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1. 『獨立新聞』의 수집현황

『獨立新聞』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였다. 이 신문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흔히 『獨立新聞』이라고 지칭할 때에는 上海에서 1919년부터 1926년에 걸쳐 총 198호가 발간된 국한문판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국한문판의 자매지로 1922년 7월부터 1923년 말까지 중문판이 약 40호 발간되었던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重慶으로 임시정부가 이전한 이후에도 1943년부터 1945년까지 『獨立新聞』이 중문판으로 7호가 발행된 바 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발행된 『獨立新聞』은 상해 국한문판과 상해 중문판, 그리고 중경 중문판의 세 종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의 하나로 발간되는 『獨立新聞』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세 종류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獨立新聞』은 독립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소개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또 일제의 한국통치와 중국침략의 현황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주목된 자료였고, 상해에서 간행된 국한문판은 이미 1969년에 중앙문화출판사에서 2권으로 영인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독립기념관에서 1987년 개관 기념으로 다시 영인한 바 있다. 『獨立新聞』 국한문판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본을 영인한 것이었는데, 창간호부터 189호까지가 포함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모두 21개호의 결호가 있었으며, 호외도 여럿 빠져 있었다. 중경 중문판 역시 소개되었는데, 『독립운동사사료집』 8(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4)에 그 상당수가 번역되었고, 원문은 『韓國獨立運動史料-楊宇朝篇-』(국가보훈처, 1999)에 영인되어 수록되었다. 상해 국한문판이나 중경 중문판은 모두 독립운동가의 후예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상해에서 발간된 중문판은 그 발행 자체는 알려졌을 뿐, 아직까지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최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된 『獨立新聞』에 빠져 있는 신문 일부와 호외가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의 마이크로필름 자료를 비롯하여, 독립기념관 수집자료와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집 자료 등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상해 중문판도 마이크로필름의 형태이지만 몇 호가 포함되어 있다. 그 결과 국한문판은 총189개호(결호 9개호)와 5편의 호외 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상해 중문판은 약 40호 가운데 5개호를 찾을 수 있었다. 중경 중문판은 전체가 남아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새로 발견된 6개호가 남아 있는 형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편찬위원회에서는 이들 새 자료를 보충하여 새롭게 『獨立新聞』을 간행하여 학계에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아울러 중문판은 번역문도 첨부하기로 하였다. 상해 중문판은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어,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였음을 부기한다. 다만 상해 국한문판의 경우, 결호 가운데 5개호(제177-180호, 제195호)가 개인이 소장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나, 이 자료집에는 포함시키지 못하였음을 밝힌다. 새롭게 『獨立新聞』의 발간을 가능하게 해준, 자료 소장처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2. 상해판 『獨立新聞』(국한문)

상해에서 국한문으로 발행된 『獨立新聞』은 1919년 8월부터 1926년 11월까지 만 7년에 걸쳐 모두 198호가 발간되었다. 먼저 그 발간현황을 표로 제시하면 뒤와 같다.

뒤의 ≪표 1≫에서 ‘영인’이라고 한 항목에서 ‘X’ 표시는 연세대학교 소장본을 독립기념관에서 출간한 『獨立新聞』에 빠져 있는 부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료집’ 항목은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의 영인상황으로, 추가된 경우를 밝힌 것이다. 따라서 이 자료집에는 12개호와, 호외 또는 부록 4개호가 새로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간 잘못된 편집으로 중복 수록되었던 제124호 제4면(제134호 제4면이 수록)을 바로 잡았으며, 제189호는 1 · 2면을 추가하였다.

이 신문의 판형은 제190호까지는 타블로이드판으로 발간되었음이 확인되는데, 확인되지 않는 제191호 역시 그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제192호부터 제198호까지는 타블로이드판의 절반 크기인 국판으로 간행되었다. 타블로이드판으로 발간되던 시기에는 4면이었으며, 필요에 따라 몇 차례 1면의 호외 혹은 부록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문사의 경영상태가 어렵더라도 매년 1월 1일자를 발간하였고, 아마도 1장짜리로 그 해의 달력을 부록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전체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23년과 1926년의 달력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일이다(자료집 미수록).

『獨立新聞』은 그 창간사에서 그 사명으로, “사상고취와 민심통일” · “우리의 사정과 사상은 우리의 口로 說” · “여론의 환기” · “신사상 소개” · “국사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幷하야 신사상을 섭취하여써 개조 혹은 부활한 민족으로써 부활한 신국민을 造하려고 노력함”의 다섯 가지를 밝힌 바 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에 적극 호응하면서,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동시에 독립운동의 활동내역과 일제의 통치실상을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으리라 믿어진다.

