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총사령부만으로 이루어졌다. 지휘부인 총사령부만을 조직하여 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다. 병력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선 총사령부부터 조직한 것이고, 이후 병력이 증가함에 따라 부대로서의 조직과 체제를 갖춘다는 방침이었다. 창설 이후 광복군은 총사령부를 기초로 하여 단위부대를 편성해 나가는 소위 하향식 편제방식에 의해 군대로서의 조직을 갖추어 갔다.

본 자료집에는 광복군의 조직 및 편제와 관련한 자료들을 모아 수록하였다. 조직과 관련한 자료들은 앞서 발간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중 ‘헌법・ 공보’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교섭’에 수록되어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에 광복군의 조직과 관련한 내용들이 들어 있기도 하고, 또 중국과 교섭을 벌인 자료들 중에 조직과 관련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급적 중복 수록을 피한다는 원칙 때문에 이들 자료는 본 자료집에서는 수록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병력의 모집과 충원에 관련된 자료를 비롯하여, 총사령부가 주관하여 설치한 ‘韓國光復軍官兵消費合作社’와 관련한 자료, 그리고 광복군의 역사를 기록한 ‘韓國光復軍小史’도 수록하였다. 수록한 자료는 重慶市檔案館・ 陝西省檔案館과 대만의 國史館 등에서 새로이 수집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이미 발간된 독립운동 관련 자료집들에서 발췌한 것이다.

총사령부

광복군의 기본조직은 總司令部와 支隊이다. 총사령부는 지휘부이고, 지대는 그 예하의 단위부대라고 할 수 있다. 지대의 하부조직으로는 區隊가 있고, 구대의 하부조직에는 分隊가 있었다. 광복군의 조직은 총사령부-지대-구대-분대의 편제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직체제는 처음부터 갖추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선 총사령부를 구성하여 광복군을 창설하였고, 이후 조직체제를 갖추어 갔다.

1940년 9월 17일 창설 당시 광복군의 조직은 총사령부 뿐이었다. 총사령부만을 조직하여 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다. 광복군이 창설된 중경에는 병력이 될만한 韓人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선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있던 군사간부들을 중심으로 총사령부를 구성한 것이다. 창설 당시 총사령부의 조직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1940년 8월 15일자로 발행된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에 다음과 같은 총사령부의 구성이 나타나 있다.

  총사령:李靑天

  참모장:李範奭

  참 모:菜元凱, 李復源, 李俊植, 金學奎, 公震遠

  부 관:黃學秀, 王仲良, 趙時元

  전령장교:高一鳴, 兪海濬

  주 계:安勳, 金毅漢, 李象萬, 閔泳玖

  군 의:劉振東, 林義澤, 嚴益根

  특무대:제1대 제2대제3대

  특파원

이는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면서 구성한 총사령부였다. 병력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선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군사간부들로 총사령부를 조직한 것이고, 1940년 9월 17일 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한 것이다. 총사령부성립전례식에는 이러한 구성원 이외에 임시정부 요인의 여식인 吳光心・ 金貞淑・ 池福榮・ 趙順玉・ 申順浩・ 閔泳珠 등도 참여하였다.

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거행된 직후 또 다른 총사령부 조직과 직원명단이 알려졌다. 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한 이틀 후인 9월 19일 金九가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朱家驊에게 총사령부 성립 사실을 보고하는 문건 가운데 다음과 같은 ‘한국광복군총사령부직원명단’이 별지에 수록되어 있다.

총사령:李靑天

  참모장:李範奭

  참모처장:蔡元凱

  부관처장:黃學秀

  정훈처장:趙素昻

  군법처장:洪震

  관리처장:金朋濬

  군수처장:車利錫

  군의처장:劉振東

  附 特務隊 및 路司令

   제1대 隊長:李俊植

   제2대 隊長:金學奎

   제3대 隊長:公震遠

   제4대 隊長:金東山

   이상 4隊 대원 60명씩 도합 240명

   제1路 東北司令 朴大浩, 제1로 현재 인원 4천 8백명

 이에 의하면 광복군은 비교적 정연한 조직을 갖춘 총사령부와 4개의 특무대, 그리고 동북지방에 제1로군으로 편제되었고, 병력은 5천명에 이르는 대규모 부대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러한 총사령부의 조직과 편제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는 광복군총사령부가 정연한 조직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것과 광복군이 동북지방과 연결되어 대규모 병력을 확보한 것처럼 중국측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의 조직체제를 확립한 것은 창설 이후였다. 1940년 10월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총사령부조직조례에 대한 심사가 이루어졌고, 10월 9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韓國光復軍總司令部組織條例’를 공포한 것이다. 모두 8개조로 구성된 ‘총사령부조직조례’는 총사령부의 위상 및 지휘체계, 간부의 역할 및 부서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총사령부의 조직과 부서는 총사령과 참모장을 중심으로, 10개 처의 부서를 설치하고, 특무대와 헌병대를 둔다고 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총사령:이청천

