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侯校勘 120120 「汲古閣本」·「藝文本」에는 ‘淮’로 되어 있다.닫기旣僭號稱王, 淮, 當作準, 見前濊國傳注. 爲燕亡人衛滿所攻奪, 丁謙曰, 箕淮之王馬韓也. 據朝鮮史言, 避衛滿之逼, 率衆奪金馬郡居之, 自稱武康王. 金馬, 卽本傳, 王所治月支國, 今爲全羅道益山郡.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校勘 121121 「汲古閣本」에는 ‘以止之’로 되어 있다.닫기, 毛本, 下燕字, 作以.不攻. 攻, 疑作改.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160160 秦開 秦開는 燕의 昭王(B.C.311~B.C.279) 때 賢將으로 東胡에 人質로 가서 있다가 돌아와 東胡를 征伐하여 千餘里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史記』「匈奴傳」에는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거의 같은 內容을 傳하면서 『三國志』「東夷傳」韓條에 引用된 『魏略』에서는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라고 攻取한 領域에 대해서 千餘里나 차이가 나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것은 秦開가 정복한 東胡와 朝鮮의 位置를 비정하는데 문제점이 된다.
≪參考文獻≫
『史記』卷110「匈奴列傳」
李丙燾, 「玄菟郡及臨屯郡考」『史學雜誌』41編 4·5號, 1930(『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松井 等, 「秦長城東部の位置」『歷史地理』13卷 3號, 1909.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史學雜誌』22編 12號·23編 2~5號, 1911~12.
今西龍, 「箕子朝鮮傳說考」『支那學』2卷 10·11號, 1922(『朝鮮古史の硏究』1970)
淺見倫太郞, 「漢代樂浪郡治」『法律學硏究』1931.
池內宏, 「樂浪郡考 : 附 遼東の玄菟郡とその屬縣」『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 1941.
닫기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161161 滿番汗 『漢書』「地理志」遼東郡 屬縣條에는 文縣과 番汗縣의 두 縣名이 보인다. 따라서 『魏略』의 滿番汗이 文縣과 番汗縣의 合稱임은 틀림없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二縣이 燕代에까지도 二縣이었는지 또는 一縣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漢書』「地理志」番汗縣條에는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應劭曰 汗水出塞外 西南入海’라는 註記가 있으며, 許愼의 『說文』에도 ‘沛水出遼東番汗塞外 西南入海’라는 비슷한 內容이 있다.
종래부터 滿番汗의 位置는 古朝鮮의 位置를 設定하는 데 중요 자료가 되어 왔고, 또한 논쟁이 계속된 史料였다. 이 滿番汗을 韓半島內에서 구하는 說이 있고, 韓半島밖에서 구하는 견해가 있어, 의견의 一致를 보지 못하고 있다. 例컨대 李丙燾는 沛水를 博川江에 비정하고 浿水를 淸川江으로 보아 番汗縣을 博川郡 일대로 본 바 있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地理志」8下 遼東郡 番汗縣條.
許愼, 『說文』
申采浩, 「平壤浿水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 1947.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眞番郡の位置」『歷史地理』24卷 6號, 1914.
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史學雜誌』22編 12號·23編 2~5號, 1911~12.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닫기
爲界, 趙一淸曰, 潘韓譌. 兩漢志, 俱作番汗.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校勘 122122 諸本에는 ‘溴’로 되어 있다.닫기水.162162 浿水 『史記』「朝鮮列傳」에는 衛滿의 建國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浿水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그 前에 浿水를 경계로 삼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浿水의 位置比定 問題는 近代 韓國史에서 가장 많은 논의 가운데 하나이다. 浿水의 位置를 그와 같이 중시한 것은 소위 古朝鮮의 位置를 어디에 잡느냐 하는 問題와 領域의 設定 작업이 浿水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三國史記』「地理志」에서는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라 하여 浿水가 大同江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그 뒤 『高麗史』에 그대로 답습되었고 朝鮮初에는 그러한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東國史略』에서도 浿水를 大同江으로 보는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東史綱目』에서는 浿水를 鴨綠江으로 보는 說을 취하고 있다. 이후 日本人들도 浿水를 鴨綠江·大同江·淸川江 등으로 보는 여러 의견을 제시하였다. 李丙燾는 浿水=淸川江說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中國側의 地理書에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어 더욱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漢의 桑欽의 『水經』「浿水」에는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於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보면 浿水는 東으로 흐르는 江이다. 이러한 方向의 江은 韓半島의 西海岸 一帶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茶山도 句讀點을 달리 찍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 바 있으나 특별한 案을 내놓지 못하였다. 『水經』의 浿水는 뒤에 民族主義 史家들이 遼東說 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山海經』의 기사와 함께 논의의 와중에 있다.
