中村富藏)는 이미 1905년 4월부터 대동문 근처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의학을 교육하고 있었다. 초대원장 히라미츠(平松駒太郞)에 이어 1907년 6월 쿄토대학 출신 사토(佐藤剛藏)이 부임하자 나카무라는 평양 동인의원의 부속기관으로 의학강습소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07년 10월 공립 평양동인의원 부속 평양의학교라는 이름으로 의학교육기관이 설치되었다. 의학교 개설 당시 이미 나카무라에게서 의학을 학습하고 있었던 15, 16명의 학생은 의학교로 옮겨갔다. 평양동인의원은 직원의 부족으로 외래환자의 진료에도 힘들었으므로, 의학교는 조선주둔군 군의부장 후지타(藤田嗣章)의 후원 아래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위수병원의 군의관 및 약제사의 출강을 받으며 운영되었다. 그러나 1909년 자혜의원 건립이 계획되면서 동인회는 평양동인의원의 부지, 건물, 의료기기, 약품을 한국정부에 매각하였다. 제1회 졸업생 8명이 배출된 것은 의학교의 폐교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재학생은 당분간 평양자혜의원에 설치한 의육부에서 사토에 의해 교육받을 수 있었으나 1911년 4월 총독부의 의학교육 통합방침에 따라 재학생 7명이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편입조치되면서 의육부 마저 폐지되었다.

 1902년 콜레라 유행
1902년 여름 콜레라가 조선에 칩입하였다. 7월 중순 의주에서 유행이 보고된 이후 점차 콜레라가 남하하자 조선정부는 1899년 반포된 검역정선규칙에 따라 중국에서 오는 배를 검역하기 시작하였고, 한성부에서는 5서(署)내 오예물(汚穢物)을 청소하고, 개천 등을 소독하여 콜레라가 서식할 조건을 없애나갔다. 고종은 궁내부 고문관인 샌즈(Sands)에게 칙령을 내려 방역사무국의 설치를 명하였다. 방역국의 총책임자는 경무사 이용익이 임명되었고 조선에 와 있던 일본, 영국, 미국, 독일의 의사 5명이 사무위원으로 고빙되었다. 8월 2일에는 방역국이 임시위생원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이전 방역국 위원 6명에 조선인 관리 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서양인은 의학 관련사항을, 조선인은 의료진 경호와 단속업무를 담당하였다. 임시위생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방역활동으로 잠시 남하를 멈추었던 콜레라는 9월에 접어들어 서울에 대유행하게 되었다. 고종은 은화 3천원을 내려 방역비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방역 구료위원으로 광제원 임시위원이 다수 임명되어 환자를 구료하였다. 광제원에서는 수구문 밖에 피병원을 설치하여 빈민 환자를 위한 구료를 벌여 나갔고, 의학교 졸업생 18명은 매일같이 각 지역을 순시하면서 방역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말부터는 방역 구료를 위한 위원을 무더기로 임명하여 912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해 내부의 통계에 의하면 콜레라 환자와 사망자 수는 모두 합쳐 12,873명이었다.

 제예규칙(除穢規則)
제예규칙은 한성위생회의 활동을 위한 각 가호의 오예물(汚穢物) 처리 지침이었다. 본문 12개조로 구성된 이 규칙의 내용은 집의 배수로를 축조하거나 오수류(汚水溜)를 설치하고, 쓰레기 수집용기를 비치하며, 분뇨통이 있는 변소를 만들어 관리하도록 하여 각 가호에서 나온 오물을 한성위생회에서 치워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 각 집안에 쓰레기통이나 분료통을 설치하여 모은 오물을 한성위생회 직원이 치워가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쓰레기는 경시청 인부, 분뇨는 퇴비를 만들 민간의 비료상이 치워가고 있었다. 둘째 벌칙조항으로, 규정된대로 오물을 처리하지 않을 경우 5원 이하의 벌금 또는 10일 이하의 구류에 처할 수 있었다.

 경찰의(警察醫)
1905년 12월 의사 야타(矢田房雄)을 최초의 경찰의(警察醫)로 임명한 후 1906년 1월에는 미국에서 공부한 카토(加藤周平)를 내부 위생사무관으로 고빙함으로써 위생경찰의 기초를 닦았다. 1906년 6월 경무고문은 각 도 지부 중 의사가 없는 다섯 곳, 충주, 광주, 전주, 진주, 강릉에 경찰의 5명을 확대 배치하였다. 이들을 배치한 주된 이유는 서양시술을 펼치는 의사가 전혀 없는 곳에서 근무할 경찰과 그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였지만, 전염병자 관리, 종두상황 시찰, 변사상자의 검안 및 구급치료 등의 위생사무도 담당케 하였다. 1907년 7월 의병봉기의 확산과 함께 대대적인 경찰의 증대가 이루어지고, 이때 경찰의도 47명으로 크게 증원되어 이전에 배치되지 않았던 고문지부에 배치되었다. 1908년 6월부터는 경찰의가 경찰과 그 가족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염가로 치료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숫자도 60명으로 늘렸다. 1910년 7월 전국 8도에 자혜의원을 설치키로 하면서 경찰의제도는 폐지되었다.