  참모장:이범석

  비서처:崔用德

  참모처:蔡元凱

  부관처:黃學秀

  정훈처:趙擎韓

  관리처:

  편련처:宋虎聲

  포병공처:

  경리처:趙擎韓

  군법처:

  위생처:劉振東

  특무대

  헌병대

  이것이 광복군 창설 이후 확립된 총사령부의 조직이었다. 총사령부는 성립 후에 조직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직은 갖추었지만, 이러한 조직을 운영할 만한 인적 기반은 없었다. 10개 처 중 7개 처에만 책임자가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7개 처도 최용덕・ 채원개・ 송호성은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었고, 조경한이 2개 처를 겸임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총사령부의 조직체제를 확립한 것이었다.

 총사령부의 조직과 더불어 그 단위부대인 支隊를 편성하였다. 지대의 편성은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전한 직후 이루어졌다. 총사령부는 1940년 11월 서안으로 이전하였다.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이범석은 중국과의 협의를 위해 중경에 남고, 황학수를 총사령 대리로 한 총사령부잠정부서를 편성하여 서안으로 파견한 것이다. 총사령부는 서안에 도착한 직후 서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군사특파단을 중심으로 지대를 편성하였다. 총사령부가 편성한 것은 모두 3개 지대였다. 이후 1941년 1월 서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정부주의 계열의 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광복군에 편입하여 제5지대가 되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성립 직후 지휘부인 총사령부와 4개의 지대를 갖추었다.

 창설 직후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4개 지대를 편제한 군사조직 체제를 갖추었지만,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게 되면서 조직의 대폭적인 개편 및 조정이 단행되었다. 1941년 11월 13일 중국군사위원회는 ‘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을 통해 광복군을 통할 지휘하는 조처를 단행하였다. 이와 함께 광복군측에 ‘韓國光復軍總司令部暫行編制表’를 보내왔다. 이는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통할 지휘하면서, 기존의 총사령부 조직을 개편한 것이었다.

 이 ‘잠행편제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총사령부의 조직을 대폭적으로 축소 단순화시켰다는 점이다. 이전의 총사령부는 총사령과 참모장을 중심으로 10개처의 부서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를 3개처(참모처, 총무처 정훈처)로 대폭 축소한 것이다. 둘째는 기존에 없었던 부사령과 부참모장을 신설하였다. 셋째는 총사령부에 중국군을 파견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중국군사위원회에서 광복군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는 조처였다.

 조직의 축소와 함께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총사령부를 중경으로 이전토록 하였다. 총사령부는 성립 직후 황학수를 총사령 대리로 잠정부서를 편성, 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서안은 중경과 2천여리 떨어져 있던 곳이다. 중경에 있던 중국군사위원회가 통할 지휘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서안의 총사령부는 1942년 10월 중경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총사령부의 조직은 또 한 차례 대폭적으로 개편되었다. 9개준승의 폐지가 직접적 계기였다. 1941년 11월부터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해 오던 9개준승은 임시정부의 끈질긴 교섭과 노력으로 취소되었다. 1944년 8월 23일 중국군사위원회 참모총장 何應欽이 9개준승의 취소를 통보해 온 것이다. 이로써 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임시정부가 통수권을 행사하는 군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총사령부는 자주적이고 독립성을 가진 조직체제를 갖추고자 하였고, 그 방법으로 총사령부의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총사령부의 조직 개편은 9개준승 취소통보가 있은 직후부터 추진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1944년 10월 23일 국무회의를 거쳐 중국군사위원회의 요구에 의해 임시로 시행되어 오던 총사령부의 조직과 1940년 10월 9일 공포하였던 ‘한국광복군총사령부조직조례’를 취소하고, 새로이 ‘韓國光復軍總司令部暫行組織條例’를 비롯하여 그 編制表와 支隊編制表를 공포하였다.