『水經』의 기사는 酈道元의 『水經注』에서 잘못이라는 反論이 나와 浿水가 西쪽으로 흐른다고 말하면서 浿水의 大同江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鄭寅普는 浿水=大同江說을 부인하고 奉天 海城縣 西南에 있는 淤泥阿가 이에 해당한다는 遼東說을 제창하고 있다. 또 一部에서는 大陵河·灤河·遼河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12)
浿水
浿水는 漢과 朝鮮의 國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衛滿의 亡命과 漢 武帝의 朝鮮침공 및 漢四郡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古朝鮮의 位置와 領域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浿水의 位置에 관해서는 종래 大同江說, 淸川江說, 鴨綠江說, 遼東方面說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 大同江說은 酈道元의『水經注』이래『隋書』·『新唐書』·『通典』 등 中國史書에 유지되어 浿水를 大同江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丁若鏞은 浿水에 관한 說이 鴨綠江說, 大同江說, 遼東泥河說, 猪灘水說 등으로 나뉘어져 韓國傳統史學者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鴨綠江說을 견지하여 浿水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與猶堂全書』「疆域考」 浿水辯)
淸川江說은 李丙燾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列水를 大同江으로 확정하고 平壤 지역을 古朝鮮의 中心地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였다. (「浿水考」) 한편 申采浩는 蓒芉濼說을, (『朝鮮史硏究草』pp.45∼65) 鄭寅普는 淤泥河(大凌河)說을(『朝鮮史硏究』) 제기하여 浿水의 遼東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遼東방면설은 李趾麟 등에 의해 大凌河說로 연결된다. 즉, 浿水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水經』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遼東, 遼西지역에서 東南으로 흐르다가 河流에 가서 다시 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江은 大凌河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古名이 白狼水(『熱河志』大凌河)였음을 밝혀 그 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漢代 鏤方縣이 大凌河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古朝鮮硏究』pp.72∼83)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 番汗縣條의 註내용을 인용하여 浿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浿水를 灤河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尹乃鉉,「古朝鮮의 位置와 疆域」 pp.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浿水와 고조선의 중심인 列水가 모두 灤河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浿水의 위치는 遼東故塞의 位置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列水의 位置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遼東故塞를 秦長城의 東端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列水를 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浿水는 大凌河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古朝鮮의 中心이 이동함에 따라 列水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列水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浿水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淸川江(이병도)·압록강(정약용·천관우) 등이다.
그러나『史記』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浿水는 遼東故塞(燕의 鄣塞)와 秦故空地사이의 江이다. 燕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浿水는 이와 병행하는 江이 된다. 滿番汗이 千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浿水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漢書』「地理志」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浿水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大同江으로『史記』의 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水經』卷上「浿水」
『水經註』卷14「浿水」
『漢書』卷28下「地理志」 下 遼東郡 番汗縣條 班固의 註.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浿水考.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三 浿水辯;「大東水經」 其三 浿水.
李丙燾,「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
申采浩,『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集』下卷, 1972)
尹乃鉉,「古朝鮮의 위치와 疆域」『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1988.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津田左右吉,「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유. 엠. 부찐,『古朝鮮』1986.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7「地理志」4 高句麗條.
『史記』卷115「朝鮮列傳」
『水經』「浿水」.
『水經注』卷14 浿水條.
申景濬, 『疆界志』
韓百謙, 『東國地理志』
韓鎭書, 『海東繹史』
安鼎福, 『東史綱目』
丁若鏞, 『我邦疆域考』
申采浩, 「平壤浿水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今西龍, 「眞番郡考」『朝鮮古史の硏究』1970.