 여성 종두원
여성종두원은 “한국 부인이 남자 인허원을 접하는 것을 혐오하는 풍습” 때문에 생겨났다. 산파 또는 간호부가 대한의원에서 종두술을 익힌 후 종두인허원 자격을 획득하였는데 1909년 현재 부인 종두인허원은 일본인 21명, 한국인 4명을 포함하여 25명이었다. 이들은 충북, 경북, 전북 3도를 제외한 나머지 10개 도에 1명에서 4-5명까지 파견되었다. 부인 종두인허원의 탄생은 두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는 여성에게 접종함으로써 종두접종자 수를 늘리기 위한 방책으로 이 제도가 탄생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보건활동과 관련하여 간호부나 산파와는 다른 형태의 여성 전문인력이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약품 급 약품영업취체령
일제시기 초기 약품업자들은 단순히 약품 판매뿐 아니라 환자의 용태(容態)를 청취하고 약제를 조제하여 교부하는 등 의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아편 같은 경우는 모르핀주사나 코카인 주사가 만연하는 형편이었다. 일본인 약품업자의 경우에도 모르핀이나 코카인 주사를 조선인에게 시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1912년 3월 <약품 및 약품영업취체령>을 발포하여 약제사, 제약자, 약종상, 매약업자 등 각 약업 관계자들의 업무 범위를 한정하고, 독약, 극약의 판매에 제한을 가했으며, 아울러 매약검사법을 정하였다. 1913년 7월에는 약품순시규칙을 반포하여 일반 약품업자에 대한 단속을 실시하였다.

 청량음료수 급 빙설(氷雪)영업취체규칙
청량음료수 및 빙설은 주로 여름에 판매되는 상품으로 위생상 주의해야할 대상이었다. <청량음료수 급 빙설(氷雪)영업취체규칙>은 청량음료수 및 빙설(氷雪)에 대한 정의, 청량음료수 및 빙설(氷雪)의 함량, 청량음료수 및 빙설(氷雪)을 제조하는 자에 대한 규정, 빙설의 저장소를 설치하려는 자에 대한 규정, 판매하는 청량음료수 및 빙설(氷雪)에 부착하여야 하는 사항, 청량음료수 및 빙설(氷雪)의 채취장, 제조장, 저장소에 대한 규정, 청량음료수 및 빙설(氷雪) 영업에 관련하는 자에 대한 규정, 영업 폐업시 신고 사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량음료수 급 빙설(氷雪)영업취체규칙>에 규정된 내용을 위반했을 때는 50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혹은 과료의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메틸 알코올 취체규칙
메틸 알코올(メチ-ルアルコホル, 木精)은 화학용 약품으로 인체에 해로운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효과를 지니므로 일본인 주조업자(酒造業者)들이 주류(酒類)의 부패방지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메틸 알코올(木精)취체규칙>은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메틸 알코올을 함유한 음식물은 판매하거나 판매할 목적으로 제조, 진열, 저장할 수 없었다. 음식물 이외의 물품이라도 메틸 알코올이 섞인 물품에는 용기에 메틸 알코올이 포함되어 있다고 게재하여야만 판매할 목적으로 제조, 진열, 조장될 수 있었다. 메틸 알코올을 제조, 수입하거나 판매하는 자는 장부를 갖추고 제조, 수입(受入), 양도, 사용, 수입처(受入處), 양도처(讓渡處) 등을 기재하여 경찰관 혹은 위생기술원의 검열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메틸 알코올 취체규정을 위반했을 때는 5백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졌다. 다른 음식물에 대한 취체와 달리 과료나 구류가 없는 것은 다른 음식물보다 메틸 알코올이 더욱 유해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 취체규칙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 취체규칙>의 대체적인 내용은 각지에 산재한 묘지는 우선 존속시키되 후일 필요에 따라 서서히 정리하기로 하되 공동묘지를 설치하여 특별한 사유가 없는 자는 모두 공동묘지 이외에 매장, 개장(改葬)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방공공단체, 예를 들면 거류민단 일본인회, 외국인 거류단체, 혹은 도부면(道府面)에서 허가나 승인을 거쳐 설치된 공동묘지 역시 위에서 서술한 공동묘지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공동묘지의 신설을 비롯하여 기타 준비기간을 필요함에 따라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 취체규칙>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준비가 완료된 도(道)부터 순차적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학교의(學校醫)
1919년 4월 8일 <학교의(學校醫) 규칙>가 반포되면서 관공립학교에는 학교의(學校醫)의 배치가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다. 학교의는 매월 적어도 1회 수업시간 중에 교실, 기숙사를 시찰하여야 했다. 시찰 내용은 환기, 채광, 실내 온도, 난방 장치, 책상, 걸상의 배치, 학교 청결방법 실행, 음료수, 직원 및 학생의 건강상태 등이었다. 학교를 시찰할 때 병에 걸린 직원이나 학생을 발견하게 되면 증상에 따라 결근, 결과(缺課), 휴학 혹은 치료를 시행하도록 학교장에게 신고하여야 했으며, 학교 부근이나 학교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는 필요한 예방 및 소독방법을 강구하고 상황에 따라 학교 전부 혹은 일부를 폐쇄하여야 할 경우에는 학교장에게 신고해야 했다. 이외에도 학교장이 요구할 때 직원 및 학생의 신체검사, 기타 학교위생을 담당하여야 했다.

