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右議政 趙相愚등이 입시하여 長白山일대를 살피겠다는 淸의 咨文에 回咨할지 여부와 접대 절차에 대해 논의함  
연월일숙종 38년 1712년 02월30일(음)
이달 27일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 입시하였을 때에, 우의정 조상우가 아뢰기를
"저들의 자문(咨文)에 강기슭을 따라 길을 만들어 장백(長白)으로 가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육로(陸路)는 임신년의 회자(回咨) 때에 길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통보하여 받아들였었고, 수로(水路)는 작년에 목극등(穆克登)이 험난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서도 그가 수성(水性)을 잘 안다하여 '나는 꼭 가겠다.'는 말로 남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자문에 과연 이 목극등이 장백으로 가서 살피겠다는 말이 있고, 또 중로(中路)가 끊겼으니 조선(朝鮮)에서 좀 조관(照管)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목극등이 앞서 본 의견을 지키려는 것이며, 또 칙사(勅使)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비록 그 일을 무겁게 여기려는 뜻에서 나온 듯합니다. 지금 서둘러서 '육로로 통하기 어렵다'고 회자를 쓰면, 임신년에 이미 자문을 왕복하여 완결된 일이요, 수로로 통하기 어려움은 비록 목극등이 통과한 곳을 들어서 말하되, 처음의 험난함은 말할 것도 없고, 갈수록 더욱 험준(險峻)하여 실은 갈 수가 없다는 등의 말로 회보(回報)하면 저들이 비록 길을 떠났으나 저들로부터 분부하여 중지하는 길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부(禮部)의 자문이 나온 뒤에 이어 패문(牌文)이 있으니, 지금 만약 회자한다면 어색한 걱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황지(皇旨)를 받들고 왔으니 거절하는 뜻을 보여서는 옳지 않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조상우가 아뢰기를
"자문을 보내는 문제는 말하기 어려우나 문자를 얽음에 있어 요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있습니다. 중로(中路)에 통과하기가 어려움이 염려된다는 뜻으로 말을 하면 저들이 혹 중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임신년 (1692)에 다섯 칙사가 나왔을 때에 다행히 중지하였으나 작년의 일은 임신년의 경우와 다르고, 지금 또 이러하니 그 뜻은 반드시 가서 살펴보고 말겠다는 것이다. 지금 만약 회자를 한다면 반드시 어색한 걱정이 생길 것이다. 여러 신하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행병조판서 최석항이 아뢰기를
"저들이 옴에 있어 수로와 육로의 험난을 모르는 바 아니나, 임신년에 중지한 뒤에 또 작년의 일이 있고 금번 또 자문과 패문을 보내는 일이 있으니 그들 생각은 반드시 가 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전에 길이 험난함을 이유로 하였으나, 지금 한 마디도 봉행(奉行)한 것이 없으니, 과거 여러 차례 어렵다고 말한 뜻은 마침내 헛되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번 자문을 보내는 일은 그만 둘 일이 아닙니다. 또 이 문제는 관계가 가볍지 않아 마침내는 앞으로 난처한 일로 될 것이므로 반드시 이번에 말을 잘 하여 자문을 보내야만 앞으로 장본(張本)이 될 수 있고, 사정의 갑작스러움으로 하여 말 없이 그대로 허용해서는 아마도 부당할 듯합니다."
하였고, 호조판서 김우항은 아뢰기를
"소신이 밖에 있을 때에 이미 굳이 자문을 보낼 것이 없다고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초 목극등(穆克登)이 몸소 험난을 지나면서 고생을 치렀고, 이[齒]가 부러져 돌아가기까지 하였으나 지금 또 나오는 것은 그 생각이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 살펴본 뒤에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패문이 도착한 뒤에는 중지시키지 못합니다. 지금 비록 자문을 보낸다 하더라도 무익할 듯 싶습니다. 성교(聖敎)는 진정 지당합니다."
하였으며, 형조판서 이언강이 아뢰기를
"자문 가운데 조관(照管)하라고 한 것은 말 뜻이 매우 함축(含蓄)되어 있습니다. 저들의 수로와 육로가 다한 뒤에 우리에게 조관을 요구하면 앞으로 어찌 응하겠습니까? 이는 진정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작년 목극등이 갖은 험난을 겪으면서 돌아갔는데 지금 또 나오는 것은 그 생각이 반드시 가서 보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곧바로 정지를 요구할 수 없으나, 접대(接待) 등 문제를 지금 예에 의하여 거행하되 수로와 육로가 험난하여 조관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말하여 자문을 보내면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있고, 어설픈 일이 생기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하였고, 행사직 김석연은 아뢰기를
"김우항이 아뢴 말이 좋을 듯 싶습니다."
