附錄
豫審發 제120호 大正 8년 8월 13일
釜山地方法院
豫審掛 代理 朝鮮總督府 판사 渡邊 純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귀하
貴發 제122호 촉탁에 의거하여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制令 제7호 위반사건의 증인 安熙濟 외 5명에 대한 신문을 끝냈으므로 1件 서류를 송치하는 바입니다.
송치서류
一. 증인 신문조서 6
二. 촉탁서 1
三. 증거 서류 1
이상
그리고 증인 尹賢鎭·崔浚은 앞서 회답과 같이 신문이 不能인 바입니다.
大邱地方法院 豫發 제122호
신문 촉탁서
별지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위 피고사건에 관하여 左記 성명의 자(를) 증인 혹은 참고인으로 하여 지정 사항을 신문한 후 조서 회송하도록 촉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지명한 자(가) 병 때문에 출정하지 못할 때에는 그 소재에 관하여, 또 본건 사실을 모르는 자일 때에는 이를 아는 자에 대하여 동일한 사항을 신문하도록, 만약 다른 관내에 現住하는 경우에는 관할청에 轉囑하도록, 또한 관계 서류 물건이 있으면 압수한 후 회송하기 바랍니다.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釜山地方法院
예심판사 귀중
左記
증인의 주소
釜山府 草梁洞 659番地.
安熙濟
34세
釜山府 元町 3丁目 12番地.
尹顯泰
31세
釜山府 瀛州洞.
尹炳浩
釜山府白山商會 내.
尹賢鎭
釜山府白山商會 내.
崔浚
위에 대한 신문 사항
一. 증인 등은 각 피고 등을 아는가, 안다면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二. 증인은 釜山에서 白山商會를 조직하여 무역상을 경영하고 있는가, 위 商會는 그 후 주식 조직으로 변경한 것 같은데, 언제 변경하고 그 자본금은 어느 정도이며, 각 중역의 주소·성명 및 주식 인수인의 주소·성명, 각 인수 주수, 현재 불입 금액은 어느 정도인가.
三. 白山商會에 피고 南亨祐를 고용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떠한 사정으로 그를 고용하였으며, 그에게는 어느 정도 보수를 주고 있었는가.
四. 증인 등은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그 운동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의 수단으로 白山商會를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증인 등은 중국 上海에서 동지가 조직한 조선 假政府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피고 南亨祐에게 다액의 자금을 주어 그를 上海가정부로 파견한 것 같은데, 어떠한가.
五.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증인 등은 국권 회복을 기도한 南亨祐로부터 그 운동자금을 강요당하여 다액의 자금을 공급했던 것이 아닌가.
六. 南亨祐는 大正 8년 4월 초순경 釜山을 출발하여 上海가정부로 가 司法部總長이 되었다는데, 그로부터 소식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사연은 어떠했는가.
七. 南亨祐 및 증인 등은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과 교제·왕복하며 국권 회복에 관해 모의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떠한가.
八. 尹賢鎭은 다액의 운동자금을 上海가정부에 출자하여 同 정부의 大藏卿이 된 것 같은데, 어떠한가.
九. 증인 등은 張德秀란 자를 아는가. 안다면 언제 어떠한 일로 알게 되었는가. 張德秀도 국권 회복을 기도한 자로서 증인 등은 그에게도 다액의 운동자금을 주어 日本 및 上海에 왕복시켜 동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大正 8년 7월 21일자 豫發 제112호 當職의 촉탁에 의거하여 압수한 증거 물건에 관해서 일일히 그 설명을 요구하기 바랍니다.
증인의 주소
釜山府 草梁洞
釜山府廳 서기 松岡武雄
위 신문 사항
一. 증인은 慶尙北道 淸道郡 大城面 松邑洞金裕德·金裕經 및 피고 金在烈을 아는가.
二. 이 엽서는 증인이 金裕經에게 발송한 것인가.
三. 위 엽서 가운데「사업 경영에 관한 일인데 하루라도 빠른 것이 득책 운운」이라고 되어 있는데, 金裕經은 언제 쯤 어떠한 사업을 경영하고 있었는가, 증인이 아는 사실을 상세히 진술하라.
四. 金裕經金裕德과 공동으로 釜山에서 미곡상을 경영하기 위해 大正 8년 1월경 그곳으로 가 2·3개월간 가옥 매입 등에 분주하였으며, 증인의 주선으로 釜山府安東病院으로부터 대금 630원에 전화를 매입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 그들은 실제 미곡상을 경영하려 한 것으로 보였는가.
五. 金裕德·金裕經은 피고 金在烈 등이 기도한 구한국의 國權恢復團에 가맹하여 大正 8년 봄 쯤 釜山에서 그 운동자금 조달 등에 金在烈과 함께 분주하고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는가.
증인의 주소
釜山府 瀛州洞大成旅館.
孫永洵
신문사항
一. 증인은 慶尙北道 淸道郡 大城面 松邑洞金裕經·金裕德 및 피고 金在烈을 아는가.
二. 증인은 金在烈金裕德으로부터 누룩제조회사의 주식 인수를 의뢰받은 일이 있는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 의뢰를 받았으며 그 모집 결과는 어떠했는가.
三. 金裕經·金裕德金在烈 등이 기도한 구한국의 국권 회복단에 가맹하여, 주식 인수 또는 상업 자금을 빙자해 金在烈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분주했던 일을 알지 못하였는가, 알았다면 그 사실의 상세.
四. 증인은 釜山에서 主一商會를 경영하며 상업을 경영하고 있는가, 위 회사는 누구누구와 경영하며, 그 출자금은 어느 정도이고, 어떠한 상업을 하고 있는가.
증인의 주소
釜山府 草梁.
李明濟
신문사항
一. 증인은 피고 李舜相을 아는가.
二. 증인은 魚類 도매업을 하고 있는가.
三. 大正 8년 2월 중 李舜相이 청어 매입을 위해 증인의 집에 와서 가격을 묻고 비싸다며 떠나버렸던 일이 있는가.
松岡武雄 발신 金裕經 앞으로의 엽서 1통 첨부하다.
별지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인
성명연령직업 
尹相泰38미곡상본적 慶尙北道 達城郡 月背面 上仁洞
주소 慶尙北道 達城郡 月背面 上仁洞
徐相日33미곡상본적 慶尙北道 大邱府 市場北通 11番地
주소 慶尙北道 大邱府 市場北通 11番地
李始榮  본적 慶尙北道 大邱府 堅町
朴永模32종이제조업본적 慶尙南道 陜川郡 陜川面 陜川洞
주소 慶尙南道 陜川郡 大陽面 陽山洞
洪宙一44고용인 天道敎區長본적 慶尙北道 大邱府 南山町 683番地
주소 慶尙北道 大邱府 南山町 683番地
徐丙龍35大邱銀行 副支配人본적 慶尙北道 達城郡 壽面 大明洞
주소 慶尙北道 大邱府 南山町 430番地
鄭舜永  본적 慶尙北道 星州郡 靑坡面 新坡洞
尹昌基31고용인본적 慶尙北道 大邱府 明治町 2丁目 140番地
주소 咸鏡南道 元山府 上里 1洞
李永局31大邱銀行員본적 慶尙北道 大邱府 橫町 71番地
주소 慶尙北道 大邱府 橫町 71番地
金圭  본적 忠淸南道 牙山郡 面里未詳
黃炳基  본적 全羅南道 南原郡, 또는 求禮郡 面里未詳
徐昌圭30농업본적 慶尙北道 大邱府 京町 2丁目 87番地
주소 慶尙北道 大邱府 京町 2丁目 87番地
金應燮42辯護士본적 慶尙北道 安東郡 豊北面 五美洞
주소 慶尙北道 大邱府 京町 2丁目
申相泰 곡물상본적 慶尙北道 漆谷郡 岩木面 ◉星洞
卞相泰  본적 慶尙南道 昌原郡 鎭海面 良村洞
南亨祐 白山商會본적 慶尙北道 高靈郡 읍내
주소 慶尙南道 釜山府
安廓  본적 慶尙南道 昌原郡 內西面 檜原里
李亨宰  본적 慶尙南道 馬山府
金璣成39곡물상본적 慶尙南道 馬山府 俵町 128番地
주소 慶尙南道 馬山府 石町 51
徐相懽33농업본적 慶尙南道 統營郡 統營面 大和町
주소 慶尙南道 統營郡 統營面 大和町
徐相灝32곡물상본적 慶尙南道 統營郡 統營面 明井洞
주소 慶尙南道 統營郡 統營面 明井洞
裵相淵30농업본적 慶尙北道 星卅郡 星卅面 京山洞 628番地
주소 慶尙北道 星卅郡 星卅面 京山洞 628番地
裵相濂27농업본적 慶尙北道 星州郡 星州面 京山洞 628番地
주소 慶尙北道 星州郡 星州面 京山洞 628番地
片東鉉33농업본적 慶尙北道 迎日郡 興南面 中城洞 56番地
주소 慶尙北道 大邱府 西千代田町 10番地
金在烈36농업본적 慶尙北道 高靈郡 高靈面 法洞
주소 慶尙北道 高靈郡 高靈面 法洞
裵重世  본적 慶尙南道 馬山府 石町
李舜相33운수업본적 慶尙南道 馬山府 俵町 11番地
주소 全羅北道 益山郡 益山面 裡里 榮町626
증인 尹炳浩 신문조서 증인 尹炳浩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制令 제7호 위반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의 촉탁으로 大正 8년 8월 4일 釜山地方法院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열석한 후, 판사는 前示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尹炳浩, 31세.
신분·직업은 白山貿易株式會社 지배인.
주소는 釜山府 瀛州洞大成旅館.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각 피고 등을 아는가.
(이때 촉탁서의 尹相泰 외 26명을 읽어 들려주다)

尹相泰大邱에서 1·2회 만났다. 徐相日은 얼굴만 안다. 朴永模京城에서 1·2회 만났다. 洪宙一은 얼굴만 안다. 徐丙龍大邱에서 상업상의 관계로 1·2회 만나보았다. 尹昌基도 같다. 南亨祐는 작년 여름 무렵부터 白山商會에 있었기 때문에 아는 사이이다. 安廓馬山 여인숙에서 2·3회 만났다. 金璣成은 상업상의 관계로 아는 사이이다. 徐相灝는 작년 중 그가 장사일로 釜山에 왔을 때 한번 만났다. 裵相濂京城에서 慶尙學友會의 친목회 때 만났다. 片東鉉白山商會와 상거래 관계가 있어 2·3회 만났다. 裵重世도 거래 관계상 아는 사이이다. 다른 피고들은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다.

증인은 釜山에서 白山商會를 조직하여 무역상을 경영하고 있는데, 위 상회는 언제 누구누구가 조직하고 각기 출자금은 어느 정도였는가, 위 상회는 그 후 주식 조직으로 변경했다고 하는데, 언제 변경을 했고 자본금은 어느 정도이며, 각 중역의 주소·성명 및 주식 인수인의 주소·성명 및 각 인수 주식, 현재의 불입 금액은 어느 정도인가.

大正 6년 1월, 나· 崔浚·安熙濟·尹顯泰·崔浣·金容祚·鄭舜模·成台永·李楨和·柳德燮·安湛·許杰 등 외 한 두 명의 사람이 자본금을 14만 원으로 하고 제1회 불입은 3만 5천 원으로 해서 경영하여 왔는데, 大正 8년 1월 14일자로 白山貿易株式會社 설립 허가를 얻어 금년 6월 10일 등기를 거쳐 조직을 변경하였다. 그런데 나는 합자회사를 설립한 지 얼마 안되어 가정 형편상 사직하고 大正 7년 4월 다시 입사하여 조직 변경 후 지배인이 되었다. 회사의 자본금·중역의 성명·인수인의 성명 등은 뒤에 서면으로 제출하겠다.

白山商會가 피고 南亨祐를 고용한 연월일·고용한 사정·그 보수 등은 어떠한가.

그는 원래 교사였는데 사업을 하고 싶은 희망에서 견습을 위해 고용해 달라는 것이었으므로 고용하였다. 처음에는 무보수였으나 작년 가을 쯤부터 3·40원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증인 등은 구한국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여 그 운동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의 수단으로 白山商會를 설립하였던 것이 아닌가, 증인 등은 중국 上海에서 조직한 조선 假政府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피고 南亨祐에게 다액의 자금을 교부하여 그를 上海가정부로 파견한 것 같은데, 어떠한가.

결코 그러한 일은 없었다. 南亨祐는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며 떠나버렸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증인 등은 국권 회복을 희망하여 기도한 南亨祐로부터 그 운동자금을 강요당하여 다액의 자금을 공급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그가 떠나버린 후 문서의 왕복조차 없었다.

南亨祐는 大正 8년 4월 초순경 釜山을 출발하여 上海가정부로 가 司法部總長이 되었다는데, 그로부터 소식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내력의 상세.

그는 떠나버린 후 하등의 소식이 없으며, 물어보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南亨祐 및 증인 등은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과 교제·왕래하며 국권회복에 관한 모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떠한가.

그러한 일은 결코 없었다.

尹賢鎭은 다액의 운동자금을 가정부에 출자하여 그 정부의 大藏卿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어떠한가.

尹賢鎭, 즉 尹顯振은 아는 사이이나 물어보는 것 같은 사실은 모른다.

張德秀란 자를 아는가. 그도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증인은 그들에게 다액의 운동자금을 주어 日本 및 上海에 왕복시켜 동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張德秀는 나와 같이 早稻田大學 출신인데, 나보다 3·4년 후에 졸업한 사람으로, 在京 중 아는 사이였으나, 이미 4·5년 동안 소식이 없다.
(증인은 퇴정하더니 잠시 후 前述한 조사를 하였다고 하며 서류를 제출하였으므로 본 조서 말미에 編綴하다) 위 錄取한 바를 읽어 들려주었던 바, 틀림없다는 뜻을 승인하고 서명하다.
증인 尹炳浩
大正 8년 8월 4일
釜山地方法院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선서서
양심에 좇아 진실을 말하고
아무 것도 묵비하지 않으며
또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함
증인 尹炳浩
屆出
지시에 의하여 左記와 같이 계출하는 바임.
左記
一. 崔浚은 본사 取締役 사장이나 현재 자기의 본적지인 慶州郡 慶州面 校里 69番地에 있음.
一. 尹賢鎭은 원래 알지 못하는 자임.
一. 尹顯振梁山郡 사람으로, 전 白山商會 및 주식회사의 조직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다만 상업상의 거래에 의해 아는 것 뿐으로, 현주소는 알지 못하는 바임.
大正 8년 8월 5일
釜山府 本町 3丁目
白山貿易株式會社 지배인 尹炳浩
釜山地方法院 귀중
白山貿易株式會社 株金 및 중역 성명
一. 자본금 100만 원정
一. 제1회 불입금 25만 원정
一. 중역의 주소·성명
직함성명주소
취체역사장崔浚慶州郡 慶州面 校里 69番地
전무취체역尹顯泰梁山郡 梁山面 北部洞 358番地
취체역安熙濟釜山府 草梁洞 659番地
취체역李鍾和蔚山郡 下廂面 東里 729番地
취체역趙東玉咸安郡 咸安面 鳳城里 804番地
취체역許杰東萊郡 龜浦面 華明里 1134番地
취체역李愚奭善山郡 善山面 莞田洞 134番地
취체역尹炳浩南海郡 雪川面 文義里 86番地
취체역鄭載謜河東郡 金陽面 大峙里 658番地
감사역尹相殷釜山府 瀛州洞 26의 1番地
감사역文永贇河東郡 北川面 稷田里 1191番地
감사역金翔源河東郡 河東面 邑內里 847番地
白山貿易株式會社 주주 명부록
성명주수(주)주소
崔浚2,000慶北 慶州郡 慶州面 校里 69
安熙濟2,000釜山府 草梁洞 659
尹顯泰2,000慶南 梁山郡 梁山面 北部洞 358
李鍾和1,500慶南 蔚山郡 下廂面 東里 729
尹相泰1,000慶北 達城郡 月背面 上仁里 909
安翔相1,000慶南 宜寧郡 富林面 立山里 37
崔璇鎬1,000慶南 山淸郡 丹城面 南沙里 38
趙東玉1,000慶南 咸安郡 咸安面 鳳城里 804
詳杰700慶南 東萊郡 龜浦面 華明里 1134
金洪錫700慶南 宜寧郡 宜寧面 西洞 349
李愚奭700慶北 善山郡 善山面 莞田洞 134
李祐植600慶南 宜寧郡 宜寧面 東洞 1053
尹炳浩500慶南 南海郡 雪川面 文義里 86
金容祚500慶南 東萊郡 東萊面 院里 923
鄭在涴500慶南 河東郡 金陽面 大峙里 658
金翔源500慶南 河東郡 河東面 邑內里 847
權五鳳500慶南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554
金在泌500慶南 東萊郡 鐵馬面 梅谷里 25
金琪邰500慶南 晋州郡 奈洞面 篤山里 598
李鉉輔500慶南 居昌郡 居昌面 下洞 172
文永贇500慶南 河東郡 北川面 稷田里 1191
朱其洹500慶南 昌原郡 熊面 西北部里 511
南亨祐300京城府 嘉會洞 125
姜正熙100慶南 宜寧郡 宜寧面 茂田里 927
鄭載謜100忠南 天安郡 天安面 邑內里 100
許萬正100慶南 晋州郡 智水面 勝內里 355
尹相殷50釜山府 瀛州洞 26의 1
金時龜50釜山府 埋立新町 33
池榮璡50釜山府 本町 4丁目一光商會
崔泰旭30釜山府 本町 4丁目 11
洪鍾熙10咸南 文川郡 郡內面 玉坪里 58
金錫準10慶南 梁山郡 梁山面 中部洞 289
증인 松岡武雄 신문조서 증인 松岡武雄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制令 제7호 위반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의 촉탁으로 大正 8년 8월 4일 釜山地方法院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열석한 후, 판사는 前示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松岡武雄.
신분·직업은 평민, 釜山府 吏員.
주소는 釜山府 草梁洞 2丁目.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慶尙北道 淸道郡 大城面 松邑洞金裕經·金裕德, 피고 金在烈을 아는가.

