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左將軍이 이미 두 군대를 합병한 뒤 맹렬히 朝鮮을 공격하였다. 朝鮮의 相 路人·韓陶와 尼谿相 參과 將軍 王唊042042 王唊 朝鮮相 路人, 相 韓陶, 尼谿相 參, 將軍 王唊에 대해서 應劭는 주석하기를 ‘모두 다섯 사람인데 戎狄(衛滿朝鮮을 말함)이 官制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두 相이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應劭가 이들을 다섯 사람으로 본 것은 尼谿相 參을 尼谿와 相 參 두 사람으로 나누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顔師古는 이러한 應劭의 견해를 반박하고 相 路人, 相 韓陶(陰), 尼谿相 參, 將軍 王唊 네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西漢이 衛滿朝鮮을 멸망시킨 후, 路人의 아들 最(路人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사망), 韓陶(『史記』「朝鮮列傳」에는 韓陰), 參, 王唊 등을 列侯로 봉하였는데, 尼谿라는 독립된 명칭으로 제후에 봉해진 기록을 볼 수가 없다. 이로 보아 參을 尼谿相의 이름으로 읽은 顔師古의 견해는 옳은 것으로 생각된다.(三上次男, 「衛氏朝鮮國の政治·社會的性格」p.217)
여기서 필자는 古朝鮮과 衛滿朝鮮의 社會性格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시사를 받는다. 앞의 주석 28)에서 衛滿朝鮮의 관직으로 裨王과 將士가 확인되었으므로, 『史記』「朝鮮列傳」에 나타난 衛滿朝鮮의 관직은 朝鮮相, 相, 尼谿相, 將軍, 裨王, 將士 등이 된다. 이러한 관직명은 고대 한국어가 한자화되었을 것인데, 그 명칭으로 보아 중국의 관제와는 전연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했기 때문에 중국의 관제에 밝았던 應劭는 衛滿朝鮮의 관제를 평하여 말하기를 ‘戎狄(衛滿朝鮮을 말함)이 관제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두 相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史記索隱』; 『漢書』「西南夷兩粤朝鮮傳」應劭주석) 이러한 평은 應劭가 중국인의 처지에서 衛滿朝鮮이 西漢의 관제를 따르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衛滿은 西漢으로부터 망명해 온 인물이므로 西漢의 관제에 밝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衛滿이 西漢의 관제를 사용하지 않고 西漢과는 다른 독자적인 관제를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은 衛滿이 통치자가 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지역에 토착화된 관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의 이러한 유추가 허용된다면 衛滿朝鮮의 관제는 바로 古朝鮮의 그것을 계승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史記』에는 西漢과 관계가 있었던 관직만 언급되었으므로, 실제로는 古朝鮮과 衛滿朝鮮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관직과 체계적인 행정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체계적인 행정조직은 국가단계 사회의 하나의 요소가 되는 것이므로, 古朝鮮과 衛滿朝鮮은 상당히 높은 단계의 사회에 진입해 있었을 것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三上次男은 路人, 韓陰, 參, 王唊 등의 출신성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路人은 『史記索隱』에 ‘路人은 漁陽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근거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국에는 路라는 성이 적지 않은 데에는 『史記索隱』의 설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路人은 중국으로부터의 이주자였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韓陰의 출신성분도 분명하지 않으나 중국에 韓이라는 성이 많음으로 그도 중국으로부터의 이주자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王唊도 王姓의 중국인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尼谿相 參은 성과 이름을 합하여 단지 參 한 자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宋書』倭人傳에서 倭王 瓚·武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가 토착인으로서 중국의 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尼谿는 아마도 토착 부족의 명칭이 漢字로 기록되었을 것인데, 이로 보아 衛滿朝鮮의 지배층은 중국인에 의하여 완전히 점유되었던 것이 아니고 토착민 豪族이 상당히 진출하여 중국인 유력자와 土着豪族 사이에 어느 정도의 타협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앞의 논문, pp.217~218) 李丙燾도 衛滿朝鮮의 중앙관직에 보이는 朝鮮相, 尼谿相 등은 그의 출신 부족명이 관직명이 된 것으로, 原始部族長制의 잔재 유품이라고 하였다.(「衛氏朝鮮興亡考」p.82) 이와 같이 部族名이 관직명이 된 현상은 衛滿朝鮮보다 앞선 古朝鮮에서는 더욱 현저하였을 것인데, 이것은 古朝鮮의 국가구조가 朝鮮族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부족의 연맹으로 이루어졌을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며 그 유풍이 衛滿朝鮮에 남아있었다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史記』卷115 「朝鮮列傳」所引『史記集解』·『史記索隱』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三上次男, 「衛氏朝鮮國の政治·社會的性格」『中國古代史の諸問題』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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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樓船[將軍]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지금 樓船은 잡혀 있고, 左將軍 단독으로 將卒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니, 맞아서 싸우기 두렵거늘 王 또한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韓]陶·[王]唊·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路人은 道中에서 죽었다.

