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樂工을 하사하였으며,075075 漢時賜鼓吹技人 여기에서 鼓吹技人을 받은 대상은 고구려왕이다. 漢帝國이 주변 諸集團의 首長에게 鼓吹와 旗 등을 賜與하는 것은 封爵하여 印綬를 주는 것과 함께 漢의 세력권에 歸服한데 대한 댓가로 그 首長에게 한제국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널리 행해졌다. A.D. 136년에 夫餘王이 직접 來朝하였을 때도 그에게 黃門鼓吹 등을 주어 귀국케 하였다. 또한 한국의 古代 諸種族들 간에는 崔理의 樂浪國의 自鳴鼓說話나 東明王과 松讓王이 鼓角을 가지고 각기 自國의 위엄을 다투었다는 東明王說話 등에서 보듯이 북(鼓)은 단순한 樂器가 아니라 呪術的인 위력을 지닌 祭器로서 국가와 王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만큼 鼓吹는 곧 王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漢은 고구려왕에게 鼓吹技人을 주어 고구려의 대표로서의 위치를 인정하였지만, 일면으로는 고구려 내의 여러 집단들과 각각 交易關係를 맺어 朝服과 依幘을 주면서 이들 집단들과 개별적인 교섭을 하여 회유하였다. 그에 따라 그들 집단에서 보내진 이들이 玄菟郡에 나아가 교섭을 하니, 玄菟郡의 관리인 高句麗令이 그에 관계된 사항을 관장하였다. 『三國志』韓傳에서 전하듯 漢郡縣에 나가 朝服과 印綬를 받은 韓人이 千餘人이나 되었다는 것도 당시 中國郡縣의 그러한 정책의 소산이다. 그 결과 비록 B.C. 75년 이후 고구려가 漢郡縣의 직접적인 지배하에서는 벗어났으나 고구려 내의 諸集團들은 제각기 漢과 연결되는 면을 지녀 일종의 遠心分離現象을 낳았다. 이로 말미암아 王室을 中心으로 한 중앙집권력의 성장에 제약을 가하게 되어 고구려국은 漢의 영향권하에 예속된 상태를 당분간 지속케 되었던 것이다. 1C 초 王莽이 胡를 치는데 고구려병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고구려에 작용하고 있던 그러한 중국의 영향력을 말해주며, A.D. 47년 蠶支落 大加 戴升의 一萬口가 後漢으로 이탈한 것도 그러한 면이 있다.
닫기
항상 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朝服과 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玄菟]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城을 쌓고서 朝服과 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溝漊076076 幘溝漊 幘溝漊를 세움은 곧 高句麗族의 諸集團에 대한 고구려 중앙정부의 統制力이 확립되어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적으로 漢郡縣에 나가 朝服과 衣幘을 받고 交易하여 漢과 직·간접의 관계를 맺고 있던 諸那集團들의 對外交涉窓口를 이제 中央政府가 一元化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족 내부에 작용하고 있던 漢의 영향력을 배제한 것을 말한다. 그뒤 고구려가 교만해져 다시는 郡에 오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하는 것이다. 幘溝漊의 구축 시기는 太祖王代로 여겨진다.
≪參考文獻≫
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1975.
닫기
라 부른다. 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城을 부르는 말이다.

註 075
漢時賜鼓吹技人 : 여기에서 鼓吹技人을 받은 대상은 고구려왕이다. 漢帝國이 주변 諸集團의 首長에게 鼓吹와 旗 등을 賜與하는 것은 封爵하여 印綬를 주는 것과 함께 漢의 세력권에 歸服한데 대한 댓가로 그 首長에게 한제국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널리 행해졌다. A.D. 136년에 夫餘王이 직접 來朝하였을 때도 그에게 黃門鼓吹 등을 주어 귀국케 하였다. 또한 한국의 古代 諸種族들 간에는 崔理의 樂浪國의 自鳴鼓說話나 東明王과 松讓王이 鼓角을 가지고 각기 自國의 위엄을 다투었다는 東明王說話 등에서 보듯이 북(鼓)은 단순한 樂器가 아니라 呪術的인 위력을 지닌 祭器로서 국가와 王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만큼 鼓吹는 곧 王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漢은 고구려왕에게 鼓吹技人을 주어 고구려의 대표로서의 위치를 인정하였지만, 일면으로는 고구려 내의 여러 집단들과 각각 交易關係를 맺어 朝服과 依幘을 주면서 이들 집단들과 개별적인 교섭을 하여 회유하였다. 그에 따라 그들 집단에서 보내진 이들이 玄菟郡에 나아가 교섭을 하니, 玄菟郡의 관리인 高句麗令이 그에 관계된 사항을 관장하였다. 『三國志』韓傳에서 전하듯 漢郡縣에 나가 朝服과 印綬를 받은 韓人이 千餘人이나 되었다는 것도 당시 中國郡縣의 그러한 정책의 소산이다. 그 결과 비록 B.C. 75년 이후 고구려가 漢郡縣의 직접적인 지배하에서는 벗어났으나 고구려 내의 諸集團들은 제각기 漢과 연결되는 면을 지녀 일종의 遠心分離現象을 낳았다. 이로 말미암아 王室을 中心으로 한 중앙집권력의 성장에 제약을 가하게 되어 고구려국은 漢의 영향권하에 예속된 상태를 당분간 지속케 되었던 것이다. 1C 초 王莽이 胡를 치는데 고구려병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고구려에 작용하고 있던 그러한 중국의 영향력을 말해주며, A.D. 47년 蠶支落 大加 戴升의 一萬口가 後漢으로 이탈한 것도 그러한 면이 있다.
註 076
幘溝漊 : 幘溝漊를 세움은 곧 高句麗族의 諸集團에 대한 고구려 중앙정부의 統制力이 확립되어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적으로 漢郡縣에 나가 朝服과 衣幘을 받고 交易하여 漢과 직·간접의 관계를 맺고 있던 諸那集團들의 對外交涉窓口를 이제 中央政府가 一元化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족 내부에 작용하고 있던 漢의 영향력을 배제한 것을 말한다. 그뒤 고구려가 교만해져 다시는 郡에 오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하는 것이다. 幘溝漊의 구축 시기는 太祖王代로 여겨진다.
≪參考文獻≫
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1975.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