금년 ( 釜山府) 고용인 李春白의 소개로 金裕經釜山에서 무역상을 경영하고자 하니 전화를 주선해 달라고 하여 처음으로 그를 만나 아는 사이가 되었다. 金裕德·金在烈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 엽서는 증인이 金裕經에게 보낸 것인가.
(이때 領 제335호의 證 제159를 보이다)

그렇다.

위 엽서 가운데「사업 경영에 관한 일인데 하루라도 빠른 것이 득책 운운」이라 하였는데 金裕經은 언제 쯤 어떠한 사업을 계획한 것이있는가.

금년 4월경 金裕經이 무역상을 하기 위해 일본인 아무개의 주선으로 本町 4丁目 소재의 가옥을 일금 8천 원에 사고자 함에 있어 8천 원을 묶어두는 것은 억울하니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증인에게 상의하였으므로, 다행히 釜山府 埋立新町에 신축 가옥이 있으니 그것을 빈다면 8천 원의 금리로 넉넉히 집세를 지불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던 바, 그는 그렇게 해달라고 하므로 집주인인 長野材木店에 가 집세 등을 문의코자 하였으나 주인이 부재 중이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언제 누가 빌지도 예측하기 어렵고 또한 주선한 전화도 그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빨리 집을 빌든가 사들이든가 결정하여 조속히 사업에 착수하면 좋을 것이라는 뜻으로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金裕經金裕德과 공동으로 釜山에서 미곡상을 경영하기 위해 大正 8년 1월경 그곳에 가 2·3개월간 가옥 매입 등에 분주하였으며, 증인의 주선으로 釜山府安東病院으로부터 대금 630원에 전화를 매입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

그렇다. 金裕經은 형인가 종형인가와 함께 이곳으로 와 미곡·해산물 무역을 경영한다고 하면서 가옥 매입에 분주하였으며, 증인의 주선으로 栗林新吉로부터 대금 630원에 매입했는데, 명의 변경 때 安東病院의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실제 무역상을 하는 것 같이 보였는가.

李春白으로부터 金裕經淸道에서 5만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었으나, 釜山에 형인가 종형인가와 함께 왔을 때에는 한 사람은 미곡상을 하자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요리점업을 하자고 하여 이야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며, 또 일본인에게서 가옥을 사들이는 데 있어서도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았고, 또 내가 발신하여도 답신이 없었던 등으로 인해 당초에는 진실로 미곡상을 경영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중도에서 좀 의심을 했던 것이다.

金裕德·金裕經은 피고 金在烈 등이 기도한 구한국의 國權恢復團에 가맹하여 大正 8년 봄 쯤 釜山에서 그 운동자금 조달 등에 金在烈과 함께 분주하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는가.

거기까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위 錄取한 바를 읽어 들려주었던 바, 틀림없다는 뜻을 승인하고 서명·날인하다. 증인 松岡武雄
大正 8년 8월 4일
釜山地方法院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증인 安熙濟 신문조서
증인 安熙濟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4일 釜山地方法院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열석한 후, 판사는 前示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安熙濟, 34세.
신분·직업은 곡물상.
주소는 釜山府 草梁洞 659番地.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각 피고 등을 아는가.
(이때 尹相泰 외 26명의 성명을 읽어 들려주다)

尹相泰白山貿易株式會社를 창립하기 위한 발기인 모집 때 아는 사이가 되었다. 徐相日은 내가 京城에 유학하던 중 아는 사이가 되었다. 朴永模도 같다. 洪宙一徐相日의 집에 있었으므로 4·5년 전부터 아는 사이이다. 徐丙龍은 은행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2·3년 전부터 거래를 위해 은행에 출입하다 아는 사이가 되었다. 南亨祐는 8년 전 유학했을 때의 선생이었기 때문에 아는 사이이다. 金璣成은 4·5년 전부터 곡물 거래를 하였기 때문에 아는 사이가 되었다. 徐相灝는 3·4년 전부터 곡물 거래를 하였기 때문에 아는 사이가 되었다. 片東鉉과는 작년에 곡물 거래를 하였기 때문에 아는 사이가 되었다. 다른 피고들은 모두 모른다.

증인은 白山商會를 조직하여 무역상을 경영하고 있다 하는데, 위 상회는 언제 누구와 조직하였으며, 그 출자금은 어느 정도인가. 그 후 주식 조직으로 변경한 것 같은데, 그 자본금·주식 인수수·현재 불입 금액은 어느 정도인지 상세히 진술하라.

맨 처음 나는 혼자서 白山商會를 조직하였는데, 그 후 崔浚·尹顯泰·崔浣·金容祚·鄭舜模·成台永·李楨和·柳德燮·安湛·許杰 등과 내가 자본금을 14만 원으로 하여 합자회사로 고치고 3만 5천 원을 불입하여 경영해오다가, 금년 2월 14일 주식회사 설립 허가를 받아 조직을 변경하였다. 자본금은 100만 원, 重役은 鄭載謜·趙東玉·李鍾和·崔浚·李愚奭·尹顯泰·尹炳浩·許杰과 나 9명이며, 주식 인수인의 주소·성명·그 株數 등은 기억하지 못한다.

白山商會南亨祐를 고용하였는데 그 연월일·그 사정·보수 등은 어떠한가.

작년 봄, 그가 상업 견습을 위해 고용해 달라고 하여 고용해 보수 3·40원을 지급하고 있었으나 금년 3월에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이후(로는) 소식이 없다.

증인은 구한국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고 있어 운동자금의 조달과 동지 규합의 수단으로 白山商會를 경영하고 있는 자가 아닌가. 증인은 중국 上海에서 동지가 조직한 조선 假政府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피고 南亨祐에게 다액의 자본을 교부하여 그를 上海假政府로 파견한 것 같은 데, 어떠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증인은 국권 회복을 기도하는 南亨祐로부터 그 운동 자금을 강요당해 다액의 자금을 공급했던 것이 아닌가.

南亨祐에게는 보수 외에 돈을 교부한 일이 없다.

南亨祐는 大正 8년 4월 초순경 釜山을 출발하여 上海假政府로 가 司法部長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소식이 있었는가, 있다면 그 내용의 상세.

그는 白山商會를 그만두고 떠난 후 서신이 끊겼으므로 그러한 것은 알지 못한다.

南亨祐 및 증인은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과 교제·왕래하며 국권 회복에 대한 모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떠한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尹顯鎭은 다액의 운동 자금을 上海假政府에 출자하여 그 정부의 大藏卿이 된 것 같은데, 어떠한가.

尹賢鎭은 모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문하는 것 같은 사실도 모른다.

張德秀란 자를 아는가. 그도 국권 회복을 기도하고 있는 자로서, 증인은 그에게도 다액의 운동 자금을 급여하여 日本 및 上海를 왕복시키며 동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張德秀는 모른다. 신문하는 (것과 같은) 사실은 전혀 없었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大正 8년 8월 5일
釜山地方法院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증인 李明濟 신문조서
증인 李明濟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의 촉탁으로 大正 8년 8월 5일 釜山地方法院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열석한 후, 판사는 前示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李明濟, 47세.
신분·직업은 위탁 판매업.
주소는 釜山府 草梁洞 429番地.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피고 李舜相을 아는가.

모르는 사람이다.

증인은 魚類 도매상을 하고 있는가.

어류에 한하지 않고 어떤 물건이라도 위탁 판매를 하고 있다.

大正 8년 2월중 李舜相이 靑魚 매입을 위해 증인의 집에 와서 가격을 묻고 비싸다고 하며 떠나버렸던 일이 있는가.

평소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므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大正 8년 8월 5일
釜山地方法院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증인 孫永洵 신문조서
증인 孫永洵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의 촉탁으로 大正 8년 8월 5일 釜山地方法院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열석한 후, 판사는 前示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孫永洵, 31세.
신분·직업은 곡물상.
주소는 釜山府 大倉洞 8番地의 5호.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慶尙北道 淸道郡 大城面 松邑洞金裕經·金裕德 및 피고 金在烈을 아는가.

모두 아는 사이이다.

증인은 金在烈金裕德으로부터 누룩제조회사의 주식인수를 의뢰받았던 일이 있는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 의뢰를 받았고 그 모집 결과는 어떠했는가.

금년 5월경 大邱 南門 밖 金德順의 집에서 金在烈을 만났을 때 누룩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하고자 하니 발기인을 모집해 달라고 하며 설계서·취지서를 제시하였는데 나도 찬성은 하지만 재산상의 능력은 없다고 하고 헤어진 일이 있다.

金裕經·金裕德金在烈 등이 기도한 구한국의 國權恢復團에 가맹하여 주식 인수 또는 상업 자금을 빙자하여 金在烈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분주했던 것을 아는가, 안다면 그 사실을 상세히 진술하라.

그러한 일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증인은 釜山에서 主一商會를 경영하며 상업을 영위하고 있는가, 위 상회는 누구누구와 경영하며, 각기 출자금은 어느 정도로서 어떠한 상업을 하고 있는가.

大正 7년 5월에 발기하고 금년 7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여 주로 무역을 하고 있다. 그 출자자·출자금은 여기에 기재되어 있으니 양지하기 바란다.
(이때 증인은 성명·출자 금액 등에 관한 조사서를 제출하였으므로 본 조서 말미에 編綴하다) 위 錄取한 바를 읽어 들려주었던 바, 틀림없다는 뜻을 승인하고 서명하다.
증인 孫永洵
大正 8년 8월 5일
釜山地方法院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藤木永吉
主一商會 출자(자) 성명
(단위: 원)(단위: 원)
崔演武主務5,000鄭在涴 1,250
孫永洵5,000朴熙淳 2,500
姜周秀 1,500金弘祚 250
孫載憲 2,500姜基焄 500
姜仁善 2,500朱寧南 250
金性洙 1,250金仲見 1,250
金鍾震 2,500李鍾海 1,250
孫永稷 1,250李鍾兌 500
孫海憲 250崔益浚 625
李泰浹 1,250朱寧南 1,000
鄭載謜 1,250金相範 1,250
許萬正 1,250金慶漢 250
韓翼東 250金裕經 2,500
朴在夏 250千錫敏 125
金永熺 125趙東玉 250
어음 지불조金錫準 2,500
趙東鉉 500孫振模 1,250
金琪淵 5,000朴海暾 1,250
崔泰旭 1,250金裕鉉 2,500
崔泰錫 1,250崔浚 1,250
孫振熙 1,250신입 미불조
金時龜 2,500南吉斗 500
孫振瑞 1,250孫秀文 625
尹炳浩 250합계 63,000
증인 尹顯泰 신문조서 증인 尹顯泰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制令 제7호 위반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의 촉탁으로 大正 8년 8월 12일 釜山地方法院 豫審廷에서
豫審掛 代理 朝鮮總督府 판사 渡邊純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열석한 후, 판사는 입회 서기의 통역에 의해 前示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尹顯泰, 31세.
신분·직업은 회사원.
주소는 釜山府 草梁洞 337番地.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본건 27명의 피고 중 증인이 알고 있는 자가 있는가.
(이때 尹相泰 외 26명 피고의 성명을 읽어 들려주다)

尹相泰는 7년 전에 회사 창립에 관한 일로 한 번 만난 일이 있을 뿐이다. 徐相日은 4·5년 전부터 상거래 관계로 알았으며, 李始榮도 같다. 洪宙一徐相日의 서기인 관계로 알았으며, 徐丙龍大邱銀行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거래상 알았다. 南亨祐는 2·3년 전부터 白山商會의 사무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았으며, 安廓은 잡지 경영에 관한 일로 2·3년 전에 두 번 정도 상의하러 온 일이 있어 알았다[잡지는「實業雜誌」라고 하는 것이었으나 성사되지 않고 끝났다]. 李亨宰·金璣成은 3·4년 전부터 상거래 관계로 알았으며, 徐相灝·片東鉉도 같다. 그 밖의 피고는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다.

증인은 釜山에서 白山商會를 조직하여 무역상을 경영하고 있었는가.

그렇다.

위 상회는 처음에 누구와 조직하였으며, 그 출자금은 어느 정도 되는가. 위 상회는 그 후 주식 조직으로 변경되었다는데, 언제 변경하였으며, 자본금은 어느 정도이고, 각 임원의 주소·성명, 주식 인수인의 주소·성명 및 각 인수 株數, 현재 불입 금액이 어떠한지를 아는가.

알고 있다.

위 사실은 이 서면의 기재 사항과 차이가 있는가.
(이때 尹炳浩가 제출한 「屆」라는 제목의 서면을 보이다)

주식회사로 조직이 변경된 이후는 그와 같은데, 당초 白山商會安熙濟 혼자 설립한 것이었으나, 2년 쯤 전 나·安熙濟·崔浚·崔浣·金容祚·鄭舜模·成台永·李楨和·柳德燮·安湛·許杰이 자본금을 합계 14만 원으로 하여 합자회사로 고치고 경영해 왔으며, 금년 2월 14일 제시한 서면대로의 주식회사로 하였던 것이다. 위 합자회사의 출자금은 각자 달라 나는 7천 75원을 출자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白山商會南亨祐를 고용한 연월일, 그 사정, 보수는 어떠했는가.

작년 가을 쯤 고용했는데, 당시 주식 조직으로 변경하기 위해 사무원이 필요하였으므로 전부터 나는 그와 면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고용하였다. 그 후 금년 2월경에 이르러 잠시 京城의 본집에 돌아간다고 하며 떠나버린 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보수는 개근하면 한 달에 40원 정도 주기로 하고 있었다.

증인은 구한국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그 운동 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 수단으로 白山商會를 경영하였으며, 또한 중국 上海에서 동지가 조직한 조선 假政府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南亨祐에게 다액의 자금을 교부하여 그를 上海假政府로 파견하였다고 하는데, 어떠한가.

결코 그러한 일은 없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증인은 국권 회복을 기도하는 南亨祐에게 강요당해 위 운동자금으로 다액의 돈을 공급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사실도 없다.

南亨祐는 大正 8년 4월 초순경 釜山을 출발하여 上海假政府로 가서 司法部總長이 된 것 같은데, 그로부터 통지가 있었는가.

아무런 통지도 없기 때문에 그의 소식은 모른다.

