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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 Ⅴ
1. 해방 직후(1945~50)의 학회와 학회지
구한말 이래 근대역사학을 개발한 한국사학자가 적지 않게 배출되었으나 해방 전에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 많았다.註 003 그리고 해방 후에 鄭寅普·白南雲·崔益翰·安在鴻·金台俊·李瑄根·李北滿처럼 사회활동이나 정계에 투신하여 사실상 연구활동이 제한되거나 중단한 이도 있었다. 또 金洸鎭에 이어 李淸源처럼 일찍이 북한으로 간 이도 있었다. 그렇게 연구인원이 감소되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8·15 이전의 隱遁學者가 나오고 亡命學者가 돌아오고 新進學者의 참여가 있었고 또 종전에 식민사학에 종사하던 이가 새시대를 맞아 민족사학에 참가한 이도 있어 한국사연구는 더 없이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아울러 여러 가지 저술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註 004
그런 가운데 다양한 연구학회가 결성되어 學會誌들이 간행되고 있었다. 해방 전에도 역사학자가 모여 있던 1934년에 설립한 震檀學會가 있었다. 그것은 역사뿐 아니라 국어 국문학자와 함께 결성한 한국학 연구학회였다. 진단학회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이어 해산했던 것을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 조선학술원의 창립에 이어 재건한 것이다. 45년 10월 21일 탄생한 朝鮮科學者同盟도 종합연구단체라는 점에서는 조선학술원과 같은 것이었다. 과학자동맹은 각 방면의 유물사관 학자의 총집결체였고, 젊은 학자를 중심한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는 朝鮮史硏究會와 歷史學會가 결성되었다. 그와 같이 분야별 세대별로 모임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 조직이 다원화되면서 회원의 활동이 분산되어 조선학술원은 당초의 뜻대로 중앙 아카데미의 구실을 할 수 없어, 설립자인 백남운은 46년 5월 6일에 民族文化硏究所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평양에서 내려온 韓斌과 손잡고 그해 2월 5일에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정치운동에 입신한 처지였으므로 민족문화연구소도 자연 그의 정치활동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註 005 진단학회도 친일파 회원의 제명문제가 제기된 가운데 학회를 재건한 李丙燾가 별도로 조선사연구회를 결성하고, 젊은 연구자들은 과학자동맹이나 역사학회를 만들어 딴 살림을 차리게 된 마당에 한국학연구 센터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무수한 학술문화단체가 나타나 46년 2월 24일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맹이 결성되기까지 했다.註 006 연맹에는 조선학술원과 진단학회 등 당대를 대표한 학술 단체가 거의 모두 가담하고 있었으나(회원단체 95) 뿔뿔이 흩어지는 모임들을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이와 같이 해방 직후에 연구단체가 제나름의 명분을 앞세우며 탄생하였으나 학술연구만으로 버티어 나가기 힘든 속에서 명분을 다할 수 없었다. 조선학술원은 회보로서 『學術』을 겨우 창간호 간행(1946.8.15)에 그쳐야 했고,註 007 『震檀學報』는 1950년까지 5년간에 제15집(1947.5.28)과 16집(49.1.10)을 내는 데 그쳤다.註 008 1934년부터 42년까지 식민지하에서도 14호까지 발행했던 것을 감안하면 해방기간의 실적이 너무 부진하였다. 15, 16집에 실린 역사 논문은 李相佰·李仁榮·李能植의 글 3편밖에 없었다.註 009 조선과학자동맹에서는 『科學戰線』과 『週報 民主主義』를 간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회보 내용을 보면 『주보 민주주의』 47년 3월호의 삼일운동 특집호 같은 것이 있기는 했으나註 010 그 외에는 거의 時論으로 메워져 있다. 신진 역사학자들도 시사평론을 투고하고 있었다. 거의 시론뿐이라는 것이 순수 학술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만큼 정치 정세가 긴박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연구자들도 정치 취향에 따라 연구광장을 옮겨 종합 연구조직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역사학자만의 학회가 탄생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 12일에 朝鮮史硏究會가, 12월 25일에는 歷史學會가, 그리고 46년 8월 15일에 京城大學朝鮮史硏究會가 탄생한 것이다.
