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하여 말하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金櫃)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金氏)로 삼았다”210210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로 황제(皇帝)의 아들로 이름을 지(摯)라 하였다. 태호(太昊)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소호(小昊)라고 하였으며, 금덕(金德)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금천씨(金天氏)라고 불렀다.닫기211211 이 내용은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조와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 나온다.닫기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國子博士)212212 국자감에서 교육을 담당한 박사이다. 국학은 신문왕 2년에 설치되었고, 경덕왕대에 이르러 대학감(大學監)으로 개명되었으나 국자감에 대해 직접 언급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닫기 설인선(薛因宣)213213 국자박사의 직위에 있었으며, 김유신 비문을 지었다.닫기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214214 김유신의 一代記와 功績을 적은 碑로 보이는데 현재 전하고 있지 않다.닫기과 박거물(朴居勿)215215 신라 경문왕대를 전후하여 문장가로 활약하였다. 숙위학생의 신분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였다(이기동, 「신라하대 빈공급제자의 출현과 나당문인의 교환」, 《신라골품제와 화랑도》, 일조각, 1980).닫기이 지었고 요극일(姚克一)216216 신라 하대의 서예가이다.닫기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217217 三郞寺는 경북 경주시 성건동 西川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창건되었다. 三郞寺라는 절 이름에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세 사람의 화랑과 관련있는 듯 하나 화랑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5 感通篇 景興遇聖條에는 神文王대에 國老였던 景興이 이 절에 住錫한 것으로 나온다. 三郞寺碑는 삼랑사의 創建緣起를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닫기에 보인다. 고구려는 또한 고신씨(高辛氏)218218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제곡(帝嚳)이라고도 하였다. 황제 헌원씨의 증손자로 처음 신(辛) 땅에 봉함을 받았고 뒤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고신씨(高辛氏)로 불렀다고 한다.닫기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진서(晉書)》219219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방현령(房玄齡) 등이 찬한 진(晉)왕조의 정사(正史)이다. 전체 130권으로 되어 있으며, 644년 편찬하였다.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외에 재기(載記) 30권이 있다.닫기의 기록에 보인다.220220 본 기사는 《晉書》 권124 載記 제24 慕容雲條에 “慕容雲 字子雨 寶之養子也 祖父高和 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으로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7년조에도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 報之 雲祖父高和 句驪之支屬 自云 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이라고 나오고 있다. 《晉書》 載記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高陽氏의 後裔”로 되어 있는데 비해 본 기사에서 “高辛氏의 後裔”라고 한 것은 撰者의 改筆로 보아야 할 것이다.닫기 옛 사서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221221 이 기사는 백제 왕실과 고구려 왕실의 근원이 같은 것을 보여준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및 권25 개로왕 20년조와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에 보인다.닫기고 하며, 또한 “(秦)222222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으며, 시황제 때에 이르러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기원전 221~기원전 206).닫기·(漢)223223 高祖 劉邦이 세운 나라. 前後漢 합쳐 400여년에 걸쳐 중국에 군림하였다. 前漢(西漢이라고도 함)은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項羽를 이기고 長安에 도읍하였다. 그러나 15대째 이르러 王莽에게 찬탈을 당하여 멸망하였다. 존속 기간은 기원전 202~서기후 8년까지이다. 後漢(東漢이라고도 함)은 서기 25년에 光武帝가 漢을 부흥시켜 洛陽에 도읍하여 후한을 세웠다. 그러나 黃巾의 난을 계기로 쇠퇴하여 서기 220년에 魏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존속 기간은 서기후 25~220년이다.닫기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해동(海東)224224 우리나라의 별칭(別稱)으로 우리나라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일컫던 이름이다.닫기으로 많이 도망왔다”고도 한다.225225 이와 관련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에는 진한 사람들이 낙랑 사람을 본래 자신들의 남은 무리로 여겨 ‘아잔(阿殘)’이라고 했던 사실을 전하는 데, 이는 사로국의 성장 과정에 낙랑계 유이민이 신라에 대거 유입된 사실을 반영한다(문창로, 「신라와 낙랑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2004, 81쪽). 진한 지역으로 이동한 유이민 집단은 진의(秦)의 통일 및 장성 수축기에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이동한 동이 계통의 집단이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한국사론》 23, 1990, 1990). 또한 기원후 2세기 중·후반경 후한의 세력약화와 함께 진행된 낙랑 방면의 유이민 파동은 사로국의 지배세력 교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이기동, 「신라의 성립과 변천」, 《한국고대사론》, 한길사, 1988, 81쪽).닫기 그렇다면 삼국의 조상들은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는가? 백제 말기에 와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를 맺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계속하면서 신라를 침공하여, 유리한 조건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을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이웃과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226226 이 문장은 《春秋左傳》 隱公 6年 5月條의 “五月庚申 鄭伯侵陳 大獲 往歲 鄭伯請成于陳 陳侯不許 五父諫曰 親仁善隣 國之寶也 君其許鄭…”에 나온다.닫기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에 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大國)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註 210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로 황제(皇帝)의 아들로 이름을 지(摯)라 하였다. 태호(太昊)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소호(小昊)라고 하였으며, 금덕(金德)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금천씨(金天氏)라고 불렀다.