 조선의사회(朝鮮醫師會) 규칙
조선의사회는 의사위생(醫事衛生)의 개량 발전을 도모하는 단체로서 도지사가 인정한 구역 내의 관공, 사립 진찰소, 치료소 또는 출장소에서 진찰 혹은 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로 구성되었다. 의사회를 구성하려면 5인 이상의 설립위원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회칙안을 가지고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명칭 및 구역, 사무소의 위치, 임원의 종류, 수, 직무 권한, 선임, 해임 및 임기에 관한 규정, 총회 등 회의에 관한 규정, 경비 분담에 관한 규정, 서무 및 회계에 관한 규정 등이다. 의사회는 의사위생에 관해 행정관청으로부터 자문받은 사항, 의사위생에 관해 행정관청에 건의한 사항, 의사위생 연구 및 시설에 관한 사항, 구료(救療)에 관한 사항 등을 시행하도록 규정되었다.

 약품 순시규칙 시행수속
경찰관 혹은 헌병인 감시원이 조사해야할 사항은 면허, 면허증, 허가증, 업무 담당자, 제약품의 종류 및 매약 방법, 독약 비치 장소 및 자물쇠, 매약 정가, 그외 업무에 관련된 장부류였다. 기술원인 감시원이 조사해야할 사항은 약품의 품질 및 성상(性狀), 약명, 약품 저장법, 독약 극약의 구분, 독약 극약의 소량 판매 여부, 독약 극약의 판매 수여(授與)에 관한 증서, 처방전, 조제부, 약품의 소분(小分) 및 봉함, 의료용 약품과 공업용품의 구분, 도량형기, 약의 품질 및 용기, 포장 등이었다.

 산파시험규칙
산파시험은 도장관(道長官)이 시행하며, 5개월 이상 산파 수업을 받은 사람만이 시험 자격을 가졌다. 시험을 치르려는 자는 졸업증명서, 수업(修業)증명서, 산파 혹은 의사 2명이 증명하는 수업(修業)이력서를 첨부하여 도장관(道長官)에게 제출하도록 하였다. 시험 과목은 학술 시험으로 1) 정규 임신, 분만 및 취급법, 2) 정규 산욕(産褥)의 경과 및 신생아 간호법, 3) 이상 임신, 분만의 취급법, 4) 임신부, 욕부(褥婦), 신생아의 질병, 소독 방법 및 산파심득(産婆心得), 실습 시험으로 실지 시험 혹은 모형 시험이 있었다. 학술 시험에 합격한 자만이 실습 시험을 치를 자격을 가졌다.

 순화원내 한방부 설치
1920년 순화원에 반대하여 사립 피병원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주요한 설립 배경 중의 하나가 사립 피병원에서는 병자의 병세나 요구에 따라서 한약(漢藥)과 양약(洋藥)을 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사립 피병원 설립을 위한 기부금 모집 광고에도 “한약(漢藥)으로 시료(施療)하는 사설(私設) 피병원(避病院)”을 설립한다는 문구가 들어갈 만큼 한약 사용에 대한 조선인의 요구는 컸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콜레라에 걸리게 되면 한약국이나 한약방에 가서 증세를 설명하고 약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방(韓方) 역시 전염병에 대해 특별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방의 병용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인이 정서적으로 한방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방을 병용하자는 주장은 일제의 양방(洋方) 일변도 치료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순화원에 한방부를 설치한 것은 조선인들의 한방 선호 경향을 순화원에서도 수용하였음을 의미한다.

 조선 수의사(獸醫師) 규칙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 1일 <조선 수의사(獸醫師) 규칙>을 반포하여 향후 수의사만이 가축 질병에 관련된 진찰과 치료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수의사 면허는 의사법 제1조 제2항 제1호 또는 제2호에 해당하는 자, 관립 혹은 공립 실업학교 또는 조선총독이 그와 동등하다고 인정하여 지정한 실업학교에서 수의학을 학습하고 졸업한 자, 외국의 수의학교를 졸업하거나 외국에서 수의사 면허를 받은 일본인 중 수의업을 하기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부여되었다. 수의사의 진료 대상인 가축은 소, 말, 양, 돼지, 개, 고양이였다.

 의료관계자 직업능력 신고령
국가총동원법이 반포되면서 의사, 치과의사, 약제사, 간호부 등 의료관계자의 직업능력을 신고하도록 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신고는 1938년에 제1회 신고를 마친 후 4년마다 시행하도록 하였다. 신고사항은 성명, 성별, 출생 연월일, 본적, 주소, 병역 관계, 면허번호, 진료 능력, 학력 및 경력, 취업 장소, 취업 형태, 봉급액, 건강상태, 배우자 유무와 부양자 수, 총동원 업무종사에 관한 희망 등이었다. 지방장관은 신고한 의료인에 대해 직업능력을 검사하여야 했다.

 조선 우결핵병(牛結核病) 예방령
축우(畜牛)의 결핵병에 관해서는 조선가축전염병예방령의 일부 조항을 적용하여 검진과 소독을 실시하고, 수입이나 이입(移入)하는 소의 검역과 이환우(罹患牛)의 수이입(輸移入) 정지 등의 취체를 시행해왔다. 그러나 병우(病牛)의 경우 겨우 우유영업취체규칙에 의해 격리를 명령할 수 있을 뿐 그 취체가 불가능하여 병독의 근절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매년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더욱이 매해 우우유의 소비량이 증가함에 따라 젖소를 많이 들여오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결핵병에 걸린 소의 우유를 먹고 결핵에 감역되는 사례를 막기 위해 1939년 10월 1일 <조선우결핵병예방령>을 시행하게 되었다. 예방령이 반포됨으로써 검사방법이 확립되고 중증(重症) 결핵우(結核牛)는 물론 경미한 증세를 보이는 결핵우라도 강제 도살 처분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41년에는 결핵병에 걸린 소 232두를 발견하고 도살처분을 시행하였다.

