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한민』 제22호(1940. 7. 15)  

『한민』 제22호(1940. 7. 15)

最後消息 軍事大員繼續出發

 한국국민당 리사장 김구 선생은 지난봄에 그 당을 대표하야 광복군건립계획과 아울너 그에 대한 원조를 중국 당국에 요청하였는바 별항보도같이 장개석장군의 쾌락을 얻었다. 국민당의 사업을 인계한 한국독립당에서는 광복군의 건전한 발젼을 위하야 소유의 력량을 정부에 공헌하자는 그 당 결의에 의하야 금번에 중국 당국으로붙어 허락을 받은바 광복군 조직 활동에 대한 일체 권리를 정부에 밧친 것이다. 이것을 받은 정부에서는 광복군에 관한 조직 조례 등 일체 법령을 일간에 반포하리라 하며 그와 동시에 참모장 유동열장군으로 하야금 청년군관 ○○인을 대동하고 모지로 가서 죠성환 · 황학수 등 장군으로 더부러 광복군 건립의 제1보공작을 개시하리라 한다.

[社論] 韓國獨立黨의 誕生과 韓國革命

 우리는 약한 힘으로써 강한 적을 타도하랴는 혁명자다. 우리에게는 생과 사의 판가리 싸홈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성패를 불계하고 항상 맹열한 투쟁을 통하야 최후승리를 쟁취하기까지 노력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우리가 최후 승리를 쟁취할 수 잇는 요소는 세 가지가 있다. 첫재, 우리의 힘이 적을 타도할 수 있을 것. 둘재, 젹이 제삼국에게 견해할 때. 셋재, 젹의 내부에 혁명이 일어날 때다. 힘은 집중되어서 그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오. 분산된 데서 그 효용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강한 힘도 분산되면서 해지고 약한 힘도 집중되면 강해지는 것이다. 젹이 강하다 하여도 그 내부에 잠재한 군벌과 재벌 호상 간에는 그 자쳬간의 모순이 자라가는 중에 더욱 중일전쟁으로 인하야 국세가 백공천창의 곤경에 빠졌으며 또 빈곤 중에서 생명의 보장까지 잃은 그 인민의 졍부에 대한 반감은 내부혁명을 폭발식히고야 말 형세에 있다. 지금 일본제국주이의 환절(고리)에는 곳곳이 약점이 생겼다. 우리의 적은 힘이라도 능히 한점으로 집중한 후 이야 한마디만 끊어버리면 일본제국주의는 붕괴되고야 말 것이다. 이에서 우리는 최후 승리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태양광선으로 하여금 화경을 통과하야 한 초졈으로 집중하게 하면 불이 일어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적은 힘이라도 능히 한 초졈으로 집중하게 하면 강한 젹도 살라버릴 수 잇는 것이다. 그럼으로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이라 하는 것이다.

 한국독립당의 탄생은 한국혁명에 새 무기가 생긴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를 잃은 후 30년 동안에 맹열한 혁명운동이 꾸준히 게속하여 왔지만 단결의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는 까닭에 큰 효과를 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창립된 한국독립당은 3개 이상의 혁명단체가 동일한 목젹 · 신앙 · 결심 하에서 투쟁의 력사가 길고 뎍망과 공로가 아울러 높은 우리 운동게의 령수인물을 중심으로 한 분명한 채게와 엄밀한 조직과 광명한 주의로써 강철과 같이 뭉친다. 전에 업든 강유력한 당이다. 몰락되여 가는 점이 최후 발악을 하고 있는 이때에 이 당이 탄생한 것은 한국혁명의 완성이 멀지 아니한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우리 한인으로서 누가 이를 축하하지 아니하며 옹호하지 아니하랴.

 그러나 한국독립당이 탄생되였다고 우리의 혁명력량이 다 집중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당을 옹호만 하지 말고 한거름 더 나가서 이 당의 당원이 되자. 먼데서붙어 시작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갓가운 광복진션에서붙어 시작하자. 그리고 림시졍부를 뎌욱 강화하자. 이것이 젼 민족의 힘을 뭉치는데 첫거름이며 또 가장 유력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이 될가 하는데 대하야 구체문제는 뒤로밀고 위선 추상젹으로라도 당면문제에 대한 의견을 간단이 말하면 미주와 같은 곳에는 중요한 지방에 교민단 같은 성질의 단쳬를(명칭은 무엇이라 하는지) 하나씩만 주어(북미의 대한인 국민회와 같이) 그 지방 동포들의 자치사업만 전문으로 연구실행하고 혁명사업을 위하여는 동일한 목젹과 신앙을 가진 원동의 독립운동자들과 반드시 일개의 당원이 되어써 그 정신과 력량을 통일하는 것이 최량책이다. 이것이 혁명원측에 부합됨은 물론이어니와 광복군이 즉일에 성립되여 모든 것이 군사젹으로 진행하는 이때에 있어서 더욱 그러한 것이다.