南亨祐 및 증인 등은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과 교제·왕래하며 국권 회복에 관한 모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尹賢鎭은 다액의 운동자금을 上海假政府에 출자하여 그 정부의 大藏卿이 되었다는데, 어떠한가.

尹賢鎭은 알지 못하나, 나의 아우에 梁山 읍내에 살던 尹顯振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馬山에서 만세를 불렀기때문에 당국의 검거를 두려워하여 행방불명이 되어 있으나, 신문한 것 같은 사실은 모른다.

증인은 張德秀란 자를 아는가.

모른다.

그도 국권 회복을 기도하고 있는 자로서, 증인 등은 그에게도 다액의 운동자금을 주어 日本 및 上海 사이를 왕복시키며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사실은 없었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大正 8년 8월 12일
釜山地方法院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高木信
豫審掛 代理 朝鮮總督府 판사 渡邊純
―○―
大邱地方法院 豫發 제133호
촉탁서
별지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예심 처분상 필요하오니 在記의 자들 집에 가서 가택을 수색하여 각 피고들 사이의 왕복 문서 기타 左記 기재의 범죄 사실과 관계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압수한 후 송부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피고 등은 상업 자금을 빙자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던 것 같으므로 상업 자금 재촉에 관한 서류가 있으면 이것 역시 압수하기 바랍니다.
大正 8년 8월 1일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
大邱地方法院 慶州支廳
豫審判事 귀하
左記
범죄 사실
피고 尹相泰는 정치에 관한 비밀결사인 達城親睦會講遊園의 회원인 피고 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 등과 大正 2년 음력 1월 15일 達城郡 壽城面 大明洞安逸庵에서 국권 회복에 관한 모의를 거듭하여 각자 그 모의를 실현시킬 것을 맹세하고 서약서를 작성하였으며, 다시 피고 李永局·金圭·黃炳基를 가맹시켜 中央總部를 大邱府 內에 두고 이상의 피고 등은 본부 위원이 되었으며 尹相泰를 中央總部의 統領으로 추대하고, 외교부장을 徐相日, 교통부장을 李始榮·朴永模, 機密部長에 洪宙一, 문서부장에 李永局·徐丙龍, 勸誘部長에 金圭, 遊說部長에 鄭舜永, 決死隊長을 黃炳基로 하여 각기 담당한 사항에 의해 동지를 규합하고 비밀히 국권 회복 운동을 하고 있던 중, 前示 達城親睦會·講遊園은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 하여 당국으로부터 해산을 명령받았을 뿐 아니라, 동지 중의 과격파인 朴尙鎭·金在烈·鄭雲絅 등이 大正 5년 중 强盜傷人·銃砲火藥類取締令施行規則 위반죄에 의해 大邱地方法院 검사국에 검거되었으며, 이어 위 朴尙鎭·權國弼 등이 大正 6년 중 公州地方法院 검사국에 강도 살인·보안법 위반 등으로 검거되어 피고 등의 운동도 좌절을 초래하였을 무렵, 大正 8년3월에 이르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前示 피고 등은 궐기하여 그 원래의 뜻을 관철코자 達城親睦會 회원이었던 피고 徐昌圭 및 피고 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등을 권유한 후 앞서 게재한 국권 회복의 비밀 단체에 가입시킴과 동시에 협의 끝에, 上海에 설립한 조선 假政府와 연락을 취함과 동시에 회원 또는 자산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징수하여 그 수행을 도모함이 옳다 하여, 大邱 中央總部에서의 활동 이외에 경상남도 馬山府에 지부를 두어 피고 安廓을 지부장, 피고 李亨宰·金璣成을 위 지부의 役員으로 하여 위 지방에서 운동을 개시케 하였으며, 피고 金在烈·徐相日은 오로지 위 운동자금의 조달에 종사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고 金在烈은 그달 중 大邱府 내에서 전에 같이 達城親睦會 회원이었던 金裕經으로부터 상업 자금을 빙자하여 운동 자금 1만 원을 지출토록 하려하였으며, 피고 徐相日은 자기 집에서 그달 중 피고 徐相灝에게 일금 2만 원을 지불하겠다는 취지의 증서, 피고 裵相淵으로부터 금액 5천 원의 약속어음 2매, 같은 해 4월 8일부터 같은 달 17일 사이에 피고 片東鉉으로부터 현금 또는 換으로써 합계 1만 5천 6백 원을 운동 자금으로 교부받았고, 그 달 중 大邱府 京町 2丁目 피고 徐相圭의 집에서 그로부터 예약된 운동비 1만 원의 내입금으로 일금 1천 원을 받았으며, 또한 그 달 중 大邱府 西千代田町鄭龍基의 집으로 가 운동 자금으로 응분의 출자를 할 것을 비밀히 권유하였고, 피고 金應燮·南亨祐는 조달한 다액의 돈을 휴대하고 上海로 가 그곳에 설치된 조선 假政府의 役員이 되었으며, 앞서 郭鍾錫 등이 작성·송부한 조선독립청원서프랑스 파리에서 개최 중인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조선 안에 다수 인쇄·배포함으로써 안녕 질서를 해쳤으며, 그리고 이에 앞서 申相泰·卞相泰大邱 總部의 命에 의해 경상남도 지방으로 가서 독립운동 거행을 선동하였고, 피고 卞相泰는 鎭東里에서 權寧大 외 1천 4·5백 명의 사람을 선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鎭東 憲兵駐在所를 습격하여 그곳 주재 憲兵伍長 川上淸太郞 외 수 명에게 상해를 가하여 소요를 일으킨 자이다.
수색할 장소
慶州郡 읍내 校里崔浚의 집.
8월 9일 전화 청취서
慶州法院支廳 판사 앞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이달 1일 및 4일자 귀청의 예심판사 앞으로 촉탁한 증인 신문 및 가택 수색은 귀청 판사 앞으로 정정하며, 급속히 처리해 주기 바랍니다.
전화 청취자
수색조서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으로 大正 8년 8월 10일 大邱地方法院 慶州支廳朝鮮總督府 판사 李熙迪,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岡安雄 입회한 후, 피고사건에 관하여 수색 처분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임검장소
입회인
수색장소 또는 물건
수색결과
수색시간
慶尙北道 慶州郡 慶州面 校里崔浚의 집
崔浚, 朝鮮總督府 순사 西本國吏, 순사 孫振權
사랑 3동 및 각 그 미닫이, 사무실 1간
별지 물건 차압 조서에 기재한 물건을 얻음
착수 大正 8년 8월10일 오전 9시 분
종료 大正8년8월10일 오전 10시30분
위 처분을 끝내고 즉시 그곳에서 이 조서를 작성하였으므로 廳印을 찍을 수 없음. 본건 수사에 필요한 통역은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 陳在成의 통역을 통하다.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岡安雄
朝鮮總督府 판사 李熙迪
물건 차압 조서
尹相泰 외 26명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左記 목록의 물건을 차압함.
大正 8년 8월 10일
大邱地方法院 慶州支廳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岡安雄
朝鮮總督府 판사 李熙迪
출장지인 까닭으로 廳印을 찍을 수 없음.
물건번호품목진출인 주소·성명소유자 주소·성명비고
1.
2.
3.
편지
편지
약속어음
1통
1통
1매
慶州郡 慶州面 校里崔浚
慶州郡 慶州面 校里崔浚
慶州郡 慶州面 校里崔浚
이상
慶州郡 慶州面 校里崔浚
慶州郡 慶州面 校里崔浚
慶州郡 慶州面 校里崔浚
 
진정서
大邱監獄 재감인
裵相濂
본 피고는 21세에 倭館精米所를 착수하여 큰 손해를 보고 마음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굶주린 호랑이가 숯을 삼키듯 유리한 소리를 들으면 불원천리하고 왔다갔다 하다가 末境에 鑛業에 착수할 때에 成則爲高요 敗則爲貧이라 양단으로 이를 생각하고 착수하였더니 하늘이 惠顧치 않았음인지 이것 역시 실패로 돌아가니, 오호라, 이는 곧 나이 미천한 자의 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만 소치로다. 한번 파산하고 난 후로 東西의 負債와 아내의 원망, 자식의 울부짖음에 그 마음이 끓어지려 하고, 四隣이 모두 不讃하고 사회가 모두 핍박하므로 혹은 도망치거나 혹은 숨어다니며 머리를 들어 행동치 못하고 그 어찌 할 바를 몰라 죽으려 하였으나 곳이 없더니, 大正 6년 봄에 다행히 큰형 裵相洛이 나의 정상을 보고 가련타 하여 나에게 몇 십 두락의 토지를 주어 保家케 하고, 또한 지금으로부터 이후는 장사는 하지 말고 반드시 집에 있으면서 일을 보살피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그 해 봄 사망시에 유언하여 가르치기를 宗家를 보전하고 가족이 화락하도록 하라 하니, 이에 느끼고 또 느껴 내 형의 敎言을 지킴이 형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내 일생의 큰 목적은 富를 이루고 집을 보전함에 있으므로 결심하여 이 확정된 立志에 전심으로 가사를 돌보고 주위 생활의 苦境과 분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문불출하였는데, 오늘의 구속은 천만뜻밖의 사실이요, 실로 양심상 범죄의 의사도 없었나이다. 실로 오늘의 구속은 원통함이 천추의 恨이옵니다. 판사는 이를 明察해 주시기 엎드려 바라옵니다. 일정한 立志 밑에 평생의 일을 정하고 그 입지대로 진행 중에 하루라도 목적 진행상 장애는 곧 나의 원수이거늘, 또 하물며 본심에도 없는 일로써 구속하니 실로 억울합니다. 이 마음은 富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 이외에는 없고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하더라도 목적 이외의 일은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진심을 할복하여 이를 보이도록 할 수 있으면 하겠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며, 다만 조리없는 글자로 진술합니다. 관청에서 이와 같이 믿지 않으니 장래의 나의 입지를 어떻게 성취할까 탄식할 뿐입니다. 판사는 깊이 생각하시어 明察해 주시기 엎드려 바랄 뿐입니다.
가령 판사의 일생의 큰 목적은 법률로써 입지한다 가정하고, 그 입지대로 진행하던 중 중도에서 富를 목적으로 하여 사람을 속였다고 구속을 받았다면 그때 양심에도 실로 없었던 판사의 마음은 어떠하겠읍니까.
천하는 달라도 人心은 일반이 아니옵니까. 본 피고의 본 마음이 위와 같음을 진정하는 바입니다.
大正 8년 8월 15일
위 피고인 裵相濂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귀하
―○―
진술서
본적지 善山郡 龜尾面 元坪洞.
현주소 大邱府 감옥 재감.
피고인 金漢洙
20세
진정사실
위 진술한 것은, 본인의 부친 金鍾鍊大邱府 大和町에서 여관업을 하는데, 본인은 본집에서 왕래하며 일을 돕던 중 금년4월[날짜 미상]부터 在監 피고인 朴在華·陳瑢燮 등이 무슨일로인지 본인 집에 주인을 정하여 내왕하며 숙박한 지 2개월이나 되었는데, 그 동안 善山郡 海平 등지에 사는 李弘模란 자와 무슨 영업에 종사한다며 大邱 京町에 사는 金裕鉉에게 자기 토지를 잡혀 금전 대출 운운하며 차일피일하고 숙박한 음식 대금이 100여 원에 달했으나 피고 등은 본인과 같은 고향 사람인 까닭에 인정상 독촉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숙박하던 중 금년 6월 10일[날짜 미상]에는 어디로 갔는지 사방에 탐문하여도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사세가 부득이하기 때문에 피고인 본적지에 물어보려고 할 때에 陳瑢燮이 먼저 오고 朴在華는 금년 6월 16·7일 양일에 피고인 韓東洙와 함께 와서 말하기를, 2·3일 본적지에 긴급한 일이 있어 일언반구없이 수일을 경과하였으니 대단히 失信하였으나 이번에는 보급하기로 하겠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본인이 韓東洙는 어떠한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자기와 동업하기 위하여 大邱府 京町에 거주하는 金裕鉉에게서 돈을 차용할 것이라고 운운하기에, 하여간 모르겠으니 음식 대금이나 지불하라고 하였던 바, 금년 6월 19일에 朴在華·韓東洙 등이 본인 집에 와서 객지에 의복이 불결하니 자네가 양복점에 동행하여 양복 2벌만 주문해 달라기에 그러라고 하고, 大邱 山中 양복점에서 피고인의 양복을 주문한 후 본인도 피고인 등과 동시에 매입하면 염가이기 때문에 양복 1벌을 지어 정가 30원에 예치하고 본인은 귀가하였으며, 피고인 등은 吉田旅館으로 가서 숙박하였다. 그 후 금년 6월 20일에 본인이 朴在華에게 간 즉 오늘은 보급할 터이니 金裕鉉의 집에 동행하자고 하기에 부득이 동행하였던 바, 피고인 朴根洙·韓東洙·陳瑢燮 등이 둘러 앉아 있었는데 본인은 필요가 없으므로 가게 앞에 나와 있었던 바, 잠시 후 피고인이 나오기에 朴在華에게 빚을 지불하라 한 즉 지금 돈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 山中 양복점에 동행하자고 하므로 동행하여 전날 주문했던 것을 찾았고 빚 중 50원을 본인에게 지불하므로 양복에 30원을 지불하고 돌아오는 길에 잡화점에 가서 내의를 10여 원에 매입하고 본인은 귀가하였다. 피고인 등은 그 후에는 어찌 된 일인지 전혀 알 수 없더니 금년 6월 20일 오후에 朴在華가 본인의 집으로 와서 오늘 達城公園 안에서 金裕鉉韓東洙·陳瑢燮·朴根洙등이 모여 酒席 중이니 자네도 또한 동행하자 하므로 참석하여 종일 놀았다. (그런데) 피고인 등이 어찌된 일인지 大邱警察署에 포박되어 피고인 등을 신문한 결과 본인도 金裕鉉·韓東洙 등이 韓根洙의 재산을 편취하기 위해 공모한 것을 안다 하여 형벌이 중대하므로 공모하였다고 했으나, 확실한 내용은 모르고 朴在華에게 음식 대금 50원을 수취한 것이오니, 죄의 有無를 明察하여 주시기 伏望하오며 확실히 피고인 등의 사실은 전부 알지 못하므로 위와 같이 본인의 실지 정상을 진술하는 바입니다.
大正 8년 8월 15일
金漢洙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귀하
―○―
朝鮮銀行 大邱支店 關係書類
朝鮮銀行 大邱支店
尾家仁六 귀하
拜啓, 의뢰에 의해 별지와 같이 각기 작성하여 이에 31매 封入하여 보냅니다. 그런데 매우 제멋대로이긴 하나 이곳에는 이 작성서의 부본이 없으므로 서류는 반려하여 주기 아무쪼록 부탁하는 바입니다.
「반환 不要」
차압 물건 목록
별지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증거 물건으로 左記의 물건을 차압함.
大正 8년 8월 18일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佐佐木澄
번호품목수량발송인 성명소유자 성명비고
233尹相泰 의뢰분 할인어음 원장 사본1매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34尹相泰 당좌예금장 사본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35徐相日의 송금환 명세표 사본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36徐相日의 당좌예금장 사본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37徐相日의 당좌예금장 사본 (大正 7년 12월 17일부터 다음 해 6월 15일까지)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38徐相日 화물환 어음원장 사본 上半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39徐相日 화물환 어음원장 사본 下半 일부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40徐相日 할인어음 원장(의뢰분)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41徐相日 할인어음 원장(의뢰분) 下半 일부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42徐相日의 주문선 전신환 기입장 사본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243徐相日의 정기 대부장 사본1통大邱府朝鮮銀行 大邱支店 반환 不要
―○―
大邱銀行 關係書類
서류제출서
當行에 비치되어 있는 左記 簿冊의 사본을 요구에 의해 제출함(단, 반환 不要).
大正 8년 8월 18일
大邱府大邱銀行
지배인 古藤常麿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판사 尾家仁六 귀하
左記
(尹相泰·徐相日에 관한 것)
一. 당좌예금 원장 兩名分 2통
二. 當行 할인어음 원장
(의뢰 및 이서) 1통
(지불 및 振出) 2통
三. 他行 할인어음 원장 1통
四. 하물환 어음 원장·취조 송금 2통
五. 대부금 원장 1통
차압 물건 목록
별지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증거 물건으로 左記의 물건을 차압함.
大正 8년 8월 18일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佐佐木澄
번호품목수량발송인 성명소유자 성명비고
244徐相日 하물환 어음 원장 사본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45徐相日 대부금 원장 사본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46徐相日 당좌예금 원장 사본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47徐相日 他行 할인어음 원장 사본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48徐相日 當行 할인어음 원장 사본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49徐相日 當行 할인어음 원장 사본(의뢰분)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50徐相日尹相泰 취조 송금 환어음 기입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52尹相泰의 당좌예금 원장 사본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53尹相泰의 당행 할인어음 원장 사본(의뢰분)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254尹相泰의 당행 할인어음 원장 사본(振出分)1통大邱府大邱銀行 반환 不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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殖産銀行 大邱支店 關係書類
서류제출서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피고사건에 관하여 左記 서류를 요구에 의해 제출합니다(반환 不要).
大正 8년 8월 18일
大邱府
殖産銀行 大邱支店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귀중
左記
一. 당좌예금 사본 徐相日·尹相泰分 2
二. 어음 대부 원장 사본 兩名分 2
三. 연부 대부 尹相泰分 1
四. 송금환 어음 기입 徐相日分 1
五. 하물환 어음 徐相日分 1
六. 할인 어음 徐相日分 1
七. 他行 할인 어음 徐相日分 1
八. 증서 대부 徐相日分 1
차압 물건 목록
벌지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증거 물건으로 左記의 물건을 차압함.
大正 8년 8월 18일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佐佐木澄
번호품목수량발송인 성명소유자 성명비고
254徐相日의 당좌예금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55徐相日의 어음 대부 원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56徐相日의 송금환 어음 기입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57徐相日의 하물환어음 원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58徐相日의 할인어음 원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59徐相日의 他行 할인어음 원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60徐相日의 할인어음 원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61증서 대부 원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62尹相泰의 당좌예금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67尹相泰의 연부대부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68尹相泰의 어음 대부 원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269尹相泰의 하물환어음 원장 사본1통大邱府殖産銀行 大邱支店 반송 不要
―○―
支 제1629호 송부서
尹相泰
외 26명
위 자들에 대한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촉탁한 증인 신문의 件, 처분을 행하였기에 관계 서류를 左記 목록과 같이 송부하는 바입니다.
大正 8년 8월 15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 귀하
목록
一. 촉탁서 1통
一. 증인 앞 송달서 4통
一. 玉麒煥·金轍斗·明道奭 신문조서 3통
一. 증인 출두건에 관한 조회안 1통
一. 金裕鉉 신문 조서 1통
신문촉탁서
별지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위 피고사건에 관하여 左記 성명의 자를 증인 혹은참고인으로 하여 지정 사항을 신문한 후 조서를 회송해 주기를 촉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지명한 자가 병 때문에 出廷이 불가능할 때에는 그 소재에 관하여, 또 본건 사실을 모르는 자일 때에는 이것을 모두 아는 자에 대하여 동일한 사항을 신문하기를, 만약 다른 管內에 現住하는 경우에는 관할청에 轉囑하기를, 또한 관계서류·물건 등이 있으면 압수한 후 회송하여 주기바랍니다.
大正 8년 7월 31일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判事 귀하
左記
증인의 주소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谷安里.
金裕鉉
위 증인에 대한 사항
一. 증인은 피고 尹相泰·徐相日·李始榮·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申相泰·安廓·南亨祐·李瑩宰李亨宰·金璣成·朴永模·李舜相을 아는가, 알고 있다면 어떠한 관계로 알았는가.
二. 증인은 수 년 전부터 피고 裵重世·金璣成에게 자금을 급여하여 馬山洞 舊馬山 俵町에서 상호를 五○商會라 칭하며 곡물상을 경영시키고 있는가, 위 상회는 자본금이 어느 정도이며, 언제부터 경영하였고, 이익금은 어느 정도 내고 있는가.
三. 裵重世·金璣成 등은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그 운동 자금의 조달과 동지 규합의 수단으로 위 五○商會를 경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것은 아니었는가.
四. 피고 尹相泰·徐相日·李始榮, 기타는 大正 2년경부터 國權恢復團을 조직하여 그 中央總部를 大邱에 두고 그 지부를 馬山에 설치하여 피고 安廓을 그 지부장으로 하고 李亨宰·金璣成을 그 부원으로 하여 동지의 규합, 자금의 조달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裵重世·李舜相도 그 단원에 가맹하여 그들과 함께 분주하였던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알고 있다면 그 경위의 상세.
五. 大正 8년 5월경 五○商會의 영업을 중지하고 裵重世는 오로지 자금의 회수에 노력하다가 그 후 도주한 것 같은데, 중국 방면에 있는 동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그는 그 회수금을 휴대하고 그곳에 가 있는 것이 아닌가.
六. 증인은 裵重世·金璣成 등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강요받아 그 결과 그들이 자금 조달의 수단으로 경영한 위 상회에 자금을 융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七. 증인은 裵重世·金璣成·安廓·李亨宰·李舜相 등에게 조선독립의 운동자금을 준 일이 없는가, 그들이 馬山 지방에서 동지의 규합, 운동 자금의 조달에 분주하였던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안다면 그 경위의 상세.
八. 裵重世·安廓·李亨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大正 8년 7월 21일 豫 제114호 本職의 촉탁에 의하여 압수한 증거 물건 중 증인에게 관계된 것이 있으면 일일이 설명시키기 바랍니다.
증인의 주소
馬山府 俵町.
玉麒煥
馬山府 俵町, 또는 馬山府 午東洞.
金轍斗
馬山府 俵町.
明道奭
위 3명에 대한 신문 사항
一. 증인은 각 피고 등을 아는가, 안다면 어떤 관계로 알게 되었는가.
二. 玉麒煥·金轍斗는 자금을 공급하고, 明道奭과 피고 李瑩宰, 즉 李亨宰는 업무 집행의 책임을 맡아 馬山府馬山에서 상호를 元東商會라 칭하여 곡물 및 해산물상을 경영하고 있었는가.
三. 玉麒煥·金轍斗는 각기 자금 어느 정도를 출자하였고 언제부터 위 상회를 경영하였으며, 그 이익금은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四. 피고 李亨宰는 수년 전부터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동지의 규합 및 자금 조달에 분주하고 있어 증인 등은 그 기도에 찬동하였으며 元東商會는 그 자금 조달 기관으로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五.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은 大正 2년 경부터 國權恢復團을 조직하여 그 中央總部를 大邱에 설치하고 지부를 馬山에 두어 피고 安廓을 그 지부장에, 李亨宰·金璣成을 그 부원으로 하여 동지의 규합·자금의 조달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裵重世·李舜相도 그 단원에 가맹하여 그들과 함께 분주하였던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六. 증인은 李亨宰·安廓·裵重世·李舜相 등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강요당해 출자한 일은 없는가.
七. 李亨宰·安廓·裵重世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大正 8년 7월 21일자 豫發 제114호 本職의 촉탁에 의하여 압수한 증거 물건 중 증인 등에게 관계된 것이 있으면 일일이 설명시키기 바랍니다.
증인 玉麒煥 신문조서
증인 玉麒煥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하여 大正 8년 8월 1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豫審掛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玉麒煥, 45세.
직업은 雜業.
주소는 馬山府 元町 113番地.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각 피고 등을 아는가.