 의료관계자 징용령
1941년 12월 15일 <의료관계자 징용령>이 반포되면서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의사, 치과의사, 약제사, 간호부의 징용에 관한 내용이 규정되었다. 징용령의 반포로 의료인들은 국가가 행하는 군사상 혹은 군사 원호상 필요한 위생에 관한 업무, 국가나 지방 공공단체 등이 행하는 방공상(防空上) 필요한 위생에 관한 업무, 국가나 지방 공공단체가 행하는 위생에 관한 업무로서 명령으로 정해진 것. 공장사업장 관리령에 의해 정부가 관리하는 공장 사업장 기타 시설 및 후생대신(厚生大臣)이 지정한 공장 사업장 기타 시설에서 위생에 관한 일을 담당하도록 규정되었다. 또한 총동원 업무를 행하는 육해군 부대 및 학교를 포함하는 부서의 대신(大臣), 지방 공공단체의 장, 방공(防空)계획 설정자 또는 공장의 사업주는 의료관계자의 배치를 후생대신에게 신청할 수 있었다.

 의사시험 시험자격 중 특례에 관한 건
<당분간>이라는 조건 아래 의사, 치과의사, 약제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특례가 부여되었다. 의사의 경우 수업연한 4년 이상의 의학교를 졸업하거나 5년 이상 의술을 닦은 자로서 중학교 4년 과정을 수료하거나 그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고 인정된 자, 의업 면허를 가지고 개업중인 자, 예비 시험에 합격한 자, 1942년 12월 31일 이전에 실시된 의사시험 1부 시험에 합격한 자, 1941년 혹은 1942년에 시행된 의사시험을 치른 자가 시험 자격이 부여되었다. 치과의사의 경우 치과의학교 3년 이상의 과정을 이수하였거나 5년 이상 치과의술을 닦은 자로서 중학교 4년 과정을 수료하거나 그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고 인정된 자, 의업 면허를 가지고 개업중인 자, 예비 시험에 합격한 자, 1942년 12월 31일 이전에 실시된 치과의사시험 1부 시험에 합격한 자, 1941년 혹은 1942년에 시행된 치과의사시험을 치른 자가 시험 자격이 부여되었다. 약제사의 경우 3년 이상의 약학교를 졸업하거나 5년 이상 약학을 닦은 자로서 중학교 4년 과정을 수료하거나 그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고 인정된 자, 의업 면허를 가지고 개업중인 자, 예비 시험에 합격한 자, 1942년 12월 31일 이전에 실시된 약제사시험 학설(學說)시험에 합격한 자, 1941년 혹은 1942년에 시행된 약제사시험을 치른 자가 시험 자격이 부여되었다.

 전염병 소독방법 시행심득(施行心得)
전염병 소독을 시행함에 있어 소독 책임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조사하도록 규정하였다. 병명, 계통 및 원인, 발병 일시, 증상의 경중, 발병 후 환자가 있던 방, 발병 전후 환자가 왕래한 장소, 발병 전후 환자집과 왕래하거나 물품을 주고받거나 식사를 한 사람의 유무, 가족 동거인의 수 및 노유부녀(老幼婦女)의 구별, 방의 수 및 넓이, 변소의 수 및 환자나 간호인이 사용한 변소, 간호에 종사한 자, 환자가 사용한 물품, 환자가 사용한 이불류, 환자가 사용한 편기 및 타호(唾壺)의 소재지 및 내용물, 오물을 세척 매몰하거나 투기한 장소, 음식물 찌거기의 유무, 음식물 저장 장소, 기타 오염될 우려가 있는 장소 및 물품, 음료수 및 잡용수(雜用水)의 종류 및 전용(專用) 여부, 주위 상황 특히 하수 관계, 천연두의 경우 종두 시행의 유무 혹은 종두 후 경과 연수, 디프테리아일 경우 혈청 사용 유무 등. 이외에 채변 채취할 때 유의해야할 사항, 환자의 수송시 주의해야할 사항, 소독 시행 순서, 소독을 시행할 장소 및 주의해야할 사항 등이 규정되어 있다.

 입치(入齒)영업 취체규칙
'입치(入齒)영업 취체규칙'에 따르면 입치영업자는 5년 이내의 기간 동안 영업지역을 한정당한 상태에서 면허를 발부받았으며, 입치, 발치(拔齒)외에는 다른 의술에 관한 업무를 할 수 없었다. 다만 진통 등 응급할 때만을 예외로 하였다. 입치영업자는 치과의사와 달리 기능, 시술 방법, 경력에 관련된 광고를 할 수 없었으며, 치과의사와 혼동되는 표시를 할 수도 없었다. 면허를 받지 않거나 면허지역 외에서 입치영업을 하거나, 기타 '입치(入齒)영업 취체규칙'에 규정된 사항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백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태를 부과하는 처벌을 받았다.

 요리옥(料理屋), 음식점 영업취체규칙
<요리옥(料理屋), 음식점 영업취체규칙>는 요리옥이나 음식점 영업을 행함에 있어 준수해야할 각종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영업용 건물의 구조, 영업자들이 준수해야 할 사항, 경찰서장의 명령할 수 있는 사항 등이었다. 요리옥이나 음식점을 경영함에 있어 경찰들의 취체는 강력하여 영업자들은 공중위생, 풍속취체, 기타 공익상 필요한 명령을 하달할 수 있었고, 영업자가 고용인을 고용했을 때는 경찰서장에게 10일 이내에 신고해야 했다. 경찰서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영업자 및 호주, 가족, 고용인의 건강진단서를 제출하여야 했으며, 영업자 조합을 설치할 때에도 규약을 작성하여 경찰서장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요리옥(料理屋), 음식점 영업취체규칙>에 규정된 각종 조항을 위반했을 때는 구류나 과료(科料)의 처벌을 받았다.

