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渤海039039 渤海傳 『新唐書』渤海傳은 卷219의 「北狄列傳」에 契丹·奚·室韋·黑水靺鞨과 함께 실려 있다. 그 구성에서 渤海의 出自·建國過程·位置 및 唐과의 交涉記事로 이루어진 것은 『舊唐書』渤海靺鞨傳과 동일하지만, 『舊唐書』에 없는 渤海內部에서 행해진 歷代王國의 諡號와 年號·行政區劃·官制·地方의 名産 등이 附記되어 있다.
이에 그 記事의 정확성은 『舊唐書』보다 떨어지지만『舊唐書』에 보이지 않는 渤海國內의 事情에 관한 記事가 많기 때문에 그 史料的 價値는 『舊唐書』보다 높게 평가되고 있으며, 渤海史 硏究의 基本 史料로 이용되고 있다.
≪參考文獻≫
李龍範, 『古代의 滿洲關係』1976, 한국일보사.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洋學報』 36卷 4號, 1954(『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東洋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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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는 본래 粟末靺鞨040040 粟末靺鞨 北魏時代에 ‘勿吉’의 이름으로 孝文帝 延興 年間(471~477)에 使者 乙力支를 北魏에 보내어 高句麗의 膨脹主義를 呼訴하고 援兵을 요청하였던 이 部族은 隋·唐代에 ‘靺鞨’로 칭해지게 되었으며, 『隋書』靺鞨傳에 따르면 粟末部·伯咄部·安居骨部·拂涅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의 7部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松花江 上流인 伯都訥에서부터 松花江 下流를 거쳐 黑龍江 下流까지 그리고 東南은 長白山 一帶까지 散居하던 古代 滿洲族 集團을 總稱한 것이며, 7部가 統一된 政體를 이룩하였던 것은 아니다.
粟末靺鞨은 粟末水(『魏書』勿吉傳·『北史』勿吉傳에는 ‘速末水’로 『新唐書』「地理志」에는 ‘涑沫’로 되어 있다) 즉, 지금의 北流 松花江 流域에 居住하였기에 칭하게 된 部族名이다.
『隋書』 靺鞨傳에는 粟末靺鞨에 대하여 ‘ …… 與高麗相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中’이라고 하여 高句麗와 近接한 地域의 靺鞨로 되어 있다.
그 中心部에 대하여는 長順主撰의 『吉林通志』「沿革志」에서 北流 松花江岸인 吉林·烏喇로 推定한 바 있다. 『吉林通志』의 이 比定은 日本의 松井等(「渤海國の疆域」pp.427~431), 池內宏(「鐵利考」pp.21~24), 津田左右吉(「勿吉考」pp.18~24) 日野開三郞(「靺鞨七部考」)등에 의해서 추종된 바 있다. 그러나 高句麗 特有의 山城이 遼東半島에서 吉林 北의 龍潭山까지 列置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和田淸은 吉林·烏喇 一帶는 高句麗의 版圖인 것으로 斷定하고 粟末部는 그보다 北인 粟末水 下流인 것으로 推斷한 바 있다(「渤海國地理考」pp.89~90).
粟末靺鞨은 隋의 開皇 年間에 그 酋長 突地稽가 高句麗와의 戰爭에서 패하여 그 8部의 勝兵 千餘人을 이끌고 扶餘地 西北으로 빠져나와 隋에 保護를 요청하였던 바 있었다.
당시 隋는 이미 煬帝가 卽位하고 있어 그를 金紫光祿大夫 遼西太守로 册封하여 營州(現 朝陽)에 있도록 하였다. 그는 隋 煬帝의 高句麗 遠征에 언제나 從軍하여 큰 功을 세워 煬帝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唐 高祖 武德 初에 使臣을 보내서 朝貢을 바치자, 高祖는 그 部落을 燕州(現 義縣 附近)에 두게 하고 그를 總管으로 任命하였다. 劉黑闥의 叛에는 그 部下를 이끌고 定州에서 싸워서 功을 세워 太宗으로부터 蓍國公의 封을 받고 또 그 部落을 北京인 幽州의 昌平城에 옮겨 살도록 하였다.
때마침 高開道가 突厥을 이끌고 幽州에 來攻하자 突地稽는 다시 그 무리를 이끌고 이와 싸워서 크게 무찔러 貞觀 初에는 右衛將軍을 拜하고 國姓인 李氏를 받게 되었다.
그의 아들 李謹行은 武力絶人하여 麟德 年間(664~665)에는 營州都督을 拜하였으며, 그 部落 家僮 數千人은 財力으로 변경을 휘잡아 다른 夷人들의 질시를 받았다 한다. 그 후 자주 戰功을 세워 官이 鎭軍大將軍·行右衛大將軍을 거듭하고 燕國公에 册封되었다. 永淳 元年(682)에 사망하였다(金毓黻, 『渤海國志長編』族姓考)
<참조>
『舊唐書』 渤海靺鞨傳 註 3)
靺鞨
古代에서 中世에 걸쳐 滿洲 東半部와 黑龍江 下流의 시베리아 地方에 살던 部族의 이름이다.
