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제목(328) [伊藤 조난 사건 조사보고 제2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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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伊藤 조난 사건 조사보고 제2보]
목록
    제1. 흉행의 발단 및 경과
    제2. 흉행 후의 同志의 행동
    제3. 블라디보스토크 및 하얼빈 재류 한국인의 감상 및 러시아 관헌의 의향
    제4. 『大東共報』의 상황
    제5. 安重根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왔을 때 및 斷指한 때와 그 장소
    제6. 安重根과 鄭大鎬
    제7. 흉행의 동지자
    제8. 블라디보스토크 및 하얼빈 재류 한국인 安重根과 李在明의 비교
安重根의 흉행사건 발생 이래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 재류하는 한국인으로 한국 내지로 돌아온 자가 있음을 발견치 못했으므로 거의 조사할 방도가 없습니다. 지금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파견한 밀정이 가져오는 정보 중 가장 신빙해야 할 사실을 아래에 열거하고 아울러 제1·제2의 조사서 중 서로 다른 점을 정정하고자 합니다.
제1. 흉행의 발단 및 경과
1909년 10월 10일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재하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大東共報社 내 사무실에서 社長인 러시아인 미하일로프, 발행인 러시아명 니콜라이 유카이 즉 兪鎭律(조사서 제1에 발행인 니콜라이 유카이를 러시아인으로 했으나 兪鎭律이 러시아로 귀화한 이후의 성명이기 때문에 정정함), 主筆 鄭在寬, 記者 尹煜 즉 尹一炳, 李剛 즉 李政來, 王昌東 즉 鄭順萬 6명이 집무 중 安應七 즉 安重根, 禹德淳, 曺道先 3명이 찾아와 9명이 一團이 되어 잡담 끝에 여느 때와 같이 國事談에서 排日憤慨談으로 변이되었을 때 좌중의 한 사람이 伊藤 公이 하얼빈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다는 것을 알리자, 좌중의 한 사람이 “그는 한국을 집어삼키기를 끝내고 이제 또 하얼빈에 오다니 그렇다면 반드시 예측할 수 없는 간계를 품고 올 것이다.”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떠들어댔습니다. 또 한 사람은 “그를 암살하기에 매우 좋은 기회이다. 불행히도 역부족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고 말하자 (이 두 명의 이름은 분명치 않음) 사장 미하일로프는 그 두 사람의 분개담에 대해 “그 말은 대단히 옳다. 伊藤 公은 우리나라의 藏相(재무장관)과 회담할 필요가 있어 하얼빈으로 오는 것이다. 여러 해 계획한 암살 기회가 바로 지금이니 참으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이다. 猶豫逡巡하다가는 영원히 그 목적을 달하는 날을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속히 실행 임무를 맡을 자는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일이 너무 급해서 금전의 준비가 없음은 물론이고 가장 필요로 하는 흉기가 없다고 하며 스스로 나아가 임무를 맡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미하일로프는 다시 “너희들 동포에게 격문을 돌려 자금을 醵集하고 후일에 반환하도록 하라. 차제에 나는 운동원을 대체하고 또한 총검을 공급할뿐더러 흉행 후의 조처에 관해서는 내가 반드시 책임을 지고 절대로 죽음에 처해지는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安重根이 나서서 그 말에 응해 자신이 실행 임무를 맡고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겠으며 원컨대 흉행 후의 보호에 전력을 다해 줄 것을 바란다고 답하자, 미하일로프는 이를 장하게 여기고 흉행을 수행하면 틀림없이 관헌에게 체포되겠지만 하얼빈은 러시아의 조차지이기 때문에 재판권은 러시아에게 있으니 맹세코 무죄가 되게 하겠다고 확언했다고 합니다. 곁에 있다가 이런 문답을 들은 禹德淳·曺道先도 역시 자진해서 安重根과 공동실행을 신청하자 3명이 서로 맹약하고 大東共報社 사원들을 돌아보고 실행 후 흉행자의 보호에 진력할 것인지 어떤지를 맹세시키고 後顧의 염려가 없다는 것을 타이르자 이에 협의가 한데 모아져 동 15일 사장 미하일로프는 일금 약간(금액은 밝혀지지 않음)과 단총 3정을 安重根에게 건네주어 이틀 내에 동지와 결별하고, 동 18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도중 綏芬河에서 2박하고 同地에서 劉寬五(19세)를 데리고 하얼빈으로 나가 金成白 집에서 2박하였다. 