南亨祐釜山白山商會의 회원이라고 하며 재작년 그 회사가 증자하기로 되었다는 취지로써 출자할 것을 신청해온 일이 있어 아는 사이가 되었으며, 安廓은 전에 昌信學校 교사를 하여 나의 아이가 신세를 지고 있었으므로 아는 사이가 되었고, 李亨宰는 우리들이 공동 경영하는 元東商會의 회원이므로 아는 사이이다. 金璣成·裵重世·李舜相은 모두 馬山 사람이므로 아는 사이이다. 그 밖의 피고들은 모른다.

元東商會는 舊馬山에서 곡물 및 해산물상을 경영하는가.

그렇다. 또 그 밖에 위탁 판매도 한다.

그대와 金轍斗는 자금을 공급하고 明道奭과 피고 李瑩宰, 즉 李亨宰가 업무 집행 책임을 맡고 있는가.

그 상회는 묻고 있는 4명이 각자 500원씩 출자하여 李亨宰明道奭이 업무 집행을 책임맡고, 金轍斗는 회계를 담당하며, 나는 아무 것도 담당하고 있지 않다.

언제부터 그 상회를 경영하고 있는가.

작년 5월부터이다.

이익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아직 결산하지 않았으나 대체로 손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이익금으로 처분할 것이 없으며, 따라서 그 조치에 관하여 상의한 일도 없다.

피고 李亨宰는 수년 전부터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동지의 규합 및 자금 조달에 분주했으며, 증인 등은 그 기도에 찬동하여 元東商會는 그 자금 조달 기관으로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李亨宰가 그러한 기도에 분주하고 있었던 것은 모른다. 따라서 元東商會가 그 자금 조달 기관 등으로 되었던 일도 없다.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은 大正 2년경부터 國權恢復團을 조직하여 그 中央總部를 大邱에 설치하고 지부를 馬山에 두어 피고 安廓을 그 지부장으로, 李亨宰·金璣成을 그 부원으로 하여 동지의 규합·자금의 조달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裵重世·李舜相도 그 단원에 가맹하여 그들과 분주하였던 것을 아는가.

그러한 일은 전연 모른다.

증인은 李亨宰·安廓·裵重世·李舜相 등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강요당해 출자한 일이 있는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李亨宰·安廓·裵重世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모른다. 그런데 李亨宰는 금년 4월경 좁쌀을 팔러 安東縣 방면으로 갔다가 5월경에는 平壤으로 갔다고 하는데, 安東縣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나, 여관 주인 朴洸으로부터 그러한 편지가 왔던 일이 있는데, 지금은 그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大正 8년 8월 1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증인 金轍斗 신문조서
증인 金轍斗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하여 大正 8년 8월 1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豫審掛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金轍斗, 32세.
직업은 미곡상.
주소는 馬山府 石町 95番地.
豫審掛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각 피고 등을 아는가.

徐相日은 수년 전 野球會에서 아는 사이가 되었으며, 安廓昌信學校의 교사로서 우리 집의 아이들이 신세를 졌기에 알게 되었고, 李亨宰元東商會의 공동 경영자로 아는 사이이다. 金璣成·裵重世·李舜相 등은 馬山 사람이기 때문에 아는 사이이나, 그 밖의 피고들은 모른다.

증인은 元東商會의 공동 경영자인가.

그렇다.

그 상회의 출자자·업무 목적 및 임원은 어떠한가.

그 상회는 釜山에 사무실을 설치하여 나 및 玉麒煥·明道奭·李亨宰의 4명이 각자 500원을 출자해 곡물 및 해산물의 매매 및 위탁 판매를 업으로 하는데, 李亨宰가 곡물, 明道奭이 해산물 쪽의 각 업무 집행을 책임맡고 나는 회계를 보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하였고, 또 이익금은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작년 5월부터 경영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이익금은 없다.

피고 李亨宰는 수년 전부터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동지의 규합 및 자금 조달에 분주하고 있었는데, 증인은 그 기도에 찬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모른다.

그리고 元東商會는 그 자금 조달 기관으로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과 大正 2년경부터 國權恢復團을 조직하여 그 中央總部를 大邱에 설치하고 지부를 馬山에 두어 피고 安廓을 그 지부장에, 李亨宰·金璣成을 그 부원으로 하여 동지의 규합·자금의 조달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裵重世·李舜相도 그 단원에 가맹하여 그들과 함께 분주하고 있었던 것을 아는가.

모른다.

증인은 李亨宰·安廓·裵重世·李舜相 등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강요당해 돈을 낸 일이 있는가.

없다.

李亨宰·安廓·裵重世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모른다. 그런데 李亨宰는 금년 4월경 곡물 매각을 위해 安東縣으로 갔는데, 그 후 5월 말경 安東縣信東商會 주인 朴洸李亨宰平壤을 향해 출발했다는 것이었으므로 平壤의 거래선인 海壤商會에 조회해 보았으나 오지 않았다고 하는 답변이었으므로, 그 후의 행선은 전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大正 8년 8월 1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선서서
양심에 좇아 진실을 말하고
아무 것도 묵비하지 않으며
또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함.
증인 金轍斗
증인 明道奭 신문조서
증인 明道奭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하여 大正 8년 8월 1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豫審掛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明道奭, 35세.
직업은 곡물상.
주소는 馬山府 俵町 149番地.
豫審掛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피고 등을 아는가.

徐相日은 수년 전 野球로 이곳에 와서 그때부터 알았으며, 南亨祐白山商會의 應資 권유로 온 일이 있어 그때부터 알았고, 安廓은 이전에 昌信學校 교사로서 조카가 신세를 졌기 때문에 알았으며, 李亨宰元東商會의 공동 경영자로서 알고 있고, 金璣成·裵重世·李舜相은 이곳 사람이므로 아는 사이이다. 그 밖의 피고들은 모른다.

元東商會의 경영자·출자자·업무·설립 연월·역할 등은 어떠한가.

그 상회는 舊 馬山에서 곡물·해산물의 판매 및 위탁 판매를 하며, 나 및 玉麒煥·金轍斗·李亨宰가 각자 500원씩 출자하여 나는 해산물, 李亨宰는 곡물 쪽의 각 업무를 집행하고 金轍斗가 회계를 맡고 있으며, 작년 5월 창립한 것이다.

이익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아직 이익은 없다.

피고 李亨宰는 수년 전부터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동지의 규합 및 자금의 조달에 분주하고 있었다는데, 어떠한가.

그러한 것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증인 등은 그 거사에 찬동하여 元東商會는 그 자금 조달 기관으로서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없다.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은 大正 2년 전 무렵부터 國權恢復團을 조직하여 그 中央總部는 大邱에 설치하고 지부를 馬山에 두어 安廓을 그 지부장으로, 李亨宰·金璣成을 그 부원으로 하여 동지의 규합·자금의 조달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裵重世·李舜相도 그 단원에 가맹하여 그들과 함께 분주하였던 것을 아는가.

모른다.

증인은 李亨宰·安廓·裵重世·李舜相 등으로부터 독립 자금을 강요당해 돈을 냈는가.

없었다.

李亨宰·安廓·裵重世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大正 8년 8월 1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증인 金裕鉉 신문조서
증인 金裕鉉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하여 大正 8년 8월 14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豫審掛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金裕鉉, 32세.
직업은 곡물상.
주소는 馬山府 俵町 128番地.
豫審掛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증인은 피고 尹相泰·徐相日·李始榮·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申相泰·安廓·南亨祐·李瑩宰李亨宰·金璣成·朴永模·李舜相을 아는가.

洪宙一大邱에서 馬山視察團에 가입하여 왔기 때문에 알게 되었으며, 南亨祐釜山 白山商會員이므로 상업 거래상 알게 되었고, 安廓은 앞서 昌信學校 교사였던 사람이라 알며, 李亨宰馬山에서 곡물상을 경영하는 사람이라 알게 되었고, 金璣成은 나와 공동 영업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 알고 있는데, 그 밖의 사람들은 모른다.

증인은 수년 전부터 피고 裵重世·金璣成에게 자금을 공급하여 舊馬山 俵町에서 상호를 五○商會라 칭하여 곡물상을 경영시키고 있었는가.

내가 800원 정도, 裵重世는 2·3천 원 정도, 金璣成은 가옥을 제공하여 세 사람이 공동으로 곡물상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나는 작년 가을 쯤 탈퇴하고 말았다.

언제부터 시작하였고, 이익금은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재작년 12월경부터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익은 출자금액에 따라 분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탈퇴 당시 200원 정도의 이익 분배를 받았다.

裵重世·金璣成 등은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그 운동 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의 수단으로 위 五○商會를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피고 尹相泰·徐相日·李始榮 등은 大正 2년경부터 國權恢復團을 조직하여 中央總部를 大邱에 설치하고 그 지부를 馬山에 두어 피고 安廓을 그 지부장으로, 李亨宰·金璣成을 그 부원으로 하여 동지의 규합·자금의 조달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裵重世·李舜相도 그 단원에 가맹하여 그들과 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일은 전혀 모른다.