이 部族이 中國正史에 처음 보이는 것은 『魏書』勿吉傳에 ‘勿吉’이라는 이름으로 ‘高句麗’의 北에 있으며 옛 肅愼國’에 속하는 部族으로 적혀 있다.
특히 北魏 孝文帝의 延興 年間(471~477)에는 勿吉이 使者 乙力支를 北魏에 파견하게 되어 北魏에서 지금의 吉林 附近까지의 路順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勿吉은 『北史』勿吉傳에 ‘一曰靺鞨’이라고 적혀 있는 바와 같이 隋·唐時代에는 靺鞨로 表記되었다.
『隋書』靺鞨傳에 따르면 靺鞨은 ‘粟末部·伯咄部·安車骨部·拂涅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의 7部로 나뉘어져 松花江 上流인 伯都訥에서부터 松花江 下流 및 黑龍江 下流까지, 東南은 長白山一帶의 넓은 地域에 걸쳐 散居하면서도 統一을 이룩하지 못한 低文化族을 總稱한 것이다.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白山部와 粟末部가 高句麗에 倂合되어 粟末靺鞨의 酋長 突地稽는 그의 部衆을 이끌고 遼西로 逃走하여 隋의 保護를 받았으며, 黑水部를 제외한 나머지 靺鞨도 部로서의 존립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參考文獻≫
李龍範, 『古代의 滿洲關係』1976.
長 順, 『吉林通志』卷10「沿革志」上 吉林屬城及府廳州縣沿革全表.
松井等, 「渤海國 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參考文獻≫
『隋書』卷81 「東夷列傳」靺鞨條.
長 順, 『吉林通志』卷10 「沿革志」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6 「族姓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池內宏,「鐵利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3, 1916(『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日野開三郞, 「靺鞨七部考」『史淵』36·37合輯.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洋學報』 36卷 4號, 1954(『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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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高[句]麗에 附屬되어 있었으며, 姓은 大氏041041 大氏 渤海王國의 國姓인 大氏는 高句麗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姓이다. 일찍이 池內宏은 이를 乞乞仲象이 營州에서 東走하여 震國을 建國한 후 中國式 姓名으로 改名한 것이 大祚榮이었다고 推斷함으로서 ‘大’氏는 震國 以後부터 보이게 된 新姓같은 해석을 내린 바 있다(「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pp.1~13).
池內宏의 이 推斷에 대하여 學界一部에서 同調者도 있었으나(津田左右吉, 「渤海考」p.110), 곧 鳥山喜一의 反論에 부딪혀 定說이 되지 못하고 있다(『渤海史考』p.33).
그 후 이 문제는 稻葉岩吉에 의해 乞乞仲象의 ‘乞乞’은 그 音이 ‘女直’을 漢字로 表示한 것이며 그 姓 ‘大’는 梵語에서 ‘大’라는 뜻의 Makha와 관련되니, 그 出身이 ‘靺鞨’ 즉, Maha이기 때문에 그 姓을 中國式으로 ‘大’氏로 한 女眞의 巨酋가 ‘大祚榮’이었다는 奇論까지 나오고 있다)(「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續みて」)
한편 高麗 初에 來投한 大光顯 등 많은 渤海國 王族은 그 후 우리나라에서 永鹿太氏로서 번성을 누리고 있다.
<참조>
1.『舊唐書』渤海靺鞨傳 註 4)
大祚榮
『舊唐書』渤海靺鞨傳에서는 渤海王國의 建國者를 大祚榮으로 明記하고 있으나, 『新唐書』渤海傳에는 唐에 처음 叛旗를 들어 東走하여 渤海王國의 기틀을 잡았던 것을 大祚榮의 父인 乞乞仲象으로 기록하고 있다. 學界에서는 渤海王國의 建國者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적지않은 論爭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問題에 대하여 처음 池內宏은 乞乞仲像과 大祚榮은 同一人으로서 乞乞仲象은 建國前 營州住在時의 本名이며, 大祚榮은 建國後 中國式으로 改名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pp.1~13). 渤海國의 建國者에 대한 池內宏의 論旨는 『新唐書』·『舊唐書』 兩書의 서로 어긋나는 記事를 折衷·調和시키려는 데 있었으며, 津田左右吉도 이에 同調하였으나(「渤海考」p.110), 이 推斷은 곧 鳥山喜一에 의해 ‘too logical’이라는 理由로 否定되었다(『渤海史考』p.33). 이 問題는 그 후 1933年 10月에 있었던 白鳥庫吉의 學術講演에서 거론되어 乞乞仲象과 大祚榮의, 同一人說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乞乞仲像은 靺鞨人이었다는 說이 主張되었다(「渤海國に就いて」pp.92~98).
≪參考文獻≫
池內宏, 「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東洋學報』5卷 1號, 1914(『滿洲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東京奉公會.
