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정과 제륭의 왕위 다툼에서 균정편을 들다 ( 836년 (음) )

개성(開成) 원년 병진(丙辰: 836, 흥덕왕 11, 희강왕 원년)에 흥덕왕이 죽었다. 왕위를 이을 적자(嫡子)가 없어, 왕의 사촌 동생 [김]균정(均貞)133133 ?~836. 원성왕의 손자이고 예영태자(禮英太子)의 아들로 신무왕(神武王)의 아버지이다. 애장왕 3년(802)에 대아찬(大阿湌)으로 관등을 올려 가왕자(假王子)로서 왜국에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헌덕왕 3년(812)에 시중이 되어 814년까지 국정을 맡았고, 동왕 14년(822)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3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진압하였다. 흥덕왕 10년(835)에 상대등이 되었으며 왕이 죽자 왕위 다툼에서 제륭(悌隆)에게 패배하여 난 중에 죽었다. 아들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였을 때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존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7~708쪽).닫기과 사촌 동생134134 균정(均貞)의 형인 헌정(憲貞)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49쪽).닫기의 아들 [김]제륭(悌隆)135135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개륭(愷隆)’, 또는 ‘제옹(悌顒)’이라 하였다. 흥덕왕의 당질(堂姪)이고 균정의 형인 각간(角干) 헌정(憲貞)의 아들이다. 원성대왕의 증손자이다. 균정과 왕위 다툼에서 승리하여 희강왕(僖康王)이 되었으나, 3년 만에 김명(金明)에게 살해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8쪽).닫기이 왕위를 다투었다. [김]은 [김]균정의 아들인 아찬(阿湌)136136 신라시대 제6관등이다.닫기 [김]우징(祐徵)137137 ?~839. 신무왕(神武王)의 이름이고 균정의 아들이다. 헌덕왕 14년(822)에 대아찬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정하였고, 흥덕왕 3년(828)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6년(831)에 사임하였다. 동왕 9년(834)에 다시 시중이 되었다가 다음해 아버지가 상대등에 임명됨으로써 사임하였다. 흥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제륭을 받드는 김명 일파와 궁중에서 싸우다가 져서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희강왕이 김명에게 시해되자 장보고에게 청하여 5천 명의 군사 지원을 받아 경주에 쳐들어가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곧바로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8쪽).닫기균정의 매서(妹壻)인 예징(禮徵)138138 ?~849. 균정의 매부(妹夫)이며 친족으로는 균정의 손자이다. 아저씨 우징, 김양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위에 앉히려 하다가 싸움에서 패배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공격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문성왕 2년(840)에 상대등이 되어 849년까지 맡았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8쪽).닫기과 함께 [김]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족병(族兵)139139 자기의 족원(族員)을 동원하여 조직한 사병(私兵, 이기백, 「신라사병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노태돈, 「나대의 문객」, 《한국사연구》 21·22, 1978, 7쪽)이다. 김양의 ‘족병(族兵)·모사(謀士)·병졸(兵卒)’, 김헌창의 ‘종족(宗族)·당여(黨與)·기민(其民)’ 및 ‘노동삼천인(奴童三千人)·갑병(甲兵)’(《신당서》 권220 신라전) 등의 경우가 도독과 지방세력 또는 대호족의 세력기반이나 사회적 성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이 하대 사회의 모순이었으며, 혼란의 소지가 되었다(신형식, 「신라군주고」, 《백산학보》 19, 1975, 97쪽)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8~709쪽).닫기으로써 숙위하였다.

註 133
?~836. 원성왕의 손자이고 예영태자(禮英太子)의 아들로 신무왕(神武王)의 아버지이다. 애장왕 3년(802)에 대아찬(大阿湌)으로 관등을 올려 가왕자(假王子)로서 왜국에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헌덕왕 3년(812)에 시중이 되어 814년까지 국정을 맡았고, 동왕 14년(822)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3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진압하였다. 흥덕왕 10년(835)에 상대등이 되었으며 왕이 죽자 왕위 다툼에서 제륭(悌隆)에게 패배하여 난 중에 죽었다. 아들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였을 때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존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7~708쪽).
註 134
균정(均貞)의 형인 헌정(憲貞)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49쪽).
註 135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개륭(愷隆)’, 또는 ‘제옹(悌顒)’이라 하였다. 흥덕왕의 당질(堂姪)이고 균정의 형인 각간(角干) 헌정(憲貞)의 아들이다. 원성대왕의 증손자이다. 균정과 왕위 다툼에서 승리하여 희강왕(僖康王)이 되었으나, 3년 만에 김명(金明)에게 살해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8쪽).
註 136
신라시대 제6관등이다.
註 137
?~839. 신무왕(神武王)의 이름이고 균정의 아들이다. 헌덕왕 14년(822)에 대아찬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정하였고, 흥덕왕 3년(828)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6년(831)에 사임하였다. 동왕 9년(834)에 다시 시중이 되었다가 다음해 아버지가 상대등에 임명됨으로써 사임하였다. 흥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제륭을 받드는 김명 일파와 궁중에서 싸우다가 져서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희강왕이 김명에게 시해되자 장보고에게 청하여 5천 명의 군사 지원을 받아 경주에 쳐들어가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곧바로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8쪽).
註 138
?~849. 균정의 매부(妹夫)이며 친족으로는 균정의 손자이다. 아저씨 우징, 김양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위에 앉히려 하다가 싸움에서 패배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공격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문성왕 2년(840)에 상대등이 되어 849년까지 맡았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8쪽).
註 139
자기의 족원(族員)을 동원하여 조직한 사병(私兵, 이기백, 「신라사병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노태돈, 「나대의 문객」, 《한국사연구》 21·22, 1978, 7쪽)이다. 김양의 ‘족병(族兵)·모사(謀士)·병졸(兵卒)’, 김헌창의 ‘종족(宗族)·당여(黨與)·기민(其民)’ 및 ‘노동삼천인(奴童三千人)·갑병(甲兵)’(《신당서》 권220 신라전) 등의 경우가 도독과 지방세력 또는 대호족의 세력기반이나 사회적 성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이 하대 사회의 모순이었으며, 혼란의 소지가 되었다(신형식, 「신라군주고」, 《백산학보》 19, 1975, 97쪽)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08~7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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