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土地肥美, 校勘 163163 「殿本」에는 ‘宜’ 다음에 ‘移’字가 있다.닫기種五穀及稻,178178 五穀及稻 ‘五穀及稻’라고 하는 것을 보면 벼(稻)는 이 당시에 五穀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韓國의 歷史에서 文獻으로 가장 먼저 벼농사에 관해서 나타나는 기록은 바로 이 자료라고 보겠다.
考古學의 자료에서 이 문제를 보면 물론 이 時期부터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찍이 金海貝塚에서 炭化된 쌀이 발견된 바 있어 이 地方일대가 文獻資料와 마찬가지로 考古學的으로 벼농사가 일찍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無文土器에서 쌀농사의 흔적을 많이 발견하고 있어 韓國의 歷史에서 벼농사는 그 起源이 상당히 소급해서 올라감을 알게 되었다. 水稻와 陸稻의 問題는 앞으로의 연구에서 밝혀져야 할 것이다.
<참조>
『三國志』夫餘傳 註 10)
五穀
五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종류와 명칭이 다른데, 각종 문헌에 나오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麻·黍·稷·麥·豆(『周禮』天官, 疾醫條의 注)
② 黍·稷·麻·麥·菽(『大戴禮』曾子 天圓條의 注)
③ 稻·稷·麥·豆·麻(『楚辭』大招條의 注)
④ 黍·稷·菽·麥·稻(『孟子』滕文公上의 注 및 『周禮』夏官職方氏條)
⑤ 粳米·大麥·小麥·大豆·黃黍(『素問』藏氣法時論의 注)
⑥ 稻穀·大麥·小麥·菉豆·白芥子(『成就妙法蓮華經』注 瑜伽觀音儀軌)
⑦ 大麥·小麥·稻穀·小豆·胡麻(『建立曼茶羅護摩儀軌』)
李春寧은『李朝農業技術史』에서 中國의 古代農業에서 곡식의 栽培順序는 稷(稗)→黍梁(粟)→麥類→稻作, 農産物로 통해 보는 中國 古代農業史의 時代區分은 西周以前=黍稷文化, 春秋~戰國時代=粟麥文化, 그 以後는 稻米文化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경우 稗黍類의 栽培는 新石器時代 以來로 가장 原始的 耕作法인 火田에서 시작, 三國時代 初葉까지는 粟麥類가 主 作物이었고 古代의 中國·日本·韓國은 거의 共通的으로 稗粟·大豆·小豆·大麥·小麥·稻가 主要 栽培作物이었다고 하였다.
한편, 千寬宇는 이를 통괄하여 5穀은 대체로 ‘麻·黍(粟)·稷(稗)·麥·豆’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p.36)
≪參考文獻≫
李春寧,『李朝農業技術史』1964, 韓國硏究院.
千寬宇,「三國志 韓傳의 再檢討-三韓攷 第 2 部-」『震檀學報』41, 1976.
井上秀雄,『東アジア民族史』1, 1974.
≪參考文獻≫
崔淑卿, 「韓國摘穗石刀의 硏究」『歷史學報』13, 1960.
金廷鶴, 「考古學上으로 본 韓國文化의 起源」『韓國文化人類學』2, 1969; 『韓國の考古學』1972, 河出書房新社, 東京.
金元龍, 「韓國裁稻起源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25·26·27, 1964; 「韓國半月形石刀의 發生과 展開」『史學志』6, 1972; 『韓國考古學槪說』1973, 一志社.
李春寧, 「韓國의 稻作 渡來考」『一山金斗鍾博士稀壽紀念論文集』1966; 「韓國農耕起源에 관한 小考」『民族文化硏究』7, 1973.
金貞培, 「韓國先史時代의 經濟發展段階試論」『歷史學報』50·51合輯, 1971.
鑄方貞亮, 「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耕-特に穀物を中心として-」『社會經濟史學』8卷 4號, 1938; 「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具に就いて」『社會經濟史學』8卷 10號, 1939.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江坂輝彌, 「稻作文化傳來に關する諸問題」『考古學雜誌』52卷 4號, 1967.
石毛直道, 「日本稻作る系譜(上)」『史林』51卷 5號, 1968.
岡崎敬, 「日本における初期稻作資料-朝鮮半島との關連にふれて-」『朝鮮學報』49輯, 1968.
西谷正, 「朝鮮半島における初期稻作-その硏究史的展望-」『考古學硏究』16卷 2號, 1969.
佐原眞·金關恕, 「稻修の始まり」『古代史發掘』4, 1974.
Pearson Richard, 「朝鮮半島先史時代の食料生産と經濟」『考古學ジセ-ナル』98卷 2~5號, 1974, ニユ-サイエンス社, 東京.
