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제목(17) [鬱陵島 出張復命書 送付 件]  
문서번호公第28號  
발신일1899년 10월 4일 ( 1899년 10월 04일 )  
발신자 在元山 領事 武藤精次郞  
수신자 特命全權公使 林權助  
(17) [鬱陵島 出張復命書 送付 件]
公第28號
지난번 江原道 鬱陵島로 출장 명령을 받은 高雄 書記生의 복명서 사본 1통을 보내니 이것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또 이 복명서 내용과 같이 올해 11월 30일까지 퇴거해야 한다고 통고해 두었습니다만, 그 기일 내에 과연 퇴거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다시 경비함을 파견하여 확인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같이 아시기 바라며 이 점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敬具.
1899년 10월 4일
在元山 領事 武藤精次郞
特命全權公使 林權助 殿

[別紙]
문서제목復命書  
復命書
“울릉도의 樹木 벌채권은 전에 韓國 정부가 러시아인에게 양여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함부로 이를 도벌하는 일이 있다고 하니 帝國 軍艦 摩耶에 편승하여 그 섬에 가서 조사한 후, 벌목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또 盜伐者들을 편의상 군함에 태워서 데리고 돌아오든가, 또는 뒷일을 경계한 후에 즉시 떠나게 하든가, 만일 즉시 퇴거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기한을 정하여 퇴거하도록 명하라.”는 뜻을 別紙 제1, 제2호와 같이 올해 8월 21일 및 22일자 京城 駐在 林 特命全權公使의 훈령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巡査部長 管谷新平을 대동하고 동월 26일 오전 6시 摩耶艦에 편승하여 목적지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날씨가 좋지 못하여 잠시 강원도 長箭彎으로 물러났다가 다음 날인 27일 오전 7시 비바람을 무릅쓰고 출발하였으나 풍랑이 더욱 심하여 항해가 자유롭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장전만 근처로 되돌아가려고 하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28일까지도 같은 상황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군함을 우선 釜山으로 기항하기로 결정하여 29일 오후 4시에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곧바로 이 사실 및 同艦이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려서 다시 울릉도로 향할 때까지 체재할 것인가의 여부를 제3호와 같이 공사에게 품의하였더니, 30일에 제4호와 같이 어떠한 回訓이 있을 때까지 부산에 체재하라는 전보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9월 2일 제5호와 같이 摩耶艦이 다시 울릉도로 향하여 출발할 때까지 체재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라는 내용의 전보 훈령을 접수하였습니다. 부산 체재 중 먼저 울릉도에 갔다 온 부산세관장 라포르의 설명을 들으니, 현재 거주 중인 日本人은 남녀 합하여 모두 200여 명에 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도저히 군함에 모두를 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울릉도는 정박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연안에 잠시밖에 遊泊할 수 없으므로 퇴거를 명령해도 군함 遊泊 시간 안에 과연 퇴거할 수 있을 것인지의 점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집행이 끝날 때까지 머물면서 다시 군함이 회항하여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운운하는 제6호 내용을 9월 2일에 상신하였습니다. 같은 달 6일에 이르러서 제7호와 같은 布達文을 가지고 상륙하여 주된 일본인을 모아서 이것을 일반에게 포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2, 3일간 그 섬에 체재하면서 지방관들과 협동하여 모든 일을 알선 받은 후 다시 군함이 회항하기를 기다려서 철수하거나, 어떻게 하든 實地의 상황을 봐 가면서 적당한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의 回電에 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훈령을 받고 同月 18일 울릉도로 향하여 출발하였지만 또다시 악천후로 인하여 경상도 蔚山에서 잠시 풍랑을 피하기를 5일간, 24일 오전 5시에 출발, 25일 오전 5시 겨우 울릉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섬에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정박장도 없고 특히 폭풍우 후에는 격랑으로 인하여 자유로이 상륙할 수 없어서 섬을 한 바퀴 돌아온 후에 겨우 동남면의 해안에서 상륙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풍랑이 조금 진정되었기 때문에 함장에게 2, 3일 간을 정박하면서 기다리든지, 혹은 며칠 후 재차 회항하여 돌아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함장은 또다시 풍랑이 일게 되면 난을 피할 만한 장소도 없고 갔다가 다시 회항해 오는 것도 용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大和艦과의 교대 기간도 임박했으므로 회항할 수 있을지 여부도 예측하기 어려우니 지금부터 상륙시키면 7시간을 遊泊하며 배로 돌아오기를 歸艦을 기다릴 것이니 가급적 빨리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7시간을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고 간신히 南陽洞이라는 곳에 상륙하였습니다. 그 마을에는 계곡 사이에 일본인 가옥 네 채가 있고 8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 주된 자는 島根縣 隱岐國 西鄕中町 138번지 평민 畑本吉藏과 同 伯耆國 東伯村 95번지 평민 天野源藏 두 사람으로, 자신이 우두머리라고 말하면서 몇 명을 사역시켜 벌목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에게 각처에 산재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그 지명과 인원, 호수 등을 조사하였더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東海岸