朝鮮史硏究會는 회원 명단이 없어 분명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창립 3주년인 48년 12월 12일에 고려문화사를 통해 발간한 『史海』에 李丙燾·金庠基·姜大良(강진철)·金廷鶴·申奭鎬·辛東燁·金映遂 등이 집필하고 있어 그들이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註 011 회장은 李丙燾, 부회장은 金庠基·申奭鎬였다. 논문은 7편 실려 있는데 모두 전통시대에 관한 것이다.註 012 역사연구의 전문 학회지가 출간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으나 무슨 영문인지 창간호로 끝나고 그 후에는 연구회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歷史學會는 1945년 12월 25일에 창립하였다. 초창기 회원은 廉殷鉉·洪以燮·金一出·閔泳珪 등의 초대 간사 외에는 확실하지 않으나 1948년의 회원 명단을 보면 모두 신진학자들이었다.註 013
구성원으로 보면 국사·동양사·서양사 그리고 미술사 등의 분류사 연구자를 총괄한 연구학회였고, 또 젊은 학자를 중심한 모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성 학자들이 며칠 전인 12월 12일에 조선사연구회를 결성한 바로 뒤에 젊은 연구자들이 따로 학회를 결성했다는 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진단학회에서 일어났던 동일한 반발이 아니었던가 한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좌우익의 학자가 함께 참가한 모임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초기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1948년 5월에, 남북에서 단독정부가 각각 수립되던 시기에 좌우익 학자가 모여 있었다는 것이 주목되는 것이다. 학회 차원에서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을 열망했던가를 짐작케 하는 단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歷史學會는 1949년 5월 27일에 『歷史學硏究』를 정음사에서 간행하면서 7편의 논문을 실었다.註 014 권말의 「彙報」를 보니 6회의 학술발표회가 있었고,註 015 세 번이나 간사가 교체된 것으로 보아,註 016 학회 활동도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歷史學會는 1952년 3월 16일에 ‘재건’이 아니라 ‘창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45년에 결성한 역사학회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52년의 역사학회를 설립한 주역 가운데 金元龍·趙義卨·洪以燮·韓㳓劤·高柄翊·全海宗 등은 45년의 역사학회 명단에도 등재되어 있는 인사들이었다. 45년의 역사학회나 52년의 역사학회나 탄생할 때는 문자로 전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던 것 같다.註 017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살피기로 한다.
1946년에는 경성대학내에서 李仁榮 교수를 중심으로 朝鮮史硏究會가 결성되었다. 그 연구회는 학생조직이었는데 46년 8월 15일 孫晋泰 서문으로 편찬한 『朝鮮史槪說』의 완성을 전후하여 결성한 것이다.註 018 손진태·이인영 교수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李洵馥·韓㳓劤·孫寶基와 유물사관을 따르던 金思億·林建相 등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즉, 기성 연구자들이 좌우로 분열하던 현실 속에서 앞의 역사학회처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 연구자들 가운데는 분단이 아닌 통일을 지향하고 있던 이도 적지 않았다. 경성대학 조선사연구회는 46년 신탁통치안의 문제로 좌우의 대립이 격화되고,註 019 그 해 가을 미군정의 國立大學 設置案 문제로 학교가 혼란에 빠지고 있었는데註 020 이순복이 주도하여 국사연구실 앞에 ‘歷史科學硏究所’의 간판을 걸자 “이것이 학교에서 문제가 되어”註 021 明洞 입구에 있던 신문화연구소로註 022 옮겨, 역시 역사과학연구소의 간판을 걸고 있다가註 023 新堂洞 李洵馥회원댁으로 옮겼는데 1948년말에 이순복이 병사하면서註 024 연구회도 자연 해산되고 말았다. 그 때까지 연구회 활동에 가담한 이는 위의 인사 외에 李明九·鄭泰玟·李基白·李喜秀·許景日·李瓔馥 등이 있었다.註 025
이 무렵에 학회가 아닌 역사연구기관도 탄생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인 8월 17일에 印貞植이 朝鮮社會科學硏究所를, 8월 20일에는 李相佰이 新文化硏究所를 설립한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한 사설 연구소 외에 申奭鎬는 식민지시기의 조선사편수회 사업을 수습하여 1946년 3월 23일 國史館을 설립하였는데 1948년 남북에서 각각 정부가 수립된 후인 49년 3월에 국사관을 國史編纂委員會로 확대 개편하였다.註 026 그럴 때 북에서는 임시역사편찬위원회(1947, 위원장 이청원)를 계승하여 역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되니(1948, 위원장 백남운) 남북에서 각기의 관학체제가 수립되었다.