 공산주의자에게 대하여도 통일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꼭 같다. 우리의 내외정세가 위급한 것을 그들도 좀 더 졀실히 인식하고 종래의 종파젹 관련과 산만한 행동을 청산하고 신속히 자체의 통일을 완성한 후에 남과 같이 국가제일, 민족제일, 군사제일, 승리제일 등 구호 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우리와 공동분투하지 현계단의 우리의 목표는 동일한 것이다. 광복군이 우리의 손으로 조직된다고 해서 조선의용대에 방해될 일이 없는 것이다. 광복군은 중한연합군의 단위가 될 한인의 독립젹 부대이며 의용대는 중국군 시위원회 정치부에 부속한 비무장젹 선전대라는데서 근본젹으로 성질과 사업이 판이한 것이니 괴차에 하등의 마찰이 없을 것은 물론이어니와 광복군으로 인하야 의용대와 민족적 지위도 제고될 수 있는 것이며, 또 의용대로 인하야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호감을 증진할 수도 있는 것이니 광복군과 의용대는 앞으로 사업에 있어서 충돌이 없을 것을 단언할 수 있다. 해외에 최소한도라도 원동과 미주에 있는 공산주의자들도 하나이 되라. 만일 자체의 통일을 실현하지 못하고 현상대로 공작을 진행하면 그 결과는 의식젹으로 무의식젹으로 우리의 민족젹 혁명력량을 분산식힐 것 뿐이다. 우리는 조국광복을 위하야 동주의자의 촉진하는 동시에 타주의자의 통일도 간절히 히망하는 것이다. 전 민족젹 혁명력량의 집중을 신속히 실현하기 위하야

韓國獨立黨 創立

 통일이 우리의 무기라는 것을 우리가 입으로 부르지질 뿐 않이라 실재 경험에서도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운동서에서는 내용으로는 통일을 파괴하는 자도 민중을 속이기 위하야 입으로는 통일을 열열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금번에 한국독립당의 창립은 비로소 누가 진정한 통일을 주장하는 자이며 누가 거짓통일을 주장하는 자인 것을 민중 앞에서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본래 광복진션 삼당은 먼저 그 자신의 통일을 완성하여 해외의 민족운동자의 대동단결을 실현한 후에 비로소 공산주의자들과도 통합작을 하는 것으로써 통일방안을 세웠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제기하는 자들은 통일이라는 미명으로써 도로혀 이것을 방해하여 왓다(별항 한국독립당 창립경과문을 참조). 그리하야 통일이 예정계획보다 지연된 것만은 사실이다. 사필귀정으로 지난 5월 9일에 긔강서 대성황리에 세 당은 해체되고 새로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였다(해체선언과 창립선언은 이미 인쇄 배부한 까닭에 본지에 등재치 아니함). 이와 같이 복잡다단한 중에서 만난을 배제하고 우리 민족운동의 총본영이 될 신당이 탄생하니 일반 혁명동지와 동포는 미칠 듯이 깃버하였다. 만인 환호 중에서 성립된 한국독립당은 우리 광복운동자에 가장 영광스러운 한 패자를 더하였으며 대책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도 획시기젹 신기원을 지은 것이다. 그 당의 간부는 여좌하다.

  執行委員長 金九

  執行委員  洪震 · 柳東說 · 趙琬九 · 車利錫 · 朴贊翊 · 趙素昻 · 李靑天 · 金朋濬 · 崔東旿 · 楊墨 · 嚴恒燮 · 金學奎 · 安勳 · 趙時元

  常務委員  趙琬九 · 趙素昻 · 李靑天 · 金朋濬 · 嚴恒燮

  監察委員會 李始榮

  監察委員  宋秉祚 · 閔丙吉 · 金毅漢 · 公震遠

[社告(1)]

 일직이 반정동포를 위문하고 격려하기 위하야 위문금을 모집하든바 이제 광복군이 조직됨을 따라 이런 사업은 응당 광복군 사령부에서 처리할 것임으로 앞으로 위문금을 보내실 이는 직접 림시졍부 군무부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그 전에 본사로 보내시는 위문금이 있으면 본사에서는 군무부로 전하겠읍니다.

[社告(2)]

 본사에서는 이번에 본보의 배포망을 정리하야 독자들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젼해지도록 하였읍니다. 따라서 미주와 하와이에 게신 독자 여러분에게 국민회를 통하여 배포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이후로는 미 · 묵 · 큐 등지에 게신 분은 미주국민회로 하와이에 게신 분은 하와이 국민회나 동지회로 본보를 청구하여 보시기를 바람니다.

韓國獨立黨 創立 慶祝大會

 黨成立에 對한 響應

 지난 5월 9일에 한국독립당이 혁명민중의 환호 중에서 장엄하게 창립된 것은 별항 보도와 같거니와 동 17일 하오 2시에는 림시정부 소재지요 한국독립당의 탄생지인 그 지방에서 남녀로소 100여명이 셩대한 경축대회를 열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이날을 경축하기 위하야 공부를 정지하였다. 리시영 선생의 사회로써 순서를 따라서 회는 정중히 진행된바 장소는 작년에 7당통일회의의 성공을 위하야 7당대표환영회를 열든 그 자리며 인물도 새 옷을 입고 나온 어린아이들까지 작년의 그 사람인데 다만 민족전선 대표만 없었다. 일반 민중은 환소와 흥분된 태도로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남녀 동지들의 이미 된 통일을 경축하며 또 장래의 더 큰 통일을 완셩하자는 우렁찬 음셩은 강유력한 리론에 마치어 억양이 분명하매 청중의 정서는 극히 격앙하였고 더욱히 통일을 갈구한 어린이의 부드러운 노래는 각 개인의 가슴을 꼭꼭 찔러서 었지 할 줄 모르게 통일을 파괴하는 자에 대한 의분을 젹발식혓다. 그 회는 동일 하오 4시 반에 마치였다고 한다.

在美 各 團體에서 韓國獨立黨 創立을 祝賀

 민족주의자의 통일당인 한국독립당의 창립에 대하야는 내외 인사의 기대가 컷드니만큼 그 소식이 한 번 전 세상에 젼하여지자 여러 곳에서 축하하는 이가 많은데 그것을 일일이 소개하는 것은 지면관게로 할 수 없고 그 중 멀리서 온 것만 몇 개 추리여 소개한다.