東洞 18戶 25명茂洞 2戶 3명
北海岸
竹岩 1戶 3명寧洞 2戶 9명
䤟洞 1戶 4명玄洞 1戶 20명
通龜尾 1戶 9명 
이상 79명 외에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현재 인원은 모두 100명 정도이지만, 작년부터 올해 봄까지는 1,560명에 달했는데 올해 3월에 철수하였다고 하며, 그리고 이 79명 중 畑本, 天野 두 사람을 제외한 주된 자는 12명으로 그 성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島根縣田中 政春
福葉 勝太郞
隱岐國知天郡岡村脇田 正太郞
島根縣松江市山本 克衛
西濱 福太郞
島根縣濱町田波 音次郞
大分縣豊後西伯郡仲西 秋太郞
石井 利三郞
島根縣知天郡由井 留次郞
隱岐國浦鄕村備前屋 某
門 萬太郞
隱岐國安東町深田 甚太郞
이 12명은 거의 모두 7곳에 산재하고 있기 때문에 元籍 등을 조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불러 모으려고 해도 군함의 정박 시간이 짧기 때문에 부득이 우두머리 격인 畑本吉藏·天野源藏 두 사람에게 수목을 도벌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깨우쳐 준 후, 조속히 일동이 협의하여 퇴거해야 한다는 뜻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올해 7월에 오게 되어 있는 선박이 아직까지 오지 않았는데, 근일 중에 올 것이므로 그 배로 퇴거할 것을 내일 즉 26일에 집합시켜 명령을 전달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제7호의 전보 훈령 취지에 따라 제8호의 布達文 몇 통을 작성하여 두 사람에게 주고 각처에 산재해 있는 주된 자에게 교부하여 기필코 11월 30일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취지를 일러주게 하고 제9호와 같이 在住者의 일동을 대표하여 퇴거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고 배로 돌아와서 그 날 오후에 출발하여 26일 오후 5시 부산에 도착하자 곧바로 제10호와 같이 개략적인 전보를 공사에게 복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섬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목을 채벌하게 된 것은 이 섬의 都監 즉 島守라고도 말하는 한국 관리(현재 이 섬의 도감은 裵季周라는 자임)의 공식 허가를 얻어 수목의 크기에 따라 이에 상당한 벌목료를 납부하고 채벌하는 것이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지목하여 도벌자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며 거의 매매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퇴거를 명하더라도 이 섬의 도감이라는 자에게 賣木行爲를 엄금한다는 훈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서 또다시 오늘과 같이 우리나라 사람이 이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섬에 이주하게 된 것은 대개 5년 전의 일로 거의 집을 짓고 토착민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오로지 槻松을 벌채하거나 黏黐를 제조하고 겸하여 울릉도에서 나는 콩을 수출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섬에는 논이 없어 土民들은 콩과 조, 기장류를 주식으로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너간 이래 미곡, 옥양목, 잡화류를 수입해 왔기 때문에, 토민들은 물건의 매매나 교환 등에 매우 편리하다고 느껴서 도감을 비롯하여 일반 토민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며, 그동안 피차의 관계가 매우 평온하여 절대로 시끄러운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수입화물은 주로 伯耆國境 또는 濱田港에서 100石 내지 200石을 和船에 싣고서 연 3회 즉 1회는 3월에, 2회는 5월에, 3회는 7월에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벌채한 수목과 콩 등의 수출품은 敦賀·馬關·博多에서 하역한다고 합니다. 이 섬에서 생산되는 콩은 매년 4~5,000석에 달한다고 하며, 콩에 대하여는 도감이 징수하는 수출세액이 100石에 대하여 백분의 2의 비율로 과징된다고 합니다.
현재 토민 인구는 2,000여 명이고 호수는 모두 500호이며, 농부와 어부가 각각 반수이고, 선박을 건조하는 목공들이 있으며 식수는 도처에 계곡물이 맑아 음료로 적합하다고 합니다.
이 섬은 元山에서 185哩이고, 竹邊에서 73哩, 부산에서 175哩 되는 곳에 있는 하나의 도서로서 동서가 조금 긴 삼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위가 18哩이고 그 위치는 북위 37도에서 시작되어 37도 33분에 이르며, 동경 139도 49분에서 시작되어 139도 57분에 이릅니다. 또 주위 연안의 바다 밑은 암석으로 되어 있고 깊이는 48미터에서 72미터 이상으로 投錨할 곳이 없는 조그만 섬입니다. 지세는 전체적으로 높은 산맥으로 5,000피트에 달하는 높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도처에 산과 산이 마주하여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며 푸른 숲이 울창하게 바위 위로 늘어져 있어서 경관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위와 같이 복명합니다.
1899년 10월 3일
外務書記生 高雄謙三
在元山 領事 武藤精次郞 殿