同人의 물음에 대해서는 고향에서 처자가 도착하기 때문에 마중을 위해 왔다고 말하고, 동 23일 劉寬五를 남겨 두고 曺道先·禹德淳과 함께 蔡家溝로 가서 1박하고, 다음 24일 安重根 혼자서 치치하얼이라는 땅으로 가서 劉寬五에게 伊藤 公의 하얼빈 도착시간을 문의해 그 답전을 얻자 禹德淳·曺道先을 남겨두고 같은 날 25일 하얼빈으로 돌아와 그날 밤은 정거장에서 묵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물어물어 찾아온 劉寬五에게 그가 가진 금시계 1개와 금 6圓을 건네주며 伊藤 公에게 흉행을 가하면 이 몸 역시 죽게 될 것임을 알리고 돌아가자, 劉寬五는 그 뜻을 받들고 마차를 타고 일본 里數로 5~6丁인 지점에 이르러 상황을 대기하고 있을 때에 흉행을 수행한 것으로 劉는 이를 알자 달려서 金成白의 집으로 돌아왔으나 거의 실신할 정도로 당황해 겨우 냉수를 얻어 마시고서야 정신을 가라앉혔다고 합니다.
제2. 흉행 후 同志의 행동
실로 安重根 등의 흉행은 담화 도중에 우연히 기도된 것으로 9명은 흉행의 맹약이 성립되자 절대로 남에게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安重根 등의 흉행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가장하고, 그 실행 후 安重根 등은 憂國의 제일공신이기 때문에 그 공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의연금 모집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安重根은 일본 관헌에게 인도되어 旅順에서 재판에 붙여지기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듣자 크게 당황해 어떻게 해서든 사형에 처해지지 않을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大東共報社 社長 러시아인 미하일로프는 上海로 가서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에게 자문했더니 즉시 변호의 쾌락을 얻고, 또 上海에 재류하는 한국인 閔泳喆·閔泳翊·玄尙健 등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재류 자들로부터 금 1만圓을 醵金시켜 미하일로프를 거쳐서 더글러스에게 건네주어 변호의 계약을 맺고 미하일로프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습니다. 더글러스는 영국 제1급 변호사입니다. 변호를 해 줄 것인가를 물었더니 즉시 변호의 노고를 취할 것을 승낙해 함께 旅順으로 가서 재판장을 만나 변호 허가를 받고, 또한 安重根과도 면회하여 사형에 처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慰諭하고 돌아왔습니다. “스티븐스의 암살자는 겨우 7년 징역에 처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安重根도 무거워도 동일한 형기일 것이다. 일본이 어찌 불법한 재판을 행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재판이 불법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열국에 호소해 萬國共同裁判所로 옮기도록 할 것이다.”라고 장담하기 때문에 兪鎭律 등의 동지는 득의양양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비용 조달이 초미의 급무라서 샌프란시스코 및 하와이 재류 한국인에게는 鄭在寬·李剛의 이름으로, 러시아 및 上海 재류의 한국인에게는 鄭順萬·兪鎭律·尹一炳의 이름으로 현재 부지런히 義金이라 일컫고 모집 중이며,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 수도에 머물고 있는 李範晋 및 그의 아들 李瑋鍾에게 러시아 관헌에게 安重根을 일본정부에 인도한 부당성과 장래 보호 교섭 등을 타전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재류 崔鳳俊, 煙秋 노우키에프스크 재류 李範允 및 崔才亨에게는 흉행 실행 후에 통지했는데, 崔才亨은 무뢰하고 불량해서 항상 남의 재물이나 빼앗는 데에만 급급하던 安重根이 이런 壯擧를 이룩했다니 지난날의 협잡배가 이제야 국가 제일 공신이 되었다 칭찬하고 그 서한에 금 400圓을 곁들여서 즉시『大東共報』에 송부해 왔으며, 崔鳳俊은 2,000圓을 보내어 그 흉행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또 安重根의 처자는 重根이 하얼빈으로 데려온 劉寬五의 부친 劉敬集이 綏芬河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동반해 현재 同港의 한국인 부락 開拓里에『大東共報』의 兪鎭律 등이 집 한 채를 차용해 옷과 음식을 공급하며 평온하게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변호비용 모금에 관해서는 咸鏡北道 會寧署長으로부터도 아래의 보고가 있기 때문에 이미 각지에 전파되었음을 알기에 충분합니다.