하였으며, 강화유수 조태로는 아뢰기를
"저들 자문이 나온 뒤에는 회자(回咨)로 힘이 되기는 어려울 듯 싶습니다. 그러나 먼저 자문을 보내어 미리 통로의 험난한 상황을 통고하면 저들도 어찌 마음을 돌리는 일이 없겠습니까? 작년에 목극등이 수로를 경유하며 험난한 상황을 이미 직접 보았으니, 지금 또 육로로 통과하기 어려운 사정임을 미리 통보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하였고, 이조참의 이광좌(李光佐)는 아뢰기를
"패문(牌文)이 나온 뒤에 곧바로 중지를 요청하면 어색한 걱정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접반사를 보내 정중히 접대하며 몸소 상류(上流)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자문을 보내 그 길이 매우 험난한 상황임을 설명하면 어설픈 일이 생기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저들의 자문에 이른바 토문강(土門江)이라 한 것은 곧 중국 음(音)의 두만강(豆滿江)입니다. 지금 보면 저들의 자문에, 의주강(義州江)에서 토문강으로 향하되 처음에는 물을 거슬러서 올라가다가 물길이 불통된 뒤에 저들 연변(沿邊)의 육로를 거치고, 육로가 또 불통인 경우 우리 나라로 하여금 약간 조관해 달라고 하였으니, 이는 수로와 육로 모두 불통이 된 뒤에 오로지 우리 나라로 하여금 담당해서 꼭 길을 찾아 보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강변 길로 갈 수가 없으면 내지(內地)를 경유하여 보내야 하니, 내지의 길을 어찌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서둘러 자문을 보내서 매우 험난하여 통과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자세히 설명하면 비록 곧 받아들이지는 않는다하더라도 앞으로 우리의 주장을 내세울 때에 자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따르기 어려운 요청은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자문도 곤란한 듯하다. 저들은 자문 보내는 것도 부족하게 여기고 이어서 패문(牌文)을 보냈으니, 지금 만약 또 자문을 보내 방지하면 반드시 어색한 걱정이 발생한다. 작년에 목극등(穆克登)이 직접 험난을 겪고 돌아갔는데 지금 또 나오는 것은 그 뜻이 반드시 중지하지 않을 것이요, 또 정축년 이후 저들이 말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청혼(請婚)하는 일까지 있어 의순공주(義順公主)라 하여 사람을 들여보냈으니, 저들의 일을 끝내 방지할 수 없다. 지금 비록 자문을 잘 짓는다하더라도 결어(結語)에 방색(防塞)하는 뜻이 있으면 저들은 반드시 화를 낼 것이다. 이는 곧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테니 이 문제는 끝내 중대해 진다."
하였다. 조상우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의 뜻은 모두 저들이 도착한 뒤에 길이 험난하여 걱정을 가져오는 일이 있게되면 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미리 통고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길을 닦고 한편으로 자문을 보내는 것이 무방할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패문이 나온 뒤에 방색(防塞)하는 뜻으로 자문을 보냄은 옳지 않다. 나의 뜻은 결코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들이 만약에 '작은 나라에서 큰 나라의 명을 거부한다.'고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이 문제는 끝내 방색할 수 없고, 또 다른 일이 발생하면 나라에 매우 욕이 되니, 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임신년에 저들은 다섯 칙사(勅使)를 보내 길을 열도록 하려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자문을 보내 길의 험난한 실상을 설명함에 따라 3차례나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들은 결과 모두 허용치 않으려 하였으나 강희(康熙 : 청성조(淸聖祖))가 특별히 허용하여 보내지 않았고, 작년에 목극등(穆克登)이 나왔을 때도 길이 험난한 것을 직접 보고 돌아갔습니다. 금번에 자문을 보내되 임신년의 앞서의 말을 곧바로 들고 또 작년의 일을 들어서 증거로 삼으면 말에 실로 근거가 있어 진정 어설픈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아뢰기를, '저들이 현재 ≪성경지(盛京誌)≫를 짓고 있는데, 백두산(白頭山) 근처가 곧 그들이 처음 일어난 곳이기 때문에 굳이 살피려 한다.'합니다. 그러나 이에 그칠 뿐이라면 어찌 여러 차례의 계획을 이와 같은 행동으로만 하겠습니까? 신이 어려서부터 선배(先輩) 유식한 이의 말을 들은 바 있습니다. 저들은 호로(胡虜)로서 중국에 들어가 점거(占據)한 지 이미 백년이 가깝습니다. 아뢰기를, '호로에게는 백년의 운(運)이 없다.'하였으니, 그들도 어찌 스스로 생각지 않겠습니까? 