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羅165165 新羅傳 『隋書』新羅傳은 卷81의「東夷列傳」에 高句麗·百濟 및 靺鞨傳과 함께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新羅國의 出自를 毋丘儉의 침입 때 피난해 간 高句麗人들이 세웠다고 본 기록과 隋 開皇 14年(594, 眞平王 16年)의 新羅王에 대한 册封記事·官名·甲兵·風俗·衣服·物産 등에 대한 記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隋와 新羅와의 交涉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隋書』新羅傳의 태반이 新羅의 狀態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梁書』新羅傳 이후 新羅에 대해서 두 번째로 立傳하고 있어 新羅史硏究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參考文獻≫
高柄翊,「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申瀅植,『新羅史』1985,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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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國, 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魏將校勘 071071 「汲古閣本」에는 ‘母’로 되어 있다.닫기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校勘 072072 『北史』「新羅傳」에는 ‘留’앞에 ‘有’字가 있다.닫기者遂爲新羅焉.166166 魏將毋丘儉討高麗 …… 留者遂爲新羅焉 新羅의 出自를『梁書』·『南史』·『北史』등이 古之亡人避秦役의 후예로 본 것과는 달리『隋書』·『通典』·『文獻通考』등에서는 新羅를 毋丘儉 侵略 때에 沃沮로 피난했던 자들이 남아서 세웠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新羅의 기원에 있어서 북방 특히 高句麗와의 연계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新羅의 成長過程에 있어서 東海岸으로의 문화유입과 문물교류상을 짐작케하는 바로써『三國史記』南解次次雄 16년의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북방의 영향이 컸다고는 하지만, 新羅와 高句麗의 사회적 차이를 고려할 때 高句麗 遺民이 곧 新羅의 조상이었다고 할 수 없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新羅는 任免記事가 제일 많고, 高句麗는 巡幸記事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양사회의 차이를 알 수 있다(申瀅植,『三國史記 硏究』p.154;『韓國古代史의 新硏究』p.70).
<참조>
『梁書』新羅傳 註 3)
其先本辰韓種也
新羅의 起源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방향으로 기술되어 있다. 첫째는『三國志』「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이를 계승한『梁書』·『南史』·『北史』그리고『翰苑』의 기록이며, 둘째는『隋書』에서 毋丘儉의 侵入 때 沃沮로 피난했던 高句麗의 殘留民이라고 한 說로,『通典』·『文獻通考』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셋째는 新羅를 弁韓의 후신으로 간주하는『新·舊唐書』·『册府元龜』등의 기록으로서 전자의 두 계통과는 다른 자료에 의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新羅는 중국 秦의 流亡人과 연결된 辰韓의 후예라는 것, 高句麗系 殘民이라는 것, 그리고 弁韓의 후예라는 것 등으로 그 出自가 복잡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秦役을 피해서 韓半島로 유입된 古之亡人은 곧 넓은 의미의 衛氏朝鮮系 遺民이라고 할 수 있다.(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p.200; 丁仲煥,「新羅村落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p.427) 무엇보다도 한반도 京畿·忠淸·全羅道 一帶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의가 鐵器를 伴出하지 않는 靑銅器가 중심이 된 반면에 慶尙道 一帶의 유물은 북방계의 영향과 鐵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양지방의 차이를 볼 수가 있다.(李賢惠, 앞의 책, pp.18~20)
따라서 辰韓은 馬韓의 附庸勢力이 아니었다. 더구나 建國神話의 경우에도 高句麗와 百濟는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반면, 新羅는 그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는 예가 많다.(趙芝薰,『韓國文化史序說』pp.60~61) 무엇보다도 濟·羅의 王을 비교할 때, 高句麗와 百濟의 王은 주로 善射者나 强勇者임에 반해, 新羅王은 德望·智慧者임을 강조하고 있어 兩國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pp.86~91) 이러한 사실은 春秋戰國時代 이래 중국 流亡人의 南下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秦人의 韓半島 南下는 아니었다. 동시에 辰韓을 秦韓과 결부시킨 것은 中國人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는 북방 유민이 南下하는 과정에서 馬韓의 동쪽을 지나왔을 것임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馬韓의 附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크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丁仲煥,「新羅村落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歷史學報』17·18合輯, 1962.
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1984, 一潮閣.
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新羅本紀」1 南解次次雄 16年條.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下「東夷列傳」新羅條.
『北史』卷94「列傳」新羅條.
『通典』卷185「邊防」1 新羅條.
『文獻通考』
申瀅植『三國史記 硏究』1981, 一潮閣;『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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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 其王本百濟人,167167 其王本百濟人 百濟人이 신라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도 高句麗殘民이 新羅人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과 비슷한 양태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은 같은 계통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高句麗와 百濟의 王의 특징은 剛勇과 善射를 내세우고 있는 다음의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有膽力 善騎射(『三國史記』「高句麗本紀」平原王 元年條)
天資剛勇 善騎射(『三國史記』「百濟本紀」契王 元年條)
위의 두 기록에서 보듯이 濟·麗의 왕은 예외없이 志氣豪邁하고 百發百中(善射)의 기예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신라의 왕은 德과 智를 내세운 ‘性寬仁明敏(『三國史記』善德女王 元年條)’의 예를 보게 된다.
이는 백제와 신라가 각기 문화적 전통이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pp.90~91).
≪參考文獻≫
『三國史記』卷5「新羅本紀」5 善德女王 元年條; 卷19「高句麗本紀」7 平原王 元年條; 卷24「百濟本紀」2 契王 元年條.
