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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북한연표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북한 점령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전을 시작하였다. 소련군은 10일 웅기와 나진, 13일 청진, 21일 원산에 진주하고 26일에는 평양에 진입하였다. 제1극동방면군 산하의 부대로 북한에 진주한 25군은 치스챠코프 상장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러나 실제 북한에 대한 현지 점령정책은 보로쉴로프에 소재한 상급부대인 제1극동방면군(후에 연해주군관구로 개칭) 군사위원인 스티코프 상장이 책임지고 수행하였다. 현지 점령군인 25군 차원에서는 민정담당 부사령관 직제가 도입되면서 1945년 12월 로마넨코 소장이 이에 취임하였고 그를 중심으로 현지 민사행정이 이루어졌다. 민정담당 부사령관 직제는 1947년 5월 민정청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각 지역에는 경무사령부를 설치하고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소련군은 점령 직후 각 지역에서 조직되어 있던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직을 활용하여 각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1945년 말까지 평남지역의 조만식 등 우익세력이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였던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북한점령정책의 원칙은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훈령에서 제시되었다. 이 훈령에서는 북한지역에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을 수립하고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들>의 존재를 용인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은 북한의 우익 세력이 행정에 참여하고 정당의 결성을 통해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1946년 초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지지여부로 조선민주당의 우익세력에 대한 배제가 이루어지면서 내용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소련의 좌우연립 노선은 북한 사회주의자들의 이른바 <민족통일전선>의 형태로 형식적으로나마 계속 유지되었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과 대비해볼 때 소련군의 점령정책이 가진 특징은 현지 한국인 자치조직의 활용에 있었다. 각 지방 인민위원회의 활용과 함께 중앙차원에서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회의 및 북조선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9월 북한정부의 수립 이후 북한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948년 12월 공식 철군하였다.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17일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북한 지역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결성된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는 저명한 우익 지도자인 조만식(曺晩植) 외 오윤선 장리욱, 김필환, 이윤영, 이주연, 김병연, 한근조, 노진설, 손창윤, 지창규 등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는 산하에 총무, 치안, 재정, 생활, 선전, 교섭 등 6부를 설치하였고 전문부원을 설치하였다. 각 부서의 책임자로는 이주연(총무부장) 최능진(치안부장) 박승환(재정부장) 한재덕(선전부장) 홍기주(교육부장) 이종현(생활부장) 등을 임명하였다.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는 이주연 한재덕 이외에는 모두 우익 인사로 구성되었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공산주의자 16인과 우익인사 16명으로 구성되는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었다.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1945년 8월 27일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소련군의 진주 이후 우익 중심의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공산주의자와 우익이 동수의 비율로 하여 성립하였다.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공산주의자와 우익의 연합정권으로 탄생하였으나 구체적인 정책 시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내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는 토지문제의 해결 방안의 차이였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발표한 3.7제가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에 의해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등 내연하고 있던 갈등은 업무상의 공백을 야기하였다. 이는 11월 11일에 부위원장인 오윤선 김익진 한근조 등 우익인사 일부의 사퇴가 수리되면서 상당한 정도의 조직개편으로 이어졌다. 1945년 말까지 유지되던 연합정권으로서의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결국 1946년 1월 5일 모스크바결정에 대한 지지문제로 위원장 조만식 등 우익인사 상당수가 사퇴함으로써 사실상 공산주의자들의 주도 아래 놓여지게 되었다.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 개최
1945년 10월 8일 평양에서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평안남도 31명, 평안북도 15명, 황해도 11명, 함경남도 11명, 함경북도 7명 등 5도인민위원회 대표들이 출석하였으며 치스챠꼬프 사령관 이하 소련군 사령부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1) 농업생산과 식량문제 2) 군수공장을 민수공장으로 개편할 데 관한 문제 3) 금융재정 문제 4) 지방기구의 정비 통일 문제 등을 토의 결정하였다. 특히 이 회의에서는 각 지방주권기관이 유기적 연락과 통일적 보조를 취하는데 필요한 대책들이 논의되었다. 회의에서는 각 지방 인민위원회의 내부 구성을 통일하였으며, 면 리 인민위원회 선거를 계획하였다.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1945년 10월 13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서북5도당 책임자 및 당 열성자 대회>가 개최되었다. 100여명의 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대회에서는 김용범의 사회로 임시집행부 선거, 박헌영에 대한 축전 결의, 소련군정 상업부장 네우메이코프의 국제정세보고, 오기섭(吳淇燮)의 <정치노선과 당의 임무에 대한 보고>, 김일성(金日成)의 <조직문제에 대한 보고>, <지방정권 및 도당 사업강화 문제>와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설치 및 그 위원 선정에 대한 결정, 이영(李英) 최익한(崔益翰) 파에 대한 비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대회에서는 <정치노선확립 조직확대강화에 대한 결정서> <토지문제에 관한 결정서> <좌경적 경향과 그 분파행동에 대한 비판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대회에서 이루어진 결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북한의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의 설치였다. 본래 1국1당을 원칙으로 하는 공산주의운동의 조직원리상 북한만의 독자적 조직의 설치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오기섭(吳淇燮), 정달헌(鄭達憲) 등 일부 국내계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의 독자적 공산당 조직 설치에 반대했다. 결국 1945년 10월 2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도 분국 설치를 정식 승인하였다. 분국(分局)이라는 조직적 형태가 결정된 것은 1국1당 원칙이라는 고전적 당조직 원리를 주장하는 국내계 공산주의자들과 남북분단의 특수성으로 독자적 조직의 설치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김일성 등이 타협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 조직적 형태가 어떻든 간에 분국 설치는 한국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이 소련군 주둔 하의 북한지역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한다. 1946년 초반에는 곧 그 조직명칭 또한 북조선공산당으로 변경되었고 1946년 8월에는 조선신민당과의 합 당을 통해 북조선로동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북조선행정국
1945년 11월 19일까지 북한 5도행정의 통일적 지도관리를 위한 북조선행정국이 구성되었다. 산업국, 교통국, 농림국(이순근), 상업국, 체신국, 재정국, 교육국, 보건국, 사법국(조송파), 보안국(최용건) 등 10국이 구성되었다.

 조선노동조합평의회북조선총국
1945년 11월 말 조선노동조합평의회북조선총국은 북한의 노동자 대중조직으로서 남한에서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북한 지부로서 출발하였다. 출범 당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북조선총국은 산하에 14개 산업별 직업동맹을 조직하고 있었다. 1946년 5월 26일 북조선직업총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47년 10월 5이 제11차 중앙확대위원회에서는 조직체계를 개편하여 종래의 행정지역적인 도(道), 시(市) 연맹과 산업별 군(郡)위원회를 없애고 중앙과 각 생산장 초급단체를 직접 연계시키며 그 사이에 약간의 산업지역적인 지구위원회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1947년 9월 1일 현재 17개 산업별 직업동맹과 3,507개소의 직업동맹 초급단체, 38만 5천여 명을 맹원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민주당
해방직후 소련군정의 비공산주의 정당 결성 허용 정책에 따라 북한의 우익세력은 독자적 정당 창건에 나서게 되었다. 평양지역의 우익지도자인 조만식(曺晩植)은 이윤영, 한근조, 김병연, 김익진, 우제순, 조명식, 이종현 등과 협의 끝에 창당 준비작업에 나섰다. 그 결과 11월 3일 창립대회를 가지고 조선민주당이 발족하였다. 발기인 105인이 중심이 된 창립대회에서는 당수로 조만식(曺晩植) 부당수로 이윤영 최용건(崔庸健), 그리고 중앙위원 33인을 선출하였다. 조선민주당은 창립대회일자인 11월 3일(광주학생운동), 발기인 수 105인(조선어학회사건), 중앙위원 수 33인(3.1운동 독립선언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받고 있음을 표방하였다. 조선민주당은 창당직후 소련군정과 공산당의 협력 속에 급속도로 당세를 확장하여 나아갈 수 있었다. 조선민주당의 지지기반은 대체로 기독교도, 중농 이상 지주 부농층이었다고 평가된다. 50년 1월 작성된 <선천군 교회학교 실태조사>에서 선천군 조선민주당 지지자 중 중농층의 비율이 전체 조사대상 1,196 중 47%인 228명으로서 북한 전체 평균인 20.73%를 2배 이상 상회하고 있으며 지주 부농은 무소속을 제외한 23명 중 21인이 조선민주당 지지자였다. 따라서 조선민주당은 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 주장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창립당시 조선민주당의 강령은 소작제도의 철폐가 아니라 <소작제도의 개선, 자작농 창정의 강화>를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에 따른 갈등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운영과정 및 조선민주당 정강 논의 과정에서도 표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말까지 갈등과 협력 사이를 오가며 지속되던 조선민주당과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은 1946년 1-2월 모스크바결정지지 문제를 둘러싸고 소련군정 및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 속에 성격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5일 <조선민주당열성자대회>에서 모스크바결정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는 조만식(曺晩植) 지도부가 당에서 제거되었으며, 2월 24일에는 공산주의자인 최용건(崔庸健)을 당수로 하는 새로운 중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47년 4월에는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하였다. 조선민주당의 독자적 성격은 탈각되고 공산당의 우당(友黨)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기관지로 <조선민보>를 발행하였다.

 조선신민당
조선신민당은 1945년 12월 북한으로 귀환한 연안 조선독립동맹이 명칭을 변경하면서 1946년 2월 16일 성립하였다. 귀국 후 잠시 정국을 관망하던 조선독립동맹은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등과 함께 모스크바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자기 발언을 시작하였고, 이후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과 줄곧 공동 보조를 취했다. 독립동맹은 1월 31일 강령을 개정하고 <민주공화제에 입각한 조선민주공화국>의 건립과 <대기업의 국유화와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토지 재분배>등을 주장하였다. 1946년 2월 16일 정당체제로 전환하면서 현단계의 혁명을 <자산계급성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급전직하로 변화되여가는 국내외 정세에 조응하여> <강유력한 조직체로 건국대업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조선신민당으로 개칭한다고 밝혔다. 개칭 당시 김두봉, 최창익, 한빈, 방우용, 박효삼, 장지민, 이유민, 이춘암, 윤공흠, 김호, 진반수, 양민산, 최영, 백남운, 명희조, 김여필, 김장환 등 17명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신민당은 1946년 6월 26-28일 평양에서 제1차 북조선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1월 25일 한빈(韓斌)을 서울로 파견하여 백남운(白南雲)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동맹경성특별위원회를 결성한 바 있던 조선신민당은 이 대회에서 경성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 당중앙위원회로 개편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신민당은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에 합류하였다.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
1945년 12월 17-18일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북부 조선당 단체들의 사업에 있어서의 착오와 결점에 대하여> 보고를 진행했다.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보고에 대하여 <인민적인 조선민주주의정권 수립>,당원들의 사상적 조직적 통일 강화, 1945년 1월 15일까지 당원증 부여 준비, 노동계급의 우수분자를 당대열에 인입 등 13개 항목의 결정을 채택하였으며, 18일 2일째 회의에서는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책임비서로 김일성을 선임하였다.

 전국농민조합총연맹북조선연맹 결성
전국농민조합총연맹북조선연맹은 북한의 농민 대중단체로 1946년 1월 31일 결성되었다. 전국농민조합총연맹북조선연맹은 1946년 2월 28일-3월 3일에는 북조선농민대회를 개최하여 <토지는 밭가리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토지개혁 실시를 요구하였다. 1946년 7월 11일 제3차 북조선농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북조선농민동맹으로 개칭하였다. 1947년 11월 현재 9,791개의 리 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맹원 총수가 257만 2천여 명에 달해 당시 북한의 정당 사회단체 가운데 최대의 단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창립 초기에는 70%에 달하는 사무원 성분 지도간부의 존재가 조직상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47년 4월 3일-15일 사이에 799개 면 리와 89개 군과 6개 도에서 농민동맹 위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 결과로 리 위원으로 87.33%, 도 위원으로 84.1%가 빈농성분이 선출되었으며 이어 고농(高農) 중농(中農)의 순으로 농민동맹 간부의 구성이 역전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해방이후 조직된 북한의 정식 중앙정권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각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1946년 2월 7일 평양에서는 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과 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및 행정국 각 국장들의 발기로 북조선의 각 도에서 32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예비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지방자치기관 지도부 개선의 과제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조직의 불가피성에 관해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당면과업으로 1) 지방정치기관으로부터의 친일파 반민주주의 분자 숙청 2) 일제 민족반역자 조선인 대지주 토지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 준비기초 세울 것 3) 생산기업소의 회복과 발전 4) 철도 및 수로 운수업의 회복 5) 금융 은행체계와 상업의 정리 6) 기업가 상업가들의 사유자본 발전 및 중소기업 장려 발전 7) 노동운동에 대한 방조와 각 기업소 운수업 공업 제조소 위원회의 광범한 조직 8) 국내의 민주주의적 개혁과 적당한 국민교육제도를 제조함 9) 민주주의적 정신으로 인민들 사이에 광범한 문화계몽사업 전개 10) 모스크바 결정의 진의 해석 등 <10개조 당면과업>을 제시했다. 회의에서는 북한만의 중앙정부 결성에 대한 최종적 결론을 유보하고 다음날인 2월 8일 참가자들의 범위가 보다 확대된 <북조선 민주주의 각 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대표 확대협의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 회의에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할 것에 대한 결정서>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및 도 시 군 인민위원회의 당면과업에 대한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이 회의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및 각급 지방인민위원회가 실천해야 할 정치강령으로 김일성이 제시한 당면과업 10개조에 <식량문제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수립할 것>을 추가하여 11개조 당면과업을 결정했다. 2월 9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위원장 김일성(金日成) 이하 위원 23명이 선출되면서 정식으로 발족하였는데, 그 성원은 위원장 김일성(金日成), 부위원장 김두봉(金枓奉), 서기장 강양욱(姜良煜) 외 무정(武亭), 최용건(崔庸健), 이문환(李文煥), 한희진(韓熙珍), 이순근(李舜根), 이봉수(李鳳洙), 한동찬(韓東燦), 장종식(張鐘植), 윤기녕(尹基寧), 방우용(方禹鏞), 최용달(崔容達), 홍기주(洪箕疇), 현창형(玄昌炯), 이기영(李箕永), 강진건(姜鎭乾), 박정애(朴正愛), 홍기황(洪基璜), 강영근(姜永根), 방수영(方壽永), 김덕영(金德永)이었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1946년 2월 8일 김달현을 위원장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1947년 4월 1일 현재 당원수는 23만 명이었으며, 사회성분이 노동자 17%, 농민 77% 사무원 2.3% 상인 0.9% 기업가 및 수공업자 1.9%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천도교청우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농민이었다. 5월 7일 북조선 천도교청우당은 20개조 정강을 지지하여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 천도교청우당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참여하여 북조선로동당, 북조선민주당과 함께 제도권 3대 정당의 하나로 북한의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등 북한체제의 형성과정에 참여하였다. 1947년 4월 4일 청우당 1차 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1948년 4월 3일 2차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지난 1년간의 사업을 총결하고 향후 사업방침을 토의하였다. 1947년 말에서 1948년 초반에 걸치는 시기에 남북 분단이 가시화되는 시점에 북한의 일부 천도교 세력은 서울의 천도교 세력과 연결되어 북한에서 남북총선거를 요구하는 이른바 <3.1시위재현사건>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신도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우익적 요소가 약화되고 위원장 김달현 체제가 강화되었다. 기관지로 ≪개벽≫을 발간하였다.

 토지개혁법령 공포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북한의 반봉건적 농업구조를 청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토지개혁의 실행은 각 농촌에 조직된 빈농, 소작인, 농업노동자 중심의 농촌위원회가 담당했다. 토지개혁법령에서는 일본인, 친일파 민족반역자 소유의 토지는 물론 5정보를 초과하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의 토지 혹은 모두 소작주거나 계속적으로 소작 주는 토지는 모두 몰수하도록 규정했다. 이에 따라 몰수된 토지는 총 100만 8,178정보로서 당시 북한 전체토지면적 182만 98정보 중 약 55.4%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몰수된 토지는 토지없는 혹은 토지적은 농민, 고용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분배의 방식은 농가별 가족수를 고려하여 그 가족의 노동력을 기준으로 분배되었다. 즉 연령별, 성별 기준에 따라 가족 구성원 각각의 노동력 점수를 산정하고 이를 합하여 농가별 토지분배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1946년 총 농업호수 112만 1천 295호 가운데 약 72만 4,522호가 평균 1.32정보의 토지를 분배받았다. 고용농민 및 토지 없는 농민은 각각 평균 1.31정보와 1.36정보를 소유하는 자작농이 되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모든 토지를 수용한 소비에트형 토지개혁과는 달리, 일본제국주의자와 그 협력자의 토지를 몰수하는 부분과 지주적 토지소유를 해체하는 부분의 두 가지 범주로 크게 구분하여 토지수용의 범주를 설정하는 점에서 동유럽과 같은 인민민주주의형의 토지개혁에 속했다. 그러나 토지 몰수의 대상이 5정보 이상으로 규정되고 또 토지소유 규모에 상관없이 모두 소작주거나 혹은 계속 소작주는 토지는 모두 몰수대상으로 설정한 점에서 동유럽에 비해 급진적인 것이었다. 또한 동유럽의 경우 토지개혁 결과 상당수의 국유지를 확보함으로써 농업협동화의 기반을 마련했는데 반해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을 통해 창출된 국유지가 총 1만 8,935정보로서 전체 경지면적 182만 4,605정보의 1.0%에 불과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자작소농제를 창출하였다는 점에서는 중국의 토지개혁과 유사하였다. 그렇지만 분여된 토지에 대해 매매와 양도를 금지하여 토지소유권에 제한을 가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유럽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한편 토지개혁은 사원, 성당, 교회 등 종교단체에도 적용되어 총 4,124호에서 1만 5,290정보가 몰수되었으며 각 단체당 평균 3.7정보를 몰수당했다. 이로써 북한에서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불교계 천주교계 개신교계의 재정기반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토지개혁의 결과 북한 농촌사회에서 계급으로서의 지주층은 소멸되었고 토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 특히 빈농들은 사회주의세력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토지개혁 이후 농민동맹원은 108만 3,985명에서 144만 2,149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공산당원의 숫자는 46년 4월 2만 6천여명에서 1946년 8월에는 36만 6천여 명으로 격증하였다.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제1차 대표대회
1946년 5월 10일에는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제1차 대표대회가 소집되었다. 해방직후 북한의 여성단체는 부녀동맹, 해방부녀회 혹은 여성동맹 등 다양한 명칭으로 조직되고 있었다. 1945년 11월 18일 북한 6개 도의 여성대표들의 회합에서 이들 각 여성단체를 통합하여 중앙여성동맹을 조직하였으며 이것이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의 모체가 되었다. 1946년 5월 10일에는 제1회 대표대회를 소집하여 그 동안의 여성사업을 총결하고 당면사업을 토의 결정하였으며 국제여성연맹에 가입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는 동시에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으로 그 명칭을 개칭하였다.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은 곧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1차 대회가 개최될 무렵 64만 8천명이던 회원은 1948년 9월 1일 현재 136만 9,188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이는 16-60세의 전 북한 여성의 69%에 해당하는 것이다. 1948년 9월 현재 여성동맹 산하에는 6개의 도위원회, 13개의 시위원회, 89개의 리위원회, 34개의 광산위원회, 38개의 공장위원회, 122개의 기관위원회, 14,226개의 농촌위원회와 86,474개의 초급단체들이 있었다. 전체 맹원은 노동자 5.7%, 농민 75,5%, 회사원 1%, 기타(주부, 상인 등) 17.7%로 구성되어 있다. 당별 분포에 의하면 노동당원 5.9%, 민주당원 1.3%, 청우당 3.3%, 비당원 89.5%였다. 학력별 분포는 고등교육 수료자가 0.03%, 중등교육 1.42%, 초등교육 14.5%, 부분 해독 69.47%, 완전 문맹자 14.58% 등이었다.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1946년 7월 22일 북조선공산당, 조선민주당, 조선신민당, 천도교청우당, 북조선직업총동맹, 북조선농민총동맹,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북조선민주청년총동맹, 조쏘문화협회, 북조선예술총연맹, 북조선불교총무원, 북조선반일투사후원회, 북조선소비조합, 북조선교육문화후원회, 북조선공업기술총연맹, 북조선보건연맹, 북조선건축동맹 등 북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각급 위원회 결성에 대한 보고>를 청취 토의하고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 정당 단체들의 대표 17명으로 구성된 1차 중앙위원회에서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 결성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 결정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탄생, 토지개혁 완수, 노동법령 실시 등 여러 가지 <민주과업>을 완수하였다고 평가하고, 남한 <반동파>와 <변상적 제국주의>의 식민지화 책동에 반대하여 <좀더 강유력한 투쟁을 전개할 필요에 의하여>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를 결성한다고 하였다. 이 결정서에서는 김일성이 발표한 20개조 정강을 <공동한 이론적 근거가 되며 공동한 투쟁강령이 된다>고 지적하였다.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 의장은 북한의 4대 정당 대표들인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일성, 조선민주당 당수 최용건, 신민당 위원장 김두봉,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김달현이 윤번으로 맡기로 하였다.

 북조선로동당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은 양당을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을 창립시켰다. 합당은 7월 23일 조선신민당 김두봉(金枓奉)이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김일성(金日成)에게 합당제의 서한을 보내고 이에 대해 김일성(金日成)이 수락함으로써 가시화되었다. 1946년 7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양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7월 29일에는 다시 양당 중앙위원회 확대 연합회의를 개최하여 합당을 결정하고 당 강령을 채택하였다. 합당은 중앙지도부 수준에서 먼저 합당을 결의하고 하부단위에 동의를 요청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합당 논의과정에서 양당 내부에는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8월 7일 <북조선로동당합당대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시, 군, 면 구단위 조직까지 통합작업을 진행하여 8월 20일에 하부조직 통합이 마무리 되었다. 1946년 8월 28-30일에는 평양에서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북한지역의 6개 도에서 선출된 801명의 대표가 참석한 대회에서는 13개항의 당강령과 41개조의 당규약을 채택하고 당기관지로 노동신문을 발행하기로 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 위원 43명과 검열위원회 위원 11명을 선출하였다. 1946년 초중반경에 있었던 동유럽 공산당의 좌파정당 합당과 맥을 같이 하는 북조선로동당의 창립은 북한의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를 대중적 근거로 하는 단일한 좌파정당의 출현을 의미하였으며, 북조선로동당은 외형상 진보적 대중정당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맑스레닌주의 정당으로서의 기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북조선문학예술가총동맹
1946년 9월 북조선문학예술가총동맹은 북한의 문학, 연극, 음악, 무용, 미술, 영화, 사진 등 각 분야의 예술가들을 포괄하는 대중단체로서 조직되었다. 1946년 3월 25일 이기영(李箕永), 한설야(韓雪野), 박팔양(朴八陽), 안막(安漠), 안함광(安含光), 한재덕(韓載德), 김사량(金史良) 등 주로 문학인들에 의하여 <민주주의민족문화> 수립의 기치 아래 북조선예술총연맹의 이름으로 문학예술 각 부문을 망라하여 출발하였다. 그후 1946년 9월 북조선문학예술인 전체대회 결과, 각 부문별 동맹이 결성되고 이를 기반으로 북조선문학예술가총동맹으로 개조되었다. 문학예술가총동맹은 과거 카프 진영과 그 외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주요 문학예술인을 중심으로 하여 2만여 명의 각 분야의 예술인을 망라하였다. 1947년 12월 현재 지도부 구성원은 위원장 이기영(李箕永), 부위원장 안막(安漠), 정률(鄭律), 서기장 이동규(李東珪), 문학동맹 위원장 이기영(李箕永), 연극동맹 위원장 박영호(朴英鎬), 음악동맹 위원장 이면상(李冕相), 미술동맹 위원장 선우담(鮮于澹), 영화동맹 위원장 주인규(朱仁奎), 사진동맹 위원장 이문빈(李文彬), 무용위원회 위원장 최승희(崔承喜) 등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
1946년 5월 7일 김일성(金日成)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육국은 대학창립준비를 진행시켜 동년 5월 27일 종합대학건설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수차의 위원회를 거쳐 구성된 대학안은 동년 7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결정서로 구체화 되었으며 대학명칭을 <북조선김일성대학>이라 이름지었다. 김일성대학은 舊평양의학전문학교, 평양공업전문학교를 편입시키고 學舍는 舊흥국공업 창생상업 평양사범 및 인민재판소의 건물들을 지정 받아 7월 17일 농학 공학 철도공학 이학 의학 법학 문학 등 7개 학부에 24개의 학과를 설치하고 본과생 1,190명과 예비과생 200명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8월 19일부터 2,265명의 지원자를 전형하여 8월 28일 1,140명의 입학자를 발표하고 9월 1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초대 총장에는 김두봉(金枓奉), 부총장에는 한빈(韓斌)이 임명되었으며 교원 68명으로 출발하였다. 1947년 현재 8개 학부, 39개 학과, 97학급, 3,900명(여학생 455명), 교원 140명으로 발전하였다.

 도(道) 시(市) 군(郡) 인민위원회 선거
1946년 11월 3일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실시를 위해 중앙 1개, 도 6개, 시 12개, 군 90여 개의 선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선거구는 도 452개, 시 287개, 군 2,721개, 선거분구는 1만 2,363개가 조직되었다. 10월 15일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 입후보자는 도 459명, 시 293명, 군 2,769명 등 총 3,521명이 등록을 완료하였다. 선거에는 전 유권자의 99.6%가 투표에 참가하였으며,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추천 후보자에 대한 찬성투표율는 도 인민위원 97%, 시 인민위원 95.1%, 군 인민위원 96.9%였다.

 북조선기독교도연맹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은 1946년 11월 28일 창립하였다. 초기에는 교직자 중심이었으나 1948년부터 일반신도도 가입하였다. 1948년 9월 1일 현재 맹원 수는 85,118명이었다.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은 강령으로 1) 기독교의 박애적 원칙에 기하여 인민의 애국열을 환기하며 조선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건국사업에 일치 협력할 것 2) 민주조선 건국에 해독인 죄악과 항쟁하고 도의 건설을 위하여 분투할 것 3)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진력할 것 4) 기독교의 발전을 위하여 매진할 것 등을 내세웠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
1946년 12월 2일 북조선로동당 제14차 중앙상무위원회는 <사상의식 개혁을 위한 투쟁 전개에 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하고 건국사상총동원 운동 전개를 결정하였다. 15일 북조선로동당 중앙상무위원회에서는 황해도 재령군 농민대회의 애국미 헌납, 양곡수매사업 보장 운동 전개에 대한 호소에 대하여 이를 적극 지지하며 전 북한적 운동으로 조직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북조선통신사
946년 12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통신사>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북조선통신사는 <외국 및 북조선 정보의 전체를 총괄하며 국제사건과 북조선사회, 정치 및 경제생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중앙과 지방의 조선출판물과 라디오에 공급할 목적>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직속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북조선통신사의 사장으로는 한설야가 임명되었으며, 부사장 겸 주필으로는 박무가 임명되었다. 북조선통신사의 구체적인 사명은 1) 외국으로부터 수신한 모든 정보 및 라디오 정보와 북조선 각 지방통신 통괄, 2) 국제사건 및 북한 신민주주의제도의 사회, 정치적 및 경제적 생활에 관한 정보를 적시 각 신문 및 라디오에 보도할 수 있도록 보장, 3) 전항의 제 정보를 북한 중앙 및 지방의 각 문과 라디오 방송국에 공급 등으로 규정되었다. 북조선통신사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및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각 기관을 대표하여 공식보도, 성명 및 반박할 권리를 가졌다. 북조선통신사는 정보 재료를 공급하는 대상인 신문사, 잡지사, 출판기관 및 라디오방송국으로부터 그 요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북조선통신사는 서기국 및 외국정보부, 사회 정치 생활부, 경제생활부, 라디오 수신 및 방송부, 총무부 등의 5부와 사진기자반으로서 구성되었다. 북한 정부의 수립 이후 북조선통신사는 조선통신사로 발전하였다.

 도(道) 시(市) 군(郡) 인민위원회 대회
1947년 2월 17일 개최된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회>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공포 시행해온 법령을 합법화하고 선거에 의한 북한지역의 중앙정부를 구성할 목적으로 평양에서 소집되었다. 대회에는 북한 주민의 직접 투표에 의하여 선출된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 3명중에서 1명씩이 참가하였으며, 북조선로동당 북조선민주당 북조선천도교청우당 북조선직업총동맹 북조선민주청년동맹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등 각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 각 5명씩을 합하여 총 1,186명(이 중 29명 결석)으로 구성되었다. 대회에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발포한 법령들을 만장일치로 승인하였으며, 1947년도 인민경제부흥발전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대회에서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를 대표한 최용건(崔庸健)의 제의에 의해 북한지역의 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인민회의를 창설하였다. 대회에서는 직접선거를 거친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들이 참가하는 가운데 정권을 구성함으로써 정권기구의 대표성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포한 임시법령을 선거로 뽑힌 인민위원들에게서 공식 추인 받음으로써 보다 공고화시키려 하였다. 또한 대회에서는 인민경제부흥발전계획을 수립함으로써 북한 경제의 계획화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조선역사편찬회
조선역사편찬회는 1947년 2월 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결정에 의해 발족하였다. 북한정권의 수립 이후 내각결정 제11호에 의해 교육성 산하 조선역사편찬위원회로 발전하였다. <과학적이며 선진적인 사관에 입각한 진정한 조선민족의 역사를 편찬할 목적으로> 설치된 동 위원회는 백남운(白南雲)을 위원장으로 하여 상임위원 12명과 위원 16명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한국역사의 전사(全史)를 편찬하며 한국사의 사료와 우수한 역사저작을 수집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동 위원회의 초기 연구 활동은 한국근대사의 연구로부터 시작하였는데 한국근대사에 대한 이청원(李淸源) 저 ≪조선근대역사연구≫등의 저작과 김광진(金光鎭) 외 4명의 ≪조선역사연구논문집≫ 등이 발표되었으며 상고(上古)로부터 1949년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사의 체계완성에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기관지 <역사제문제>를 월간으로 발행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 제1차 회의 개최
1947년 2월 21일 북조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인민정권의 최고기관>으로 규정된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은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표대회에서 그 대표 5명마다 1명의 비율로 선출되었다. 당선된 대의원 총 237명의 사회구성을 보면 노동자 52명(22%), 농민 62명(26%), 사무원 56명(24%), 인텔리 36명(15%), 기업주 7명(3%), 상업가 10명(4%), 수공업자 4명(2%), 종교가 10명(4%)이었다. 여성 대의원은 34명(15%)이었다. 북조선인민회의에는 법률을 채택하는 등 입법권과 함께 대외무역, 국가안전 보호, 인민경제계획의 채택, 국가예산문제, 국가기관 검열, 행정구역 변경과 신설,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및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재판소 검찰소등의 국가기관 조직 등 중요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또한 북조선인민위원회 및 사법기관을 조직 선거하며, <전체국가기관 및 그 책임자들의 사업활동에 관한 검열의 규정>문제를 해결할 권한을 가지는 동시에, 인민위원회에 질의를 하여 그 회답을 받을 권한을 보유했다. 또한 북조선인민회의에는 상임의원회가 조직되어 인민회의 소집과 의사진행을 지도하고, 북조선인민회의 휴회 중 북조선인민위원회 간부의 임면, 特赦의 결정과 실시, 외국과의 조약비준, 북조선인민회의가 채택한 법률 집행 등의 권한을 가졌다. 1차회의에서 구성된 상임의원회는 의장 김두봉, 부의장 최용건 김달현, 서기장 강양욱, 상임의원 김책, 강진건, 박정애, 최경덕, 이기영, 김제원, 김상철 등으로 구성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직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한 최고정권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가 창설된 후 그 최고정권집행기관으로서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회의 제1차회의 회의에서 북조선인민회의 규정 제6조 제15항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북조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는 김일성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하고, 그 조직을 위임하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 구성원은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책 홍기주, 기획국장 정준택, 산업국장 이문환, 내무국장 박일우, 외무국장 이강국, 재정국장 이봉수, 교통국장 허유희, 농림국장 이순근, 체신국장 주황섭, 상업국장 장시우, 보건국장 이동영, 교육국장 한설야, 노동국장 오기섭, 사법국장 최용건, 인민검열국장 최창익, 선전부장 허정숙, 간부부장 장종식, 양정부장 송봉욱, 총무부장 김정주 등이었다. 1948년 2월 17일 소집된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 회의결정으로 도시경영국(국장 : 이병제), 선전국(국장 : 허정숙), 민족보위국(국장 : 부위원장 김책 겸임) 등의 부서들이 승격 또는 신설되었다.

 헌법제정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북한에서는 독자적인 정부수립에 나섰으며, 그 가시적 조치의 하나로서 헌법제정사업을 제기하였다. 북한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의 조직을 결정한 지 나흘 후의 시점인 11월 18일 북조선인민회의 제3차회의를 개최하여 헌법제정에 관한 김두봉의 보고를 청취하고 토론을 거쳐 11월 19일 김두봉(金枓奉) 외 31인의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의 조직을 결정하였다.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는 11월 20일 1차 회의를 가지고 김택영(金澤泳), 이청원(李淸源), 김윤동(金潤東) 등 3인의 헌법초안작성위원에게 헌법작성을 위임하였다. 이들에 의해 작성된 헌법초안은 12월 20일-21일 개최된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2차 회의에 제출되어 다듬어졌다. 초안은 1946-1947년 북한이 시행해온 이른바 <민주개혁>의 성과를 성문화하는 원칙에 따라 작성되었다. 그 내용은 주권의 소재를 노동계급이 아닌 <인민>에게 부여하고, 전 산업의 국유화가 아닌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규정하고 생산수단에 대한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는 등 <인민민주주의헌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6-7일 개최된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서는 이 초안을 바로 채택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한편 <전인민토의>를 결정하였다. 약 2개월 반에 걸친 <전인민토의> 결과 수정된 헌법초안은 1948년 4월 28일-29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 회부되어 재차 논의 수정되게 되었다. 내용 수정은 초안의 <인민민주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고 있던 시점에 개최되었던 특별회의에서는 토의 결과 헌법초안에 대해 <찬동>하는 결정만을 채택하고 본격적인 시행은 연기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찬동>된 임시헌법초안은 사실상 북한의 <고정적인> 헌법초안으로서 1948년 9월 소집된 최고인민회의에서 부분적 수정을 거쳐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1972년 이른바 <사회주의헌법>이 새로 제정될 때까지 부분적 개정을 거치면서 북한의 기본법으로 기능하였다.

 화폐개혁 실시
1947년 12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법령 제30호로 <북조선에서 통용할 신화폐 발행과 현행 화폐 교환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6일부터 12일까지 전 북한 지역에서 구화폐 교환이 진행되었다. 교환은 동가비율(同價比率)로 근로소득자에게는 전월(前月) 소득과 동액(同額), 농민은 현물세 완납자 매호당 700원, 전문대학생은 국가급비(國家給費)와 동액, 기타는 호주 500원 18세 이상 그 가족 200원을 한도로 교환할 수 있게 하였으며, 남은 돈은 예금하며 12일 이후의 현금은 무효로 하였다. 신화폐는 1원, 5원, 10원, 100원권이며 1원 미만의 화폐는 그대로 통용시켰다.

 안길(安吉)
안길(安吉)은 1907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출생하였다. 1926년 용정에서 대성학원에 입학하였으나 3년만에 중퇴하고 해성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했다. 1931-32년 추수, 춘황투쟁에 참가했다.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4년부터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여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4연대 정치주임을 역임하였다. 1937년에 제2방면군 제14단 정치주임을 역임하였으며 1938년 제3방면군 참모장이 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에 입국하여 조선공산당의 지방 조직 건설에 참여하였으며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위원, 평안남도당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1946년 7월 보안간부훈련대대부의 온상인 평양학원 창설 당시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동년 9월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참모장을 역임하였고 1947년 12월 13일 사망하였다. 북한 정부에 의해 공화국 영웅칭호와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북조선로동당 제2차 전당대회
1948년 3월 27-30일 북조선로동당 제2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전체 75만 당원을 대표하여 999명이 참가하였다. 28일 2일째 회의에서는 김일성이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사업결산 보고>를 진술하였다. 29일 제3일째 회의에서는 1)김일성의 결산 보고에 대한 토론과 이에 대한 김일성의 결론 발언 2) 2차 전당 대회의 대표 심사 보고와 이에 대한 결정서의 채택 3) 당 규약 수정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4일째인 30일에는 1) 중앙위원회 사업 결산 보고에 관한 결정서 채택 2) 당규약 수정에 관한 결정서 채택 3) 당중앙 지도기관 선거가 있었다. 중앙위원으로는 김일성을 비롯하여 67명, 당 중앙 후보위원으로는 20명, 검사위원으로 7명이 각각 선출되었다.

