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王과 百濟王을 소집하였으나 使臣을 보냄. 新羅가 4개 촌을 공략 ( 529년 04월(음) )

이 달 사신을 보내어 己能末多干岐를 보냈다. 아울러 임나에 있는 近江毛野臣에게 명령하여 “아뢴 바를 알아보고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毛野臣은 熊川001001 熊川경남 昌原의 熊川面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鎭海市로 보기도 한다.닫기에 머물면서어떤 책에는 任那의 久斯牟羅002002 久斯牟羅屈自郡(또는 『三國遺事』 권 3, 塔像 4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조에 나오는 仇史郡) 부근으로 보고 있는데 오늘날의 昌原으로 보기도 하고 馬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닫기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러 모았다. 신라왕 佐利遲003003 佐利遲당시 新羅王은 法興王으로 휘는 原宗인데 佐利는 原의 譯이고 遲는 智와 같이 人名에 많이 쓰이는 美稱으로 보고 있다. 이와는 달리 佐利遲는 법흥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신라의 第一 重臣이었던 哲夫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닫기久遲布禮004004 久遲布禮그 音이 비슷한 居柒夫(또는 荒宗으로도 씀)로 보고 있다.닫기를 보내었고어떤 책에는 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라 하였다 백제는 恩率彌騰利005005 彌騰利뒤에 나오는 騰字의 표기가 다른 恩率 彌縢利와 동일 인물일 것이다. 恩率은 백제 16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닫기를 보내어 毛野臣이 있는 곳에 가서 모이게 하고 두 왕은 참석하러 오지 않았다. 毛野臣이 매우 화를 내며 두 나라 사신을 꾸짖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이다어떤 책에는 큰 나무의 끝은 큰 나무로 잇고 작은 나무의 끝은 작은 나무로 잇는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두 나라의 왕이 몸소 와서 천황의 명령을 받지 않고 가벼이 사신을 보내는가. 이제 비록 너희 왕이 스스로 와서 명령을 받겠다 하더라도 나는 칙을 선포하지 않고 반드시 쫓아가서 물리칠 것이다”라 하였다. 久遲布禮恩率 彌縢利가 마음속으로 두려워 각각 돌아가서 왕을 부른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그 上臣006006 上臣단순히 大臣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나 구체적으로 어느 관등 또는 관직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이와 비슷한 표기법으로 생각되는 것으로는 『三國遺事』 권 1, 紀異 元聖大王조에 金敬信을 二宰, 金周元을 上宰라고 한 것이 있으며, 「聖德大王神鐘銘」金邕을 上相 大角干이라 한 예가 있다. 특히 上相은 上大等, 侍中 등의 上位에 있는 最高執政官이 아닐까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닫기利叱夫禮智干岐007007 伊叱夫禮智干岐당시 신라의 將軍 異斯夫(또는 笞宗으로도 쓴다)를 가리킨다.닫기로 바꾸어 보냈는데신라에서는 大臣을 上臣이라 하는데 어떤 책에는 伊叱夫禮智奈末이라 하였다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毛野臣이 멀리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무리가 수천 명인 것을 보고, 熊川으로부터 任那의 己叱己利城008008 己叱己利城앞에 나온 任那의 久斯牟羅와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닫기으로 들어갔다. 伊叱夫禮智干岐는 多多羅原009009 多多羅原부산의 多大浦로 보는 견해가 있다.닫기에 머물며 공경하여 돌아가지 않고 세 달을 기다리며 칙을 들으려고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다. 伊叱夫禮智가 거느린 士卒들이 마을에서 걸식하고 있었는데 毛野臣의 從者 河內馬飼首御狩와 마주쳤다. 御狩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숨어서 걸식하는 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주먹으로 쳤다. 걸식자가 보고 “삼가 세 달을 기다리며 勅旨를 듣고자 했으나 아직도 선포하려고 하지 않고 칙을 들으려는 사신을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上臣을 죽이고자 함임을 알겠다”라 하였다. 이에 所見을 모두 上臣에게 아뢰었더니 上臣은 4개의 村金官·背伐·安多·委陀가 4개 촌이다. 어떤 책에는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를 4개 촌이라 하였다010010 金官·背伐·安多·委陀가 ~ 4개 촌이라 하였다여기에 나오는 4개 村의 위치는 모두 洛東江口에 있는 지방으로 추정된다. 金官須那羅는 같은 곳으로 金海에, 安多多多羅는 多大浦에, 背伐費智熊川 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委陀和多는 같은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닫기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多多羅 등의 4개 촌을 노략질하게 한 것은 毛野臣의 잘못이다”라 하였다.

註 001
熊川 : 경남 昌原의 熊川面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鎭海市로 보기도 한다.
註 002
久斯牟羅 : 屈自郡(또는 『三國遺事』 권 3, 塔像 4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조에 나오는 仇史郡) 부근으로 보고 있는데 오늘날의 昌原으로 보기도 하고 馬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註 003
佐利遲 : 당시 新羅王은 法興王으로 휘는 原宗인데 佐利는 原의 譯이고 遲는 智와 같이 人名에 많이 쓰이는 美稱으로 보고 있다. 이와는 달리 佐利遲는 법흥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신라의 第一 重臣이었던 哲夫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註 004
久遲布禮 : 그 音이 비슷한 居柒夫(또는 荒宗으로도 씀)로 보고 있다.
註 005
彌騰利 : 뒤에 나오는 騰字의 표기가 다른 恩率 彌縢利와 동일 인물일 것이다. 恩率은 백제 16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註 006
上臣 : 단순히 大臣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나 구체적으로 어느 관등 또는 관직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이와 비슷한 표기법으로 생각되는 것으로는 『三國遺事』 권 1, 紀異 元聖大王조에 金敬信을 二宰, 金周元을 上宰라고 한 것이 있으며, 「聖德大王神鐘銘」金邕을 上相 大角干이라 한 예가 있다. 특히 上相은 上大等, 侍中 등의 上位에 있는 最高執政官이 아닐까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註 007
伊叱夫禮智干岐 : 당시 신라의 將軍 異斯夫(또는 笞宗으로도 쓴다)를 가리킨다.
註 008
己叱己利城 : 앞에 나온 任那의 久斯牟羅와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註 009
多多羅原 : 부산의 多大浦로 보는 견해가 있다.
註 010
金官·背伐·安多·委陀가 ~ 4개 촌이라 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4개 村의 위치는 모두 洛東江口에 있는 지방으로 추정된다. 金官須那羅는 같은 곳으로 金海에, 安多多多羅는 多大浦에, 背伐費智熊川 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委陀和多는 같은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가명
加耶
新羅
百濟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