白鳥庫吉, 「渤海國に就いて」『史學雜誌』 44編 12號, 1933
2.『舊唐書』渤海靺鞨傳 註 5)
高麗別種
渤海王國의 主體에 대하여 『舊唐書』에는 ‘高[句]麗別種’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渤海傳에는 ‘…本粟末靺鞨附高[句]麗者…’라 하여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高句麗領土로 倂合된 松花江 流域의 粟末靺鞨로 되어 있어 渤海史硏究에서도 가장 異說이 많은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問題에 대하여 津田左右吉은 大祚榮이 建國에 있어서 東牟山(太白山 東北인 敦化縣으로 推斷)을 根據로 하였다는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따라 渤海王室의 出自를 靺鞨 7部 中 長白山 附近에 居住하던 白山部出身으로 推斷한 바 있다(「渤海考」p.118).
津田左右吉에 이어 鳥山喜一은 『新·舊唐書』에 보이는 엇갈리는 記事를 절충하여 渤海王國의 開國者인 大祚榮은 高句麗別部出身이나, 그 王國을 形成한 主體는 靺鞨族이라는 主張을 내놓았다(『渤海史考』pp.33~34).
한편 池內宏은 治者階級은 소위 ‘渤海靺鞨’이며 이 王國은 기타의 靺鞨部도 참여한 靺鞨族國家인 것으로 推斷하였다(「鐵利考」p.84).
이와 같이 『新·舊唐書』의 記事만 가지고 渤海王國의 主體가 어느 族에 속하는지 穿鑿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臆斷의 境地를 벗어날 수 없었으나, 이 問題에 관하여 획기적인 見解를 發表한 것은 白鳥庫吉이다. 즉, 그는 1933年 渤海國 上京發掘物展覽會에 즈음한 學術講演에서 ① 『續日本紀』神龜 5年條에 渤海王國 大武藝가 日本에 보낸 國書에서 ‘復高[句]麗之舊居 有扶餘之遺谷’이라 하여 高句麗의 光復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天平寶宇 3年條에도 그 自身을 ‘高麗國王大欽茂 …… ’라 自稱하고 또 日本에서의 返書에도 ‘敬問高麗王 …… ’이라고 渤海王을 高句麗王으로 칭하였다는 점 ② 日本側記錄에 보이는 日本에 派遣된 渤海使臣 85名 中 12名이 옛 高句麗王姓인 高氏이고 기타의 副使를 합쳐 거의가 漢族名이며 滿洲名은 靺鞨隨行員 6名 뿐이었던 점 ③ 唐에서도 이 王國을 表面上으로는 渤海라고 稱하지만 一般人은 역시 高[句]麗라고 칭하였던 점 등을 들어 開國者 大祚榮은 『舊唐書』의 記事대로 高句麗人이며, 王과 上流階級을 形成한 中樞勢力은 高句麗遺民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으나, 被支配層은 靺鞨이었을 것이며, 渤海王國의 正體는 高句麗遺民이 靺鞨族을 利用하여 國家光復에 成功한 것이라고 하였다. 白鳥庫吉이 異論이 많았던 渤海의 五京制度까지도 高句麗 本來의 制度를 따랐으며 다만 上京을 北에 두었던 것은 中國의 影響이라고 부언한 것도 渤海가 高句麗王朝의 延長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려는 試圖에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渤海國に就いて」pp.92~98).
그러나 韓國史의 獨自的인 展開를 否定하는 植民地史觀의 體系化를 그 學的 生活의 信條로 삼고 있던 稻葉岩吉의 奇論이 잇달아 發表되었다. 즉, 그는 靺鞨을 種族名으로 보지 않고 梵語에서의 ‘大’의 뜻인 Maha로 우겨 ‘大人’의 뜻으로 새겨,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姓大氏’의 大氏를 그 譯字로 보았다. 따라서 種人의 名稱으로서는 肅愼에서 곧 女眞(直)으로 되는 것이며, 女眞의 名稱은 契丹 以後의 것이 아니고 渤海의 始祖 乞乞仲象의 乞乞이 즉 女直(『遼史』의 表記)의 初音이라는 것이다. 즉. 仲象·祚榮은 女眞人의 巨酋이며 그 巨酋가 中心이 되어 渤海王國을 建設하였던 것이다. 이 王國은 女眞人만의 힘이 아니고 高句麗遺民의 合力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舍利乞乞仲象’의 舍利가 女眞語의 ‘泉’의 뜻이며 高句麗大姓 泉氏(泉蓋蘇文의 家門)과 關係가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渤海王國의 主權者 및 支配階級은 松花·黑龍 兩江의 女眞人이었던 것 같으나, 그 文化는 거의 高句麗人에게 장악되고 있었다는 要旨이다.(「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讀みて」pp.108~113). 古代 滿洲族에 대한 號稱의 系列조차 無視하고 난데없이 梵語까지 이에 結付시킨 이 奇論은 渤海史와 高句麗史와의 關係를 認定하지 않으려는 底意에서 나온 것이 너무도 分明하기에 學界에서는 처음부터 疎外되고 있다.