 4월 남북연석회의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는 남한 단독선거 실시 및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북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의 회합으로 개최되었다. 1947년 중반 이후 남북협상의 필요성은 남한측에서도 중간파를 중심으로 계속 제기되어 왔거니와 1948년 초순부터는 김구 김규식이 북한측에 남북협상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함으로써 남한 정국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연석회의 개최는 1948년 3월 25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26차 회의에서 <유엔 결정과 남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하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하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 사회단체에 고함>을 채택하고 이를 방송을 통해 공개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김구 김규식의 서한 발송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으나, 북한측의 제안은 남한의 광범위한 정치세력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4월 남북연석회의는 대규모 연석회의 즉 4월 19-23일 개최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4월 30일 개최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및 4김회담 등을 포함하는 소범위 연석회의로 구분되어 진행되었다. 북한측의 제안에 따라 개최된 대규모 연석회의에서는 각각 남북한의 정치정세에 대한 보고와 토론을 거쳐 단독선거 반대와 유엔 한국위원단의 철거, 미소 양군의 동서 철수를 주장하는 내용의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전 조선동포에게 격함>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요청서> 등을 채택하는 한편 5.10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한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전국위원회> 조직을 결정하였다. 대규모 연석회의에서 단독선거 반대 입장을 공동 확인하였다면 소범위 연석회의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통일국가 수립문제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4월 30일 개최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서는 미소양군 철퇴 이후 내전 불가, 전조선정치회의의 소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등에 관해 합의하였다. 그러나 결국 예정대로 남한에서 5.10 선거가 강행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서도 곧이어 정부가 수립되면서 4월 연석회의는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진행
1948년 6월 29일- 7월 5일 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는 남한에서 5.10선거가 강행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일정에 오른 조건에서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회의는 6월 29일 - 7월 5일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6월 29일 개최된 예비회의에는 북측에서 16명, 남측에서 17명 등 모두 33인의 인사가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김두봉은 의제로서 연석회의 본회의 의사일정, 회의 보고자 문제, 회의 개회일자 문제 등을 제기하였으며, 남한 단독선거와 조선의 통일 대책 문제, 본회의 보고자 문제 등 두 가지가 의제로 결정되어 논의되었다. 뒤이어 본회의는 7월 2-5일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金日成은 보고를 통해 새롭게 <전변된 정세>에 대응하여 보다 <결정적인 구국대책>으로서 <전조선적인 최고정권기관>을 수립할 것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시헌법>을 시행할 것을 제기했다. 회의에서는 이에 대한 토론을 거쳐 선거에 기초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고 남북 대표자들로 <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8월 25일 북한측 대의원 선거가 진행되었으며 남한측 대의원은 이중선거의 방식으로 대의원을 선출하여 북한 최고정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다. 이 회의의 구성과 결정에 대해 김구, 김규식 등 남측 우익세력은 이 회의가 4월 연석회의에 비해 극소수의 인사들만이 참여하였고 또 그 결정내용이 1차 연석회의의 합의와 배치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으며 따라서 북한정권 역시 단독정부임을 천명하였다.

 최고인민회의 남한측 대의원 선거
1948년 8월 21-26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진행되어 최고인민회의 남한측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결정에 따라 남북한 전역의 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가 결정되었으나 사실상 남한에서는 직접 선거의 실시가 불가능하여 남한측 대의원선거는 선거지도위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이중선거로 진행되었다. 북한측 주장에 따르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대의원선거에는 남한 전유권자 8,681,746명 중 6,782,407명 즉 전 유권자의 77.52%가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1.080명의 대표가 피선되었는데 대회에 도착한 것은 1,002명이었다. 피선된 대회대표자 중 남조선노동당 당원 187명, 민주독립당 당원 53명, 근로인민당 당원 62명, 인민공화당 당원 68명, 노동조합 전국평의회맹원 66명, 전국농민동맹맹원 70명, 문화단체총연맹맹원 24명, 민주여성동맹맹원 30명, 민주애국청년동맹맹원 23명, 전국유교연맹맹원 18명, 기독교민주동맹맹원 18명, 사회민주당당원 43명, 신진당당원 31명, 민중동맹맹원 20명, 민주한독당당원 35명, 근로대중당당원 19명, 청우당당원 7명, 학병거부자동맹맹원 4명, 건민회회원 7명, 민족자주여성동맹맹원 2명, 민족자주연맹맹원 30명, 민족대동회회원 6명, 건국청년회회원 6명, 보국청년회회원 6명, 건국유교연맹맹원 7명, 불교청년단단원 6명, 조선농민당당원 6명, 한국독립당당원 7명, 무소속 269명이었다. 피선된 대회 대표자 중 노동자가 159명, 농민이 396명, 사무원 367명, 인테리 18명, 수공업자 26명, 상인 62명, 종교인 16명, 기업가 52명, 전지주 4명이었다. 피선된 대표자 중 65명이 여성이었다. 8월 21일부터 26일간에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대회가 진행되었다. 대회는 비밀투표로 남한 인구수 5만명 당 1인의 비율로 360명의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피선된 대의원은 조선최고인민회의의 선거에 참가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무소속의 대표자들이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선거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7월 9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북한측 대의원 선거 진행이 결정되었다. 1948년 8월 5일까지 전 북한 212 선거구에서 227명의 후보자가 등록 완료되었다. 후보자 가운데에는 노동자 48명, 농민 76명, 정권기관 정당 사회단체 간부 52명, 인테리 및 기술자 19명, 기업가 9명, 상인 7명, 수공업자 5명, 종교가 11명이 포함되었으며 여성은 31명이었다. 8월 25일 선거에는 등록된 유권자 452만 6,065명 중 452만 4,962명이 투표에 참가(99.97%)하였으며, 445만 6,621명의 선거자가 찬성투표(98.49%)하였다. 총 212개 선거구에 등록된 227명의 후보자 중 212명이 당선되었다.

 조선어문연구회
조선어문연구회는 국어 국문의 통일과 발전을 위한 연구사업을 일층 강화 발전시키기 위하여 1948년 10월 2일 내각 제4차 회의 결정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본래 1947년 2월 김두봉의 주도로 설립된 <조선어문연구회>에서 발전한 이 단체는 국어 국문의 과학적 연구에 근거한 사업과 그의 통일적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한자 횡서, 철자법에 대한 원안(原案) 작성 등의 연구사업과 병행하여 신문자 제정, 훈민정음의 음운 등 어문개혁에 대한 연구사업을 수행하였다. 조선어문연구회는 이극로(李克魯)를 위원장으로 하고 있었으며 국어 문법의 편수(編修)와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편집위원회와 사전편찬분과위원회, 문법편찬분과위원회 등의 전문위원회가 편성되어 있었다. 기관지로 월간 ≪조선어연구≫를 발행했다.

 학술용어사정위원회
1949년 2월 5일 내각결정 제7호 <학술용어 및 실용한자 사정에 관한 결정>에 의하여 설치된 학술용어사정위원회(學術用語査定委員會)는 학술용어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한자를 사정(査定)하여 학술의 체계를 확립하여 과학 및 기술발전의 기초를 확고히 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일제 식민지통치에 의한 학술용어의 불통일성(不統一性)과 불일치성을 시정 개혁하고 학술과 기술 용어의 합리화를 도모하였다. 산하에 각 부문의 학술용어 사정(査定)을 위하여 실용한자(實用漢字), 어문학(語文學), 수학물리(천문학 포함), 화학지리학(지질학 포함), 예술(藝術), 경제(經濟), 생물학(生物學), 공학(工學), 농학(農學), 임학(林學), 수산학(水産學), 의학(醫學), 법학(法學), 철학, 교통운수학(交通運輸學), 체신학(遞信學) 등 18개 부문에 걸쳐 학술용어사정분과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1954년 말 현재 위원장과 32명의 중앙위원으로 지도부를 구성하였으며 21개의 분과위원회를 가지고 있었다. 1953년 12월까지 자연 및 기술과학에 관한 학술용어들을 통일 정리하여 ≪학술용어≫(제1부)를 발간하였다. 1954년 3월에는 사회과학편(제2부)을 발간하였다. 1,2부의 ≪학술용어≫에 수록된 학술용어 총어휘 수는 약 5만 단어에 달하였다. 이후 1955-1956년에는 이미 사정 공포한 학술용어에 대한 재검토 및 재정리 사업과 어휘 보충 사업을 진행하였다. 1956년 3월 9일자 내각명령 제21호 <학술용어사정위원회를 과학원에 이관할 데 관하여>에 의하여 동 위원회는 교육성으로부터 과학원으로 이관되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 약칭 : 조국전선) 결성 논의는 남한의 남조선노동당, 민주독립당, 인민공화당, 근로인민당, 남조선청우당, 남조선여성동맹, 전평의 연명으로 된 5월 12일부 서한이 5월 14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앞으로 전달되면서 시작되었다. 5월 16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는 이를 적극지지 찬동하면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내용의 답서를 남한측 정당 사회단체들에 발송하였다. 이에 따라 5월 25일 준비위원회 제1차회의가 북한측에서 3개 정당, 15개 사회단체들과 남한측 10개 정당, 23개 사회단체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어 준비위원회 지도부 및 서기부를 선거하였으며 결성대회 준비 계획서를 작성하여 6월 초에 재개될 제2차 회의에 제출할 것을 준비 위원회 지도부에 위임하였다. 6월 7일 준비위원회 제2차회의에서는 가맹을 신청한 53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참석 하에 결성대회 계획안을 심의하여 채택하였다. 6월 25-28일 남북의 71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76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평양 모란봉극장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첫날 회의에서는 대회의 의안으로 1) 현하 국내의 정치정세와 우리의 임무에 대한 보고 2)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강령에 대한 보고 3) 전국 인민에게 고하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 선언서 채택 4)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 대표자격 심사위원회 보고 5)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선거 등이 채택되었다. 조국전선 결성대회 최종일인 28일까지 각 의안에 대한 토론을 거쳐 결정서, 조국전선 강령 선언서 등을 채택하고, 김일성을 비롯한 99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한 후 폐막하였다. 동 28일에 개최된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는 중앙 상무위원과 의장단을 선거한 다음 중앙위원회 기구 및 간부 결정과 8.15 해방 4주년 기념 전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선출된 의장단은 김두봉, 허헌, 김달현, 리영, 유영준, 정노식, 리극로였으며, 중앙상무위원은 김일성, 리용, 최경덕, 강량욱, 김두봉, 최용건, 강진건, 현정민, 허헌, 서창섭, 박헌영, 라승규, 한설야, 리구훈, 김달현, 홍명희, 리기영, 리종만, 김원봉, 리극로, 유영준, 정노식, 리영, 김병제, 김남천, 박창옥, 박정애가 선출되었다. 29일 조국전선 서기국에서는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 언론 출판기관, 교육문화기관, 종교기관, 산업경제기관, 남한주둔 미군당국, 유엔한국위원단, 국회 등 각계각층에 특별우편으로 선언서 1,000여통을 발송하였으며, 7월 2일에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결성대회에서 채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 방책에 관한 선언서>를 송부하여 대내외적으로 조국전선의 결성사실을 알렸다.

 중국군 한인 부대 인민군 편입
동북에서 내전이 끝나자 중국군에 소속된 한인부대의 북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1949년 7월 동북에 있던 제166사와 제164사가 북한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이동하기에 앞서 부대를 다시 재편하였다. 1949년 7월 10일자로 취해진 발령에 의하면 제166사의 사단장 겸 정치위원은 방호산(方虎山), 부사단장 홍림(洪林)이었고, 제164사의 경우 사단장 겸 정치위원 이덕산, 참모장 노철룡(盧喆龍)이었다. 심양에서 위수업무를 맡았던 제166사는 7월 20일 출발하였으며 병력은 10,321명이었다. 장춘 위수업무를 맡고 있던 제164사는 7월 23일 출발하였으며 병력은 10,821명이었다. 그리고 1949년 9월 28일 129명이 북한으로 출발하였다. 이리하여 1949년 한 해에 21,271명의 의용군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북한으로 넘어온 166사는 인민군 6사단으로, 제164사는 5사단으로 재편되었다. 한편 관내로 진격해 들어갔던 조선인 각급 부대들은 제4야전군 제47군의 3개 사단에 흩어져 있었다. 1950년 3월 이 부대들은 정주에서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하였다. 전우를 사단장으로 하여 재편된 부대는 1950년 4월 전용열차 편으로 북한으로 들어갔고 입북하여 두 달 가량의 훈련을 거친 후 곧 한국전쟁에 참여하였다.

 남북통일 제의
1950년 6월 1일 근로인민당 위원장인 리영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가 제의한 평화통일 방책을 다시한번 추진할 것을 남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과 그 성원들에게 제의하였다. 6월 5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제5차회의에서는 이에 동의하고 <평화적 통일방책을 또 한번 추진시킬 데 대한 구체적 방침들을 제시하는 호소문을 작성할 기초위원회>를 11명으로 구성하였다. 6월 7일 조국전선 중앙확대위원회에서는 호소문과 호소문의 전달 방법 및 절차에 대해 토의하였다. 6월 9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에서는 이 호소문을 남한 제 정당 사회단체들과 인사들 및 유엔한국위원단에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원을 1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여현역에 대기시킨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같은 날 개최된 조국전선 중앙상무위원회에서는 산하 각 정당 사회단체들의 사업 방침 문제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협의회 준비 및 그 준비위원회 구성에 관한 문제들을 토의 결정하였다. 그러나 남한 정부가 조국전선 파견원들의 서한 접수를 거부하고 유엔한국위원단에만 전달하게 되자, 9월 10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남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인사들에게 호소문을 전달하기로 하고 11일 여현역을 통과하여 서울로 출발할 것을 지시하였다. 조국전선 파견원들이 남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자, 6월 16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그 대책을 논의하고 최고인민회의가 평화통일 대책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 문제를 토의해 줄 것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요청하였다. 6월 1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와 남한의 국회를 <단일한 전조선 립법기관으로 연합하는 방법으로써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천할 것>을 제안하였다 . 이 제안에 따르면 <전조선 입법기관>은 헌법을 채택하고 정부를 구성하며, 앞으로 <전조선 입법기관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에는 이승만, 김성수, 이범석, 신성모, 채병덕, 백성욱, 조병옥, 윤치영, 신흥우 등을 <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체포할 것, 언론 출판 집회 시위 군중대회의 자유 보장,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그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 중지와 정치범 석방 등을 전제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유엔한국위원단의 즉각 철수를 주장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1953년 7월 27일 정전) 전쟁 발발 당일 북한은 내무성 보도를 통해 1) 남한이 <북침>을 중지하지 않는 한 군사적 대책을 취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전쟁의 모든 책임은 남한에 있다고 주장하고 2) 남한의 <북침>을 격퇴하고 반공격전으로 넘어갔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당일 내각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국방군들의 불의의 진공과 관련하여 38선에 조성된 긴장된 사변들에 대한 문제들>을 토의하고 제반 대책들을 취하였다.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내의 일체 주권을 군사위원회의 수중에 집중>시켰다. 위원장에는 김일성(金日成), 위원에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朴憲永), 부수상 홍명희(洪命熹),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金策), 국방상 최용건(崔庸健), 내무상 박일우(朴一禹),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鄭準澤)을 임명하였다. 6월 26일 김일성(金日成)은 방송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 헌법을 사수>하고 이승만 정권을 소탕하며, 남한에 인민위원회를 부활시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치하에 조국통일을 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남한 토지개혁 결정
1950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 토지개혁의 실시를 결정하였다. 이미 북한은 한국전쟁 이전인 1949년 5월 13일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가 조직되어 남한 토지개혁 준비 사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내각결정 제46호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 조직에 관한 결정서>에 따라 조직된 이 법령기초위원회의 성원은 위원장 홍명희를 위시하여 박문규, 송봉욱, 강진건, 리구훈, 리승엽, 김렬, 리극로, 성주식, 리만규, 김병제, 박정애, 리인동, 최경덕, 최용덕, 유영준, 장균, 채백회, 김영제, 전종일, 강규찬 등이었다. 법령기초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에 제의할 법령초안을 작성하여 1949년 5월 말까지 내각에 제출하도록 위임받았다. 법령기초위원회는 남한지역의 농민을 초청하여 의견교환을 하는 등 법령제정에 착수해서 5월30일 법령초안 원안을 작성했다. 6월 4일에는 내각에서 법령기초위원회의 보고를 청취하고 그 사업을 연장하며 초안과 함께 시행세칙도 기초할 것을 결정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 토지개혁의 실시를 발표했다.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르면, 남한에서의 토지개혁은 북한 헌법 제7조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도록 규정되었다.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의거하였으며, 몰수의 대상은 <미제국주의자와 리승만 괴뢰정부 및 그의 기관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조선인 지주의 소유토지와 면적의 다과를 불문하고 계속적으로 소작주는 자>의 토지로 규정했다. 그러나 소작주지 않고 자작하는 농민의 토지(자작지)는 5정보 또는 20정보까지 몰수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몰수된 토지는 고용농민과 토지 없는 농민 및 토지 적은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도록 하였다. 구체적인 토지개혁은 각 동(리)의 고용농민과 토지없는 농민 및 토지 적은 농민들의 총회에서 선거된 농촌위원회에서 실시하도록 하였다.

 남한 점령지역에서 군 면 리(동)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
1950년 7월 25일 - 9월 13일 북한은 남한 점령지역에서 군 면 리(동)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미 1950년 7월 1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 <남반부 해방지역의 군 면 리(동)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할 데 대하여>를 채택한 바 있었다. 이 정령에 따라 김원봉, 장순명, 김응기, 리종갑, 현훈, 정칠성, 남성민, 리환기, 방학세 등으로 구성된 중앙선거지도부가 구성되어 선거 실시를 지도하였다. 9월 28일 현재 자료에 따르면, 선거는 경상북도내의 8개 군과 경상남도내의 9개 군 및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 즉 황해도(옹진군과 남연백군)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9개도의 108개 군, 1,186개 면, 13,654개 리(동)에서 실시되었다. 당선된 인민위원회 위원은 군 인민위원회 3,878명(여성 566명), 면 인민위원회 22,314명(여성 2,559명), 리 인민위원회 77,716명(7,609명)이며 당선된 리 인민위원회 위원은 면 대표자 대회에 참가한 대표자의 95.56%, 군 인민위원회 위원은 군 대표자 대회에 참가한 대표자의 97.53%의 찬성투표를 받았다고 발표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3차 전원회의
1950년 12월 21-23일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3차 전원회의에서는 1) 김일성의 <현정세와 당면 과업>에 대한 보고 2) 남북근로단체들의 통일 3) 조직문제 등을 토의하였다. 1년만에 개최되는 이 전원회의에서 진행한 보고에서 김일성은 그동안의 전쟁을 총결 보고했다. 김일성은 그동안의 전쟁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전쟁의 제1계단은 인민군이 전진을 계속하던 시기이며 제2계단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이며 제3계단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남한군과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몰아낸 시기로 구분하였다. 김일성은 1단계의 전쟁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으로 <많은 예비군을 준비하지 못하였으며 우리 앞에 중첩히 쌓여있는 곤란들과 난고들을 극복하는데 대한 타산과 준비가 부족>하였고, <일부 지휘관들은 적을 포위 섬멸하여 적의 유생역량을 소멸함으로써 적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할 대신에 적을 한갖 밀고만 나가서 일정한 시기에 적군이 다시 편성할 가능성을 주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뿐 아니라 <해방된 지역들에 대한 방어조직이 불충분하였던 까닭에 적의 측면 공격을 가능케>하였으며, 허성택 등 중앙위원들이 빨치산 투쟁 조직에 대한 당 중앙의 지시를 실행하지 않는데 대해 비판하였다. 인민군의 후퇴시기인 제2단계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비판 대상이 거론되었다. <일부 지휘관들이 병력이동에 대한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제때에 집행하지 못한 사실>, 김열이 책임진 후방 공급사업이 잘 조직되지 못한 점, 민족보위성 문화부상인 김일이 보인 패배주의적 경향, 후퇴과정에서 무정의 군벌주의적 만행, 김한중 및 최광 등이 보인 비겁성 등이 비판 받았다. 당 차원에서는 북강원도 위원장 임춘추, 남강원도 위원장 조진성, 경기도 위원장 박광희 등이 자기 지역을 사수하지 않고 도주하였다고 비판받았다. 또한 교통성, 교육성, 선전성 등이 후퇴 당시에 비규율성과 비조직성을 발휘하였다는 점도 거론되었다. 김일성은 전쟁의 전망과 관련하여 전쟁이 장기전이 되었으며 <조국에 닥쳐온 위험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적들이 병력을 재편할 여유를 얻지 못하도록 <적극적인 추격전>을 전개하여 적의 병력을 더 많이 섬멸함으로써 <종국적이고 또한 결정적인 투쟁을 더욱 강하게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의 임무와 관련하여는 청우당이나 민주당의 일부 당원이 적과 협력했다고 해도 양 당과의 통일전선을 유지해야 하고, 점령지역에서 점령군의 치안대나 멸공단에 가담한 사람이라도 심사 없이 함부로 숙청해서는 안 된다고 당내의 일부 경향에 대해 비판하였다.

 남북 근로단체들의 통합
1950년 12월 21-23일 개최된 조선로동당 3차 중앙위원회에서는 <남북 근로단체들의 통일> 문제가 논의되었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으로 북한측에 유리하게 전세가 반전되는 상황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서는 그 동안의 전쟁정책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한 조치들이 논의되었다. <남북 근로단체들의 통일> 문제는 이러한 목적으로 남북한의 좌파 대중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현하 군사 정치정세하에서 전술상 또는 정치적 필요>를 고려하여 <남북조직으로 분리하였든 근로단체인 직맹, 민청, 여맹 및 문화예술단체들을 통일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통합은 <현존한 남북 근로단체 중앙위원회들을 각각 연합함으로서 자기들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건립하여 단일한 행동강령을 채택>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로 하였으며, 구체적인 통합사업은 당 중앙조직위원회와 근로단체 중앙기관에 조직되어 있던 당조에게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남과 북의 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는 1951년 1월 17-18일 양일간 연합회의를 개최하고 통일적인 민주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어 남북한의 직업동맹이 1951년 1월 20-22일 연합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조선직업총동맹으로 통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51년 2월 11일 남북한 농민동맹 중앙위원회 연합회의에서는 조선농민동맹으로 합동을 결정하였다. 3월 10-11일에는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과 남한의 문화단체총연맹의 합동으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여성동맹 또한 1951년 4월 20-21일 합동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조선민주여성동맹의 단일조직 밑에 합동하였다.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
중국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쟁의 중국 본토로의 확산을 우려하며 전황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군사적 대비를 해오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7월 13일 각지에 분산 배치되어 있던 병력 25만 5천여명으로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조직하였으며, 8월 중순까지 각 부대가 안동(安東), 봉성(鳳城), 집안(輯安), 통화(通化), 요양(療陽), 해성(海城), 본계(本溪), 철령(鐵嶺), 개원(開原) 등지에 집결 완료하여 정비 훈련에 들어갔다. 8월 하순에는 상해 지역의 제9병단과 서북지구의 제19병단을 파견하여 동북변방군을 돕도록 했으며, 비행연대 전차여단 고사포 연대 및 포병을 증편 시켜 지원부대를 증강시켰다. 중국 각지의 대도시와 공업기지에 대한 대공방어 조치를 취하는 한편, 동북지구 남부의 공업설비와 전략 비축물자를 북부로 옮기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 및 소련으로부터 중국에 대한 공식 참전 요청이 들어온 것은 1950년 10월 1일이었다.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직접 베이징으로 가서 참전을 요청했으며, 스탈린 역시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조선동무들에게 중국군의 엄호 하에 예비부대를 편성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최소한 중국군 5-6개 사단 병력을 38선으로 파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참전을 정식 요청했다. 북한 및 소련의 참전요청에 접하여 중국은 각각 공산당과 정부 차원의 논의를 거쳐 참전을 결정하였다. 1950년 10월 8일 모택동은 이미 조직되어 있던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하고 북한으로 향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팽덕회(彭德懷)를 임명하는 동시에, 동북행정구를 중국인민지원군의 후방기지로 삼고 일체의 후방지원업무와 북한측에 대한 원조 사무를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고강(高岡)을 경유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19일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4개군 및 3개 포병사단, 1개 고사포연대는 3개의 방향에서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 입북했으며, 10월 25일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첫 전투를 치른 이후로 1951년 초까지 중국군은 유엔군 및 한국군을 38선 이남까지 밀어붙이고 서울까지 점령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군의 참전을 계기로 한국전쟁은 명실상부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전쟁의 양상은 사실상 중-미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미국의 세균전 의혹
1951년 5월 8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유엔총회 의장 및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미국측이 세균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항의하였다. 북한측의 주장에 따르면 1950년 12월 중순에서 1951년 1월까지 북한 지역에서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들이 미군 점령상태에서 인민군에 의해 재탈환된 지 7-8일 후에 동시에 발견된 것이며 이전 4년간 북한 지역에는 천연두 발병건수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북한측이 제시한 통계에 의하면 북한지역의 천연두 발병 건수는 1951년 4월에는 3,500여건 이상이었으며 그 중 10%가 사망했다고 한다. 지역적으로는 미군 점령상태에서 가장 늦게 인민군이 탈환한 지역인 강원도(1,126건) 함경남도(817건) 황해도(602건)에서 특히 만연되었으며, 미군이 점령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천연두 환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측은 이 천연두 발병이 미국측의 고의적 세균무기 사용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인민군의 서울 점령 당시 노획한 이른바 이승만 정부 비밀문고의 문헌들과 북한 외무성이 발표한 <조선에서의 국내전쟁의 범죄자를 폭로하는 제문건과 자료>에 수록된 문건들, 남한 군대 참모부 첩보부 제3과에서 작성되었다는 <1950년도 첩보사업 계획>이라는 문건을 제시하였다. 북한측은 이러한 천연두 전염이 <질식성 유독성 및 기타 유사한 독가스와 세균적 방법을 전쟁에 사용함을 금지하는데 관한> 1925년 6월 17일부 제네바 의정서를 미국측이 고의적으로 위반한 결과라고 주장하며, 그 책임자인 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와 릿지웨이 등 책임자를 재판에 부칠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과학원
한국전쟁 직전인 1952년 4월 27일 전국 과학자 대회 개최가 개최되면서 북한 과학계의 조직화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회에서는 <1951년 공화국 과학연구사업의 총결과 1952년 당면 과업>에 대한 보고를 청취 토의하고 전국 과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한 후 29일 폐막했다. 동년 10월 9일 내각에서 과학원 조직에 관한 결정 제183호를 채택했다. 과학원은 원사, 후보 원사, 연구사 등을 구성원으로 하고 있었으며, 최고기관인 총회와 각 부문회의, 상무위원회 등의 기구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 이 결정에 따라 초대 원장으로 홍명희(문학 원사), 부원장으로 최삼열(화학 원사), 서기장으로 장주익이 임명되었으며 각 분야별로 원사 및 후보원사가 선임되었다. 11월 5일에는 과학원 원사 및 후보원사 제1차 총회를 개최하고 상무위원회의 조직 및 각 연구소 소장을 선정하였다. 그 결과 12월 1일 과학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과학원은 <이론 과학과 응용과학의 전반적 발전을 백방으로 방조하며 인류의 과학적 성과를 연구하며 또 발전시킨다> <부강한 민주주의 독립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과학 분야에서 달성한 제 성과를 계획적으로 리용하며 문화 및 인민경제 제 분야에서의 발전을 촉진시킨다>는 등의 기본 과업을 내세웠다. 1954년 말 현재 과학원은 산하에 사회과학부문, 자연 및 기술 과학부문, 농학 및 의학 부문 3개의 부문, 8개의 연구소를 두며 활동하고 있었다.

 남로당계 숙청
1953년 8월 5-9일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는 박헌영, 이승엽, 이강국, 조일명, 임화, 배철, 박승원, 안영달, 김응빈, 윤순달, 조용복 등 남로당계 핵심 인물들의 <반당적 반국가적 행위>에 대한 중앙위원회 비서 박정애의 보고를 토의하고 이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 결정서에서는 박헌영 이승엽 일파가 당내에 종파적 그룹을 형성하였으며 박헌영의 비호 아래에서 이승엽, 이강국, 조일명, 임화, 배철 등이 미국 정보기관과 연계를 맺고 간첩활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했다. 이승엽, 박승원, 조일명, 임화, 배철, 김응빈, 윤순달 등은 군사쿠데타를 시도하여 <박헌영정부>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고 비난받았다. 이 회의에서는 박헌영 이승엽 등에 대한 정치위원회의 입장에 지지를 표시하면서 박헌영에 대한 출당(黜黨)과 재판 회부를 결정하였다. 이미 1952년 12월 15일 개최된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로동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라는 보고를 한 이후 <5차 전원회의 문헌토의 사업>을 위해 각급 노동당 도, 시, 군 당위원회와 각급 정치기관들에서 전원회의 및 초급당 총회들이 진행되면서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들>에 대한 당내 비판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열이 그 책임자로 지목되어 이승엽 그룹에 대한 체포가 이루어진 바 있었는데, 6차 전원회의는 이를 공식화하는 계기였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는 박헌영에 대해서 직접적인 간첩혐의는 두어지지 않았으며 방임 및 비호의 책임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이승엽 등에 대한 재판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 진행되었으나,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1955년에 이르러서야 진행되었다.

 전후경제복구건설 논의
1953년 8월 5-9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는 전후경제복구건설 문제가 논의되었다. 당시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종식된 직후의 시점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모든 것을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하여>라는 보고를 진행하였다. 이 보고에서 그는 <정전은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승리>이며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우리 조국의 통일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정전협정 체결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활용하여 국가경제의 균형적 회복과 자립적 토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보고에서는 <1년 동안에 인민경제를 복구 발전함에 필요한 전반적 준비사업과 정리 사업을 전제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인민경제 복구발전의 3개년 계획을 작성하여 인민경제 각 분야에 걸쳐 전전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셋째 계단으로는 국가의 전반적 공업 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작성하고 그를 실천함으로써> 부강한 민주주의독립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거대한 국가적 과업이 나서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한국전쟁으로 북한은 1949년에 비하여 1953년 사회총생산액이 75%로 감소되었으며 공업총생산액은 64%, 그 중 생산수단 생산은 42%로 저하된 실정이었다. 공업과 농업의 비중은 1949년의 47대 53에서 1953년에는 42대 58, 공업총생산액에서 생산수단과 소비재의 비중은 59대 41로부터 38대 62로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는 중공업의 우선적 복구 발전을 통해 국가경제의 균형회복과 자립적 토대를 강화하는 노선을 취했다. 이를 통해 경공업과 농업을 성과적으로 복구 발전할 수 있으며 전쟁으로 뒤떨어진 인민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반이 확 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편으로 중공업의 발전에 우선적 위치를 부여한 것은 군수공업의 확장 발전을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로동당은 <정전협정 체결의 결과 다만 정전이 성립되었을 뿐이며 완전한 평화는 달성되지 못하였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공업의 복구 역시 군수공업과 관련 있는 제철, 기계제작, 조선, 병기 공업 등에 우선적인 위치를 부여하였다.

 북한 정부대표단 소련 방문
1953년 9월 1-29일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정부대표단은 소련정부의 초청에 따라 소련을 방문하였다. 대표단은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정애, 내각 부수상 정일룡,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외무상 남일, 철도상 김회일 등 6명으로 구성되었다. 9월 10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북한대표단은 11부터 19일까지 소련 정부와 양국관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회담에 소련측에서는 소련의 내각 수상 말렌꼬프, 소련공산당 제1비서 흐루시초프, 내각 제1부수상 겸 외무상 몰로토프, 내각 제1부수상 겸 국방상 불가닌, 소련 내각부수상 겸 상업상 미코얀 등을 비롯한 9명이 참석하였으며, 북한측에서는 대표단원 전원과 소련주재 북한대사인 임해가 참석하였다. 이 회담에는 또한 모스크바 주재 중국 대사인 장문천도 참석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북한과 소련 사이의 친선을 발전시키는 문제, 한국문제의 해결문제, 소련정부가 결정한 10억루불 무상 원조금 사용문제, 소련측으로부터 받은 차관 보상 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양국 정부는 양국간의 친선 및 협조관계가 양국 인민들의 이익에 전적으로 부합하며 극동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 정전협정 체결은 한국문제를 외국의 간섭 없이 한국민들 자체의 해결 조건을 지어준다는 점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10억 루블의 원조금 사용의 방법과 절차에 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원조금은 <인민경제의 골간으로 되며 다른 경부부문들을 복구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 조건으로 되는 대공장들을 복구하며 이전에 북한에 없던 새 공장들을 신설하는데 사용하기로> 합의하였다. <복구 확장될 공장들은 김책제철소, 성진제강소, 흥남비료공장, 수풍발전소, 평양방직공장이며 또한 신설될 새 공장들은 견방직 공장, 육류종합공장, 해어 통조림 공장, 염산 공장, 염색 공장 및 표백 공장, 뜨락또르 수리 공장, 중앙 라디오 방송국 등>이었다. 또한 이 공장들의 복구 신설에 필요한 공장 시설 즉 각종 기계 및 설비들과 건축 자재들을 소련측이 제공하며 공장들의 복구 및 신설과정에 기술자 파견, 기술 원조, 민족기술간부 양성에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산업, 운수, 체신, 농업 및 기타 부문에서 북한측이 자체적으로 복구하는 기업소에 대한 시설품 및 건축 자재를 소련측이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 외에도 농산업 및 인민생활 개선을 위한 물품과 생활필수품 지원, 병원 및 학교에 필요한 설비 제공, 과학기술중앙도서관 설비 제공 등에 대해 합의하였으며, 이상의 소련측의 원조는 10억 루블의 원조금에서 사용하기로 하였다. 소련은 이 원조금을 2년 동안에 제공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그 금액의 3분의 2는 1954년도 말까지 제공하고 그 여분은 1955년에 전부 제공하기로 하였다. 한편 북한측이 소련에서 받아온 차관 보상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그 채무액의 반분 이상을 삭감하며 그 잔여분의 보상개시 기한을 여러해로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북한측인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소련 정부와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그 협정에는 북한을 대표하여 김일성, 소련을 대표하여 몰로토프가 서명하였다. 김일성은 9월 25일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귀국하였다.

