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 난의 진압 과정과 진압 후의 논공행상 ( 822년 03월18일(음) )

18일에 완산주(完山州) 장사(長史)204204 각 주에 파견되어 있던 관리로 사마(司馬)라고도 하였다. 장사(長史)는 관등이 사지에서 대나마까지인 자로 임명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장사(長史)〈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하였다.〉는 9명이었다. 관등이 사지(舍知)에서 대나마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삼국사기》 권제40, 직관 2, 도독) 벼슬 이름. 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p384)닫기최웅(崔雄)과 주조(州助)205205 주의 차관직으로 주보(州輔)라고도 하였는데, 관등이 나마에서 중아찬까지인 자로 임명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주조(州助)〈혹은 주보(州輔)라고도 하였다.〉는 9명이었다. 관등이 나마(奈麻)에서 중아찬(重阿)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삼국사기》 권제40, 직관 2, 도독)닫기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왕경으로 도망와 반란을 보고하니, 왕이 곧바로 최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速含郡)206206 현재의 경남 함양군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천령군(天嶺郡)은 본래 속함군(速含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함양군(咸陽郡)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운봉현(雲峯縣)은 본래 모산현(母山縣)〈혹은 아영성(阿英城), 혹은 아막성(阿莫城)이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이안현(利安縣)은 본래 마리현(馬利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삼국사기》 권제34, 지리 1, 신라 강주 천령군)닫기 태수직을, 영충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고, 차원(差員)207207 어떤 임무를 맡겨 다른 곳에 파견하던 벼슬아치닫기 장수 8명에게 왕도의 8방(方)을 지키게 한 후에 군사를 출병시켰다. 일길찬 장웅(張雄)을 선발로 잡찬 위공(衛恭)208208 《흥덕왕릉비편(興德王陵碑片)》에 보이는 “驍騎將軍叡恭”의 ‘예공(叡恭)’과 동일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新羅 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1984, 156쪽).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미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닫기 파진찬 제릉(悌凌)이 그 뒤를 잇고, 이찬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 우징(祐徵) 등은 삼군을 통솔하고 정벌을 떠났다. 각간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209209 성덕왕 21년 10월에 축조한 모벌군성(毛伐郡城) 곧 관문성(關門城)을 가리킨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외동면(外東面)에 당시의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관문성에 대하여서는 정영호, 「신라 관문성에 대한 소고」, 《고문화》 5, 1977박방룡, 《新羅 關門城의 金石文 考察》 (《美術資料》 31, 1982)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경주 동남쪽의 관문이다. 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p286 여기 문화(蚊火)는 경주 동남의 무화관문(毛火關門)의 무화(毛火)와 같다고 본다.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63닫기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각각 종군을 청하여, 명기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황산(黃山)으로 향하고, 안락시미지진(施彌知鎭)210210 현재의 경북 상주시 화서면(化西面)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 1980, 338쪽)(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3닫기으로 향했다. 이때에 헌창은 장수를 보내 주요 도로를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웅도동현(道冬峴)211211 도동(道冬)은 현재의 경북 영천시 남단인 도동(道洞)과 금호읍(琴湖邑) 일대인 신라시대의 도동현(道洞縣)과 동일 지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도동현(道冬峴)은 아마 그 부근에 있던 고개였을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3닫기에서 적병을 만나 격퇴하였고, 위공제릉장웅의 군대에 합세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해 승리하였다. 병사들이 속리산(俗離山)으로 나아가 적병을 공격해 섬멸하였고, 균정 등은 적과 성산(星山)212212 경상북도 성주의 옛 이름이다. 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p385닫기에서 싸워 멸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함께 웅진(熊津)에 도착해 적과 큰 전투를 벌였는데, 목을 벤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은 간신히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견고히 수비하니, 여러 군사들이 포위 공격을 한 지 10일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였다. 헌창이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종자(從者)가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각각 묻었다. 성이 함락되자 옛 무덤에 있는 그의 몸을 찾아내 다시 베고 종족(宗族)과 도당(徒黨) 무려 239명을 죽이고 백성들은 놓아주었다. 그 후 공(功)을 논하여 작위와 상을 줌에 차등을 두었다. 아찬 녹진(祿眞)213213 일길찬(一吉湌) 수봉(秀奉)의 아들로 헌덕왕 10년(818년)에 집사시랑(執事侍郞)이 되었으며, 동왕 14년에 당시 상대등으로서 내외 관원의 인사를 맡고 있던 忠恭에게 인재등용의 요체(要諦)를 직언하였다. 헌덕왕 14년(822년)에 김헌창(金憲昌)이 난을 일으키자 이 난의 진압에 종사하여 공을 세웠다. 《삼국사기》 권45 열전 녹진전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3 《삼국사기》 45 녹진전을 참조할 것. 