 하와이 국민회에서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각하

 3당 통일의 완성에 관하와 젼에 일치로 만공 열성젹 축하를 드리나이다.

 제위 션생의 성대한 회의를 모준하와 미포에 재류하난 소수 남아의 동족 간 단합을 속성하였으면 하는 의사가 간절하오나 매번 시험할 때마다 실행의 난관에 걸리여 실패되오며 실패할 때마다 감정의 악화가 우심하여지는 과거의 실감으로 주져하는 바이올시다. 차제에 만일 졍부대표 겸 한독대표 일인을 파송하였으면 내부통일과 외면의 활동에 막대한 도움이 있겠아오며 …… 만만사 고하신 후 회교하심을 바라나이다.

대한민국 22년 5월 11일

조명요

 미주국민회에서

 공문 제159호 한국독립당 집행위원감찰위원과 젼체 당원 선생 위감

 대한민국 22년 4월 1일에 귀당이 정식성립된 것을 봉문하옵고 대한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와 중앙상문위원회난 전톄 회원과 갗이 가장 큰 정셩을 가져 자에 축하문을 드리나이다.

 광복진선 3당의 통일로 한국독립당의 셩립은 우리 민족이 자력갱생으로 드러가는 첫길이올시다. 언제든지 우리 민족은 반듯이 이 길로 들어가야 국가광복의 목젹을 탈할 수 있거늘 과거 30년간 이 길로 들어가기 어려워 기로에서 방황하다가 금일에 비로소 이 길로 들어서니 젼도는 졍셩단결이오. 력량집중이올시다. 하강 불좌이리오. 대업가셩이올시다. 본회 동인은 먼저 하사를 드리오며 아울러 후진을 딸어 동포를 공부하기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22년 2월 9일

대한인국민회중앙집행위원장 한시대

중앙상무부총무 김병연

 대한인부인구제회 중앙부장 심영신씨 축하문

 중국안에 재류하시는 우리 운동의 여러 령수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야 십수년동안 노력하시다가 이제 내외의 형세가 통일을 졀실히 요구하는 엄중한 시긔에 있어서 능히 각자의 당을 히생하시고 통일된 한당 한국독립당을 창조하심에 대하야는 만간의 열셩으로 치하하오며 무한한 정의를 표하나이다.

대한민국 22년 6월 4일

대한인부인구제회 중앙부장 심영신

서긔 김헬렌

 이외에도 동지회 중앙부장 손승운씨로부터 6월 9일발로 한국독립당 창립을 치하하는 글을 김구 션생께 보내였다.

 統一을 爲하야 前 解盟도 積極努力

 민족젼선련맹에서도 소속삼단톄 통일을 위하여 수삭동안 회의를 게속하였다. 그러나 젼 · 해 량맹과 민혁당 간에 의견이 대립되였다. 젼 · 해 량맹에서는 공산주의자는 공산당 이외의 당을 갖일 수 없다 하나 민혁에서는 꼭 당을 고집하였다. 2대 1로 민혁은 또 물러났다. 이에 김규광 · 왕지연 · 김강 동지는 량맹 통일의 셩공을 긔약하고 모지로 떠난다 한다.

玄河竹 先生 逝世

 일즉이 만주에서 다년간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공산주의운동의 거성인 현하죽 선생은 9 · 18만주사변 이후 만주를 떠나 화북에 오서서 부단히 우리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하섰고 최근에는 중경에 오서서 우리 혁명단톄의 통일을 촉성하시다가 불행이도 뜻을 이루시기 전에 불치의 병으로 금년 5월 10일 하오 7시 중경 남안 인제 의원에서 동지들의 기대를 어기고 이 세상을 떠나섰으니 형년은 56세이시다.

선생이 도라가신 후 3일 즉 5월 13일 중경에 있는 우리 혁명단체들은 남안 화상산 묘지에서 선생의 장례를 거행하였고 6월 30일에는 남안 워꿍뽀에서 선생의 추도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려유조선부녀회, 조선의용대 중국방면에서는 조선의용대, 주임지도위원, 주함당씨 등 3인과 대만의용대 대만혁명단톄련합회 그리고 중국공산당기관지 신화일보사와 제18집단군 공산당의 계통 주유관사처에서 각기 만연을 세왓다. 그 회는 오후 3시에 개회하야 4시에 폐회하엿는데 각당 대표들의 추도사 랑독과 자유연설도 있었다 한다.

故 石吾 李東寧 先生 追悼會

 우리의 선각자이며 도사인 석오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후로 동지 동포들의 비애는 무엇에 비할 수 없다. 서안에 있는 림시정부 군사특파단과 그곳에 있는 동지들의 주최로 장엄한 추도회를 연 것을 시초로 하야 락양의 조선의용대, 강서의 조선의용대, 또 멀니 태평양 건너 하와이군도의 국민회 · 동지회 · 동맹단, 하와이 전도민중대회 미 본국 로산젤스의 북미대한인국민회에서도 다 각각 엄숙한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한다. 특별히 신한민보에서는 호의로써 부음을 전하였으며 하와이 대한인부인구제회에서는 조무신과 함께 부의로 미화 30원을 보냈다. 또 하와이에 있는 동지회 · 한인긔독교회 · 부인구제회 등 3단체에서도 미화 31원을 보냇다. 선생의 장례는 국장으로 정부에서 하였음으로 그 부의금은 장차 선생의 기렴사업의 긔금을 삼으리라는데 물론 어느 단톄나 개인이 부의금을 보낼 의사가 있으면 그 돈을 재무장 김구 선생께 보내여 긔금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在美 布 · 墨 · 古 同胞에게

