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일곱 성을 함락시키다 ( 649년 08월(음) )

〔3년(649)〕 가을 8월에 백제의 장군001001 백제의 장군: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9년(649) 8월조에는 ‘좌장(左將)’으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金庾信) 중(中)조에는 ‘좌평(佐平)’으로 기록되었다.닫기 은상(殷相)002002 은상(殷相): 백제의 장군이다. 진덕왕 3년(649) 8월 좌장(左將)으로서 정병 7,000명을 이끌고 신라의 석토(石吐)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고, 도살성(道薩城)에서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패배하였다. 다른 기록에 더 이상 보이지 않아 더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닫기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성(石吐城)003003 석토성(石吐城) :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신라의 지명으로 전한다.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의 문안산성(文案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閔德植, 1983,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닫기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대장군(大將軍) 유신(庾信)과 장군(將軍) 진춘(陳春)004004 진춘(陳春):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조에 전하는 진순(眞純)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진순(陳純)이라고도 하였다.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전하였고, 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하서주 총관(河西州 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으며,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는 경정 총관(京停 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6년(676) 11월에 재상(宰相)으로 있을 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문무왕이 허락하지 않고 연로한 신하를 우대하는 의미로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닫기·죽지(竹旨)005005 죽지(竹旨): 진골 출신 중신(衆臣)인 술종공(述宗公)의 아들로서『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제2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 竹旨郞)조에는 죽만(竹曼)·지관(智官)·죽지랑(竹旨郞)으로 기록되었다. 진평왕대에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며(金哲埈, 1975, 「新羅 貴族勢力의 基盤」,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다. 진덕왕 5년(651) 2월에는 파진찬(波珍湌)으로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이후 백제 부흥군 토벌, 고구려 원정, 백제 고지(故地) 점령, 나당전쟁 등에서 공을 세웠다. 죽지의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효소왕 때 그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鄕歌)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가 전한다.닫기·천존(天存)006006 천존(天存): 진골 출신의 고관으로 진덕왕~문무왕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무열왕 7년(660) 5월 26일에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무열왕을 모시고 남천정(南川停)에 갔다. 이후 백제 부흥군 토벌, 거열성(居列城) 공취, 고구려 원정, 백제의 고지(故地) 점령 등에서 활약하였다. 666년 자신의 아들인 한림(漢林)을 김유신(金庾信)의 아들인 삼광(三光)과 함께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케 하였다. 문무왕 19년(679) 정월에 서불한(舒弗邯)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고 그해 8월에 죽었다.닫기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막게 하였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싸운 것이 열흘이 지났으나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도살성(道薩城)007007 도살성(道薩城): 도살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1년(550) 정월조 참조.닫기 아래에서 주둔하게 되었다. 유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틀림없이 백제인들이 와서 염탐할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함부로 누구냐고 묻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서 군영 안을 돌아다니면서 말하기를, “벽을 견고히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응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서 그 후에 싸움을 결판내겠다.”라고 하였다. 〔백제의〕 첩자가 이를 듣고 돌아가서 은상에게 보고하자 은상 등은 군사가 증원되리라 생각하여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장사(將士) 1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980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마(戰馬) 10,000필을 획득하였고, 병장기와 같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008008 유신 등이 진격하여 …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9년(649) 8월조와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金庾信) 중(中)조에 동일한 사건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김유신열전에는 이때 신라가 백제의 장군 달솔(達率) 정중(正仲)과 사졸 100명을 사로잡고, 좌평(佐平) 은상(殷相)과 달솔 자견(自堅) 등 10인과 군사 8,980명을 베었으며, 말 1만 필과 투구·갑옷 1,800벌을 노획하였고, 또한 돌아올 때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는 것을 받은 다음 모두 놓아주었다고 기록되었다. 본 기록은 김유신열전의 원전에 전하는 기록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김유신열전에는 이 전투가 진덕왕 2년(648)에 일어났다고 하여, 신라본기에서 진덕왕 3년(649)이라 한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닫기

註 001
백제의 장군: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9년(649) 8월조에는 ‘좌장(左將)’으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金庾信) 중(中)조에는 ‘좌평(佐平)’으로 기록되었다.
註 002
은상(殷相): 백제의 장군이다. 진덕왕 3년(649) 8월 좌장(左將)으로서 정병 7,000명을 이끌고 신라의 석토(石吐)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고, 도살성(道薩城)에서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패배하였다. 다른 기록에 더 이상 보이지 않아 더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註 003
석토성(石吐城) :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신라의 지명으로 전한다.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의 문안산성(文案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閔德植, 1983,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
註 004
진춘(陳春):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조에 전하는 진순(眞純)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진순(陳純)이라고도 하였다.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전하였고, 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하서주 총관(河西州 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으며,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는 경정 총관(京停 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6년(676) 11월에 재상(宰相)으로 있을 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문무왕이 허락하지 않고 연로한 신하를 우대하는 의미로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註 005
죽지(竹旨): 진골 출신 중신(衆臣)인 술종공(述宗公)의 아들로서『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제2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 竹旨郞)조에는 죽만(竹曼)·지관(智官)·죽지랑(竹旨郞)으로 기록되었다. 진평왕대에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며(金哲埈, 1975, 「新羅 貴族勢力의 基盤」,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다. 진덕왕 5년(651) 2월에는 파진찬(波珍湌)으로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이후 백제 부흥군 토벌, 고구려 원정, 백제 고지(故地) 점령, 나당전쟁 등에서 공을 세웠다. 죽지의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효소왕 때 그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鄕歌)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가 전한다.
註 006
천존(天存): 진골 출신의 고관으로 진덕왕~문무왕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진덕왕 3년(649)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무열왕 7년(660) 5월 26일에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무열왕을 모시고 남천정(南川停)에 갔다. 이후 백제 부흥군 토벌, 거열성(居列城) 공취, 고구려 원정, 백제의 고지(故地) 점령 등에서 활약하였다. 666년 자신의 아들인 한림(漢林)을 김유신(金庾信)의 아들인 삼광(三光)과 함께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케 하였다. 문무왕 19년(679) 정월에 서불한(舒弗邯)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고 그해 8월에 죽었다.
註 007
도살성(道薩城): 도살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1년(550) 정월조 참조.
註 008
유신 등이 진격하여 …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9년(649) 8월조와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金庾信) 중(中)조에 동일한 사건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김유신열전에는 이때 신라가 백제의 장군 달솔(達率) 정중(正仲)과 사졸 100명을 사로잡고, 좌평(佐平) 은상(殷相)과 달솔 자견(自堅) 등 10인과 군사 8,980명을 베었으며, 말 1만 필과 투구·갑옷 1,800벌을 노획하였고, 또한 돌아올 때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는 것을 받은 다음 모두 놓아주었다고 기록되었다. 본 기록은 김유신열전의 원전에 전하는 기록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김유신열전에는 이 전투가 진덕왕 2년(648)에 일어났다고 하여, 신라본기에서 진덕왕 3년(649)이라 한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주제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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