渤海王室과 그 中樞勢力을 高句麗로 보지 않으려는 日本學界의 경향은 第2次世界大戰後에도 이어져 和田淸은 『舊唐書』渤海靺鞨傳에서 大祚榮의 出自를 ‘高麗別種’이라는 ‘別’字가 붙는 것으로 보아 高句麗의 同族이 아니고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粟末靺鞨’을 ‘高麗別種’으로 表現한 것이라고 推斷하였다(「渤海國地理考」p.59).
한편 韓國學界에서는 李承休의 『帝王韻記』를 비롯하여 柳得恭의 『渤海考』 등에서 大祚榮의 出身이 ‘本高麗別種也’라는 이 記事에만 依據하여, 渤海史를 韓國史의 體系에 넣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 내려 왔으나, 日本學界의 이와 같은 異說에 자극받아 大祚榮과 渤海王國의 主體勢力을 이루었던 種族의 究明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또 朴時亨은 『三國史記』「新羅本紀」元聖王 6年 3月條의 ‘以一吉凔伯魚 使北國’ 또는 憲德王 4年 秋9月條에 보이는 ‘遣級滄崇正 使北國’이라는 ‘北國’은 渤海國을 가리킨 것이며, 新羅에서 韓國史를 新羅를 南國으로 한 南北朝史로 보아 同族意識에서의 一時的인 領主임을 認識하고서의 號稱이었다는 等의 推斷過程을 거쳐 渤海王室이 高句麗係임을 力說하고 있다(「渤海史硏究のために」pp.169~211).
그리고 朱榮憲은 渤海王國의 古墳·都市와 建築·瓦當 등 遺物을 高句麗의 그것과 比較하여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高句麗의 繼承者로서의 渤海國文化를 說明하려고 試圖한 바 있다(『渤海文化』pp.138~167).
한편 李龍範은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大祚榮의 出自를 否定하고 ‘ ……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 ’라고 한 것이라던가, 最初의 建國地인 『舊唐書』의 ‘桂婁之故地’를 ‘挹婁之故地’로 바꾸고 있는 『新唐書』渤海傳의 記事는 당시의 東北亞細亞史의 硏究로서는 無理가 많다는 점,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階層 및 文化의 內容 등을 들어 渤海王國의 主體는 高句麗遺民이었음을 主張하였다(「渤海王國의 形成과 高句麗遺族」).
이 問題에 관한 硏究의 視角을 中國과 蘇聯으로 돌려보면 먼저 中國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意味에서 問題가 많은 『滿洲源流考』「部族」渤海條를 비롯하여 長順의 『吉林通志』·王世遵의 『寧安縣志』에서의 古典的 硏究와, 1919年에 唐晏이 엮은 『渤海國志』나 1931年에 黃維翰이 엮은 『渤海國記』 등에는 大祚榮의 出自가 깊이 究明된 자취가 없다.
이 問題의 해명에 本格的으로 努力을 기울인 것은 1934年에 金毓黻이 엮은 『渤海國志長編』부터이다.
즉, 金毓黻은 『渤海國志長編』의 여러 項目에서 渤海王國이 靺鞨族의 國家인 것을 堅持하다가 叢考의 一項에서만은 日本側史料에 依據하여 渤海王國이 高句麗의 後繼者인 것을 認定한 바 있다.
中國政權이 수립된 후 渤海王國의 上京龍泉府를 비롯하여 豆滿江 流域의 渤海遺跡發掘 및 貞惠公主墓·貞孝公主墓의 調査에서 많은 成果를 올렸으나, 中國學界가 보여준 이와 같은 硏究熱의 거의 대부분이 ‘渤海史是我們偉大祖國 以漢族主體的多民族史州中的 重要篇章’이라는 즉, 中國史속의 少數民族史의 一分野로 하려는 데 있었기에 渤海文化 中에 高句麗的 要素를 충분히 認定하면서도 그 主體를 高句麗 遺民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있다(王承禮, 「敦化六頂化渤海墓淸理發掘記」p.200).
王承禮는 唐代의 渤海王國을 『新唐書』渤海傳의 서술대로 ‘是粟末靺鞨’이라 斷定하고서 遺蹟을 發掘하였던 것이며, 그는 다시 1982年의 發掘報告書에서는 ‘總之渤海文化可以說就是唐文化 渤海文學就是唐代各民族學的組成部分 …… ’이라고까지 極言하여(「唐代渤海貞惠公主墓誌和貞孝公主墓的比較硏究」p.185), 渤海王國에 미친 高句麗의 文化要素까지도 말살하려는 傾向조차 보이고 있다.
中國學者의 이와 같은 경향은 陳顯昌에게도 보이고 있다(「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pp.85~89; 「渤海貞惠公主墓碑的硏究」pp.69~70).
한편 1860년의 露·淸北京條約으로 渤海王國의 定理府·率賓府를 포함한 지금의 沿海州를 차지하게 된 帝政 러시아의 渤海史硏究의 傳統을 이어받은 蘇聯에서의 渤海建國者에 관한 見解는 또 日本이나 中國과는 다른 것이 있다.