또 『獨立新聞』은 제190호(1926년 1월 1일자) 부록 ‘獨立新聞新年特刊’(자료집 미수록)에 수록된 「本社新訂社章」 제2조에서, “독립운동의 기관지로 독립운동자 사회의 輿論을 대표하야 그 조직적 운동을 策進하며 사업을 선전함을 主旨로 하는 것”임을 공언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178호(1925년 11월 29일자, 자료집 미수록)의 「本社社員諸氏와 各地支局諸位며 本報讀者僉位의게」라는 ‘謹告’에서도 “一 본 독립신문은 우리 독립운동자의 公同한 기관이오 개인의 영업적이 안임, 一 본 독립신문은 우리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고 분산된 民心을 집중하도록 함, 一 본보의 기사는 우리 독립운동자 個身에 대하야 隱過揚善의 義로 통일을 주장함, 一 본 독립신문은 하등 個團體나 혹은 개인의 기관지로 변치 못함”이라고 하여 신문의 성격을 강조한 바 있었다. 『獨立新聞』이 개인이 아닌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독립운동계의 여론과 활동을 알리는 것이 그 본 뜻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문에 수록된 기사내용도 임시정부의 기관지로서의 기능과, 독립운동의 전개양상에 기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관련된 공지사항과 활동을 비롯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의 상황, 현안문제(태평양회의 · 국민대표회의 · 대통령 심판문제 등)에 대한 해설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아울러 일제의 한국통치와 만행 등을 알리면서, 신사상에 대한 소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컨대 「改造」 · 「國家」 · 「俄羅斯革命記」 · 「社會主義」 · 「社會主義硏究」 · 「婦人解放問題에 關하야」 · 「敎育」 · 「國際社會主義聯合會」 등의 논설이나 번역이 연재되었다. 또 독립운동의 역사와 현상을 「俄領實記」 · 「義兵傳」 · 「韓國獨立運動의 眞相」 등의 연재를 통하여 밝히고자 하였다. 국제정세에 대한 해설 역시 적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의 방침과 노선에 대한 관심 또한 중요시되었다. 전체적으로 ‘독립’을 위한 대외선전을 『獨立新聞』이 자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운영을 중심으로 『獨立新聞』의 간행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표 1≫ 상해 국한문판 『獨立新聞』 발간현황

호수간행일자제호면수영인자료집호수간행일자제호면수영인자료집
11919.08.21獨立4  431920.02.05獨立新聞4  
208.264  4402.074  
308.294  4502.124  
409.024  4602.144  
509.044  4702.174  
609.064  4802.284  
709.094  4903.014  
809.134  5003.044  
909.164  5103.064  
1009.184  5203.114  
1109.204  5303.134  
1209.234  5403.164  
1309.254  5503.184  
1409.274  5603.204  
1509.304  5703.234  
1610.024  5803.254  
1710.044  5903.304  
1810.074  6004.014  
1910.114  6104.034  
2010.144  6204.084  
2110.164  6304.104  
2210.254  6404.134  
2310.28獨立新聞4  6504.154  
2411.024  6604.174  
2511.044  6704.204  
2611.084  6804.244  
2711.114  6904.244  
2811.154  7004.274  
2911.204  7104.294  
3011.274  7205.014  
3112.024  7305.064  
3212.254  7405.084  
3312.274  7505.114  
341920.01.014  7605.154  
3501.084  7705.184  
3601.104  7805.224  
3701.134  7905.274  
3801.174  8005.294  
3901.224  8106.014  
40 (4)XX8206.054  
4101.314  8306.104  
4202.024  8406.174  
851920.06.22獨立新聞4  1261922.05.20獨立新聞4X추가
8606.244  12705.274  
8712.184  12806.034  
8812.254  12906.144  
891921.01.014  13006.244  
9001.154  13107.014  
9101.214  13207.084  
9201.274  13307.154  
9302.054  13407.224  
9402.174  13508.014  
9502.254  13608.124  
9603.014  13708.224  
9703.054  13808.294  
9803.124  13909.114  
9903.194  14009.204  
10003.264  14109.304  
10104.024  14210.124  
10204.094  14310.214  
10304.214  14410.304  
10404.304  14511.084  
10505.074  14611.084  
10605.144  14711.304  
10705.214  14812.134  
10805.254  14912.234  
10905.314  1501923.01.014  
11008.154  15101.104  
11110.054  15201.174  
11210.144  15301.244  
11310.284  15401.314  
호외11.051X추가15502.074  
11411.114  15603.014  
부록11.141X추가15703.074  
11511.194  15803.144  
11611.264  15904.044  
11712.064  16005.024  
11812.264  16106.134  
1191922.01.014  16207.214  
12002.204  16309.014  
12103.014  호외09.041  
12203.314  16409.194  
12304.154  16510.134  
12405.064  16611.10 4  
12505.13(4)XX16712.054  
16812.26독립신문4  1851925.05.05독립신문4  
1691924.01.014  18606.054X추가
17001.194  호외09.251X추가
17102.024  18710.214X추가
17203.014  18811.014X추가
17303.294  호외11.021X추가
17404.264  18911.114  
17505.314  1901926.01.01 XX
17607.264  191 (4)XX
17710.044XX19209.03독 립16X추가
17811.294XX19310.0314X추가
17912.304XX19410.138XX
1801925.01.014XX19510.238XX
18102.214XX19611.038X추가
18203.014XX19711.188X추가
18303.234  19811.308X추가
18403.314       