註 042
王唊 : 朝鮮相 路人, 相 韓陶, 尼谿相 參, 將軍 王唊에 대해서 應劭는 주석하기를 ‘모두 다섯 사람인데 戎狄(衛滿朝鮮을 말함)이 官制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두 相이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應劭가 이들을 다섯 사람으로 본 것은 尼谿相 參을 尼谿와 相 參 두 사람으로 나누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顔師古는 이러한 應劭의 견해를 반박하고 相 路人, 相 韓陶(陰), 尼谿相 參, 將軍 王唊 네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西漢이 衛滿朝鮮을 멸망시킨 후, 路人의 아들 最(路人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사망), 韓陶(『史記』「朝鮮列傳」에는 韓陰), 參, 王唊 등을 列侯로 봉하였는데, 尼谿라는 독립된 명칭으로 제후에 봉해진 기록을 볼 수가 없다. 이로 보아 參을 尼谿相의 이름으로 읽은 顔師古의 견해는 옳은 것으로 생각된다.(三上次男, 「衛氏朝鮮國の政治·社會的性格」p.217)
여기서 필자는 古朝鮮과 衛滿朝鮮의 社會性格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시사를 받는다. 앞의 주석 28)에서 衛滿朝鮮의 관직으로 裨王과 將士가 확인되었으므로, 『史記』「朝鮮列傳」에 나타난 衛滿朝鮮의 관직은 朝鮮相, 相, 尼谿相, 將軍, 裨王, 將士 등이 된다. 이러한 관직명은 고대 한국어가 한자화되었을 것인데, 그 명칭으로 보아 중국의 관제와는 전연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했기 때문에 중국의 관제에 밝았던 應劭는 衛滿朝鮮의 관제를 평하여 말하기를 ‘戎狄(衛滿朝鮮을 말함)이 관제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두 相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史記』「朝鮮列傳」에 주석으로 실린 『史記集解』·『史記索隱』; 『漢書』「西南夷兩粤朝鮮傳」應劭주석) 이러한 평은 應劭가 중국인의 처지에서 衛滿朝鮮이 西漢의 관제를 따르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衛滿은 西漢으로부터 망명해 온 인물이므로 西漢의 관제에 밝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衛滿이 西漢의 관제를 사용하지 않고 西漢과는 다른 독자적인 관제를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은 衛滿이 통치자가 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지역에 토착화된 관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의 이러한 유추가 허용된다면 衛滿朝鮮의 관제는 바로 古朝鮮의 그것을 계승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史記』에는 西漢과 관계가 있었던 관직만 언급되었으므로, 실제로는 古朝鮮과 衛滿朝鮮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관직과 체계적인 행정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체계적인 행정조직은 국가단계 사회의 하나의 요소가 되는 것이므로, 古朝鮮과 衛滿朝鮮은 상당히 높은 단계의 사회에 진입해 있었을 것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三上次男은 路人, 韓陰, 參, 王唊 등의 출신성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路人은 『史記索隱』에 ‘路人은 漁陽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근거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국에는 路라는 성이 적지 않은 데에는 『史記索隱』의 설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路人은 중국으로부터의 이주자였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韓陰의 출신성분도 분명하지 않으나 중국에 韓이라는 성이 많음으로 그도 중국으로부터의 이주자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王唊도 王姓의 중국인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尼谿相 參은 성과 이름을 합하여 단지 參 한 자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宋書』倭人傳에서 倭王 瓚·武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가 토착인으로서 중국의 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尼谿는 아마도 토착 부족의 명칭이 漢字로 기록되었을 것인데, 이로 보아 衛滿朝鮮의 지배층은 중국인에 의하여 완전히 점유되었던 것이 아니고 토착민 豪族이 상당히 진출하여 중국인 유력자와 土着豪族 사이에 어느 정도의 타협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앞의 논문, pp.217~218) 李丙燾도 衛滿朝鮮의 중앙관직에 보이는 朝鮮相, 尼谿相 등은 그의 출신 부족명이 관직명이 된 것으로, 原始部族長制의 잔재 유품이라고 하였다.(「衛氏朝鮮興亡考」p.82) 이와 같이 部族名이 관직명이 된 현상은 衛滿朝鮮보다 앞선 古朝鮮에서는 더욱 현저하였을 것인데, 이것은 古朝鮮의 국가구조가 朝鮮族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부족의 연맹으로 이루어졌을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며 그 유풍이 衛滿朝鮮에 남아있었다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史記』卷115 「朝鮮列傳」所引『史記集解』·『史記索隱』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三上次男, 「衛氏朝鮮國の政治·社會的性格」『中國古代史の諸問題』1954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