 개편된 총사령부의 ‘잠행조직’은 총사령과 참모장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고, 사무처리 부서로 참모처・ 부관처・ 정훈처・ 경리처・ 군법실・ 의무실 등 4처 2실을 갖추었다. 그리고 광복군을 통솔하는 기구로 통수부를 부활시켰다. 통수부는 1940년 11월 설치된 이후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게 되면서 페지되었다가 1944년 11월 6일 ‘大韓民國臨時政府統帥府’로 다시 설치되었다. 광복군의 통수권자는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조직과 지휘계통을 확립하였다. 광복군의 통수권자는 임시정부 주석이고, 총사령부는 통수부의 지휘를 받으며, 그 단위부대인 지대를 통솔하는 조직체제를 갖춘 것이다. 개편된 총사령부의 조직계통을 표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통 수 부,총사령부,총 사 령,참 모 장,고급참모,제3지대,제2지대,제1지대,군의실,군법실,경리처,정훈처,부관처,참모처

광복군의 조직계통을 확립하면서, 군인의 계급도 원래 광복군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환원하였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대한제국 군대에서 사용하던 계급을 사용하였으나, 9개준승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게 되면서 중국군의 계급체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총사령부의 조직을 개편하면서, 계급을 원래대로 환원한 것이다. 계급은 將官:正將・ 副將・ 參將, 領官:正領・ 副領・ 參領, 尉官:正尉・ 副尉・ 參尉, 士官:特務正士・ 正士・ 副士・ 參士, 兵員:上等兵・ 一等兵・ 二等兵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군인의 각종 표식과 제복도 새롭게 바꾸었다. 군무부가 제정하여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軍人의 各種 標式制定案’과 ‘軍人制服樣式制定案’을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지 대

총사령부 성립 직후 편성된 4개 支隊의 조직과 편제도 바뀌었다. 지대의 조직과 편제가 바뀌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이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에서 결성한 무장조직으로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통할 지휘하게 되면서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조선의용대측에 호의적이었던 중국군사위원회의 일부 인사들이 조선의용대를 광복군과 병행 발전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이를 추진하려고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반대하는 의사를 개진하고,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1942년 2월 11일자로 한국담당자인 朱家驊가 蔣介石에게 올린 簽呈(「김구가 올린 節略의 내용을 전하는 簽呈」)에 그러한 내용이 보이고 있다. 이에 의하면 김구는 주가화에게 “근자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국군사당국이 조선의용대를 새로 編組하여 광복군과 병행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한국 무장대오의 통일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내부 마찰을 일으킬 염려가 다분합니다”라며 중국군사당국의 의도에 반대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하고, “조선의용대 제1・ 제2・ 제3 각 지대원들이 모두 자진하여 북상을 위해 渡江한 뒤 남은 소수 간부 10여명은 무장세력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광복군에 귀속되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주가화는 김구의 이러한 뜻을 그대로 장개석에게 보고하였고, 장개석은 이를 중국군사위원회 참모총장 何應欽에게 연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조선의용대측과 이 문제를 협의하였고, 주가화는 그 결과를 1942년 5월 11일자로 김구에게 편지(「조선의용대 개편과 무기 및 급양지원 요청에 대한 중국당국의 결정내용을 알리는 편지」)를 통해 알려주었다. 그 내용은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합병 편조하는 문제는 金若山과 여러차례 상의하였습니다. 김약산은 자신이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하고 아울러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의 한 지대로 개편시키는 조건하에 광복군과의 합병을 수락하였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조선의용대 대장 김약산은 자신이 광복군 부사령이 되고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의 한 지대로 편제하는 조건을 붙여 광복군으로의 편입을 수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약산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김약산이 부사령을 요구하는 데 대해 처음에는 반대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김구는 1942년 5월 1일 주가화에게 공함(「陳國彬의 광복군 부사령 임명에 관한 김구의 公函」)을 통해, “군사위원회 방면에서는 조선의용대 진국빈(김약산) 대장을 광복군 부사령에 임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광복군의 편제에는 부사령 자리가 없습니다. 혁명과정에서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적당치 않은 조치로 여겨집니다”라고 한 것이다.

중국군사위원회는 김구의 반대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명령하였다. 1942년 5월 15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에 부사령 직제를 증설함과 아울러 김약산을 該軍으로 파견한다. 원래의 조선의용대는 該軍의 제1지대로 개편한다”는 내용의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및 광복군의 개편」에 관한 명령을 발동한 것이다.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이 발동되자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수락하기로 결정하였다. 1942년 5월 17일 김구는 하응흠에게 “우리 한국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김약산을 광복군 부사령 겸 지대장으로 결정하였습니다”라며, 그 사실을 통보하였다(「김약산을 광복군 부사령 겸 지대장으로 결정하였음을 알리는 편지」).

