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일곱 성을 함락시키다 ( 649년 08월(음) )

가을 8월에 백제의 장군154154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9년 8월조에는 ‘좌장(左將)’으로, 《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에는 ‘좌평(佐平)’으로 기록되었다.닫기은상(殷相)155155 649(의자왕 9) 8월에 좌평(佐平)으로서 좌장(左將)이 되어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으나 도살성(道薩城)에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에게 패하여 죽었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9년 8월조《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닫기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石吐)[성(城)]156156 《삼국사기》 권37, 잡지(雜志)6, 지리(地理)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신라의 지명으로 기록되었다.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의 문안산성(文案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민덕식,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1983 참조).닫기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57157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9년(649) 8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닫기 왕이 대장군(大將軍) [김(金)]유신(庾信)과 장군(將軍) 진춘(陳春)158158 진순(陳純)이라고도 하였고,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文武王) 원년 7월 17일조의 진순(眞純)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649년(진덕왕 3)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661년(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하서주 총관(河西州 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으며,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는 경정 총관(京停 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676년(문무왕 16) 11월에 재상(宰相)으로 있을 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문무왕(文武王)이 허락 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닫기·죽지(竹旨)159159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 竹旨郞)조에는 죽만(竹曼)·지관(智官)·죽지랑(竹旨郞)으로 기록되었다. 진덕왕(眞德王)대의 중신(重臣)인 술종공(述宗公)의 아들로, 진평왕(眞平王)대에 화랑으로 활동하였다. 649년(진덕왕 3)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651년(진덕왕 5) 2월에는 파진찬(波珍湌)으로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661년(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귀당총관(貴幢 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으며,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는 경정 총관(京停 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670년에 백제 부흥군의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 6월에는 당(唐)나라의 군사들을 석성(石城)에서 격파하였다. 효소왕(孝昭王) 때 죽지(竹旨)의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그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鄕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가 전해지고 있다.닫기·천존(天存)160160 649년(진덕왕 3)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660년(무열왕 7) 5월 26일에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무열왕(武烈王)을 모시고 남천정(南川停)에 갔으며, 661년(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귀당총관(貴幢 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고, 이후 겨열성(居列城) 등을 공취하였다. 664년 2월에는 이찬(伊湌)으로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웅진에서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맹약을 체결하였다. 666년 자신의 아들인 한림(漢林)김유신(金庾信)의 아들인 삼광(三光)과 함께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케 하였다. 668년 6월에 각간(角干)으로서 귀당 총관이 되어 김인문 등과 함께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으며, 670년 7월에는 백제의 고지(故地)를 재점령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정월에 서불한(舒弗邯)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8월에 죽었다.닫기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막게 하였다.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10여 일 동안 싸웠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으므로 도살성(道薩城)161161 《삼국사기》 권37, 잡지(雜志)6, 지리(地理)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기록된 지명이다.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도안면으로 비정하거나(민덕식, 「고구려 도살성고」, 《사학연구》 36, 1983) 또는 충청남도 천안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80쪽).닫기 아래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김]유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틀림없이 백제인들이 와서 염탐할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함부로 검문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서 군영 안을 돌아다니면서 말하기를
“방어벽을 견고히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응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서 그 후에 싸움을 결판내겠다.”라고 하였다. [백제의] 첩자가 이를 듣고 돌아가서 은상에게 보고하자 [은] 등은 군사가 증원될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김]유신 등이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장사(將士) 1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천 9백 8십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마(戰馬) 1만 필을 획득하였고, 병기와 같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162162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9년 8월조《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김유신전에는 이때 신라는 백제의 장군 달솔(達率) 정중(正仲)과 사졸 100명을 사로잡고, 좌평(佐平) 은상(殷相)과 달솔 자견(自堅) 등 10명과 군사 8,980명을 베었으며, 말 10,000필과 투구·갑옷 1,800벌을 노획하였다. 또한 돌아올 때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항복하는 것을 받아들여 모두 놓아주었다고 기록되었다.닫기

註 154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9년 8월조에는 ‘좌장(左將)’으로, 《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에는 ‘좌평(佐平)’으로 기록되었다.
註 155
649(의자왕 9) 8월에 좌평(佐平)으로서 좌장(左將)이 되어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으나 도살성(道薩城)에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에게 패하여 죽었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9년 8월조《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註 156
《삼국사기》 권37, 잡지(雜志)6, 지리(地理)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신라의 지명으로 기록되었다.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의 문안산성(文案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민덕식,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1983 참조).
註 157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9년(649) 8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註 158
진순(陳純)이라고도 하였고,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文武王) 원년 7월 17일조의 진순(眞純)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649년(진덕왕 3)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661년(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하서주 총관(河西州 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으며,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는 경정 총관(京停 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676년(문무왕 16) 11월에 재상(宰相)으로 있을 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문무왕(文武王)이 허락 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註 159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 竹旨郞)조에는 죽만(竹曼)·지관(智官)·죽지랑(竹旨郞)으로 기록되었다. 진덕왕(眞德王)대의 중신(重臣)인 술종공(述宗公)의 아들로, 진평왕(眞平王)대에 화랑으로 활동하였다. 649년(진덕왕 3)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651년(진덕왕 5) 2월에는 파진찬(波珍湌)으로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661년(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귀당총관(貴幢 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으며,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는 경정 총관(京停 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다. 670년에 백제 부흥군의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 6월에는 당(唐)나라의 군사들을 석성(石城)에서 격파하였다. 효소왕(孝昭王) 때 죽지(竹旨)의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그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鄕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가 전해지고 있다.
註 160
649년(진덕왕 3) 8월에 장군으로서 백제와의 도살성(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였고, 660년(무열왕 7) 5월 26일에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무열왕(武烈王)을 모시고 남천정(南川停)에 갔으며, 661년(문무왕 원년) 7월 17일에는 귀당총관(貴幢 摠管)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고, 이후 겨열성(居列城) 등을 공취하였다. 664년 2월에는 이찬(伊湌)으로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웅진에서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맹약을 체결하였다. 666년 자신의 아들인 한림(漢林)김유신(金庾信)의 아들인 삼광(三光)과 함께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케 하였다. 668년 6월에 각간(角干)으로서 귀당 총관이 되어 김인문 등과 함께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으며, 670년 7월에는 백제의 고지(故地)를 재점령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정월에 서불한(舒弗邯)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8월에 죽었다.
註 161
《삼국사기》 권37, 잡지(雜志)6, 지리(地理)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기록된 지명이다.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도안면으로 비정하거나(민덕식, 「고구려 도살성고」, 《사학연구》 36, 1983) 또는 충청남도 천안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80쪽).
註 162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9년 8월조《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김유신전에는 이때 신라는 백제의 장군 달솔(達率) 정중(正仲)과 사졸 100명을 사로잡고, 좌평(佐平) 은상(殷相)과 달솔 자견(自堅) 등 10명과 군사 8,980명을 베었으며, 말 10,000필과 투구·갑옷 1,800벌을 노획하였다. 또한 돌아올 때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항복하는 것을 받아들여 모두 놓아주었다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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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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