이상과 같이 해방 직후에 종합연구학회와 역사연구학회, 그리고 연구소도 탄생하고 있었다. 식민지시기에 진단학회 외에는 한국인의 역사연구 모임이 하나도 없던 것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발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學會誌도 創刊號는 모두 간행하였다. 당시의 출판 사정을 고려해 보면, 또 어떠한 지원도 없던 삭막한 때에 그나마의 업적도 대견스러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한편, 국토분단과 분단정국이 심화되면서 유물론사학자는 47년부터 서서히 북으로 이동하여 북한학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에 올라간 학자들은 『조선력사연구론문집』(1947)에 이어 『력사제문제』(1948)의 필자로 활동하였다.註 027 그리하여 한국사연구가 분단사학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서울에서 탄생한 연구학회가 단명으로 끝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본 역사학회와 경성대학 조선사연구회처럼 젊은 연구자들 가운데는 분단정국에 따른 분열을 거부하고 함께 역사연구의 광장을 이끌어 갔던 이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註) 003
해방 전에 작고한 학자는 朴殷植·申采浩·金敎獻·李相龍·文一平·金在喆 등이 었고, 安廓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다. 고인이 아니라도 權悳奎처럼 병석에 누워 연구가 더 이상 불가능한 이도 있었다.바로가기
註) 004
隱遁했던 학자와 신진연구자의 동향과 논저에 대하여는 앞에 소개한 趙東杰의 1997년의 글, pp.668~669 참조.바로가기
註) 005
조동걸, 「年譜를 통해본 鄭寅普와 白南雲」(『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p.403.바로가기
註) 006
민주주의민족전선, 『解放年報』 朝鮮解放1年史(文友印書館, 1946), p.186.바로가기
註) 007
『韓國現代史 資料叢書』 9(돌베개), p.685.바로가기
註) 008
진단학회, 「震檀學會 50年回顧」 및 「震檀學會 50年日誌」(『震檀學報』 57, 1984), pp.217~251 및 「震檀學報 號數別 總目次」(『震檀學會六十年誌』, 1994, p.281).바로가기
註) 009
震檀學會가 위축되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회장이던 宋錫夏의 병세 악화, 회원간의 좌우 대립(『진단학보』 15, 16, 휘보 참조), 총무간사 趙潤濟가 제기한 친일학자의 제명문제(李崇寧, 「진단학회와 나」, 『진단학보』 57, pp.241~242. 이 때에 李丙燾·申奭鎬·金庠基 등이 별도로 조선사연구회를 결성한 것으로 안다), 그와 같이 기성 한국사학자의 조선사연구회의 결성(1945. 12. 12)과 廉殷鉉· 洪以燮 등의 젊은 역사학자의 역사학회의 결성(1945. 12. 25) 등을 원인으로 진단학회가 쇠퇴하고 있었는데, 회생하는 힘은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1954년부터 『韓國史』 간행을 착수하면서 얻게 되었다(金載元, 「진단학회 50년회고;광복에서 오늘까지」, 『진단학보』 57, p.228).바로가기
註) 010
『韓國現代史 資料叢書』 7, p.62.바로가기
註) 011
『史海』 창간 제1호 후미의 「朝鮮史硏究會 會則」과 「編輯後記」 참조.바로가기
註) 012
『史海』 창간호의 논문 목차는 「創刊辭」(조선사연구회장 李丙燾), 「韓·濊·貊 移動考」(서울대학 교수 金庠基), 「高麗初期의 對契丹 關係」(서울대학 강사 姜大良), 「朝鮮 神話의 科學的 考察(1)」(고려대학 교수 金廷鶴), 「獨島 所屬에 대하여」(국사관장申奭鎬), 「“韓山世稿”의 史的 資料(1)」(문교부 편찬과장 辛東燁), 「新羅文化의 特徵」(서울대학 교수 李丙燾), 「近世朝鮮의 社會階級」(동국대학 교수 金映遂)이다.바로가기
註) 013
歷史學會, 『歷史學硏究』 제1집(正音社, 1949), p.326 「彙報」를 보면, 創立·會則·發表會·幹事·會員에 관한 기사가 있다. 회원은 다음과 같이 대부분 신진학자들이었다.