수십년 내려오면서 공공연히 우리에게 지나치게 후하게 대우하고, 최대한으로 공물(貢物)을 경감하기까지 함은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대체로 중국에서 백년을 지내면서 비단옷·기름 진 음식에 젖었다가 하루 아침에 막북(漠北)으로 돌아가게 되면 사실 견디기 어렵습니다. 또 저들은 가장 달자(韃子 : 달단(韃靼))를 두려워합니다. 심양(瀋陽)에서 영고탑(寧固塔) 사이로 돌아가자면 달자가 아주 가까워 차단(遮斷)될 우려가 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특히 후하게 대우함은 언젠가 패하여 돌아갈 때에 다소 여유가 있는 경우 어염(魚鹽) 등 물산에서부터 토지·인민에 이르기까지 진정 지원을 받자는 뜻이 있고, 급박한 때에는 반드시 곧바로 서북(西北)의 길을 취하자는 것입니다. 이번 행차는 반드시 산천(山川)의 험난한 막힘, 도리(道里)의 사정을 보려는 것입니다. 바깥 논의들은 모두 '굳이 서북을 침점(侵占)하려면 지형 모르는 것을 뭐 걱정하겠는가?'라고 하나 이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한 소문을 어찌 총신(寵臣)을 시켜서 직접 보도록 하겠습니까? 사정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마땅히 충분히 살펴서 처리해야 합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버들 가지를 꺾어 채소(菜蔬)밭에 울타리를 친 것을 미친 사람도 놀라서 돌아다본다[折柳樊圃 狂夫瞿瞿].'고 하였으니, 우리가 지키기를 진정 견고하게 하면, 저들도 자연 가벼이 보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상국(上國)으로 대우하나 나라를 지키는 방법에 있어 어찌 그들이 하는대로 일임할 수 있겠습니까? 설한령(薜罕嶺) 길은 내지(內地)에서 곧바로 북로로 통하는 곳이므로 결코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만약 곧바로 저들 행차를 막는다면 어설픈 일이 생길 수도 있으나, 길을 통과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면 어찌 어설픈 일이 생기겠으며, 보낼 자문에도 어찌 할 말이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속일만한 방법[可欺以其方]입니다. 비록 상국이라 내세우지만 천험(天險)은 넘을 수 없으니 저들이 어찌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저들은 한 번 결정한 뒤에는 전혀 고치지 않는다. 목극등(穆克登)이 이가 부러져 돌아가서는 반드시 황제(皇帝)에게 아뢰었을 것이나 지금 또 이러하니, 이는 반드시 나와 보려는 뜻이다. 자문을 보냄은 무익하고 반드시 다른 일을 빚는다. 이는 결코 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저들이 비록 일체의 일을 시행한다 하나 강희(康熙)가 50년 동안 천하를 주장함에 있어 그가 하는 바를 보면 변통할 만한 일이 있으면 번번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임신년의 일을 보아도 역시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지역이 험난하다고 잘 실행하면 저들도 어쩌지 못합니다. 뒤에는 비록 별도로 조처한다 하더라도 금번의 경우는 반드시 받아들이는 길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저들이 반드시 나와 보려고 한다면 끝내 방지할 수 없다. 저들도 설한령에 길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동을 취하여 우리를 시험해 본다면 우리가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 저들이 만약 설한령 길을 찾아 물어서 본색(本色)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저들이 설령 설한령을 찾아 묻더라도 이 길은 본래 없다고 답하면 저들이 어찌 다른 나라의 지형을 헤아려서 반드시 있다고 추궁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저들이 이미 자세히 알고 묻는데 우리가 없다고 답변하면 이는 성실해야 할 도리가 아니다. 근년에 유집일(兪集一)이 갔었을 때에 설한령을 말한 바 있다.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허용하도록 전교하였다. 지금 만약 자세히 알고 우리에게 묻는다면 끝내 방색해서는 옳지 않고, 방색하다가 되지 않아 나라에 욕이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어찌 무익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조태로가 아뢰기를
"폐4군(廢四郡)에서부터 길을 닦아 나간다면 혹 모르겠으나, 내지(內地)의 경우 결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소신이 어사(御史)가 되었을 때에 그 길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만약 강변의 파수(把守)하는 소로를 따라 가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이광좌도 이점을 우려하여 아뢴 것입니다. 자문을 보낸 뒤에 강박한 일이 있을 경우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도 무방합니다. 어찌 미리 지장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자문을 보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고, 최석항은 아뢰기를