즉, 1852年에 發表된 V. Gorskii의 『滿洲家屬의 始期』 以後 P. Katalov·M.G. Shevelev·F.F. Busse·D.M. Pozdnev 등의 渤海史硏究를 이어받은 소련 學界의 경향은 最近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A.P. Okladnikov에게서 그 一面을 엿볼 수 있다. 소련의 極東考古學調査隊를 이끌고 沿海州 一帶의 調査發掘成果를 바탕으로 내린 渤海王國의 主體種族에 대한 Okladnikov의 結論은 渤海王國의 文化가 高句麗·新羅와 가장 共通性이 많은 것은 認定되나, 그 王國의 主體種族만은 高句麗가 아니고 『新唐書』渤海傳의 記事대로 粟末靺鞨이었다고 主張하고 있다(「The Mo-Ho Tribes and the P'o-Hai State」pp.170~200; 『Советского Папьнего Бостока』pp.194~205).
渤海王國의 主體種族에 관한 소련학자들의 이와 같은 主張은 渤海王國의 率賓府, 定理府 등 沿海州를 領土로 占有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渤海史의 一部가 그들의 地方史 또는 少數民族史의 一部라고 하는 政策的인 意圖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그들의 정치적인 의도에서는 渤海國史를 高句麗史와 連結지어 韓國史의 體系에 넣어 說明하는 것보다 이미 歷史에서 그 자취가 없어진 靺鞨族과 連結짓는 것이 有利한 까닭이다.
≪參考文獻≫
『新唐書』卷219「北狄列傳」 渤海條.
『滿洲源流考』卷6「部族」 渤海條.
『續日本記』卷10 神龜 5年條.
박시형, 「발해사연구를 위하여」『력사과학』 1962년 1호.
李龍範, 「渤海王國의 形成과 高句麗遺族」(上·下)『東國大學校論文集』10·11, 1972·1973.
주영헌, 『발해문화』1971, 사회과학출판사(日譯, 1979, 雄山閣).
唐 晏, 『渤海國志』1919 (『宋遼金元四史資料叢刊』(一) 1977, 文海出版社).
黃維翰, 『渤海國記』1931, 遼海書社.
金毓黻, 『渤海國志長編』1934, 華文書局.
閻萬章, 「渤海貞惠公主墓碑的硏究」『考古學報』1956年 第2期.
王承禮,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社會科學戰線』1979年 第3期; 「唐代渤海 貞惠公主墓誌和貞孝公主墓的比較硏究」『社會科學戰線』1982年 第1號.
陣顯昌, 「唐代渤解上京龍泉府遺址」『文物』1980年 第9期.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池內宏, 「鐵利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3, 1916(『滿鮮史硏究』 中世篇 第1册 1933).
白鳥庫吉, 「渤海國に就いて」『史學雜誌』44編 12號, 1933.
稻葉岩吉, 「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讀みて」『靑丘學叢』23號, 1936.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V. Gorskii, 『滿洲家屬의 始期』1852.
A.P. Okladnikov, 「The Mo-Ho Tribes and the P'o-Hai State」『The Soviet Far East in Antiquity』1965, University of Toronto, Canada; 『Советского Папьнего Бостока』1973, Москва 加藤九祚·加藤晋平 譯, 『シべリアの古代文化』1974, 講談社.
≪參考文獻≫
池內宏,「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東洋學報』5卷 1號, 1914(『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津田左右吉,「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 1915.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原書房.
稻葉岩吉, 「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讀みて」『靑丘學叢』 23號,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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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高[句]麗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挹婁042042 挹婁 後漢時代로부터 알려진 滿洲에서 沿海州 附近에 걸쳐 居住하던 種族名이다.
이 種族의 住地와 生活·習俗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한 『三國志』挹婁傳에는 그 住地에 대하여 ‘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이라 하고 있다.
『三國志』보다 100여년 후에야 엮어진 『後漢書』挹婁傳은 그 種族을 肅愼國의 後裔인 것으로 看做하고,『三國志』의 ‘濱大海’를 ‘東濱大海’로 하여 ‘東’字를 加하였을 뿐 대체로 『三國志』挹婁傳의 記事를 옮긴 데 지나지 않는다.
『三國志』挹婁傳에 長春·農安 附近인 ‘東北千餘里’라 하고 大海에 濱하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어, 이 種族의 中心勢力은 지금은 烏蘇里 流域에서 沿海州 一帶의 住民이며, 『後漢書』以後의 中國史書들이 斷定하고 있는 肅愼族에 비하면 그 一部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古代의 肅愼族과 挹婁의 그 內包外延이 일치되지 않은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挹婁가 그 以前에 中國에 알려져 있던 肅愼族의 槪念에 포함되어 있었던 一部 地域의 住民을 가리키고 있다는 點까지는 의심할 수 없다.