姜大良 金聖七 金永基 金一出 金元龍 金廷鶴 金俊燮 金在龍 金弘柱 高柄翊
高在國 李能植 李德星 李三實 李想佰 李順基 李如星 李用熙 廉殷鉉 閔泳珪
閔天植 方顯模 柳洪烈 全錫淡 田元培 全海宗 鄭鎭行 趙義卨 曺佐鎬 崔文煥
韓仁錫 韓相鎭 韓㳓劤 洪淳昶 洪以燮(이상 35명, 1948년 5월 현재).바로가기
註) 014
『歷史學硏究』에 실린 논문은 「生活原理로서의 政治思想」(趙義卨), 「李朝後期의 政治支配關係」(高其陽), 「春秋會盟論考」(金一出), 「Chiliasmus(千年天國信仰)와 Magister Thomas' Muenzer」(金在龍), 「이슬람敎徒와 元代社會」(高柄翊), 「天主敎傳播와 李朝封建社會」(韓㳓劤), 「唐代 均田考」(全海宗)이다.바로가기
註) 015
발표회 내용은 제1회:1947년 1월 10일, 「朝鮮工藝史에 관하여」(李如星)·제2회:1947년 2월 2일, 「將來의 東洋史學」(洪淳昶)·제3회:1947년 3월 5일, 「朝鮮 三國時代의 社會構造」(曺佐鎬)·제4회:1947년 4월 10일, 「세계2차대전」(미 제24군단 역사부장 Lane)·제5회:1947년 6월 15일, 「이슬람敎徒와 元代社會」(高柄翊)·「獨逸 農民戰爭」(金在龍)·제6회:1948년 6월 27일, 「原始 朝鮮社會의 硏究」(李德星)이다. 초창기의 열성이 돋보이는 반면, 공백기의 안타까운 기록도 주목된다. 분단정국의 영향인 듯하다.바로가기
註) 016
3차의 간사진은 다음과 같았다. 제1차, 1945년 12월:廉殷鉉·洪以燮·金一出·閔泳珪. 제2차, 1947년2월:李想佰·崔文煥·洪淳昶·廉殷鉉·韓相鎭·金一出. 제3차, 1948년 2월:서양사부, 趙義卨. 조선사부, 金廷鶴. 동양사부, 金一出. 총무부, 高在國. 韓相鎭.
위의 간사 명단을 보면, 제1차 간사는 모두 연희전문학교 출신이라는 점, 김일출은 3차에 걸쳐 맡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거기에서 역사학회의 창립과 운영 성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김일출은 경북 영덕 출신으로 연전을 졸업하고 서울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으며, 명동 입구에 있던 이상백의 신문화연구소의 간사와 역사과학연구소를 맡고 있다가 6·25 때 북으로 올라갔다.바로가기
註) 017
高柄翊의 증언에 의하면, 먼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피란지에서 연구 분위기가 침체한 것을 극복하고, 젊은 사학도의 연구 의욕을 불러 일으켜 결집할 필요가 있었다는 이유와, 젊은이의 연구의욕을 결집하자면 진취적인 성격의 학회가 되어야 한다는 정도의 합의로 발기하고 창립에 임했다고 회고했다. 李基白은 52년의 역사학회가 45년의 역사학회의 계승이나 부활은 아니지만, 45년에 역사학회를 만든 “그러한 사실도 있어서 학회를 만들어 보자는 의욕들이 생겨날 수가 있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좌담;「歷史學會 創立當時를 回顧하며」, 『歷史學報』 75·76합집, p.387). 그러니까 직접 관계는 없지만, 간접으로는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바로가기
註) 018
京城大學朝鮮史硏究會, 『朝鮮史槪說』(弘文書館, 1949). 책의 序頭를 보면 1946년 8월 15일 경성대학 국사연구실에서 孫晋泰가 ‘序’文을 썼고, 책의 後尾에는 역시 1946년 8월 15일에 李仁榮이 “과거 1년을 회고하면서” ‘跋’文을 썼다. 이것을 보면 1946년에 완성하여 필사본 등으로 사용하다가 1949년에 인쇄본으로 출간한 것 같다. 孫晋泰의 서문에 “경성대학내 조선사연구회 회원 제군의 노력으로써 이에 이 조선사개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조선사연구회는 늦어도 1946년 8월 15일 이전에 만들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李基白은 “『조선사개설』의 저술도 그(이순복)가 주장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아는데, 이미 1946년 여름에는 원고가 완성되어 있었다.”라고 회고했다(李基白, 『硏史隨錄』, 일조각, 1994, p.238).바로가기
註) 019