安應七의 공판은 만국재판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 이의 비용(변호사 의뢰) 모금은 현재 러시아 국적의 한국인들은 安應七을 위해 서로 다투어 응모 중이며, 그리고 모아진 기부금은 모두 大東共報社에 맡겨두었다고 합니다.
제3. 블라디보스토크 및 하얼빈 재류 한국인의 감상 및 러시아 관헌의 의향
재류 한국인은 도처에서 安重根의 흉행을 찬양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安重根은 미하일로프 및 더글러스의 변호에 의해 반드시 무죄가 될 것이며, 일본은 스티븐스 암살사건의 張仁寬 등에 대한 미국의 재판과 다른 야만적인 재판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사형에 처하는 것 같은 일이 있다면 列國은 결코 이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2~3명만 모여도 나라가 바로 망하여 돌아가려 해도 천지가 없으니 창을 갈고 총을 비축해서 자손에게 서로 전해 장차 한 번은 일본과 큰 전쟁을 벌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또 하얼빈에서도 어떻게 安重根을 旅順監獄에서 구원할 것인가를 의논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비분강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의연금 모집 계획은 없으며, 다만 그들은 ‘伊藤 公은 일본 스스로가 죽인 것이다. 처음에 러시아는 관리 외의 사람들 환영을 금지시켰으나 일본 스스로가 요청해 재류 자들을 정거장 구내로 들여보냈기 때문에 安重根은 이런 호기에 편승해 구내로 들어간 것이다. 생각건대 伊藤 公은 우리 조국을 병탄해놓고도 역시 부족하다 싶어 간계를 품고 하얼빈으로 와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安重根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하늘이 義士를 인도해 그 탄환이 至誠을 관철한 것이다. 伊藤 公의 죽음은 근래의 일대쾌거’라고 매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러시아 관헌은 伊藤 公의 조난에 동정하며 하얼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 같이 헌병으로 하여금 安重根 공범자의 정찰에 힘쓰는 모양이지만 그 동지의 한 사람인 尹一炳과 같은 자는 미하일로프의 추천에 의해 러시아헌병대의 일본인에 대한 밀정을 맡아 오히려 헌병대를 이용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도저히 그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움은 물론, 그 동정도 표면에만 그치고 한국인 사이에서는 은근히 安重根을 찬양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얼빈 재류 한국인은 200명 이하로 가장 유력자는 金成白이라고 합니다. 同人은 러시아에 귀화한 자로 현재 한국인 民團長이나 많은 자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남보다 우월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생각건대 하얼빈 재류 한국인이 거의 전부 하층노동자에 속해 이번 흉행사건에 관계된 자는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崔才亨·李相卨·崔鳳俊 등에게 협의하지 않는 것은 安重根은 저명한 무뢰한이기 때문에 종래 다수에게 혐오당하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이를 협의하더라도 믿을만한 상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흉행 실행 후에 통지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李相卨은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을 인솔하려 청국령 綏芬河 북쪽 일본 里數로 약 40리 포미산자라는 땅으로 이주하고자 그 땅을 의논하기 위해 출타, 부재중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李相卨이 재류 한국인을 인솔하고 이주를 하고자 함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 부락 開拓里는 러시아와의 차용 기한이 만료되었으므로 퇴거를 명하고 追願을 불허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주하는 것이며 한국인은 이것 역시 일본이 조국을 병탄한 결과라고 하며 러시아에 대한 악감을 일본으로 돌려서 원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4. 『大東共報』의 상황
블라디보스토크 재류 한국인은 약 4천에 달하는데 서로 모이기만 하면 국권회복을 외치지만 자금이 부족해 설립한 桂東學校도 유지에 매우 곤란함을 느끼며, 또 재류자의 유일한 결사인 一心靑年會는 前 國民團長 金致甫가 회장이 되어 그 동지인 부회장 車錫甫·梁性權·高相俊 3명과 합심해 오로지 권세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內訌이 생겨 작년 9월에 해산했습니다. 또 民團長은 崔鳳俊으로 바뀐 상황이기 때문에『大東共報』도 그 영향을 받아 거의 유지가 곤란해져 머지않아 폐간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大東共報』는 재류자의 유일한 클럽으로 출입자가 많아 서로 모이기만 하면 국권회복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오히려 낙으로 삼는 관점이 있습니다. 생활의 곤란도 신문사의 유지 곤란도, 그 밖의 제반 사항도 불평이 있으면 모두 이는 일본의 소치라고 원망함을 일과로 삼아 흉행을 협의한 10월 10일 安重根·禹德淳·曺道先 등이 찾아왔지만 同人들은 일정한 직업도 없는 무뢰한으로 그날도 불평이나 늘어놓기 위해 왔다가 미하일로프의 종용에 따라 흉행 실행의 임무를 맡은 것이라고 합니다.