 북한 정부대표단 중국 방문
1953년 11월 10-27일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정부대표단은 중국을 방문하였다. 북한 정부는 김일성의 소련 방문 한 달 후에 전후복구건설 문제 및 제네바협정 체결 문제 등 <양국의 이익에 관계되는 제반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정부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북한정부는 10월 29일 김일성을 단장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정애, 내각 부수상 홍명희,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외무상 남일, 재정상 윤공흠, 철도상 김회일, 도시경영상 주황섭 등 8명으로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11월 12일 북경에 도착한 북한 대표단은 11월 13일 중국 국가주석인 모택동을 방문하여 회담하고 이 회담에서 결정된 문제들에 근거하여 11월 14일부터 동 23일까지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에 중국측에서는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 주은래, 국가계획위원회 주석 고강, 정무원 부총리 등소평, 무역부장 엽계장 등 6명이 참가하였으며 북한측에서는 대표단 전원과 북경주재 북한 임시대리대사 서철이 참가하였다. 회담에는 또한 북경주재 소련대리대사인 와시꼬브도 참석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북한과 중국 <양국의 이익에 관계되는 정치 및 경제문제들>을 토의하였다. 양국은 <친선 단결을 강화하며 경제 문화합작을 더 긴밀히 하기 위하여 조중 경제 및 문화합작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였다. 양국은 정전협정의 체결과 실시가 한국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함에 있어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향후 통일 문제에 대한 관계 각국들과 합작하는 문제와 제네바 정치회의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였다. 중국은 한국전쟁 기간에 중국이 원조한 이체의 물자와 비용을 전부 무상으로 인정하고 1954-1957년 기 간에 인민폐로 8만억 원의 무상원조를 결정하였다. 이 원조 중에서 1954년도에 3만억원을 제공하고 그 잔여분 5만억 원은 3년 간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또한 중국 측은 철도 복구에 필요한 노력과 기술 원조, 기관차와 여객차 및 화물 차량을 제공하기로 하였으며 북한 기술자들의 중국 파견 실습 진행과 중국 기술자들의 북한 파견에 대해 합의하였다. 양국간에는 이 회담의 결과로 11월 23일 <경제 및 문화 합작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외에도 무역 철도 기술자, 기능자 양성 및 기타 문제들에 대하여도 개별적 협정들이 체결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1953년 12월 18-19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1)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사업을 강화할 데 대하여 2) 각급 당지도기관들의 결산-선거실시에 대하여 등이 토의되었다. 첫째 문제에 대하여는 김일 부위원장이 보고하였고 둘째 문제에 대하여는 박정애 부위원장이 보고하였다. 두 문제에 대한 회의 참가자들의 토론이 있은 후 해당한 결정들이 채택되었다. 김일성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한 결론 발언을 통해 <현시기 통일전선사업을 강화하는 것은 전후 인민경제복구건설을 성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중요한 담보>라고 지적하고 <무엇보다 먼저 우당 단체와 우당 당원들과의 통일전선>을 강조했다. 그는 하층통일전선의 강화를 위해 우당 당원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해 주는 문제, 이들을 각종 협동단체에 인입시키는 문제, 기업가 및 상인들과의 통일전선 문제, 기독교인들 특히 기독교 청년들과의 사업 강화 문제 등을 지적했다. 상층통일전선의 강화를 위해서는 정권기관에서 일하는 <우당 사회활동가들과 무소속 민주인사들과의 사업>을 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부 우리 당원들은 그들에게 사업을 대담하게 맡기지 않고 독판을 치고 있으며 쓸데없이 우쭐대면서 그들을 냉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김일성의 비판은 한국전쟁기 민주당 및 청우당의 일부 당원들이 인민군을 공격하거나 <치안대> 혹은 우익 청년단체 등에 가담했던 사실 때문에 당내에서 통일전선의 무용론이 등장하는 데 대한 대응이었다. 한편 회의에서는 각급 당 지도기관 결산-선거 사업과 관련하여서는 도, 시(구역) 군당 위원회와 초급당 단체의 결산-선거 사업은 1954년 1월 20일부터 4월 5일까지 실시하되 세포(분세포) 총회, 초급당 총회 또는 대표회는 1954년 1월 20일부터 2월 25일까지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시(구역) 군당 대표회 또는 철도관리국 당 대표회는 1954년 3월 1일부터 3월 20일까지, 각 도(평양시) 당 대표회는 1954년 3월 25일부터 4월 5일까지 각각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기 6차 회의
1953년 12월 20-22일 최고인민회의 제6차회의 평양에서 개막되었다. 최고인민회의 회의는 1950년 2월에 제5차회의가 진행된 후 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가 3년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개최되는 것이었다. 회의에는 의안으로 1) 쏘베트 사회주의공화국연맹과 중화인민공화국 및 인민민주주의제국가들에 파견하였던 정부대표단 사업 경과에 관하여 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승인에 관하여 3)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일부 변경에 관하여 등이 제출되었다. 첫째 의안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직접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대의원 리유민, 김승현, 한일무, 리재영, 김란주화, 교통상 김회일, 대의원 원홍구, 문두재, 공화국영웅 리권무, 대의원 고희만, 리주연, 오신남, 김락진, 정준택 등이 토론하였다. 토론에 이어 김일성의 결론이 있은 후 회의에서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맹과 중화인민공화국 및 인민민주주의 제 국가들에 파견하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대표단의 사업경과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승인에 관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강량욱 서기장의 보고를 청취하고 최고인민회의 제5차회의와 제6차 회의 간에 채택한 정령 즉 <산업성을 중공업성, 화학 건재공업성, 경공업성의 3개 성으로 분리함에 관한 1951년 7월 27일 정령>, <인민검열위원회 조직에 관한 1952년 5월 8일 정령>, <무역성을 설치함에 관한 1952년 10월 9일 정령>, <농업성을 농업성으로 개칭함에 관한 1952년 11월 29일 정령>, <국가건설위원회를 조직함에 관한 1953년 6월 8일 정령>과 부수상들을 임명함에 관한 정령들, 상들을 임명 또는 해임함에 관한 정령들, <최고검찰소 검사 총장의 철직 및 임명함에 관한 정령>, <최고재판소 성원을 보선함에 관한 정령>, <학성군을 김책군으로, 성진시를 김책시로 개칭함에 관한 정령>,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정령들, 세금제정에 관한 정령들, 대사 실시에 관한 정령들을 각각 승인하였다. 다음으로 회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선거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일부 변경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였다. 박정애의 제의에 따라 의장, 부의장,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및 위원들을 해임 및 보선하였다. 그 결과 의장으로 리영, 부의장으로 리유민 홍기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김응기 리극로 등이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최원택 원홍구 강응진 전윤도 유해붕 문두재 등이 보선되었다. 부의장 김달현,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홍기주, 상임위원회 위원 구재수 등은 해임되었다.

 1954년 3월 전원회의
1954년 3월 21-2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3월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 의제로는 1) 산업 운수 부문에서의 제 결함들과 그를 시정하기 위한 당, 국가 및 경제기관들과 그 일꾼들의 당면 과업에 대하여 2) 조직문제에 대하여 등이 제기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김일성으로부터 각각의 보고를 청취하고 해당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조직문제와 관련하여 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창옥과 김일이 내각 부수상으로 임명됨과 관련하여 박창옥과 김일을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직에서 해임할 것 2)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박영빈과 당 간부부장 박금철 등을 증원할 것을 결정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기 7차 회의
1954년 4월 20-23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7차 회의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는 의안으로 1) 1954-1956년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 계획에 관하여 2) 1950, 1951, 1952, 1953년 국가예산집행결산 및 1954년 국가예산에 관하여 3)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승인에 관하여 등이 논의되었다. 첫째 의안인 1954-1956년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에 관하여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박창옥이 보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의원 윤행중, 김복진, 김열, 주황섭, 김명리, 최광, 김찬, 현훈, 오제영, 반일병, 김계림, 김황일, 김원봉, 리종권, 김일, 최익한, 김병남, 채백회, 화학건재공업성 부상 주종의,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김승화, 대의원 정일룡, 최승희, 교통상 김희일, 내각 부수상 겸 경공업상 박의완 등이 토론하였다. 회의에서는 토론 결과 <1954-1956년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 계획>을 법령으로서 채택하였다. 둘째 의안인 1950, 1951, 1952, 1953년 국가예산 집행 결산 및 1954년 국가예산에 관하여 부수상 겸 재정상 최창익이 보고하였다. 회의는 1954년 국가예산심의위원회를 선출하였으며, 보고에 대하여 대의원 강문석, 윤상만, 홍기주, 김득란, 리기석, 박세영, 리석보 등이 토론하였다. 1954년 국가예산심의위원회는 1950,1951,1952,1953년 국가예산집행에 대한 결산을 승인하며 1954년 국가예산을 원안대로 승인할 것을 제의하였다. 회의에서는 1954년 국가예산에 관한 법령을 전원일치로 채택하였다. 회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승인에 대한 강량욱 서기장의 보고를 청취하고 최고인민회의 제6차 회의와 제7차 회의간에 채택한 정령들 즉 <성을 조직 및 폐지함에 관한 1954년 3월 23일 정령들>(전기성, 수산성을 새로 조직하고 도시경영성을 폐지), 각 성원을 임명 및 해임함에 관한 정령들, <조선인민군 군무자와 그의 가족들 중 적의 일시적 강점 시기에 죄를 범한 자들에게 형사 책임 및 사회적 제재를 면제함에 관한 정령> 등을 승인하였다. 또한 회의에서는 제6차 회의와 제7차 회의에서 행정구역 변경에 대한 정령과 일부 성들을 조직 개편함에 관한 정령들을 승인한 데 적응하여 헌법 제37조 8항과 내각 성원을 규정하는 헌법 제58조에 수정과 보충을 가할 필요성과 관련하여 상임위원회가 제출한 법령 초안을 법령으로 각각 채택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기 8차 회의
1954년 10월 28-30일 최고인민회의 제8차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 제출된 의안은 (1) 조선문제의 평화적 조정을 위한 제네바 회의에서의 정부대표단의 사업에 관하여(보고자 남일 외무상) (2) 지방주권기관 구성법에 관하여(보고자 홍명희 부수상)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반부 지역에 있어서 도를 분할 및 신설하며 일부 시, 군, 리(읍 및 로동자구)를 변경함에 관하여(보고자 최창익 부수상) (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승인에 관하여 등이었다. 회의에서는 상기 문제들을 토의하고 <조선문제의 평화적 조정을 위한 제네바회의에서의 북한 정부대표단의 사업에 관한 결정서>, <조선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며 전체 조선인민의 일치한 염원인 평화적 조국 통일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남한 국회, 제 정당, 사회단체, 각계 각층 인사들, 전체 남조선인민들에게 보내는 최고인민회의 호소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방주권기관 구성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방주권기관 구성법 채택과 관련하여 헌법 제36조 및 제5장 지방주권기관 조항들에 수정 및 보충을 가함에 관한 법령>,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반부 지역에 있어서의 일부 시, 군, 리(읍 및 로동자구)들을 신설 및 변경함에 관한 법령>과 <황해도를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분할하며 량강도를 신설함에 관한 법령>들을 채택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사소송법 일부 조항들을 보충 및 변경함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1954년 6월 15일)을 승인하였다. 회의는 또한 사망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강응진 대의원 대신에 리만규 대의원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으로 보선하였다.

 지방주권기관 구성법
최고인민회의 제8차회의 제3일회의(1954년 10월 30일)에서는 내각이 제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방주권기관 구성법>을 채택하였다. 동 지방주권기관구성법은 북한 지방주권기관과 그의 집행 기관을 명확히 구분하여 도, 시, 군(구역), 리(읍, 로동자구)에 있어서의 지방주권기관은 해당 인민회의로, 그의 집행기관은 해당 인민위원회로 규정하였다. 동 법령에서 지방 각급 인민회의는 그 관할 지역내 공민들의 일반, 평등, 직접 선거 원칙에 의하여 비밀투표로 선출된 대의원들로 구성하도록 규정되었다. 대의원들의 임기는 도 인민회의는 4년, 시 군(구역) 및 리(읍, 로동자구) 인민회의의 경우는 2년으로 하였다. 각급 인민위원회는 해당 인민회의의 집행기관이며 지방의 국가 행정기관으로서 해당 인민회의에서 선거하는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 및 위원들로 구성하는바 해당 인민회의와 상급 기관의 결정, 지시에 의거하여 자기 관할 지역 내에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1월 전원회의
1954년 11월 1일-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1월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1) 농촌경리의 급속한 복구발전을 위한 로동당의 금후 투쟁 대책에 관하여(보고 김일) 2) 각급 당 지도기관들의 결산-선거 실시에 관하여 3) 조선로동당 강령작성위원회를 재조직할 데 관하여 4) 조직문제 등에 관해 토의가 있었다. 회의 마지막 날에서는 <농촌경리의 금후 발전을 위한 우리 당의 정책에 관하여> 김일성의 발언이 있었다. 그는 <우리의 과업은 공업과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성분을 점차로 더욱 확대하며 강화> 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혁명적 민주기지를 철옹성같이 강화는 것>이며 <민주기지를 강화함에 있어서 농촌진지를 강화하는 문제가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 농촌진지를 강화하기 위하여서는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성분을 발전시키며 우리나라 농촌을 점차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농촌에서 부농의 제한과 농업협동화의 본격화를 의미하였으며 사실상 북한만의 본격적인 사회주의 과업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한편 회의에서는 강령작성위원회 조직을 결정하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월 전원회의
1955년 4월 1일부터 4일간에 걸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월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1) 당원들의 계급적 교양 사업을 일층 강화할데 대하여(보고 김일성) 2) 당 및 국가기관 내의 일부 일군들에게 아직 남아 있는 관료주의를 퇴치할 데 대하여(보고 김일성) 3)경제 절약, 재정 및 자재 통제 규률과 반탐오 반낭비 투쟁 강화에 대하여 4) 조직 문제 등이 안건으로 제출되어 토의되었다. 회의 마지막 날에 위원장 김일성으로부터 1,2,3항 문제에 대한 종합적 결론이 있었다. 김일성은 이 결론에서 <당내에서 계급교양사업을 강화할데 대한 문제를 오늘 비로소 새로 제기하는 것은 아니며> <성숙된 모든 조건들을 고려하여 북반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문제와 당내에서 계급교양사업을 강화하는 문제를 더욱 뚜렷하게, 더욱 강력하게 제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그의 결론에서는 박일우, 방호산, 강문석, 오기섭 등이 각각 개인영웅주의자, 종파주의자, 지방주의자로 비판받았다. 김일성은 당검열위원회 사업의 강화를 통해 이들 종파주의자에 대한 강한 통제와 감찰사업을 실시하며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2월 전원회의
1955년 12월 2-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2월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는 1) 농촌경리의 급속한 복구 발전을 위한 로동당의 금후 투쟁 대책에 관한 당중앙위원회 11월 전원회의 결정 집행 정형에 대하여 2) 제3차 전당대회 소집에 대하여 3) 조직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회의에서는 위원장 김일성의 발언이 있었으며 제3차 전당대회는 1958년 4월에 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사업결산 보고(보고자 김일성) 2) 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 사업결산 보고(보고자 검사위원회 위원장 리주연) 3) 조선로동당 규약 개정에 관한 보고(보고자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정애) 4) 조선로동당 중앙지도기관들의 선거 등의 의사일정으로 소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중앙위원회 결정에 의하여 초급 당 단체들의 결산 선거를 위한 총회들은 1955년 11월 15일부터 12월 말까지 도, 시(구역) 군 당 단체 대표회들은 1956년 1월부터 3월까지 걸쳐 진행되게 되었다.

 조선로동당 3차 대회
1956년 4월 23-28일 진행된 조선로동당 3차대회는 1948년 3월 2차 당대회 이후 8년만에 개최되었다. 이 대회가 개최되기 직전인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는 스탈린 격하 및 평화공존 정책으로의 전환을 표방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로동당 3차대회는 이러한 새로운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김일성 지도부의 대응이 주목되었다. 특히 개인숭배 현상의 근절과 집단지도 원칙의 준수 문제, 평화공존과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해 문제 등 조선로동당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었다. 경제건설노선의 측면에서는 조선로동당 지도부가 유지해 온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과 경공업 농업의 동시적 발전>을 통한 사회주의공업화 노선이 당 내외에서 비판에 처해지던 시기였다. 공업화 및 농업협동화의 템포가 지나치게 빠르며 이는 인민 경제생활에 긴장을 야기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김일성 지도부는 기존의 노선을 고수하였다. 이 대회의 첫날 진행한 중앙위원회 사업총결보고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공업화 및 농촌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한 농업협동화 운동을 한층 발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김일성은 당내 개인숭배 현상의 존재를 인정하였지만, 그가 비판한 것은 박헌영의 개인숭배와 종파사상의 잔재였다. 당대회는 김일성 지도부의 노선을 승인하였다. 대회에서 채택된 결정서에서는 <국가의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기초를 확고히 축성하며 농업의 사회주의적 집단화를 실현함으로써 공화국 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촉진>시켜야 하며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을 확고히 견지>하고 <농업 및 경공업 생산을 급속히 발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중앙위원회가 자기의 일체 활동에서 당적 지도의 최대원칙인 집체적 협의제를 엄격히 준수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앞에 제기된 과업들을 정확히 해결하였음을 인정한다>고 하여, 조선로동당에 대한 개인숭배 비판을 사실상 부정하였다. 이러한 김일성 지도부와 견해를 달리하는 당내 불만 그룹은 비판을 강화하였으며, 이러한 당내 갈등은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으로 폭발하였다.

 평화통일 선언
1956년 4월 28일 조선로동당 3차 대회에서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에서는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외부의 간섭 없는 자주적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 군비확장 중지 및 외국군대의 철수 등 평화체제로의 전환, 남한의 사회 정치적 민주화, 남북간의 상호 접촉과 협상,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통일 단결의 강화와 통일의 적을 반대하는 공동투쟁 강화, 통일을 위한 국제적 환경의 조성 등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문에서는 통일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하여 <남북 조선 국회, 정부 혹은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써 구성되는 상설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제의하였다. 또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 협정이 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남북 조선의 정부 대표를 포함한 광범한 아세아 국가들이 참가하는 국제회의를 소집할 것을 희망>하였다.

 인민군 병력축소
1956년 5월 31일 북한 정부는 인민군 병력을 축소한다고 발표하였다. 북한 정부는 남한 당국이 북한을 반대하여 전쟁을 도발하지 않는 한 무력을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1956년 8월 31일까지 8만명의 무력을 축소한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무력 축소와 함께 <군사장비와 전투기재를 축소하여 해당한 군사비를 평화건설과 인민생활에 충당>하고 제대 군인들에게는 평화적 직업을 국가적으로 알선 보장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동 성명에서는 <현하의 국제 국내 정세는 조선에서의 긴장상태가 최대한으로 완화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조치가 <남북조선 인민들이 남북 조선간의 관계가 개선되고 남북 간의 접촉이 민활하여짐으로써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 촉진될 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에 넣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1956년 7월 2일 조소앙, 안재홍 등 한국전쟁기에 납북되었던 인사들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하고 결성대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재북 남방 인사 중 동감하는 동지들이 여기 한 자리에 모여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촉진시킬 대사를 의논>하였으며, <이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발기 조직하여 우리나라의 평화적 통일 독립의 위업을 촉진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자주적인 평화 통일, 남북의 교류와 접촉, 남북 정부 정당 단체 및 애국적 인사들로 평화통일문제 협의를 위한 상설기관 설치, 남북 총선거에 의한 민주통일연합정부의 수립 등을 주장하고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거든 그 실현을 위하여 응분의 노력을 다하자>고 호소하였다.

 8월종파사건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북한현대사에서 유일한 조직적 반김일성 운동으로 평가되는 이른바 <8월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 주로 연안계 출신들이 중심이 된 이 사건에서 반대파들이 제기한 주요 문제는 당내 개인숭배 문제, 당 정부의 인사정책 문제 등이었다. 김일성(金日成)의 소련 및 동구방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개최된 8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崔昌益), 윤공흠(尹公欽), 서휘(徐輝), 김강(金剛), 리필규, 고봉기(高峯起), 박창옥(朴昌玉) 등 일부 중앙위원들은 기존 중앙위원회 노선에 반대하는 연설을 준비했으나, 이들 중 윤공흠이 발언했을 뿐 이들의 발언은 친김일성 세력에 의해 즉각 저지 당했다. 이 회의에서는 최창익(崔昌益), 윤공흠(尹公欽), 서휘(徐輝), 리필규, 박창옥(朴昌玉) 등의 출당 혹은 당 정부 직위 박탈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윤공흠(尹公欽), 서휘(徐輝) 등 반대파 4명은 중국으로 도주하였으며, 소련주재 대사인 이상조(李相朝)는 조선로동당의 결정을 비난하며 본국 소환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로동당 내부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중국 및 소련과의 외교문제로 비약하였다. 당시 북경에서 개최되고 있던 중국공산당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있던 미코얀은 팽덕회(彭德懷)와 함께 평양에 들어와 이 사건에 개입하였다. 이들의 압력으로 9월 23일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사건 주모자들에 대한 출당조치 철회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선로동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반종파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김두봉(金枓奉), 박의완(朴義玩) 등 <8월종파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는 인사들이 당 정부의 주요직위에서 숙청되었다.

 지방주권기관 선거
1956년 11월 20일, 27일 북한에서는 지방주권기관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는 1949년 11월, 12월에 리, 면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 후 그동안 헌법규정에도 불구하고 실시하지 못했던 첫 지방주권기관 대의원 선거였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56년 9월 1일 정령으로 리(읍, 노동자구) 인민회의 선거를 1956년 11월 20일에, 도 시 군(구역) 인민회의 선거를 동 27일에 실시할 것을 결정 발표하였다. 선거는 유권자 총수의 99.99%(도,시,군<구역> 및 리<읍, 노동자구>) 참가, 추천된 후보자에 대한 찬성투표는 선거참가자 수의 99.93%(도), 99.89%(시, 군<구역>), 99.73%(리<읍, 노동자구>)를 보였다. 선거 결과로 리(읍, 로동자구) 선거에서는 리(3,715개), 읍(170개), 노동자구(74개) 인민회의에서 총 대의원 수 54,279 명(여성 11,199)이 선출되었다. 도, 시, 군(구역) 선거에서는 평양시를 포함한 도 인민회의(10여개)에서 1,009 명(여성 200)의 대의원이 선출되었고, 시(14개) 군(170여 개), 구역(5개) 인민회의에서 총 9,346 명(여성 19,00)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이들 선거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정령에 따라 헌법 제12조의 공민의 선거 및 피선거권 보유 연령을 종래의 20세로부터 만 18세로 낮추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선거에서는 해방 후 10년간의 생활을 통하여 <민주주의교양>을 받고 <조국건설>에 참가하고 있는 현 실정에 비추어 종래 선거에서 제외되어 있던 <친일분자>들의 선거 참가가 허용되었다.

 천리마 운동
1956년 12월 1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건설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라는 연설을 진행하였다. 이 전원회의에서는 경제발전 속도를 늦출 것을 주장하는 의견에 반대하고 경제를 계속 높은 속도로 발전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전원회의에서는 1957년에 공업생산을 1956년의 예정실적보다 21% 더 높일 것을 결정하였으며 게획과제 외에 40억-50억원어치의 상품과 여러 가지 강재 5,000-1만톤, 알곡 5만톤을 더 생산할 과제를 제기하고 당원과 근로자들에게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호소하였다. 김일성은 1956년 12월 28일 강선제강소에서 제강소 지도일군 및 모범노동자 협의회에서 <내부예비를 최대한으로 동원하여 더 많은 강재를 생산하자>고 호소하였다. 그 결과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은 6만톤의 공칭능력을 가진 분괴압연기에서 결의한 9만톤을 뛰어넘어 12만톤의 강재를 생산하였으며, 1956년보다 143.3%로 높이 세워진 이해 계획과제를 141.2%로 초과 수행하였다. 이후 이러한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이른바 <보수주의와 소극성, 기술에 대한 신비주의>를 반대하는 <집단적 혁신운동> 즉 <천리마운동>이 북한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제2기 선거
1957년 6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제2기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1957년 8월 27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권이 행사되는 전 지역에서 실시>한다는 정령을 공포, 동일부로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관한 규정과 박정애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써 구성된 중앙선거위원회의 조직을 발표하였다. 1957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헌법 제35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215개 선거구를 조직 발표하였으며, 각 도(평양시, 개성시) 인민위원회들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관한 규정≫ 제23조에 의하여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써 구 선거위원회들을 7월 8일까지 조직 완료하였다. 선거분구는 인구 500-3,000명의 범위 내에서 특히 필요한 지역에서는 도인민위원회 승인 밑에 인구 500명 미만되는 거주 지역에 각각 1개, 특별 선거 분구는 선거권을 가진 환자 25명 이상 있는 병원, 요양소 및 철도의 주요 역 기타 이와 유사한 기관에 조직되었다. 7월 14-20일까지는 대의원 후보자 추천 사업이 진행되었다. 대의원 후보자 추천을 위한 공장, 기업소, 사무기관. 종업원회의와 리, 읍, 동 주민회의, 농업협동조합 회의 등 집회들에서 추천 진행하였다. 선거는 8월 27일 진행되었는데, 총 215개의 선거구에서 전체 선거자의 99.99%가 각 선거구 선거위원회에 등록된 후보자들에게 찬성 투표하였다. 대의원의 계층별 구성은 대의원 총수 215명(여자 27명) 가운데 노동자 대표 84명, 농민 대표 64명, 사무원 인테리 대표 60명, 기업가 상인 대표 3명이었다. 이들 전체 대의원 중에서 1948년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선거된 대의원이 재선된 경우는 74명이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 중에는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 투쟁 하여 체포 감금당하였던 대의원 61명을 비롯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5명, 노력 영웅 12명, 인민배우 2명, 공훈 배우 1명, 각종 훈장과 메달을 수여 받은 대의원 180명이 들어있다. 대의원들의 연령별 구성은 18-30세 5명, 31-40세 34명, 41-50세 99명, 51-60세 54명, 61세 이상 23명이었다. 지식 정도별 구성은 대학졸업 정도 60명, 전문학교 졸업 정도 17명, 중학 졸업 정도 43명, 소학 졸업 정도 95명이었다.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1차 회의
1957년 9월 18일 -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1차 회의가 진행되었다. 의안으로는 1)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 조직 2) 최고인민회의 상설위원회 조직 3)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정령 승인 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선거 5) 내각 조직 6) 검사총장 임명 7) 최고재판소 소장 선거가 제기되었다. 제1일 회의에서는 의장으로 최원택, 부의장으로 리기영, 김창준을 선거하고 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어 7명으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와 헌법 제42조와 제43조에 근거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위원회인 법제위원회, 예산위원회, 외교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제2일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자격심사위원회 보고를 청취하고 전체 대의원의 자격인정에 관한 결정을 채택,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3차 회의와 제2기 제1차회의 기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채택한 정령을 승인하였다. 제2기 최고인민회의 성립과 관련하여 현 내각은 최고인민회의 앞에 자기의 전체 권한을 바친다는 김일성으로부터 제출된 성명 발표가 있었고 이와 관련하여 김일성에게 새 내각 조직에 대한 복안 제출을 위임하자는 박정애 대의원의 제의를 채택하였다. 제3일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선거에 들어가 위원장 최용건, 부위원장 한설야 리극로 고준택, 서기장 강량욱 등 2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이어 내각조직에 관한 의안 토의에 들어가 김일성이 제출한 복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하였다. 계속하여 검사총장 임명, 최고재판소 소장 선거에 이어 김일성의 연설이 있었다.

 공산당 및 노동당 대표 회의 참가
1957년 11월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당정대표단은 소련에서 개최된 10월혁명 40주년 기념행사와 공산당 및 노동당 대표들의 회의에 참가하였다. 1957년 11월 6일 김일성은 10월 사회주의 혁명 40주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경축 회의에서 축하 연설하였다. 10일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위원장, 소련 내각 수상 등 소련 당 정부 지도자들과 담화를 진행하였다. 11월 14일 - 11월 16일에는 <사회주의 제 국가 공산당 및 노동당 대표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1월 16일 - 11월 19일 <공산당 및 노동당 대표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들 회의에서는 <현 국제정세 및 평화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당면문제들과 또한 공산당 및 로동당들 호상 간의 관계 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회의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관계의 본질, 현 정세 하에서의 맑스레닌주의의 순결성의 고수와 제국주의 앞잡이로서의 수정주의와의 투쟁의 강화, 당 대열의 맑스레닌주의적 통일의 고수와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 현 조건하에서 형제 국가 및 당들의 금후 공동 투쟁에서의 보조일치를 위한 구체적 대책에 관한 문제> 등이 토의되었는바 북한 대표단은 회의참가 활동에서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단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맑스레닌주의의 순결성의 고수를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으며 회의들에서 채택된 선언 및 평화선언에 서명>하였다.

 1957년 12월 확대 전원회의
1957년 12월 5-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2월 확대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는 중앙위원 및 후보위원들과 중앙 검사위원들 외에 각 도, 시, 군 당 및 정권기관 책임 간부들, 성 및 기타 중앙 기관의 책임 일군들, 인민 군대 간부들, 과학 문화 부문 일군들, 중요 생산 기업소 간부 등 모두 1,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사회주의 10월혁명 40주년 경축행사와 각국 공산당 및 로동당 대표회의들에 참가한 조선로동당 및 정부 대표단의 사업에 관한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의 보고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전원회의는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 및 로동당 대표회의의 선언과 평화선언을 지지 찬동하고 조선로동당 및 정부 대표단이 자기의 사업을 원만히 수행하였다고 평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발언이 있은 다음 해당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신자모
북한에서는 정부수립 이후 조선어문연구회를 중심으로 문자개혁안, 신철자법이 제기되었다. 1958년 1월 17-18일에 북한 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 언어학연구실 주최로 개최된 언어학 학술토론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문자개혁안 특히 <신자모 6자>는 김두봉이 제기했고 김수경이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과학원 후보원사 이극로, 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 연구사 홍기문 부교수, 연구사 이세용, 평양사범대학 박상준, 청진교원대학 최능선, 교육문화성 서광순, 과학원 언어문학 연구소 연구사 정렬모 부교수, 신의주교원대학 조창목, 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 연구사 황부영 등이 참가한 토론에서는 새로운 자모 여섯자가 한국어 음리에 맞지 않으며 <비인민적인 것>이라고 하여 불필요하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이 토론회에는 문자개혁을 주장하는 논자들의 엄밀한 의미에서 토론이라기보다는 종파분자로 규정된 김두봉이 가진 언어학 분야에 대한 영향력 비판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2차 회의
1958년 2월 17일-19일에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2차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의 의안은 1) 1956년 국가예산집행에 대한 결산과 1958년 국가예산에 관하여 2) 국제긴장상태를 완화하며 세계평화를 유지 강화할 데 대한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결정 및 소련 정부의 제안들과 관련하여 3)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승인에 관하여 등이 제출되었다. 회의에서는 이들 의안을 토의하고 <1956년 국가예산 집행에 대한 결산을 승인함에 관한 결정>과 <1958년 국가예산에 관한 법령>, <국제긴장상태를 완화하며 세계평화를 유지강화할 데 대한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결정 및 소련 정부의 제안들과 관련한 최고인민회의 결정> 등을 채택한 후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1차 회의로부터 제2차 회의에 이르는 기간에 채택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승인하였다. 19일 회의에는 북한을 친선방문 중이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대표단이 임석하였으며 주은래 총리가 연설하였다.

 조선로동당 제1차 대표자회
1958년 3월 3-6일 조선로동당 제1차 대표자회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1) 인민경제발전 제1차 5개년(1957-1961) 계획에 관하여 2) 당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 3) 조직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제4일 회의에서 김일성의 발언이 있었다. 회의에서는 의정 첫째 문제와 둘째 문제에 대한 결정과 해당한 결정들이 채택되었다. 대표자회는 제3차 당대회가 제시한 기본 방향에 따라 제1차 5개년 계획의 과업들을 결정하였는데, 결정에는 <제1차 5개년 계획기간에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확고히 축성함으로써 우리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과 낙후성을 완전히 퇴치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장차 인민경제의 기술적 개건과 더욱 대규모적인 기본 건설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물질적 및 기술적 조건을 준비할 것>을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또한 <농촌 경리와 개인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성함으로써 인민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적 경제형태의 유일적 지배를 보장할 것>과 <5개년 계획기간에 식량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며 입는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며 주택조건을 결정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인민의 생활수준을 더욱 향상시킬 것>을 과업으로 제시하였다. 회의는 5개년 계획의 기본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을 보장하면서 경공업과 농촌 경리를 동시에 발전시킬 데 대한 당의 경제정책을 계속 철저히 관철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조직적 차원에서 보면 이 회의는 1956년 8월 전원회의 이후 조선로동당 내부에서 진행된 이른바 반종파 반수정주의 투쟁이 마무리 되는 계기였다. 이 대회에서는 김두봉, 박의완, 오기섭 등이 비판받고 숙청당했다.

 1958년 3월 전원회의
1958년 3월 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인민군내 당정치사업을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결론 발언을 통해 당 중앙 상무위원회가 군내정치사업에 대한 검열을 실시한 결과 <반당분자들이 인민군대내에도 수정주의의 사상적 독소를 적지 않게 뿌려 놓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하고, 그것은 총정치국장 최종학을 비롯한 총정치국내 일부간부의 사상적 동요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시기 인민군내의 당사업이 수정주의자들, 반당분자들과의 사상투쟁을 전개하는 데서 전당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김일성은 그러한 현상을 제도적으로 방지할 방안으로 <인민군대내의 당정치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민군대내에 전반적으로 당위원회제도를 내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중앙위원회의 직접 지도를 받는 인민군당위원회를 내오고 군단과 사단, 연대에도 각각 당위원회를 설치하며 대대에는 초급당위원회, 중대에는 초급당단체를 두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과거 인민군대 내에서 정치사업을 담당해왔던 총정치국은 인민군당위원회의 한 사업부서로 당위원회에서 집체적으로 토의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한편 김일성은 인민군대가 <통일전선의 군대>라는 <수정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 비판하고 인민군대는 오직 조선로동당의 영도만을 받는 조선로동당의 군대이며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을 계승한 군대라는 점을 강조했다. 군인들에 대한 군사교육과 정치교양에서는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애국주의사상>으로 무장시킬 것을 주문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6월 전원회의
1958년 6월 5-7일간에 걸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 식료품 가공공업과 일용품 생산을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 2) 국내 상업과 대외 무역을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 등의 의안을 토의하고 해당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중요 발언이 있었다. 전원회의는 사회주의 건설의 대고조와 문화혁명 수행의 현실적 요구 그리고 전후 시기에 이룩한 경제발전에 의거하여 1차 5개년 계획기간에 식료품 가공공업을 4배 이상으로 장성시키며 더 많은 일용품을 다종다양하게 생산하며 장성하는 인민의 수요를 충족시킬 과업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개 군에 한개 이상의 지방산업 공장을 건설할 과업을 제시하였으며 모든 부문에서 일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며 온갖 내부 예비와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동원 이용하며 전 인민적 운동으로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회의는 또한 상업의 가일층의 발전을 위하여 상업부문 일군들 속에서 <사회주의 상업의 본질과 우월성을 깊이 인식시키는 사상사업>을 강화하며 <사회주의 상업의 우월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상업의 조직형식과 활동방법을 사회주의적으로 정비할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대외 무역사업을 가일층 발전시키기 위하여 수출자원을 확대하는 사업에 군중적 역량을 조직동원하며 수출품 생산 및 수송에서 엄격한 제도와 규율을 강화할 것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전원회의에서는 <경제호상원조이사회 참가국 공산당 및 로동당 대표들의 회의>에 참가하였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대표단 사업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
1958년 6월 9-11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의 의안은 1) 인민경제발전 제1차 5개년(1957-1961) 계획에 관하여 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승인에 관하여 등이 제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상기 의안들을 토의하였다. 11일 회의에서 수상 김일성은 <모든 것을 조국의 융성 발전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이어 회의는 <인민경제발전 제1차 5개년(1957-1961) 계획에 관한 법령>을 채택하였다. 다음으로 회의는 중국 인민지원군 장병들과 중국인민에게 감사편지를 보내자는 박정애의 제의에 의하여 <영웅적 중국인민지원군 장병들과 위대한 중국 인민에게 전체 조선인민의 명의로 보내는 감사 편지>를 채택하였다. 회의는 또한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2차 회의와 제3차 회의 기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채택한 일련의 정령들을 승인하였으며 허정숙의 제의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수정 및 보충안 작성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9월 전원회의
1958년 9월 26-27일간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1) 밭 관개 및 논 관개 면적을 더욱 확장할 데 대하여 2) 금속공업발전을 촉진시킬 데 대하여 토의하고 해당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전원회의는 농촌에서 기술혁명의 중요고리의 하나인 관개체계의 확립을 위하여 이 사업을 <전당적 전인민적 운동>으로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회의는 또한 금후 관개건설의 기본 방향을 규정하였으며 1차 5개년 계획기간과 1959년도에 진행할 관개건설의 규모를 확정하고 그의 수행을 위한 기술경제적 제 대책을 명시하였다. 다음으로 전원회의는 금속공업을 가일층 발전시키며 금속 제품에 대한 수요를 원만히 충족시키기 위한 과업들을 제시하였다. 회의는 금속공업제품의 생산을 급속히 증대시키기 위하여 모든 야금 공장들과 광산들에서 부단한 기술적 개조를 진행하며 설비이용율을 더욱 제고하며 야금공장과 광산들의 건설을 더욱 앞당기며 수공업적 방법에 의한 철재 생산을 도처에서 진행하며 철재 절약을 대중적 운동으로 광범히 전개할 과업들을 제시하였다. 이와 함께 지질탐사사업을 더욱 확대강화하며 광물자원을 적극 탐사확보할 것을 제시하였다. 전원회의는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촉진시킬 것>을 전체 당원들에게 호소하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편지를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한 조직문제를 취급하였다.

 한반도 비핵 평화지대 창설 제안
1986년 6월 23일 북한은 정부 성명을 통해 한반도의 비핵, 평화 지대 창설에 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 성명에서 첫째 북한 정부는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저장과 반입을 하지 않으며 외국의 핵기지를 포함한 모든 군사기지의 설치를 허용하지 않으며 외국의 핵무기들이 자기의 영토, 영공, 영해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둘째로는 미국정부가 한반도를 비핵지대,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남한에 대한 새로운 핵무기 반입을 중지하고 이미 반입한 모든 무기들의 단계적 감축과 완전 철수를 주장하고, 셋째로 북한과 미국 및 남한 당국간에 비핵지대, 평화지대 창설에 관한 협상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응할 것이라고 성명 하였다.