1) 창간과 초기(1919-1921)

1919년 3 · 1운동 이후 국내외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정부의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심지는 중국의 上海였다. 이미 3월 28일자로 『獨立新報』라는 등사판 신문이 창간되었는데, 金弘敍가 주필이었고, 白南七 · 裵東宣 · 李光洙 · 金聲根 등이 조력하여 제10호(4월 11일자)까지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등사판으로 영어 소식지를 간행하여 외국인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3 · 1운동의 소식과 한국독립의 당위성, 그리고 일제의 만행을 국내외의 인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내무총장 安昌浩는 『韓日關係史料集』의 편찬을 착수하고, 이어 신문의 발간에도 진력하였다. 그러나 정부기관지의 기능을 할 신문사는 정부 직속기구로 구성되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신문사 재정문제와 프랑스조계 당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조치였던 것 같다. 아무튼 신문사는 회사의 형태로 설립되어, 1919년 8월 21일자로 창간되었다. 『獨立』이라는 제호로 주 3회, 즉 화 · 목 · 토요일에 국한문으로 발행되었던 것이다.

『獨立』은 임시정부의 법령을 비롯하여 인사 · 포고문, 또 국무회의와 임시의정원의 기사 등을 실어, 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임시정부 재무부에서는 신문사에 2차례에 걸쳐 보조비 항목으로 1,100원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신문사의 편집이나 운영에 관해서는 임시정부로부터 독립된 존재였다.

신문이 국한문으로 간행된 것으로 미루어, 제작진은 그 독자층을 한국인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상해에 있는 한국인들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聯通制의 실시와 국내특파원의 파견을 통하여 국내와의 연계를 시도하고 있었고, 신문은 바로 그러한 경로로 국내에 전달되었다. 『獨立』은 그 「창간사」에서 이미 소개한 5가지의 사명을 내걸었다.

신문의 창간준비는 李光洙 · 李英烈 · 趙東祜 · 朱耀翰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국한문 활자의 주조에서부터, 문선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사장 겸 주필(편집국장) 이광수 · 영업부장 이영렬 · 출판부장 주요한의 진용으로 운영되면서, 조동호 · 車利錫 · 朴賢煥 · 金輿濟 등이 기자로 참여하였다.

『獨立』은 1919년 10월 16일자(제21호)까지 순조롭게 발행되었으나, 일제의 상해총영사가 프랑스조계 당국에 지속적으로 임시정부 사무소와 신문사의 폐쇄를 요구하자, 신문사에서는 10월 25일자부터 제호를 『獨立新聞』으로 바꾸어 간행하였다.

신문이 발행되면서 신문사에 관여하는 인원이 증가하였다. 1920년 2월 말 현재 일제가 조사한 독립신문사 관여자는 이광수 · 이영렬 · 조동호 · 옥관빈 · 주요한 · 박현환 · 崔謹愚 · 高辰昊 · 車觀鎬 · 白性郁 · 金得亨 · 金次龍 · 柳炳基 · 羅在玟 · 張萬鎬 등이었다. 이 밖에도 차리석 · 김여제 등과, 申國權이 있었던 것 같다. 대체로 이들 가운데에는 안창호의 측근이 많았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기호파 세력이 안창호가 『獨立新聞』에 자신을 따르는 인물들로 포진시켜 개인기관으로 만들고 있다고 불평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렇다.