이로써 지대의 조직과 편제도 전면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결정에 의해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의하여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朝鮮義勇隊改編宣言」을 발표하고, 광복군 편입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하면서 광복군에 부사령 직제가 증설되었고, 지대의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의용대가 제1지대로 편성된 것이다. 그리고 기존에 편성되었던 제1・ 제2・ 제5지대를 통합하여 새로이 제2지대로 편성하였다.

지대의 개편은 모두 3개 지대를 편성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제1지대는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부사령 김약산이 지대장을 겸임하였다. 위치는 중경에 두었다. 제2지대는 종전의 제1・ 제2・ 제5지대 대원들을 통합하여 편성하였고, 지대장은 참모장 李範奭을 임명하였다(1942년 8월 12일자 「한국광복군 제2지대 편조 비준과 李範奭 지대장 임명을 알리는 訓令」). 위치는 서안에 두었다. 그리고 安徽省 阜陽을 중심으로 초모활동을 하던 징모제6분처가 대원들을 확보하여 1945년 6월 제3지대로 편제되었다. 지대장은 金學奎였다.

지대의 조직은 지대본부와 區隊로 편제되었다. 제1지대는 산하에 2개 구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제1구대는 湖北省 光化縣 老河口에서 활동하였다. 제2구대는 浙江省 金華에 있었다. 1943년 1월 24일 중국 제3전구 사령관 顧祝同이 장개석에게 보낸 보고(「공작진행을 위해 사업비 지원을 요청하는 李蘇民의 보고를 전하는 代電 」)에 제2구대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장 李蘇民이 사업비 보조를 청한다고 하면서 “본대는 이전에는 조선의용대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광복군으로 개편되어 군사위원회에 직속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군사위원회로부터 제3전구 장관부에 배속명령을 받았습니다”라 하고 있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하면서 전방에 나가 활동하고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을 구대로 편제한 것이다.

제2지대는 지대본부인 支隊附와 3개 구대로 편제되었다. 제2지대의 편제 및 간부명단은 1942년 「軍務部軍事報告」에 나타나 있고, 앞서 발간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임시의정원) 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제2지대의 조직은 지대장을 중심으로 하여 총무조와 정훈조로 구성된 지대본부, 그리고 그 산하에 3개 구대가 설치되어 있고, 각 구대는 3개 分隊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군사위원회가 실시한 광복군 점검과 관련된 보고에 “현재 南平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광복군은 1942년 10월 1일 남평에서 성립된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이며 분대장은 金文鎬입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공작대원 명단’을 첨부한 문건이 들어 있다(「한국광복군 점검결과에 관한 代電 」). 제3구대 제3분대가 1942년 10월 1일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그 대원들의 명단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총사령부 직원 및 병력

광복군의 기본적인 조직은 총사령부, 지대, 구대, 분대의 체계로 편제되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에서 창설한 것으로 한국인이 구성원이었지만, 중국군이 광복군에 파견되어 복무하기도 하였다. 총사령부와 그 예하의 단위부대인 지대에까지 중국군이 파견되었다.

총사령부에는 중국군이 파견되어 간부를 맡기도 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는 1941년 11월 광복군을 통할 지휘하기 시작하면서 중국군을 총사령부에 파견, 직원으로 복무하도록 한 것이다. 1942년 3월 13일 장개석이 군사위원회의 훈령으로 중국군사위원회 고급참모 尹呈輔를 총사령부 참모장으로 발령하였다(「광복군 참모장 尹呈輔의 발령에 관한 훈령」). 이에 따라 참모장을 맡고 있던 이범석은 제2지대장으로 전출되었다. 참모장은 윤정보에 이어 趙德樹가 임명되었고, 1945년 6월 1일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金弘壹이 부임할 때까지 중국군에서 맡고 있었다.

정훈처・ 참모처・ 경리처를 비롯한 각 부서에도 중국군들이 임명되었다. 1942년 7월 28일 王平一이 주가화에게 보낸 공함(「한국광복군총사령부 문제에 대해 王平一이 朱家驊에게 보낸 書函」)에는 정훈처장으로 부임하였던 王平一이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黃紹美가 임명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군이 광복군에 파견될 경우에는 상당한 대우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42년 8월 6일 정훈처장으로 임명된 황소미의 경우 중국군에서의 계급이 上校였지만, 少將의 급료를 지급받기로 하고 파견되었다.