 애국열사릉
1986년 9월 17일 평양시 교외의 신미리에 애국열사릉이 준공되었다. 애국열사릉에는 항일빨치산 출신과 함께 <항일혁명투쟁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도와 나선 반일애국지사들과 남조선에서 활동한 혁명가들과 진보적 인사들, 조선인민군 지휘관으로, 과학자, 문화예술인으로 일하다가 희생된 애국열사들이 안치>되었다. 1986년은 김일성의 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1926년 10월 17일) 60주년이며, 조국광복회 창건(1936년 5월 5일 동강회의) 50주년, 새날소년동맹 결성 60주년, 조국광복회 기관지인 <3.1월간> 창간 50주년 등 김일성의 <혁명전통사>에서 중요한 기념의 해였다.

 김일성 소련 친선방문
1986년 10월 22-26일 김일성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인 고르바초프의 초청으로 소련을 친선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는 정치국 위원들인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 당 중앙위원회 비서 허담이 수행하였다. 22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방문기간 동안 고르바초프와 회담 및 단독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들에서는 <두 나라 정세를 호상 통보하였으며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친선협조관계를 더욱 확대 발전시킬 데 대하여서와 공동의 관심사로 되는 일련의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김일성은 <조선반도의 정세를 분석하고 제국주의침략책동을 반대하며 조선에서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아세아와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조선로동당의 입장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김일성은 <소련공산당 27차대회의 과업관철을 위한 투쟁에서 달성하고 있는 성과들을 축하하고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소련의 평화적 발기들을 적극 지지>하였다. 고르바초프는 북한 근로자들이 <사회주의건설에서 이룩한 성과들을 열렬히 축하하고 이 성과들은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정력적인 영도의 결과>이며, <조선로동당의 당사업이 잘되고 있는데 대하여 지적하면서 당과 인민이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단결된 것을 열렬히 축하>한다고 언급하고, <소련 당과 인민은 남조선에서 미군과 핵무기를 비롯한 모든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조선반도를 비핵지대, 평화지대로 전변시키며 어떠한 외세의 간섭이 없이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을 견결히 지지한다고 강조하였다> 김일성은 방문기간에 고르바초프의 평양 방문을 초청하였으며, 고르바초프는 이를 수락하였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평양개최 발기
북한 청년학생들은 국제평화의 해인 1986년 7월 18일 평양에서 <핵전쟁의 위험을 막고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집회>를 가지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1989년 여름 평양에서 진행할 것을 발기하였다. 1986년 11일 부다페스트에서 진행된 세계민주청년련맹 제12차대회와 1987년 1월 아디스 아바바에서 진행된 국제학생동맹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를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87년 2월 6-8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국제준비위원회 제1차회의에서는 1989년 여름에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진행하는데 찬성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1차 회의
1986년 12월 29-30일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1차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주석 선거, 국가지도기관선거 등이 토의되었다. 회의에서는 김일성을 주석으로 재추대하였으며, 중앙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회, 최고인민회의 법안심의위원회를 선거하고, 중앙인민위원회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과 중앙검찰소 소장을 임명하였으며, 중앙재판소 소장을 선거하고, 정무원 총리 이근모(李根模), 부총리 홍성남(洪成南) 등을 선출하였다.

 남북고위급정치군사회담 제안
1986년 12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1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시정연설을 통해 남북의 고위당국자들과 함께 군사실권자들이 참가하는 <남북고위급정치군사회담>을 가지고 거기에서 남북사이의 정치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들과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협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김일성은 이 회담에서 <상호 비방중상을 중지하고 여러 분야에서 합작과 교류를 실현하여 민족적 유대를 도모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을 협의 해결하며 무력축소와 군비경쟁의 중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와 큰 규모의 군사연습 중지와 같은 문제들을 토의 해결해야 할 것> <중립국감독위원회의 권능을 높이고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 쌍방의 군사행동을 감시하는 기구로서 중립국감독위원회 성원국들인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위스, 스웨덴의 군사인원들로 중립국감시군을 조직하는 문제를 협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구호나무 발굴
1987년 2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시기 본부인 이른바 <백두산밀영>이 개영한 직후인 1987년 5월 이 지역 주변의 수립지대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구호를 나무에 새긴 이른바 <구호나무>가 첫 발굴되었으며 이후 그해 말까지 400여대의 <구호나무>가 나왔다고 한다. 북한측 주장에 따르면, 1988년에 들어와서는 그 수가 더욱 늘어나 8월까지 1,300여대, 11월말까지 2,400대 1989년 1월말까지 3,026대의 <구호나무>에서 3,050점에 달하는 구호가 발굴되었으며, 이 중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숙을 칭송한 구호나무가 466점이었다. 구호나무 발굴 지역은 북부국경 일대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 함경남북도와 자강도 등 북부조선의 넓은 지역을 포괄한다고 한다. 이 구호나무가 나온 지역들은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한 백두산지구를 비롯하여 연사군에서 은덕군에 이르는 두만강연안일대, 선봉군에서 함경남도 리원군에 이르는 동해안선일대, 그리고 낭림산 줄기와 부전령 산줄기, 함경산줄기 등을 따라 위치한다고 발표되었다. 1987년 초부터 시작된 구호발굴 사업을 계기로 1988년 이후 백두산밀영 중심으로 하는 북부조선 일대에 사적발굴사업 진행되었다. 북한측은 1990년 초까지 <구호문헌> 1만여 점을 발굴했으며, 그 발굴 지역은 1989년 들어 더욱 확대되어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거의 모든 도, 시, 군, 구역을 포괄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북한측의 주장에 따르면 이 구호문헌들의 내용은 회의 장소와 토의내용을 전하는 표식을 전하는 것에서부터 <항일혁명투사들과 혁명적 수령관> <열렬한 조국애와 우리 민족제일주의정신> <불굴의 혁명정신과 필승의 신념> <혁명적 낙관주의정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사업은 물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등 이른바 <혁명전통>을 입증하고 후계자인 김정일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김일성 중국 친선방문
1987년 5월 20-26일 김일성은 중국을 공식 친선 방문하였다. 김일성의 중국방문에는 정치국 위원이며 부주석인 리종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며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인 김영남, 조선로동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이며 당중앙위 비서인 허담이 수행하고, 중국주재 북한 대사가 동행하였다. 김일성은 21일 베이징에 도착하여 중국공산당 총서기 대리이며 중국 국무원 총리인 조자양, 국무원 부총리인 만리,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습중훈,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이며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인 양득지 등의 영접을 받았으며,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가 주석인 이선념과 회견하였다. 같은 날 조자양과 이선념이 공동으로 마련한 연회에 참석하였다. 이 연회에서 이선념은 <순치(脣齒)의 관계에 있는> 양국의 친선관계를 재확인하는 한편 북한정부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북고위급정치군사회담 제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미국과 남한측이 남북대화 재개 및 3자회담의 실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으며, 중국이 홍콩 및 마카오에 대한 주권회복문제를 옳게 처리하고 있고 대만을 귀속시켜 중국을 통일하려는 중국측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나라들과 블록불가담국가들을 비롯한 세계 모든 평화애호역량이 굳게 단결하여 반전평화운동을 힘있게 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베이징 체류기간 동안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등소평, 조자양 등과 회담하였는데 이 회담들에서는 양국의 친선협조관계의 발전문제, 공동의 관심사로 되는 일련의 문제들에 대해 의견이 교환되었다고 한다.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3차 회의
1988년 4월 5-7일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3차회의가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을 비롯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참가하였다. 또한 당, 정권기관, 행정경제기관, 사회단체 일군들, 과학 교육 문화예술 보건 부문 일군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고 북한주재 각국 외교대표들이 초대되었다. 회의에서는 <1987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과 1988년 국가예산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회의의안에 대한 재정부장의 보고에 이어 토론이 진행되었다. 보고자는 1987년 국가예산수입은 303억 3,720만원으로 1986년에 비하여 106.3%로 빨리 늘어났다고 지적하였다. 토론 결과 최고인민회의 결정 <1987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에 대하여>와 최고인민회의 법령 <1988년 국가예산에 대하여>를 대의원 전원찬성으로 채택하였다.

 무용표기법
북한 무용표기연구집단은 15년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새로운 무용표기법을 연구 완성하였다. 새로 창제된 무용표기법은 자모식으로 된 34개의 무용문자들을 기본으로 하여 무용형상의 수단과 요소들을 기록한 것이다. 이 표기법에서는 몸 움직임을 4가지 형태와 11가지 놀림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모음적 기능을 수행하는 문자로, 12개의 자리문자와 7개의 방향문자를 자음적 기능을 수행하는 문자로 제정하였다. 북한에서는 이 무용표기법이 <과학성> <통속성> <보편성>을 가짐으로써 무용예술작품의 보급과 보존, 무용교육과 과학연구사업 발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며 특히 국제적인 무용예술교류사업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줄 것으로 평가하였다.

 포괄적 평화방안 제의
1988년 11월 7일 북한 중앙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정무원 연합회의 평양에서 진행하고 평화통일을 위한 포괄적 평화방안을 제의하였다. 회의에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포괄적인 평화보장 대책에 대하여>를 상정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우선 안팎의 정세를 분석 평가하고 나라의 평화문제를 해결할 수 잇는 현실적 가능성이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데 대하여 주목하였다. 특히 회의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최근 남한 당국자가 유엔총회에서 한 발언에서 군사문제를 협의할 용의를 표시한 사실에 유의>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간주하였다. 회의에서는 우선 조선반도의 평화보장을 위한 공동의 기초로서 1) 통일 지향 2) 외국무력 철수 3) 남북의 군축 4) 당사자 대화 등 평화보장 4원칙을 제기하였다. 또한 이 원칙에 기초하여 포괄적인 평화방안을 제기하였다. 그것은 1)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단계적인 미군무력의 철수와 남북 사이의 군축, 중립국감독위원회 권능확대, 북한과 미국 및 남한 3자 회담 진행 2) 남북의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호비방 중지, 상호비난 대결고취 정치행사 중지와 상대 체제 부정 법규 개정,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 실시,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대규모 군사연습 중지, 군사분계선 일대의 일체의 군사행동 중지, 우발적 충돌사건 확대 방지를 위한 쌍방 고위급당국자 사이의 직통전화 개설 3) 남북 고위급 정치군사 회담 실시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이를 통해 3자회담과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이 성과적으로 추진된다면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연합회의의 제안은 남한 및 미국 정부의 서한으로 발송되었다.

 제6기 제14차 전원회의
1988년 11월 28-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14차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김일성의 사회로 진행한 이 회의에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들과 정치국 위원 및 후보위원들, 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들,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들이 참가하였다. 또한 중앙과 지방의 당 및 행정경제기관 일군들, 과학교육부문 일군들, 공장 기업소 지배인 당 비서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의사일정으로는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공업을 빨리 발전시킬데 대하여>가 제기되었으며 정치국 위원이며 당 중앙위원회 비서인 연형묵이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토론이 전개되었으며, 김일성이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전원회의는 현시기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 공업을 빨리 발전시키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전원회의는 오늘 우리 앞에는 이미 이룩한 성과에 기초하여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 공업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켜 가까운 몇 해 사이에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 공업을 세계적 수준에로 올려 세워야 할 영예로운 투쟁과업이 나서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오늘의 시대는 전자공업의 최신과학기술에 토대하여 공작기계를 수자조종화하고 생산공정을 로봇화하는 전자화의 시대, 로봇화의 시대>라고 지적하고 <수자조종공작기계와 로보트생산을 늘리는데 힘을 집중할 데 대하여 지적>하였다.

 문익환 목사 방북
1989년 3월 25일 - 4월 3일 한국의 문익환 목사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면담하고, 허담 등의 조국통일위원회 관계자들과 회견하였다. 4월 2일 문익환 목사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자격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인 허담과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는 7.4 남북공동성명의 3대 원칙이 재확인되고 연방제 통일 지향,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교류협력을 위한 상호 노력,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반대 등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성명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조국통일위원회 측에서 문익환 목사가 주장한 남북교류와 <점진적> 연방제 통일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 성명에서는 연방제의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연방제 실현을 위한 방도로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1990년 김일성의 신년사에서 북한의 공식 제안으로 구체화되었다.

 제6기 제16차 전원회의
1989년 6월 7-9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16차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김일성의 사회로 진행된 이 회의에는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정치국 위원 및 후보위원들, 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들,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들이 참가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당 및 행정경제기관 일군들, 공장, 기업소 지배인, 당비서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당의 경공업혁명 방침을 관철하여 인민소비품 생산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킬데 대하여> 토의하고, 그 결과 김일성이 결론 연설을 하였다. 전원회의에서는 <현시기 경공업 발전의 중심과업은 이미 마련된 경공업의 튼튼한 토대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경공업공장들의 현대화를 다그쳐 경공업을 한단계 더 높이 발전시킴으로써 인민소비품에 대한 인민들의 수요를 더욱 원만히 보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구체적 과업으로는 방직공업의 발전에 의한 1993년 천 생산량 15억 미터 달성, 신발공업의 발전, 식료가공품생산의 3.2배 증대 등의 구체적 과업을 제시하였다. 또한 <2-3년 안으로 전반적 경공업 제품의 질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도록 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경공업의 발전을 위해 원료보장을 위한 화학공업의 발전, 기술일군양성사업의 강화, 경제조직사업의 개선강화, 경공업부문에 대한 당의 지도 개선 강화 등의 과업을 제기하였다.

 김일성 중국 비공식 방문
1989년 11월 5-7일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초청에 따라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는 노동당 정치국 위원들인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인 김영남,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허담이 수행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며 중국 중앙군상위원회 주석인 등소평, 중국공산당 총서기 강택민,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국무원 총리인 이붕 등이 김일성을 베이징 역에서 영접하였다. 6일 오전 김일성은 등소평과 회담하였으며, 동일 오후에는 강택민과 회담하였다. 7일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며 국가주석인 양상곤 및 이붕과 회견하였다. 이 회담 및 담화 가운데에서는 <전통적인 조중 친선을 더욱 공고 발전시킬데 대한 문제와 국제정세 등 호상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한 의견이 교환>되었다. 또한 북한측의 사회주의건설 및 통일문제 입장에 대해 중국이 지지를 표명하였으며, <반혁명폭란을 평정하고 4개 기본원칙을 견지하며 개혁 개방을 견지하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한> 중국측의 입장에 대한 북한의 지지의사가 표명되었다. 한편 김일성과 중국 지도자들은 이들 회담에서 <당의 영도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 입장에 대해 확인하였다.

 제6기 제17차 전원회의
1990년 1월 5일부터 9일까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17차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김일성의 사회로 진행된 이 회의에는 당 중앙위원 및 후보위원, 당중앙검사위원회 위원들이 참가하였다. 또한 중앙과 지방의 당 및 행정경제기관 일군들, 공장 기업소 지배인, 당비서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회의에는 <인민경제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증산과 절약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릴데 대하여>를 의제로 상정 토의하였다. 1980년대를 정리하는 의미를 가지는 이 회의에서는 <80년대가 사회주의건설역사에서 가장 거창한 전변이 일어난 창조와 비약의 연대이며 주체사상의 기치 밑에 사회주의를 성과적으로 건설해 나가는 당의 불패의 위력과 영도력이 모든 분야에서 힘있게 과시된 영광의 연대>라고 자평했다. 이는 사상 기술 문화 3대혁명을 벌여온 결과라고 지적하며 <90년대에 사회주의건설에서 보다 큰 승리를 이룩하려는 당의 확고한 결심을 강조하면서 경제건설에서 결정적인 전진을 가져올 중요한 투쟁과업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증산하고 절약하며 이미 마련된 경제토대가 은을 내게 하자>는 구호를 제시하고 전당 전국 전민이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최대한으로 증산하고 절약할 것을 호소했다. 회의에서는 <증산절약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서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생산을 높은 수준에서 정상화>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회의에서는 이 <증산절약투쟁이 단순한 경제실무적 사업이 아니라 대중의 사상을 발동하여 전당과 온 사회에 새로운 혁명적 기상이 차넘치게 하는 중요한 정치적 사업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남북 정상, 정당 수뇌 협상회의
1990년 1월 1일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남북의 정상 및 각 정당 수뇌가 참석하는 협상회의를 제안하였다. 김일성은 <군사분계선 남측 지역에 쌓아놓은 콩크리트 장벽>을 제거하고 자유로운 내왕을 실현하여 남북을 서로 전면 개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남과 북 사이의 협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러한 협상을 위해 <북과 남의 최고위급이 참가하는 당국과 각 정당 수뇌들의 협상회의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진행되던 남북당국 사이의 회담과 국회회담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회담들을 활발히 추진시켜 나아가는 동시에 <광범한 협의를 거쳐 민족공동의 통일방도를 확정하기 위하여 북과 남의 당국과 정당, 단체 대표들이 참가하는 민족통일협상회의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계속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1990년 1월 9일 북한의 <정부, 정당 대표들의 연합회의>에서는 이 제의의 구체적 실현 방도를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남한 당국과 각 정당 수뇌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채택하고 정무원 총리의 위임을 받은 2명의 연락원을 서울에 파견하여 전달하도록 결정하였다. 또한 2월 24일 개최된 2차 연합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정무원총리 연형묵이 위임에 의해 남한 대통령인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노태우, 국무총리 강영훈, 평민당 총재 김대중에게 서한을 보내기로 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1차 회의
1990년 5월 24-26일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1차회의가 진행되었다. 새로 선거된 대의원들이 참가하였고 당 정권기관 및 행정경제기관, 사회단체 일군들, 과학 교육 문화예술 보건출판보도부문 일군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회의에는 1) 국가 주석 선거 2) 국가지도기관 선거 3) 1989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과 1990년 국가예산에 대하여 등의 의안이 논의되었다. 주석 선거에서는, 5월 23일 진행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18차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이종옥이 김일성을 국가주석으로 재추대할 것을 제의하였고, 만장일치로 재추대가 결정되었다. 뒤이어 국가주석인 김일성의 제의에 따라 부주석을 선거하였으며, 국방위원회 조직,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및 위원 선거,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사무장 및 의원 선거, 중앙검찰소 소장 임명, 중앙재판소 소장 선거, 정무원 총리 선거가 있었다. 또한 정무원 총리로 선출된 연형묵이 정무원 성원들을 발표하였다. 이 밖에 최고인민회의의 부문별 위원회인 법안심의위원회, 예산심의선거위원회, 외교위원회, 통일정책심의위원회를 선거하였다. 세 번째 의안인 예산 문제에 대해서는 재정부장 윤기정의 보고 및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회의 보고와 이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결정 <1989년 국가예산 집행의 결산에 대하여>와 최고인민회의 법령 <1990년 국가예산에 대하여>를 각각 채택하였다.

 북한과 일본 수교협상 시작
1990년 9월 24일 일본자민당 및 사회당 대표단은 북한을 방문하였다. 25일 조선로동당과 일본대표단장이 회담을 가졌으며, 27일에는 김일성(金日成)이 가네마루 신(金丸信)과 단독회담을 가졌다. 28일에는 공동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이후 북한과 일본은 수교협상을 진행하였다.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고 1991년에는 부부장(차관)급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간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1월 30-31일 평양에서 제1차 본회담이 진행된 이후 1991년에 5차에 걸친 회담이 진행되었다. 북한은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일본의 식민통치 공식 사죄를 요구하고 전후 45년간의 피해를 포함하는 배상금 지급을 요구하는 한편,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문제 등을 제기하였다. 일본측은 배상문제와 관련하여 전후 45년간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고 보상이 아닌 재산청구권 문제로 규정하였다. 또한 일본은 핵문제의 해결, 재북 일본인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남북대화와 수교협상을 연계시켰다. 수교협상은 8차회담까지 진행되었으며, 1992년 11월 이후 중단되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9월 17일 유엔총회 제46차 1차 회의에서는 각각 남한과 북한의 유엔가입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북한의 유엔 가입은 북한정부 수립 직후부터 요구해온 바였지만,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이전의 <하나의 의석에 의한 공동가입>을 주장해온 데서 입장이 변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조치>로 간주했다. 1990년 5월 24-26일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1차 회의에서 김일성이 <하나의 의석에 의한 공동가입」을 주장한 이후로, 북한은 만약 <통일이 실현되기 전에 유엔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남과 북이 두 개 의석으로 제각기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석을 가지고 공동으로 들어갈 데 대한 입장>을 유지해 왔다. 북한은 이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유엔동시가입을 결정한 데 대해 <남한 당국만이 유엔에 단독으로 들어가 유엔무대를 분열의 고정화에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남북합의서
1991년 12월 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 사흘째 회의에서는 양측 수석대표인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연형묵」의 명의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합의서)에 서명했다. 동년 12월 26일에는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의 연합회의에서 <남북합의서>를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다음 해 2월 19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발효시켰다. <남북합의서>는 서문과 1)남북화해 2)남북불가침 3)남북교류 협력 4) 수정 및 발효 등을 규정한 4장 25조로 구성되었다. 서문에는 1) 7.4공동성명의 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2)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해 민족적 화해를 이루고 3)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유지하며 4) 다각적인 교류 협력으로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한다는 점을 밝히고 <쌍방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다. 합의서는 화해부문에서 1) 상호체제의 인정 존중 2) 내부문제 불간섭 3) 비방, 중상금지 4) 파괴, 전복행위 금지 5) 현 정전상태를 남북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하는 것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판문점에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 운영하기로 규정했다. 또 남북불가침 부문에서 1) 상호무력 불사용 불가침 2)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을 규정하고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을 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했다. 또한 1) 불가침 이행보장을 위해 3개월내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고 2) 무력충돌을 방지키 위해 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 설치 등 구체적인 조치를 규정했다. 1972년 12월 동독과 서독간에 합의된 기본 조약을 모델로 한 <남북합의서>는 비록 남북관계를 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여 그 성격이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간 조약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북 정부당국간에 이뤄진 최초의 공식 합의 문건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남북합의서> 채택은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였다는 점, 더욱이 7.4공동성명과는 달리 구체적인 실천방안 및 기구구성까지 합의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제6기 제19차 전원회의
1991년 12월 24일 조선로동당 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김정일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했다.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제5기 17차 전원회의에서 당비서로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은 1980년 10월 제6차 조선로동당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당 군사위원으로 공식 등장해 권력 전면에 나섰으며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위원장 김일성)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이러한 조치는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비서로 북한 권력의 핵심인 노동당을 장악한데 이어 군 통수권마저 김일성으로부터 넘겨받아 실질적인 권력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북한의 권력구조상 국가주석이 당 총비서, 중앙인민위원회 국방위원장, 인민군 총사령관을 겸직토록 되어 있었다. 또한 북한군 지휘체계상 국방위원회와 군사위원회가 최고사령관을 감독하게 돼 있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본다면 군 통수권의 전권이 이양된 것으로는 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는 국가주석인 김일성이 중앙인민위원회 국방위원회 및 당 군사위원회 위원장직을 유지하는 가운데 그의 후견 아래 김정일에로의 권력 이양이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음을 의미하였다.

 나진 선봉의 자유경제무역지대 설정
1991년 12월 28일 북한 정무원은 함경북도 나진, 선봉지역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설정한다는 내용의 「정무원 결정문」제174호를 채택했다. 이 결정문에서는 세계 여러나라들과 경제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북한정부의 일관된 방침이라고 지적하면서, <나진-선봉지역이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인접나라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과의 경제교류 협력을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데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들어 이 일대의 6백21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설정한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문은 이어 「자유경제무역지대」에서는 북한관계기관의 승인 하에 외국인에 대한 합작기업, 합영기업, 외국인 재정지원기업 등 각종 형태의 기업설립운영 및 각종 서비스사업 종사가 허용되며 이 지역 내에 있는 나진 및 선봉항과 인접지역인 청진항을 자유무역항으로 한다고 밝혔다. 나진-선봉지역 자유무역지대화 구상은 그동안 유엔개발계획(UNDP)에 의해 제기되고 논의되기는 했으나 북한당국이 이를 설정할 것을 공식 발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미전향 장기수 송환 요구
북한은 1992년 1월 남북교류협력분과위에서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이인모(李仁模)의 송환을 한국 측에 처음으로 공식 요구했다. 이때부터 소위 「이인모 문제」가 남북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북한은 1992년 5월 서울에서 열린 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도 이인모의 송환을 강력히 요청했다. 이인모 북송 문제는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된 노부모이산가족 및 예술단의 교환방문 실시 무산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거듭되는 북한측의 요구에 대해 한국은 <이인모 문제>를 이산가족 문제 및 납북인사 송환문제와 연계시켜 대응하였으나, 1993년 3월 10일 한국 정부의「무조건」송환 결정에 따라 3월 19일 무기한 방북의 형식으로 북한으로 송환됐다. 이후에도 1994년 11월 15일 비전향 장기수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등의 송환을 촉구하는 평양시 군중집회를 진행하고, 1996년 8월 30일 조선적십자회 위원장 대리 이성호(李星鎬)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게 출소장기수 김인서의 송환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는 등 북한측은 장기수의 송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발표
1992년 1월 20일 남북고위급회담의 북한 대표단 단장인 정무원총리 연형묵과 남한측 대표단 수석대표인 국무총리 정원식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문에서는 남과 북은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위험을 제거하고 우리 나라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는다> <핵에네르기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하여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들에 대하여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가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사찰을 실시한다>, 공동선언 발표 후 1개월 안에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구성 운영한다는 등의 사항에 합의하였다.

 종군위안부 문제
1992년 3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인 박성철 부주석,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 정당, 사회단체 책임일꾼들, 관계부문 일꾼들이 참가하는 <정당, 사회단체 연합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남북이 종군위안부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할 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보고자는 <종군위안부>문제는 <지난 태평양전쟁시기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강요당한 수난과 모욕의 일단을 청산하는 문제로서 북에만 국한되는 문제도 아니고 남에만 해당되는 문제도 아니며 북과 남이 힘을 합쳐 풀어야 할 민족공동의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보고자는 일본당국의 책임과 사죄 및 보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쌍방이 시급히 공동대응책을 제의하였으나 남한측이 공동 대처하는 데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데 대하여 비판하였다. 보고자는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이 힘을 합하여 공동대응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 실천적 조치로서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민족공동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기하였다. 또한 종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대일 공동대응책을 강구해 나가는데서 나서는 제반 문제들을 협의 해결하기 이하여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들의 예비회의를 빠른 시일 안에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연합회의에서는 남한의 정당, 단체들과 각계 인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채택되었다. 호소문에서는 남북이 힘을 합쳐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공동투쟁을 벌려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3차 회의
1992년 4월 8일부터 10일까지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3차 회의가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는 김일성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참가하였다. 또한 당, 정권기관, 행정경제기관, 사회단체 일꾼들, 과학 교육 문화예술 보건 출판보도 부문 일꾼들,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조총련 인사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회의에는 북한주재 각국 외교대표들이 초대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 1991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과 1992년 국가예산에 대하여 2)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심의결정한 법들을 승인함에 대하여 3) 북한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 사이에 맺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 따르는 담보협정을 비준할데 대한 제안심의에 대하여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일부 수정 보충함에 대하여 등의 의안이 채택되었다. 재정부장이 첫째 의안에 대해 보고하며 1991년 국가예산수입 총액은 371억 9,484만원으로서 계획은 100.2%로 넘쳐 수행하였으며 전해에 비하여 104.2%로 늘어났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1991년 국가예산은 2억 8,560만원에 달하는 지출에 비한 수입초과를 가지고 성과적으로 결산되었다고 하면서 이것은 사회주의 예산제도의 우월성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지적하였다. 회의에서는 1991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과 1992년 국가예산에 대한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회 보고가 있었으며 토론들이 진행되었다. 토론자들은 1992년 국가예산이 사회주의 건설의 방대한 과업수행을 재정적으로 담보할 수 있도록 정확히 편성되었다고 하면서 이에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였다. 회의에서는 둘째의안인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심의결정한 법들을 승인함에 대하여>를 토론하였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사회주의상업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승인함에 대하여>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도시경영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승인함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형사소송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승인함에 대하여>를 각각 대의원 전원찬성으로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셋째 의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 사이에 맺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 따르는 담보협정을 비준할 데 대한 제안심의에 대하여>를 토의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원자력공업부장이 보고를 하였다. 그는 북한 정부가 1985년 12월 12일에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 가입한데 언급하고 이것은 핵에네르기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 이용하며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입장을 내외에 선언하는 것으로서 노동당의 일관한 반핵평화정책으로부터 출발한 정당한 조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본 회의에서 핵담보협정이 심의되고 승인되면 국제원자력기구와 합의되는 실무적 절차에 따라 지체없이 핵사찰을 받을 것이라는 북한 정부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어 셋째의안에 대한 토론들이 있었다. 그 결과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결정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 따르는 담보적용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 사이의 협정을 승인함에 대하여>를 대의원 찬성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회의에서는 넷째 의안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일부 수정 보충함에 대하여>를 토의하였다. 의장 양형섭은 수정 보충한 사회주의헌법을 본회의 심의에 제기하였다. 그는 수정 보충된 헌법을 해설한 다음 수정 보충된 헌법초안을 낭독하였다. 회의에서는 이를 전원찬성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결정 <1991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에 대하여>와 최고인민회의 법령 <1992년 국가예산에 대하여>를 대의원 전원찬성으로 각각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과 위원들,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회 위원을 새로 선거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북한 헌법 개정
1992년 4월 9일 북한은 1972년에 채택된 <사회주의헌법>을 개정하였다. 새로 개정된 헌법은 우선 기본 체계의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이전의 6개의 독립된 장으로 구성되었던 국가기구 규정이 8개의 절로 구성된 하나의 장으로 변화하였으며, 기본원칙을 규정한 정치 경제 문화 章 다음에 국방이 독립된 장으로 신설되었다. 내용상의 가장 큰 변화는 국가의 지도사상에 관련한 변화였다. 즉 1972년 사회주의헌법에서 국가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규정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조항이 삭제된 점이었다. 기존헌법에서 주체사상에 대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규정하고(제4조) 대외관계의 기본원칙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원칙>(제16조)이 천명되었던 데 반해서 새 헌법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체사상으로 대체시켰다. 새 헌법에서는 국가는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제3조) 규정하였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주체사상의 핵심개념인 <자주성의 옹호>(제17조)로 대치하였다. 두 번째로는 기존 헌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실시>(제10조)를 규정하고 있는데 반해 <인민민주주의독재 강화>(제12조)를 규정하였다. 세 번째는 주권문제와 관련하여 1972년 헌법에서 국가의 주권이 <노동자, 농민, 병사, 근로인테리>에 있다고 규정했던데 반해 <노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으로 규정하였다. 네 번째로는 권력구조의 측면에서 기존 국가주석에게 부여되었던 군통수권을 국방위원장에게 부여하였다. 위와 같은 헌법 개정은 동구 사회주의 몰락과 소련의 해체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사실상의 군 통수권자인 김정일에게 국가수반의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팀스피리트훈련 재개 무조건 철회 요구
1992년 10월 27일 <정부, 정당, 단체 연합회의>가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되었다. 연합회의에는 북한 정부, 정당, 단체 대표들과 범민련 북측본부 성원들, 남북고위급회담 북측 대표단 성원들이 참가하였다. 연합회의에서는 <미국과 남조선당국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연습 재개결정에 공동으로 대처할 데 대하여>를 토의하였다. 연합회의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이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인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이 보고를 하였으며 토론들이 진행되었다. 보고에서는 <미국과 남조선 당국자들이 도발적인 팀스피리트 합동군사연습 재개를 결정한 것을 비롯하여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새로운 군사적 모의를 진행함으로써 완화와 화해의 방향으로 발전하여 오던 북남관계가 불신과 대결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매우 엄중한 사태가 조성>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고자는 <팀스피리트 합동군사연습이 재개되면 북남대화가 파괴될 뿐 아니라 북남사이에 이미 이룩된 합의사항들의 이행도 차단 당하여 화해와 불가침 분야는 물론 경제와 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의 협력, 교류가 실현될 수 없게 된다>고 하면서, <팀스피리트> 합동군사연습 재개를 무조건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연합회의에서는 결정서와 세계각국 정부, 정당, 국회들에 보내는 편지가 채택되었다. 이 결정서에서는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이 팀스피리트 합동군사연습을 끝내 강행하는 조건에서는 앞으로 북남고위급회담은 물론 각 부문별 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남조선당국과의 모든 대화와 접촉을 동결시키도록 할 것>이며 <팀스피리트 합동군사연습 재개 기도를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범민족적인 운동을 적극 벌여나가도록 할 것>이라고 주장했 다.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4차 회의
1992년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4차 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롯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1) 산림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2)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심의 채택한 법들을 승인함에 대하여 3) 조직문제 등의 의안이 채택되었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회 위원장이 첫째 의안에 대한 보고를 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법령 <산립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대의원 전원찬성으로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둘째 의안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보고자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사회주의헌법 제101조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3차 회의가 있은 때로부터 제4차 회의에 이르는 기간 국기법과 외국인투자법, 합작법, 외국인기업법을 심의채택한데 대하여 지적하였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법령들인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국기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승인함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외국인투자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승인함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합작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승인함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외국인기업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승인함에 대하여>를 대의원 전원찬성으로 각각 채택하였다. 또한 회의에서는 셋째의안을 토의하고 정무원 총리로 강성산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제8차 대회
1993년 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제8차 대회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개막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에는 각 도, 시, 군 사로청 대표회들에서 선거된 대표자들이 참가하였다. 또한 대회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후보위원들, 시, 군당 책임비서들이 초대되었으며 당 일군들, 청소년교양 관계부문 일군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대회에는 김일성의 서한 <청년들은 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주체혁명위업을 빛나게 완성하자>가 전달되었다. 대회는 1) 청년들을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한 청년전위로 튼튼히 준비시키기 위한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의 과업에 대하여 2)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중앙검사위원회 사업총화에 대하여 3)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규약 개정에 대하여 4)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중앙지도기관선거에 대하여 등의 의정을 승인하고 토의하였다. 첫째의정에 대한 보고를 사로청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하였다. 보고자는 총결 기간 사로청 사업에서 이룩된 성과들에 언급하였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국가의 최고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치로 어쩔 수 없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는 <NPT 탈퇴는 미국의 핵전쟁 책동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국 내 일부계층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자위적 조치>라고 강조했다. 이 날 개최된 중앙인민위원회 제9기 7차 회의에서는 팀스피리트 재개 및 IAEA 특별사찰 강화로 조성된 정세를 토의하고 <팀스피리트훈련 재개, 특별사찰 요구 등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해와 사회주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한 절박한 요구로부터 자위권을 행사해 우리가 NPT탈퇴를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정부 성명은 NPT 탈퇴조치가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핵위협을 중단하고 IAEA이사회가 공정의 원칙을 되찾을 때까지 불변>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1985년 12월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였고, 1991년 7월 IAEA의 핵안전조치협정에 합의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임시사찰을 받아왔다. IAEA는 1992년 1월 말 북한 영변지역에 대한 6차 임시사찰에서 북한이 공개하지 않은 2개 핵시설 공개를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2월 25일 정기이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바 있으며 3월 25일까지 북한이 특별사찰을 수용토록 시한을 정한 바 있었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에 따라 한반도 정세는 극도의 긴장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고 그 결과 탈퇴선언의 효력발생을 보류하였다. 1993년 6월 11일 북한과 미국은 뉴욕에서 북한 핵문제 논의를 위한 네 차례의 고위급회담을 마무리하고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유보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는 1) 핵폐기를 포함한 무력사용과 위협을 하지 않으며 2) 한반도의 비핵화,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며 상대방의 자주권을 상호 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3)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는 등 3원칙이 포함되었다.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1993년 4월 6일 김일성은 이른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전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 단결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1) 전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국가를 창립 2) 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단결 3)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 4) 동족사이에 분열과 대결을 조장하는 일체 정쟁 중지 5)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같이 가시고 서로 신뢰하고 단합 6) 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며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 것 7) 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 재부 보호 8) 접촉, 내왕, 대화를 통한 이해와 신뢰, 단합 9) 남과 북, 해외 전민족 연대성 강화 10)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할 것 등으로 요약된다. 북한에서는 이 <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3대원칙, 1980년 김일성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제안과 더불어 조국통일 3대헌장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
1993년 4월 7일부터 9일까지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가 진행되었다. 김일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회의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참가하였으며 당, 정권기관 행정경제기관 사회단체 일군들, 과학 교육 문학예술 보건 출판보도 부문 일군들,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조총련 인사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회의에는 북한주재 각국 외교대표들이 초대되었다. 회의에서는 1)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전민족대단결 강령을 채택할 데 대하여 2) 1992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과 1993년 국가예산에 대하여 3) 지하자원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4)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채택한 법들을 승인함에 대하여 5. 조직문제 등의 의안이 채택되었다. 정무원 총리 강성산이 첫째 의안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첫째 의안에 대한 대의원들의 토론을 거쳐, 회의에서는 김일성이 작성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대의원 전원찬성으로 채택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회의에서는 <7천만 겨레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채택하였다. 한편 회의에서는 재정부장이 둘째 의안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회 위원장이 1992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과 1993년 국가예산에 대한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회 심의보고를 하였다. 셋째 의안에 대한 정무원 부총리의 보고에 이어 지하자원법 초안이 낭독되었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법령 <지하자원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대의원 전원찬성으로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넷째 의안에 대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보고를 청취하고 이에 대해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외국투자기업 및 외국인 세금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외화관리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자유경제무역지대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계량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각각 전원찬성으로 승인하였다. 다섯 번 째 의안인 조직문제를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선거하였다. 김일성의 제의에 의하여 회의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당중앙위원회 비서이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정일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오진우를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거하였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부문별 위원회 일부 위원장들을 소환 및 선거하고, 중앙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일부 소환 선거하였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결정 <1992년 국가예산집행의 결산에 대하여>와 최고인민회의 법령 <1993년 국가예산에 대하여>를 각각 채택하였다.