닫기
趙一淸曰, 漢書地理志, 樂浪郡浿水縣, 水西至增地入海, 今大同江也. 溴字誤. 下同. 弼按漢書朝鮮傳云, 至浿水爲界. 浿水解見前高句麗傳.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校勘 123123 諸本에는 ‘故’로 되어 있으나 何焯의 주장에 의거하여 ‘收’로 고쳐 잡는다.닫기中國亡命 何焯曰, 故字當作收.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校勘 124124 「殿本」에는 ‘以’로 되어 있다.닫기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 亡字下, 似少一字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弼按, 魏略所云, 與史記漢書朝鮮傳, 略同而較詳, 可補史漢朝鮮傳之缺. 丁謙曰, 朝鮮史相傳, 其國, 肇自檀君傳, 一千四十八年, 至周初, 箕子代興, 傳四十世, 爲燕人衛滿襲據其地. 班書, 記漢事, 故託始於滿. 眞番, 本朝鮮附屬番部, 七國時爲燕所略. 武帝, 破朝鮮, 改爲郡. 治霅縣, 在今奉天興廳邊外, 東南至鴨緣江地. 浿水有二, 唐書高麗傳, 南涯浿水, 指大同江, 而此傳浿水, 均指鴨綠江. 今攷據家, 但知大同江爲浿水, 不知鴨綠江亦有浿水之名. 蓋大同江, 在平壤南, 衛滿所都王險城, 卽平壤. 滿渡浿水, 而後居此, 則水在平壤之北可知, 證一. 涉何, 諭右渠還朝, 必經浿水, 證二. 左將軍, 擊破浿水西軍, 方得至王險, 證三. 右渠太子, 入謝天子, 至浿水引歸, 證四. 觀此, 傳中浿水, 皆指鴨綠江, 明矣. 臨屯亦番部. 後爲郡, 治東暆, 今爲朝鮮道江原道江陵府城.

校勘 120
「汲古閣本」·「藝文本」에는 ‘淮’로 되어 있다.
校勘 121
「汲古閣本」에는 ‘以止之’로 되어 있다.
校勘 122
諸本에는 ‘溴’로 되어 있다.
校勘 123
諸本에는 ‘故’로 되어 있으나 何焯의 주장에 의거하여 ‘收’로 고쳐 잡는다.
校勘 124
「殿本」에는 ‘以’로 되어 있다.
註 160
秦開 : 秦開는 燕의 昭王(B.C.311~B.C.279) 때 賢將으로 東胡에 人質로 가서 있다가 돌아와 東胡를 征伐하여 千餘里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史記』「匈奴傳」에는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거의 같은 內容을 傳하면서 『三國志』「東夷傳」韓條에 引用된 『魏略』에서는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라고 攻取한 領域에 대해서 千餘里나 차이가 나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것은 秦開가 정복한 東胡와 朝鮮의 位置를 비정하는데 문제점이 된다.
≪參考文獻≫
『史記』卷110「匈奴列傳」
李丙燾, 「玄菟郡及臨屯郡考」『史學雜誌』41編 4·5號, 1930(『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松井 等, 「秦長城東部の位置」『歷史地理』13卷 3號, 1909.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史學雜誌』22編 12號·23編 2~5號, 1911~12.
今西龍, 「箕子朝鮮傳說考」『支那學』2卷 10·11號, 1922(『朝鮮古史の硏究』1970)
淺見倫太郞, 「漢代樂浪郡治」『法律學硏究』1931.
池內宏, 「樂浪郡考 : 附 遼東の玄菟郡とその屬縣」『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 1941.
註 161
滿番汗 : 『漢書』「地理志」遼東郡 屬縣條에는 文縣과 番汗縣의 두 縣名이 보인다. 따라서 『魏略』의 滿番汗이 文縣과 番汗縣의 合稱임은 틀림없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二縣이 燕代에까지도 二縣이었는지 또는 一縣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漢書』「地理志」番汗縣條에는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應劭曰 汗水出塞外 西南入海’라는 註記가 있으며, 許愼의 『說文』에도 ‘沛水出遼東番汗塞外 西南入海’라는 비슷한 內容이 있다.
종래부터 滿番汗의 位置는 古朝鮮의 位置를 設定하는 데 중요 자료가 되어 왔고, 또한 논쟁이 계속된 史料였다. 이 滿番汗을 韓半島內에서 구하는 說이 있고, 韓半島밖에서 구하는 견해가 있어, 의견의 一致를 보지 못하고 있다. 例컨대 李丙燾는 沛水를 博川江에 비정하고 浿水를 淸川江으로 보아 番汗縣을 博川郡 일대로 본 바 있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地理志」8下 遼東郡 番汗縣條.
許愼, 『說文』
申采浩, 「平壤浿水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 1947.
那珂通世, 「朝鮮樂浪玄菟帶方考」『史學雜誌』5編 4號, 1894.