 태평양 저쬭에 게시는 동포들! 지금은 무더운 여름이외다. 얼마나 고생을 하십니까. 신문지상을 통하야 아시겟지만 요즘 한 달 이상을 왜놈의 비행긔가 거의 매일 이 중경으로 날러와서 폭탄을 나려드러 집을 부시고 긔관총을 노아서 중국 백성을 죽이고 있읍니다. 아마도 중경시가의 3분의 1은 부서졌을 것입니다. 최근 전해오는 소식을 들으면 이렇게도 잔인하게 중경을 부시는데도 깟닥없이 백성들이 자긔정부를 여전히 옹호하고 더욱 왜놈에 대한 적개심이 □□하여지는 까닭에 왜놈들은 중국 백성들의 기운을 □이 위하야 비밀히 일본으로부터 2,000파운이나 되는 무겁고 큰 폭탄 60개를 한구로 갖어 왓다는 □□ 것은 전문으로 중경을 전부 회까루를 만들기 위해서이라 합니다. 비록 우리 사무실 좌우에도 여러 개 폭탄이 떠러졌지만 우리는 멀리 계신 여러 동포들의 염려하여 주신 은혜로 아모 일 없이 중경에서 그대로 버티고 있읍니다. 앞으로 이 중경이 완전히 회까루가 되더래도 우리들은 끝까지 하든 일을 계속 할렵니다. 이렇게 하는데서 우리는 여러 동포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없을가 하야서입니다.

 동포들! 이렇게 두어 자를 써놓고 다시 무었이라고 말슴을 들여야 할지 모르겠읍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을 쑥 솟아나오며 붓을 쥔 팔이 경련을 일으키며 목이 콱 메여옵니다. 일즉이 동포들은 참아 떠날 수 없는 졍든 고향을 떠나서 산 설고 물 설은 남의 땅에서 가진 고생을 하시면서도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한 번도 한때라도 조국의 자유를 다시 찾을려고 노력을 쉬이신 때가 없읍니다. 일즉 이 동포들은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군을 도와서 우리 독립운동사상에 광영을 준 청산리 젼쟁을 만들었으며 9 · 18사변 이후 일시 우리 운동이 고요할 때 여러분의 혈성은 리봉창 의사의 왜황조격사건 그 뒤를 이여 윤봉길 의사의 상해 횽큐공원사건을 만들었으며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우리 림시졍부의 광복군 준비공작(군사특파단)이 이미 여러 동포의 성의로 인하야 그 긔초가 서젔으며 중국 최고령수 장개석장군의 허락으로 광복군이 정식으로 성립되게 되였읍니다. 여러 동포들은 리승만 선생 한시대 션생, 김병연 션생, 조병요 션생, 심영신 션생 등 현명한 령수의 령도 하에 정신상뿐만 아니라 아울러 물질상에도 피와 땀으로 바꾸어온 다수한 금전을 림시정부에 보내여 우리 혁명성공의 긔초가 되는 광복군을 조직하게 되였으니 여러분은 이믜 우리 조국에게 큰 영광을 돌리었읍니다. 듣자오면 더욱이 멕시코 메리다에 게신 여러분 동포들은 일자리가 없어 사라가기 퍽 골란하여 미주 대한인국민총회에서 구제금을 보내엿는데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이하시고 그대로 림시정부에 보내셨다고 하니 이 곧에 있는 우리들은 물론이오. 전선에서 싸호는 동지들도 이 소식을 듣고는 여러분의 혈성에 대하야 머리를 숙일줄 압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러한 동포들의 성의는 반드시 우리 민족을 부흥식히고 머지않은 앞날에 독립이 반드시 성공될 줄 압니다.

 동포들! 비록 우리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수 없고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여러분의 귀하신 정신과 뜨거운 셩의를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우리가 었지 멀리 떠러저 있다고 하야 여러 동포의 애국정신과 혈셩을 저버릴 수 있겠읍니까. 우리는 동포에게 향하야 림시졍부에 향하야 그리고 하날을 향하야 서약합니다. 조국을 위하야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경건한 마음으로 바른손을 하늘로 향하야 높이 듬니다. 동포들! 동포들! 아모쪼록 끝까지 공동분투 합시다.

大韓人國民會 北美地方 總會 積極 後援을 決議

 光復軍에 對한 反應

 오래동안 계획 중이던 광복군조직이 한번 세상에 전해지자 큰 긔대와 히망을 가지고 기다리든 각지 동포들의 기뻐함은 크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적극적 후원을 하겟다는 소식이 적지 않다. 북미주에 있는 동포들도 이 소식을 듯고 지난 6월 8일 긴급회의를 열고 광복군을 힘 있게 후원할 것을 결의하였다는 보고가 왓으니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김구 선생 헤감 …

  헤함을 배수하와 우리 림시정부로써 완전한 독립성을 갖인 한국광복군 조직에 착수하야 2,500만 총동원령을 내린 것과 중국 최고령수 장개석 선생이 중국○○○에 령을 하야 한국광복군 조직에 협상진행을 지휘한 공보를 듯자오니 이것이 우리 광복전도가 전개되난 대사건이올시다. 국민회 중앙삼부난 6월 8일 긴급회의를 열고 광복군조직을 힘 있게 후원하기로 결의하였고 현명하신 정부당국의 계획이 위대하시고 퇴고가 다대하심을 위하야 이에 치하서를 드리나이라.

대한민국 22년 6월 8일

대한인국민회중앙집행위원장 한시대

중앙상무부총무 김병연

 □□□ 도 6월 19일 하와이발 동지회 중앙부장 손승운씨로붙어 광복군성립을 축하하는 동시에 힘 있는 데까지 적극 후원하겠다는 글이 왓다.