 단군릉 발굴
북한 사회과학원은 1993년 10월 2일「단군릉 발굴보고」를 발표하면서, 단군릉과 단군부부로 추정되는 5천11년 전의 유골을 발굴했다고 주장했다. 사회과학원은 또한 <단군릉 발굴로 우리 민족이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떳떳이 자랑할 수 있게 됐으며 고조선의 도읍인 평양이 인류발상지의 하나이며 민족의 발상지라는 사실이 힘있게 증명됐다>고 강조했다. 이후 1994년 1월에는 <단군릉복구위원회>가 조직되어, 평양시 강동군에 있는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축해 1994년 10월 11일 준공했다. 1994년 12월 30일과 1995년 10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단군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개건(改建)된 단군릉은 평양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 야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총부지 면적은 45정보(약 45만 평방m)로 크게 개건기념비 구역, 석인상구역, 무덤구역 등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능 건설에 모두 1994개의(김일성의 사망연도) 화강석이 쓰였고, 높이 8m인 개건기념비에 단군릉을 개건한 김일성 및 김정일의 업적을 기린 헌시가 새겨져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의 단군릉 개건에는 북한 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깊이 개입되어 있다고 해석된다. 즉 북한정권이 고조선, 고구려, 발해,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정통성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는 한편 김일성 김정일의 우상화에도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
1993년 10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는 당 비서들과 중앙기관 당 및 행정책임일군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우리나라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발표 30돐을 뜻깊게 맞이할 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 회의는 농촌에서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계속 추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농촌경리에 대한 지도와 관리를 개선하며 전인민적 소유와 협동적 소유의 련계를 강화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려 사회주의 집단경리의 우월성을 더욱 높이 발양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농업지도체계>의 요구에 맞게 <협동농장들에 대한 기업적 지도를 강화>하며 <분조관리제와 작업반 우대제를 바로 실시>하여 <협동농장관리 운영수준을 전반적으로 높이며> <협동농장들에 직접 복무하는 농업기업소들을 더 잘 꾸리고 그 역할을 높여 공업과 농업의 직접적인 생산적 련계를 강화>하고 협동적 소유에 대한 전인민적 소유의 지도적 역할을 끊임없이 높여 두 소유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도(직할시)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실시
1993년 11월 21일 도(직할시)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선거는 각급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선거법 시행세칙에 따라 각지에 조직된 선거분구를 단위로 하여 진행되었으며 전체 유권자의 99.9%가 선거에 참가하여 선거구들에 등록된 도(직할시) 인민회의 대의원 후보자들에게 100% 찬성 투표하였다. 선거 결과 전국의 모든 선거구들에서 3,520명이 도(직할시) 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은 선거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제6기 제21차 전원회의
1993년 12월 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21차 전원회의가 진행되었다. 김일성의 사회로 개최된 이 전원회의에는 당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들, 당중앙검사위원회 위원들이 참가하였다. 회의에는 1) 제3차 7개년계획 수행총화와 당면한 경제건설방향에 대하여 2) 조직문제 등의 의정이 상정되었다. 첫째 문제에 대하여 정치국 위원인 정무원 총리 강성산이 보고하였다. 김일성이 이에 대해 결론 발언을 하였고, 전원회의는 해당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전원회의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정치국 후보위원, 당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을 보선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심의에 제출할 조직문제를 토의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6차 회의
1993년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6차 회의가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되었다. 회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롯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당, 정권기관, 행정경제기관, 사회단체 일군들, 과학 교육 문화예술 보건 출판보도 부문 일군들,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조총련 일군들이 방청하였다. 회의에서는 1)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3)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채택한 법들을 승인함에 대하여 4) 조직문제 등의 의안이 채택되었다. 회의에서는 첫째 의안에 대한 보고와 토론들이 있었으며, 최고인민회의 결정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를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둘째 의안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정무원 부총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법> 초안을 낭독하고 여러 대의원들이 토론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법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채택하였다. 이어 셋째 의안을 토의하였는데,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심의 채택한 법들을 최고인민회의 승인에 제기하는 보고를 하였다.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법령들인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토지임대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국투자은행법을 채택함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방주권기관구성법을 수정 보충함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관법을 수 정 보충함에 대하여>를 각각 전원 찬성으로 승인하였다. 회의에서는 넷째 의안인 조직문제를 토의하고, 김영주, 김병식을 각각 부주석으로 선거하였다. 한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을 소환하고 일부 대의원들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으로 선거하였다. 또한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부문별 위원회 성원들을 일부 소환하고 선거하였다.

 북한 군사정전위원회 철수 선언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로부터 철수할 것이며, 중립국감독위원회 북측 감시국인 폴란드도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했다. 북한은 1991년 9월 한국군 장성이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라는 이유로 군사정전위 본회담을 거부해 왔기 때문에 비서장회의 철수는 사실상 군사정전위원회 기능의 정지를 의미하였다. 한편 북한은 이미 1994년 초 중립국감독위원회에서 체코를 철수시킨 바 있어 폴란드에 대한 철수압력은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 체제 무력화를 의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북측은 현존하는 휴전협정은 대체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준수하고 적대행위는 하지 않겠으며 현재 운용되고 있는 판문점내의 군사직통전화는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5월 24일 그 후속조치로서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새로운 협상기구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개설했다고 유엔군측에 통보했다. 북한측은 <판문점대표부> 설치의 목적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1994년 9월 1일 당가선 중국외교부부부장은 북한 특사 송호경 북한 외교부 부부장에게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중국대표단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밝혀 이 문제에 대한 북한측 입장을 지지했다. 이러한 북한과 중국의 태도로 인해 군사정전위원회는 사실상 그 기능을 정지하게 되고 중립국감독위원회는 현격히 축소됨으로써 두 기구를 기본 축으로 성립하는 정전협정체제는 상당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탈퇴 성명
북한 외교부는 1994년 6월 13일 1)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즉시 탈퇴하며 2) 북한이 특수지위 아래 받아온 <안전조치의 연속성 보증을 위한> 사찰을 더이상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이 성명에서는 <제재는 곧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한다>고 밝혔다. 이 성명은 IAEA가 정례이사회에서 핵문제와 관련,「북한에 대한 협력을 중단한다」는 결의를 채택한데 대한 대응으로 발표됐다. 국제원자력기구 탈퇴 성명은 핵안전협정 탈퇴는 아니었으나, 이로 인해 유엔의 북한 제재가 논의 예정되는 등 한반도의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6월 16일 김일성이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회담에서 미국이 3단계 북-미 회담과 경수로방식으로의 전환에 대한 지원을 약속할 경우 핵개발 계획을 동결할 의사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긴장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미간의 핵협상이 시작되었다.

 남북정상회담
1994년 6월 18일 김일성은 북한을 방문한 후 남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18일 카터 전 미대통령으로부터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김대통령을 빠른 시일내에 만나고 싶다>는 김일성의 구두메시지를 전달받고 이를 즉각 수락하는 한편 이러한 의사를 카터 전 대통령이 김일성에게 전해주도록 요청했다. 김영삼 대통령이「아무 조건없이」김일성을 만나겠다고 밝힌 것은, 이전까지 김영삼 대통령이 내건「핵투명성확보」등 남북정상회담의 전제조건들을 모두 철회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남북은 6월 28일 판문점에서는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접촉을 갖고 남북정상회담의 시기와 장소등을 협의한 결과 25일부터 27일까지 김영삼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서에서는 1) 남북정상회담을 7월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하되 2) 체류일정은 필요에 따라 더 연장할 수 있으며 3) 다음 정상회담은 쌍방 정상의 뜻에 따라 정하기로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일성이 7월 8일 사망함에 따라 7월 11일 북한측은 김용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편지를 보내 정상회담 연기를 통보해옴으로써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김일성 사망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북한의 김일성이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했다. 9일 북한 방송들은 김일성 사망 34시간만에 사망 소식을 보도했다. 북한은 7월 8일-17일까지를 애도기간으로 설정하고, 김정일,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총리 강성산, 부주석 이종옥 박성철, 외교부장 김영남 등 당 정 군 고위간부 273명으로 구성된 장의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19일 영결식을 가지고 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 김일성의 영구가 안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정권 수반의 지위에 오른 이후 북한을 50여 년간 통치해온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를 목전에 두고 사망하였다.

 북-미 제네바 핵협상 타결
북한과 미국은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기본합의문에 서명함으로써 1994년 9월 23일부터 진행해 온 핵협상을 타결 지었다.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인 강석주와 미국 순회대사 로버트 엘 갈루치가 서명한 이 기본합의문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흑연감속로와 연관시설들을 경수로 발전소들로 교체하기 위하여 협조한다>고 지적하여 북한의 핵시설을 동결하는 반면 미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북한에 경수로 2기와 대체 에너지를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서는 경수로 건설이 상당히 진행되고 나서 또 그 핵심부품이 도착하기 전에 <국제원자력기구가 필요하다고 간주하는 모든 조치>를 받아들이기로 하여 그간 문제가 되어 왔던 특별핵사찰을 사실상 수용하였다. 한편 이 합의문에서는 북-미 관계의 개선 추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즉 북미간의 <정치 및 경제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고 <통신봉사와 금융결제에 대한 제한조치들의 해소를 포함하여 무역과 투자의 장벽을 완화>하기로 하였다. 또한 상대국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양국관계의 진전에 따라 양국관계를 대사급으로 승격시킨다는 데에도 합의하였다.

 북-일 수교회담 재개 합의
1995년 3월 30일 조선로동당과 일본의 자유민주당대표단, 일본사회당대표단, 신당사끼가께대표단으로 구성된 일본 연립3여당대표단은 북한과 일본의 수교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 연립 3여당 대표단은 1995년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였다.이 방문기간 북한 정무원 강성산 총리가 일본의 연립3여당대표단을 만났으며, 당 중앙위원회 비서 김용순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로동당대표단과 이들 3여당 대표단 사이의 회담이 진행되였다. 그 결과 조선로동당대표단 단장 김용순, 자유민주당 대표단 단장 와따나베 미찌오, 일본사회당 대표단 단장 구보 와따루, 신당사끼가께대표단 단장 하또야마 유끼오 등은 중단되었던 북-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재개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 합의서에서는 4당이 <국교정상화의 조기실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대화재개와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에는 그 어떤 전제조건도 없다는 것 그리고 철저히 관계개선을 위한 것으로 되여야 한다> <두 나라사이의 회담이 철저히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4당은 집권당의 책임으로부터 각기 자기 정부가 두 나라사이의 조기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노력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또한 이 합의서에 따라 4당은 각각 북한과 일본 정부가 국교정상화를 위하여 새로이 제9차 회담을 속히 진행할 것을 권고하기로 하였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1996년 1월 19일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대표자회에서는 동맹의 명칭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바꾸었다. 이 대회 결정서에서 청년동맹은 <그 지도사상과 혁명전통으로 보나 창립경위나 발전노정과 혁명전통으로 보나> 오직 김일성의 이름과만 결부하여 부를 수 있는 김일성의 청년동맹이라고 규정하였다. 대회에서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의 개칭을 결정하면서 김정일의 영도를 따라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계승 완성할 것을 다짐하였다. 해방직후 민주청년동맹에서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으로, 다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발전한 청년동맹은 일반 대중단체와 마찬가지로 조선로동당의 사상과 정책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인전대>로서 기능하면서 동시에 노동당원을 육성해내는 예비대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청년동맹은 연령적으로 만 14-30세의 비당원으로 구성되고 있다. 일반 직장, 학교, 군대 등에 동맹조직을 두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청년들이 주요 구성원인 학교와 군대가 핵심 조직대상이다. 북한 사회에서 청년동맹은 특히 <혁명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김정일 후계체제의 확립에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해 왔다.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당시부터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의 영광스러운 청소년시절을 따라 배우자>라는 구호 아래 <김일성따라배우기운동>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김정일이 이룩한 <청년사업경험을 적극 따라 배우고 철저히 구현>하자는 모토아래 <김정일따라배우기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혁명과 청년운동발전의 요구에 맞게> 한다는 명분으로 동맹원들 사이에서 김정일에 대한 충실성을 <신념화, 량심화, 도덕화, 생활화>하는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이러한 청년동맹의 명칭 변경은 김일성 사후에도 청년동맹이 김일성의 노선과 정책을 옹위하는 체제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지속할 것이며,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는 의미를 가진다.

 북-미 잠정협정 체결 제안
1996년 2월 22일 외교부 대변인은 북-미 잠정협정 체결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는 기존의 정전협정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북한의 기본입장이 <한반도에서 완전하고 포괄적이며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하려면 북미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담화에서는 미국의 대북정책과 현 북미관계 수준을 고려하여, 완전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한반도 무장충돌 및 전쟁위험 제거와 정전상태의 평화적 유지를 위한 북미간 잠정협정 체결을 제안하였다. 이 잠정협정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관리, 무장충돌과 돌발사건 발생시 해결방도, 군사공동기구의 구성과 임무 및 권한, 잠정협정의 수정보충 등 안전질서유지와 관련되는 문제들이 포함되었다. 북한은 이 잠정협정의 이행 감독 주체로서 판문점에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북미 공동군사기구를 조직 운영할 것을 주장하고, 잠정협정을 채택과 북미 공동군사기구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협상 진행을 주장하였다.

 유엔사령부 해체 촉구
1996년 4월 10일 북한 외교부는 유엔사령부 해체를 촉구하는 <비망기>를 발표하였다. 외교부는 이 <비망기>에서 당시 유엔사무국이 편집 간행한 ≪유엔연감(특별판)≫에서 1948년 남한 선거 실시와 1950년 북한에 반대하는 군사적 조치를 취한 것을 공적으로 묘사한 데 대해 반박하면서, 유엔이 미국에 의해 한국 분열과 한국전쟁 촉발에 부당하게 이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으로 ≪유엔연감(특별판)≫이 유엔군사령부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데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유엔군사령부는 <사실상 유엔밖에 존재하면서 실제적인 교전 실체를 가리워주고 있는 유령기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정전협정의 법률적 당사자가 북한 및 중국 측과 유엔측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적 당사국은 북한과 미국이며, 정전체계를 관리 운영해온 직접적인 당사자도 북한과 미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사령부라는 간판과 유엔 깃발이 미국의 책임을 가리워주고 있다고 하였다. 외교부는 유엔이 <1950년에 미국에 유엔군사령부 조직을 권고했던 것처럼 그의 해체도 역시 권고할 수 있으며 최소한 미국에 의하여 도용되고 있는 자기의 이름과 깃발을 회수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조선반도의 평화보장을 위한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렇게 하는 것만이 유엔이 한반도 평화보장에 기여할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이고 처사라고 주장하였다.

 주체연호 시행
1997년 7월 8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 공동 결정서를 통해 김일성의 탄생연도인 1912년을 주체원년으로 선포하고 주체연호를 시행하는 한편,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을 국가 최고명절인 태양절로 지정했다. 이 결정서에서는 김일성이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며 <위대한 김일성 동지를 우리 당과 인민의 영원한 수령으로, 주체의 태양으로 천세만세 높이 받들어 모시며 수령님께서 이룩하신 혁명업적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대를 이어 빛내여 나가는 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전체 인민의 한결같은 의지>라고 주장하였다.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합동회의
1997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합동회의가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인 리종옥 부주석과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성원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들과 위원들, 정무원 및 사회단체 책임 일군들, 범민련 북측본부 중앙위원들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김정일의 저작인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에서 제시한 <조국통일대강>의 관철 대책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이며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보고를 하고 이에 대해 토론하였다. 회의에서는 조국통일 3대 헌장에 기초하여 연방제 방식에 의한 통일국가 창립과 <제도통일>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회의에서는 현시기 북남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서 나서는 절박한 요구라고 하면서 이를 위하여서는 남한 당국자들이 외세에 의존하고 외세와 <공존>할 것이 아니라 남북 사이의 정치적 및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며 남조선의 사회정치생활을 민주화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정일 당총비서 추대
1997년 10월 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특별 보도>를 통해 김정일의 총비서 추대를 발표하였다. 김정일의 총비서 추대는 당대회 혹은 전원회의를 개최하지 않고 각급 당 대표회를 개최하여 추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특별보도에 따르면,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 대표회, 도(직할시) 대표회, 성, 중앙 및 도당 기능을 수행하는 당조직들의 대표회들이 진행>되었으며, 이들 대표회에서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우리 당의 총비서로 추대할 데 대하여>를 토의하고 김정일을 당 총비서로 추대할 데 대한 결정서들을 채택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는 이들 당조직의 의사를 반영하는 형식을 취하여 김정일이 <당의 공인된 총비서로 높이 추대>되었음을 발표한 것이다. 김정일은 조선인민군총사령관, 국방위원장 취임에 이어 당 총비서에 취임함으로써 그가 북한의 핵심 근간 조직인 당과 군을 통괄하는 명실상부한 지도자임을 대내외적으로 재확인시켰다.

 남한과 대화, 협상 용의 천명
1998년 2월 18일 정당, 단체 연합회의에서는 남한과의 대화 및 협상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평양에서 진행된 이 회의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며 부주석인 박성철,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며 부주석인 김병식 등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북과 남이 단합하여 자주적으로 민족의 출로를 함께 열어나가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이며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인 김용순은 보고에서 김영삼 정권의 퇴진과 관련하여 <자주와 민족적 단합을 지향하는 새 정치는 남조선에서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일정에 올라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7.4 남북공동성명 3대원칙과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 그리고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내용으로 하는 조국통일 3대헌장을 지침으로 삼아 자주와 단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용순은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바와 같은 <국제공조>를 단호히 배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늘 우리 앞에 긴절하게 나서는 과제는 최악의 상태에 있는 남북관계를 화해와 단합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김영삼 정권의 종말과 함께 반북 대결정책도 끝장내고 반북대결을 연북화해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용순은 <앞으로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 민족자주와 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의 길을 열어나갈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남조선의 정당, 단체들을 비롯하여 그 누구와도 대화와 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이 김용순의 보고를 적극 지지하고 남한의 정당, 단체들에 보내는 편지를 채택하였다.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 방북
1998년 6월 17-23일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은 북한을 방문하고, 금강산 관광 사업에 합의하였다. 방북 기간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와 관련 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1989년 당시 북한을 방문한 정주영은 북한측과 금강산을 국제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기로 합의하고 의정서를 체결한 바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었다. 1998년 10월 다시 방북한 정주영은 10월 30일 김정일과 면담에서 현대의 금강산 독점개발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98년 11월 18일부터 금강산 관광이 개시되었다.

 인공위성 발사 주장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고 9월 4일 중앙방송이 주장했다. 북한측의 이러한 주장은 8월 31일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옛 명천군 대포동)에서 발사된 물체가 신형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1호 미사일>임을 공식 부정하는 것이었다. 중앙방송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를 인용 <우리 과학자 기술자들이 다기관 운반로켓트로 첫 인공지구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했다>고 밝히고 <운반로켓트는 8월31일 12시7분에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86도 방향으로 발사돼 4분53초만인 12시11분53초에 위성을 자기 궤도에 정확히 진입시켰다>고 전했다. 이 방송은 이어 <운반로켓트는 3계단으로 되어 있다>면서 <1계단은 발사 후 95초만에 분리돼 발사장으로부터 253킬로미터 떨어진 북위 40도51분, 동경 139도40분의 동해 공해상에 떨어졌다. 2계단은 1백44초만에 머리부 유선체를 활개하고 2백66초만에 분리되어 발사장으로부터 거리 1천6백46킬로미터인 북위 40도13분, 동경 149도7분의 태평양 공해상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3계단은 2계단이 분리된후 27초만에 위성을 궤도에 진입시켰다. 위성은 지구로부터 제일 가까운 거리 2백18.82킬로미터, 제일 먼거리 6천9백78.2킬로미터의 타원궤도를 따라 돌고 있으며 주기는 1백65분6초>라고 전하고 <위성에는 필요한 탐측기재들이 설치돼 있으며 우주를 평화적으로 이용키 위한 과학연구사업을 추진하는데 이바지하게 된다>고 밝혔다. 중앙방송은 이번 인공위성 발사가 <앞으로 실용위성발사를 위한 계산토대를 확증하는 데도 의의가 있다>면서 <지금 위성에서는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정일 장군의 노래> 선율과 함께 <주체조선>이라는 모르스 전신부호가 27MHz로 지구상에 전송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방송은 <이번에 우리 과학자, 기술자들이 단 한번의 발사로 궤도에 정확히 진입시킨 운반 로켓트와 인공지구위성은 1백% 우리의 지혜와 기술로 개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는 1992년에 이어 1990년대 들어 두 번째의 헌법개정이었다. 사회주의헌법을 전(全) 7장 166조로 개정하면서 국가주석 및 중앙인민위원회를 폐지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와 정무원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으로 각각 개편하였다. 북한은 신헌법 서문을 통해 <김일성 동지를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며 그의 사상과 업적을 옹호 고수하고 계승 발전시켜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헌법개정에서 그동안 김정일이 유지해온 국방위원장직에 대해 <정치 군사 경제역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는 국가최고직책>으로 규정하여 실질적인 국가수반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이는 1994년 7월 김일성(金日成)사망 후 4년여 동안 계속돼 왔던 과도기적인 국가운영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공식적인 <김정일 시대>를 열었음을 의미한다.

 중국 공식 방문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金永南)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국무원의 초청으로 1999년 6월 3일부터 7일까지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김영남의 중국 방문은 북한 고위인사로서는 91년 10월 김일성(金日成)의 방중 이후 7년 8개월만에 처음으로,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 이후 소원해졌던 북한-중국 관계와 관련하여 주목받았다. 김영남의 방문 과정에서는 북-중 정상 상호교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전통적 우호관계를 재확인했다.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4일 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양국관계를 한층 발전시키기 위해 충분히 의사를 교환했다>며 <이를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영남은 북한의 대내외 정책에 대한 중국측의 지지를 얻었다. 주룽지(朱鎔基) 중국총리는 북한의 경제정책에 관해 <중국은 북한의 조선식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가능한 지원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북한의 대외정책에 대해 <중국은 남북 관계개선을 지지하며 북한이 미국, 일본, 유럽연합 등 서방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하고 최종적으로 관계 정상화를 이룰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김영남의 방중 과정에서 양국은 두 나라 관계의 개선의 원칙을 확인한 이외에도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식량 15만 톤과 코크스 40만 톤 무상지원 등 경제적 지원을 약속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북한은 50명에 이르는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면서도 경제관련 각료를 1명도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대신에 백남순 외무상, 박동춘 외무부상, 김일철 인민무력상, 호위총국의 김연주, 김학두 등 외무 국방부문 인사를 대표단에 대거 포함시켰다. 이는 양국 지도자들이 우호관계 유지 및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중국식 개혁 개방 정책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효화 선언
1999년 9월 2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라며 북한측 해상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북한은 <서해 해상 우리의 영해 안에 제멋대로 설정한 미군측의 강도적인 북방한계선은 무효임을 선포한다>며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에 대한 자위권은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에 의해 행사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한편 1) 정전협정에 따른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선 2) 북측 강령반도 끝단인 등산곶과 한국측 굴업도 사이의 등거리점(북위 37도 18분 30초, 동경 125도 31분) 3) 북측 옹도와 한국측 서격렬비도, 소엽도 사이의 등거리점(북위 37도 1분 12초, 동경 124도 55분) 등을 연결하는 수역을 인민군측 해상군사통제수역으로 선포했다. 이 수역에는 NLL 이남의 한국측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이 포함되었다. 북한은 7월 21일 개최된 유엔사령부와의 판문점 장성급회담에서 이와 같은 해상경계선을 제시하고 한국 및 미국 간에 실무접촉을 가질 것을 제의한 바 있었다. 북한은 이날 취한 조치가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 문제를 협상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미군측이 끝내 문제토의를 외면하고 비법적이고 강도적인 북방한계선 문제를 계속 고집하고 있는 조건에서 우리의 당당한 해상군사통제수역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측의 이러한 조치는 9월 15일 발생한 이른바 연평해전 이후 남북관계의 새로운 긴장요인으로 등장하였다. 이에 대해 유엔군사령부 및 한국정부는 NLL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며, 새 해상경계선 문제 논의는 남북합의서에 따라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논의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북-미 베를린 미사일 협상 타결
1999년 9월 12일 북한과 미국 고위급 회담 대표단은 1999년 9월 7일부터 12일까지 베를린에서 진행해 온 미사일 협상을 타결했다. 북한과 미국은 1996년 4월 20일에 제1차 미사일회담을 개최한 이후 4차에 걸친 미사일 회담, 1999년 6월 23-24일 1차 북미 고위급 회담 이후 3회에 걸친 고위급회담을 통해 미사일 협상을 벌여왔다. 협상 대표인 김계관 (金桂寬) 북한 외무성 부상과 찰스 카트먼 미국 한반도평화회담 특사의 명의로 발표한 공동발표문에 따르면, 양측은 경제제재와 미사일 문제를 포함한 현안에 대한 우려를 해결하기 위한 계속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또한 <양측은 이같은 노력을 계속하기로 합의했으며 양국 관계개선과 동북아시아 및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안보 증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당분간 긍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위와 같은 표현은 1998년 <인공위성> 발사 이후 미사일 문제는 <주권행위>라고 주장해 온 북한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서, 이는 사실상 북한측이 미사일 발사를 유예하며 미국은 대북 경제제재를 해제하기로 잠정 합의했음을 의미하였다. 이에 따라 1999년 9월 17일 미국은 대북 경제제재 완화 조치를 발표하였고, 9월 24일 북한 역시 북미 고위급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의 이 합의는 그간 미국이 요구해온 <미사일개발 포기>를 명시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으며 협상의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었지만, 한반도 평화구도 정착에 큰 걸림돌이 돼 온 미사일 문제 해결에 중요한 전환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이후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 개선은 한층 탄력을 얻게 되었다.

 김두봉(金枓奉)
김두봉(金枓奉:1890-1961)은 경남 동래 출신이다. 서울에서 기호학교(畿湖學校:中央高等普通學校의 전신)와 배재학교에 다녔으며, 1913년 대동청년단에 가입했다. 이 무렵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하여 소년 잡지 ≪청춘≫을 편집했으며,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가담했다. 1917년 보성고보, 휘문고보, 중앙고보에서 시간강사를 지냈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4월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신채호(申采浩)가 주필로 있던 순한문 신문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 편집을 맡았다. 그즈음 신한청년당에 가담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22년 상해에서 ≪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출간했다. 1924년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1928년 11월 이후 인성학교 교장(28.11-32.9, 1933)을 지냈다. 1928년 대한독립당촉성회 참여, 1930년 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40년 민족혁명당 중앙위원 겸 조선의용대 편집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 주력 부대와 함께 태항산 팔로군 근거지에 도착했다. 1942년 5월 태항산 반소탕전에 참여했다. 7월 태항산에서 개최된 화북조선독립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주석에 취임했다. 1944년 4월 연안에서 조선혁명청년학교 교장, 1945년 2월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이 되었다. 1945년 12월 북한으로 귀국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3월 조선신민당 위원장이 되었다. 8월 북조선로동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6년 김일성 대학 초대 총장이 되었다. 194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대외적인 국가수반의 지위에 올랐다. 1956년에 발생했던 <8월 종파사건> 연루 혐의로 195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자기비판을 하고 12월 전원회의에서 비판받았다. 1958년 6월 최고인민회의 회의에서 대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1961년 사망했다.

 최창익(崔昌益)
최창익(崔昌益)은 함북 온성에서 태어났다. 일본 조도전(早稻田)대학 정경과를 다녔다. 1923년 6월 귀국했다.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했다. 7월 고려공산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위원이 되었다.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0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12월 사상단체 사회주의자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화요파와의 협상에 서울파 대표로 참가했다. 12월 코민테른 파견 서울파 대표자로 선임되었다. 1926년 봄 조공 지부 승인 문제에 대한 서울파의 견해를 코민테른에 전달했다. 4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민족당주비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7년 귀국 후 조공에 입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35년 출옥했다.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해 민족혁명당에 참여했다. 1938년 6월 김원봉(金元鳳)의 지도노선에 불만을 품은 48명의 사회주의 청년과 함께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한 뒤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결성했다. 7월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명칭을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바꾸고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의 통일전선 단체로 성립된 조선민족전선연맹에 합류했다.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기관으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지도위원이 되었다. 그해 말 일본군에 의해 무한(武漢)이 함락되자,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延安)으로 이동했다.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교관을 지냈으며 팔로군 129사(師) 교도단(敎導團)에서 활동했다. 1939년경 무정(武亭)과 함께 항일, 조중(朝中)연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청년당을 결성했다. 그후 조선의용대의 북상 공작을 추진했다. 1941년 1월 산서성(山西省) 태항산(太行山)에서 조직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간부로 선임되었고,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교사가 되었다.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확대 개편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상무위원, 서기부장이 되었다. 1945년 독립동맹 부주석이 되었다. 1945년 12월 평양으로 귀국했다. 1946년 2월 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하고 부위원장이 되었다. 8월 북조선로동당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인민검열국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 북한 재정상이 되었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52년 11월 북한 부수상,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의 실질적 주모자로 지목되어 실각했다.

 김책(金策)
김책(金策:1903-1951)은 함경북도 학성군(현재 김책시)에서 태어났다. 용정 동흥중학교에 입학했다. 재학중 반일청년단체에 참가했다. 1927년 화요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하여 연길현 수신향 세포에 배속되었다.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1930년 10월 영안현에 건립된 지방 소비에트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31년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심양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곧 구출되어 중국공산당 빈현(賓縣) 특별당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2년 9월 주하(珠河)중심현위 군사위원이 되었다.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 제1단 정치부 주임, 1938년 제3군 정치부 주임, 1939년 4월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43년 10월 동북항일연군 부대로서는 맨 마지막으로 만주에서 철수하여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1944년 1월 항일연군 교도려 (일명 88여단)에 합류하여 제3영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5년 7월 중공 동북위원회 내에 설치된 조선공작단 간부가 되었다. 1945년 9월 김일성(金日成)과 함께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귀환했다.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2월 평양학원 원장이 되었다. 8월 북조선로동당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위원 겸 상무위원이 되었다. 1948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민족보위국 초대국장이 되었다. 1948년 9월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내각부수상 겸 산업상이 되었다. 1949년 6월 조선로동당 정치위원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위원, 전선사령관이 되었다. 1951년 1월 3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강건(姜健)
강건(姜健:1918-1950)은 본명은 강신태(姜信泰)로 경북 상주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7년 만주 길림성 영안현으로 이주했다. 1930년 여름 아동단에 입단했으며 1933년 영안현 팔도하자에서 항일유격대에 입대했다. 주보중(周保中)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에서 활동했다. 1936년 제2로군 제3사 9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1년 소련 영내로 이동하여 항일연군 교도려 (일명 88여단) 제2영 정치위원, 제4영 영장을 지냈다. 1945년 9월 연변으로 진출하여, 중국공산당 연변위원회 서기, 동북민주연군 길동군구 사령원이 되었다. 1946년 가을 북한으로 귀국하여, 1946년 9월 함경북도 나남 소재 보안간부훈련소 제2소장이 되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면서 총참모장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북한정부의 수립 이후 민족보위성 부상 겸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9월 8일 전사했다. 9월 10일 내각 제25차 전원회의에서는 강건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며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하도록 하는 한편, 조선인민군 제1중앙군관학교에 강건의 이름을 달며 그의 유가족을 보호하도록 하는 내각결정 제158호, 166호가 채택되었다.

 허가이(許哥而)
허가이는 190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전연방레닌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다. 얼마 후에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다. 1933년 5월 - 1934년 9월 키네슈무 시 콤소몰 지역위원회 제2서기로 일했다. 1934년 9월 스베르들로프 전소련공산주의농업종합대학에서 공부했으나 1935년 7월 중퇴하였다. 1936년 2월부터 전연방레닌공산주의청년동맹 아무르주위원회 조직부장으로 근무하였다. 1936년 말 혹은 1937년초에 포시에트 구역 공산주의청년동맹 제1서기직을 맡았다. 이후 포시에트 구역 공산당위원회 제2서기가 되었다. 1937년 출당되고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 부근으로 이주하였다. 1939년 복당되었다. 1941년 여름 공산당 지역위원회 제2서기, 1941년 말 니즈니치르치크 구역 공산당 지역위원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1943년 타슈켄트 근처의 파르하드스트로이에서 진행된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당위원회 부서기, 1944-1945년 타슈켄트 부근 한인 부락에서 중소형 수력발전소 건설업무를 지도하였다. 해방 후 입북하여 1945년 12월 17-18일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제3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조직부 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1947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11차회의에서 당 강령 및 규약 수정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8년 3월 북조선로동당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48년 9월 25일 당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조직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9년 6월 남북조선로동당 연합중앙위원회의 결성과 조선로동당으로의 개칭 당시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1년 1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차 전원회의에서 당 조직사업에서 관문주의적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고 비서의 직책에서 물러나 내각 부수상이 되었다. 1953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에서 저수지 복구사업 문제로 비판받았다. 1953년 7월 2일 오전에 이 문제를 재차 토의하게 되는 정치위원회를 앞두고 자살하였다고 발표되었다.

 박헌영(朴憲永)
박헌영(朴憲永:1900-1956)은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2년 3월 대흥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했다. 4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3월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11월 상해로 망명했다. 1921년 3월 재상해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1년 5월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기관지 ≪올타≫ 편집자가 되었다. 8월 북경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9월 상해 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922년 2월 중퇴했다. 3월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 결성에 참여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4월 국내에 입국하려다가 신의주 경찰서에 검거되어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24년 1월 출옥했다. 1924년 2월 서울에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했다. 3월 고려공청 중앙총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4월 동아일보사에 취직했다. 같은 달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신흥청년동맹의 기관지를 발행하기 위해 <신흥청년사>(新興靑年社)를 창립하고 상무위원이 되었다. 8월 조선일보사 기자로 취직했으나, 11월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퇴직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전국대회에 참석하고 집행위원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1월 <제1차조선공산당사건> 때 검거되었으나,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1928년 8월 소련으로 망명하여,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29년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졸업한 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문제 뜨로이까 위원이 되었다. 1933년 1월 상해에 파견되어, 조선공산당 조직준비위원회 국내 조직과의 연계활동과 기관지 ≪꼼무니스트≫ 편집에 종사했다. 7월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9년 9월 만기출옥했다. 12월 경성콤그룹에 가담했다. 1940년 4월 경성콤그룹 지도자 겸 기관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해 12월 이후 1941년 12월까지 3차례에 걸쳐 경성콤그룹 관련자에 대한 검거사건이 발생하자, 광주 백운동 벽돌공장으로 은신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상경하여 <8월테제>를 발표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9월 조선공산당 총비서가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스탈린과 면담했다. 10월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했다.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에서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 9월 북한 정권 수립에 합류하여 부수상 및 외상이 되었다. 1949년 3월 북한 정부대표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6월 남북조선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제2비서가 되었다. 1950년 5월 북한 정부에 의해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한국전쟁 시기 1950년 10월 인민군의 후퇴에 즈음하여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되었다. 1952년 말 이승엽 일파의 숙청 당시 조선로동당에서 숙청되었다. 1955년 12월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하반기에 처형되었다.