大正 8년 5월경 五○商會의 영업을 중지하고 裵重世는 오로지 자금의 회수에 노력하다가 그 후 도주하였다는데, 중국 방면에 있는 동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그는 그 회수금을 휴대하고 그곳으로 간 것이 아닌가.

금년 5월경 五○商會가 폐업하고 裵重世가 자금 회수에 노력하였던 것은 알고 있으나, 그 밖에 묻는 사실은 모른다.

증인은 裵重世·金璣成 등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강요당해 그 결과 그들이 자금 조달 수단으로 경영한 五○商會에 자금을 융통하였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가입 때에는 그들의 권고에 의해 가입한 것이 사실이다.

증인은 裵重世·金璣成·安廓·李亨宰·李舜相 등에게 조선독립의 운동 자금을 준 일이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일은 없다.

그러면 그들이 馬山 지방에서 동지의 규합, 운동 자금의 조달에 분주했던 것을 알 것이다, 어떠한가.

그러한 일도 모른다.

裵重世·安廓·李亨宰는 지금 그곳에 있는가.

李亨宰중국 安東縣으로 갔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른다. 그 밖의 사람들이 있는 곳은 전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大正 8년 8월 14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
支 제2914호
송부서
별지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촉탁한 참고인 卞相龜 신문의 件은 처분을 끝냈으므로 관계 서류를 左記 목록과 같이 송부하는 바입니다.
大正 8년 8월 18일
光州地方法院 郡山支廳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春川泰助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귀하
목록
一. 참고인 신문조서 1통
一. 신문 촉탁서 1통
大邱地方法院 豫發 제149호
신문촉탁서
별지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위 피고사건에 관하여 左記 성명의 자를 증인 혹은 참고인으로 하여 지정 사항을 신문한 후 조서를 회송하여 주기 촉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지명한 자가 병 때문에 出廷하지 못할 때에는 그 소재에 관하여, 또 본건 사실을 모르는 자일 때에는 이를 모두 아는 자에 대하여 동일한 사항을 신문하도록, 만약 다른 관내에 現在하는 경우에는 관할청에 轉囑시키도록, 또한 관계 서류·물건 등이 있으면 압수한 후 回送하기 바람.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光州地方法院 郡山支廳
豫審判事 귀중
左記
증인의 주소·성명
郡山府.
殖産銀行員 卞相龜
신문사항
一. 증인은 피고 卞相泰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二. 大正 8년 봄 쯤 증인은 大邱府 京町安泰鎭의 집 또는 大邱府 東城町 3丁目金玉卿의 집에 체재하고 있었는가.
三. 大正 8년 2월 말 및 3월 초순경 卞相泰京城의 國葬 구경을 가던 도중 및 그 귀로에 大邱 증인의 하숙에 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떠한가.
四. 卞相泰는 위 京城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렀을 때 피고 徐相日·尹相泰 등과 회합하여, 자기의 鄕里, 즉 慶尙南道 昌原郡 지방에서 인심을 선동해 조선독립에 대한 시위운동을 거행하도록 모의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五. 卞相泰는 그 후 향리인 昌原郡 鎭田面 지방에서 조선독립의 선언서를 배포하고 많은 사람을 선동하여 독립만세 및 소요를 일으켜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는 것인데,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六. 卞相泰는 鎭田面 지방에서 위와 같이 소요를 일으키게 하고 그 체포를 면하기 위해 같은 해 4월 중 도주하여 大邱의 증인 집에 와서 수일간 체재한 후 다른 데로 도주한 것 같은데, 어떠한가, 증인은 그 사실을 알면서 체재시켰다는데, 어떠한가.
七. 卞相泰가 증인 집으로 도주해 와 있을 때 大邱府 南城町의 약종상 鄭震泳卞相泰를 찾아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떠한가, 그들은 어떠한 담화를 하였는가.
八. 卞相泰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이상
참고인 卞相龜 신문조서
卞相龜
별지 피고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正 8년 8월 16일 光州地方法院 郡山支廳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春川泰助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朴之喆
열석한 후, 판사는 위 자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 및 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은 卞相龜.
연령은 25세.
직업은 은행원.
주소는 郡山府 本町 18番地, 朝鮮殖産銀行 내.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에 기재된 자인지 아닌지를 물었던 바, 참고인은 피고 卞相泰와 친척 관계가 있다고 진술하였으므로 참고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다.

그대는 피고 卞相泰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卞相泰는 나의 백부의 아들로서, 나의 四寸에 해당한다.

그대는 大正 8년 봄 쯤 大邱府 京町安泰鎭의 집에 체재했던 일이 있는가.

그렇다. 그대로이다.

그대는 어째서 前述 장소에 체재하고 있었는가.

나는 그 당시 大邱殖産銀行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또 大邱府 東城洞 3丁目金玉卿의 집에 체재하였던 일이 있는가.

같은 해 3월 20일 前述 安泰鎭의 집에서 金玉卿의 집으로 옮겨 그 해 7월 2일 郡山殖産銀行으로 전임하기까지 계속 체재하였다.

大正 8년 2월 말 및 3월 초순경 卞相泰京城의 國葬 구경을 가던 도중 및 그 돌아오는 길에 大邱 참고인의 하숙에 들렀던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떠한가.

2월 말 京城으로 국장 구경을 갈 때에는 나의 집에 들렀으나 돌아가는 길에는 들르지 않았던 것이다.

京城에 갈 때에는 참고인 집에서 며칠간 체재하였는가.

馬山에서 저녁 7시경에 大邱에 도착하여 다음 날 오전 1시 기차로 京城으로 갔다.

卞相泰는 위 京城에서 돌아가는 길에 들렀을 때 徐相日·尹相泰 등과 회합하여 자기의 鄕里 즉 慶尙南道 昌原郡 지방에서 인심을 선동하여 조선독립의 시위 운동을 거행하도록 모의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알고 있는가.

京城에서 돌아가는 길에는 나의 집에 들르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서 조선독립운동을 모의했는지 어떤지는 나는 모른다.

卞相泰는 그 후 향리인 昌原郡 鎭田面 지방에서 조선독립의 선언서를 배포하여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고 독립만세 및 소요를 일으키게 하여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는데, 알고 있는가.

昌原郡 鎭田面 지방에서 독립만세 및 소요가 있은 후, 즉 4월 18일경 卞相泰는 나의 집에 들른 일이 있는데, 그때 卞相泰는 나에게 이번 昌原의 소요사건에 자기도 참가하였으며 죽은 사람도 나왔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자기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사람을 선동했다는 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卞相泰가 많은 사람들을 선동했던 것이 아닌가.

卞相泰는 성질이 거칠기 때문에 아마도 선동까지 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卞相泰는 鎭田面 지방에서 소요를 일으키게 하고 그 체포를 면하기 위해 그 해 4월 중 도주하여 大邱의 참고인 집으로 와서 수일간 체재한 후 다른 데로 도주한 것 같은데, 어떠한가.

그렇다. 전술한 대로 그 해 4월 18일 우리 집에 와서 사흘 밤 묵고, 釜山으로 간다고 하며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그대는 그 사실을 알면서 체재시킨 것 같은데, 어떠한가.

그렇다. 인정상 부득이했던 것이다.

卞相泰가 참고인 집에 도주해 와 있을 때 大邱 東城洞의 약종상 鄭震泳卞相泰를 찾아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떠한가, 또한 그들은 어떠한 담화를 하였는가.

나는 낮 동안에는 은행에 출근하여 집에 없었기 때문에 모르겠으나, 밤에는 鄭震泳이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던 일은 없다. 따라서 卞相泰가 그와 어떠한 담화를 하였는지 모른다.

卞相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른다.
위 참고인은 日本語를 이해하므로 通事를 사용하지 않고 신문하여 錄取한 바를 읽어 들려주었던 바, 틀림없다는 뜻을 승인하고 다음에 서명·날인하다. 참고인 卞相龜
大正 8년 8월 16일
光州地方法院 群山支廳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朴之喆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春川泰助
―○―
上警 제16367호
大正 8년 8월 13일
上海總領事館 警察署長
朝鮮 大邱地方法院
판사 尾家仁六 귀하
조선 假政府에 대한 회답
8월 4일자 豫發 제140호로 조선 假政府에 관한 수사의 件을 조회한 바, 左記와 같으므로 이에 회답하는 바임.
一. 국권 회복을 기도한 조선인 등은 이곳 프랑스 租界에 자칭 朝鮮 假政府를 조직하고 있었음. 金應燮도 그 조계에 거주하나 法部次官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으며, 南亨祐·尹賢鎭은 있는지 없는지 분명하지 않음.
二. 李始榮假政府의 法部總長으로 이곳에서 국권 회복을 기도하고 있었음. 安廓·金圭·裵重世는 있는지 없는지 분명하지 않음. 그런데 金龜라는 사람이 있는데 金圭가 아닌지.
三. 金應燮이 다액의 돈을 제공한 형적은 이를 인정하지 못함. 그리고 그들 일파는 모두 우리의 국권이 미치지 않는 프랑스 조계에 있음.
四. 假政府의 각 총장은 다음과 같음.
국무총리 李承晚 미국에 있음.
외교총장 金圭植 파리에 있음.
내무총장 安昌浩 이곳에 있음.
재무총장 崔在亨 이곳에 있음.
군무총장 李東暉間島에 있음.
법무총장 李始榮 이곳에 있음.
교통총장 文昌範間島에 있음.
본적은 명확치 않음. 또 일정한 직업이 없으며, 유지들이 제공한 운동비로 衣食함.
목적 관철의 방법으로는 각지에 산재된 동지와 연락을 취하고, 여러 가지 비밀 출판물을 반포하여 조선 내 조선인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이로써 民意의 통일을 도모하고, 외교총장 金圭植은 현재 파리에 출장하여 평화회의를 好機로 삼아 극력 획책하고 있는 것 같음.
五. 참고 사항
그들은 우리 국권이 추호도 미치지 않는 프랑스의 專管 거류지에 주거함으로써 우리 관헌은 하등 방책이 없음. 언젠가 형사범의 체포·인도를 요구하였으나 해당 관헌은 정치범으로 처분할 자라고 추정하여 요구에 응하지 않은 형편임.
―○―
서류송부서
尹相泰 외 26명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피고사건에 관한 증인 신문의 件 촉탁에 의해 처리한 후 左記 목록과 같이 송부하는 바임.
大正 8년 8월 27일
京城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永島雄藏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귀하
목록
一. 송달증서 1통
一. 조서 1통
一. 촉탁서 1통 증거 물건 첨부.
一. 소재 수사 회답 1통
증인 崔景在는 신문 不能.
大邱地方法院 豫發 제142호
신문촉탁서
별지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위 피고사건에 관하여 左記 성명의 자를 증인 혹은 참고인으로 하여 지정 사항을 신문한 후 조서를 회송하도록 촉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지명한 자가 병 때문에 出廷하지 못할 때에는 그 소재에 관하여, 또 본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일 때에는 이것을 모두 아는 자에 대하여 동일한 사항을 신문하기를, 만약 다른 관내에 現住하는 경우에는 관할청에 轉囑하도록, 또한 관계 서류·물건 등이 있으면 압수한 후 회송하기 바람.
大正 8년 8월 5일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京城地方法院
예심판사 귀하
「證 제15호의 1·2·4, 16호의 1·2, 17호의 1내지 7, 18호의 2를 첨부함」
左記
증인의 주소·성명
京城府 堅志洞.
公爵 李堈
위에 대한 신문 사항
一. 이 서면은 증인이 피고인 片東鉉에게 발신한 것인가.
이때 領 제335호의 證 제16호의 1·2, 17호의 1 내지7, 18호의 2를 제시하도록.
二. 위 서면은 무슨 일때문에 片東鉉에게 발신한 것인가, 특히 이 서면 중에 비밀 운운이라 기재되어 있는데, 무엇인가, 각 호 證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을 요구하도록.
三. 위 서면은 증인이 片東鉉과 구한국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고 그 운동 자금을 그에게 출자시키기 위해 발신한 것이 아닌가. 證 제16호의 1[봉투 在中] 1만 원 차용증서는 그 운동 자금 1만 원을 받고 차용 명의로써 수취증을 그에게 교부한 것이 아닌가.
증인의 주소·성명
京城府 堅志洞 35番地朴基範方.
崔景在
위에 대한 신문 사항
一. 이 서면은 증인이 피고 片東鉉에게 발신한 것인가.
이때 領 제335호의 證 제15호의 1·2·4를 제시 하도록.
위 서류는 무슨 일 때문에 발신한 것인가, 그 내용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을 요구하도록.
二. 위 서면은 증인이 李堈公 및 피고 片東鉉과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여 그 운동 자금을 片東鉉에게 출자시키기 위해 발신한 것이 아닌가.
屆書
李堈公 전하를 증인으로 호출하였던 바 公 전하께서는 당시 병환으로 두문불출 중에 계심. 그러나 신문에 대한 회답에는 지장이 없기에 위 계출하는 바임.
大正 8년 8월 20일
李堈公附
李王職 事務官 黑崎美智雄
京城地方法院
예심판사 永島雄藏 귀하
증인 李堈 신문조서
증인 李堈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1일 京城府 寬勳洞 196番地李堈公 저택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永島雄藏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磯村仁兵衛
열석한 후, 예심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은 李堈.
연령은 43세.
신분은 公族.
직업은 없다.
주소는 京城府 寬勳洞 196番地.
예심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평소 사용하는 인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작년까지는 가지고 있었으나, 작년 가을 이후로는 가지고 있지 않다. 작년 가을까지 사용한 인장은 반지에 「晚悟士岡」이라고 조각하고 주위에 한 줄의 바퀴가 있으며 굵기는 새끼손가락 머리 크기의 것이있는데, 작년 가을에 없애버렸다.

이 서면을 증인 片東鉉에게 보낸 일이 있는가.
(이때 제16호 證의 1을 보이다)

그 속의 차용 증서는 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京城 東大門 밖의 별장에서 京城 東大門 밖에 거주하는 金錫胤에게 주선을 명하고 그가 片東鉉에게 교섭한 바, 巨濟島의 漁場을 경영시켜 주면 대여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어장은 釜山香椎源太郞에게 사용시키고 있어 계약 기간 중이므로 안된다고 거절하였더니, 그 후 위 어장에 관계없이 대여한다면서 金錫胤片東鉉의 중개인을 나의 별장으로 데리고 와 金錫胤의 주선으로 1만 원을 대여받았기 때문에 그의 손을 거쳐 片東鉉에게 건네준 것으로, 그 증서는 내가 그 날짜의 날에 쓴 것이다. 그런데 그 후 片東鉉이 어장을 경영케 해 달라고 청구해 왔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안되므로 일단 위 차용금을 반환하기로 하여 돈을 빈 1주일 쯤 후 金錫胤에게 1만 원을 주어 상대방에게 갚게 하였던 것이다. 金錫胤은 정직한 사람이므로 그 돈을 片東鉉에게 반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때 차용 증서를 돌려받지 않고 나도 金錫胤에게서 수령서를 받아놓지 않았던 바, 金錫胤이 차용 증서의 반환을 片東鉉에게 청구하고 있는 동안 片東鉉의 소재를 모르게 되었고, 金錫胤片東鉉의 소재를 알 수가 없었으며, 때문에 차용 증서를 돌려받을 수 없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金錫胤도 그 후 사망했던 것이다.

片東鉉은 당시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는가.

京城典東旅館에 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片東鉉의 소재는 누구를 시켜 조사시킨 것인가.

하인 七錫 및 崔아무개 등에게 조사시켰다.

그러면 金錫胤으로부터 1만 원을 받았다가 곧 반환하였다는 것이 되는가.

그렇다. 1주일 후에 변제하였다.

변제한 돈은 빌려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게 된 것이었는가.

그렇다. 빌려받은 돈은 100원 (짜리) 지폐로 1만 원이었으며, 나의 금고에 넣어 두었던 것을 그대로 반환했던 것이다.

위 차용 증서에 찍은 인장은 작년 가을까지 사용한 반지에 조각되어 있던 인장인가.