 창기(娼妓) 건강검진 시행수속(施行手續)
창기에 대한 건강검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의(公醫), 촉탁 경찰의(警察醫) 또는 경찰의무촉탁(警察醫務囑託)이 실시하였다. 건강검진을 실시할 때는 경찰 혹은 헌병이 진단소에 파견되어, 불참자의 유무, 잘못 나온 사람이 있는지 여부, 질서 및 청결 유지 등을 담당하였다. 건강검진은 크게 5으로 분류되었는데 건강하다고 인정될 때는 <건강>, 전염병 질환으로 격리 치료가 필요할 때는 <입원>, 통원치료가 필요할 때는 <통원>, 전염성이 아닌 질병 또는 임신, 분만 등으로 일을 하기 힘들다고 인정될 때는 <휴업>, 질환이 치료됐을 때는 <치유>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는 매월 5일까지 지난 달에 행한 창기 건강진단서를 경무부장에게 보고하여야 했다.

 박창훈(朴昌薰)
서울 태생으로 1909년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일제 강점 후 경성고등보통학교 제2회로 졸업하였다. 1913년 졸업 후 관리 자격을 얻기 위해 보통문관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토지조사국의 국원이 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세균학교실에서 당시 교장이었던 시가(志賀潔)의 관심 아래 연구를 시작하였다. 외과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가운데 급성 질환인 단독(丹毒), 악급성(惡急性)인 목양봉밀치염(木樣蜂蜜熾炎)과 수료(水療)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1925년 교토(京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내장 외과를 표방하지 않고 항문외과, 즉 치질을 전공하였다. 1932년 한성의사회 부회장, 1933년에는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4월 5일 부산 피난 중 사망하였다.

 유일준(兪日濬)
유일준은 1895년 2월 16일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옥정리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을 마치고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입학하였다. 1918년 졸업 후 경상남도 진주 자혜의원에 취직하여 안과에서 환자를 보았다. 1919년 6월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1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후 총독부의원 소아과에 입국하여 수련을 받았다. 1921년 7월 24일 혈청학의 권위자 올랜후드 교수의 지도를 받고자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으로 유학하였다. 1923년 7월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모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자 하였으나 교수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일본 학위가 필요했기에 1924년 10월 다시 일본 케이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티프스균의 바라치온 현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26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위촉받았고 그해 10월 교수로 승진하였다. 세균학 연구에 종사하던 1932년 8월 12일 한강에서 수영 도중 익사하였다. 해방 후 1947년 8월 12일 동료들이 준비한 추도회가 서울대학 의예과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에메틴주사 사건
일제는 디스토마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에메친 주사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에메친 주사는 치료효과가 좋은 반면에 중독성이 있어, 주사 대상자의 건강상태를 살펴야 했다. 만일 중독증세가 있는 사람에게 계속 주사를 강행할 경우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영흥에서 에메친 주사 접종자 백여명 중 사망이 6명, 중태가 6명, 활동 부자유자가 93명에 이르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조선인들은 일제가 자신들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채 주사를 시행하였고, 이미 주사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도 강제적으로 계속 주사함으로써, 결국 사망자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일제는, 사망한 사람들은 마침 감기가 극성을 부리는 중에 폐렴에 걸려 죽었을 뿐, 에메친 주사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인 의사들로 조직되었던 <한성의사회(漢城醫師會)> 소속 의사들은 영흥의 사망자와 환자들을 관찰한 후 “지금껏 그렇게 괴상한 환자를 본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중독임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일제는 감기로 인한 폐렴이 사망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많이 양보해 보아도 <호의(好意)로 인한 실책(失策)>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질병 치료를 위해 시행된 주사를 둘러싸고, <호의성(好意性)>을 주장하는 일제와, 무단성(武斷性)을 주장하는 조선인이 대립하게 된 것이었다.