광복군을 옹호하자!

大韓人國民會와 婦人救濟會에서 蔣介石將軍에게 致敬

 우리 광복군을 조직하는데 대하야 적극적으로 후원하겟다고 승락한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장군에게 향하여 하와이에 잇는 대한인국민회 회장 조병요선생과 한국부인회 회장 심영신 선생으로부터 감사한 뜻을 표시하는 뎐보를 발했는데 그 내용은 지난 6월 22일 중경 각 신문에 게재된바 아래와 같다.

  장위원장 각하 …

  귀하로부터 한국동포들이 귀국 령토 안에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는 것을 허락하고 아울러 원조하여 줄려고 하는데 대하야 매우 감사합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정의와 인도가 깨여진 이때에 귀국 졍부의 이번 일은 진실로 정의를 옹호하며 중 · 한 량국의 련락을 촉진함을 충분이 표시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귀하의 불굴 불요의 굳은 정신으로 진정한 화평을 위하야 노력하심을 경탄하고 축하합니다.

 이 외에 하와이 동지회에서도 장개석장군에게 우리 광복군 조직을 준허하여준데 대하야 사의를 표하는 글을 보냈다고 그 회 중앙부장 손승운씨로부터 백범 선생께 편지가 왓다.

 광복군을 옹호하자!

朴始昌 同志 中國戰線에 出戰

 고국무령 백암 박은식 선생의 자제 박시창 동지는 지난 6월 모일 중국 군사당국의 출전명령을 받고 중국군인 천여 명을 거나리고 ○○방면에 가서 큰 싸홈에 참가하였다.

 박시창 동지는 일즉이 13년 전에 황포군관학교 포병과 제5회를 우수한 셩젹으로 졸업하고 니여서 중앙군교 군관단과 포병학교 등을 졸업한 뒤에 오전에는 중앙군교 락양분교에 중병기교관이 되였고 이번 전선에 나가기 전에는 모 군대에 영장이 되였다.

 그는 일즉이 장개석장군의 북벌전쟁에 참가하였고 8년 전에 상해에서 이러난 송호항일전쟁과 다음해 화북전쟁에 참가하야 원수왜놈과 싸운 빛나는 전공을 갖이고 있다.

 그는 금년 40의 혈긔방장한 장교로서 참령의 지위를 갖이고 있다.

韓國光復軍의 成立과 그 將來

 최근에 우리 림시졍부에서는 드디어 광복군의 성립을 졍식으로 결정하고 방금 그 준비에 착수하야 멀지 않어 우리의 무장 정부군대가 제일선에서 원수왜놈과 총부리를 마주 대이고 승부를 결하게 될 것이다.

 이 광복군의 성립에 대하야 림시졍부로서는 벌서 4년 젼 중일전쟁이 폭발되든 민국 18년 녀름부터 광복군성립을 위한 건군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비밀한 가운데서 여러 방면으로 실현을 위하야 활동하여 왓는데 그 동안에 안으로는 중국 관내에 있는 우리 혁명운동 각 당의 통일문제로 인하야 끌어오게 되고 밖으로는 우리 운동을 찬성하는 몇 나라에 대한 국제적 원조에 대한 여러 차례의 외교젹 협의를 거둡 하기 따문에 오날까지 끌어오게 되였든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관내 각 당의 통일운동은 투기분자의 무성의와 주의상의 차이로 시간만 끌고 실패를 거듭하다가 드디어는 광복진선 9단체 중에 5단체가 한국독립당으로 통일하게 되면서 즉시로 이 당이 옹호하고 지지하는 정부로서는 년래의 계획이였든 광복군의 조직에 착수하고 이를 동포에게 발표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하야는 방금 왜놈과 싸우고 있는 중국방면에서는 절대적으로 환영하며 적극적으로 후원할 것을 쾌락하였다.

 림시정부에서는 지나간 해 가을에 광복군의 조직을 준비하기 위하야 중국서북 모 지방으로 군사특파단을 보낸 것은 이미 다 아는 바이고 지금에 광복군의 성립을 정식으로 발표함과 아울러 정부의 참모부 등 중요한 군사기관을 전선 가까운 곳으로 옴기어 대대젹으로 활동을 하게하고 또 특별히 군무장 리청쳔 장군이 친히 전선으로 가서 군의 성립을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조사와 활동을 하는 동시에 전선에 있는 우리 군사장령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하게 될 것이다.

 한 나라 혁명운동에 무장활동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우리 3 · 1운동이 맨주먹으로 싸웠기 때문에 실패한 것만 보아도 앞으로 우리 운동에 무장부대의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3 · 1운동에 실패한 우리 운동자들은 그 후로 남북 만주에서 주로 무장독립군을 조직하야 10여 년 동안 원수 왜놈과 싸워 왓으나 9 · 18 이후로 왜놈들이 만주를 점령하고 우리 독립군을 포위하고 발호함으로 우리 무장부대의 무기탄약의 공급과 병사의 보충과 훈련에 대하야 많은 곤난을 느끼어 일시젹으로 쇠침한 사태에 빠지였다. 그 후로 여러 방면에서 군의 재 건립에 대하야 많이 애를 섰으나 뜻과 같이 성공을 못하여서 중일전쟁이 이러난 후 3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혹 개인으로 중국 군대에 참가하야 왜놈과 싸우거나 혹은 선젼대 같은 것을 조직하야 전선 가까히서 왜놈에게 고함친 일은 있으나 모다 무장을 하고 시원히 싸워보지 못하였다. 그럼으로 이번에 이 광복군의 성립은 력사젹으로 중대한 이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왜젹과 포화로 싸울 광복군은 다음과 같은 멫가지 특질이 있으니 이것이 곳 광복군이 걸어 나갈 길이다.