그렇다.

이 명함은 어떠한 관계로 건네준 것이었는가.
(이때 제16호 證의 1 중 명함을 보이다)

그 명함은 위 돈 차용에 관해서 金錫胤에게 준 것으로, 위 명함의 글씨는 내가 쓴 것이며, 1만 원의 돈을 빌기 전 金錫胤이 면회를 구하러 저택에 왔을 때 봉투에 넣어 하인을 시켜 건네주었던 것이다.

이 편지를 알고 있는가.
(이때 제16호 證의 1 중 서한만을 보이다)

그것은 金錫胤이 그러한 편지를 片東鉉에게 보내주었으면 하고 청구해 왔으므로 내가 써서 날인하고, 또한 봉투도 내가 써서 金錫胤에게 건네주었던 것이다. 그 편지에 기재된 것과 같이 맨처음에는 1만 5천 원의 차용을 부탁했던 것이다.

지금 대답한 봉투는 이 봉투인가.
(이때 제16호 證의 1 봉투를 보이다)

그렇다.

지금 편지에 상경하면 상세히 상의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어떠한 일을 상의한다는 뜻인가.

그것은 어장에 관계없이 돈을 대여하겠는가 어떤가를 교섭하기 위하여 그렇게 썼던 것이다.

지금 봉투에는 「 田仁壽李萬善」으로 발신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였는가.

그것은 본명을 내서는 나쁘기 때문에 李萬善이라는 가명으로 女官인 田仁壽의 집에 있는 것 같이 해서 냈던 것이다.

1만 원 차용 증서의 날짜는 大正 7년 5월 18일로 되어 있으나, 지금의 봉투에는 같은 해 6월 7일의 일부인이 찍혀 있어 대답이 틀리는 것 같은데, 어떠한가.

1만 원을 변제한 후 金錫胤이 그러면 어장에 관계없이 1만 원을 차용하도록 주선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 편지를 냈던 것이다.

그 편지를 낸 후 片東鉉이 왔는가.

그 후 典洞旅館에 왔다는 것이어서 그의 소재를 찾게 한 일이 있는데, 결국 그와 만나지 못하였다.

돈을 돌려주고 차용 증서를 돌려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사무소 쪽에 이야기한 일이 있는가.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편지를 낸 일이 있는가.
(이때 제16호 證의 2를 보이다)

이 편지는 1만 원을 변제하고 片東鉉의 주소를 찾고 있을 무렵 내가 써서 냈던 것으로, 그 편지 중에 재경시 만날 것 운운이라고 한 것은 片東鉉이 돈을 썼다든가 하여 경찰에 불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 일을 물어 보냈던 것이다.

이 편지에 의하면, 片東鉉의 재경시 면회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면회한 것은 아닌가.

편지에는 그렇게 썼으나 片東鉉과 면회한 일은 없다. 그런데 저택에 있던 崔아무개를 시켜 片東鉉에게 어장의 기간은 아직 6년이나 있으므로 그 기한 후가 아니면 사용권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 일은 있다.

이 편지를 낸 일은 있는가.
(이때 제17호 證의 1을 보이다)

그 편지는 내가 써서 片東鉉에게 준 것이다. 그것은 片東鉉 쪽에서 어장 사용에 관한 계약서를 썼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淸書하면 보여달라고 부탁해 보냈던 것인데, 그것에 대해 계약서는 보내오지 않았다.

이 편지를 알고 있는가.
(이때 제17호 證의 2를 보이다)

그렇다. 그것은 이전 이 저택의 인력거꾼으로 있던 崔興元片東鉉에게 돈의 차용을 부탁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片東鉉에게 주의시켜 주었던 것으로, 역시 내가 쓴 것이다.

崔興元崔景在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興元은 景在의 前 이름이다.

이 편지를 낸 일이 있는가.
(이때 제17호 證의 3을 보이다)

그것도 내가 써서 崔景在에게 들려 片東鉉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 편지에는 내일 면회하겠다고 써 보냈던 것이나 片東鉉이 없었기 때문에 면회할 수 없었다.

이 편지에 비밀로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일인가.

그것은 면회할 장소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째서 비밀리에 면회할 생각이었던가.

그것은 사무소 쪽에서 崔景在를 내쫓은 후의 일이며, 사무소 쪽이 알게 되어서는 돈이 차용되지 않으므로 비밀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 편지는 언제 쯤 냈던 것인가.

1만 원을 변제한 후 작년 7·8월경의 일이다.

이 편지를 낸 일이 있는가.
(이때 제17호 證의 4를 보이다)

그것도 내가 써서 片東鉉에게 보낸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片東鉉은 吳와 공동으로 어장을 경영하려고 하였으나 뒤에 吳를 제거하고 단독으로 경영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吳가 방해하게 되었으므로 吳에게 비밀리에 하라고 말해 보냈던 것이다.

이 편지를 낸 일이 있는가.
(이때 제17호 證의 5를 보이다)

그것도 내가 써서 片東鉉에게 보낸 것으로, 그것은 崔景在가 돈 차용건에 관해 방해하므로 주의하라고 말해 보냈으며, 또한 내일 면담하겠다고 이야기해 보냈으나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편지를 낸 일이 있는가.
(이때 제17호 證의 6을 보이다)

그것도 내가 써서 계약서를 비밀리에 淸書해 보내달라고 片東鉉에게 말해 보냈던 것이다.

淸書는 비밀히 하지 않으면 미연에 풍설이 떠돌아 곤란하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그것은 吳가 방해하기 때문에 吳에게 비밀히 하지 않으면 미연에 풍설이 떠돌아 곤란하다는 뜻이다.

그 풍설이 떠돌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은 일반에게 알려지면 곤란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지는 않으며, 吳에 대한 것 뿐이었다.

이 편지를 냈었는가.
(이때 제17호 證의 7을 보이다)

그것도 내가 써서 낸 것으로, 그 당시 순사인 宋이 片東鉉에게 돈의 차용을 부탁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그 일을 물었으며, 또 서류는 준비했는가 하는 것, 서책 즉 편지는 태워버리라고 말해 보냈던 것이다. 서책은 다른 사람에게 보게 해서는 나쁘기 때문에 태우는 편이 좋다고 이야기해 보낸 것이며, 또 비밀히 등사하여 운운이라 되어 있음은 계약서를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등사하고 만족치 못한 곳이 있으면 이곳에서 고칠 것이니 써 보내라는 것이었다.

여관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어떠한 생각에서 나온 것인가.

片東鉉은 어장일로 경찰에서 취조를 받았고 吳도 그 일로 수일간 구류되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서는 좋지 않으므로 비밀리에 하게 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이 편지도 증인이 낸 것인가.
(이때 제18호 證의 2를 보이다)

그렇다. 그것은 片東鉉이 어장의 계약서를 보내왔기 때문에 만족치 못한 점을 수정하여 돌려보낸 후에 낸 것이다.

이 편지에 의하면, 어장의 계약을 체결할 생각으로 계약서류의 만족치 못한 점을 수정하여 돌려보낸 것이 되는데, 그러한 연유인가.

香椎와의 계약 기간이 지난 후 어장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라면 계약하자고 계약서를 수정해서 돌려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은 즉시 경영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편지는 어느 것이나 다 片東鉉에게 보냈던 것임에 틀림없는가.

그렇다.

증인은 결국 片東鉉과는 만나지 못했던 것인가.

그렇다. 만나지 못했다.

片東鉉을 만나지 못했던 것에 관해서는 무엇인지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이쪽 희망대로 돈을 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만나기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보인 편지는 증인이 片東鉉과 舊韓國의 국권 회복을 기도하고 그 운동 자금을 내게 하기 위하여 片東鉉에게 보냈던 것이 아닌가.

결코 그러한 일은 없었으며, 전적으로 지금 말한 것과 같이 어장 계약이나 돈 차용에 관해 보냈던 것이다.

맨처음 받았던 1만 원은 국권 회복의 운동 자금으로 받았던 것으로, 차용 증서라는 명의로 위 금액의 수취서를 냈던 것은 아닌가.

결코 그러한 일은 없었다.

금년 중 片東鉉과 편지 왕래를 한 일이 있는가.

이쪽에서는 차용 증서를 돌려받기 위해 4·5회 편지를 낸 일이 있으나 아무런 회답도 없었다.

金錫胤에게 1만 원을 준 것을 누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것은 崔景在가 알고 있다.

崔景在가 이 저택에서 쫓겨난 후 그와 만난 일이 있는가.

쫓겨난 후에도 잠시 동안은 출입하고 있어 만난 일이 있는데, 금년에 들어서는 온 일이 없으며, 현재 그는 시골에 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水原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작년 7·8월경 片東鉉京城에 왔을 때 1만 원 차용 증서의 반환을 청구한 일이 있는가.

편지로 그것을 청구한 바 어장의 계약서를 작성한 후 동시에 가져온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말한 것 같이 계약서를 수정하여 돌려 보내준 후 소재를 모르게 되어 결국 돌려 받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으로, 소재를 모르도록 된 후에도 자주 마음이 닿는 곳에 편지를 냈으나 아무런 회답도 없었다. 그런데 이쪽에서 낸 편지는 되돌아 오지는 않았다.
증인 李堈 위를 읽어 들려주었던 바, 틀림없다는 뜻을 진술하고 서명하다.
앞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京城地方法院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磯村仁兵衛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永島雄藏
출장지에서 작성하였으므로 소속청의 도장을 찍지 못함.
―○―
支 제1710호
송부서
尹相泰
26명
위 자에 대한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촉탁한 신문의 건을 처리하였는 바, 관계 서류를 左記 목록과 같이 송부하는 바입니다.
大正 8년 8월 30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 귀하
목록
一. 촉탁서 1통
一. 증인 호출 송달증 7통
一. 증인 卞種元 조서 1통
一. 참고인 具守書 조서 1통
一. 참고인 梁錦還 조서 1통
一. 증인 鄭又萬 조서 1통
一. 참고인 卞相憲 조서 1통
一. 참고인 卞相攝 조서 1통
一. 참고인 卞相根 조서 1통
一. 증인 川上淸太郞 조서 1통
一. 전화 용지 1통
一. 증인 卞仁燮 조서 1통
一. 증인 卞在容 조서 1통
一. 여비 일당 청구서 1통
그리고 보내주기를 바라는 權寧大 등 소요 피고사건 기록은 별도 소포로서 송달하였읍니다.
刑事共助事件記錄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기록
기호
大正 8년 刑共 제4호원고
공소인
 
사건명制令 제7호 위반대리인 
증인성명川上淸太郞
외 9명
피고 피공소인 
대리인 
촉탁
청명
大邱地方法院
번호 
주임판사
川野邊
서기
上野
終局要旨大正 8년 8월 29일 신문 종료
大正 8년 8월 30일 조사 송치
기록첨부
大邱地方法院 豫發 제144호 신문촉탁서
별지 피고인 尹相泰 외 26명에 대한 大正 8年 制令 제7호 위반
위 피고사건에 관하여 左記 성명의 자를 증인 또는 참고인으로 하여 지정 사항을 신문한 후 조서를 회송하여 주기 촉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지명한 자가 병 때문에 출정하지 못할 때에는 그 소재에 대하여, 또 본건 사실을 모르는 자일 때에는 이것을 모두 아는 자에 대하여 동일한 사항을 신문하여 주기를, 만약 다른 관내에 現在하는 경우에는 관할청에 轉囑하기를, 또한 관계 서류·물건 등이 있으면 압수한 후 회송하여 주기 바랍니다.
大正 8년 8월 6일
大邱地方法院
예심판사 尾家仁六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예심판사 귀중
기록은 별도 소포로 부침[馬山支廳 大正檢刑 제310호 權寧大 외 9명 소요사건 기록].
左記
증인의 주소·성명
釜山監獄 馬山分監.
卞相攝
39세
具守書
26세
卞相憲
23세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363番地. 卞相根
32세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363番地. 梁錦遠
27세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363番地. 卞在容
19세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363番地. 鄭又萬
31세
昌原郡 鎭田面 日岩里 949番地.
卞應洙의 손자 卞仁燮
18세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88番地.
卞益潤의 四男 卞鍾元
19세
鎭東憲兵駐在所長.
陸軍憲兵伍長 川上淸太郞
위 各 人에 대한 신문 사항
一.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具守書·卞相憲·黃泰益·金永鍾·卞相攝·卞又範 등이 공모하여 大正 8년 4월 3일 옛 節日을 기해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고,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鎭北面里의 각 구장에게 권유, 그날 大群衆團을 조직하여 同郡 鎭東憲兵駐在所 등을 습격·파괴할 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열을 지어 나아가 그 헌병주재소로 몰려들려고 하였으며, 도중 헌병 등이 저지하려고 하므로 投石 기타 폭행을 하여 경계원인 위 주재소 소속의 헌병오장 川上淸太郞, 상등병 ◉谷七次, 헌병보조원 沈宜震 등에게 부상을 입히고 소란을 피웠으며, 군중 중에도 다수의 사상자를 낸 전말에 관해 증인 등이 아는 사실의 상세.
卞相泰는 피고 尹相泰·徐相日, 그 밖의 피고 등과 수년 전부터 조선독립의 음모단을 조직하여 大邱府에 그 中央總部를 두고 이후 그 동지의 규합 등에 분주하고 있던 자로서, 大正 8년 3월 초순경 조선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발발하였을 당시 卞相泰京城의 國葬 구경을 하고 돌아오던 중 大邱府에 들러 中央總部의 간부인 피고 尹相泰·徐相日 등과 모의한 후 昌原郡 지방에서 인심을 선동하여 독립운동의 소요 등을 일으키고자 스스로 담임하고 귀향하여 前示 소요를 일으키게 한 자로 思料되므로
卞相泰는 前示 소요에 어떻게 관계하고 있었는가, 그 상세.
卞相泰는 피고 尹相泰 등과 기도한 조선독립의 음모단원으로서 權寧大 외 8명에게 독립운동 및 소요를 일으키도록 선동하였으며, 그 결과 공모하여 前示 소요를 야기시킨 자가 아닌가 상세.
③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祥라는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도 卞相泰가 主가 되어 선동한 것이 아닌가.
④ 위 소요 때에 있어서의 피해 상황 등 證 제199호 기록 중 증인 등에 대한 각 신문조서·보고서 등을 참조하여 상세한 신문을 바람.
또한 證 제199호의 기록 중 증인 등의 공술로서 左記와 같은 기재가 있어 피고 卞相泰가 前示 소요사건의 주모자 중 일원인 것은 분명한 것 같으므로 또한 증인 등에 대하여 엄중히 취조하여 주기 바람.
左記
一. 卞相根의 공술 중[기록 41면]
① 3월 31일 卞相泰權寧大와 鎭田面 良村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이번의 독립운동은 각지 도처에서 개시되었다, 이곳에서도 최근에 일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그때는 여러 동지들은 모름지기 참가하도록, 만약 참가하지 않을 때에는 조선인이 아니고 개자식이다, 後難이 있을 것이다 운운하고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이상 기록 43면].
卞相泰는 良村里 토지 개간장에서 里民 7·9명에게 내일 3일 조반 후 良村里 앞의 도로에 모이도록 연설하였다[이상 기록 43면].
二. 梁錦還의 공술 중[47면].
① 4월 2일 오후 7시경 鎭田面 良村面 앞의 개울가에서 卞相泰權寧大·黃泰益 등과 4월 3일의 節日에 일대 독립운동을 할 것을 상의하였다[47면의 뒤].
卞相泰가 4월 2일 아침 동리 안을 단장을 가지고 돌며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을 구타하므로 里民은 무서워하며 참가하였다[48면 뒤].
三. 卞在容의 공술 중에[기록 61면]
卞相泰가 독립운동에 참가하라고 권하고 응하지 않으면 구타하므로 자기도 운동에 참가하였다, 舊韓國旗는 卞相泰가 재료를 주었기 때문에 만들었다. 3일 아침 卞相泰는 단장을 가지고 동리 안을 돌며 빨리 가라고 하므로 자기도 갔다[이상 61면 뒤 내지 62면].
四. 卞相憲의 공술 중[303면]
① 4월 1일 낮 쯤 權寧大·卞相泰·權泰容·卞相攝·卞相基 등이 日岩里의 한문 서당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모의를 하고 독립선언서 및 통지서를 만들었다는 것을 들었다[307면 뒤].
② 독립선언서 또는 통지서에는 4월 3일 아침 良村里에 모일 것,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의 가옥을 파괴하겠다 운운, 구한국기를 휴대할 것, 한 집에 한 사람 이상 참가할 것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305면].
五. 卞相攝의 공술 중[333면]
① 4월 2일 정오경 鎭田面 良村里 앞에서 卞相泰는 7·80명의 사람에게 3일에 제2회 독립운동을 할 것이니 참가하라고 연설하였다(이상 334면).
② 4월 1일 오후 4시경 卞相泰는 나에게 鳳岩里의 具守書에게 읽어 들려주라고 하며 독립통지서를 주었다(436면).
③ 4월 1일 卞相泰는 나에게 독립운동을 할 것을 통지해 왔다, 또한 그 뜻을 具守書에게 전달하라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그러한 뜻을 전하였다(354면).
④ 나는 朴永燮의 집에서 卞相泰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통지서를 具守書에게 건네주었다(355면).
卞相泰는 良村里의 개간지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각자의 집을 파괴하겠다고 연설하였다(356면).
⑥ 4월 2일 卞相憲의 집에서 卞相泰가 구한국기를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다(358면).
六. 具守書의 공술 중(153면·369면)
卞相泰가 가라고 하므로 나도 騷擾團에 참가하였다(155면).
卞相憲卞相泰가 준, 4월 3일 운동을 할 것이라는 뜻의 통지서를 보이고 卞相基가 들려주었는데 이 운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집을 파괴하고 里民을 죽인다고 말하였다(370면 뒤).
七. 鄭又萬의 공술 중(171면)
① 良村里의 卞相泰가 단장을 휴대하고 조선인이 어째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는가, 만약 참가하지 않으면 너의 집을 파괴하고 너희들을 밟아 죽이겠다고 하였다(171면 뒤).
八. 卞仁燮의 공술 중(57면)
① 鎭田面의 소요는 權寧大·卞相攝·卞相泰·黃泰益 등이 모의하여 야기시켰다고 里民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다(50면).
九. 卞種元의 공술 중(64면)
① 4월 3일의 소요에는 卞相泰가 가라고 지휘하므로 갔다(64면 뒤).
② 구한국기는 卞相泰가 재료를 사 주었다(65면).
증인 卞種元 신문조서
증인 卞種元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5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卞種元, 19세.
직업은 농업.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具守書·卞相憲·黃泰益·金永鍾·卞相攝·卞又範 등이 공모해서 大正 8년 4월 3일 옛 節日을 기해 조선독립운동을 하려고 기도하여 昌原郡 鎭田面·鎭北面의 각 구장에게 권유, 그날 大郡衆團을 조직하여 鎭東憲兵駐在所를 습격·파괴할 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高唱하며 줄지어 가서 그 헌병주재소에 밀어닥치려 하고, 도중 헌병등이 저지하려고 하자 投石 기타 폭행을 하여 경계원인 위 주재소 소속 헌병 등에게 부상을 입히고 소란을 피웠으며, 그 밖에도 다수 사상자를 낸 전말에 관하여 증인이 아는 사실의 상세한 것을 진술하라.