 쉬띄꼬프
쉬띄꼬프(1907-1964)는 류쁘꼬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7년 직업기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이래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제2비서, 1939-1940년 소련과 핀란드 전쟁 시기 제7군 군사회의 위원, 2차세계대전 시기인 1942-1943년 레닌그라드전선 군사회의 위원, 1943-1944년 볼호프스끼전선 군사회의 위원, 1944년 까렐스끼이전선 군사회의 위원을 역임했다. 1945년 4월 이래 1947년까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위원, 1947-1948년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을 지냈다. 1946년 3-5월, 1947년 5-10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로서 미국과 한국문제를 논의했다. 북한정부 수립 이후인 1948-1951년 북한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를 지냈다. 1951-1959년 당사업에 종사하여 소련공산당 노브고로드주 위원회, 연해주변경위원회 제1비서를 역임했다. 1959년 4월 이래 헝가리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를 지냈으며, 1961년 이래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 내각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 1963년 2월 이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당 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1939-1952년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56-196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남북 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
1949년 6월 30일 남북 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 노동당의 합당과 조선로동당으로의 개칭이 결정되었다. 1994년에 발간된 ≪김일성전집≫ 제9권에 수록된 이 회의에서의 김일성의 보고에 따르면, 이미 1948년 8월 2일 남북조선노동당은 연합중앙지도기관을 조직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로 칭할 것을 결정하였다. 김일성은 <민주역량과 반동세력간의 정치투쟁>이 극도로 첨예화되어 무장투쟁에까지 이르게 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조선로동계급의 통일이며 모든 민주역량의 통일이며 진정한 애국자들의 통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남북 노동당이 통일되어야만 해결될 수 있으므로 유일한 조선로동당으로 합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양당의 중앙위원회를 하나의 유일한 중앙위원회로 연합하고 거기에 남북조선로동당연합대회를 소집하기 전까지 두 당을 지도할 권한을 주며 현존하는 연합중앙지도기관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로 개편할 것>을 제의하였다. 남북로당이 합당됨에 따라 조선로동당은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선임되었으며 박헌영과 허가이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신설된 당비서에는 허가이, 이승엽, 김삼룡이 임명되었으며, 정치위원회 위원에는 김일성, 박헌영, 김책, 박일우, 허가이, 이승엽, 김삼룡, 김두봉, 허헌이 선출되었다. 이와 함께 9명의 정치위원에 최창익과 김열을 포함시켜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조만식(曺晩植)
조만식은 1883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1888년-1896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897년-1904년 상업에 종사했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했다. 같은 해 4월 일본에 건너가 동경 정칙(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년 4월 동경 명치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1913년 3월 졸업했다. 동 4월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되었고 1915년 오산학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2월 오산학교장을 사임하고, 동 3월 4일 상해 임시정부로 향하던 중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920년 1월에 가출옥했다. 1921년 평양 YMCA 총무에 취임하였다. 1922년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고 민립대학기성회준비회를 결성했다. 1923년 송진우, 김성수 등과 함께 연정회에 참여하였으며,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 이상재, 한용운, 송진우, 현상윤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오산학교장에 재취임했으나 1926년 사임하고 평양 숭인중학교장이 되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1927년 숭인상업학교 이사장이 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를 평양에서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1932년 평양 YMCA 총무를 사임하였다. 동 6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1933년 7월 사임하였다. 1936년 평양에서 을지문덕 장군 묘수보회(墓修保會)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44년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에 은거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17일 새벽 평양에 귀환하여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그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8월 26일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종용으로 사회주의자들과의 연립정권인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수립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다. 9월 중순부터 정당 조직에 착수하여 11월 3일 평양에서 창당대회를 개 최하여 조선민주당을 창립하고 당수가 되었다. 1946년 1월 5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1950년 6월 북한에서 조만식을 남로당 지도부인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무산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달현(金達鉉)
김달현은 1884년 함경남도 고원 출생으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세에 천도교에 입도한 후, 1918년 일본 청삼축산전문학교(靑森畜産專門學校) 축산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경성 휘문중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1년 평양에서 체포되었다. 1923년 무산동맹 이사, 1925년 고원소작조합 간부, 1926년부터 천도교 고원 종리원장, 천도교 도사 등으로 활동했다. 해방 직후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7월 22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 결성 당시 의장이 되었다. 1947년 2월 21일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의원회 부의장이 되었으며, 1947년 11월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위원으로 헌법초안제정사업에 참가했다.1948년 4월 천도교청우당 2차 전당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재선출되었다. 1948년 9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및 부의장이 되었다.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9월 무임소상이 되었다. 1958년 10월 천도교청우당에서 제명되고 숙청 체포되었다.

 혁명자유가족학원
1947년 3월 24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혁명자유가족학원 창립을 결정하였다. 이 학원은 김일성의 출생지이기도 한 만경대에 창설되었다. 김일성은 1947년 8월 3일 이곳을 직접 방문하였다. 9월 10일에는 기공식이 만경대에서 거행되었고, 한달 만인 10월 12일에 역시 김일성의 참석 하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혁명자유가족학원에는 개교와 함께 최저 9세부터 23세까지의 연령인 320명이 입학하였으며, 그 가운데 남자는 296명 여자는 24명이었다. 입학생들의 부형은 이등박문 암살에 참가한 사람부터 3.1운동, 단천농조사건, 원산태평양노조사건 등 국내에서 대중운동을 한 사람,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하여 희생된 사람 등 다양하였다. 해방후 산업 운수기관에서 일하다가 산재를 당한 노동자의 자녀들도 일부 입학하였다.

 김일성, 박헌영 모스크바 방문
1949년 3월 김일성,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스탈린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에서 김일성 등은 전쟁에 의한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북한군이 남한군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1950년 3월 김일성은 북한주재 소련대사인 쉬띄꼬프를 통하여 4월 초 스탈린과의 면담을 제의하였다. 그는 남북한의 통일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여타 공산당내 문제 등을 의제로 스탈린과 협의하기 바란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 3월 23일 스탈린이 이에 동의하면서 1950년 4월 김일성 및 박헌영은 스탈린과 다시 면담하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계획하고 있는 통일과정을 시작하는데 동의하였다. 동시에 개전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억류 한인의 남한 송환 반대
1957년 12월 31일에 50개월에 걸친 한일회담예비교섭이 타결되었다. 이 예비교섭에는 오무라수용소에 수용중인 1598명의 조선인 등이 45일 이내에 남한으로 송환되고 부산에 억류중인 일본인도 일본으로 송환이 결정되었다. 일본은 1958년 1월 19일에 제1차로 억류교포 69명을 석방하였고, 1월 22일에 제2차로 66명을 석방하였으며 남한도 1월 31일에 300명의 일본어부을 일본으로 송환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억류하고 있던 교포 가운데서 94명이 북한으로의 송환을 희망하고 이에 대한 일본측의 태도가 모호함으로 인하여 쌍방 억류자의 송환이 지연되었다. 이런 상황의 전개 속에서 북한의 남일외상이 오무라수용소에 억류중인 조선인의 남한 송환을 반대하고 북한으로 송환을 요청하였다.

 재일동포 귀국 촉진 요청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이 창설된 후, 재일동포들은 더욱 조직화되고 절대다수의 재일동포들이 조총련 산하에 집결하였다. 조선로동당은 조총련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하고, 교육원조금 명목의 지원금을 지원하였다. 1958년 8월 11일에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의 집단귀국 결의가 있었고, 8월 12일에 도쿄에서 개최된 조선해방 13주년 기념 재일조선인 중앙경축대회에서 귀국실현결의가 채택되었다. 195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경축대회에서 김일성은 재일동포의 입북 후 생활조건 보장과 귀국에 필요한 수단과 비용제공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남일외상은 일본정부에 재일동포 귀국 실현을 요구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9월 전원회의
김일성의 참석하에 9월 26-27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끝난데 맞추어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보수주의와 소극성을 없애고 대담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1) 밭관개 및 논관개 면적을 더욱 확장할데 대하여 2) 금속공업 발전을 촉진시킬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김일성은 농촌경리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된 후 수리화를 농촌기술혁명의 당면과업으로 제시하고 밭관개체계의 확립과 논관개 면적의 확대를 지시하였다. 또 급속히 늘어나는 철재에 대한 인민경제 각 부문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금속공업부문에서 5개년 계획과제를 앞당겨 수행할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고, 강재의 품종과 규격을 계속 늘이며 질을 높일 것도 요구하였다.

 북-중 무역협정 및 차관협정 체결
1958년 2월 14일에서 21일 사이에 주은래를 단장으로 한 중국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였고, 1958년 중의 중국군의 완전철수를 합의하였고 실제적으로 완료되었다. 중국군의 철수가 완료되기 직전 이주연(북한 부수상, 무역상)을 비롯한 북한 통상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1959-1962년간 상호 중요물자 공급에 관한 협정 및 북한에 대한 차관제공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서 중국은 북한의 5개년 계획기간에 3억원의 무상원조와 차관제공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12월 29일에 중국이 북한에 제공한 8억원(중국화폐)의 결산 의정서에 조인하였다.

 전반적 중등의무교육제 실시에 관한 법령
1958년 당시의 북한의 교육체계는 인민학교 4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으로 되어 있었는데 1956년 8월부터 전반적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북한은 경제개발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많은 수의 기술인력을 확보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1958년 10월 1-2일에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4차 대회에서 전반적 중등의무교육제를 실시하며 기술의무교육제를 준비할데 관하여 토의하고 법령을 채택하였다. 이 법령에는 1958년 11월 1일부터 전반적 중등의무교육제를 실시할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기술의무교육실시를 위한 준비사업을 진행하고 특히 2년제 각종 기술학교들을 설치할 것과 기술학교들의 물질 기술적 토대의 축성, 대량으로 요구되는 교원 양성 및 교원재교육 기관의 신설 확장이 결정되었다. 북한은 중등의무교육제의 실시를 아시아에서 처음 실시된 역사적 사건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농업협동조합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통하여 토지의 재분배를 이루었던 북한은 분배된 토지의 매매를 금지함으로써 협동적 토지소유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정치 경제적 정세의 변화는 북한의 농업체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53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농업협동화의 과업이 제시되었고, 이 방침에 따라 농업협동조합은 빠른 속도로 추진되었다. 3가지 형태로 구분되는 농업협동조합은 처음부터 협동화가 가장 높은 형태를 목표로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1958년 8월에 농업협동화가 완수되었다. 조선로동당은 자연부락단위로 조직된 농업협동조합들을 리단위로 통합하는 조치들을 취했으며, 리인민위원장이 농업협동조합 관리위원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모든 협동조합에서는 빈농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고, 부농들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
1950년 12월 25일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국인민지원군은 1953년의 한국전쟁 휴전협상의 한쪽 당사자로 남아서 전쟁의 종결에 참여하였다.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에 주둔하면서 북한의 전후복구를 지원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의 시작은 1954년 10월에 7개 사단 87,894명의 철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의 완료는 1958년 2월에 주은래를 대표로 하는 중국정권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이 발표한 성명(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동시철수와 중립국 감시하 총선)에 따라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1958년 4월가지 1단계로 8만여명이 철수하였고, 8월까지 2단계, 3단계로 10월 25일까지 완전 철수하였고, 북한은 10월 26일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완전 철수를 발표하였다.

 정부대표단 베트남 친선방문
1957년 7월 7-12일에 월맹 대통령 호지명이 북한을 방문하여 반미 연대성을 강화할 것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었다. 1957년 8월 1일에 북한은 월맹에 5만루블의 무상원조를 제공하였다. 1958년 11월 28-12월 2일에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여 북한대표단이 월맹을 방문하였다. 북한과 월맹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 진영의 통일과 단결을 주장하고, 반미공동 투쟁에 상호협조할 것과 공산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호소하였다. 또 경제, 과학, 문화, 예술 등의 각 분야에서 교류촉진과 친선을 강화하였다.

 1959년 신년사
김일성은 1958년을 사회주의건설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둔 해로 의미를 규정하였다. 도시와 농촌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달성되었고, 사회주의 공업화의 실현에서도 커다란 전진을 이룩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공업부문에서는 대야금공장 설비와 중형기계까지 자체의 힘으로 생산하였고, 자동차, 뜨락또르, 불도젤, 굴착기, 화차를 비롯한 새로운 기계제품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지방의 모든 예비와 가능성을 동원 이용하여 1,000여개의 중소지방산업공장도 건설하였다. 농업부문에서는 혹심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370만톤의 알곡을 생산하여 획기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김일성은 주장하였다. 이어서 1959년에는 알곡을 500만톤 이상 생산하고, 농촌의 전기화를 실현할 것을 전망하였다.

 사회주의 농업협동화 관련 결론 연설
김일성은 관개면적을 100만 정보로 늘리고 치산치수사업을 잘하여 홍수와 가뭄 피해를 막을 것을 강조하였다. 논면적을 계속적으로 늘리고, 밭관개 공사를 대대적으로 할 것과 하천정리사업, 사방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영농방법에서는 토지이용률을 높여 알곡생산을 높이기 위하여 다모작 경종법을 널리 받아들이고 집약적 영농법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집약적 영농법의 기본은 논밭을 깊이 갈고 곡식을 배개 심으며, 비료를 많이 주는 것인데, 김일성은 이런 방법을 쓴다면 가까운 앞날에 700만톤 이상의 알곡을 생산할 수 있으며, 2-3년 안에 전체 인민이 이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농촌기술혁명의 기본과업으로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를 제시하고 노동계급과 농민과의 튼튼한 동맹을 이룩할 것과 협동조합이 농민생활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였다. 또 협동조합이 리단위로 통합되어 규모가 커짐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노농적위대
1958년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 후, 북한은 노농적위대를 창설하였다. 노농적위대는 당과 혁명이념을 고수하고 국가와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노농적위대는 군(郡)단위를 연대로, 2-3개 리와 동 및 대학을 대대, 각 리와 동 및 직장을 중대, 작업반과 인민반을 소대로 편성하고 있다. 구성원은 제대군인, 노동자, 농민, 사무원, 학생 등 18-50세의 남자와 18-35세의 여자로 구성되어 잇고, 당위원장이 각급 제대장을 겸임하고 있다. 노농적위대의 평시임무는 사회안전부를 지원하여 향토를 경비하며, 전시에는 예비병력으로 동원되어 후방작전에 참가한다. 노농적위대는 국방력 강화에 있어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전인민을 튼튼히 무장시켜 유사시에는 생산과 전투를 모두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전인민무장화를 목표로 추진되었으며, 국방에서의 자위의 원칙을 철저히 관철하는 토대의 하나라고 주장되고 있다.

 최고인민회의 제2기 5차 회의
최고인민회의 제2기 5차회의는 1959년 2월 19-21일까지 평양에서 김일성의 참석하에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957년 국가예산 집행에 관한 결산과 1959년 국가예산에 대하여 2) 농업현물세에 관하여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승인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1957년도 국가예산 집행 결산은 예산에 비하여 수입은 121.9%, 지출은 101.4%로 각각 초과 집행되었으며, 1959년도 국가예산은 1958년도 예정실적에 비하여 수입은 112.1%, 지출은 124.2%로 각각 장성될 것을 예견하였다. 농업현물세의 평균 부과비율은 22.4%로부터 10%로, 알곡을 포함한 모든 농작물수입에 대한 농업현물세의 평균부과비율은 20.1%로부터 8.4%로 낮추어졌다.

 농업현물세
농업현물세는 1946년 6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 이후 각종 잡세를 철폐하고 농업생산물의 일부를 국가에 바치게 한 현물조세제도이다. 농업현물세의 목적에는 노동자, 사무원들의 식량을 보장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연계를 강화하고, 노농동맹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농업현물세가 25%에 달했으며, 1956년부터는 실수확고에 관계없이 고정현물세제를 실시하고 세율을 평균 20.1%로 낮추었다. 1959년에는 협동농장의 공동 축적을 강화하기 위하여 농업현물세의 평균 부과비율은 22.4%로부터 10%로, 알곡을 포함한 모든 농작물수입에 대한 농업현물세의 평균부과비율은 20.1%로부터 8.4%로 낮추어졌다. 그리고 경제토대가 약한 산간지대의 일부 농업협동조합에 대해서는 현물세를 완전히 면제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2월 전원회의
김일성의 참석하에 1959년 2월 23-25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1958년 9월 전원회의 이후 생산과 건설에서 많은 성과들이 나타났고, 이와 관련하여 제품의 질을 높이는 문제와 긴장된 수송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업으로 제기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 소련공산당 제21차대회에 참가하였던 당 대표단의 사업에 대하여 2) 공업제품의 질을 제고할데 대하여 3) 교통운수사업을 더욱 개선, 강화할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양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제품의 질을 높이는 문제에 대해 거듭 강조하였고,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사상투쟁과 더불어 근로자의 기술문화수준을 높일 것을 요구하였다. 또 늘어난 물동량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철도의 전기화를 주장하고 2차 5개년 계획기간에 철도의 전기화를 완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천리마작업반 운동
천리마작업반운동은 생산에서의 집단적 혁신운동이며, 근로자들을 공산주의적으로 교양개조하는 방법이며, 온 사회의 혁명화, 노동계급화를 다그치는 대중운동이라고 김일성은 규정한다, 따라서 천리마작업반운동은 공업과 농업, 건설, 운수 등 생산분야뿐만이 아니라 과학, 교육, 문화, 보건과 인민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따라서 북한은 천리마작업반운동은 천리마운동이 심화발전된 형태라고 설명한다. 천리마작업반운동은 1959년부터 구체화되었는데, 강선제강소의 진응원작업반이 하루 생산량을 160% 초과달성한 것을 모범으로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천리마작업반운동은 노동자 상호간의 경쟁보다 작업반단위의 집단적 경쟁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소련의 스타하노프운동과 구별된다.

 공작기계 새끼치기운동
경제계획이 과감하게 추진되면서 전문기계공장들의 능력만으로는 인민경제의 기계설비에 대한 수요를 원만히 충족시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렇지만 전문적인 공작기계공장들의 능력만으로는 이러한 수요를 해결할 수도 없었고 많은 외화를 주고 공작기계를 수입해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해결을 위하여 김일성은 1959년 5월의 로동당 중앙위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모든 공장, 기업소에 있는 모든 공작기계가 국가계획이외에 한 대 이상의 공작기계를 생산하게 함으로써 1년 동안에 공작기계 보유대수를 배 이상으로 늘릴 것을 지시하였다. 김일성은 공작기계 새끼치기가 일반공작기계에 그치지않고, 대담하게 대형공작기계와 특수공작기계를 생산하는데로 발전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공작기계 새끼치기운동의 결과 1년 동안에 1만3000여대의 공작기계를 더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부정적 측면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재일조선 공민들의 귀국 협정 조인
1956년 4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천해(金天海)가 이극로와 함께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공동의장에 임명되었다. 남로계의 숙청과 김천해의 등장은 일본지역으로의 통일전선정책이 구상되었음을 보여준다. 1957년의 조총련에 대한 <교육원조금>의 지원과 1958년 8월에는 재일동포들의 집단적인 북한귀국 결의가 이어졌고, 9월에 김일성은 재일동포의 입북후 생활보장과 귀국에 필요한 수단과 비용제공을 약속하였다. 재일동포의 입북사업은 북한이 조총련과의 협의를 거쳐 진행하였으며, 동시에 북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 사이에도 1956년부터 접촉이 병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59년 8월 북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간에 캘커타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재일동포의 입북사업이 진행되었다.

 평양시 건설사업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에 평양시 복구전망계획을 수립하고, 1953년 7월에는 평양시복구재건에 대한 내각결정 125호를 발표하고 평양시복구위원회(위원장 김일성)를 조직하였다. 1958년 7월에는 평양시를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데 대한 내각결정 83호를 채택하고 적극적인 수도건설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 이후 북한은 모든 것을 평양건설에라는 구호를 내걸 정도로 적극적으로 평양건설에 집중했으며, 1959년 8월의 내각결정 제54호도 평양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에 채택된 평양시종합개발계획은 현재 평양 모습의 기본 구조를 갖추게 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2기 6차 회의
김일성의 참석 하에 1959년 10월26-28일 사이에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북한에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이루어지고, 사회주의건설이 전면적으로 전개되며, 재일동포의 입북이 예정되던 고무된 시점에서 열린 회의이다. 이 회의는 1)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관하여 2) 인민교육체계를 개편할 데 관하여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승인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남북한의 대표들로 상설위원회를 조직할 것과 남북조선경제대표들로 남북경제발전 및 교류상설위원회를 구성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일반교육과 기술교육을 결합한 중등기술교육체계를 확립하고 야간 및 통신 대학망을 더욱 확장할 것을 지적하였고, 각급 학교 학생들의 수업료를 전반적으로 폐지한 내각의 조치를 확인하였다.

 재일동포 제1차 귀국선
일제에 의하여 징용을 당하거나, 식민지 조선에서의 궁핍한 생활에 의해 일본으로 흘러 들어왔던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심한 민족적 차별과 억압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핍박과 차별은 제2차대전이 종식된 후에도 그치지 않았으며, 남한으로의 귀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북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간의 캘커타협정에 의해 재일동포의 입북이 1959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귀국선이 1959년 12월 16일에 975명을 태우고 청진항에 도착하였다. 캘커타협정에 의한 입북은 1967년까지 계속되었고 1968년부터 1970년에는 입북이 중단되었다. 입북초기인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전체 입북자의 약 80%인 75,000명이 입북하였고, 중단기간 후인 1971년부터 1981년 사이의 입북자는 연 평균 329명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1960년대의 입북과 1970년대의 입북은 여러 면에서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제1차 귀국동포 평양시 환영대회
청진에 도착한 재일동포들은 북한 인민들의 뜨겁고 감격스러운 환영을 받았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이 어려운 중에도 집과 살림살이를 준비하였다. 제1차 귀국동포들은 평양으로 이동하여 평양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김일성은 직접 재일동포들을 접견하고 가정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북한이 재일동포의 입북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일본에서 고통받고 있는 한민족에 수용의 의지가 담겨있었으며, 동시에 이 사업을 통한 체제 우월성의 선전,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충하고자하는 여러 가지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거주하게 되면서 북한정권과 재일동포들은 정치, 경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갈등적인 요소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 신년사
김일성은 1960년 신년사에서 소련인민은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세계가 경탄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중국인민은 사회주의건설의 대약진운동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주의 형제국의 성과적 건설과 통일, 단결이 승리의 중요한 담보라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1960년을 제1차 5개년계획 수행에서 거둔 성과를 공고히 하고 제2차 5개년계획의 성과적 수행을 준비하는 해로 규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농촌경리의 기계화에 역량을 집중할 것, 모든 공업부문에서 노동생산능률과 설비이용률을 높일 것, 축산업과 수산업을 발전시켜 여러 가지 부식물에 대한 근로자의 수요를 충족시길 것, 다양한 직물과 일용품의 공급, 문화주택과 문화후생시설의 대대적인 건설을 지시하였다.

 2차 북송재일동포, 학교와 직장으로 배치
입북 재일동포들은 생산관계가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된 북한에서 각 직장과 학교에 배치되었다. 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국영상업기관에서 일하게 되었고, 개인 기업가들은 기술과 기능에 따라 공장, 기업소나 생산협동조합에 들어가게 되었다. 학생들의 경우 대부분이 학업을 계속했지만, 학생 신분이 아니었던 사람들의 진학 희망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입북 동포들의 직업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일본에서의 직업과의 연관성이었는데, 이것은 학생, 농민, 노동자의 경우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입북동포의 직장, 학교, 주거지의 배치는 그들의 조총련조직에서의 지위나 돈 등의 기여도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
1960년 8월 8일부터 11일까지 김일성의 참석하에 평양에서 로동당 중앙위 전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1)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기술혁신운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할데 대하여 2) 기술인재 양성사업을 개선강화할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김일성은 이 회의의 결론에서 기계공업 육성의 중요성를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더불어 각 공장에서 필요한 부속품을 자체로 조달함으로 인하여 공장 공무직장에서는 설비이용률과 노동생산능률이 낮고 규격화와 전문화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어서 김일성은 농촌기계화를 위하여 10-15마력짜리 뜨락또르의 생산을 제기하고 뜨락또르의 실제 활용 실태를 비판하였다. 김일성은 앞으로 7개년 계획기간에 기술혁명을 전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정규대학과 기술대학을 설치하고 통신과 야간교육 등을 통하여 기술인재양성사업을 추진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평양대극장
1960년 8월에 준공된 평양대극장은 북한의 대표적인 공연시설로 중국역 역전동 영광거리에 있다. 연건축면적은 29,000평방미터이고 정치행사장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주로 가극과 무용극을 공연한다. 외부 건축양식은 전통 한식 합각식 지붕이 축대칭으로 이루어졌고, 내부는 관람부분과 무대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현관, 중앙홀, 전람실, 귀빈실, 관람실 등이 있고, 무대와 배우실, 장치제작실, 경영 및 관리실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석은 2190석이고 무대는 2000명 이상이 공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소극장으로 이용되는 700석 규모의 종합연습실도 있다.

 제1차 7개년 계획
인민경제 5개년 계획을 성과있게 수행한 후, 1961년부터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은 생산재생산인 중공업 우선정책을 추진하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며 과학과 문화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7개년 계획은 공업총생산액에서는 2.5배, 알곡총수확고는 1.5배라는 예상목표를 제시하였다. 제1차 7개년 계획의 중심과제는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전면적인 기술개선의 수행이 제시되었다. 김일성은 7개년 계획의 첫 3년은 이미 마련된 중공업기지를 더욱 잘 정비하고 그 기초 위에서 경공업과 농촌경리를 급속히 발전시켜 인민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데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4년 동안에는 중공업기지를 더욱 확장하고 기술장비를 개선하여 사회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결정적으로 강화하면서 인민생활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연방제 창설 제의
김일성은 1960년 8.15해방 15돌 경축대회에서 외국의 간섭이 없이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한이 공산화를 두려워하여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적 대책으로 남북한의 연방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 때에 김일성이 말하는 연방제는 당분간 남북한의 현재 정치제도는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한의 경제문화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자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연방제의 실시를 통해 남북한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하고 상호이해와 협조를 가능하게 한 후,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룰 것을 주장했다. 김일성은 4.19로 인해 전개된 남한의 새로운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였다.

 1960년 12월 확대 전원회의
1960년 12월 20-23일까지 김일성의 참석하에 평양에서 로동당 중앙위 확대전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1960년의 완충기 경제과업이 진행되고 새로운 7개년 인민경제계획 수행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의는 1) 1960년도 농촌경리부문 사업총화와 1961년도 과업에 대하여 2) 1961년도 인민경제 발전계획에 대하여 3) 각국 공산당 및 로동당 대표들의 회의사업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알곡 100만톤 이상의 증산, 협동농장들의 정치경제적 강화, 국가농목장에 대한 기업관리의 개선 등을 중요과업으로 제시하였다. 동시에 1961년에 시작되는 7개년 경제계획의 중심방향과 수행방도를 제시하였다.

 남북철도 연결 제안
북한은 1960년 8월에 김일성이 남북 연방제 창설을 제의한 후 적극적으로 남한에 교류와 협상을 제의해 왔다. 1960년 11월에는 남북간 경제문화의 교류를 위한 경제위원회 조직을 다시 제의했으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남한의 국회 및 정당 사회단체에 경제문화 교류를 제의하였다. 노조관계자들도 남북협상을 제의했으며, 1961년 1월에 들어서는 과학원장 백남운이 남북한의 경제인사 및 과학자의 교류를 제안하기도 했다. 또 구체적으로는 중공업위원회 위원장 김두삼이 남한의 전기동력난의 타개책을 제시하고, 교통상 김회일이 남북철도의 연결을 제안하고, 남한의 절량 농가에 구호미 10만석 제공을 결의하는 등 북한의 대남 교류 공세가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2.8 비날론 공장 준공
비날론은 이승기박사에 의하여 개발된 화학 섬유로서 북한의 의복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북한은 북한사람이 발명하고 공장을 만들고, 조선에 풍부한 재료를 사용하는 비날론 공업은 완전한 주체적 공업이라고 크게 평가하고 있다. 북한은 1961년 5월에 힘흥에 2.8비날론 공장을 준공하였는데, 이 공장은 총면적 50만평방미터의 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큰 건물만 하여도 건평 4만평방미터에 높이 30미터인 방사직장 등 30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이 공장의 건설에는 거의 만톤에 이르는 1만5천여개의 기계설비와 장치물들이 들었으며 배관의 길이만 500킬로미터가 넘고, 8만입방미터의 콩크리트가 소요되었다.

 당 및 정부대표단 소련 방문
1961년 5월 남한에서 5.16이 발생하자 소련부수상 코시킨이 5월 말에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남북연방제 제안과 미군철수를 지지하였다. 같은 해 6월 29일부터 7월 10일까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북한과 소련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북한과 소련은 1961-67년간에 소련의 북한에 대한 기술적 협조에 관한 문제와 1962-65년간의 북한 화학공업발전을 위한 상품납입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북한은 7개년 경제계획 수행을 위한 소련의 경제적, 기술적 원조제공을 약속받았다.

 당 및 정부대표단 중국 방문
1961년 7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귀로에 북경을 방문하였다. 김일성은 중국과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북한 내각 수상인 김일성과 중국 국무원 총리 주은래가 서명한 이 조약은 <국가주권과 영토안정에 대한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과 호혜, 상호원조와 지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조약은 어느 일방에 대한 어떠한 국가로부터의 침략이라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취할 의무를 지니며 어느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해 전쟁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해 지체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군사동맹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조선로동당 4차 당대회
조선로동당 제4차 당대회는 1961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8일간에 걸쳐 열렸다. 대회에서는 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에 대하여 2) 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 사업총화에 대하여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경제 발전 7개년 계획에 대하여 4)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가 의제였고, 당규약이 수정되었다. 이 시기의 당원 수는 131만 1563명이라고 발표되었고, 대의원 수는 1657명이었다. 중앙위원으로는 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금철, 김창만, 이효순, 박정애, 김광협, 정일용, 남일, 이종옥, 김익선, 이주연, 하앙천, 한상두, 정준택, 서철, 최현, 석산, 김경석 등 모두 85명이 선출되었고 백학림, 김중린 등 50명의 후보의원이 선출되었다. 4차 당대회는 건국 초기의 경쟁적인 파벌들이 모두 사라지고 김일성파가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는 형세를 이룬 대회이다.

 당대표단 소련 방문
1961년 6월과 7월에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우호협조 및 호상 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던 김일성은 10월에 다시 소련을 방문하였다. 10월 14일부터 11월 1일까지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소련공산당 22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흐루시쵸프는 스탈린격하 및 평화공존론을 다시 제기하고 알바니아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김일성은 로동당 중앙위 제4기 2차 전원회의에서 귀환보고를 했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나라들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이 평등과 자주성에 기초하여 형제 당, 형제 나라들이 단결하며 협조할데 대한 조선로동당의 원칙적 입장과 수정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를 천명했다.

 1962년 신년사
1961년은 북한에서 조선로동당 4차 당대회가 없었고, 남한에서 5.16이 발생한 중요한 한 해였다. 김일성은 1962년 신년사에서 1961년에는 알곡 생산이 483만톤, 선철과 립철이 근 100만 톤, 석탄이 1100만톤 생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알곡 500만톤, 직물 2억 5천만 미터, 수산물 80만 톤, 주택 20만 세대, 강철 120만 톤, 석탄 1500만 톤을 생산하는 6개의 고지 점령을 1962년의 중심과업으로 제시하였다. 김일성은 과업의 성과적 수행을 위해서 공장, 기업소의 설비 이용률을 최대한 높이고 생산을 정상화할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한 개의 고지를 점령하고 그 성과를 공고히 한 다음에 더 높은 고지를 점령하는 식으로 생산을 체계적으로 빨리 장성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제4기 3차 전원회의
1962년 3월 6-8일 사이에 김일성의 참석하에 로동당 중앙위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3월 8일에 김일성은 이 당시 북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결론을 진술하였다. 그는 이 즈음에 실시된 황해남도당위원회에 대한 당중앙위원회의 집중지도를 통하여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하였다. 김일성은 당조직사업을 더욱 강화할 것과 당원들이 당규약대로 움직일 것을 요구하였다. 즉 로동당의 하부조직들은 당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잇는 곳들이 많이 있었고, 당원들은 대중적 정당으로의 빠른 발전과정에서 사상적으로 충분히 무장되지 못했다. 특히 이 결론에서 김일성은 농촌에서의 계급투쟁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으며, 이 시기 농촌의 사회상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준다. 동시에 이 회의는 수정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에서의 당의 입장이 제시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제3기 1차회의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전체 유권자 100% 참가, 100% 찬성 투표로 구성된 후, 1962년 10월 22-23일간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설위원회 조직, 내각 조직, 검사총장 임명, 최고재판소장 선거 등이 진행되었다. 수상에는 김일성, 부수상에는 김일, 정준택, 정일룡, 이종옥, 김광협, 남일, 국가계획위원장은 정준택, 민족보위상은 김창봉, 내무상은 박문규, 사회안전상은 석산, 외무상은 박성철, 국가검열상은 김익선 등으로 조직되었다.

 대안의 사업체계
대안의 사업 체계는 1961년 12월 김일성이 남포시 대안 전기 공장을 방문, 공장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공장 당 위원회의 집체적 지도 체계를 확립하는 등의 개선책을 제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안의 사업 체계는 당의 지도적 역할 강화 및 정치 도덕적 자극을 앞세우는 정치 사업 우선, 공장 기업소의 관리 운영에서 공장 당 위원회의 집체적 토의와 지도 및 당 간부와 지배인의 생산 현장 지도 강화를 포함한 군중 노선 관철, 중앙 집권화된 계획적 관리와 독립 채산제 실시 등을 주요 원칙으로 하고 있다. 대안의 사업 체계에서는 모든 문제를 공장 당 위원회에서 집체적으로 토의 결정하고 분공된 데 따라 지배인은 행정 사업을 하고, 기사장은 생산에 대한 기술적 지도를 하며, 당 비서는 사람과의 사업을 하게 되어 있다.

 조선로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 개최
김일성의 참석하에 1962년 12월 10-14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중국군의 철수와 쿠바사태 등의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회의는 이후 북한의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키는 전략적 방침이 결정된 중요한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는 1) 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할데 대하여, 2) 1962년 인민경제계획 실행총화와 1963년 인민경제 발전계획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국방력의 강화를 위하여 인민군대를 간부화하고 현대화하며, 노농적위대를 강화하고 전체 인민을 무장화시키며 전국을 요새화할 것을 결정하였다.(4대 군사노선 채택) 인민경제계획의 성과적 수행을 위해서 대안의 사업체계, 청산리방법의 관철, 각급 당위원회의 집체적 영도와 그 기능의 제고, 계획화사업의 강화, 협동생산의 철저한 조직과 집행, 설비 이용률의 제고, 기술혁신운동의 강력한 추진, 로동행정사업의 강화, 기본건설에서 중요대상들에 대한 역량의 집중, 후방공급사업의 개선, 일군들의 정치기술 실무수준의 제고 등을 제시되었다.

 남한의 절량민과 풍수해 이재민 구제에 대한 결정 채택
1990년대 이후에는 남한이 북한에 대해 대화와 교류협력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왔지만, 한국전쟁 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북한이 남한에 대한 다양한 교류와 지원을 요구하는 공세를 펼쳐왔다. 각 정당, 사회단체들이 총동원되어 남한의 해당 정당, 사회단체에 대해 대화를 촉구하였으며, 끊어진 철도의 연결과 각종 경제적 지원을 선전적으로 펼쳐댔다. 1963년 6월에 남한의 절량민과 이재민에 대한 지원을 발표하였다. 1964년에도 <남한 인민의 생활안정을 보장하기 위하여>라며, 매년 쌀 200만석(30만톤), 강재 10만톤, 전력 10억KW/h, 화학섬유 1만톤을 비롯하여 시멘트, 목재, 기게류 등을 다량으로 제공할 것을 선전하였다.

 사회주의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북한 사회주의 건설에서 농촌사업은 가장 복잡하고 가장 어려운 사업의 하나였다. 농촌사업이 어려운 것은 기술과 문화, 사상이 낙후하였고, 농민구성의 복잡성, 농촌경리의 자연적, 계절적 제약성, 농촌의 분산성과 관련이 있었다. 1964년 2월 25-27일간 평양에서 열린 로동당 중앙위 제4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를 진술하였고 전원회의에서 당 활동의 지침이 되는 강령적 문건으로 채택되었다. 이 문건에서는 사회주의하에서의 농촌문제해결의 기본원칙을 다음의 세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 농촌에서 기술혁명과 문화혁명, 사상혁명을 철저히 수행하여야 한다. 둘째, 농민에 대한 노동계급의 방조, 농업에 대한 공업의 방조, 농촌에 대한 도시의 지원을 백방으로 강화하여야 한다. 셋째, 농촌경리에 대한 지도와 관리를 공업의 선진적인 기업관리 수준에 끊임없이 접근시키며, 전인민적 소유와 협동적 소유의 연계를 강화하고 협동적 소유를 전인민적 소유에 부단히 접근시켜야 한다.