[別紙][附屬書]
문서제목[駐韓公使와 高雄謙三 간에 授受한 鬱陵島 問題 公信 諸件]  
[駐韓公使와 高雄謙三 간에 授受한 鬱陵島 問題 公信 諸件]
第1號
울릉도의 수목 벌채권은 앞서 한국 정부에서 러시아인에게 양여할 때까지 일본인들이 도벌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 이를 금지해 달라고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및 한국 정부로부터 의뢰가 있었음. 이에 의하여 貴館 高雄 書記生에게 울릉도 출장을 명함. 同 서기생은 이 섬에 있는 일본인을 조사하여 벌목을 금하는 명령을 전달할 것. 출장에는 摩耶 艦長에게 의뢰하여 편승을 요구할 것. 이 艦에 편승하여 그 섬으로 왕복하는 것은 摩耶 함장의 계획에 포함하도록 요청하고, 本日 摩耶의 체류를 보류한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취소함. 출장비 등은 우선 입체한 후 추후 本省에 청구할 것.
1899년 8월 21일 오후 6시 접수

[別紙][附屬書]
문서제목[駐韓公使 林이 高雄謙三에게 보낸 鬱陵島 問題 관련 電訓]  
第2號
울릉도에서 도벌자를 군함에 편승시켜서 연행하든가 또는 엄중하게 향후를 경계하고 타일러서 즉시 이 섬을 떠나도록 할 것. 만일 즉시 떠나도록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면 날짜를 정하여 퇴거를 명령할 것.
8월 22일 오후 접수

[別紙][附屬書]
문서제목[右件 관련 高雄謙三의 訓令 要請]  
第3號
지난 26일 출항하여 울릉도로 향하였지만 악천후로 인하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어서 부산으로 되돌아왔으며 摩耶艦은 또다시 날씨를 기다리면서 이 섬으로 향할 때까지 이곳에서 체재해야 할지 지시를 요청함.
1899년 8월 29일
高雄謙三
林 全權公使 殿

[別紙][附屬書]
문서제목[右件에 대한 回訓]  
第4號
어떤 回訓이 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체재할 것.
1899년 8월 30일 電訓

[別紙][附屬書]
문서제목[右件 관련 電訓]  
第5號
高雄 서기생은 摩耶艦이 출발할 때까지 부산에서 체류한 후 다시 울릉도로 출발하여 그 임무를 완수할 것.
1899년 9월 2일 電訓