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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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校勘 071
「汲古閣本」에는 ‘母’로 되어 있다.
校勘 072
『北史』「新羅傳」에는 ‘留’앞에 ‘有’字가 있다.
註 165
新羅傳 : 『隋書』新羅傳은 卷81의「東夷列傳」에 高句麗·百濟 및 靺鞨傳과 함께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新羅國의 出自를 毋丘儉의 침입 때 피난해 간 高句麗人들이 세웠다고 본 기록과 隋 開皇 14年(594, 眞平王 16年)의 新羅王에 대한 册封記事·官名·甲兵·風俗·衣服·物産 등에 대한 記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隋와 新羅와의 交涉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隋書』新羅傳의 태반이 新羅의 狀態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梁書』新羅傳 이후 新羅에 대해서 두 번째로 立傳하고 있어 新羅史硏究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參考文獻≫
高柄翊,「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申瀅植,『新羅史』1985,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註 166
魏將毋丘儉討高麗 …… 留者遂爲新羅焉 : 新羅의 出自를『梁書』·『南史』·『北史』등이 古之亡人避秦役의 후예로 본 것과는 달리『隋書』·『通典』·『文獻通考』등에서는 新羅를 毋丘儉 侵略 때에 沃沮로 피난했던 자들이 남아서 세웠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新羅의 기원에 있어서 북방 특히 高句麗와의 연계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新羅의 成長過程에 있어서 東海岸으로의 문화유입과 문물교류상을 짐작케하는 바로써『三國史記』南解次次雄 16년의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북방의 영향이 컸다고는 하지만, 新羅와 高句麗의 사회적 차이를 고려할 때 高句麗 遺民이 곧 新羅의 조상이었다고 할 수 없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新羅는 任免記事가 제일 많고, 高句麗는 巡幸記事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양사회의 차이를 알 수 있다(申瀅植,『三國史記 硏究』p.154;『韓國古代史의 新硏究』p.70).
<참조>
『梁書』新羅傳 註 3)
其先本辰韓種也
新羅의 起源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방향으로 기술되어 있다. 첫째는『三國志』「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이를 계승한『梁書』·『南史』·『北史』그리고『翰苑』의 기록이며, 둘째는『隋書』에서 毋丘儉의 侵入 때 沃沮로 피난했던 高句麗의 殘留民이라고 한 說로,『通典』·『文獻通考』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셋째는 新羅를 弁韓의 후신으로 간주하는『新·舊唐書』·『册府元龜』등의 기록으로서 전자의 두 계통과는 다른 자료에 의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新羅는 중국 秦의 流亡人과 연결된 辰韓의 후예라는 것, 高句麗系 殘民이라는 것, 그리고 弁韓의 후예라는 것 등으로 그 出自가 복잡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秦役을 피해서 韓半島로 유입된 古之亡人은 곧 넓은 의미의 衛氏朝鮮系 遺民이라고 할 수 있다.(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p.200; 丁仲煥,「新羅村落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p.427) 무엇보다도 한반도 京畿·忠淸·全羅道 一帶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의가 鐵器를 伴出하지 않는 靑銅器가 중심이 된 반면에 慶尙道 一帶의 유물은 북방계의 영향과 鐵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양지방의 차이를 볼 수가 있다.(李賢惠, 앞의 책, pp.18~20)
따라서 辰韓은 馬韓의 附庸勢力이 아니었다. 더구나 建國神話의 경우에도 高句麗와 百濟는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반면, 新羅는 그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는 예가 많다.(趙芝薰,『韓國文化史序說』pp.60~61) 무엇보다도 濟·羅의 王을 비교할 때, 高句麗와 百濟의 王은 주로 善射者나 强勇者임에 반해, 新羅王은 德望·智慧者임을 강조하고 있어 兩國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pp.86~91) 이러한 사실은 春秋戰國時代 이래 중국 流亡人의 南下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秦人의 韓半島 南下는 아니었다. 동시에 辰韓을 秦韓과 결부시킨 것은 中國人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는 북방 유민이 南下하는 과정에서 馬韓의 동쪽을 지나왔을 것임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馬韓의 附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크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韓條.
丁仲煥,「新羅村落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歷史學報』17·18合輯, 1962.
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1984, 一潮閣.
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新羅本紀」1 南解次次雄 16年條.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下「東夷列傳」新羅條.
『北史』卷94「列傳」新羅條.
『通典』卷185「邊防」1 新羅條.
『文獻通考』
申瀅植『三國史記 硏究』1981, 一潮閣;『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註 167
其王本百濟人 : 百濟人이 신라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도 高句麗殘民이 新羅人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과 비슷한 양태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은 같은 계통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高句麗와 百濟의 王의 특징은 剛勇과 善射를 내세우고 있는 다음의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有膽力 善騎射(『三國史記』「高句麗本紀」平原王 元年條)
天資剛勇 善騎射(『三國史記』「百濟本紀」契王 元年條)
위의 두 기록에서 보듯이 濟·麗의 왕은 예외없이 志氣豪邁하고 百發百中(善射)의 기예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신라의 왕은 德과 智를 내세운 ‘性寬仁明敏(『三國史記』善德女王 元年條)’의 예를 보게 된다.
이는 백제와 신라가 각기 문화적 전통이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pp.90~91).
≪參考文獻≫
『三國史記』卷5「新羅本紀」5 善德女王 元年條; 卷19「高句麗本紀」7 平原王 元年條; 卷24「百濟本紀」2 契王 元年條.
申瀅植,「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地位」『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정치>왕실>국왕>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