금년 4월 2일 저녁 내가 良村里의 書堂에 있을 때 卞相泰가 자기 및 黃泰益 명의의 통지서를 가지고 와 내일 만세를 부를 것이니 이 통지서에 쓰여져 있는 대로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그 통지서에는 내일 3일 良村里 앞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다, 만약 응하지 않을 때에는 그 집을 부술 것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따라서 나는 다음 3일 아침 良村里 앞에 모였는데, 그 인원수는 약 2천 명 정도로서, 旗를 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鎭東邑으로 향했다. 그것은 鎭東邑에 가서 만세를 부를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도중 五西里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되돌아오고 말았으므로 뒤의 일은 모른다.

위는 피고 卞相泰·尹相泰·權寧大 등이 공모해서 그대들을 선동하여 시킨 것이 아닌가.

그것은 모르나, 나는 위 통지서가 卞相泰黃泰益의 명의인 점으로 보아 위 두 사람이 주모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權寧大도 주모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만세를 부를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구한국기는 卞相泰가 재료를 사주었다는 것인데, 어떠한가.

그렇다. 그가 통지서를 가지고 온 날 마을 서당으로 와서 구한국기를 만들라고 하며 넓은 韓紙 5·6매를 건네주었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작은 기 14개를 만들어 다음 날 가지고 갔다.

위 소요 전에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란 자가 헌병주재소에 구금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것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大正 8년 8월 25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참고인 具守書 신문조서
참고인 具守書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片東鉉·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3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참고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具守書, 26세.
직업은 농업.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鳳岩里.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함을 인정하고 참고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다.

그대는 소요피고사건에 관하여 공판에 부쳐져 현재 在監 중인가.

그렇다.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卞相憲·黃泰益·金永鍾·卞相攝·卞又範 및 그대들이 공모해서 大正 8년 4월 3일의 옛 節日을 기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여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鎭北面의 각 구장에게 권유, 그날 대군중단을 조직하여 鎭東憲兵駐在所 등을 습격·파괴할 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高唱하면서 줄지어 가 그 주재소에 밀어닥치려 하였으며, 도중 헌병 등이 저지하려고 하자 투석 기타 폭행을 하여 경계원인 위 주재소의 헌병 기타에도 사상자를 낸 전말에 관하여 그대가 아는 사실의 상세한 것을 진술하라.

4월 2일에 나는 良村里에서 온 卞相攝·卞相基·卞相憲·卞相述 등에게 불리어 같은 마을 朴永植의 집에 갔던 바 위 4명의 사람은 나에게 통지서를 읽어 들려주었다. 그 통지서에는 다음 3일 아침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각 里民이 집합할 것, 만약 응하지 않을 때에는 後難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취지였다. 그래서 다음 3일이 되자 良村里 앞에 여럿이 집합하였으므로 나도 가서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거기에서 鎭東 읍내를 향해 줄지어 갔는데, 나는 鎭東邑 가까이까지 갔을 무렵 발포 소리가 들리고 앞서 가던 사람이 도망쳐 왔기 때문에 나도 그대로 귀가했던 것이며, 읍내 부근의 상황은 모른다.

그대가 들은 통지서는 누가 만든 것인가.

그것은 前述한 4명이 가지고 온 것이므로 그들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된다.

피고 卞相泰가 참가하라고 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그대들에 관한 소요사건에 대하여 헌병에게 위와 같이 권고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일은 없다.

卞相泰가 주모자이며 위 소요를 한 자가 아닌가.

그러한 것은 모른다. 나는 卞相泰의 얼굴도 모른다.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大란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모른다. 제1회의 소란이 있었던 것조차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앞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참고인 梁錦還 신문조서
참고인 梁錦還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참고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梁錦還, 27세.
직업은 고용인.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卞相泰方.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함을 인정하고 참고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다.

그대는 피고 卞相泰의 고용인인가.

그렇다.

피고 卞相泰權寧大, 기타의 사람과 공모하여 大正 8년 4월 3일 鎭田·鎭北 양 방면의 里民을 규합하여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鎭東憲兵駐在所를 파괴하고 기타의 폭행을 하기 위해 만세를 高唱하며 줄지어 가서 그 헌병소에 밀어닥치려던 도중 헌병 등이 저지하려고 하므로 이에 투석 등의 폭행을 하여 부상시키고 소요를 한 전말을 아는가.

금년 4월 2일에 卞相泰·權寧大·黃泰益의 3명이 良村里 시장에서 내일 만세를 부를 것이니 모두 모이라는 뜻의 연설을 하였다는 것으로, 그것은 卞洪瑞라는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卞洪瑞가 나에게 너도 내일은 나오라고 하였으므로 다음 3일 나는 日岩·良村·大峙里의 주민 등과 함께 鎭東邑內로 갔는데 그 사람 수는 2천 명 정도로, 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줄지어 갔다. 그러자 鎭東邑의 입구에서 헌병이 이를 저지하였으므로 싸움이 되었는데 그런 가운데 헌병이 발포하였기 때문에 나는 도망쳐 돌아왔다. 그리하여 투석 등을 했는지 또 부상했는지 나는 모른다.

위 소동은 피고 卞相泰·尹相泰 등이 기도한 조선독립음모단원이 權寧大 등에게 선동한 결과 공모하여 하게 한 것이 아닌가.

모른다.

피고 卞相泰가 주모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는가.

전술한 대로 4월 2일에 卞相泰權寧大·黃泰益 등과 良村里의 개울가인 시장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라는 연설을 하였다는 것 및 卞相泰가 그날 단장을 들고 돌아다니며 그 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타하므로 里民은 이를 무서워하여 참가했다는 것을 모두 卞洪瑞로부터 들었으므로, 卞相泰가 위 소동의 주된 사람이라는 것은 추측하고 있었다.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란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모른다. 다만 古縣里 시장에서 만세소동이 있었다고 하는 것만은 들어 알고 있으나, 그 자세한 것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앞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증인 鄭又萬 신문조서
증인 鄭又萬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鄭又萬, 31세.
직업은 농업.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平安里.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피고 卞相泰·權寧大 등 수 명이 공모해서 大正 8년 4월 3일 里民 대군중단을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鎭東憲兵駐在所를 습격하려고 줄지어 가던 도중 이를 저지하려고 하던 헌병에게 투석·폭행하여 부상자를 낸 전말에 관해 아는 사실을 진술하라.

금년 4월 3일 아침 식사 후 卞相泰權寧大 두 사람이 우리 집 앞에 와서 오늘 里民들이 모여 만세를 부를 것이니 오라고 권했으므로 뒤에 간다고 해 두었던 바, 그러한 가운데 계속 里民들이 鎭東 읍내를 향해 가므로 나도 거기에 가담하여 읍내 입구까지 갔던 바, 이미 1천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있었으며, 얼마 안있다가 발포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도 왼쪽 궛밥에 유탄을 맞아 조금 부상했으므로 곧 귀가해 버렸다. 뒤에 들으니 日岩里에서는 黃이라고 하는 사람, 良村里에서는 卞相泰, 大峙里에서는 權아무개라고 하는 사람 등이 주동이 되어 위 소동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헌병의 이야기나 풍문 등에 의해 안 것으로, 자세한 것은 모른다.

도중에는 旗를 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줄지어 갔는가.

다른 사람은 큰 기를 세우거나 작은 기를 쥐고 만세를 부르며 갔는데, 나는 그 組에는 들지 못하였다.

헌병에게 투석했는가.

나는 투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그대의 상처는 정도가 어떠한가.

찰과상으로 4·5일 있다 나았다.

다른 死傷은 어떠한가.

사상자가 있었다는 것은 들었으나, 자세한 것은 모른다.

卞相泰는 그대에게 참가하지 않을 때에는 밟아 죽이겠다고 하였는가.

그렇다. 전술한 대로 4월 3일 우리 집 앞을 통과할 때 나를 향해 오늘의 節日을 기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므로 너도 鎭東 읍내로 오라, 만약 참가하지 않으면 밟아 죽이겠다고 하며 단장을 휘둘렀다.

위 소요 전에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라는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 전에도 古縣里의 시장에서 만세 소동이 있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누가 주동자인지 그 점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참고인 卞相憲 신문조서
참고인 卞相憲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3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참고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卞相憲, 23세.
직업은 농업.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함을 인정하고 참고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다.

그대는 소요피고사건에 부쳐져 현재 在監 중인가.

그렇다.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具守書·黃泰益·金永鍾·卞相攝·卞又範 및 그대들이 공모해서 大正 8년 4월 3일의 옛 節日을 기해 조선독립운동을 기도하여,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鎭北面의 각 구장에게 권유, 그날 대군중단을 조직해서 慶尙北道 昌原郡鎭東憲兵駐在所 등을 습격할 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高唱하며 줄지어 가서 그 파출소에 밀어닥치려고 하였으며, 그 도중 헌병 등이 저지하려고 하므로 투석 기타 폭행을 하여 경계원인 위 주재소의 헌병 기타에게도 사상자를 내고 소요를 한 전말에 관하여 그대가 아는 사실의 상세한 것을 진술하라.

금년 4월 3일 아침 사는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집합해 있었으므로 나도 갔던 바, 이로부터 조선독립을 위해 鎭東 읍내로 간다는 것으로 약 5·600명 정도의 里民이 큰 기·작은 기를 가지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줄지어 갔다. 나도 만세를 불렀는데 도중 岩下里까지 갔을 때 앞장선 사람이 읍내 부근에서 헌병과 충돌하여 발포당했다는 것이어서 돌아왔던 것으로, 나는 그곳에서 돌아와 버렸다. 그래서 충돌 현장의 상황은 모른다. 또 그 소동은 어느 사람이 주모자였는지 모른다. 내가 그것에 가담한 것은 누구로부터 통지를 받거나 또는 권유당한 것도 아니며, 里民들이 집합하고 있으므로 가 보았던 것이다.

피고 卞相泰가 피고 尹相泰 등과 기도한 조선독립의 음모단원으로 權寧大 등을 선동하고 그들과 공모하여 위 소동을 하게 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일은 없었다.

4월 1일 낮 쯤 權寧大·卞相泰·權泰容·卞相攝·卞相基 등이 日岩里의 한문 서당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모의를 하고 독립선언서 및 통지서를 만들었다는 것을 들었다고, 그대들에 관한 소요사건에 대해 그대가 헌병소에서 진술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조금 틀린다. 나는 4월1일에 權寧大·卞相泰·權泰容·卞相攝·卞相基 등이 日岩里의 한문 서당에서 통지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들었다.

통지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도 보았는데, 4월 3일에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良村里 앞에 모이라고 하는 통지서였다.

그 통지서에는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의 가옥을 파괴한다 운운, 구한국기를 휴대할 것, 한 집에 한 사람이상 참가할 것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가.

있었다.

위 통지서를 卞相泰 등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풍문으로 알았던 것이다.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란 자가 鎭東憲兵所에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한 것은 모른다. 다만 그 전에 古縣里 시장에서 만세 소동을 하였다는 것만은 들었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앞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참고인 卞相攝 신문조서
참고인 卞相攝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3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참고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卞相攝, 39세.
직업은 농업.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日岩里.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함을 인정하고 참고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다.

그대는 소요피고사건에 관하여 공판에 부쳐져 현재 在監 중인가.

그렇다.

그대는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具守書·黃泰益·金永鍾·卞相憲·卞又範 등과 공모하여 大正 8년 4월 3일의 옛 節日을 기해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고,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鎭北面의 각 구장에게 권유하여 그날 대군중단을 조직, 鎭東憲兵駐在所를 습격·파괴할 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高唱하며 줄지어 가 그 헌병주재소에 밀어닥치려고 하였으며 도중 헌병 등이 저지하려고 하므로 투석 기타 폭행을 하여 경계원인 위 헌병 기타에게도 사상자를 낸 전말에 관하여 참고인이 아는 사실의 상세한 것을 진술하라.

금년 4월 3일 나는 약 2천 명 정도와 함께 良村里에서 鎭東 읍내를 향해 旗를 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줄지어 갔다. 나는 그 집단의 중간 정도에 있었으므로 선두의 일은 잘 모르나, 선두가 鎭東邑 입구의 다리에 다달았을 때 헌병이 이를 저지한 모양으로, 마침내 충돌하여 헌병이 발포하였기 때문에 모두 도망쳤다. 헌병에게 투석했는지 아닌지 그 점은 모른다.

具守書의 진술에 의하면, 그대는 卞相基·卞相憲·卞相述과 함께 4월 2일에 鳳岩里로 가서 具守書를 불러내 그대들이 가지고 있던 통지서를 읽어 들려주고 운동에 참가하도록 권했다는 것인데, 어떠한가.

틀림없다.

누가 그것을 만든 것인가.

통지서는 卞相泰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내가 4월 2일에 卞相泰를 만났던 바, 그가 위 통지서를 건네주며, 내일 즉 3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里民을 모아 鎭東 읍내로 갈 것이니 이 통지서에 의해 里民에게 참가하도록 권유해 달라고 하였기 때문에 내가 권유하게 되었던 형편인 것이다.