挹婁에는 王이 없고 다만 部落에 各 酋長이 있을 뿐이며 그 酋長은 夫餘에 稅賦를 바쳤다 한다. ‘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이었다는 記事를 보면 이 種族은 東北亞細亞族으로서 滿洲의 古代語와 다른 特殊한 言語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한편 이 地域의 土着民들을 古代 漢民族이 ‘挹婁’ 즉, ‘I-Iou’로 부르게 된 것은 보통 沿海州의 퉁구스族을 漢民族이 ‘오룬춘(鄂倫春, Oron-Chun)’이라 하고, 黑龍江 中流의 고르디(Goldi)族을 ‘오로치(Orochi)’로 부르는 데에서 그 語源을 찾는 學者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참조>
1.『三國志』挹婁傳 註 2)
挹婁
挹婁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滿洲源流考』에는 만주어에서 岩穴의 穴을 뜻하는 葉嚕·伊魯와 音이 비슷함을 들어 그 語源을 설명한 ‘又有站名㦤路 亦作伊魯 當即遼金挹婁縣之遺 今滿洲語 謂巖穴之穴爲葉嚕與伊魯 音相近 可知當時命名之義'란 기록이 있다.
또한 퉁구스語의 一方言에 馴鹿를 뜻하는 Oro, Iru의 對音으로 보는 說도 있으나, 이에 대해선 挹婁人이 순록을 기른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挹婁族의 거주지는 부여의 동쪽, 北沃沮의 북쪽으로서 대략 우수리강 유역과 沿海州, 송화강 및 흑룡강 하류 일대의 지역으로 여겨진다.
『三國志』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거할 때, 挹婁族은 비록 體形은 당시 인근에 있던 夫餘·高句麗·沃沮·東濊 등의 濊貊族과 비슷하지만, 그 言語·住居·衣服·習俗 및 활과 같은 도구 등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반면에 후대의 勿吉·靺鞨 등의 존재 양태와 동일한 면모를 많이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의 계승관계에 있는 족속임을 알 수 있다. 이 挹婁의 종족적인 계통을 古아시아族으로 규정한 說이 있다. (三上次男, 「挹婁人の民族的性格とその社會」pp.311~330) 이는 읍루족의 習俗이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脂肪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石鏃과 毒矢를 사용하는 점 등이 Aleuts, Chuckchee, Korvak, Giliyak 등의 이른바 古아시아族으로 분류되는 족속들의 풍속과 相似한 반면에, 濊貊族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을 주된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東北아시아의 住民을 퉁구스族인, 또는 퉁구스族에 蒙古種이 일부 混血된 족속인 濊貊族과 古아시아族으로 크게 양분하였다. 이 說은 言語學的인 면에서 가령 Primore와 Amur지역 주민의 언어가 처음에는 古아시아語였다가 뒤에는 퉁구스-만주어를 사용하였다는 견해에 의해 뒷받침되어지고 있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읍루족의 종족적 계통에 관한 이러한 說들은, 한반도의 有文土器 文化人의 종족적 계통과 韓國語의 기원 및 계통에서의 古아시아적 要素에 대한 일부의 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편 읍루족을 古아시아族으로 보는 說에 대해 原論的인 입장에서 穴居는 極寒地帶에 사는 족속들의 住居方式으로 널리 보이며, 毒矢의 사용도 軟弓弱矢를 가진 미개인이 사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方式으로 많이 행해졌으며, 石鏃은 철기문화가 수용되지 못한 단계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여, 이런 習俗이 읍루족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어 왔다. (和田淸, 「唐代の東北アジア諸國」pp.134~137) 즉, 3세기 당시 읍루족의 문화적 낙후성과 생활환경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서, 반드시 읍루족의 종족적 계통을 나타내는 고유한 특성으로 볼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挹婁·勿吉·靺鞨·女眞·滿洲族으로 이어지면서 뚜렷한 계승관계를 보이는 半農·半狩獵의 이 大族屬을 일괄해 古아시아족으로 단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바이다. 읍루족의 習俗이 현존하는 소위 古아시아족계 족속들의 그것과 相似한 면이 있음이 분명하고 만주지역에 古아시아族系의 주민들이 존재하였음도 인정되고 있지만, 읍루의 후예인 女眞·滿洲族의 言語와 古아시아族의 언어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前者가 Altai語에 속함은 명백한 바이다. 古아시아族인 挹婁의 要素가 퉁구스系인 靺鞨-女眞에 약간 흡수되어졌다고 하기에는 史書에서 전하는 양자의 계승관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한편 읍루족을 순수 퉁구스族으로 보고 濊貊族을 퉁구스族과 몽고族의 混血로 보는 견해도 일찍이 제기되어 왔다.
≪參考文獻≫
『滿洲源流考』卷2「部族」挹婁條.
金廷鶴, 「考古學上으로 본 韓國民族」『白山學報』1, 1966.
金貞培, 『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上), 1935.
白鳥庫吉, 「塞外民族」『東洋思潮』1936, 岩波書店.
三上次男, 「挹婁人の民族的性格とその社會」『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和田淸, 「唐代の東北アジア諸國」『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池內宏, 「肅愼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3, 1934.
M.G. Levin, 『Ethnic Origins of the People of Northern Asia』1963.
S.M.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2.『晋書』肅愼傳 註 2)
肅愼
肅愼이란 用語는 周代에 中國의 東北 지방에 살던 東夷族을 일컫던 말이다. 肅愼에 관한 가장 오래된 記錄은 孔子가 편찬한 『春秋』이다. 『春秋左傳』昭公 9年條에 보면 ‘肅愼·燕·毫 吾北土也’라고 하여 肅愼은 燕·毫과 아울러 中國의 北方에 있다고 하였다.