 백인제(白麟濟)
1899년 1월 28일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남양리에서 아버지 백희행(白禧行), 어머니 청주(淸州) 한(韓)씨 사이의 4남 3년 중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1912년 오산학교에 입학하였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검거되어 투옥되었으며, 이 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20년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복교하였고, 1921년 3월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1년 4월 총독부의원 외과학교실 부수(副手)로 임용되었고, 1923년 6월 30일에는 총독부의원 외과 의원(醫員)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16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강사로 임명되었고, 1928년 4월 6일 <실험적 구루병(佝僂病)의 연구>로 토쿄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6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가 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임상의학 주임교수였다. 1941년 백인제외과의원을 개원하였고, 1945년 10월 재건된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로 부속병원 원장으로 복직하였다. 1946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3외과학교실 주임교수로 임명되어 1947년 1월까지 재임하였다. 1946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재단법인 병원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과정에서 납북되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개설되고 예과생들이 본과로 올라와 3학년이 되면서 임상실습을 할 수 있는 병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종래 총독부의원을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으로 개편하여 운영토록 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은 총독부의원의 건물, 조직, 시설과 의료진을 모두 흡수하여 1928년 6월 21일 개원식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은 진료과 조직에서 총독부의원 11개과에서 2개과를 증설하여 제1내과, 제2내과, 제3내가, 제1외과, 제2외과, 정형외과, 산과부인과, 피부과비뇨기과, 안과, 이비인후과, 소아과, 신경과정신과, 치과를 운영하였고, 지원조직으로 약제과, 서무과, 간호과 및 산파양성과가 있었다. 당시 각과는 호칭할 때 교수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불렀는데 제1내과는 이와이(岩井)내과로 호흡기분야를 다루었고, 제2내과는 이토(伊藤)내과로 소화기분야, 제3내과는 條崎내과로 신경계 분야를 다루었다. 제1외과는 마츠이(松井)외과였고, 제2외과는 오가와(小川)외과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총독부의원과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같은 관립기관이었지만 운영은 독립적으로 실시하는 별개의 기관이었다. 그러나 부속의원이 없는 경성의학전문학교로서는 총독부의원이 실질적인 부속병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자 총독부의원장이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을 겸임하고, 임상 교수에는 총독부의원의 의관(醫官) 및 의원(醫員)들이 교수 혹은 조교수로 겸직하고 있었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교사(校舍) 역시 총독부의원에서 1, 2백미터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어 임상실습에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개정된 조선교육령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고 총독부의원이 경성제국대학의 부속의원으로 이관되자 경성의학전문학교는 학생들이 실습할 병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는 적십자병원을 부속의원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적십자병원과 관련 부서인 내무국의 반대로 실패하고, 결국 학무국의 주선으로 경복궁 맞은 편 소격동(昭格洞)을 부지로 선정하고 병원 설립에 착수하였다. 병원은 2층 건물에 1백 병상과 임상 각과의 진료실을 갖추고 1928년 11월 29일 개원식을 거쳐 개원하였다.

 이정애(李貞愛)
이정애는 1925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930년 하와이 퀸스병원(Queen's Hospital)을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간호부양성소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녀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현대 간호학을 당당하는 교수 및 부간호부장으로 세브란스에 부임하였다. 그녀는 세브란스에서 간호윤리와 간호사를 담당하였는데 개방적인 교수법으로 학생들의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능력을 개발하는데 힘쓴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주로 실습교육에 치우친 간호교육에서 이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현대 간호교육의 개선을 위해 주력하였다.

 김탁원(金鐸遠)
김탁원은 1915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삼일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된 관계로 동기생보다 2년 늦은 1921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다른 사람들이 전공하지 않은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정신신경과를 목표로 도일하여 동경에 있는 국립 정신병원에서 1년간 근무하였다. 다시 중국 북경으로 가서 1년간 협화(協和)대학병원 등에서 연구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체류하는 동안 만났던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생 길정희(吉貞姬)와 결혼하고 서소문동에 내과 정신병 질환 전문병원을 개원하였다. 1927년 3월 함남 영흥에서 에메틴 주사 중독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인 의사단체인 한성의사회에서 조사위원을 파견하였는데 김탁원은 박승목(朴勝木), 정석태(鄭錫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1931년에서 1932년 한성의사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부인 길정희와 함께 조선인 여의사 교육기관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28년 5월 19일 조선인 여의사 육성을 목적으로 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 기성회가 개최된 곳인 김탁원의원이었다. 1933년 미 감리교 선교사 홀(R. S. Hall)이 귀국하자 김탁원 부부가 여자의학강습소의 운영을 담당하였고, 이 강습소가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 1944년 3월 16일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이영춘(李永春)
이영춘은 1903년 10월 16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귀성면(貴城面) 대령리(大領里) 84번지에서 이종현(李宗鉉)과 김아옥(金娥玉)의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평남 광량만공립보통학교(廣梁灣公立普通學校),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모교의 생리학교실 조수(助手)로 있다가 1933년 병리학교실 강사로 임용되었다. 1935년 전북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마모토(熊本)농장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하여 농장 소속 소작인 2만명에 대한 치료를 담당하였다. 1935년 8월 일본 쿄토(京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개정면을 중심으로 농촌위생사업과 학교위생사업에 매진하였고, 1948년 <개정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부임했다. 197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1980년 11월 25일 기관지 천식으로 사망하였다.

 오긍선(吳兢善)
1878년 10월 4일 충남 공주군 사곡면(寺谷面) 운암리에서 해주 오씨 23세손으로 출생했다. 1896년 상경하여 내부 주사(主事)로 임용되었다가 사직하고 10월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간사로 협성회에서 출간하는 ≪협성회보≫의 창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1년 군산(群山)에 내려가 알렉산더 선교사의 한글 선생이 되었다. 1902년 알렉산더의 주선으로 미국에 가 센트럴데학에서 교양과정을 마친 후 1904년 켄터키주의 루이빌대학에 편입하여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1909년 루이빌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동안 피부과학을 연구하였다. 1907년 10월 미 남장로교 선교사자격으로 귀국하여 군산 야소교병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0년 군산을 떠나 광주 야소교병원장으로 취임하였고, 1911년 9월에는 목포 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하였다. 1912년 세브란스의학교 교장 에비슨의 초청으로 세브란스의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피부과학을 강의하였다. 1921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감, 1934년에는 에비슨의 후임으로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1년 이영준에게 교장을 물려주고 퇴직하였다. 1962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1963년 5월 18일 사망하였다.