초기 신문사의 재정은 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의 지원으로 해결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신문 발간에 필요한 인원과 자금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기부가 있었지만, 창간 이래 구독료는 전혀 걷히지 않았다. 1920년 2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의 형태로 전환하고자 시도한 것은 바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즉 안창호를 발기위원장, 李東輝를 찬성위원장으로 하는 주식모집발기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들은 신문사의 재정난 타개를 위하여 주당 500원으로 200주의 주식을 모집하여 총자본금 10만원을 확보할 계획이었고, 신문의 간행과 국민에게 필요한 소책자를 발행하는 것을 그 사업으로 내걸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을 포함하여 명망 있던 인사들을 발기인과 찬성원으로 내걸었지만 기대한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1920년 5월 안창호 · 김승학 · 이영렬 · 申禹鉉 · 張基礎 등의 노력으로 增資하여 신문사를 합자회사를 만들었는데, 김승학 등은 임시정부 내무부 직할로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단과 光復軍參理部의 요직을 맡았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신문사의 재정이 나아지지 않아 구독료를 선불하지 않으면 신문발송을 중지하였고, 결국 『獨立新聞』의 발행을 1920년 5월 11일자(제75호)부터 주 3회에서 화 · 토요일 2회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의 발행부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간 초기에는 2,000부 정도를 찍었다고 한다. 상해에서 500-600부를 배포하고, 나머지는 미주 · 만주 · 노령 · 국내에 보냈다. 독립신문사에서는 단행본도 출판하였다. 중국 『大陸報』의 기자로 국내의 3 · 1운동을 취재한 바 있던 N. 페퍼의 글을 신문에 연재한 다음 『韓國獨立運動의 眞相』이라는 제목의 팜플렛으로 간행하였고, 그것을 중문으로 번역하여 『韓國眞相』으로 출판한 바 있다. 또 이광수가 신문에 집필한 논설을 모아 『獨立新聞論說集』의 출간을 예고하였으나, 이것은 간행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韓國獨立運動史略』(金秉祚)과 『李舜臣傳』(朴殷植) · 『神檀民史』(金敎獻) 등의 저작도 독립신문사의 발행이라는 것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신문사에서 발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1920년 6월 24일자(제86호)를 발행한 뒤, 일제가 프랑스조계 당국에 항의하자 다시 신문사가 봉쇄되었다가 그 해 12월 18일자(제87호)로 속간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후 『獨立新聞』은 심화된 재정난으로 주 1회 정도 발간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러한 시기에 사장 이광수는 안창호의 적극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문사를 사임, 1921년 4월 애인 許英肅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이영렬이 신문사와 三一印刷所의 책임을 맡았다.

하지만 1921년 6월 9일 조계당국은 신문을 인쇄하던 三一印刷所의 폐쇄를 명령하였고, 결국 신문은 다시 정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過激主義 書類를 印刊하엿다는 嫌疑”였다(『獨立新聞』 1921년 10월 5일자 사설). 신문이 속간될 수 있던 것은 그 해 10월이었고, 이 휴간시기에 이영렬이 신문사를 그만두고, 대신 金希山(金承學)이 신문사와 삼일인쇄소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2) 중기(1921-1924)

1921년 6월에 인쇄소의 폐쇄로 정간되었던 『獨立新聞』은 그 해 8월 15일자(제110호)로 속간되었다. 김승학이 신문사를 맡아 운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이미 1920년 5월 독립신문사를 합자회사로 만드는데 참여하여 거금을 출자한 바 있었다. 그는 만주지역 독립운동기관의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므로, 결국 그 자금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지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승학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신문발간에 앞서 조계당국과 몇 가지 사항의 준수를 약속하였다. 즉 인쇄소 기구는 중국인에게 교부하고 프랑스조계 안에 두지 말 것 · 신문 발간소는 다른 지방으로 신문지상에 명기할 것 · 신문사를 혹 프랑스조계에 密置할 경우에는 그 장소를 조계 工務局에 보고할 것 · 공무국의 통지가 있을 때에는 신문 편집국과 기타 기구를 24시간 내로 他處로 이전하여 일본관헌에 발견되지 않게 할 것 · 신문사나 인쇄소의 비밀한 위치는 다수의 한국인이 알지 못하도록 할 것이 그 내용이었다. 김승학은 그가 신문사를 맡았던 동안 인쇄소를 이전한 것이 28회였고, 이전시 활자를 운반하기 위하여 마차 2량과 인력거 20여 채가 필요하였으며, 이전 후보지로 빈 건물 1채를 예비해 두어야 했다고 한다(金承學, 「亡命客行蹟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2, 1998, p.430). 그리고 10월 5일자(제111호)부터는 신문의 제4면 좌측 상단에 ‘Published in Nanking, China’라고 명기하여, 신문이 상해가 아닌 南京에서 간행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1922년 7월경에는 중문판 『獨立新聞』도 창간되었다.