註 211
이 내용은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조와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 나온다.
註 212
국자감에서 교육을 담당한 박사이다. 국학은 신문왕 2년에 설치되었고, 경덕왕대에 이르러 대학감(大學監)으로 개명되었으나 국자감에 대해 직접 언급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註 213
국자박사의 직위에 있었으며, 김유신 비문을 지었다.
註 214
김유신의 一代記와 功績을 적은 碑로 보이는데 현재 전하고 있지 않다.
註 215
신라 경문왕대를 전후하여 문장가로 활약하였다. 숙위학생의 신분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였다(이기동, 「신라하대 빈공급제자의 출현과 나당문인의 교환」, 《신라골품제와 화랑도》, 일조각, 1980).
註 216
신라 하대의 서예가이다.
註 217
三郞寺는 경북 경주시 성건동 西川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창건되었다. 三郞寺라는 절 이름에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세 사람의 화랑과 관련있는 듯 하나 화랑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5 感通篇 景興遇聖條에는 神文王대에 國老였던 景興이 이 절에 住錫한 것으로 나온다. 三郞寺碑는 삼랑사의 創建緣起를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註 218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제곡(帝嚳)이라고도 하였다. 황제 헌원씨의 증손자로 처음 신(辛) 땅에 봉함을 받았고 뒤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고신씨(高辛氏)로 불렀다고 한다.
註 219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방현령(房玄齡) 등이 찬한 진(晉)왕조의 정사(正史)이다. 전체 130권으로 되어 있으며, 644년 편찬하였다.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외에 재기(載記) 30권이 있다.
註 220
본 기사는 《晉書》 권124 載記 제24 慕容雲條에 “慕容雲 字子雨 寶之養子也 祖父高和 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으로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7년조에도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 報之 雲祖父高和 句驪之支屬 自云 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이라고 나오고 있다. 《晉書》 載記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高陽氏의 後裔”로 되어 있는데 비해 본 기사에서 “高辛氏의 後裔”라고 한 것은 撰者의 改筆로 보아야 할 것이다.
註 221
이 기사는 백제 왕실과 고구려 왕실의 근원이 같은 것을 보여준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및 권25 개로왕 20년조와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에 보인다.
註 222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으며, 시황제 때에 이르러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기원전 221~기원전 206).
註 223
高祖 劉邦이 세운 나라. 前後漢 합쳐 400여년에 걸쳐 중국에 군림하였다. 前漢(西漢이라고도 함)은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項羽를 이기고 長安에 도읍하였다. 그러나 15대째 이르러 王莽에게 찬탈을 당하여 멸망하였다. 존속 기간은 기원전 202~서기후 8년까지이다. 後漢(東漢이라고도 함)은 서기 25년에 光武帝가 漢을 부흥시켜 洛陽에 도읍하여 후한을 세웠다. 그러나 黃巾의 난을 계기로 쇠퇴하여 서기 220년에 魏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존속 기간은 서기후 25~220년이다.
註 224
우리나라의 별칭(別稱)으로 우리나라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일컫던 이름이다.
註 225
이와 관련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에는 진한 사람들이 낙랑 사람을 본래 자신들의 남은 무리로 여겨 ‘아잔(阿殘)’이라고 했던 사실을 전하는 데, 이는 사로국의 성장 과정에 낙랑계 유이민이 신라에 대거 유입된 사실을 반영한다(문창로, 「신라와 낙랑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2004, 81쪽). 진한 지역으로 이동한 유이민 집단은 진의(秦)의 통일 및 장성 수축기에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이동한 동이 계통의 집단이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한국사론》 23, 1990, 1990). 또한 기원후 2세기 중·후반경 후한의 세력약화와 함께 진행된 낙랑 방면의 유이민 파동은 사로국의 지배세력 교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이기동, 「신라의 성립과 변천」, 《한국고대사론》, 한길사, 1988, 81쪽).
註 226
이 문장은 《春秋左傳》 隱公 6年 5月條의 “五月庚申 鄭伯侵陳 大獲 往歲 鄭伯請成于陳 陳侯不許 五父諫曰 親仁善隣 國之寶也 君其許鄭…”에 나온다.
색인어
지명 : 고사
국명 : 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