 상애원(相愛院)
1909년 미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어빈(C. H. Irvin)은 부산 감만동에 나병원을 마련하여 12명을 입원시킨 후 1910년 영국 구라회(British Leprosy Mission)의 지원을 받아 정식 개원을 하였다. 1909년 부산이 호주장로교의 선교구역으로 결정되면서 부산의 나환자 사업은 1911년부터 호주장로교와 미 북장로교가 나환자위원회(Leper Comittee)를 구성하여 연합으로 운영하다가 1916년부터 호주장로교의 단독 운영으로 변하였다. 1912년 5월부터 멕켄지(J. M. Mackenzie)가 원장이 되면서 나병원을 상애원(相愛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1930년은 멕켄지가 봉사한지 20년이 되는 해로서 수용환자들은 그를 기념하는 철문을 설립하였다. 맥켄지는 1938년 은퇴하였고, 후임으로 트루딩거(M. Trudinger)가 통영에서 옮겨와 근무하였다. 상애원은 1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면서 시작하였는데 1919년에는 150명, 1928년에는 500명, 1934년에는 600명을 수용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수용된 나환자들은 각 방별로 땅을 분배받아서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농사지었다. 전시체제에 돌입한 1940년 말 총독부는 나환자 수용소 부지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애원을 폐쇄하였고, 환자 중 일부는 여수 애양원으로 옮겨졌다.

 최영태(崔永泰)
최영태는 1909년 5월 28일 전북 옥구군(沃溝郡) 대야면(大野面) 지경리(地境里) 802번지에서 최주현(崔周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1926년 졸업하고 그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모교 세균학교실에 입국한 최영태는 경성제국대학 미생물학 교실의 나카무라(中村)교수의 지도 아래 세균학 연구를 진행하였다. 1939년 그는 오사카(大阪)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그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미생물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의 전공은 주로 결핵균과 장티푸스균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연구는 단지 학술적인 측면에만 머무르지는 않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만주에서 발진티푸스 방역 책임을 당당하였고, 1945년 해방 후 과도정부 보건후생부 방역국장을 역임하였다. 업무 수행과정에서 보건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필요성을 느낀 그는 미국 미네소타대학 보건대학원에 유학하여 산업보건학을 전공하였다. 1948년 귀국한 그는 대한민국 보건부 초대 방역국장으로 임명되어 각종 전염병 방역사업에 전염하였다. 1949년 12월 16일 대한산업보건협회가 창립되자 총무를 맡았다. 1952년부터 1964년까지 대한석탄공사 보건관리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광부들의 직업병인 진폐증(塵肺症)을 최초로 보고하였고, 대한석탄공사 내에 진폐증 보상제도를 마련하였다. 대한산업보건협회 회장, 대한예방의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92년 3월 10일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정구충(鄭求忠)
정구충은 1895년 11월 3일 옥천 소정리(素庭里)에서 출생하여 1913년 한성고등보통학교, 1921년 오사카(大阪)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모교 부수(副手), 조수(助手)를 거쳐 1925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자혜의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하였다. 1925년에는 해주도립의원 외과 과장, 1927년에는 초산도립의원 외과 과장을 역임하였다. 1932년 오사카(大阪)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33년 서울 종로3가에 외과의원을 개원하였다. 1935년 조선인 의사단체인 한성의사회(漢城醫師會) 회장을 하였고, 1945년 해방 후 서울여자의과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대한외과학회 회장, 1959년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6년 12월 8일 사망하였다.

 이학송(李鶴松)
이학송은 평안남도 개천군(价川郡) 북면 염전리에서 부친 이동식(李東植)과 모친 주동옥(朱東玉)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모교 피부비뇨기관 조수로 들어와 연구를 진행하던 중 1936년 동경제국대학 피부비뇨기과로 유학을 떠나 다카하시 아키라(高橋明)로부터 수련을 받았다. 1939년 토쿄(東京)제국대학에서 <웅성 호르몬이 물질대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9년 귀국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부임해오면서 최신의 비뇨기과 기재, 즉 방광경, 요도경, 이물방광경, 쇄석기, 부지, 카테터 등을 사용하여 비뇨기과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43년 세브란스병원장 겸 피부비뇨기과 주임교수가 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비뇨기과로 전직하여 후학양성에 힘썼으며 1954년부터 1966년까지 12년동안 비뇨기과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81년 5월 16일 사망하였다.

 소록도 갱생원 확장공사
1939년 27만원의 예산으로 소록되 갱생원 3차 확장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동생리 선착장 공사부터 시작되었다. 동생리 연안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접안이 쉽고 또 병사지대에 있어 하역과 운반거리가 짧아 선착장으로 유리한 곳이었다. 공사를 위한 총동원령이 내려져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기동할만한 환자는 모두 출역하였다. 때로는 조수(潮水)에 따라 밤중이나 새력에도 대낮처럼 밝힌 전깃불 아래에서 간조(干潮)때까지 야간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간호장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작업을 독려하였다. 120여일의 공사를 거쳐 600m의 호안 도로와, 풍랑을 견디기 위하여 돌 한 개의 무게가 1-3톤에 이르는 큰 돌로 쌓여진 면적 500평 높이 4.5m의 하치장이 아무 경험 없는 환자들에 의해 준공되었다. 공사인원은 96,583명이었따. 이외에도 병사, 직원 관사, 창고 등의 증축공사도 1939년 9월 말 마무리되었고, 1939년 10월 26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진행된 부랑 나환자 일제단속을 통해 검속된 1,205명의 환자가 더 수용되었다. 1939년 소록도 갱생원 수용 환자는 5,975명으로 5,770명의 정원을 205명 초과하고 있었다.