 첫재, 군은 우리 림시졍부가 조직한 졍부군이므로 대한인은 누구나 다 참가하게 될 것이오. 어느 당파에서 지휘하지 안는 순전한 국군이다.

 둘재, 군은 장한 정식 군대이므로 과거에 중국 군대를 도와서 대적선젼을 하든 의용대 조직과는 완젼히 그 성질을 달리하야 언제나 젹에 대하여는 공격 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셋재, 따라서 군은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현대화한 특수한 무장을 하게 될 것이다.

 넷재, 군은 한국정부의 것이니 만치 정부의 군사기관의 명령에 의하야 독립젹으로 작전할 것을 원측으로 하되 다만 활동하는 지대가 중국이오. 또 동일전선에서 작전을 하는 관게로 필요할 때는 중국 최고장관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영법련합군이 그 연합군 사령의 지휘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니 외국 군사긔관에 부속되는 것과는 구별할 수 있다.

 멀지 않어 그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소식이 전해올 것을 바라고 기다린다.

本黨 同志 戰線에서 凱旋

 금년 봄에 광서성 남녕방면 전선의 중국 군대에 참가하야 출전하였든 리지일 · 한도명 · 김덕목 3동지는 영예스러운 임무를 마치고 개선하였다.

 그 후 중국 군사당국에서 파견한바 되여 3동지는 지난 6월 하순경에 중경으로 왓는데 몃 달 동안 모종의 특수한 훈련을 받은 후에는 우리 광복군의 간부로써 일할 보배라 한다.

韓國獨立黨에서 英勇한 中國空軍을 慰勞

 한 달 남아를 매일 가치 100여대 비행긔로 중경에 와서 잔인한 포격을 하는 왜비행긔에 대하야 적은 수효의 비행긔를 갖이고 많은 비행긔를 쏘아 떠려트린 중국 공군의 용감한 싸홈을 매일 상쾌하게 처다보시든 백범 선생께서는 이번에 한국독립당을 대표하야 영용한 중국공군을 치하하는 간곡한 글을 보내고 아울러 위로금 1,000원을 보내어 용감한 그 글을 격려하였는데 이에 대하야 중국 비행대는 물론 각 기관에서도 매우 감사하다고 하며 이 소식을 중국 각 신문에 발표하야 전 중국 동포에게 전하였다.

[社告(3)]

 3당 통일로 인하여서 본사의 사무를 일신하는 것과 또는 왜놈의 비행긔가 중경을 매일 습격함으로 인하야 인쇠소의 일이 밀리는 관게로 본보의 발행이 이렇게 늦게 되었읍니다.

 독자 여러분은 량해하시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비행긔의 공습이 게속되는 때는 부득이 늦어질 터이니 미리 량해하시기를 바랍니다.

 특고:우레디오 시간이 변갱되였음니다. 중경시간으로 매쥬일 오정으로붙어 0시 10분까지입니다.

 파장은(단파) 2352키로미터올시다.

 지난 6월 18일에 긔강에서 한국혁명녀성동맹이 셩립한 바 그에 대한 상세한 소식은 추후 보도할련다. 량해하시라.

韓國獨立黨 創立 經過

趙琬九

 우리가 나라를 잃은 때붙어 남녀로소 빈부귀쳔을 물론하고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생존을 위하야 노력 분투하였다. 사샹이니 주의니 하는 문제는 생기지도 아니하고 오직 국가의 독립을 최고 유일한 목젹으로 하였다. 그럼으로 비록 우리가 당을 조직하지 아니하였드래도 이때에는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통충하야 독립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3 · 1운동 폭발시에 이르러서 확대하고 강화되여 전국 방방곡곡에 미첬으니 이로써 우리의 유구한 문화는 영원히 우리 민족의 독립셩을 충분히 발휘한 것이다. 이때의 우리의 혁명민중은 우리 독립운동의 총사령부로 또 왜젹의 강제젹 통치를 부인하는 대립기관으로 림시졍부를 건립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운동에 있어서 획시긔적 대발젼이다. 그러나 우리 운동게에는 공산주의운동이 생기게 되여 불행히 우리의 혁명력량은 분산되기 시작하였다.

 초긔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국가독립보다 게급투쟁발전에 더 노력하였다. 그리하야 각종의 부문단체를 조직하기에 분주하였다. 왜젹은 이것을 리용하여 독립운동을 제지하려는 간계로써 얼마시기까지는 공산주의운동의 발전을 방임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로혀 활동을 기회 얻은 것만 다행이 여기는 그들은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착오를 범하였다. 이것이 독립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대립되기 시작한 중대한 원인이다.

 서력 1926년에 이르러 공산주의자들은 제3국제의 명령에 의하여 국가독립을 최고최션의 목젹으로 하고 젼 민족젹 대동단결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자가 항샹 바라는 것이며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운동은 순조로 진행되였다. 그리하여 중국 관내에는 한국 유일독립당촉성회, 만주에는 한국독립당촉성회, 국내에는 신간회가 각각 조직되여 그 위대한 형세가 내외에 팽배하였다. 그러나 각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자긔네의 소원대로 령도권을 획득하지 못하매 먼저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게의 유력한 령수인물을 잔살하여 젼체운동을 파괴하였으며 국내에서는 왜젹에게 신간회 해산의 자구거리를 주어 그 회를 영영 해산식히게 하였다. 다만 상해에서는 여러 가지 관게로 뜻을 이루울 수 없으매 그들은 촉성회를 해산하는데 성공한 후 류호(상해) 한인독립운동자동맹이라는 것을 따로 조직하여 호빈작주를 하면서 실상은 독립운동을 파괴하였다. 이에 독립운동자들은 그들의 배신배의에 분개치 아니치 못하게 됐다.