이강수,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대한 좌파정당의 대응』(국민대학교 석사논문, 1994).바로가기
註) 020
國立大學 설치안은 1946년 7월에 미군 군정청이 발표하였다. 여름방학에 들어갈 때였다. 그런데 그에 앞서 5월 18일에는 임시정부 요인(김구·김규식·조소앙·신익희)들이 國民大學 설치안을 발표한 것이 각 신문에 보도된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1946년 9월 1일 國立大學과 國民大學이 동시에 개교하였다. 미군 군정청에서는 國民大學을 인가해 주지 않다가 그해 연말에 인가하였다. 그러니까 國立大學 설치안 즉, 國大案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미군측은 처음에 임시정부측의 작용으로 해석하기도 했다.바로가기
註) 021
좌담;「歷史學會 創立當時를 회고하며」(『歷史學報』 75·76합집), p.388 및 李基白, 『硏史隨錄』(일조각, 1994), p.239.바로가기
註) 022
新文化硏究所는 李相佰 교수가 설립한 연구소로 金一出이 간사로 일했다.바로가기
註) 023
서울대학교 사학과 동문회 李宗馥회장의 증언에 의함. 이종복회장은 從兄 李洵馥의 심부름으로 자주 역사과학연구소에 갔다고 말했다. 이종복회장은 간판의 크기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바로가기
註) 024
李宗馥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李洵馥은 발진티푸스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 원인에 대하여 한강에서 익사한 李德星과 혼동한 기록이 있으므로 사실을 밝혀 둔다(좌담, 「歷史學會의 발자취와 進路」, 『歷史學報』, 134·135합집, p.323).바로가기
註) 025
경성대학 조선사연구회에 관하여 韓㳓劤·孫寶基 교수의 증언도 들었는데, 대체로 비슷한 내용이었으나 역사과학연구소에 대하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李宗馥회장은 명동에 게시되어 있던 간판의 크기까지 짐작할 정도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국사연구실 앞에 게시되었던 것은 李基白교수가 기억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증언이 엇갈리고 있는 것은 역사과학연구소 기간이 짧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高柄翊 교수도 金一出이 역사과학연구소를 했다는 것은 기억한다고 말했다.바로가기
註) 026
『國史編纂委員會史』(국사편찬위원회, 1990), pp.58~60.바로가기
註) 027
북한 사회과학원의 『력사과학』 1955년 6월호, 117~128면에 「해방후 10년간에 발표된 력사론문 및 단행본 목록」이 게재되어 있다. 그것을 보면 월북 학자들이 북한에서 학술활동을 개시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보면 李淸源이 1946년에 『민주조선』 8월 17~24일까지 「력사과학의 현상과 전망」을 4회 연재하여 일찍이 올라간 것을 알 수 있고, 1947년에는 『조선력사연구론문집』 11월 25일 간본에 金洸鎭·金錫亨·朴時亨의 논문이 게재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948년의 『력사제문제』에도 위의 네 사람의 논문이 실렸다. 1949년의 『력사제문제』에는 위의 네 사람 외에 崔益翰·洪起文·李如星·金漢周의 논문이 게재되었고, 『조선어연구』에는 李萬珪, 『물질문화』에는 都宥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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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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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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