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正始(240~248)中, 幽州刺史校勘 020020 「汲古閣本」에는 ‘母’로 되어 있고, 「殿本」에는 ‘毋’로 되어 있는데, 『晋書音義』에서는 ‘毋, 音無’라 하였다.닫기丘儉討句麗, 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051051 玄菟太守王頎詣夫餘 이는 魏가 公孫氏를 멸망시킨 다음 幽州刺史 毌丘儉을 보내어 고구려를 칠 때(244~245) 그 예하의 玄菟太守 王頎가 夫餘에 온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王頎가 夫餘에 들른 것은 高句麗 원정의 길에 올랐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완료된 후 回軍할 때의 일로 보는 설도 있다. 즉, 高句麗의 東川王을 北沃沮에까지 추격한 王頎는 間島 지방에서 瑚爾喀河(牧丹江) 유역으로 진군하여, 그 서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小白山系의 산맥을 넘어 夫餘가 자리잡고 있는 阿勒楚喀 평야를 거쳐 오늘날 撫順市가 있는 玄菟郡治로 개선, 歸陣하였다는 것이다.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
그러나 王頎가 동북 滿洲의 密林 지대를 크게 迂廻, 夫餘를 거쳐 歸陣하였다는 데는 反論도 있어(和田淸,「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參考文獻≫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和田淸,「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닫기
位居遣校勘 021021 「汲古閣本」·「殿本」에는 ‘犬’으로 되어 있다.닫기加郊迎, 供軍糧. 季父牛加有二心, 位居殺季父父子, 籍沒財物, 遣使簿校勘 022022 「南本」·「殿本」에는 ‘薄’으로 되어 있으며, 「宋本」도 ‘薄’으로 되어 있다.닫기斂送官. 馮本·官本, 簿, 作薄. 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052052 舊夫餘俗 …… 或言當殺 옛 夫餘의 風俗에 水旱이 계속되어 5穀이 제대로 여물지 않을 때에 그 허물을 王에게 돌려 혹은 갈자느니 혹은 죽이자느니 했다는 기사는 초기 농경사회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J.G. Frazer가『黃金의 가지』에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다.
麻余가 이러한 옛 夫餘의 風俗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당시 夫餘의 政治體制가 夫子相續에 의한 王位世襲制가 이루어질 정도로 王權이 신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절대적 王權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李丙燾,「夫餘考」p.216)
이와 관련하여 그 당시 夫餘王은 公孫度가 夫餘王에게 一族의 딸을 시집보내고 있음에서 夫餘國 支配의 實權을 쥐고 있는 權力的인 王으로서의 일면과, 麻余가 옛 遺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데에서 原始的인 王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세기의 夫餘王은 權力的이면서도 原初的이라는 상반된 양면성을 가지면서 貴族聯合制에 의해 共立되는 성격이 최고로 강하였다.(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pp.78~79)
≪參考文獻≫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第 12集.
닫기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

校勘 020
「汲古閣本」에는 ‘母’로 되어 있고, 「殿本」에는 ‘毋’로 되어 있는데, 『晋書音義』에서는 ‘毋, 音無’라 하였다.
校勘 021
「汲古閣本」·「殿本」에는 ‘犬’으로 되어 있다.
校勘 022
「南本」·「殿本」에는 ‘薄’으로 되어 있으며, 「宋本」도 ‘薄’으로 되어 있다.
註 051
玄菟太守王頎詣夫餘 : 이는 魏가 公孫氏를 멸망시킨 다음 幽州刺史 毌丘儉을 보내어 고구려를 칠 때(244~245) 그 예하의 玄菟太守 王頎가 夫餘에 온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王頎가 夫餘에 들른 것은 高句麗 원정의 길에 올랐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완료된 후 回軍할 때의 일로 보는 설도 있다. 즉, 高句麗의 東川王을 北沃沮에까지 추격한 王頎는 間島 지방에서 瑚爾喀河(牧丹江) 유역으로 진군하여, 그 서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小白山系의 산맥을 넘어 夫餘가 자리잡고 있는 阿勒楚喀 평야를 거쳐 오늘날 撫順市가 있는 玄菟郡治로 개선, 歸陣하였다는 것이다.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
그러나 王頎가 동북 滿洲의 密林 지대를 크게 迂廻, 夫餘를 거쳐 歸陣하였다는 데는 反論도 있어(和田淸,「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參考文獻≫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和田淸,「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註 052
舊夫餘俗 …… 或言當殺 : 옛 夫餘의 風俗에 水旱이 계속되어 5穀이 제대로 여물지 않을 때에 그 허물을 王에게 돌려 혹은 갈자느니 혹은 죽이자느니 했다는 기사는 초기 농경사회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J.G. Frazer가『黃金의 가지』에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다.
麻余가 이러한 옛 夫餘의 風俗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당시 夫餘의 政治體制가 夫子相續에 의한 王位世襲制가 이루어질 정도로 王權이 신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절대적 王權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李丙燾,「夫餘考」p.216)
이와 관련하여 그 당시 夫餘王은 公孫度가 夫餘王에게 一族의 딸을 시집보내고 있음에서 夫餘國 支配의 實權을 쥐고 있는 權力的인 王으로서의 일면과, 麻余가 옛 遺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데에서 原始的인 王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세기의 夫餘王은 權力的이면서도 原初的이라는 상반된 양면성을 가지면서 貴族聯合制에 의해 共立되는 성격이 최고로 강하였다.(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pp.78~79)
≪參考文獻≫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第 12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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