 종래로 국내외 각지에 독립운동자의 당적 조직이 없었다. 오직 림시졍부로써 그들의 통치기관을 삼는 동시에 또 최고 유일의 당을 삼은 것이다. 그럼으로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실혀하고 또 제일 먼저 파괴하랴는 것은 림시졍부였다. 긔회만 있으면 이것을 실현해 보랴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망동이 민중에게 배척을 당하게 되어 곳곳이 실패만 거듭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개두환면을 한 후 다시 졍략젹 형태로써 독립운동자를 여지없이 압박하고 림시정부를 긔어히 파괴하려 하였다. 이에 독립운동자도 내외의 형세에 빛이어 당적 조직이 없이는 독립운동을 앞으로 취진할 수 없다는 것을 각오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상해에서 비로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니 이것이 서력 1929년의 일이며 그 간부로는 리동녕 · 안창호 · 김구 · 리시영 등등의 독립운동게의 령수인물들과 영용 과감한 젼위분자를 젼부 망라한 것이다. 이 같은 젼국젹 대독립당의 조직을 최고 리상으로 하였으니 한편으로 보면 일개의 준비긔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와 젼후하여 만주에서도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이 성립된바 그 당의 당강이 상해의 한국독립당과 별차가 없었다. 이때붙어 한국독립당은 한 개의 고유명사가 되였다.

 상해의 한국독립당은 그 성립이후 두 가지 일에 젼력을 하였으니 하나는 림시졍부 옹호요. 또 하나는 대독립당 촉셩이었다. 다른 주의자에게 대하여는 다만 평범한 태도로 대할 뿐이었고 다시는 사업을 같이 하지 아니하니 그들도 다시 더 파괴작용을 하지 못하고 비밀한 중에서 자긔네의 내부공작만 진행하게 되였다. 9 · 18 이후로는 국내에서 왜적이 일반 혁명운동에 대하여 어떤 주의를 물론하고 좀 더 강압하매 한독은(한국독립당의 략층) 이에 대항하고져 광복운동자 자체의 대통일을 위하여 매두몰신할새 드디어 그 준비공작으로 대일젼선통일동맹을 조직하게 되였다. 이 동맹은 한독의 일개 표현단체이었는바 4 · 29 홍큐공원폭탄사건이 발생한 뒤에 한독의 중요간부가 거의 다 상해를 떠남을 딸어서 그 공작도 민활히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해 추동 간에 이르러 그 동맹은 확대되여 한독 이외에도 신한독립당(만주의 한국독립당과 관내의 한국혁명당이 합한 것)과 조선혁명당(만주)과 의열단의 세 단체를 구성분자로 하게 되였다. 그 동맹은 구성분자의 대일행동의 통일을 요할 뿐이오. 각자의 내부 사무에 대하여는 호상 불간섭하였다. 다만 의열단이 그 동맹에 가입하려한 때에는 각 단체의 반대가 자못 맹열하였으니 그것은 의열단이 공산주의의 단체라고 인졍하는 까닭이었다. 본래 의열단은 3 · 1운동 당시에 성립된바 쳐음에는 정치젹 색채가 없었고 오직 영용한 행동으로써 직졉 젹을 박멸하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 단원들도 다 유명한 청년들로 현저한 공로를 많이 세워 광복운동게의 유력한 별동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광동 가서 황포군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소위 광주폭동(중국공산당의) 전후에 다대수가 공산주의자로 변하여 그 달을 공산주의로 령도하게 되매 긔본단원 중에서도 분개하여 탈단한 자가 많었다. 미구에 그 단은 해산을 선언하였지만 리면에서는 공산주의운동을 진행하였으며 직시 북평으로 가서 비밀히 레닌학교를 설립하고 청년을 훈련하였다. 사이 안건이 발생하매 그 단의 영도자들은 다시 남쪽으로 와서 구일황 학교의 인연으로서 차차 활동의 길을 얻게 되었으며 해산한 의열단의 명의를 다시 표방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관게로써 여러 단들은 그 단이 통일동맹에 가담하는 것을 찬성치 아니하였으나 그 단의 책임자가 변명함으로 강잉히 허락을 하였다. 그 후에도 그 변명한 것과 실제의 사실이 맞지 아니하였음으로 다른 당들은 심중의 불안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만 내부 사무에 대하여는 호상간섭이 없는 관게로 별 충동은 없었다.

 서력 1934년에 대일젼선통일동맹은 소속 내부의 통일을 완성하자는 의론이 졈졈 능숙하여졌다. 다음해에 드디여 원유 네당 외에 미주 증가주의 대한인독립당까지 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결단한지 불과 두 달에 한독분자 중 일부분은 민혁과는 주의가 불합한다는 리유로써 탈퇴를 성명하는 동시에 한독을 재건설하였고 미주 대한인독립당도 민혁과 탈퇴를 성명하는 동시에 의연히 존립하였다. 그 외에 한독의 다수 중요분자들은 자초로 민혁에 가입을 하지 아니하고 한국국민당을 창립하였다. 그 리유는 첫재, 사샹이 같지 아니한 의열단과 합할 수 없다는 것이오. 둘재, 의열단 분자들이 신당되기 전붙어 림시정부를 파괴하기 위하여 당시 국무원으로 신당 당원된 분자에게 그 사직을 강요한 까닭이다. 그럼으로 한국국민당의 당의 당강은 본래 한독의 당의 당강을 그대로 인용하는 동시에 특별히 당강 중에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한 불순수젹 리론과 행동을 배척할 일들과 림시정부를 옹호진젼할 일이라는 두 항목을 가입하였으며 즉시 위기에 빠진 림시정부를 개조하여 독립운동의 졍맥을 붓드렀다.