"설한령은 내지에 있어 강변까지는 백여리입니다. 어찌 저들로 하여금 내지를 꿰뚫고 지나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결코 허용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자문은 단연 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조상우가 아뢰기를
"자문문제에 성상(聖上)의 뜻이 굳게 정하여 졌으니 아래에서는 감히 다시 아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온다면 우리 나라의 접대는 작년의 경우와 다릅니다. 일로(一路)의 접대할 일을 미리 마련하여 지휘, 접대토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어떻게 해야하며, 연접(延接)하는 사신의 칭호를 뭐라고 해야겠습니까? 전에는 서북 양도의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나아가 접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한 사신을 특별히 보내서 해야 합니까? 도신(道臣)을 시켜서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칙서(勅書)가 없으니 접반사(接伴使)만을 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태로가 아뢰기를
"패문(牌文)에 다만 '의주강원(義州江源)'이라 하였으니 저들이 곧바로 의주(義州)에 도착할지 혹 만포(滿浦) 등으로 질러 갈지를 어찌 정확히 알 수 있습니까? 저들은 의주를 보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강기슭을 거슬러 나와 백두(白頭)로 향하려는 뜻입니다. 본도의 방백은 감영(監營)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니, 마땅히 만상(灣上)으로 나아가 탐문하여 접대해야 합니다. 이 역시 미리 지휘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의 경우 감사가 감영을 떠나 접반사와 같이 가야만 상의하여 지원할 수 있으니, 같이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저들이 갈 길은 혹 저들의 경계를 거치거나 우리 경계를 거치기로 할 것이므로, 굳이 곧바로 접반사라고 명칭을 붙일 것은 없을 듯 싶습니다. 그 명칭을 바꾸어 호행사(護行使)라 일컫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김우항이 아뢰기를
"길이 우리 경계를 경유하면 접반사라 일컫는 것이 불가하진 않습니다."
하였으며, 최석항이 아뢰기를
"의주(義州)로부터 백두산(白頭山)으로 향하면 북도(北道)를 거쳐 나갈 듯 싶으니, 서북의 방백은 모두 감영을 떠나 나아가서 접대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접반사도 양도로 나누어 보내야 합니다."
하였고, 조상우가 아뢰기를
"평안감사의 장계에, '저들이 만약 의주로부터 만포(滿浦)로 오면 수로를 거치거나 육로를 경유할 것이므로, 미리 그 경유하는 바를 알아야만 공급(供給)을 준비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역시 조정에서 미리 지휘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에 육로를 요청하는 경우 굳이 막을 것은 없으나 우리가 먼저 육로를 요청함은 옳은 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감사의 장계에 '이쪽 변경을 경유하여 간다면 예에 의하여 접응(接應)하겠으나 저들 변경을 거쳐서 가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저들 변경으로 갈 때에는 굳이 접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저들의 변경으로 간다면 굳이 맞이하고 접대할 것이 없으나, 이쪽 변경을 거쳐간다면 접반(接伴)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상우가 아뢰기를
"장계에, '총괄 관리하여 접대할 때에 칙사를 맞이하는 예(禮)에 따라야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칙사의 경우와 다르니 굳이 칙사를 맞이하는 예에 따를 것이 없다. 그러나 패문이 있으니 작년과는 다르다. 도신(道臣)은 이러한 뜻을 알고 매몰스럽지 않게 하는 것에 좋겠다."
하였다. 조상우가 아뢰기를
"장계에, '수로와 육로, 피차의 경계를 막론하고 갈 때에 모두 참(站)을 배치하고 나와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 경계로 갈 때에 어찌 참까지나 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겠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