처장 뿐만 아니라 각 科의 과장에도 중국군이 파견되어 복무하였다. 1944년 1월 5일자로 정훈처장 황소미가 중국군사위원회 인사처에 보고한 문건(「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조직훈련과장 인사에 관한 黃紹美의 보고」)에 정훈처 조직훈련과장 朱其瑞를 면직하고 上校급의 沈忠全을 임명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총사령부에 파견되어 복무한 중국군의 관좌이력표가 남아 있다. 1944년 1월 18일자로 황소미가 군사위원회 군정부에 보고한 문건(「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장 황소미의 보고」)에 첨부된 ‘육해공군 관좌 이력표’가 그것이다.

파견된 중국군 중에는 그 역할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어, 광복군의 발전에 방해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정훈처 조직훈련 과장을 맡고 있던 朱其瑞가 그런 경우였다. 정훈처장 황소미가 1945년 3월 23일자로 군사위원회 張治中에 보낸 書函(「한국광복군 인사문제에 관한 書函」)에 “주기서는 능력이 떨어짐에도 행동은 과장되고 공작에 힘을 쏟지 않아 가장 불합리한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주기서는 기회를 보아 자신이 이익을 취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과 “더 이상 방치해둔다면 정치공작의 존엄과 중한 두 나라의 우의를 해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인사조치를 요구한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병력의 충원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창설 당시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군사간부들과 중국의 각종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확보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총사령부와 지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병력확보의 기본적인 방법은 招募活動이었다. 기존의 대원들로 징모분처를 설치하고, 이들로 하여금 일본군 점령지역에 들어가 그곳에 이주해 있는 한인청년들을 포섭하여 데리고 나오도록 한 것이다.

이외에 일본군으로 끌려나왔던 學兵들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하였다. 학병들은 1944년 1월 평양과 서울에서 징집되어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 중 중국전선에 배치된 학병들이 일본군을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탈출은 중국대륙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들이 많이 찾아온 곳 중의 하나는 징모제6분처가 활동하고 있던 安徽省 阜陽이었다. 그 책임자였던 金學奎는 이들을 韓國光復軍訓練班으로 편성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한 후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김학규는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군사훈련을 마친 학병출신 중 일부를 중경의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1944년 12월 6일자로 김학규가 김구에게 보고한 「한광반 제1기 졸업생에 관한 보고」가 이와 관련된 자료이다. 이들이 중경에 도착한 것은 1945년 1월 말이었다. 중경에서 발행되던 중국신문 ≪中央日報≫는 “청년 34명, 부녀자 6명, 아동 4명 등 총 44명의 한인이 老河口를 출발하여 각지를 전전한 끝에 얼마전 중경에 도착하였다”고 하면서, 이들을 회견한 내용을 1945년 2월 4일자 「일본군대 내의 韓籍사병 귀순」이란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일본군을 탈출하여 곧바로 광복군을 찾아온 경우도 있었지만, 중국군 쪽으로 탈출해 온 경우도 많았다. 학병을 비롯하여 지원병・ 징병・ 일본군 군속・ 상업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청년들이 중국군 쪽으로 탈출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또 중국군에 귀순하거나 포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광복군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그동안 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알려진 것도 많지 않았다. 본 자료집에는 그 실상을 파악하고 짐작할 수 있는 몇 가지 자료들을 수록하였다. 1943년 12월 25일과 26일자로 중국 제5전구 사령관인 李宗仁이 장개석에게 보낸 전문(「韓籍 포로 11명의 한국광복군 이관에 대한 代電」, 「적 점령구역에서 넘어온 韓人의 처리방법을 문의하는 代電」)이 그 하나다. 이 자료는 중국군이 한인 귀순자와 포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것으로, 주요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현재 제5전구 사령장관부에는 洪寅英・ 金一東 등 귀순한 한인 2명 외에도 11명의 한인 포로가 더 있습니다. (중략) 이들은 모두 금년 9월경 군대에 징집되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10월경 長江 하류지역에 도착한 이들은 작전부대에 편입되지 않았습니다. 日人들을 위해 희생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이들은 후방에 한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자 곧장 일본군 진영을 탈출해 왔다고 합니다. 만일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의 요청이 있다면 이들 11명의 포로들을 광복군에 넘겨 공작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데 그렇게 해도 될지 지시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중국 제5전구지역에서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던 한인청년들이 귀순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임시정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에 잡혀 보호를 받게 되었고, 제5전구사령부에서는 이들을 광복군에 넘기고자 하였다. 그 여부를 장개석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중국군에서는 일본군을 탈출하거나 귀순하여 온 한인청년들을 대부분 광복군으로 인계하였다. 그러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 1944년 4월 1일자 ≪中央日報≫의 「적점령구역에서 귀순한 청년 4명 광복군에 입대」란 기사에 “周口 경비부대는 3월 중순 汎北에서 金象太・ 安國保・ 李濬承・ 韓春圭 등 4명을 포획하였다. 심문결과 이들은 모두 조선적 청년들로 적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한국광복군에 참가할 목적으로 우리측에 귀순하였다. 이들 4명의 청년들은 적절한 조치를 거친 뒤 광복군에 넘겨져 공작에 임하게 될 것이다”라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일본군을 탈출하거나 귀순해 온 한인청년들을 중국군에서 일정한 교육을 시킨 후, 이들을 광복군에 인계하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 제5전구에서 그랬다. 1945년 3월 11일자로 제5전구사령부에서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보낸 전보(「신입대원의 성적조사표 발송에 관한 代電」, 「한국광복군이 새로 초모한 대원의 조사표」)를 통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앞의 자료는 徐廷天 등 한인청년 12명을 제5전구 간부훈련단에서 훈련을 실시하였고, 그 사실을 군사위원회 정치부 및 광복군 정훈처에 통보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후자는 이들 12명에 대한 성명・ 출생・ 당적・ 가정상황・ 학력・ 직무경력・ 사상・ 훈련성적 등을 기록한 신원조사표이다.

