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華에 가두어 둔 죄인을 押送해 오거든 實情을 샅샅이 조사하겠다는 備邊司의 啓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강원감사 이호민(李好敏)의 밀계(密啓)로 강화부(江華府)의 천극(荐棘)註001) 죄인을 적간(摘奸)하기 위해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발송(發送)하여 본부 유수(留守)와 공동으로 거행하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신(守臣)의 보장(報狀)을 보면 ‘방금 도착한 본사(本司)의 관문에 강원감사의 밀계로 인하여 금오도사(金吾都事)가 적간하기 위해 금방 내려가니 도착하는 즉시 공동으로 거행하되 혹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그 날 미시(未時) 쯤 금부도사 심노숭(沈魯崇)이 부(府)에 들어왔으므로 때문에 당직(當職 : 본인)이 즉시 경력(經歷) 이영중(李英重), 중군(中軍) 권사정(權思正)과 같이 천극 죄인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가서 도사(都事)가 개봉(開封)한 후에 죄인 3명을 극문(棘門) 안으로 불러 그 이름과 나이를 물었습니다. 죄인 성득(成得)은 37세이고 키가 4척(尺)쯤이고 얼굴은 철색(鐵色)이며 구레나룻이 다소 길며 왼쪽 팔과 왼쪽 다리가 마비되어 걸음걸이가 불편하였습니다. 죄인 철득(鐵得)은 32세이고 키가 4척쯤이며 얼굴이 철색이고 구레나룻이 짧고 다소 비대하였습니다. 죄인 쾌득(快得)은 27세로 키가 4척쯤이고 얼굴이 철색이고 작고 수척하고 구레나룻이 다소 길었으며 모두 총각이었습니다. 좌우 방수장교(左右防守將校) 오현술(吳賢述)·김경해(金景海)·김처학(金處學)·김응준(金應俊) 등이 보고한 바에는 「방수(防守) 3명의 죄인은 나이와 모습이 확실하여 의심이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식주인(食主人) 차성철(車成轍)과 그 자식 계달(啓達)이 보고한 바에는 「저들은 15년 동안 식주인을 해서 아침저녁으로 왕래하여 그 얼굴과 모습이 다른 사람과 다른지에 대해 숙지하고 있습니다. 3명의 죄인은 확실하여 의심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분내사(分內司)의 서원(書員) 김의택(金宜宅)과 고직(庫直) 이춘빈(李春彬) 등이 보고한 바에는 「저들은 역시 내사의 서고(書庫)에 여러 해 동안 왕래하여 면목에 익숙합니다. 지금 이 죄인 3명은 확실하게 의심이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본영(本營) 수교(首校) 조국린(趙國藺)과 행수표교(行首捕校) 김응현(金應鉉) 등이 보고한 바에는 「저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 장교 노릇을 하여 3명 죄인들의 면목을 상세하게 알고 있으며 오늘 적간(摘奸)할 때 3명 죄인의 용모는 확실하여 의심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의좌병방(義左兵房) 최달해(崔達海)가 보고한 바에는 「저는 정미년(丁未年 : 정조11년, 1787) 이후 거듭해서 방수(防守)를 거행했기 때문에 죄인들의 면목을 숙지할 뿐만 아니지만 정미년 1월부터 서울에서 압송해올 때 문수산성(文殊山城)에 가서 기다리다가 압송해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 때부터 나이 들 때까지 빈번하게 보았으므로 3명 죄인 면목은 전혀 의심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들이 보고한 바를 들어보면 식주인이 10여 년 동안 날마다 왕래한 것 및 처음부터 압송할 때까지 장교가 보고한 바는 또 매우 분명합니다. 금부도사가 곧 전처럼 감봉(監封)註002)하고 이어서 발길을 돌렸기 때문에 그 뒤의 방수 문제에 다시 더욱 엄하게 신칙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수신과 도사가 상세하게 살피니 3명 죄인의 용모와 나이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각인의 공초도 모두 분명하였습니다. 금성(金城) 죄인이 가탁(假託)한 정절(情節)이 지금에야 비로소 드러났으니 압송해 오기를 기다려 끝까지 조사하여 실정을 캐겠음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