김승학은 『獨立新聞』의 재정확보에 진력하면서, 노령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가 1921년 말 상해에 도착한 尹海를 1922년 7월 주필에 초빙하였다. 그러나 윤해는 9월 28일 저녁 괴한에게 총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어 신문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었으며,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임시정부의 진로를 놓고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부의장을 맡아 창조파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신문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23년 2월경에는 주필을 사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신문사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며, 임시정부와 큰 갈등을 빚지 않고 운영되었다.

독립신문사에서는 또 신문 200부 이상의 독자가 소재한 곳에 지국을, 100부 이상인 곳에 분전소를 설치하며 그 운영도 규정하였다. 1924년 1월 1일자(제169호)의 신년축하광고에 따르면, 지국은 만주 · 노령 · 미주에 15개소 분전소는 21개소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실제 지국과 분전소가 규정대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승학이 독립신문사를 운영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한 인물은 統義府의 蔡燦(白狂雲)이었다. 그러나 신문사의 재정은 계속 부족하였다. 1923년 독립신문사의 수지결산이 제175호(1924년 5월 31일자)에 실려 있는데, 이에 의하면 신문대금과 광고료의 수입이 10.6%에 불과하고, 기부금 · 의연금이 34%에 이르렀으며, 더욱이 차입금은 44.2%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직원급료와 발송비 등을 포함한 신문제작비는 3531. 81원으로 전체 지출의 71.4%를 차지하였다. 문제는 賃借對照實借入이 전년도 차입액 2,521.57원을 포함하여 4,736.51원이라는 점이다. 이는 독립신문사 1년 전체경비와 거의 같은 규모였다. 따라서 신문사에서는 신문을 발간하고서도 우표비용이 없어서 발송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실제 1924년에 들어와 『獨立新聞』은 『독립신문』으로 제호도 바꾸고 趙琬九가 주필을 맡기도 하였지만, 1개월에 1회 정도밖에 발간하지 못하였다. 또 그 해 6월 말에는 중문판이 정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 초에 신문사에 관여한 인물로는 김승학(주간) · 朴殷植(주필) · 姜弼周(기자) · 申斗植(편집) · 高容煥 · 趙東祜(인쇄부원) · 李東烈 · 崔謹愚 · 白性郁 · 柳炳基 · 羅在玟 · 張萬鎬 · 金永澤 · 金炳九(사원) 등으로 알려져 있다(『韓國民族運動史料』 中國篇, 국회도서관, 1976, p.491).

1924년 5월 김승학은 임시정부의 학무차장으로 임명되어 학무총장을 대리하면서 신문을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독립신문』 제177호(1924년 10월 4일자, 자료집 미수록)에는 그간 독립신문사를 지원해 온 통의부의 內訌을 비판하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公忿生’이란 필명으로 「南滿事變을 듯고」라는 글을 1면에 실었는데, “독립운동에 원훈을 살해한 통의부를 저주하며 亂軍輩를 聲罪하노라”는 부제에서 짐작되듯이 통의부를 비난한 내용이었다. 통의부는 共和派와 復辟派의 대립이 계속되어 왔는데, 1924년 9월 통의부를 이탈하여 임시정부 휘하의 參議府를 조직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한 공화파의 채찬이 통의부의 무장세력에 의하여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독립신문』이 이 사건을 비난하자, 통의부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그들의 세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독립신문』의 구독을 금지시킬 것을 결정하기까지 하였다. 이 분쟁에 책임을 지고 김승학은 신문사를 사퇴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는 통의부 · 정의부 세력과 협의하여, 『독립신문』을 이들이 재정을 부담하여 운영하도록 조처한 것 같다. 제178호(1924년 11월 29일자, 자료집 미수록)에 김승학의 명의로 「本社社員諸氏와 各地支局諸位며 本報讀者僉位의게」가 실린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통의부 출신 崔天浩(崔光郁)가 신문사를 맡았는데, 바로 통의부의 자금에 의지하여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승학은 1921년 10월부터 1924년 12월까지 만 3년 넘게 독립신문사의 운영을 책임졌고, 『獨立新聞』 국한문판 110호부터 178호까지 69개호를, 중문판 40여 호를 발행하였다. 그리고 1927년 3월경부터는 大韓民國臨時政府 陸軍駐滿參議府(참의부) 參議長에 취임하여 다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3) 후기(1925-1926)

1924년 11월 독립신문사는 사장 박은식 · 주필 賓光國 · 경리 최천호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박은식이 12월 11일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에 취임한 사실로 미루어 신문사의 사장직을 맡았을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독립신문사를 김승학이 사장 체제가 아니라 주간 겸 경리부장 체제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명예직인 사장에 박은식이 추대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는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어 취임하였다.

