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남궁영 ( 南宮營 )
민족구분한국인
생년월일1) 1887-09-99
출전1) 인사흥신, 349쪽
나이1) 48세(1935년 현재)
출전1) 인사흥신, 349쪽
출신지1) 木浦府 內面 北橋洞(원적)
출전1) 인사흥신, 349쪽
현주소1) 忠淸北道 淸州邑 知事官舍
출전1) 인사흥신, 349쪽
학력1) 1914년 7월 東京帝國大學 法科大學 政治學科 졸업
출전1) 인사흥신, 349쪽
경력및활동1) 1914년 10월에 總督府屬이 되고, 1917년 7월 全羅南道 珍島郡守, 1919년 2월 咸平郡守, 1921년 總督府 學務局 事務官, 1926년 3월 忠淸南道 參與官을 역임하고, 1929년 11월 慶尙南道 參與官에 임명됨. 1930년 4월 産業部長을 겸무, 1931년 9월 忠淸北道知事가 되어 1935년에 이름.
2) 대학 졸업과 동시에 본부에 들어가 全羅南道 珍島郡守, 全羅南道 咸平郡守를 역임한 뒤 본부 사무관으로 발탁되어 學務局에서 朝鮮美術展覽會의 창설이나, 朝鮮舊官制度調査를 맡아 참여.
1926년 歐美出張所의 근무를 명받았으며, 조선으로 돌아오자마자 忠南參與官으로 발탁됨.
1929년 慶尙南道參與官으로 전보.
1930년 産業部長을 겸임. 여기에서는 水産業의 통제개선, 漁業組合의 舊制刷新에 노력. 또 수산회사의 창립과 漁油肥의 통제, 부진한 水産業界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生魚 수송 등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중국 수출의 촉진 등에서 언제나 스스로 선두에 섬.
그 공적이 크게 인정받아서 忠淸南道知事로 영전.
1935년 퇴직.
다시 中樞院 參議에 임명.
3) 1914年 10月 1日 任 朝鮮總督府屬 度支部 勤務.
1915年 11月 10日 大禮記念章.
1916年 5月 10日 內務部 兼務.
1917年 7月 31日 任 朝鮮總督府 郡守 敍高等官七等 全羅南道 珍島郡守.
1917年 11月 30日 敍 從七位.
1919年 2月 10日 全羅南道 咸平郡守.
1919年 12月 24日 陞敍 高等官 六等.
1920年 2月 10日 敍 正七位.
1918年 2月 12日 任 朝鮮總督府 事務官.
1921年 2月 18日 學務局 勤務.
1922年 3月 31日 陞敍 高等官 五等.
1922年 5月 10日 敍 從六位.
1924年 10月 30日 陞敍 高等官 四等.
1924年 12月 24日 殖產局 農務課 勤務.
1925年 1月 21日 敍 正六位.
1926年 9月 6日 任 朝鮮總督府 忠淸南道 參與官.
1927年 10月 31日 陞敍 高等官 三等.
1927年 2月 15日 敍 從五位.
1928年 11月 16日 大禮記念.
1930年 4月 26日 兼任 朝鮮總督府 道事務官 慶尙南道 產業部長.
1930年 8月 12日 敍 勳六等 授 瑞寳章.
1931年 9月 23日 任 朝鮮總督府 忠淸北道 知事 敍 高等官 二等.
1931年 1月 12日 敍 正五位.
1931年 1月 17日 敍 勳五等 授 瑞寳章.
1932年 5月 14日 敍 勳四等 授 瑞寳章.
1934年 6月 30日 陞敍 高等官 一等.
1934年 8月 4日 敍 勳三等 授 瑞寳章.
1934年 2月 28日 敍 從四位.
1935月 1日 依願免本官.
1935年 4月 16日 敍 正四位.
1935年 4月 26日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 被 仰付 勅任官 待遇.
正四位 勳三等
출전1) 인사흥신, 349쪽
2) 조선공로자, 133
3) 기념표창자, 39
인물평외모1) 대학 나온 조선인 관리로서 최초로 勅任에 임명되었던 만큼 그의 수완은 정평이 나 있다. 게다가 젊은 사무관 시절 本部 農務課에 재직하며 산업방면은 확실하고 철저하게 지식을 습득하였기 때문에, 명철한 머리와 놀랄 만큼 예리한 솜씨로 新興産業道로서의 생기를 불어넣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출전1) 조선공로자, 133
참고문헌조선인사흥신록
조선공로자명감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