제5. 安重根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왔을 때 및 斷指의 때와 그 장소
安重根은 매우 나태한 무뢰한으로 재물을 빼앗아 생활의 밑천으로 삼아 도처의 재류 한국인으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일정한 장소에 체류할 수 없어 각지를 유랑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작년 8월말에 와서 체류하며 李致權 및 高相俊 집에 숙박하고 있다가 하얼빈으로 떠날 때까지 어디에도 여행한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또 斷指는 재작년 봄 煙秋(노우키에프스크)에서 행한 것으로 그 斷指 동맹자는 嚴仁燮·金達鉉·金起龍·李京化·金性權·洪範道·尹致宗 등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피로 깃발을 만들어 大東共報社에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없다고 합니다.
제6. 安重根과 鄭大鎬
鄭大鎬의 주소는 청국 綏芬河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17시간이면 도달하는 러시아·청국 양국의 경계지로서 安重根은 18일 하얼빈으로 향하던 도중 同所에서 2박하고, 또 金成白에게 처자를 마중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는 정보가 있으나, 鄭大鎬는 그 전인 10월 14일경에 한국으로 떠난 자이기 때문에 그간의 소식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제7. 흉행의 동지자
러시아인 미하일로프 및 兪鎭律, 李剛에 대해서는 이미 기재한 바 있습니다. 또『大東共報』의 발행인 니콜라이 유카이는 본래 러시아인이 아니며 兪鎭律이 러시아로 귀화한 후의 이름인 것은 前段에서 정정했습니다. 그 밖의 尹一炳에 대해서는 조사서 제1에서 尹煜은 北靑 사람으로 했으나 同人은 忠淸南道 魯城 출신입니다. 소위 魯城 尹 氏 일족으로 京城으로 나와 관립 러시아학교에 들어간 뒤 러시아 수도로 유학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尹煜으로 變名한 것이라고 합니다. 鄭順萬은 京城 사람으로 南部 尙洞 존스 배하에 속하며 감리교(美以敎) 목사입니다. 일찍이 존재했던 배일단체인 尙洞靑年會의 중심인물이 되어 열심히 배일사상을 고취해 헤이그밀사사건에 관계한 혐의가 있는 자였으나 1907년 사기 취재를 범해 바로 체포되기 직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한 이래 同地에 있는 자입니다. 鄭在寬은 平安南道 平壤 사람으로 安昌浩 등과 함께 미국으로 渡航해서 그 후 安昌浩의 배하에 속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는『共立新報』발행 명의자가 되었으나 同報가 작년 2월『新韓民報』로 개칭할 때 崔正益을 발행인으로 하여 李剛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통일 임무를 맡기 위해 작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大東共報』주필이 되어 매우 民望이 높다고 합니다.
제8. 블라디보스토크 및 하얼빈 재류 한국인 安重根과 李在明의 비교
安重根을 한국의 제1등 공신이라고 찬양했으나 李 總理 조난의 소식이 전해지자 “흉행자는 平安道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平安道 사람은 실로 한국의 柱石이다. 두 사람 중 安重根의 행동 지역은 외국 영토에 속해 왕년에 스티븐스 암살을 무턱대고 따라한 것으로 처음부터 죽음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李在明은 조국의 수도, 더구나 일본인 순사·헌병 등의 배치 속에서 이런 壯擧를 이룩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생환을 기약하지 않은 결사의 행동으로 그 용맹이 훨씬 더 위에 있으며, 또 安重根을 뛰어 넘은 제1등 공신이 나왔다.”고 칭찬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