『史記』「五帝本紀」의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渠廋·氐·羌·北山戎·發·息肅·東長·鳥夷’라고 하였는데, 後漢 鄭玄의 註를 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 하였다. 따라서 肅愼·息愼은 古代 中國人들이 滿洲 지방에 살던 東北夷를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方向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 아닌가 추측된다.(保井克己, 『滿洲の民族と言語』p.63)
周代에는 이처럼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三國時代에 魏나라가 비로소 滿洲 지방을 征伐하자, 구체적으로 이 지방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며, 이때에는 滿洲 지방에 살던 東北夷를 肅愼이라고 부르지 않고 挹婁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池內宏은 「肅愼考」에서 中國 古典上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正體를 歷史的으로 考證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中國人의 地理的 知識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同一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周代의 肅愼 이래 歷史에 쓰이던 명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肅愼(Suk-chin)-周代
朱申(Su-shin)-前漢代
挹婁(Dyūr)-後漢·三國時代
徹兒赤(Dzur-chi)-唐代
朱里眞(Jur-chin)-宋代·元代
女眞(Jur-chin)-明代
女直(Jur-chi)-明代
奴兒眞(Nyur-chin)-淸代
朝鮮이란 말도 肅愼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오늘날 Tungus語에서 Sokze(n), Sokcen이나 蒙古語에서 Juksen은 ‘禮’를 가리키는 말이다. 言語學的으로는 이러한 말들을 肅愼의 對應語로 들 수 있으나, 그 직접적인 관계는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滿洲 지역에는 일찍부터 여러 계통의 民族이 들어와 살다가 移動하였기 때문에 古代의 肅愼 이래 女眞族이 출현하기까지 적어도 몇 차례의 民族移動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S. M.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147~169) 古肅愼氏와 淸王朝를 세운 女眞族을 同一한 種族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參考文獻≫
『春秋左傳』卷12 昭公 9年條.
『史記』卷1「五帝本紀」帝舜條.
池內宏, 「肅愼考」『滿鮮史硏究』(上世篇) 第一册, 1951, 吉川弘文舘.
保井克己, 『滿洲の民族と言語』1982, 第一書房.
S. M.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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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東牟山043043 東牟山 學界에서 異說이 많았던 東牟山의 位置는 1949年 8月 以後 中國學者들이 展開한 敦化縣 一帶의 發掘 결과 敦化縣治의 敖東城인 것으로 밝혀졌다.
<참조>
『舊唐書』渤海靺鞨傳 註 14)
東牟山
東牟山의 位置에 대하여는 『資治通鑑』玄宗 開元 元年條 胡三省注에는 『新唐書』「地理志」(실은 「安祿山傳」)을 引用하여 ‘天門嶺在土護眞河北三百里’라 하고 있다. 土護眞河는 熱河省 老哈河인 바 唐軍에 쫓긴 高句麗餘類가 이와 같은 地方으로 遁走할 수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同名異地로 볼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松井等은 輝發河와 渾河의 分水嶺에 長嶺子라는 것이 있는 바, 이것을 곧 天門嶺이라고 比定한 바 있다(「渤海國の疆域」p.411). 그러나 그 위치비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津田左右吉의 敦化縣說(「渤海考」pp.123~124), 和田淸이 비정한 지금의 老爺山脈 中의 北甑說(「渤海國地理考」p.62 및 p.74) 등으로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1949年 8月 이후 中國學者들의 渤海國 古蹟發掘이 적극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이 東牟山은 현재의 敦化縣治의 敖東城 一帶인 것으로 比定되어 거의 定說化되고 있다. 이것은 敦化城에서 南으로 5km 地點인 六頂山에서 渤海王國 第3代 文王 大欽茂의 第2女 貞惠公主의 墓와 그 墓에서 出土한 墓碑 등에 비추어 보아, 이 地域이 『新唐書』渤海傳에 上京龍泉府로 遷都하기 이전 渤海王國 初期의 首都로 되어 있는 이른바 ‘舊國’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 中國學者들의 일치된 見解인 것이다(金毓黻,「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pp.75~78;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p.298; 王承禮,「吉林敦化牧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pp.575~580 및 p.584;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pp.208~209).
≪參考文獻≫
『資治通鑑』卷210「唐紀」26 玄宗 開元 元年條.
金毓黻, 「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考古學報』1956年 2期.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考古』1961年 6期.
王承禮, 「吉林敦化牡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考古』1962年 11期;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社會科學戰線』1979年 3號.
松井等,「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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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營州에서 동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新羅와 맞닿아, 泥河044044 泥河 泥河의 位置에 대하여는
①『三國史記』「新羅本紀」祇摩尼師今 14年條:秋七月〔靺鞨〕又襲大嶺柵 過於泥河
②『三國史記』「新羅本紀」慈悲麻立干 11年條:春 高句麗與靺鞨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
③『三國史記』「新羅本紀」照知麻立干 3年條: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爾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斬首千餘級
④『三國史記』「新羅本紀」照知麻立干 18年條:秋七月 高句麗來攻牛山城 將軍實竹出擊泥河上 破之
라는 記事가 있다.