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p261 김헌창의 난에 관한 《삼국사기》 녹진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는데, 녹진이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왕이 그에게 대아찬의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였다.(《삼국사기》 권제45, 열전 5, 녹진)닫기에게 대아찬의 위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歃良州) 굴자군(屈自郡)214214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지역으로, 경덕왕대에 의안군(義安郡)으로 개명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개명되기 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307~308 경상남도 창원의 옛 이름이다. 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p374닫기은 적과 가까웠으나 난에 가담하지 않아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註 204
각 주에 파견되어 있던 관리로 사마(司馬)라고도 하였다. 장사(長史)는 관등이 사지에서 대나마까지인 자로 임명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장사(長史)〈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하였다.〉는 9명이었다. 관등이 사지(舍知)에서 대나마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삼국사기》 권제40, 직관 2, 도독) 벼슬 이름. 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p384)
註 205
주의 차관직으로 주보(州輔)라고도 하였는데, 관등이 나마에서 중아찬까지인 자로 임명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주조(州助)〈혹은 주보(州輔)라고도 하였다.〉는 9명이었다. 관등이 나마(奈麻)에서 중아찬(重阿)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삼국사기》 권제40, 직관 2, 도독)
註 206
현재의 경남 함양군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천령군(天嶺郡)은 본래 속함군(速含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함양군(咸陽郡)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운봉현(雲峯縣)은 본래 모산현(母山縣)〈혹은 아영성(阿英城), 혹은 아막성(阿莫城)이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이안현(利安縣)은 본래 마리현(馬利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삼국사기》 권제34, 지리 1, 신라 강주 천령군)
註 207
어떤 임무를 맡겨 다른 곳에 파견하던 벼슬아치
註 208
《흥덕왕릉비편(興德王陵碑片)》에 보이는 “驍騎將軍叡恭”의 ‘예공(叡恭)’과 동일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新羅 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1984, 156쪽).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미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註 209
성덕왕 21년 10월에 축조한 모벌군성(毛伐郡城) 곧 관문성(關門城)을 가리킨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외동면(外東面)에 당시의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관문성에 대하여서는 정영호, 「신라 관문성에 대한 소고」, 《고문화》 5, 1977박방룡, 《新羅 關門城의 金石文 考察》 (《美術資料》 31, 1982)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2 경주 동남쪽의 관문이다. 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1958, p286 여기 문화(蚊火)는 경주 동남의 무화관문(毛火關門)의 무화(毛火)와 같다고 본다.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63
註 210
현재의 경북 상주시 화서면(化西面)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 1980, 338쪽)(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3
註 211
도동(道冬)은 현재의 경북 영천시 남단인 도동(道洞)과 금호읍(琴湖邑) 일대인 신라시대의 도동현(道洞縣)과 동일 지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도동현(道冬峴)은 아마 그 부근에 있던 고개였을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3
註 212
경상북도 성주의 옛 이름이다. 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p385
註 213
일길찬(一吉湌) 수봉(秀奉)의 아들로 헌덕왕 10년(818년)에 집사시랑(執事侍郞)이 되었으며, 동왕 14년에 당시 상대등으로서 내외 관원의 인사를 맡고 있던 忠恭에게 인재등용의 요체(要諦)를 직언하였다. 헌덕왕 14년(822년)에 김헌창(金憲昌)이 난을 일으키자 이 난의 진압에 종사하여 공을 세웠다. 《삼국사기》 권45 열전 녹진전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23 《삼국사기》 45 녹진전을 참조할 것. 이강래, 《삼국사기》 Ⅰ, 한길사, 1998, p261 김헌창의 난에 관한 《삼국사기》 녹진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는데, 녹진이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왕이 그에게 대아찬의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였다.(《삼국사기》 권제45, 열전 5, 녹진)
註 214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지역으로, 경덕왕대에 의안군(義安郡)으로 개명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개명되기 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307~308 경상남도 창원의 옛 이름이다. 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p374
주제분류
정치>군사>군사조직>보훈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정치>군사>반란>진압
정치>법률>형법>형집행
정치>행정>관인>포상·징벌
경제>경제정책>조세·공역>조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