닫기
宋本, 無移字. 曉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禮俗, 男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
魏略校勘 164164 「汲古閣本」에는 ‘云’으로 되어 있다.닫기: 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國出鐵,179179 鐵 弁辰의 鐵이 유명해서 韓·濊·倭와 2郡에 공급하였다는 이 記事는 考古學의 처지에서도 立證이 되고 있다.
鐵器遺物은 일반적으로 土壙墓에서 주로 나타나며 그 뒤에는 新羅, 伽倻의 古墳에서 集中的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鐵鋌은 古墳에서 多量으로 出土되고 있으며 이것은 화폐의 用例와 같은 役割을 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遺物들은 日本의 古墳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文獻에 나타난 記錄들과 一致하고 있다.
≪參考文獻≫
鄭白雲·朴文國譯, 「朝鮮における鐵器使用の開始について」『朝鮮學報』17, 1960.
權丙卓, 「蔚州郡達川鐵産業의 史的硏究-鐵器使用의 始期問題-」『新羅伽倻文化』2, 1970.
金廷鶴, 『韓國の考古學』1972; 「欣岩里住居址」『서울大考古人類學叢刊』4·7, 1973·1976.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1973.
文暻鉉, 「辰韓의 鐵産과 新羅의 强盛」『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 「韓國의 鐵器文化」『韓國史硏究』16, 1977.
有光敎一, 「朝鮮の初期鐵器時代文化について-土器を中心とした考察-」『東方學』10, 1955; 「朝鮮初期舍屬文化に關する新資料の紹介と考察」『史林』48卷 2號, 1965.
고고학연구소, 『조선고고학개요』1977.
西谷正, 「朝鮮におけるいわゆる土壙墓と初期金屬文化について」『考古學硏究』13卷 2號, 1966; 「朝鮮における金屬器の起源問題」『史林』50卷 6號, 1967.
鄭漢德, 「朝鮮の金屬器文化に關する若干の考察-その時代區分を中心として-」『史學雜誌』77編 9號, 1968.
近藤喬一, 「朝鮮·日本における初期金屬器文化の系譜と展開-銅矛を中心として-」『史林』7卷 1號, 1969.
穴澤和光·馬目順一, 「南部朝鮮出土の鐵製鋲留甲胄」『朝鮮學報』76輯, 1975.
닫기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校勘 163
「殿本」에는 ‘宜’ 다음에 ‘移’字가 있다.
校勘 164
「汲古閣本」에는 ‘云’으로 되어 있다.
註 178
五穀及稻 : ‘五穀及稻’라고 하는 것을 보면 벼(稻)는 이 당시에 五穀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韓國의 歷史에서 文獻으로 가장 먼저 벼농사에 관해서 나타나는 기록은 바로 이 자료라고 보겠다.
考古學의 자료에서 이 문제를 보면 물론 이 時期부터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찍이 金海貝塚에서 炭化된 쌀이 발견된 바 있어 이 地方일대가 文獻資料와 마찬가지로 考古學的으로 벼농사가 일찍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無文土器에서 쌀농사의 흔적을 많이 발견하고 있어 韓國의 歷史에서 벼농사는 그 起源이 상당히 소급해서 올라감을 알게 되었다. 水稻와 陸稻의 問題는 앞으로의 연구에서 밝혀져야 할 것이다.
<참조>
『三國志』夫餘傳 註 10)
五穀
五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종류와 명칭이 다른데, 각종 문헌에 나오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麻·黍·稷·麥·豆(『周禮』天官, 疾醫條의 注)
② 黍·稷·麻·麥·菽(『大戴禮』曾子 天圓條의 注)
③ 稻·稷·麥·豆·麻(『楚辭』大招條의 注)
④ 黍·稷·菽·麥·稻(『孟子』滕文公上의 注 및 『周禮』夏官職方氏條)
⑤ 粳米·大麥·小麥·大豆·黃黍(『素問』藏氣法時論의 注)
⑥ 稻穀·大麥·小麥·菉豆·白芥子(『成就妙法蓮華經』注 瑜伽觀音儀軌)
⑦ 大麥·小麥·稻穀·小豆·胡麻(『建立曼茶羅護摩儀軌』)
李春寧은『李朝農業技術史』에서 中國의 古代農業에서 곡식의 栽培順序는 稷(稗)→黍梁(粟)→麥類→稻作, 農産物로 통해 보는 中國 古代農業史의 時代區分은 西周以前=黍稷文化, 春秋~戰國時代=粟麥文化, 그 以後는 稻米文化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경우 稗黍類의 栽培는 新石器時代 以來로 가장 原始的 耕作法인 火田에서 시작, 三國時代 初葉까지는 粟麥類가 主 作物이었고 古代의 中國·日本·韓國은 거의 共通的으로 稗粟·大豆·小豆·大麥·小麥·稻가 主要 栽培作物이었다고 하였다.