제9전구 지역에서도 많은 한인청년들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1945년 4월 14일자로 장개석이 제9전구 사령관 薛岳에게 보낸 전보(「적구에서 넘어온 한인 40여명을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키라는 會電」)가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장개석은 설악에게 “적 점령구역에서 넘어온 한인 全在德 · 鄭功珠 등 40여명을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예하에 3개 분대, 각 분대 대원은 20명)로 편입시키고, 잠시 제9전구 사령장관부에서 지휘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지시하였다.

중국군에게 포로가 된 한인들도 광복군에 입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던 9개준승이 완전히 취소되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면서 중국측에 요청한 데서 비롯되었다. 1945년 5월 16일자 ≪中央日報≫의 「한인포로의 광복군 입대」라는 기사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중국군사위원회는 각지에 수용되어 있는 한인포로들 대부분이 일제의 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선에 투입된 사실을 주목하고, “이들 청년들이 속히 공작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군사위원회는 각지의 수용기관에 한적청년들을 우대할 것과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풀어줄 것을 통령하였다. 나아가 근자에는 각 수용기관에 통령하여 수용 중인 한적청년들을 모두 광복군에 넘겨 이들을 정식 대원으로 활동하도록 조치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5월 16일 오후 2시에 중경의 南泉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한적청년 수십명이 모두 석방되었고, 또 寶鷄수용소에 있는 한적청년들도 동시에 석방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이외에 총사령부의 주소를 비롯하여 광복군 활동지역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1942년 말 총사령부의 주소는 新生路 45號였다. 1942년 11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 관련 呈文」이란 자료에 총사령부 통신처가 “重慶 新生路 45號”로 나타나 있다. 1942년 12월 3일자로 중국측이 광복군 부사령 김약산과 접견한 기록(「金若山과의 회견기록」)에도 “한국광복군총사령부는 新生路 45호에 있으며”란 기록이 있다. 총사령부는 창설 직후 서안에서 활동하다가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1942년 10월 중경으로 돌아왔다. 그 주소가 ‘新生路 45호’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1945년 1월 현재는 총사령부가 ‘重慶 鄒容路 37號’였다. 1945년 1월 15일자로 정훈처장 황소미의 보고(「한국광복군의 과거 경험과 장래 발전 방침에 관한 보고」)에 주소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제1지대 제2구대는 “鉛山 서문 밖 貴溪鄕 사범학교 내에 주재하고”라 하여(「鉛山 주둔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의 근황」), 그 위치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본 자료집에 수록한 또 다른 자료들이 있다. ‘韓國光復軍官兵消費合作社’의 실상을 밝혀주는 자료와 『韓國光復軍小史』가 그것이다. ‘한국광복군관병소비합작사’는 중경에 있던 총사령부에서 장교와 사병들의 복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창립회결의록과 관병소비합작사명단 등을 비롯하여 모두 12건의 관련 자료가 있다. 이 자료는 중경시당안관에서 수집하였다. 학계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자료이다.