 서력 1937년에는 민혁 중에서 젼일 신한독분자와 조혁분자들이 련합하여 의열단 계통으로 파지하고 있는 민혁의 주의졍신이 졈졈 공산주의로 로골화하여 모든 졍책과 사업진행이 황당 불법하다는 리유로 호당을 선언하고 민혁과 탈퇴하는 동시에 다시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이로붙어 민혁은 명실이 상부하게 의열단게 인물의 독자무대가 된 것이다.

 같은 해에 한국국민당 ·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등 원동의 광복운동 3단체는 북미와 하와이 동지의 광복운동단체와 광복진선을 조성한 후 련합선언을 발하여 림시졍부를 옹호할 것과 우리의 혁명력량을 집중할 것을 언명하였다. 이로붙어 반년 후에 우리와 같치 아니한 주의를 신앙하는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청년단젼위동맹 · 조선혁명자련맹이 조선민족젼선련맹을 조직하여 금일까지 대립되었다.

 작년으로붙어 우리 운동게에는 통일의 성랑이 다시 높아젓다. 중국 관내에 있는 한인공산주의자 방면에서 극력 이것을 장도하면서 과거에 못지아니할 활동을 하였다. 춘사차명으로 과거의 공산주의자들은 유치병으로 인하여 범과가 많었다고 공개젹으로 공격하였다. 금일의 운동은 민족주의 령도하에서 진행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터이니 광복진선의 선배들이 속히 나와 령도하면 자긔네는 절대 복종하겠다고 입이 달도록 중복하였다. 광복진선 방면에서도 그들의 과거의 비행만 비평하고 공동분투를 거절할 수는 국가의 대업이나 민족의 도의를 위하여서 더구나 현시 정세를 보아 환영할 수 박게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절대로 신임하는 우에서 작년 여름부터 허다한 금전과 시간을 허비하면서 먼져 칠당회의를 열고 단일당 조직할 일을 토의한 바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에서 공산주의자는 자체의 조직을 해소할 수 없다고 주장함에서 그 통일회의는 파열되였다. 그 다음에 광복진선 3당은 만일 당 조직을 찬성하는 민족혁명당과 혁명사련맹(무졍부주의당)으로 더부러 5당 통일회의를 열고 끝까지 통일을 위하야 최션을 다하였다. 먼저 정식회의를 열기 전에 칠당회의에 출석하였든 5당 대표들은 장래의 졍식회의를 신속히 진행하기 위하야 당의 당원자격 등에 관한 8개 조항의 협정서를(그 원본은 새로 된 한국독립당에 보관하였음) 작성하고 각각 서명하였다. 뜻박게 민족혁명당에서 그네의 최고책임자가 책임지고 접수한 이 협졍서를 비록하기를 주장하였다. 그 중에도 당원자격에 관한 조문을 개정하랴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본래 당원자격에 관하여는 평소에 졍치신죠 여하를 불문하고 만 18세 이상 된 한국 남녀로써 본당의 당의 당강 당규 등을 복종하는 자는 당원 됨을 득함이라 규졍한 바 민혁에서는 한사하고 평소 2자를 삭제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 리유는 평소 2자가 당 내에 있어서 과거의 공산주의자만 구속할 뿐 아니라 장래에도 당내에 공산주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접수하면 민혁은 분열될 것이라고 끝까지 배신을 할랴고 하였다. 그러나 4단체(혁련까지)는 협정서에 쓰인 것을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민족혁명당은 회의도 결속하지 아니하고 행행연하게 뿌루치고 갓다.

 5당 통일회의도 7당 통일회의와 가치 또 주의 문제로서 파열되였다.

 본래 광복진선 원동3당의 통일은 수년 전부터 성숙하였든 것이다. 다만 피탈하는 도중에서 실현할 수 없어 사천에 도착됨을 기다리어 한 당을 만들기로 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천에 오기 전부터 공산주의자 측으로부터 중국 관내의 우리 혁명자의 대동통일을 열심히 부르지짐으로 우리는 과거를 더 추구치 아니하고 민족적 도의와 동포적 신의에서 3당 통일을 덥혀 놓고 선듯 그들로 더불러 좀 더 큰 통일을 위하야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또 이왕과 같이 우리를 속이고 3당 통일만 방해한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더 기다릴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야 3당 통일회의를 즉시 열고 토의를 거듭하야 드디어 지난 5월 8일에 3당을 해산하고 동 9일에 새로히 한국독립당을 창조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인과관게로 볼 수박게 없으며 이로써 우리가 통일운동을 위하야 얼마나 최후까지 고심하였으며 분투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재, 동 주의자의 단일당은 가능하고 또 연한 것(아모주의에도 붙일 것 없는 긔회주의자는 일종례외다). 둘재, 아모리 현개단 우리 혁명이 민족혁명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력량이 공고하지 못하고는 젼이나 지금이나 또는 앞까지 다른 주의자들의 속임과 도단만 당한다는 것이다. 이에서 나는 우리 광복진선(미포까지)의 단일이 가능하고 당연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동시에 광복전신 전체의 통일을 강경하게 주장한다. (끝)

▪ 『한민』 제22호, 1940년 7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