아무튼 『독립신문』의 새 편집진에서는 제181호(1925년 2월 21일자)에서, 먼저 통의부를 비판한 기사 전체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최천호는 독립신문사와 삼일인쇄소를 분리하여 김승학이 계속 인쇄소는 관할하는 조건으로 신문사를 맡았다. 그러나 김승학이 1924년 말에 상해를 떠나자 인쇄소는 6인이 간접관리로 유지하다가, 결국 1925년 2월 16일부터 다시 ‘합일적 경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발간은 순조롭지는 않았다. 통의부의 내분으로 자금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아 경영이 곤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천호가 주도한 『독립신문』은 186호까지, 모두 8개호가 발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천호는 9월 1일자로 사임하고, 그 운영은 임시로 사원회에서 선출한 3인의 집행위원에게 위임되어 10월 21일자부터 旬刊으로 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金時文 등 사원회 집행위원들은 旬刊으로 『독립신문』을 1925년 10월 21일자인 제187호부터 11월 21일자인 제190호까지 발행하였을 뿐,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독립신문』이 경영난으로 발행되지 못하자, 임시정부에서 주간 崔昌植 · 편집 金履大 · 경리 金朋濬의 진용을 갖추어 제191호(1926년 1월 1일자)부터 신문을 발간하도록 하였다. 최창식과 김붕준은 임시정부의 요인들이었다. 그리고 김이대는 통의부의 민사위원장과 정의부의 총무위원장을 역임하였는데, 실제 만주에서 상해로 와 『독립신문』의 편집을 맡았다기보다, 임시정부가 정의부세력의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 시기에 李相龍 국무령의 사임으로 새 국무령의 부임이 제대로 되지 않을 만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비록 이들이 1년에 걸쳐 8호를 발행하였지만, 임시정부의 존립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신문발행이 지난한 일이었음이 짐작된다.

결국 1925년부터 1926년에 이르는 2년 동안 신문사의 운영은 3차례의 변화가 있었고, 신문은 18호밖에 간행되지 못하였다. 1개월에 1회 발행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獨立新聞』은 폐간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임시정부의 浮沈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3. 상해판 『獨立新聞』(중문)

1922년 7월 22일자로 『獨立新聞』의 중문판이 창간되었다. 그것은 물론 중국인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며,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함께 대적하기 위한 선전용이었다. 1922년 7월 15일자(제133호)의 「中文報創刊」을 보면,

… 이로부터 我光復戰爭의 眞狀을 우리의 親愛하는 四萬萬同志에게 紹介할 길이 열리며 이로부터 兩國民 共通의 利害와 脣齒의 關係에 對한 切實한 諒解를 增進할지며 이로부터 兩國民 互相信賴의 念과 共濟의 義가 더욱 敦篤케 될지라 그럼으로 우리는 이 新聞이 白頭鴨綠과 崐崙 · 黃河와 가치 永遠하기를 빌며 同時에 俄文 · 英文 · 法文報가 速히 出現되기를 다시 褐渴不已하노라

고 하여, 중국과 연대하여 신뢰를 쌓겠다는 그 발간목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 영어 · 프랑스어판의 『獨立新聞』의 간행도 실천해야 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적어도 국한문과 중문, 그리고 영문의 세 종류 신문은 발간되어야 선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중문판 『獨立新聞』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중국인에게 한국독립운동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현실에서 비롯되었던 일이었다. 제5호에 실린 「歡迎投稿諸君」을 보면,