 사회과학원
사회과학원은 1963년 12월에 사회과학부문의 과업해결을 위해 분리가 결정된 후, 1964년 2월 17일 내각결정 제11호에 의해 <사회과학부문 연구기관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기관>으로 출발했다. 사회과학원에는 고고학연구소, 경제연구소, 역사연구소, 언어학연구소, 법학연구소, 철학연구소, 주체사상연구소, 문한연구소, 고전연구소가 소속되어 있으며, 각 연구소는 관련 분야에 대한 기관지를 발행하고 있다.

 최현(崔賢)
1907년 함북 혜산출신으로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 1929년 중국군관학교 졸업, 1941년 소련군관학교 졸업하였다. 1947년 내무성 38경비여단장, 1948년 인민군 정치국장, 1949년 인민군제2여단장, 1951년 인민군 제2군단장을 역임했다. 1956년에 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민족보위성 부상, 1957년에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 1958년에 체신상이 되었다. 1968년에 민족보위상, 1970년에 로동당 중앙위원, 정치윙원회 위원, 1972년에 인민무력부 부장, 중앙인민위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1977년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82년 4월 9일에 사망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3기 3차회의
김일성의 참석하에 1964년 3월 26-28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1) 협동농장들의 경제적 토대를 강화하며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킬데 대하여 2) ≪한일회담≫을 분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진시킬데 대하여 3) 1963년 국가예산집행에 대한 결산과 1964년 국가예산에 대하여 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승인에 대하여 등을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법령이 채택되었다. 1) 협동농장들이 국가에 바치는 현물세를 1964년부터 1966년까지 3년에 걸쳐 완전히 폐지한다. 2)협동농장들의 자체자금으로 진행하던 관개시설, 탈곡장, 축사, 창고, 농촌발전소, 전기시설을 비롯한 모든 생산적 건설과 문화후생 시설의 건설은 국가투자로 진행하며 탈곡기, 사료분쇄기, 전동기, 양수기, 분무기, 가마니 직조기 등 모든 농기계는 국가가 협동농장에 무상으로 공급한다. 3)농촌문화주택은 연차별 계획에 의하여 국가부담으로 건설하며 이미 지어준 농촌문화주택의 건설비도 국가가 부담한다.

 농업근로자동맹
해방 직후에 만들어졌던 북조선농민동맹은 1951년 2월에 남로당의 외곽단체였던 농민조합총련맹과 통합하여 조선농민동맹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농민동맹은 농업협동화가 진행되면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고, 상부조직만 있었으며, 농민들은 아무 조직에 들어가지 않은 경우들이 많았다.그러나 1964년 로동당 제4기 8차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농촌문제에 대한 테제>가 발표되고, 로동당 제4기 9차 전원회의에서 농업근로자동맹을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시기는 농업협동화가 완료된 시기이므로 모든 협동농장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되었고, 1965년 3월에 평양에서 농업근로자동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농업근로자동맹에는 협동농장원들과 국영농목장 및 농촌경리에 직접 복무하는 국가기관, 기업소, 기업소들의 노동자, 사무원들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농업근로자동맹은 농민대중을 포괄하는 근로단체이며, 농촌사업을 보장하는 로동당의 외곽단체로 규정되었다.

 제4기 제10차 전원회의
김일성의 참석하에 1964년 12월 14-19일 사이에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전원회의에서는 1964년 인민경제계획 실행의 예비적 총화와 1965년 인민경제 발전계획 수행을 위한 대책을 거의 1주일동안 토론하였다. 특히 이 시점에 그동안 여러차례 제기되었던 인민경제의 관리운영사업의 문제점에 대하여 많은 비판과 자기비판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은 이 회의의 결론에서 인민경제관리운영사업에서 결함을 나타낸 가장 주요한 원인을 성, 관리국 간부들, 도급기관 간부들에게 당성, 계급성, 인민성이 적은데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간부들의 관료주의와 나태한 세포생활, 당의 통제에 대한 불만에 대해 심하게 비판하고, 사람과의 사업, 정치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계획화 수준을 높일 것, 기술혁명, 노동행정사업의 개선 등을 강조하였다.

 남한군의 월남 파병 비난 성명들
1965년은 베트남문제로 인하여 북한과 월맹간의 접촉이 대단히 빈번해졌는데 1965년에 베트남과 관련된 중요한 활동은 다음과 같다. 1월 9일, 외무성, 남한군의 월남 파병 관련 비난 성명. 1월 17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남한군의 월남 파병 저지 호소문 발표. 1월 18일, 김일성, 월맹 특명 전권대가 레텟흥 접견. 1월 31일, 외무성, 미국의 월남전 확대정책 비난. 3월 5일, 미군의 월맹폭격 비난 성명. 3월 19일, 베트남 인민투쟁을 지지 성원하는 평양시 군중대회. 3월 26일, 월맹의 요청이 있을 경우 모든 지원군 파견 조치 성명. 5월 25일, 최용건, 남부 월남 민족해방전선 대표단 접견. 7월 8일, 남한 파월군에 해당하는 무기를 남부 월남 민족해방전선에 제공 성명. 7월 16일, 북한-월맹간 경제적 및 기술적 원조를 제공할 데 대한 협정체결. 7월 29일, 김일성, 월맹인민회의 대표단 접견. 9월 6일, 월남 인민대표단, 평양 도착. 9월 7일, 월맹 방송대표단, 평양 도착. 9월 15일, 외무성, 월남전에서 미군이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비난 성명. 11월 24일, 외무성, 월맹 지원 성명 발표. 12월 11일, 직맹(직업총동맹)대표단, 월맹 방문.

 김일(金一)
1912년 함북에서 출생하여 1935년 소련 타시켄트공화국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0년 민족보위성 부상겸 문화부장, 1954년 부수상 겸 농업상, 1956년 로동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1959년 내각 제1부수상, 1972년 정무원 총리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76년 국가 제1부주석이 되었다. 1977년 부주석,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80년 로동당 중앙위원, 정치국위원, 상무위원, 1984년 3월 9일에 사망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3기 4차회의
가 회의는 베트남전쟁이 더욱 확대되고, <한일회담>이 진전된 1965년 5월 20-25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베트남전쟁, <한일회담>, 1964년 결산과 1965년 예산이 주로 다루어졌다. 이 회의에서는 월남에 대한 <미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월남인민에 대하여 무기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지원을 주는 동시에 남부월남 민족해방전선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어느 때나 지원군을 파견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한 북한 정부의 성명을 지지 찬동하였다. 그리고 <한일회담>을 분쇄하기 위한 거족적인 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고, 박정희 정권과 일본정부간에 이루어지는 어떠한 협정이나 조약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북한은 대일배상청구권을 계속 보유하며, 청구권을 반드시 행사할 것과 한일회담을 분쇄할 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제4기 제12차 전원회의
1965년 11월 15-17일까지 김일성의 참석하에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전원회의에 앞서 김일성은 도 시 군당 위원장들과 10여일에 걸쳐 협의회가 진행되었고, 협의회에서는 군당사업 강화와 경제문제, 문화문제, 군사문제와 같은 국가사업 모든 문제에서 군의 역할을 높일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군의 주인은 군당위원회라고 강조하면서, 군에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지방공업경영위원회, 국가계획위원회 군위원회, 건설대를 조직하여 주었고, 군 사회안전부를 군당에서 직접 지휘하도록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업이 잘 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이어서 김일성은 전체 농장원들의 공동재산인 땅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음과 천리마운동도 제대도 추진되지 않음을 비판하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농촌 경리, 공업, 건설, 운수, 대외무역 등 다양한 부문에 대해 비판하고, 과업 수행을 위하여 당과 정권기관 책임일군들을 군과 리에 1년간 파견하여 지도와 방조를 하도록 결정하였다.

 당 대표자회의
조선로동당 규약에는 당 중앙위원회가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에 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당 대표자 회의 대표자의 선거절차와 대표자 선출 비율은 당중앙위원회가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당 대표자회의는 당의 노선과 정책 및 전략전술에 관한 긴급한 문제들을 토의 결정하고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을 제명하고 결원을 보선할 수 있다. 따라서 당 대표자회의는 당의 최고지도기관인 당대회를 대신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조선로동당은 1958년 3월과 1966년 10월 2차례에 걸쳐 당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의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의는 1966년 3월에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제4기 13차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동년 10월에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 현정세와 우리 당의 과업 2)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당면과업에 대하여 3) 월남문제에 관한 조선로동당 대표자회 성명 등이 토의되었다. 제1차 7개년 계획이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함에 따라 인민생활이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고, 베트남 문제 등으로 인하여 국제정세가 심하게 긴장되고, 국제 공산주의운동 내부에서도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당 규약에 의하면 4차 당대회 후 5년되던 해인 1966년에 개최되어야 할 당대회를 대표자회의로 대신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현대수정주의와 좌경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권이 단결과 자주성, <월남인민>에 대한 지원,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킬데 대한 전략적 방침을 당의 확고한 노선으로 규정하였다.

 제4기 14차 전원회의
제2차 당 대표자회의의 마지막 날인 1966년 10월 12일에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당 대표자회의 결정이 만장일치로 비준되고 당조직의 일부를 개편하였다. 전원회의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안에 상무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고,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 직제를 총비서, 비서 직제로 개편하고 비서국 설치를 결정하였다.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는 김일성, 비서는 최용건, 김일, 박금철, 이효순, 김광협, 석산, 허봉학, 김영주, 박용국, 김도만으로 구성되었다.

 기술의무교육
1966년 11월에 최고인민회의는 제3기 제6차회의에서 전반적 기술의무교육을 실시할데 대한 법령을 채택하였다. 1956년에 4년제 초등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1958년에 7년제 중등의무교육제를 실시한데 이어 1967년 4월 1일부터 전반적 9년제 기술의무교육 실시가 결정되었다. 이후 북한은 1972년부터 부분적으로 11년제 의무교육 실시를 시작하였고, 1975년부터는 전면적으로 11년제 의무교육 실시를 확대하였다. 특히 9년제 기술의무교육의 실시는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킨다는 조선로동당의 방침 관철과 연관성이 높다.

 10대 정강(요약)
김일성은 1967년 12월 17일, 최고인민회의 제4기 1차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정부정강을 발표하였다. 1)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의 노선 철저히 관철 2) 남조선 인민해방과 조국통일 실현을 위하여 남조선인민의 반미구국투쟁 지원 3) 사회 모든 성원을 혁명화 노동계급화하기 위한 투쟁을 강력히 전개 4) 인민정권의 강화를 위하여 국가, 경제기관 일군들 속에서 관료주의를 없애며 혁명적 군중관점 확립 5) 사회주의공업화 정책 견지와 기술혁명으로 근로자들을 고된 노동에서 해방 6) 나라의 과학기술발전 촉진과 사회주의적 문화 건설을 위해 투쟁 7) 전국적, 전인민적 방어태세 구축 8)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의 견지와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 원칙, 호혜 평등의 원칙에서 경제관계와 대외무역 발전 9) 해외 동포들의 이익과 민족적 권리 옹호 10) 북한을 존중하는 모든 나라들과 친선관계 도모

 최고인민회의 제4기 1차회의
1967년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김일성의 참석하에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1월 25일에 실시된 대의원선거에 당선된 475명중에서 446명이 참석하였다. 대의원 중 292명은 노동자, 70명은 농민, 95명의 사무원, 지식인이었으며, 73명의 여성이 포함되었다. 상임위원장에는 최용건, 부위원장에는 홍명희, 박정애, 강양욱, 이영호, 서기장은 박문규, 상임위원은 최현, 허봉학, 김영주, 이국진, 최광, 오진우, 김동규, 박신덕, 김려중으로 구성되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를 발표하였고, 수상은 김일성, 부수상에는 김일, 박성철, 정준택, 이종옥, 김광협, 남일, 이주연, 최용진, 김창봉, 석산, 김만금, 홍원길, 최재우가 임명되었다.

 무장공비 서울 출현
1968년은 북한의 무장공비 활동이 매우 심한 해였다. 1월 21일에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다가 실패하여 1명이 생포되고, 전원이 사살되었다. 이들 무장공비는 1967년 4월에 창설되어 유격전에 중점을 둔 특수부대였는데 대통령관저를 폭파하고 요인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11월에는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 120여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하여 양민이 살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들 무공공비는 유격대로 양성된 120명의 정예분자로 15명을 1개조로 한 8개조로서 과거와는 판이한 침투방법과 공작 수법을 구사하였다.

 푸에블로호 나포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승무원 83명을 태운채 동행의 공해상에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에 의하여 원산항으로 나포되었다. 중국은 푸에블로호 나포는 북한의 자위적 조치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홍명희(洪命憙)
1888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등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원을 하였고, 1924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다. 신간회 조직부장, 오산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통일당을 조직하였고 과도입법의원에 관선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남한 대표로 참가한 후 북한에 잔류하였다. 1948년에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거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부수상, 과학원 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의 자리를 맡았다. 대표작에는 소설 임꺽정이 있으며, 북한의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기도 했다. 1968년 3월 5일에 사망하였다.

 제1차 7개년계획 중요고지
1967년에 완수되었어야 할 제1차 7개년 계획의 생산목표가 달성되지 못했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7차 전원회의에서 경제목표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전력 생산목표량 160억-170억 KWH(1968년 목표 158억 7500만KWH), 석탄 생산목표량 2300만-2500만톤(1968년 목표 3199만톤), 선철과 입철 생산 목표량 220만-250만톤(1968년 목표 229만톤), 강철 생산 목표량 220만-250만톤(1968년 목표량 212만톤), 공작기계 생산 목표량 7500대(1968년 생산 목표량 7297대), 화학비료 생산 목표량 150만-170만톤(1968년 생산목표량 159만7000톤), 시멘트 생산 목표량 400만톤(1968년 생산목표량 366만 7000톤), 임업부문 생산목표량 약 400만 입방미터(1968년 생산목표량 572만 입방미터), 천생산목표량 4억M(1968년 생산 목표량 4억 1000만M)

 소련의 체코 침공 지지
북한과 체코는 1948년 10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한국전쟁 때 체코는 연대성을 표시하고 물질적 지원을 강화하였다. 전후 체코는 북한의 복구를 돕기위한 원조결정서를 채택하였고 수력발전소 복구와 경제기술 원조를 주었다. 1954년 1월에 쌍방간의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였다. 1963년에 체코공산당 12차 대회에서 북한대표가 동구공산당의 반중공태도를 비판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문화교류와 과학기술협조 등은 계속되었다. 1968년 체코에서 자유화투쟁이 벌어지자 북한은 로동신문 등을 통해 이를 비판하였고 소련의 체코침공을 지지하였다.

 제4기 18차 확대전원회의
1968년 11월 11-16일 사이에 김일성의 참석하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8차 전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교통운수와 노동력 문제가 중점적으로 토의되었다. 김일성은 교통운수의 긴장문제에 대하여 운수사업의 결함이 아니라 인민경제가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수송수요의 증가를 철도운수가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김일성은 각 철도운수부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관주의를 비판하였고, 강철같은 규율을 강조하였으며, 철도의 전기화를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문제해결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또 60톤자리 중량화차의 제작과 중량레일의 제작을 지시하였고, 유조차의 제작과 2500마력 디젤기관차엔진의 생산을 촉구하였다. 이어서 김일성은 자동차 이용률을 높일 수 있도록 자동차 길을 닦고, 수상운수의 발전을 위한 배설비 생산을 요구하였고, 1968년의 대가뭄에 대응하여 전군중적인 절약운동을 지시하였다.

 김창봉, 최광 숙청
1967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 이효순 등이 반당종파분자로 숙청되었다. 박금철은 일제하에서의 변절 의혹과 당 부위원장으로서 당의 군사노선을 불성실하게 집행하였다는 점, 이효순은 대남공작을 망쳐놓았다는 것이 이유로 알려져있다. 이어서 1969년에 들어와서는 민족보위상 김창봉, 참모총장 최광, 대남공작 책임자 허봉학 등 고위 군부지도자가 숙청되었다. 오진우는 이들이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문란하게 하였다며 김창봉에게는 13가지 과오를 비판하였다. 김일성은 김창봉, 허봉학이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문란케하였고, 당의 정책과 사상을 왜곡 오도하였다고 비판하고 각종의 구체적인 정책의 실패를 지적하여 처벌을 결정하였다. 이상의 두 가지 사건은 이후 김정일의 등장과 관련되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종태
김종태는 북한에 포섭되어 1964년 3월 이후 1968년 4월 검거될 때까지 4회에 걸쳐 입북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는 김일성, 대남사업비서 이효순,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 지하당 구축에 필요한 공작 지령과 거액의 공작금(미화 7만달러, 한화 2350만원, 일화 50만엔), 무기를 수령하여 반정부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는 월간 청맥을 발행하며 지식인들과 접촉하였고, 각종 시위 등에 개입하고 불만층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1968년 7월 김종태는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북한은 김종태에게 영웅칭호를 수여하였고, 평양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칭하였다.

 사회주의 경제의 몇 가지 이론문제
김일성은 1969년 3월 1일에 과학교육부문 일군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였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경제의 몇 가지 이론문제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농민시장에 관한 부분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농민시장이 자본주의적 잔재가 있지만 사회주의단계에서 완전히 없앨 수 없는 것이라면서 개인 생산물을 생산한 사람이 소비하고 남은 것을 마음대로 팔거나 다른 물건과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교시하였다. 그는 농민시장을 억압했을 때 나타나는 실질적 문제를 인정하고 인민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편리한 기능을 하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텃밭 몇 십평이 자본주의적 경영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며 농민시장을 없애려는 것을 좌경적 편향이라고 지적하였다. 동시에 사회주의 공업화가 높이 진전되고 소비품이 넉넉해지면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김동규
김동규는 1915년 동만주에서 출생하여 1937년에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에 참여하였다. 1940년에 소련유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61년에 로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66년에 최고인민회의 3기 대의원, 1966년 평양시당 책임비서, 1967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 1968년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가 되었다. 1970년에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 비서가 되었고, 1974년에 국가부주석이 되었다. 1978년 이후 자세한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김정일의 후계자 선정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정찰기 격추 사건
1969년 4월 15일 북한은 미 정찰기를 조선인민군 제447군부대가 격추하였는데 미 정찰기가 영공에 불법침입 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조선인민군 제447군부대 장병들에게 열열히 축하한다는 축하문을 보냈다. 5월에는 소련간부회의 의장 포드고리니가 북한을 방문하여 미 정찰기 EC-121기 격추사건 대처방안을 논의하였다.

 시리아
북한은 1966년에 강양욱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시리아에 파견하여 쌍방간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시리아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하였다. 1969년에는 시리아 수상 아라신, 공업상 하바슈 등이 방문하였다. 1972년에는 제2부수상 정준택이 방문하여 아랍인민의 투쟁지지, 미군철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73년 북한은 시리아에 전차병 200명, 조종사 및 미사일 요원을 파견하였고, 시리아대통령 아사드가 평양을 방문하여 경제 및 기술협정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정준택(鄭準澤)
1902년에 출생하여 경성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산기사, 사무원, 평남 서흥광산 지배인을 지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기획부장,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을 지내고 1948년에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4년에 부수상 겸 화학공업상, 1960년 경공업위원회 위원장,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1970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72년 정무원 부총리로 활약하였다. 김일성이 대표적으로 칭찬했던 인물중의 하나이며, 1958년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우리나라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몇 가지 경험에 대하여
당 및 국가기관 간부들 앞에서 1969년 10월 11일에 김일성이 한 강의의 제목이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1) 토지개혁에 대하여 2) 농업협동화운동에 대하여 3)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에 대하여 라는 세 가지 항목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상의 설명에서 몇 가지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김일성은 토지개혁의 성공에는 북조선임시위원회와 보안간부훈련소, 보안기관이 기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땅을 빼앗긴 지주 44,000호 중에서 약 20%는 도시에 거주하던 부재지주였던 관계로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농업협동화문제에 있어서 김일성은 레닌이 주장한 단순한 토지와 농기구의 통합공동경리에서도 개별 소농경리에 비하여 2-3배의 노동생산능률을 올릴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협동경리에 참여한 농민들에게는 당과 국가가 장기대부, 현물세 5% 인하, 비료대 인하 등의 각종 혜택을 개인농과 차별하여 주었음을 밝히고 있다.

 납북 대한항공 승객의 송환
1969년 12월 11일 12시 25분에 강릉을 출발하여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YS-11기가 고정간첩의 강압에 의하여 납북되었다. 이 비행기에는 승무원 4명, 승객 47명이 타고 있었는데, 북한은 납북자와 기체 송환 요구를 거부하다가 1970년 2월 14일에 이르러 납치 승객의 일부를 송환하고 12명은 계속 억류하였다.

 통혁당 목소리 방송
통혁당 목소리 방송의 전신은 1967년 3월 북한이 평남 순안에 개설한 남조선해방 민주민족연맹방송이다. 북한은 1969년에 들어와 남한에 통일혁명당이 결성되었다고 하면서 남조선민주민족연맹방송의 이름을 통일혁명당 목소리 방송이라고 바꾸고, 이 방송이 남한에서 방송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황해도 해주에 위치한 통혁당 목소리 방송은 개국시에는 2개의 주파수를 갖고 하루 2시간 방송을 하였으나 이후 방송시간을 계속 늘려왔다. 방송의 내용은 조선중앙방송의 프로를 그대로 중계하며, 남한비난, 김일성 찬양에 치중하였다.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
조선로동당 5차 당대회는 1970년 11월 2일부터 13일까지 12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원의 수는 인구 대비 11.4%인 160만명에 달했다. 5차 당대회에서 인민경제6개년 계획을 결정하였고, 당 중앙위원회를 개편하여 117명의 중잉위원과 55명의 후보위원을 선출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는 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성철, 최현, 김영주, 오진우, 김동규, 서철, 김중린 등이 서열 10위 안에 포함되었는데. 4차 당대회 중앙위원 중에서 80명이 교체되었다. 5차 당대회 정치위원은 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성철, 최현, 김영주, 오진우, 김동규, 김중린, 서철, 한익수 였으며, 김일성이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조선로동당 5차 대회 통일방안
1960년 8월 15일에 김일성은 남북총선거를 주장하면서 남한당국이 자유로운 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한의 연방제를 제의하였다. 그 후 1960년 11월 최고인민회의 2기 8차회의에서 남북연방제를 다시 구체화시켜 제의했고, 때에 따라 조금씩 내용을 달리 하였다. 1970년 5차 당대회에서는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이 정권을 장악하고 미군철수, 정치범 석방, 자유를 보장하면 협상의 용의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미군 철수 후 각각 10만으로의 감군, 무력 불행사 협정의 체결, 남북경제 문화 인사 교류, 남북총선을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의하고 과도적 조치로서 연방제 실시를 주장하였다.

 인민경제 6개년 계획
북한의 경제발전계획은 일반적으로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전후 복구단계를 거친 제1차 5개년 경제계획(1956-1960)까지이며, 2단계는 자립적 민족경제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한 제1차 7개년 경제계획(1961-1970)까지이다. 그리고 3단계는 자립적 민족경제의 강화를 목표로 한 제1차 6개년 계획기이다. 6개년계획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추진되었다. 사회주의 물적, 기술적 토대 강화, 공장설비의 근대화, 기술혁명 촉진, 중노동으로부터 노동자의 해방을 기본방향으로 하였다. 계획기간 중의 주요계획목표는 국민소득 108배, 공업생산 2.2배, 곡물수확 700-750만톤이었으며 북한은 1975년 8월말에 대체로 계획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북한은 서방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여 발전을 추진했지만, 채무불이행으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개성TV 방송
북한의 텔레비전 방송은 1963년 시범방송을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다. 1966년 8월 이후 소련으로부터 7개년계획에 대한 원조가 재개된 후 방송국 건설이 활발해졌다. 1967년 4월에 평양 텔레비전방송국(현재의 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국)이 개국했고, 같은 해 황해텔레비전 중계소를 설치했다. 이어서 1969년 4월에 개성텔레비전 방송국을 개국했고, 1971년에는 북한 내에서 시청이 불가능하고 남한에서만 시청이 가능한 NTSC방식으로 남한 시청자를 겨냥한 방송을 하였다. 현재 북한에는 전국망으로 구성된 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과 문화예술 중심인 만수대텔레비전방송, 대남전용으로 북한내의 방송과는 방식이 다른 개성텔레비전 방송의 3계통이 있다.

 제5기 2차 전원회의
1971년 4월 19일에 시작된 로동당 중앙위 제5기 2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대외무역을 발전 시킬데 대하여 결론을 지었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자체의 원료로 만들어 수출을 하는 북한의 수출은 다른 나라보다 몇배의 가치가 있으며, 6개년 계획기간 말에 가서는 예견액의 두배로 수출액을 늘리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김일성은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생산을 늘릴 수 있도록 기계공업 특히 공작기계와 자동차, 뜨락또르의 생산에 힘을 모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원료공업기지를 튼튼히 구축할 것과 대외무역에서의 신용을 강조하였다. 특히 상품의 질을 높이고 규격을 정확히 보장하고, 납입기일 등을 잘 지킬 것도 지시하였다.

 8가지 대남제안
최고인민회의 제4기 5차회의-김일성의 참석하에 1971년 4월 12-14일 사이에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의는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에서 제시된 과업과 6개년 경제계획 2차년도의 목표가 추진되는 시점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1) 현 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촉진시킬데 대하여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70년 국가예산집행에 대한 결산과 1971년 국가예산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또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등의 8개 항목의 대남제안(<구국방안>)을 내놓고, 이 8개항의 대남제안에 대하여 북한은 가장 정당하고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베트남정세에 관련하여 미국에 반대하는 인도차이나 인민들의 구국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어느 때, 어떠한 조치라도 다 취할 용의가 있다는 성명을 냈다. 8가지 대남제안(요약)은 1) 미군철수와 민족자결의 원칙에서 조선인민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것 2) 남북한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이하로 줄일 것 3) 한미상호방위조약, 한일협정의 폐기 4) 남북총선거를 통해 통일적 민주주의중앙정부 수립 5) 정치범 석방 등, 남한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6) 통일전단계에서 과도적 단계로 연방제 실시 7) 남북사이의 경제교류와 각 분야의상호협조, 인적 왕래, 서신 교환 8) 민족의 당면과업 협의와 통일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정치협상회의 소집이었다.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1946년에 창립된 북조선 민주청년동맹이 1951년에 남북의 민주청년동맹을 통합하여 조선민주청년동맹이 되었다. 이후 1964년에 조선민주청년동맹은 제5차대회에서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으로 명칭을 고쳤다. 민주청년동맹을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으로 명칭을 바꾼 이유는 <도시와 농촌에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된 결과 청년들의 변화된 처지와 새임무에 적응토록 하고자 함>이라고 주장되었다. 사로청 조직은 행정 및 생산단위로 조직되는데 사로청 중앙위원회, 시군위원회, 각 직장, 기업소, 군대, 학교등에 조직하도록 되어 있다. 가입은 만 14세부터 만 30세까지의 청년으로서 동맹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고 실천하는 자로 규정되어 있고, 1970년대 초반에 약 230만 명이 조직되었다.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제6차 대회
김일성은 1971년 6월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제6차 대회에서 ≪청년들은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해야 한다≫를 발표하였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북한 청년들의 정신도덕적 면모가 매우 달라졌고, 훌륭하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남한은 <미제>가 강점하고 있고, <반동적 식민지 파쇼통치제도>가 남아 있으므로 혁명투쟁을 멈출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혁명은 계속되며 세대는 끊임없이 바뀌게 되므로 새로운 세대들이 혁명을 계속해야만 혁명의 대를 이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로청 조직을 강화하여 청년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할 것과 청년들이 어렵고 힘든 일에 앞장서서 사회주의건설에 노력적 위훈을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정당, 대중단체와의 접촉 용의 표명
1970년 8월 15일 박정희가 평화통일 구상을 밝힌 후, 1971년 8월 6일 김일성이 남한의 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대중단체 인사와 접촉 용의를 표명하였다. 이후 8월 12일에 대한 적십자가 최두선 총재가 남북의 천만 이산가족들의 인도적 재회를 목적으로 하는 가족찾기운동을 제창하면서, 남북적십자 회담을 북측에 제의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북한은 8월 14일에 손성필 위원장의 명의로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가족 친척의 자유방문을 위한 회담을 판문점에서 열 것을 제의하였다. 북측은 가족찾기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자유왕래의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북의 적십자사간에 접촉이 진행되어 8월 20일에 첫 대면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졌다.

 남북적십자 제1차 예비 회담
1971년 8월 20일에 남북한 적십자사 파견원간의 접촉이 3분간 판문점에서 26년만에 이루어졌다. 8월 26일에 다시 7분간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남북은 적십자사 간의 예비회담을 날짜조정을 거쳐 9월 20일로 결정하고, 각각 5명씩의 대표단을 결정하였다. 9월 20일에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은 판문점 상설연락사무소 설치와 직통전화의 가설에 합의하였다. 10월 6일의 제3차 예비회담에서 남북한은 서울-평양 왕래회담에 동의하고 본회담 일시문제의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회담 의제 토의가 장기화되어 1972년 6월 16일 제20차 회담에 이르러서야 5개 항목의 본회담 의제를 합의하였다.

 민주여성동맹 4차 대회
1945년 북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창립되어 1951년에 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통합되었다. 1971년 현재 여맹원 수는 250만명에 이르고 있으며, 김성애가 중앙위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1971년에 열린 여맹 제4차대회에서는 여맹(민주여성동맹)의 과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모든 분야에서 낡은 사회의 생활양식을 없애고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을 확립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2) 여성들 속에서 사상혁명을 강화하여 여성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하는 사업을 첫째로 여긴다. 3) 계급교양을 기본으로 하는 산업주의교양을 강화하고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적극 추진한다. 4) 후대들에 대한 교양강화로 어린이를 혁명의 후비대로 양성한다. 5) 혁명적 경각성을 더욱 높여 전쟁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강화한다. 6) 인민군 원호사업을 강화한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3차 회의
로동당 중앙위 제5기 3차 전원회의는 1971년 11월 15일부터 개최되었다. 김일성은 이 회의의 결론에서 인민소비품 생산을 늘리는 문제에 대하여 지시하였다. 그는 북한이 연간 6만톤의 화학섬유생산 능력이 있으며, 수입 목화와 합하면 인민들을 잘 입힐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경공업 토대가 튼튼함에도 불구하고 소비품 생산을 늘이지 못하여 인민들의 생활을 높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군들에게 당성, 노동계급성, 인민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같은 비판과 더불어 김일성은 일부일군들이 간부가 되면서 관료화 되어 있음이라고 비판하고, 화학공업상, 노동상, 철도상, 전기공업상 등을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김일성은 7개년계획 기간에는 경공업부문에 투자를 얼마하지 못하였다며, 6개년계획 기간에는 투자를 많이 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이 시기 북한 경제와 대외정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구체적인 지적에서는 외국으로부터 필요한 기계를 적극적으로 사들이라는 부분도 여러 곳이 있다.

 직업총동맹 5차 대회와 김일성 연설
북조선직업동맹은 1945년에 창립되었으며, 1951년에 북조선 직업동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통합되어 조선직업총동맹이 되었다. 1961년에는 172만, 1968년에는 200만의 맹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직맹은 형식상으로는 노동자, 사무원들의 조직체이지만 사실상으로는 로동당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다. 직맹의 임무는 노동자, 기술자, 사무원의 공산주의 교양, 맹원의 계급교양, 기술문화 교양사업, 생산과제 수행에서 노동자들의 조직동원과 생산능률 제고 및 노동규율 강화, 노동보호사업의 조직집행, 사회주의 경쟁운동의 지도 등이다. 1968년에 직맹의 규약이 대폭 수정되었으며, 맹원의 의무조항으로 김일성 교시의 무조건적 집행, 직맹의 비밀엄수와 군사기술 습득, 김일성사상과 어긋나는 행동에 대한 과감한 투쟁 전개 등이 규정되었다. 김일성의 연설에서는 해방후에는 노동자들이 공장, 기업소의 관리운영 능력이 부족하여 직업동맹이 감독통제기능을 수행하였으나, 사회주의제도가 서고 대안의 사업체계가 나온 이후에는 직업동맹이 공장, 기업소의 관리운영에 대하여 감독통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김일성은 주장하였다. 지배인유일관리제가 없어지고, 공장당위원회가 기업활동의 모든 문제를 집체적으로 토의결정하며, 집행을 감독 통제하게 되었다. 공장당위원회가 공장의 기업관리 운영을 직접 지도통제하고 있는 상황이 됨으로써 직업동맹은 성격과 임무가 달라지게 되었다. 결국 직맹은 노동계급과 직맹원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여 당의 주위에 튼튼히 묶어 세우고, 당이 내세운 정치, 경제적 과업 수행에로 조직 동원하는 완전한 사상교양단체로 전환되었다. 5차대회에서 김일성은 직맹원들 가운데에는 노동계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무원과 교원도 있다며 이들을 노동계급의 모양대로 개조하기 위한 적극 투쟁을 요구하였다.

 평화협정 주장과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김일성은 1972년 1월의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회견에서 남북한의 긴장상태를 없애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정전협정을 남북사이의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남침할 의사가 없음>을 강조하고, 미군을 철수시키고, 남북한의 무력을 대폭 줄일 것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북한과 일본이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주장하고, 일본정부의 북한 적대정책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일본의 적대정책을 북일관계 정상화의 장애라고 주장한 김일성은 북한의 입장은 시종일관하며, 북일간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끝내고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기를 염원한다고 밝혔다. 김일성은 한일조약의 폐기를 요구하였고, 북일간의 국교수립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인사왕래의 확대, 경제와 문화분야에서의 교역과 교류확대를 요구하였다. 동시에 일본에 있는 조총련 동포들의 권리 보호를 요구하였다.

 북한, 캄보디아에 군사원조
북한은 1970년 5월 시아누크를 수반으로 하는 망명정권을 승인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캄보디아를 지원하였다. 캄보디아가 공산화 되기 직전인 1975년 3월 캄보디아 민족해방 인민무장력을 지지하는 북한 외교부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프놈펜이 공산군에 점령되자 평양시 경축대회를 열고 캄보디아와의 유대강화를 표시하였다. 1976년에 인민군 50명이 캄보디아군을 상대로 특수훈련을 교육했고, 1976년과 1977년에는 북한과 캄보디아간에 경제협력과 상호방문 등 쌍방간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농업근로자동맹 2차 대회
1967년 2월에 있은 전국농업일군대회에서 농업생산지도에서의 10대과업과 협동농장관리에서의 10대과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1972년의 농업근로자동맹 2차 대회에서 김일성은 농업부문일군들이 두 가지 10대과업에 대하여 학습도 잘하지 않고, 관철을 위한 투쟁도 잘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협동농장의 관리운영 개선에 대하여 지시하면서 협동농장관리 일군들이 생산노동에 적극 참가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협동농장 관리 일군들이 농장의 전반적 사업을 돌보아야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생산노동에 참가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협동농장관리일군들이 일년에 50-100일이상을 생산노동에 참가하도록 하는 제도를 세울 것을 농근맹(농업근로자동맹)에 요구하였다. 동시에 협동농장의 재정관리 정형의 공개, 사회주의분배원칙의 철저한 준수, 분조관리제와 작업반우대제의 실시를 지시하였다. 이러한 김일성의 지시에는 이 시기 협동농장의 경영상에 나타난 문제점을 읽을 수 있다.