총사령부에서는 1942년 11월 관병의 복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한국광복군관병소비합작사’(이하 소비합작사로 약칭)를 설립하였다. 「유한책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 창립회결의록」은 소비합작사를 창립한 회의록이다. 이에 의하면 1942년 10월 17일 총사령부 총무처장 崔滄石(崔容德)의 주관하에 관병소비합작사 창립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관병의 복리를 도모하기 위한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명칭을 ‘유한책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업무범위는 총사령부와 제1지대의 장교와 병사로 정하였다. 당시 중경에 주둔하고 있던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제1지대였다. 중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광복군의 복리를 위한 소비합작사를 설립한 것이다.

소비합작사의 구성원은 사원이라 하였고, 총사령부 직원과 제1지대 대원들로 구성되었다. 「유한책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 사원명단」은 사원의 명단을 작성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총사령부 직원이 83명, 제1지대 대원이 267명이다. 사원이 모두 350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광복군에 파견되어 복무하고 있던 중국군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화북지역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 대원들도 명단에 들어 있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중반 대원들 대다수가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중경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광복군에 편입되어 제1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1지대가 화북으로 이동한 대원들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소비합작사는 일종의 주식회사였다. 「유한책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 章程」은 소비합작사의 성격・ 운영 등을 규정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사원은 주식을 구입하였다. 주식은 1주당 400원이었다. 사원은 최소 1주 이상 소유할 수 있었고, 전체 주식의 2할을 초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사원은 구입한 주식에 책임을 졌다. 유한책임인 것이다. 앞에 언급한 ‘사원명단’에는 사원의 성명과 함께 소유한 주식과 금액이 표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총사령 이청천은 20주(8,000원)의 주식을, 부사령 김약산은 25주(10,000원)를 소유하였다. 사원들 대부분은 2주(800원)를 소유하고 있다.

소비합작사는 관병의 생활을 개선하고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그 「章程」에는 소비합작사의 경영업무에 대해 “일상 생활용품(밀가루・ 연료・ 설탕・ 옷감・ 문구・ 잡화 등)을 구매하여 사원에게 판매한다”고 하였다. 당시 중경은 일본군에게 남경을 점령당한 중국정부가 이전하여 임시수도로 정한 곳이었다. 임시수도가 되면서 중경의 인구는 크게 증가하였고, 물가도 폭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정적인 생활확보를 위해 생활용품을 단체로 구입하여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설립한 것이 소비합작사였다.

총사령부에서는 소비합작사를 설립한 후 중경시 사회국에 등기를 요청하였다. 1942년 11월 28일자로 된 「관병소비합작사 등기에 관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公函」이 그 자료이다. 총사령부의 요청에 대해 중경시 사회국은 1942년 12월 9일자로 국민정부 사회부에 “한국광복군총사령부가 異國 명의로 합작사를 조직하는 것은 합작사법 제11조 제1항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할지 몰라 보고드리오니 합당한 조치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국민정부 사회부에서 지시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국민정부 사회부는 1943년 1월 4일 중경시 사회국에 지령을 보내(「관병소비합작사 성립에 관한 지령」) 군사위원회 정치부에서 관병소비합작사 등기증을 발급하도록 허가를 받았으니 등기증을 발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경시 사회국은 1943년 1월 18일 총사령부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있다(「관병소비합작사 성립에 관한 公函」).