[別紙][附屬書]
문서제목[右件 鬱陵島 問題 관련 高雄謙三의 公信]  
第6號
이번 울릉도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목 벌채를 금지하기 위하여 군함 摩耶艦에 편승하여 이 섬으로 출장하라는 내용의 전훈을 접수하고, 지난 달 26일 원산을 출발하여 울릉도로 향하였습니다만 악천후로 인하여 도착하지 못하고 29일 부산에 일시 기항하였다는 것은 이미 전보로 상신하여 다음 명령을 대기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이 섬에 간 이곳 부산항 세관장 라포르 씨의 설명을 들으면, 이 섬에 현재 이주하고 있는 일본인은 남녀 합하여 모두 200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도벌자를 모두 군함에 편승시키기는 불가능하므로 전훈하신 뜻에 따라 엄중하게 훈계하여 가급적 신속한 시일 내에 퇴거할 것을 명령하겠지만, 선편이 없다든가 혹은 즉시 퇴거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때에는 퇴거 날짜를 정하여 퇴거를 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 섬에 정박장이 없기 때문에 일기가 좋을 때에도 겨우 4~5시간밖에는 정박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므로 그 시간 안에 과연 퇴거할 수 있을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예견이 서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 그럴 때에는 집행이 완료될 때까지 이 섬에 체재하면서 다시 군함의 회항을 기다릴 것인가, 아무쪼록 전보로 훈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점 상신합니다. 敬具.
1899년 9월 2일
在元山 外務書記生 高雄謙三
在京城 特命全權公使 林勸助 殿

[別紙][附屬書]
문서제목[右件 鬱陵島 問題 관련 電訓]  
第7號
이달 2일자 貴翰을 접수하였는데 貴官은 미리 布達文(도벌 금지와 일정한 기한 내에 철수 명령 등)을 가지고 울릉도에 상륙한 후 주된 일본인을 모아 놓고 이 포달문을 일반에게 포달하게 할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2~3일간 그 섬에 체재하면서 한국의 지방관들과 함께 공동으로 모든 일을 주선하게 한 후 재차 군함이 회항하여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철수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생각되며, 어떻게 하든 實地 상황에 따라 적당히 조치할 것.
1899년 9월 6일 電訓

[別紙][附屬書]
문서제목[九月 二十五日字 鬱陵島出張 在元山領事館 外務書記生 高雄謙三의 布達文]  
第8號
근래 우리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건너가서 사사로이 수목을 남벌하여 본국으로 수송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서 이들의 행위를 엄금시켜 줄 것을 우리 공사에게 조회하여 왔으므로 本官은 이번 우리 공사의 명을 받고 섬에 왔다. 생각해보면, 우리 일본인들이 이 섬에 머물면서 특별히 수목을 도벌하여 밀수출을 기도하는 것은 매우 괘씸한 일이니 앞으로는 결코 도벌해서는 안 됨은 물론 이 섬에 있는 일본인은 모두 이 섬을 떠날 것.
이상 엄히 시달함.
1899년 9월 25일
鬱陵島出張 在元山領事館 外務書記生 高雄謙三

[別紙][附屬書]
문서제목覺書  
覺書
第9號
이번에 우리는 이곳 울릉도에서 수목 남벌과 아울러 이곳에 在住하는 것을 엄금한다는 布達文의 취지를 숙지함과 동시에 하명하신 대로 1899년 11월 30일까지 퇴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 일동을 대표하여 말씀하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1899년 9월 25일
島根縣 隱岐國 西鄕 中町 138번지 當時鬱陵島在 畑本吉藏
鳥取根東伯郡附村 當時鬱陵島在 天野源藏
在元山領事館 外務書記生 高雄謙三 殿

[別紙][附屬書]
문서제목[鬱陵島에 出張갔던 高雄謙三의 歸任報告]  
第10號
本官 지금 귀임하였습니다. 울릉도에 있는 벌목자는 모두 100명으로 도합 8개소에 산재해 있으며, 이 섬은 높은 산맥만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육로 통행이 곤란할 뿐만 아니라 해로도 정박장이 없고, 거기에다 풍랑이 높아서 한 바퀴 돌아서 겨우 남쪽 해면에 접해 있는 해안에 상륙하였습니다. 우두머리 급인 두 사람에게 사실을 조사한 후 훈령을 전달하고 올해 11월 30일까지 퇴거할 것을 명하고 在住者 일동을 대신하여 각서를 받아 두었습니다. 歸館 후에 상세하게 우편으로 上申하겠습니다.
9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