 강원도위원회 전원회의 확대회의
약 1주일간의 현지지도 후에 1972년 3월 22일에 시작한 로동당 강원도 전원회의 확대회의 결론에서 김일성은 강원도당의 과업 수행을 비판하였다. 근로자들에게 공급할 부식등을 수량대로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고, 살림집의 부족, 농촌 수도화의 미비를 비판하였다. 이 시점에 강원도에는 농촌 수도화를 이룬 군이 하나도 없었고, 인민경제 모든 부문이 다른 도들에 비하여 뒤처져 있었다. 김일성은 강원도당에 유색금속 생산을 빨리 늘리기 위한 투쟁의 전개, 기계제작 공업과 화학공업, 경공업 발전 등 모든 부문에서의 투쟁을 요구하였다. 또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한사람당 매일 고기 60-70g, 달걀은 이틀에 한 개, 과일은 매일 1-2개, 남새는 800g이 공급되도록 요구하였다. 갈마반도는 남북이 왕래할 때를 대비하여 잘 꾸리도록 요구하였고, 원산시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도록 요구하였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1964년 제1차 아랍정상회의에서 팔레스타인 민족회의(PLO)가 결성되자, 북한은 1965년5월에 PLO지지 평양시 군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66년에는 팔레스타인 대표부를 평양에 설치하였고, 1969년 10월 시리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시에 PLO에 대한 지원 의사를 공식 표명한 후 게릴라 요원의 훈련초청, 무기, 탄약 등의 군수품제공 등의 원조를 하였다. 1974년에 고문을 초청하였고, 1979년과 1980년에 2차에 걸쳐 아부지하드 사령관을 초청하여 군사지원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후락, 김일성 방문과 박성철, 서울 방문
제9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다음날인 1971년 11월 20일에 대한적십자사 정홍진과 북한적십자회 김덕현 예비회담 대표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로동당 조직지도부장의 신임장을 가지고 단독접촉을 가졌다. 두 실무자의 접촉은 1972년 3월 22일까지 11차례에 걸쳐 계속되었고, 그 결과 쌍방간의 고위급 정치적 대화통로로 이후락-김영주간의 양자회담의 개최가 이루어졌다. 북한측은 제3국에서의 회담을 거부하고 이후락의 평양방문을 요구했으며, 실무자간의 평양과 서울 방문후에 5월 2일에 이후락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후락은 평양에서 3박 4일간 머물면서 김일성과 두차례, 김영주와 두차례 각각 회담하였다. 이후락의 평양방문에 이어 박성철이 김영주를 대신하여 1972년 5월 29일부터 3박4일간 서울을 방문하였다. 3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박성철은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박정희를 한번 예방하고, 이후락과 두 번 회담하였다. 서울에서의 회담은 평양에서 이후락이 김일성, 김영주와 토의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쌍방은 이후락과 김영주가 공동위원장이 되고 각기 3-5명의 대표로 구성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김일성, 뉴욕 타임즈 기자들과 담화
김일성은 1972년 5월 26일, 뉴욕타임즈 기자들과 면담하고 북한 인민들은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며 그 이유를 한국전쟁 중에 있었던 미국의 <야만적 침략행위>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즈음의 북한의 어려움도 미국의 위협으로 인하여 전쟁준비를 하고 있으며, 전쟁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을 미워하도록 교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개변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는 미국의 한반도 내정에 대한 간섭을 중지하고 미군철수,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해체를 요구했다. 동시에 근본문제의 해결이 없는 기자 왕래나 문화교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공명당 위원장과 김일성의 회담
김일성은 민족대단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이 남한에 사회주의제도를 강요하지 않고 남한도 북한에 자본주의제도를 강요하지 않으며, 남북사이에 군사적으로 서로 싸우지 않을 데 대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유엔이 한반도문제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일방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서는 미군의 철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과는 문화교류와 기자교류에 언제든지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일미안보조약의 폐기와 모든 미군사기지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조총련 제9차 전체대회
조총련 제9차 전체대회는 1971년 1월 29-31일간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조총련 조직정비를 위해 김일성노작 학습의 생활화, 후비간부의 교육 양성 주력 등이 결정되었다. 민족의 권리를 고수하기 위해서 영주권 신청책동을 물리치고 조선적 도로찾기 투쟁 강화, 북한 자유왕래 실현 투쟁, 출입국 관리법과 외국인학교법 성립 저지, 신용조합 육성으로 2천억엔 예금 달성이 결정되었다. <통일촉진>을 위해 한국정부의 고립화와 민단산하 동포와의 단합 강화, 한국민의 반정부투쟁 지지, 김일성주체사상의 선전 강화, 북한의 위신과 영향력 제고, <남한 혁명가>의 투쟁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결정하였다.

 7.4 공동성명
1974년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공동성명이 동시에 발표되었다. 남북 쌍방은 이후락, 박성철의 상호방문과 고위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공동성명의 형식으로 발표하였다. 동시에 가설 운용중에 있던 남북 직통전화를 공식화하였다. 7.4공동성명에서 쌍방은 자주적 해결, 평화적 방법 사용,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대단결을 통일의 원칙으로 합의하였다. 또 긴장완화와 신뢰조성을 위하여 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을 중지하고,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합의하였다. 또한 다방면의 교류와 남북적십자회담의 조속한 성사, 서울과 평양사이의 직통전화 설치를 합의하였다.

 남북 적십자 제1차 본회담
1972년 8월 30일-9월 2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 남북은 20차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본회담 의제를 확인 채택하였고,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 원칙에 기초하여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고 통일의 디딤돌이 될 것을 다짐하였다. 1차회담에서는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지들의 주소와 생사를 알아내며 알리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지들 사이의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을 실현하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지들 사이의 자유로운 서신거래를 실시하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문제,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를 의제로 합의하였다.

 남북올림픽위원장 공동성명
1972년 9월 8일, 남북한 올림픽위원회(남측 위원장 김택수, 북측 위원장 오현주)는 독일 뮌헨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북대표는 앞으로 남북체육교류회담을 위하여 서로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도록 상호초청한다는 것과 이를 위하여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하여 연락하기로 하였다.

 남북 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담 개최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 회의가 1972년 10월 12일 자유의 집에서 열렸다. 남한은 우선적인 남북조절위원회 구성발족, 사회적 이질화의 극복과 민족적 동질성의 회복의 점진적 추진, 남북 쌍방의 상대방의 체제내적 질서에 대한 간섭 배제와 교류협력 추진을 제의하였다. 북한은 남한의 반공정책 포기와 공산주의 용납, 통일과 관련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 옹호 중지, 유엔의 한반도 통일문제 개입 배제, 주한미군의 즉시 철수, 한국군의 전력 증강과 군사훈련 중지를 제의하였다. 이 회의는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2차 회의를 10월 하순경에 가질 것에 합의하였다.

 전반적 10년제 고중의무교육 실시
1972년 7월 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4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전반적 10년제 고중의무교육 실시와 관련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는 기초학력이 없는 경우 간부 양성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고중을 나온 경우는 어느 부문에 가서 일해도 막힘이 없고 30-40세에 전공과목을 배워도 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10년제 고중 의무교육제(7살- 17살)의 실시로 인하여 노동력의 부족과 사회주의 건설에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6살로 입학 시기를 당기고, 학급당 학생수를 40명 선으로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동시에 교원 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교원 양성을 늘리고, 학용품의 보급을 강화할 것도 요구하였다.

 사회주의헌법 준비과정
1948년에 제정된 헌법은 <민주주의혁명>의 성과를 담은 것이므로,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성과를 고착화시킨다는 의도로 사회주의 헌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원래는 당 5차 대회전에 헌법과 국가기관구성법을 고치기 위하여 새헌법 제정을 추진하였다. 헌법개정은 로동당이 중심이 되었으며, 정치위원들이 이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정세의 변동과 여러 가지 사업관계로 중단되었고, 5차 당대회에서 헌법 개정을 하지 못하였다. 당 5차 대회후인 1971년 초에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헌법 개정을 결정하였고,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북한은 그들의 헌법개정이 남한의 유신헌법의 개정과 맞물리면서 일면 부담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헌법개정은 별다른 저항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과 미리부터 예정되었던 것임을 강조하였다.

 남북조절위 제2차 회의
남북조절위 제2차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1972년 11월 3일 김일성은 남한의 방문단을 접견하기도 하였으며, 이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가. 쌍방은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문제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이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서명 교환했다. 나. 쌍방은 서로 중상, 비방을 하지 않기로 한 남북 공동성명의 조항에 따라 1972년 11월 11일 0시를 기하여 대남 대북방송과 군사분계선상에서의 확성기에 의한 대남방송, 대북방송, 상대방 지역에 대한 비라 살포를 그만두기로 하였다.

 사회주의 헌법
1972년에 개정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은 북한지역에 성립된 사회주의제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법적으로 옹호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사회주의헌법에서는 국가기관체계를 변화시켜 주석제와 총리제를 만들었고, 중앙인민위원회를 국가 주권의 최고지도기관으로 하였다. 종전의 국가기관체계와는 달리 인민위원회와 행정기관을 분리시키고, 노동자, 농민, 병사, 근로인테리의 대표로 되는 인민위원회가 행정기관의 사업을 늘 감독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여 행정기관일군들의 관료주의를 없애도록 의도하였다. 민주주의중앙집권제의 원칙이 모든 국가기관들의 조직과 활동의 기본원칙으로 규정되었으며, 국가기관들의 조직과 활동에서 전국적 범위에서 당의 노선과 정책을 통일적으로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 회의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는 1972년 12월 25-28일간 진행되었다. 로동당 5차대회가 지난 후에 진행된 이 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선거, 사회주의헌법 채택, 중앙국가기관 선거가 이루어졌다. 국가수반이며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주석에는 김일성이 선출되었고, 부주석에는 최용건, 강양욱, 총리는 김일, 부총리는 박성철, 정준택, 김만금, 최재우, 남일, 홍원길이 임명되었다. 최고인민회의는 임기 4년의 대의원 541명이 선출되어 구성하였고, 종전의 상임위원회는 상설회의로 명칭이 변화하고 권한이 약화되었으며, 황장엽이 의장, 홍기문과 허정숙이 부의장이 되었다. 1972년 사회주의헌법하의 주석은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주석은 임기 4년,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국가의 모든 무력을 지휘통솔하며, 중앙인민위원회 지도, 정무원 소집과 지도 등의 막대한 권한을 지녔다. 또한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자로서 조약비준 및 폐기, 외국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의 접수 권한을 가지며, 각종 법령과 명령, 결정을 공포하는 권한, 특사권도 가졌다.

 중앙인민위원회(1972년 사회주의헌법)
중앙인민위원회는 헌법상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으로 규정되었다. 중앙인민위원회는 주석, 부주석, 서기장,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임기는 4년이며 주석의 지도를 받게되고, 주석의 제의에 의하여 부주석, 서기장, 위원들이 최고인민회의의 선거 및 소환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중앙인민위원회는 국가의 대내외 정책 수립, 정무원과 지방인민회의 및 인민위원회 사업지도, 사법과 검찰 기관 사업지도, 국방 및 국가정치보위사업 지도, 헌법, 최고인민회의법령, 주석명령, 중앙인민위원회 정령, 결정, 지시 집행 정형을 감독하며, 그와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 지시를 폐지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조국통일 5대강령
1973년 6월 23일 남한의 박정희가 평화통일외교정책을 발표하였다. 이 특별성명에 대하여 김일성은 조국통일 5대강령을 제시하였다. 조국통일 5대강령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평화적 통일을 위한 북과 남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 2) 북과 남사이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경제, 문화의 여러 분야에 걸쳐 다방면의 합작과 교류실현, 3) 북한의 노동자, 근로농민, 근로인테리, 청년학생, 병사들과 남한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군인, 민족자본가, 소자산계급과 같은 각계 각층 인민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들의 대민족회의 구성, 4) 남북연방제 실시, 5) 연방제 실시후에 하나의 국가로 유엔가입

 남북대화 중단 발표
남한 적십자사는 1973년 7월 평양에서 있었던 7차 본회담에서 추석에 남북의 이산가족, 친척들로 성묘방문단 구성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남한의 법률적, 사회적 조건 환경개선을 제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8차 회담을 결정하지 못하고 회의를 마쳤다. 그러던 중 북한은 8월 28일에 김영주가 남북대화의 중단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서 김영주는 남북조절위원회에서 이후락의 제거,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하였다. 더불어 정당, 사회단체의 활동의 자유 보장과 김대중을 비롯하여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였다.

 평양지하철
1959년 공사에 착수하여 1973년 9월 5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평양역에서 인민군거리, 청년거리, 모란봉 앞의 청년공원, 서평양의 모택동 광장, 대성구역, 김일성대학 앞에 이르는 1차선이 이때 완성되었다. 지상역과 지하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하역에는 대리석으로 바닥과 둥을 장식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3차회의
1974년 3월 20-25일간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회의에서는 세금제도 철폐, 1973년도 국가예산 집행 결산이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서 북한 외교부장 허담은 자주적 평화통일의 촉진을 위해서는 미국의 내정간섭 종식과 미군 철수, 북과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 정전상태의 공고한 평화로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허담은 이 회의에서 미국에게 정식으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토의를 제의하고 판문점을 장소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조미협정체결을 제의하는 편지를 미국 의회에 보냈다.

 월남인민승리 경축 평양시 군중 집회
월맹에 계속적인 지원을 해오던 북한은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월맹에 의하여 무너지자 5월 3일에 평양시 군중대회를 열고, 로동신문은 사설에서 영웅적 투쟁의 빛나는 결실이라고 주장하였다. 1976년 7월 2일에 남북월남이 통일정부를 수립하자, 북한은 세계 반제혁명역량의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며 극찬했고, 쌍방간의 관계 강화를 강조했다. 통일베트남의 수립이래 북한, 베트남간의 관계는 다른 사회주의 나라에 비해 인사교류 및 제반교류에서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에 1979년 1월에 베트남이 프놈펜을 함락하자 프놈펜에 있던 북한 대사관을 철수하고 관계가 악화되었다.

 비동맹회의 가입
북한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하자 1955년 반둥회의를 계기로 적극적인 대중립권 외교를 추진하였다. 비동맹 국가들에 대한 노력을 통해 북한은 1973년 알제리에서 열린 제4차 비동맹정상회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였고, 28차 유엔총회에서는 북한의 주장을 반영한 한국문제 결의안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1975년 3월에 쿠바의 아바나에서 열린 비동맹조정위 외상회의에서 북한의 가입문제가 처음 대두되었으며, 1975년 페루외상회의에서 비동맹에 가입하였다. 이러한 북한측의 비동맹 외교의 결과로 30차 유엔총회에서 공산측 결의안이 퉁과되기도 했다.

 조선로동당 창건 30주년 기념 대회
김일성은 1975년 10월 19일 조선로동당 창건 30주년 기념 보고에서 6개년 계획을 1년을 앞당겨 완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의 3대혁명을 더욱 힘있게 벌릴 것을 주장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전국적인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남한의 각계 각층 인민들과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남한의 민주공화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와 협상하고 합작할 용의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유엔군 사령부의 해체, 미군 철수, 반공법의 폐지를 요구하고 연공정책을 요구하였다.

 3대혁명 소조
3대혁명소조는 1973년 2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하여 제대군인이며 열성당원인 대학졸업반 학생들과 김일성고급당학교 학생, 대학을 갓 졸업한 기술자, 사무원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이후 각 공장, 기업소와 협동농장, 각 기관과 학교들에 파견되어 당조직과 국가경제기관들의 기능을 높이고 일군들의 사상관점과 사업작풍에 전환을 일으키는 역할 수행을 요구받았다. 이들이 이러한 요구를 받게 된 것은 각지에 있는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당조직들이 정치사업과 사람과의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김일성은 주장하였다. 특히 간부들의 관료화 현상, 기관본위주의 등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이러한 문제에 투쟁하기 위한 수단으로 3대혁명 소조원을 각 도의 공장, 기업소에 파견하여 간부들의 사상을 고치고 교양개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남일(南日)
1914년 함북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에 다쉬켄트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제2차대전중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였다. 1945년에 입북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 북로당 중앙위원회 위원,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1949년에 교육성 부상, 1950년에 인민군총참모차장, 총참모장이 되었고, 1951년에 군사정전위 공산측 수석대표가 되었다. 1953년에 외무상, 1954년에 제네바회담 수석 대표, 1956년에 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1957년에 부수상이 되었다. 1962년에 부수상겸 국각건설위원회 위원장, 1970년에 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72년에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976년에 사망하였다.

 8.18 판문점 사태
1976년 8월 18일 유엔군측 경비중대장 보니파스대위가 14명의 군인 및 노무자를 인솔하여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내 유엔군측 제3초소 남방 30m 지점에서 미루나무를 치던 중에 북측 경비병과 시비가 붙었다. 이때 나타난 북한 경비병 30명이 유엔군측 노동자의 도기를 뺏어 미군 보니파스대위와 바레트소위를 살해하고 유엔군측 경비병 8명에게 중상을 가하였다. 이 사태로 인하여 북한은 전쟁태세에 돌입하고, 미국측의 해명 및 배상요구를 거부하는 등 큰 마찰을 빚었다.

 최용건(崔庸健)
1900년에 평북 태천군에서 출생하여 평북 오산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운남군관학교를 마쳤다.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냈으며, 동북항일연군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 1945년 입북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북조선민주당 중앙위 부위원장, 북조선민주당 위원장을 역임했다. 1948년에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를 했고, 민족보위성 부상을 맡았다. 1950년 서울 방위 사령관, 1953년에는 차수 칭호를 받았고, 부수상겸 민족부위상이 되었다. 1961년에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62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66년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 1972년 국가부주석 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1976년 9월에 사망하였다.

 주스웨덴 북한대사관원의 추방
1959년 스웨덴에 북한 친선협회가 결성되었고, 1973년에 양국간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11월에 양국간에 무역협정이 이루어지고 양국간에 외교부대표단과 의원대표단이 상호 방분하였다. 북한의 스웨덴과의 무역은 1973년 이전에는 100만 달러 이하였는데, 1974년 이후 화물자동차, 주물용성형기, 수공구류, 불도우저, 펌프 및 원심분리기, 적하용기계, 굴착용 기계공구 등 기계설비를 북한에서 주로 수입하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기계설비 수입으로 북한은 적자폭이 크게 확대되었고, 북한 수출품인 비철금속 가격의 하락 등으로 인하여 채무를 갚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중에 북한 외교관들이 마약밀수사건으로 추방당하게 되었고, 양국간의 관계가 정체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 제5기 13차 전원회의
1977년 4월 5일 로동당 중앙위 제5기 13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가뭄 피해 극복을 위한 대비를 주장하였다. 1976년 가을부터 약 8개월에 걸쳐 거의 비가 오지 않음으로 인하여 땅이 마르고, 저수지에 물이 차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농사에 큰 우려가 되었으며, 850만톤의 알곡을 거두려는 계획에 차질이 우려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일성은 지하수 개발, 우물파기를 지시하였고, 한냉전선에 잘 견디고 일찍 여무는 <평양8호> 벼를 전면적으로 심을 것을 지시하였다. 동시에 옥수수를 적기에 심고, 비료와 부식토 생산과 주체농법의 준수를 요구하였다.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
김일성은 1977년 9월 5일 로동당 중앙위 제5기 14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를 발표하였다. 김일성은 노동계급이 정권을 잡은 다음에도 자본주의 포위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게 되며 이러한 조건으로 인하여 밖으로부터 부르조아 반동사상과 퇴폐한 문화가 들어오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고 먹고 입고 살 걱정이 없어지면 사람들의 혁명적 열의가 떨어지므로 교육사업을 강화하여 사회성원들의 혁명적 열의를 높일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공산주의적 인간육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며, 어느 나라도 공산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다며,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개조하여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사상잔재를 뿌리뽑고, 당에 대한 충실성으로 교양하여 열렬한 공산주의 혁명가로 육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인민군 군인 10대 준수사항
1977년 11월 30일 조선인민군 제7차 선동원 대회에서 김일성은 인민군 군인들이 지켜야할 10대 준수사항을 밝혔다. 1) 인민군 군무자들은 언제나 군사규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2)인민군 군무자들은 자기의 무기에 정통하며 그것을 언제나 잘 관리하여야 한다. 3)어떤 조건에서든지 군사명령을 철저히 집행하여야 한다. 4)당 및 정치 조직들에서 준 분공을 어김없이 집행하여야 한다. 5)국가비밀, 군사비밀, 당조직 비밀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6)국가의 사회주의적 법과 질서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7)군사정치훈련에 어김없이 참가하며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8)인민을 사랑하며 인민들의 재산을 털끝만큼도 다치지 말아야 한다. 9)국가재산과 군수물자를 철저히 보호하며 그것을 절약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여야 한다. 10)동지들을 친형제와 같이 상하며 군대안에 상하일치단결의 미풍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

 제5기 16차 전원회의
김일성은 6개년 계획을 공업부문에서는 1년 4개월 앞당겨 수행했고, 농업부문에서는 2년이나 앞당겨 수행했다며 1978년 1월 28일 로동당 중앙위 제5기 16차 전원회의에서 제2차 7개년 계획을 앞당겨 수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2차 7개년 계획의 기본과업은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다그쳐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를 강화하고 인민생활을 한단계 높이는데 두었다. 이 기간동안에 모든 공업부문에서 종합적 기계화와 자동화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농업을 공업화, 현대화하고, 과학 발전에 힘을 넣어 모든 부문의 생산기술공정과 생산방법, 경영활동을 과학적 토대위에 올려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매해 20-30만 세대의 살림집을 짓고, 병원침대수를 1.2배로 늘리는 등 인민경제생활을 개선하도록 하고 이를 위하여 자력갱생의 혁명정신 발휘를 주장했다.

 제3땅굴
제1 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고랑포 동북방 8㎞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당시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측에 땅굴현장을 공동조사하자고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제2땅굴은 1975년 3월19일에 철원북방 13km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제3땅굴은 귀순한 김부성의 증언을 바탕으로 과학적인 탐사를 통해 1978년 10월17일 판문점 남방 4km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땅굴은 북한측 입구로부터 1635m가 구축되었는데, 그 위치가 서울에서 불과 44km거리에 있었다.

 신민당과 접촉 제의
1979년 6월 11일에 신민당 김영삼총재가 양당세력의 남북대화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는 양당 총재로서 통일을 위하여 장소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책임있는 사람과 만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하여 6월 18일에 북한의 부주석 김일은 로동당과 신민당의 책임있는 대표들 사이의 접촉을 위해 신민당이 편리하다고 보는 시기에 판문점이나 제3국에서 예비적 접촉을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더불어 북한은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도 대화에 나선다면 기꺼이 만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어서 6월 23일에는 로동신문 사설을 통해 김영삼총재의 발언을 지지하였다.

 미군 철수 및 미국과의 단독회담 주장
1979년 7월 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남북한과 미국간의 3자 회담이 제의되었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미국과 풀을 문제와 남한과 풀 문제가 따로 있다며 3당국회담을 거부하였다. 북한은 남한에서의 미군철수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는 정전협정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맺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회담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미국측이 요청한다면 이 회의에 남한 당국자들이 업저버로 참가시키는 것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대동강 TV공장 완공
북한은 1947년에 통신기계 제작소를 설립하여 자석식 교환기, 전화기, 확성기 등을 제작하였다. 1962년에는 각 지방에 소규모 부품공장을 계속 건설하였는데, 비교적 대규모공장인 남포 통신기계공장은 라디오와 유선방송용 고성기를 생산하였다. 1966년에는 TV수상기 생산설비를 도입하여 1968년에 TV생산공장을 완공하고 1969년부터 생산을 시작하였다. 1970년부터 희천전자관공장에서 진공관을 생산하였고, 민생용 전자기기공장으로 1979년 9월에 루마니아의 지원으로 연산 10만대 규모의 대동강TV공장을 완공하였다.

 로동당 제6차대회와 6차 당대회 규약 및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
로동당 제6차대회는 1980년 10월 10일부터 5일간 개최되었다. 10년만에 개최된 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의 사업총화보고, 당중앙위원회 검사위원회 보고, 당규약 개정, 당지도기관 선거 등이 있었다. 이 대회에서 김영주가 실각하고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화되었으며, 10대경제전망 목표가 제시되고,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시하였다. 145명의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103명의 후보위원이 선출되었다. 총비서에는 김일성, 상무위원에는 김일성, 깅일, 오진우, 김정일, 이종옥이 선출되었다. 박성철, 최현, 임춘추, 서철, 오백룡, 김중린, 김영남이 당서열 6위에서 12위에 있었다. 조선로동당은 매 당대회마다 당규약을 개정해 왔는데 전문과 10장 60조로 구성된 6차 당대회 당규약은 체제상으로는 큰 변화가 없지만 몇가지 중요한 규약 개정이 있었다. 조선로동당은 오직 김일성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서만 지도된다하여 지도사상 규정이 변화했으며, 종전에 4년에 1회로 규정된 당대회를 5년에 1회로 바꾸고, 당중앙위원회의 필요에 따라 빨리 또는 늦게 소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이 결원이 되었을 대는 후보위원 중에서 보선하되, 필요시에는 후보위원이 아닌 다른 당원으로 보선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1980년 2월에 시작된 남북총리회담 실무접촉은 4차례의 접촉과정에서 초보적인 절차문제에 합의하는 등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의제문제로 대립하다가 남한의 5.17비상계엄조치를 문제삼아 북한이 회담중지를 선언하였다. 9월에 김일성은 전두환 정권과의 대화거부를 밝혔으며, 10월 10일 조선로동당 6차 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제의하였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남한에서의 <군사파쇼통치의 청산과 민주화>를 요구했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폐지, 체포 투옥된 인사의 석방, 유신체제 청산을 요구하였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주장하며, 북과 남에 존재하는 상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민족 통일정부를 내오고, 같은 권한과 의무를 가지고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 창립으로 통일할 것을 제의하였다.

 개선문 및 주체사상탑 건립
개선문은 1982년 4월에 평양 모란봉 기슭 개선의 광장에 김일성의 위업을 기린다는 목적으로 건축되었다. 높이 60m, 폭 50m의 거대한 건축물로 평안남도에서 실어나른 화강암 1만 500여개로 건축되었다. 주체사상탑은 1982년 4월 15일 김일성의 70회 생일을 맞아 준공되었다. 대동강변 130여 정보 부지에 높이 170m의 탑으로 만들어졌는데, 김정일의 발기와 지도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70돌을 기념하여 앞뒷면에 각각 18개의 단, 양옆에 각각 17개의 단, 모두 70개의 단으로 처리했고 255500개의 화강암을 사용했다. 탑의 전망대에서는 수도평양의 전경을 관람할 수 있다.

 피바다가극단
피바다가극단은 1971년 7월에 창립되었다. 항일혁명시기에 창조되었다는 작품들을 혁명가극으로 각색하여 근로자들에 대한 혁명적 교양에 이바지하는 것을 기본 사명으로 하고 있다. 창작창조지도부와 합창부, 무용부, 무대미술부, 3관편성의 교양악단 등 혁명가극 창조에 필요한 여러개의 창조부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백명의 창작가, 예술인들로 꾸려져 있다. 1971년에 혁명가극 “피바다“를 창작했고, 1972년에는 “꽃파는 처녀“를 내놓음으로써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가극예술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고 평가받았다. 창립 후 약 2년 동안에 북한내외에서 약 300회에 가까운 공연을 했다. 예술영화 한 자위단원의 운명에 나오는 노래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민족악기에 의한 교향악과 경음악을 창조하였다고 평가받았다.

 최덕신(崔德新)
191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중국황포군관학교를 다녔다. 1945년 중국군 상교(대령), 1955년 국군제1군단장이었으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61년 외무부장관, 1963년 주서독대사, 1967년에 7대 천도교 도령을 역임했다. 1976년 미국으로 도피하여 반정부활동을 했으며, 1981년에는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다. 1986년에 조평통 부위원장, 1989년에 천도교청우당 중앙위 위원장이 되었고, 1989년 11월에 사망하였다.

 김일성저작집
≪김일성선집≫, ≪김일성저작선집≫으로 이어지던 김일성저작의 출판이 1979년부터 ≪김일성저작집≫으로 출판되었다. ≪김일성저작집≫은 해방과정에서의 소련의 역할이 나타나는 문구들이 모두 삭제되었으며, 혁명전통확립을 목적으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관련 문건을 처음으로 첨가하였다. 또한 김일성 이외의 이름을 삭제하는 등 다양한 김일성우상화작업을 시도하였고, 용어와 내용도 주체사사의 틀에 맞도록 수정하였다. 현재 44권으로 출간된 ≪김일성저작집≫은 주체사상과 정치이념, 외교, 경제발전, 국방, 사회주의 문화건설, 남북관계와 통일 등 북한 통치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김일성의 지시가 담겨져 있다. 최근에는 ≪김일성전집≫이 출간되어 그동안 빠진 문건들이 발간되고 있다.

 조선전사
≪조선전사≫는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1979년부터 4년간에 걸쳐 우리역사를 총 33권으로 편찬한 것인데, 여기에는 북한 역사학계가 그동안 이룩한 연구성과가 총 정리되어 있다. ≪조선전사≫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시기에 주체사상이 체계화, 전면화 되면서, 주체사관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전사≫는 1권이 원시편, 2권이 고대편, 3권에서 12권이 중세편, 13-15권이 근대편, 16권에서 33권까지가 현대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편 중에서 16-22권까지가 항일무장투쟁사, 23-24권이 민주건설사, 25-27권이 한국전쟁, 28-33권까지가 사회주의건설사로 서술되어 있고 연표 2권이 있다. 현대사는 김일성중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각권에는 김일성의 교시가 인용되어 있다.

 김일성 중국 공식 방문
1978년 중공당 주석 화국봉이 북한을 방문하여 쌍방 무역고의 증대와 유류의 추가지원을 약속하였다. 1978년 9월에는 등소평이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통일방침을 지지하고 미군철수 등 북한측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1981년에도 중국은 북한에 대해 친선공세를 거듭했고, 북한은 총리 이종옥이 중국을 방문해 등소평, 조자양 등과 협력증진방안 등을 논의했다. 중국공산당 12차 대회에서 모택동숭배 및 잔재가 일소되고 등소평을 핵으로 하는 호요방, 조자양 체제가 성립된 후 12월 20일에 조자양이 당과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고, 1982년에는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여 호요방과 4차례, 등소평과 2차례, 조자양 수상과 한차례 회담하였다. 김일성의 중국방문은 쌍방간의 혈맹관계를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방문중인 남한 대통령 전두환과 수행원들의 아웅산국립 묘소 참배기회를 이용하여 북한 무장 공작원이 원격조종 폭탄을 폭발시켰다. 대통령을 기다리던 서석준부총리, 함병춘대통령 비서실장,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등 17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미얀마측 인사 4명도 사망하였다. 미얀마당국은 도주하는 북한공작원 2명을 생포하고 1명을 사살했다.

 남북체육회담 제1차회의 결렬
1984년 3월 30일 북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의 남북체육대표단 회담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한체육회 회장 정주영이 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86년 아시아경기대회, 88서울 올림픽대회 등에 참가할 남북 단일팀 구성문제, 남북체육교류 실시문제를 의제로 4월 9일에 판문점에서 남북체육회담을 제의하였다. 남북은 남북체육회담 대표단 구성 및 개최일자 제의에 동의하여 4월 9일에 1차, 4월 30일에 2차, 5월 25일에 3차 남북 체육회담을 열어 각각 단일팀의 구성 및 체육교류방안을 제시하였으나 합의하지 못하고 북한측의 거부로 결렬되었다.

 김일성-호요방 1차회담
1981년 중국수상 조자양의 평양방문에 이어 최고실력자인 군사위원회 주석 등소평과 당총서기 호요방이 1982년에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양국간의 친선을 확인하고 김정일의 후계자지위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2년 9월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고, 1983년에 김정일이 비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등소평과 호요방을 만났다. 1984년 5월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청으로 호요방이 북한을 방문하여 양국간에는 매년 수뇌회담이 정례화되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1984년 5월 김일성은 소련과 동구를 방문한 후 11월에 다시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여 등소평, 호요방 등과 회담하였다.

 김일성-체르넨코 회담
1984년 5월 김일성은 부주석 이종옥, 총리 강성산, 외교부장 김영남,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등을 대동하고, 1961년 이후 23년만에 소련을 공식방문하였다. 이 회담에서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끌어 냈고, 양국간의 무역규모가 크게 증가하였다. 1986년 1월 세바르드나제 소련외상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과 회담하였고, 1986년 10월 김일성은 고르바초프의 초청으로 소련을 공식 방문하였다. 김일성은 고르바초프 영도하의 소련의 변화를 지지하였고, 소련은 북한의 통일정책과 주한미군 철수주장을 지지하였다.

 합영법
북한은 1984년 9월 총 5장 26조의 합영법을 제정하여 외국기업을 유치하여는 정책을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북한은 세계 여러나라들과 경제기술교류와 협조를 확대발전시키는 것은 조선로동당과 북한 정부의 일관된 경제정책이라고 주장하였다. 합영법 제1장은 합영의 기본, 제2장에는 합영회사의 조직, 제3장에는 합영회사의 해산과 분쟁해결을 규정하였다. 1985년 3월 북한 정무원은 전문 71조의 합영법 시행규칙을 만들었는데 제1장은 일반규정, 제2장은 합영회사의 조직. 제3장은 출자, 제4장은 이사회와 관리성원, 제5장은 물품구입과 제품판매, 제6장은 노력관리, 제7장은 외화관리, 제8장은 결산과 분배, 제9장은 합영회사의 해산, 제10장은 분쟁해결을 규정하였다.

 북적 수해물자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회가 남한의 수해 이재민을 위한 쌀 5만석, 천 50만 미터, 시멘트 10만톤, 기타 의약품을 구호품으로 보낼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한적십자사가 9월 14일에 수재물자의 인도 인수절차를 위한 쌍방 적십자사 실무접촉을 제의하였고, 양쪽의 접촉 결과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수재물자의 인수가 이루어졌다. 10월 12일에 신병현 부총리의 남북경제회담 개최제의가 있었고, 북측의 수락으로 11월 15일에 남북 경제회담이 개최되었고, 11월 20일에는 제8차 본회담을 위한 남북적십자 예비접촉이 이루어졌다. 제2차 남북경제회담은 1985년 5월에, 제3차 남북경제회담은 6월 20일에 이루어졌는데 제3차 회담에서 남북간의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 추진과 부총리급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경제협력기구 설치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88올림픽 개최장소
1985년 5월 29일 국제 올림픽위원장 사마란치는 9월이나 10월에 88올림픽에서의 남북한 단일팀 구성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을 남북한에 제의했다고 밝혔다. 북한 측은 7월 6일에 사마란치의 제의를 수락하였고, 7월 30일에 북한 정준기 부총리는 88올림픽의 남북공동개최 및 남북한 유일팀 출전을 주장하였다. 정준기는 서울, 평양 올림픽대회라는 이름으로 경기의 절반을 평양에서 치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한의 체육부 장관은 남북한 공동개최에 대해 반반 성명을 8월 2일에 발표하였다.
북한측은 올림픽 경기 8개 종목의 배정을 요구하였으나, 이 문제가 남북간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북한은 1988년 1월 12일에 88올림픽 불참을 발표하였다.

 남북적십자 제9차 본회담
1985년 8월 22일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분제와 관련하여 남북간에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9월 20-23일간 남측은 김상협 한적 총재, 북측은 손성필 북적 위원장을 단장으로 각각 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 취재기자 30명, 지원인원 20명 등 151명이 3박 4일간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방문하여 친척을 만났다. 21일과 22일 두차례에 걸쳐 북한의 평양예술단은 서울의 국립중앙극장에서 남한의 서울예술단은 평양의 평양대극장에서 공연하였다.

 협동농민들에게 사회보장제 실시
중앙인민위원회는 1985년 10월 4일에 정령을 발표하여 협동농민들에 대한 사회보장제 실시를 발표하였다. 중앙인민위원회는 농업생산과 농업협동경리의 축적금이 끊임없이 늘어남으로써 협동농민들에게 사회보장의 혜택을 줄 수 있는 튼튼한 물질적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주장했다. 협동농민들에 대한 사회보장제는 1986년 1월 1일부터 실시하며, 중앙인민위원회는 정무원에 정령 집행을 위한 구체적 대책을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남북한 UN가입반대
1985년 10월 18일 북한 부주석 박성철은 유엔총회연설에서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고 유엔에 들어가려면 최소란 북남연방제라도 실현하고 단일국호 밑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10월 22일에 남한 총리 노신영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의 무력 불사용, 남국간 직접 대화 및 최고당국자회담, 문호개방 및 88올림픽 참가자 안전 보장, 남북한의 유엔가입, 미소중일 4강과 남북한 간의 상호관게 정상화, 개도국과 남남협력의 강화를 제안하였다. 10월 24일에 남한의 이원경 외무장관은 유엔창설 40주년 기념 만찬에서 연성릉 통하여 한국단독이라도 유엔에 가입할 것을 희망하였다.

 핵확산금지조약 기구 정식 가입
북한은 1975년 9월 국제 원자력기구(IAEA)에 처음으로 가입한 후 1985년에 NPT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NPT의 모든 회원국은 NPT체결후 180일 이내에 안전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IAEA규정을 무시하고 6년후인 1992년 1월에 핵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하였다. 핵안전협정에 조인한 북한은 1993년 2월까지 IAEA로부터 6차례의 임시사찰을 받았다. 북한이 제출한 최초보고서에 입각하여 실시된 사찰결과, IAEA는 북한에 대해 핵폐기물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영변의 2개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였고, 북한이 이 시설을 군사시설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찰을 거부하면서 IAEA와 북한 간에 마찰이 벌어졌고, 1993년 3월 북한은 NPT에서의 탈퇴를 전격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