本報爲中韓之互助□出世者 凡我中韓公道之士 直筆之賢爲兩手之提携 兩情之親愛 亦爲共通的利害 一致的步調 而爭相投稿 以□新聞之光輝 則千萬幸甚

라고 하여, 중한호조를 위하여 중문판을 간행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중문판은 김승학이 독립신문사의 운영을 맡고 있을 시기에 박은식을 주필로 하고 중국인 기자들을 채용하여 제작하였는데, 무료로 중국 전국의 관공서 · 사회단체 · 교육기관에 배부되었다. 이 신문이 무료로 배부되었다는 것은 결국 제작 · 발송비의 부담이 그만큼 커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자금은 국한문판과 마찬가지로 남만주 독립군계, 곧 통의부에서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중문판으로는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우선 그 창간은 1922년 7월 22일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제5호가 1922년 8월 29일자였으므로, 국한문판과 비교하면, 7월 22일자가 된다. 그리고 1923년 11월 14일자가 제36호였으므로, 대략 2주에 1차례 간행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중문판에는 동일한 날짜는 아니지만 국한문본 몇 호와 짝지어지는지를 밝히고 있었다. 중문판은 1924년 6월까지 발행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독립신문』 제176호(1924년 7월 26일자)의 特告에 “純漢文報난 停刊된 지 四五朔 되와 中國 各省에 愛讀하던 同志들은 이 內膜을 不知하고 新聞請求가 每日踏至하오니”라고 한 것에서 짐작된다. 2주에 1회 발행으로 그 때까지 발행되었다면 약 15호가 발행되었을 것이나, 독립신문사의 사정이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다. 국한문판 자체가 중문판 제36호 이후 발간된 것이 제176호까지 10개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중문판은 대략 40호를 조금 넘게 발간된 것으로 생각된다. 발행부수는 1924년 초 현재 1,000부를 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중문판은 특히 중한연대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인 기자들인 張墨池와 李東園도 中韓國民互助社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신문의 구성은 논설 · 한국정보 · 중국통신 · 일본소식 · 각국통신 · 잡보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본의 침략과 만행 · 학정의 소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예컨대 東京大震災를 비난하면서 일본인의 만행을 설명하는데,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의 경우도 빼놓지 않았다. 또 중국인이 열차에 승차할 때의 부당한 대우도 알려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유도하였다. 아울러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 등을 소개하였고, 친일적인 중국인 관리를 비난하는 기사도 적지 않았다. 또 박은식이 저술한 『李舜臣傳』 등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에 관련된 소식이 많았던 것도 시대적인 조류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전체 40여 호가 간행되었는데 현재 5개호만이 확인된다는 사실은, 이후에도 중문판 신문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특히 중국의 관공서 · 사회단체 · 교육기관에 배부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중국의 각종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중문판의 확보시도가 시급하다. 이 자료집에는 원문 상태가 나빠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 기사를 제외하고, 번역이 가능한 부분은 번역문을 수록하였다.

현재 확인된 『獨立新聞』 중문판은 다음과 같다.

≪표 2≫ 상해판 『獨立新聞』(중문) 확인현황

호  수간 행 일 자면  수소 장 처비   고
51922. 08. 29국편MF  
1110.254국편MF 
1211.044국편MF 
231923.02.074국편MF상태나쁨
3611.144독립기념관 
371924.01.01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부록인 달력만 남음

4. 중경판 『獨立新聞』(중문)

『獨立新聞』은 임시정부가 오랜 이동시기를 거쳐 1941년 중경에 정착한 뒤인, 1943년에 이르러 다시 간행되었다. 이미 임시정부는 1939년 12월 국무위원회에 선전위원회를 설치하여, 대내외 선전활동을 강화하고자 한 바 있었다. 이어 1943년 4월에는 보다 강력하게 선전업무를 수행하고자 정부 내에 宣傳部를 설치하였다. 선전부에는 총무 · 편집 · 발행 등 3과와 선전위원회를 두었다가, 1944년 6월 총무 · 선전 · 자료 등 3과와 편집위원회를 설치하여 선전업무 전반을 총괄시켰다. 복간된 『獨立新聞』도 바로 선전부에서 발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한중연대와 대중국 선전활동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신문은 중문판으로 간행되었다.

1943년 6월 1일자로 발간된 『獨立新聞』은 타블로이드판 4면이었는데, 그 「창간사」에서 한국과 중국의 연합전선을 확대하고 원조를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 인민의 반일투쟁 등과 임시정부의 활동,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을 중국인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신문은 관공서를 비롯하여 중국 각계에 선전을 목적으로 배포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 『獨立新聞』의 발간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창간호가 발행되고 ‘제반곤란한 사정’으로 정간되었다가, 제2호가 발간된 것은 1년이 넘은 뒤인 1944년 8월 15일자였다. 마지막으로 1945년 7월 20일자인 제7호까지 발간되었을 뿐이었다.

1944년도 임시정부 선전부의 정무보고서를 보면,

三. 獨立新聞(中文版) 發行

獨立新聞(中文版)은 二十五年 六月一日에 創刊號를 出版한 後 諸般困難한 事情으로 因하여 停刊되었던 바 二十六年 八月十五日에 第二號를 同二十九日에 第三號(國恥紀念號)를 同 十月十五日에 第四號를 本年一月十日에 第五號를 同 三月一日에 第六號(三一紀念號)를 發刊하여서 中國各界에 좋은 印象을 주었다 各號 內容에 있어서는 이를 略한다

라고 하여, 그 발간현황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을 표로 만들어보면 ≪표 3≫과 같다.

