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정교원 ( 鄭僑源 )
민족구분한국인
생년월일1) 1891-04-99
출전1) 인사흥신, 315쪽
나이1) 44세(1935년 현재)
출전1) 인사흥신, 315쪽
출신지1) 京城府 嘉會洞 133(원적)
2) 慶尙北道 達城郡 西面
출전1) 인사흥신, 315쪽
2) 기념표창자, 793
현주소1) 黃海道 海州邑 知事官舍
출전1) 인사흥신, 315쪽
경력및활동1) 1906년 4월에 度支部 主事가 됨. 1908년 1월에 財務監督局 主事, 1910년 10월에 총독부 臨時土地調査局 主事, 1917년 12월에 경상남도 居昌郡守, 1921년 2월에 경상남도 서무과장을 겸함. 同 勸業課長에 승진함. 1925년 9월에 중추원 통역관 겸 중추원 書記가 됨. 1929년 11월에 전라북도 參與官, 1930년 4월에 전라남도 參與官, 1933년 4월에 황해도 知事에 임명이 되어 1935년에 이름.
2) 1906년 4월 舊韓國政府의 度支部 主事로 나갔다가, 1908년 財務監督局 主事로 근무하였다. 總督政治가 실시되면서 臨時土地調査局 主事가 되었다. 1933년 黃海道知事로 발탁되어 지방의 개선 진보에 노력하고 있다.
1917년 12월 지방에 나아가 군수가 되어 慶南 昌原郡에서 근무했으며, 1921년 2월 慶南 庶務課長, 이어서 勸業課長을 역임했다. 1925년 9월 中樞院 통역관 겸 書記로 자리를 옮겼으며, 1929년 11월 全北參與官으로 영전하여 커다란 치적을 남겼다.
全南北參與官으로 농촌진흥운동의 제1선에 섰다. 全南北은 호남지방의 비옥한 창고로 알려져 日本人 農場도 매우 많았다. 따라서 농산물이 풍부하여 中北鮮 地方과는 크게 달랐다. 성품이 온후 돈실한 그가 그 중간에 서서 자력갱생을 지도할 때 그 감화는 자연히 베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격한 사상에 휩쓸리기 쉬운 청년의 지도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현재의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3) 正五位勳四等
1910年 8月 29日 任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書記.
1916年 5月 6日 任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監査官 敍 高等官八等. 7月 31日 敍 正八位.
1917年 12月 19日 任 朝鮮總督府 郡守 命 慶尙南道 居昌郡守.
1918年 6月 29日 陞敍 高等官七等. 8月 30日 敍 從七位
1920年 9月 30日 陞敍 高等官六等. 10月 30日 敍 正七位.
1921年 2月 12日 任 朝鮮總督府 道理事官 命 慶尙南道 在勤.
1923年 3月 31日 陞敍 高等官五等. 6月 20日 敍 從六位.
1924年 10月 14日 敍 勳六等 授 瑞寳章.
1925年 1月 6日 補 慶尙南道 視學官 命 內務部 學務課長. 9月 10日 任 朝鮮總督府 中樞院通譯官 兼 朝鮮總督府 中樞院 書記官 朝鮮總督府 事務官 敍 高等官五等 內務局 勤務.
1926年 2月 3日 陞敍 高等官四等. 3月 15日 敍 正六位.
1928年 3月 30日 免 本官 專任 朝鮮總督府 事務官. 11月 16日 大禮記念章 授與. 7月 11日 陞敍 高等官三等
1929年 9月 2日 敍 從五位. 9月 4日 敍 勳五等 授 瑞寳章. 11月 28日 任 朝鮮總督府 全羅北道 參與官.
1930年 4月 26日 任 朝鮮總督府 全羅南道 參與官 兼 朝鮮總督府 道事務官 產業部長.
1933年 4月 7日 任 朝鮮總督府 黃海道 知事 敍 高等官二等. 5月 15日 敍 正五位. 6月 9日 敍 勳四等 授 瑞寳章
출전1) 인사흥신, 315쪽
2) 조선공로자, 38
3) 기념표창자, 793
인물평외모1) 실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만한 인격자로서 알려진 사람으로, 부하의 제언을 받아들이는 배포가 있으며, 부하를 신뢰하여 일을 맡기는 배짱을 가진 사람이었다. 따라서 부하들도 그를 신뢰하여 힘써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상하가 일치하여 지방의 개발에 노력하는 것이 그의 인격의 광채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또한 생활개선의 한 방책으로 흰옷 폐지, 염색 장력를 장려하고 있으나, 이미 도내에는 흰옷을 전혀 입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열렬한 그의 활동상을 자세히 살펴 볼 일이다.
출전1) 조선공로자, 38
참고문헌조선인사흥신록
조선공로자명감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