 결핵예방 주간
1936년 조선총독부는 결핵예방협회를 만들고, 그 해부터 결핵예방기간을 설정하여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전국적으로 각 지부를 통하여 각종 결핵예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에는 각 도 경찰부와 경찰서의 지원 및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각 신문사의 협조가 있었다. 충청남도 결핵예방협회의 경우 대전, 공주, 강경에서 결핵 강연과 영화 상영을 하였고, 대전 내 각 병원에서 3일간 무료건강상담을 행했으며, 다음과 같은 결핵예방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포스터 부착과 선전전단 배포, 객담(喀痰)검사 실시, 결핵예방사상 보급 및 강연회 개최, 교통이용선전, 접객업자 건강진단 및 무료 건강상담 실시, 접객업소과 가정의 침구 및 피복의 일광소독 등이었다. 매년 결핵예방주간이 설정되었고 1939년의 경우 11월 14일부터 5일간을 <결핵예방 국민운동주간>으로 정하고 14일은 도시, 15일은 농촌, 16일은 공장, 17일은 학교, 18일은 각 가정에서 적절한 행사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고병간(高秉幹)
고병간은 1899년 1월 24일 평북 의주에서 고승헌과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주에서 신영소학교, 선천에서 신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 졸업 후 외과학교실에 들어가 러들로(A. I. Ludlow) 교수 밑에서 일반외과 분야를 전공하였다. 2년간 수련을 마친 후 캐나다장로교 선교병원인 함흥제혜병원의 외과과장으로 부임하였다. 1934년 5월 연구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쿄토(京都)제국대학에서 흉부외과를 전공하여 <인체내 항체발생에 관한 연구>로 1940년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7년 4월 모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외과교수로 취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대구의과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1952년 경북대학교 총장, 1960년 연세대학교 총장, 1964년 숭실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에는 폐절제수술을 처음으로 시행하였으며, 1953년에 대한외과학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66년 12월 9일 전국대학총학장회의 석상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11일 사망하였다.

 조선간이보험건강상담소 규칙
<조선간이보험건강상담소(朝鮮簡易保險健康相談所) 규칙>에 따르면 조선간이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조선간이보험 건강상담소에서 건강상담이나 순회 건강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건강상담소에서는 상담 뿐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특수시설이 필요하지 않은 검사나 시험을 행할 수 있었다. 건강상담이나 순회 건강상담은 무료였으며, 우편 상담에도 응했다. 우편 상담을 원할 경우에는 피보험자가 자신의 보험증서 번호, 주소, 성명, 직업 및 생년월일 등을 기재하여 건강상담소로 보내야 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은 1939년 11월 9일 기공식을 거쳐, 1941년 준공되었다. 1941년은 본과생이 3학년에 진학하는 해였으므로 임상교수도 임명되어 임상의학 강의도 시작되었다. 1941년 10월 현재 임상과목 교수는 원장이자 내과장인 나리타(成田夬介), 제1내과 이갑수(李甲秀), 제2내과 이정복(李正馥), 제1외과 정구충(鄭求忠), 제2외과 최상채(崔相彩), 소아과 김덕성(金德性), 안과 김희준(金希俊), 피부과비뇨기과 김성환(金星煥), 이비인후과 한기택(韓基澤), 산부인과 신웅호(申雄浩)였다. 이들은 경성의학전문학교 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으로 총독부의원, 경성의학전문학교 혹은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에서 부수(副手), 조수(助手)로 활동하던 사람들로서 사토(佐藤剛藏)의 추천으로 임명되었다.

 경성제국대학 고지요양연구소
1938년 강원도 평강지방의 전영규(全永圭), 박하룡(朴河龍) 등 유지와 군수, 경찰서장 등 기관장으로 경성제국대학 고지요양연구소 유치기성회가 조직되었다. 박하룡은 협화의원을 개원하고 강원도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요양소 유치와 설립에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경성부립 부민병원장(府民病院長) 노사카(野坂三枝)가 창립위원 책임잘 예비조사 등 준비작업을 하였으며, 전영규(全永圭), 전병렬(全炳烈) 등 지주가 9만평의 땅을 기증하였다.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가 기부한 100여만엔과 대학예산을 합쳐 1941년 요양소 건축공사를 착수하여 1943년 5월 29일 개소식을 가졌다. 노사카 초대 고지요양연구소장, 이하라(井原俊男), 우에하라(上原芳孝), 李基寧 외에 약국장, 서무과장, 간호부장, 10여명의 간호부, 방사선 기사등이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진료동이 건평 약 600평 규모로 2개 동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베란다 겸 일광욕실이 있는 병동에는 약 100개의 병상이 있었다. 입원환자는 경성부민병원, 대학병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부속병원 등에서 고지요양에 적성으로 판명된 환자를 선별하여 수용하였다.

 영동(永同) 구세병원(救世病院)
구세군은 1922년 5월 충남 홍성에 구세약방(救世藥房)을 개설함으로써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이 시약소는 뉴질랜드 여자 선교사 베더스비 부관이 설립했는데 농촌질병을 진료함에 인기가 있어 472명을 진료한 달도 있었다. 1934년 한국 개전 25주년을 맞이하여 구세군 대장 특사 맵(H. Map) 참모총장이 내한하여 초오히를 이끌면서 구세군병원의 설립을 약속하였다. 1942년 4월 구세군 병원이 개원하였다. 총 공사비 25만원, 대지 1만여평에 건평 4백 8평의 3층 근대식 건물로 급수, 난방, 소독, 정화 등 제반 설비가 완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