≪표 3≫ 중경판 『獨立新聞』(중문) 발행현황

호 수간행일자면 수현 존제 호비 고
11943.06.014獨立新聞독립운동사자료집 8 번역 수록
21944.08.156  
308.286  
410.08(4)X  
51945.01.104  
603.014  
707.204  

이미 설명한 대로 현재 이 『獨立新聞』은 제4호를 제외하고, 『韓國獨立運動史料-楊宇朝篇-』(국가보훈처, 1999)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기사의 상당 부분이 번역되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8(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4)에 수록되어 있다. 즉 이 신문 전체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수집되어 있었는데,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어서 현재는 6개호를 양우조 선생 유족이 보관 중이다. 이 자료집에는 원문과 함께 기사 전체를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獨立新聞』의 필자로는 尹澄宇 · 嚴大衛(嚴恒燮) · 朴健雄 · 金奎植 · 李平山 · 趙素昻 · 張正林 등이 보인다. 윤징우 · 엄대위 · 박건웅은 임시정부 선전부 또는 선전위원회의 임원이었다. 社論 역시 이들이 집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신문사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선전부 또는 선전위원회를 활용하였다고 믿어진다. 이 신문은 간행주기가 일정하지 않아서인지 연재물이 보이지 않지만, 임시정부 관련기사를 집중적으로 게재하고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나 한국독립에 관련된 같은 외교문제나 한중연대에 관련된 논설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5. 나머지 말

『獨立新聞』이라는 제호로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간행한 신문은 크게 세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상해와 중경에서, 시기적으로는 1920년대와 1940년대, 간행문자로는 국한문판과 중문판으로 나뉘는 『獨立新聞』은 그 중요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1919년부터 1926년까지 7년 넘게 상해에서 200호 가까이 임시정부의 기관지 형태로 간행되었던 국한문판의 『獨立』 · 『獨立新聞』 · 『독립신문』 · 『독립』이 그러하였다. 지금까지 국한문판은 21호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에는 새로 10여개 호와 몇 호의 호외가 추가되었다. 결국 제40 · 125 · 177 · 178 · 179 · 180 · 190 · 191 · 195호 등 9개호가 보충되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 5개호는 현물이 확인되었지만, 이 자료집에는 수록하지 못하였으므로 앞으로 보충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상해에서 국한문판과 함께 발간된 중문판 『獨立新聞』은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나, 실물이 확인되지 않았었다. 이번 자료집에는 전체 40여 호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지만, 5개호를 수록할 수 있었다. 중문판의 경우, 중국의 각종기관에 배부되었으므로 더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

1940년대 중경에서 발간된 중문판 『獨立新聞』은 그 존재와 내용의 상당수가 이미 알려져 왔다. 발간된 7개호 전체가 오래 전 확보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어, 한 호가 빠진 6개호만이 남아 있다. 이 역시 중국의 공공기관을 통하여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獨立新聞』은 임시정부의 기관지였으므로, 기본적으로 그 기능이 가장 중요하였다. 국한문판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중문판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발간되었다. 『獨立新聞』에는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그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을 알리기 위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고, 한중연대에 대한 관심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 · 학정 역시 자주 논의되었으며, 독립운동의 방략도 주목되었다.

이 『獨立新聞』 자료집의 간행이 한국독립운동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연구를 보다 깊이 있게 촉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어진다. 아울러 현재 확인되지 못한 상해 발행의 중문판 『獨立新聞』을 비롯한, 결호들이 채워져서 보유판의 간행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獨立新聞』 관련연구

崔 埈, 「大韓民國臨時政府의 言論活動」, 『韓國史論』 10, 1981

李延馥, 「大韓民國臨時政府와 社會文化運動 -獨立新聞의 社說分析-」, 『史學硏究』 37, 1983;『大韓民國臨時政府 30年史』(國學資料院, 1999)

鄭晋錫, 「상해판 獨立新聞에 관한 연구」, 『汕耘史學』 4, 1990

姜炳文,「上海 臨時政府系 『獨立新聞』의 創刊과 思想」, 『李元淳敎授停年紀念 歷史學論叢』(敎學社, 1991)

孫安石,「上海の朝鮮語『獨立新聞』について-新史料により書誌的硏究と再檢討の可能性」, 『近きに在りて』 29, 1996

崔起榮,「상해판 『獨立新聞』의 발간과 운영」,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 하, 국가보훈처, 1999;『식민지시기 민족지성과 문화운동』(한울, 2003)

黃苗嬉, 「重慶版 獨立新聞의 內容分析과 歷史的 意義」. 『문명연지』 3-1, 2002;『重慶 大韓民國臨時政府史』(國學資料院, 2002)

최기영(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