『韓國光復軍小史』는 광복군 제2지대에서 펴낸 것이다. 발행일은 1943년 3월 1일로 되어 있다. 이는 광복군이 탄생하기까지 30여년에 걸친 분투의 역사와 창설 이후 2년여의 활동을 소개한 것이다. 목차는 머리말과 결론을 비롯하여 모두 7장(1장:한국독립전쟁의 제1막, 2장:맹렬하게 전개된 의병운동, 3장:광복운동의 중심이 국내에서 동북으로 옮겨지다, 4장:동북에서 펼쳐진 광복운동의 휘황한 성적, 5장:9 · 18 이후의 광복운동, 6장:한국광복군의 성립, 7장:지난 2년 반의 한국광복군)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자는 광복군의 뿌리를 대한제국 국군에 두고 있다. “1907년 한국국방군 해산일은 또한 한국광복군 창설일이라 할 수 있다”라며, 한국광복군은 최근에 출현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36전부터 존재하였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제1장에서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는 과정과 대한제국 군인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전개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논거를 근거로 “한국혁명자들은 8월 1일을 한국독립전쟁기념일로 삼고 있다. 이날은 또한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광복군이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창설되었지만,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전개한 8월 1일 광복군이 탄생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의병운동에 대해 서술하였다.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호걸지사와 열혈청년들이 다투어 무기를 손에 들고 함께 왜적에 대항하였다”며, 8년여의 의병운동 기간 5만여명의 의병들이 사상을 당하였고, 왜군도 4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하면서, 의병운동을 영도하였던 20명(李麟榮, 金秀敏, 閔肯鎬, 崔益鉉, 李殷贊, 許蔿, 池弘允, 延基羽, 朴汝成, 全羅山, 李鎭龍, 菜應彦, 李康秊, 崔在亨, 黃重玉, 徐相烈, 盧熙泰, 金錫夏, 高元植)의 이력과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의병과 신민회 인사들이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동북으로 이주한 사실과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항일무장단체들을 조직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동북지방은 한인교포들이 많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무장운동의 가장 좋은 근거지로 적합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고 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혁명단체는 거의 모두가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동북지방에서 활동한 많은 단체들을 거론하면서, 그 중에서도 대한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한국독립군・ 고려혁명군・ 조선혁명군의 조직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제4장은 1919년 3・1운동 무렵부터 1931년 9・18사변이 발생할 때까지 동북지방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과 그 성과를 설명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2천여차례 이상이나 전개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약 4만명, 한국의 무장대오도 5만여명의 희생자가 났다고 하였다. 동북에서 벌어진 항일무장투쟁은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사적이 수없이 많다고 하면서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柳河・ 海龍전투, 通化・ 興京전투, 시베리아에서 고려혁명군이 일본군을 공격한 泥港사건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제5장에서는 9・ 18 이후 동북에서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이 중국군과 함께 연합하여 일본군과 대일항전을 전개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한국독립군의 활동을 吉林自衛軍 및 護路軍과 연합하여 中韓聯軍을 건립한 시기, 中國救國軍과 연합하여 中韓聯軍討日軍을 조직한 시기로 나누어, 시기별로 일본군과 전개한 대일항전의 성과(쌍성보전투, 경박호전투, 동경성전투, 대전자령전투 등)를 서술하였다. 조선혁명군이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는 사실과 신빈현・ 영릉가전투 등에서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는 사실도 소개하고 있다.

제6장에서는 광복군이 창설된 과정과 성격・ 임무 등을 서술하였다. 이를 통해 광복군은 “한국임시정부에 예속된 군대”임을 천명하고, “광복군은 3천만 대한인민의 군대이자 한국무장혁명역량의 영도중심” “광복군은 한국을 부활시킬 구제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광복군의 임무를 현단계에서는 국내외 모든 민중의 무장반일운동을 영도하고 추진해 나갈 것, 장래에는 신한국의 건국과 건군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광복군 창설에 대해 국내외 한인들이 축하하고 흥분하여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며, 그 사례로 길림과 장춘에서 한인기독교도 수백명이, 또 안도현에서도 한인 수천명이 폭동을 일으킨 사실을 들었다.

제7장은 창설 이후 광복군의 활동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하에 놓여 처지가 매우 곤란하지만, 이를 악물고 분투하고 있다며 적후공작과 초모활동, 대적선전, 일본군에 있는 한적사병의 귀순 유도, 일본포로 심문 및 한적포로 훈련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창설 이후 1년간의 활동 가운데 군사기밀과 관련된 내용을 제외하고 공개적으로 보고할 수 있는 내용을 13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중국의 태도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여, 중국이 한국을 도와야 하는 당위성과 이유를 피력하였다. “중한관계를 언급하자니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며, “중국이 진정 한국을 위해 도와준 것이 무엇입니까. 중국인 가운데 진심으로 한국문제를 연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라며, 중국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당나라 고종이 劉仁軌를 파견하여 신라를 도운 일, 원나라 세조가 왜적을 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 사실,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이 공동으로 왜적을 막아낸 일 등의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며, 한중연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광복군에 대한 중국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촉구하였다.

한시준(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