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眞番郡の位置」『歷史地理』24卷 6號, 1914.
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史學雜誌』22編 12號·23編 2~5號, 1911~12.
津田左右吉, 「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註 162
浿水 : 『史記』「朝鮮列傳」에는 衛滿의 建國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浿水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그 前에 浿水를 경계로 삼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浿水의 位置比定 問題는 近代 韓國史에서 가장 많은 논의 가운데 하나이다. 浿水의 位置를 그와 같이 중시한 것은 소위 古朝鮮의 位置를 어디에 잡느냐 하는 問題와 領域의 設定 작업이 浿水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三國史記』「地理志」에서는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라 하여 浿水가 大同江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그 뒤 『高麗史』에 그대로 답습되었고 朝鮮初에는 그러한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東國史略』에서도 浿水를 大同江으로 보는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東史綱目』에서는 浿水를 鴨綠江으로 보는 說을 취하고 있다. 이후 日本人들도 浿水를 鴨綠江·大同江·淸川江 등으로 보는 여러 의견을 제시하였다. 李丙燾는 浿水=淸川江說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中國側의 地理書에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어 더욱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漢의 桑欽의 『水經』「浿水」에는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於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보면 浿水는 東으로 흐르는 江이다. 이러한 方向의 江은 韓半島의 西海岸 一帶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茶山도 句讀點을 달리 찍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 바 있으나 특별한 案을 내놓지 못하였다. 『水經』의 浿水는 뒤에 民族主義 史家들이 遼東說 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山海經』의 기사와 함께 논의의 와중에 있다.
『水經』의 기사는 酈道元의 『水經注』에서 잘못이라는 反論이 나와 浿水가 西쪽으로 흐른다고 말하면서 浿水의 大同江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鄭寅普는 浿水=大同江說을 부인하고 奉天 海城縣 西南에 있는 淤泥阿가 이에 해당한다는 遼東說을 제창하고 있다. 또 一部에서는 大陵河·灤河·遼河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12)
浿水
浿水는 漢과 朝鮮의 國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衛滿의 亡命과 漢 武帝의 朝鮮침공 및 漢四郡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古朝鮮의 位置와 領域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浿水의 位置에 관해서는 종래 大同江說, 淸川江說, 鴨綠江說, 遼東方面說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 大同江說은 酈道元의『水經注』이래『隋書』·『新唐書』·『通典』 등 中國史書에 유지되어 浿水를 大同江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丁若鏞은 浿水에 관한 說이 鴨綠江說, 大同江說, 遼東泥河說, 猪灘水說 등으로 나뉘어져 韓國傳統史學者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鴨綠江說을 견지하여 浿水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與猶堂全書』「疆域考」 浿水辯)
淸川江說은 李丙燾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列水를 大同江으로 확정하고 平壤 지역을 古朝鮮의 中心地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였다. (「浿水考」) 한편 申采浩는 蓒芉濼說을, (『朝鮮史硏究草』pp.45∼65) 鄭寅普는 淤泥河(大凌河)說을(『朝鮮史硏究』) 제기하여 浿水의 遼東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遼東방면설은 李趾麟 등에 의해 大凌河說로 연결된다. 즉, 浿水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水經』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遼東, 遼西지역에서 東南으로 흐르다가 河流에 가서 다시 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江은 大凌河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古名이 白狼水(『熱河志』大凌河)였음을 밝혀 그 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漢代 鏤方縣이 大凌河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古朝鮮硏究』pp.72∼83)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 番汗縣條의 註내용을 인용하여 浿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浿水를 灤河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尹乃鉉,「古朝鮮의 位置와 疆域」 pp.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浿水와 고조선의 중심인 列水가 모두 灤河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浿水의 위치는 遼東故塞의 位置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列水의 位置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遼東故塞를 秦長城의 東端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列水를 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浿水는 大凌河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古朝鮮의 中心이 이동함에 따라 列水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列水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浿水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淸川江(이병도)·압록강(정약용·천관우) 등이다.
그러나『史記』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浿水는 遼東故塞(燕의 鄣塞)와 秦故空地사이의 江이다. 燕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浿水는 이와 병행하는 江이 된다. 滿番汗이 千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浿水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漢書』「地理志」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浿水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大同江으로『史記』의 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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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經註』卷14「浿水」
『漢書』卷28下「地理志」 下 遼東郡 番汗縣條 班固의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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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115「朝鮮列傳」
『水經』「浿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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