그러면 卞相泰가 주모자인가.

위에 진술한 것 같은 형편일 뿐 아니라 통지서는 卞相泰權寧大가 주로 만들었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卞相泰權寧大가 주모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통지서를 卞相泰權寧大가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통지서는 日岩里의 서당에서 만들었으므로 그 서당의 아이들로부터 들었다.

4월 2일 卞相泰는 良村里 개간지에서 7·80명의 사람에 대하여 3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라, 만약 하지 않으면 집을 파괴할 것이라는 뜻의 연설을 하였다고 하는데, 어떠한가.

나는 그 장소에서 듣고 있었는데, 卞相泰는 내일 독립운동을 하니 참가하라고는 권고하였으나 집을 부순다는 등은 말하지 않았다.

鎭東 읍내로 갔던 것은 헌병소를 파괴할 목적으로 갔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만세를 읍내에서 부르기 위해 갔던 것이다.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란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운동이 있었다는 것, 權寧祚가 구금되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으나 卞相泰가 선동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앞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참고인 卞相根 신문조서
참고인 卞相根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2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참고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卞相根, 33세.
직업은 농업.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함을 인정하고 참고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다.

피고 卞相泰는 그대의 형인가.

그렇다.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具守書·卞相憲·黃泰益·金永鍾·卞相攝·卞又範 등이 공모하여 大正 8년 4월 3일의 옛 節日을 기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을 도모하고,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鎭北面의 각 구장에게 권유하여 그날 대군중단을 조직해서 鎭東憲兵駐在所를 파괴할 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高唱하며 줄지어 가서 그 헌병주재소에 밀어닥치려 하였으며, 도중 이를 저지하려고 하는 헌병 등에게 투석 기타의 폭행을 하여 부상시킨 전말에 관해 참고인이 아는 사실을 진술하라.

질문한 자들이 공모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금년 4월 3일에 鎭田面 良村里·日岩里의 양 里民 500명 가량이 크고 작은 旗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鎭東邑內 방면으로 밀어부치고 가는 것은 보았다. 그래서 나도 그 뒤에서 岩下里까지 가 보았던 바, 鎭東邑 앞 쪽에서 발포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것 뿐으로 돌아와버렸는데 뒤에 들으니 헌병과 위 양 里民이 충돌하였다는 것으로, 사상자도 생겼다고 하는 이야기였으나 자세한 것은 모른다.

피고 卞相泰가 그 주모자의 한 사람이 아닌가.

내가 위 岩下里까지 갔을 때 黃泰益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權寧大는 그 전날 鎭東面 古縣里 만세소동에서 돌아와서 日岩里·良村里에서도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며 나의 형 卞相泰를 良村里에, 黃泰益을 日岩里에 각 里民을 모이게 할 것을 부탁하고 卞相泰黃泰益은 그 뜻을 받아 각 里民을 규합하여 전술한 대로 줄지어 가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卞相泰는 피고 尹相泰 등과 기도한 조선독립음모단으로서 權寧大 등에게 독립운동 및 소요를 하도록 선동하고 그 결과 공모하여 前示 소요를 야기시킨 것이 아닌가.

그러한 것은 모른다.

卞相泰는 위 里民을 규합하는 데 있어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가.

형이 어떠한 방법으로 里民을 설득시켰는지 모른다.

證 제199호 權寧大 외 9명의 소요사건 중 그대의 헌병에 대한 공술에 의하면, 3월 21일 卞相泰權寧大와 함께 良村里의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개시하였으므로 우리 마을에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니 참가하라, 참가하지 않는 사람은 조선 사람이 아니고 개자식이다, 後難이 있을 것이다 운운이라고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고 공술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卞相泰가 연설한 것이 아니고 權寧大가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權寧大가 (나에게) 너의 형도 이곳에 오기로 되어 있는데 어째서 오지 않느냐고 물어왔던 형편으로, 내가 있을 때에는 형은 그 장소에 아직 오지 않았으며 權寧大가 신문한 것 같은 연설을 했던 것이다.

또한 그 조서에 의하면 그대는 卞相泰가 良村里 토지 개간장에서 里民 7·80명에 대해 내일 아침 식사 후 良村里 앞 도로에 집합하라고 연설하였다고 진술하지 않았는가.

卞相泰가 그러한 연설을 하였다는 것인데, 그 일은 그 개간장에 갔던 里民으로부터 들었던 것으로, 형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라는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것은 모른다. 다만 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만은 들었으나 누가 만세를 부르고 또 어떠한 소동이 있었는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앞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증인 川上淸太郞 신문조서
증인 川上淸太郞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5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族籍·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川上淸太郞, 37세.
族籍은 평민
직업은 육군헌병오장.
주소는 鎭東憲兵駐在所.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조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具守書·卞相憲·黃泰益·金永鍾·卞相攝·卞又範 등이 공모해서 大正 8년 4월 3일의 옛 節日을 기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여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鎭北面의 각 구장에게 권유, 그날 대군중단을 조직하여 慶尙南道 昌原郡鎭東憲兵駐在所 등을 습격·파괴할 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高唱하며 줄지어 가서 그주재소에 밀어닥치고자 하였으며, 도중 헌병 등이 저지코자 하므로 투석 기타의 폭행을 하여 경계원인 증인 기타의 사람에게 부상을 입히고 소요를 피워 군중 중에도 다수 사상자를 낸 전말에 관하여 증인이 아는 사실의 상세한 것을 진술하라.

금년 4월 3일 오후1시경 약 3천의 里民이 12尺 가량의 장대 끝에 종이로 만든 큰 태극기 50개 정도, 작은 종이의 태극기를 무수히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鎭東邑內로 줄지어 들어가려고 하였으므로 나는 헌병 2명, 보조원 2명과 함께 읍내에서 25마장 정도 떨어진 鎭北面 智山里 노상에서 이를 저지하고 간절히 해산을 명했으나 추호도 물러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밀어 쓰러뜨리고 통과하려고 하기 때문에 부득이 다시 2·3보 뒤로 물러나 또 다시 그곳에서 해산을 명했는데 역시 듣지 않았으며, 따라서 다시 읍내를 서쪽으로 15마장 떨어진 鎭北面 社洞里 社洞里다리 옆까지 물러나 그곳에서 제3회째의 설유를 했다. 그런데 군중 중에는 麻布로 머리띠를 한 자가 수 명이 있어 그들이 지휘하며 강제로 읍내로 밀어닥치려고 하였다. 거기에서 나는 이곳에서 저지하지 않으면 마침내 읍내로 들어가게 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군중을 향해 강제로 통과한다면 할 수 없이 발포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보조원도 우리들도 간곡히 설유하였던 바, 2명의 조선인은 나의 총을 빼앗으려 들고 다른 군중도 투석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깃대를 가지고 헌병을 때려 우리들은 밀려 쓰러지기에 이르러 드디어 부득이해져서 발포를 명했다. 그 결과 우리들 5명이 총계 38발을 쏘았으므로 즉사 5명, 부상 12명을 내고 군중은 그 때문에 곧 퇴산했다. 우리 쪽은 그 때문에 나는 오른쪽 머리 부분과 오른쪽 팔에 외상으로 각각 타박상과 오른쪽 다리에 挫傷을 입었으며, 澁谷上等兵은 왼쪽 정강이 부분에, 또 沈補助員은 오른쪽 허리 부분에 모두 타박상을 입었고, 또한 肩章·가슴의 단추·모자의 턱끈 등이 끓어져 버렸다.

피고 卞相泰尹相泰 등과 기도한 조선독립음모단원으로서 權寧大 등에게 독립운동 및 소요를 피우도록 선동하여 그 결과 공모해서 위 소요를 야기시킨 것이 아닌가.

위 소요는 맨 처음 權寧大가 3월 28일 鎭田面 東山里의 주막에서 里民 30명 가량에 대해 4월 3일에 독립운동을 하니 참가하라고 권유·설득하였으며, 또한 그가 卞相泰卞相攝과 함께 4월 2일 良村里의 개간장에서 里民 7·80명에 대해 같은 연설을 하고 또한 그날 저녁 위 3인이 良村里의 개울가에서 密議를 하였던 것은 앞서 보고서를 낸 대로 수사의 결과 판명되었다. 위 3명이 본건 소요의 주모자이다. 尹相泰가 위 소요에 관하여 卞相泰 등과 공모하고 있었던 형적은 인정되지 않았다.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라는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수사한 바 제1회의 독립운동은 權寧大權寧祚가 공모하여 3월 28일 鎭東面 古縣里의 장이 열리는 것을 틈타 약 300명 가량의 사람에게 기를 들게 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그로부터 鎭東邑內로 몰려들어간 것으로, 卞相泰는 관계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權寧大도 읍내로 몰려들어가는 도중에서 되돌아 왔다고 한다.
위를 錄取하여 읽어 들려주었던 바, 틀림없다는 뜻을 진술하고 서명하다. 앞과 같은 날 同廳 豫審廷에서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증인 卞仁燮 신문조서
증인 卞仁燮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申相泰·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월 29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卞仁燮, 18세.
직업은 농업.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日岩里.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具守書·卞相憲·黃泰益·金永鍾·卞相攝·卞又範 등이 공모해서 大正 8년 4월 3일의 옛 節日을 기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여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鎭北面의 각 구장에게 권유, 그날 대군중단을 조직하여 鎭東憲兵駐在所 등을 습격·파괴할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高唱하며 줄지어 가서 그 주재소에 밀어닥치려 하였으며, 그 도중 헌병 등이 저지하려 하므로 투석 기타 폭행을 하여 경계원인 헌병 등에게 부상시키고 소요를 한 전말에 관하여 증인이 아는 사실의 상세한 것을 진술하라.

나는 그러한 일은 모르나, 4월 3일에는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며 운동하기로 되어 있어 卞相泰·黃泰益 등이 주로 그 운동에의 참여 권유를 하고 마을 사람들도 이에 참가한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4월 3일 아침 식사 후 나도 里民이 모여 있는 良村里 앞의 개울가로 갔던 바 卞相泰가 작은 구한국기를 주었는데, 그 당시는 약 2천 명 정도라고 생각되는 里民이 있었으므로 나도 그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鎭東邑內를 향해 줄지어 갔던 것이나 나는 도중 岩下里에서 점심을 먹다 군중에 뒤처졌던 것인데, 얼마 안있어 里民 등이 헌병이 발포하여 죽은 사람을 냈다고 하면서 도망쳐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나도 그곳에서 귀가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른다.

통지서나 구한국기를 만든 일은 모르는가.

그러한 일은 모른다.

그대는 헌병에 대하여 소요는 權寧大·卞相攝·卞相泰·黃泰益 등이 모의하여 야기시켰다고 里民 등으로부터 들은 것 같이 진술하였는데, 어떠한가.

卞相泰의 모의 운운은 헌병으로부터 가혹하게 당했으므로 그와 같이 진술하였으나 거짓이다. 權寧大는 4월 1일인가 2일에 독립운동을 상의하러 왔다는 것을 마을 사람에게서 들었으므로 그와 같이 진술했다. 卞相泰黃泰益이 전술한 대로 참가 권유를 한 후 卞相泰는 4월 3일 鎭東邑內로 줄지어 갔을 때 良村里와 谷安里와의 村界 근처에서 군중에 대해 조선이 독립하기를 바란다면 鎭東邑에 줄지어 가서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 헌병 등은 총을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 발사하는 일은 없으니 수행하라고 한 일이 있으므로 그에 관한 일은 그와 같이 진술했다.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라는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앞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증인 卞在容 신문조서
증인 卞在容
피고인 尹相泰·徐相日·李始榮·朴永模·洪宙一·徐丙龍·鄭舜永·尹昌基·李永局·金圭·黃炳基·徐昌圭·金應燮·卞相泰·南亨祐·安廓·李亨宰·金璣成·徐相懽·徐相灝·裵相淵·裵相濂·片東鉉·金在烈·裵重世·李舜相 制令 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大邱地方法院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尾家仁六의 촉탁에 의해 大正 8년 8월 29일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豫審廷에서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열석한 후, 예심계 판사는 증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하다.

성명·연령·직업·주소는 어떠한가.

성명·연령은 卞在容, 19세.
직업은 농업.
주소는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良村里.
예심계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23조 제1호 내지 제4호 및 형사소송법 제124조 제1호 내지 제6호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그 해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신문하겠다는 뜻을 告하고 선서를 시키다.

卞敬宰卞相泰·權寧大·卞相述·權泰容·具守書·卞相憲·黃泰益·金永鍾·卞相攝·卞又範 등이 공모해서 大正 8년 4월 3일의 옛 節日을 기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여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鎭北面의 각 구장에게 권유, 그날 대군중단을 조직하고 鎭東憲兵駐在所 등을 습격·파괴할 목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高唱하며 줄지어 가서 그 주재소에 밀어닥치려고 하였으며, 그 도중 헌병 등이 저지하려 하였으므로 투석 기타 폭행을 하여 경계원인 위 주재소의 헌병 등에게 부상시키고 소요를 피운 전말에 관하여 증인이 아는 사실의 상세한 것을 진술하라.

신문한 자들이 공모하였는지 아닌지는 모르나, 내가 금년 음력 3월 2일 아침 식사 후 마을의 서당에 갔던 바 卞相泰가 통지서를 가지고 왔으며, 또한 종이 5·6매를 서당에 있던 15·6명의 사람에게 주며 이것으로 旗를 만들라, 내일 아침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하므로 있던 사람들이 그 종이로 16개 가량의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그 다음 3일 곧 4월 3일의 아침 식사 후가 되니 마을 사람이 良村里 앞 개울가에 약 1천 2·3백 명 가량이라고 생각될 정도가 모여 만세를 부르면서 鎭東邑을 향해 줄지어 갔으므로 나도 이에 참가하여 읍내 바로 앞의 鎭北 智山里에 다달았던 바, 헌병 등이 저지하고 마침내 발포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귀가하였던 것인데, 군중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 어떠한 폭행을 하였는지는 군중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모른다. 뒤에 들으니 헌병과 里民 등이 충돌하여 사상자도 생겼다고 하는 것이나 자세한 것은 모른다.

卞相泰가 가지고 있던 통지서를 보았는가.

보았다. 그 서면은 卞相泰와 權아무개라고 하는 사람의 명의로 작성되어 있었으며, 음력 3월 3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참가하도록, 만약 참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집을 파괴할 것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나도 참가했던 것이다.

卞相泰는 그것을 마을 안에 돌렸던 것인가.

卞相泰와 權아무개가 40명 가량의 사람과 걸으면서 가지고 돌리고 있는 것은 보았다. 그래서 나는 卞相泰와 權이 주모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밖에 그와 같이 생각되는 것은 없는가.

4월 3일 아침 良村里 앞의 개울가에 모였던 사람에게 卞相泰와 그 權이라고 하는 자 및 日岩里의 黃淸一이라고 하는 자 등이 서로 연설하였는데, 누구나 조선독립운동에는 반드시 鎭東邑內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헌병에게 저지되어 발포당할지라도 그 탄환은 작은 콩알탄이므로 무서워할 것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이 주모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소요의 현장에서 볼 수 없었으므로 그 후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지 모른다. 들은 바에 의하면 卞相泰는 도중에서 되돌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 權이라고 하는 것은 權寧大이며, 黃淸一이라고 하는 것은 黃泰益이 아닌가.

그 본명은 모른다.

그대는 헌병소에서 취조를 받을 때, 卞相泰는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구타할 것이라고 하였다, 구한국기는 그가 재료를 주었으므로 이것을 만든 것이다, 3일 아침 卞相泰는 단장을 가지고 동리 안을 돌며 里民에 대하여 빨리 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자기도 간 것이라고 공술하고 있는데, 그러했는가.

참가하지 않으면 구타할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신문한 대로이며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위 소요 전 제1회 독립운동을 하여 權寧祚라는 자가 鎭東憲兵駐在所에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그때도 卞相泰가 주로 선동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것은 모른다.
본 신문은 입회 서기인 朝鮮總督府 재판소 통역생의 통역에 의해 이를 행하다. 앞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朝鮮總督府 재판소 서기 上野榮助
豫審掛 朝鮮總督府 판사 川野邊四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