한편, 千寬宇는 이를 통괄하여 5穀은 대체로 ‘麻·黍(粟)·稷(稗)·麥·豆’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p.36)
≪參考文獻≫
李春寧,『李朝農業技術史』1964, 韓國硏究院.
千寬宇,「三國志 韓傳의 再檢討-三韓攷 第 2 部-」『震檀學報』41, 1976.
井上秀雄,『東アジア民族史』1, 1974.
≪參考文獻≫
崔淑卿, 「韓國摘穗石刀의 硏究」『歷史學報』13, 1960.
金廷鶴, 「考古學上으로 본 韓國文化의 起源」『韓國文化人類學』2, 1969; 『韓國の考古學』1972, 河出書房新社, 東京.
金元龍, 「韓國裁稻起源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25·26·27, 1964; 「韓國半月形石刀의 發生과 展開」『史學志』6, 1972; 『韓國考古學槪說』1973, 一志社.
李春寧, 「韓國의 稻作 渡來考」『一山金斗鍾博士稀壽紀念論文集』1966; 「韓國農耕起源에 관한 小考」『民族文化硏究』7, 1973.
金貞培, 「韓國先史時代의 經濟發展段階試論」『歷史學報』50·51合輯, 1971.
鑄方貞亮, 「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耕-特に穀物を中心として-」『社會經濟史學』8卷 4號, 1938; 「古代に於ける南朝鮮の農具に就いて」『社會經濟史學』8卷 10號, 1939.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江坂輝彌, 「稻作文化傳來に關する諸問題」『考古學雜誌』52卷 4號, 1967.
石毛直道, 「日本稻作る系譜(上)」『史林』51卷 5號, 1968.
岡崎敬, 「日本における初期稻作資料-朝鮮半島との關連にふれて-」『朝鮮學報』49輯, 1968.
西谷正, 「朝鮮半島における初期稻作-その硏究史的展望-」『考古學硏究』16卷 2號, 1969.
佐原眞·金關恕, 「稻修の始まり」『古代史發掘』4, 1974.
Pearson Richard, 「朝鮮半島先史時代の食料生産と經濟」『考古學ジセ-ナル』98卷 2~5號, 1974, ニユ-サイエンス社, 東京.
註 179
鐵 : 弁辰의 鐵이 유명해서 韓·濊·倭와 2郡에 공급하였다는 이 記事는 考古學의 처지에서도 立證이 되고 있다.
鐵器遺物은 일반적으로 土壙墓에서 주로 나타나며 그 뒤에는 新羅, 伽倻의 古墳에서 集中的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鐵鋌은 古墳에서 多量으로 出土되고 있으며 이것은 화폐의 用例와 같은 役割을 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遺物들은 日本의 古墳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文獻에 나타난 記錄들과 一致하고 있다.
≪參考文獻≫
鄭白雲·朴文國譯, 「朝鮮における鐵器使用の開始について」『朝鮮學報』17, 1960.
權丙卓, 「蔚州郡達川鐵産業의 史的硏究-鐵器使用의 始期問題-」『新羅伽倻文化』2, 1970.
金廷鶴, 『韓國の考古學』1972; 「欣岩里住居址」『서울大考古人類學叢刊』4·7, 1973·1976.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1973.
文暻鉉, 「辰韓의 鐵産과 新羅의 强盛」『大丘史學』7·8合輯, 1973.
金貞培, 「韓國의 鐵器文化」『韓國史硏究』16, 1977.
有光敎一, 「朝鮮の初期鐵器時代文化について-土器を中心とした考察-」『東方學』10, 1955; 「朝鮮初期舍屬文化に關する新資料の紹介と考察」『史林』48卷 2號, 1965.
고고학연구소, 『조선고고학개요』1977.
西谷正, 「朝鮮におけるいわゆる土壙墓と初期金屬文化について」『考古學硏究』13卷 2號, 1966; 「朝鮮における金屬器の起源問題」『史林』50卷 6號, 1967.
鄭漢德, 「朝鮮の金屬器文化に關する若干の考察-その時代區分を中心として-」『史學雜誌』77編 9號, 1968.
近藤喬一, 「朝鮮·日本における初期金屬器文化の系譜と展開-銅矛を中心として-」『史林』7卷 1號, 1969.
穴澤和光·馬目順一, 「南部朝鮮出土の鐵製鋲留甲胄」『朝鮮學報』76輯,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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