이상의 泥河에 관한 記事 중 ①項과 ②·③項에 보이는 靺鞨은 東濊를 지칭한 것이며, ①項의 습격받았다는 大嶺柵은 ‘大嶺’이 『東國輿地勝覽』江原道 江陵大都護府 大關嶺條에 ‘俗號大嶺’으로 되어 있어 大關嶺에 設置된 新羅의 防禦構造物로 추측된다.
그리고 ②項의 高句麗와 靺鞨(東濊)의 습격을 받았다는 悉直城은 三陟이며, 何瑟羅는 江陵인 것이 定說로 되어 있다.
즉, ①項에서 東濊가 大嶺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지났다 하고, ②項에서는 悉直城 즉, 三陟을 습격받았기에 江陵民을 징발하여 泥河에 築城하였다고 하면 泥河는 江陵附近인 것이 분명하나 그 구체적인 江名은 알 수 없다. 이에 北漢江의 支流인 昭陽江으로 比定하는 見解도 있다(松井等, 「渤海國の疆域」 p.424).
한편 津田左右吉은 泥河에 관한 記事 중 ②項에 보이는 牛山城을 忠州·報恩 方面으로 比定하여 泥河를 지금의 永春·丹陽 附近을 흐르는 漢江의 上流로 比定하는 見解를 피력하였다(「長壽王征服地域考」pp.77~79).
그러나 津田左右吉의 이 比定은 먼저 新羅의 牛山城을 忠州·報恩으로 比定한 論據가 분명치 않을 뿐 아니라 泥河를 丹陽 附近의 漢江 上流로 比定할 경우 上揭泥河에 관한 『三國史記』의 記事 중 ①·②項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상은 『三國史記』에 보이는 泥河에 관한 記事인 것이나, 『新唐書』渤海傳의 渤海國과 新羅의 國境으로서의 泥河에 대하여 丁若鏞은 『我邦疆域考』 「渤海考」에서 ‘我江陵之北 泥川水也’라 하고, 이것이 곧 『三國史記』「新羅本紀」에 보이는 慈悲王이 何瑟羅(江陵)人을 징발하여 泥河城을 構築하고, 炤知王時에 高句麗·靺鞨兵을 泥河 서쪽에서 격파한 그 泥河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渤海와 新羅가 이곳을 境界로 하고 있다고 하면 襄陽 以北은 모두 渤海의 領土가 되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襄陽 以北은 則天武后의 末年에 渤海領土에 들어갔다가 玄宗의 天寶以後에 鐵關 以南을 다시 新羅에서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景德王 16年에 朔庭郡(今安邊)·泉井郡(今德源) 및 屬縣의 이름도 고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鐵關이라고 하는 地名은 『東國輿地勝覽』咸境道 德源都護府 古蹟條에 ‘在府北十五里 石築 周一千四百三尺’이라는 防禦構築物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松井等은 『三國史記』「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 『古今郡國志』의 ‘自新羅泉井郡 至柵城府 凡三十九驛’이라는 記事에 의거하여 渤海와 新羅의 境界를 新羅의 泉井郡인 현재의 德源으로 단정하고, 『新唐書』渤海傳에 兩國의 國境으로 되어 있는 泥河는 德源 附近의 河川으로 보아, 德源과 그 北인 永興間의 2~3河川 中 가장 큰 永興傍의 龍興江으로 推定한 바 있다(앞의 논문, pp.422~423).
泥河에 대하여 丁若鏞은 『三國史記』「新羅本紀」에 보이는 記事를 검토하여 이를 江陵 북쪽의 泥川水로 比定하고, 『新羅書』渤海傳의 泥河도 同一地點으로 보아 그 變遷을 설명하였던 것이나, 松井等은 『三國史記』「新羅本紀」에 보이는 泥河와『新唐書』 渤海傳에 보이는 兩國의 境界地로서 泥河를 다른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泥河가 德源 附近의 河川이라는 松井設에 대하여 津田左右吉은 『三國史記』聖德 20年의 ‘徵何瑟羅道丁夫二千 築長城於北境’이라는 記事를 引用하면서도 그 地點을 밝히기 어려운 점을 설명하고, 東海岸에서 安邊 附近의 南大川과 그 北의 高原 및 永興 附近의 德之灘·龍興江·咸興의 城川江 中에서 新羅의 朔庭郡인 安邊 附近의 南大川이 그 거리로 보아 가장 무난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新羅北境考」pp.326~329).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 「新羅本紀」1 祇摩尼師今 14年條; 卷3「新羅本紀」3 慈悲麻立干 11年條·照知麻立干 3年·18年條; 卷37 「地理志」所引 『古今郡國志』 『東國輿地勝覽』卷44 江原道 江陵大都護府 山川 大關嶺條; 卷49 咸境道 德源都護府 古蹟條.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長壽王征服地域考」·「新羅北境考」『朝鮮歷史地理』1卷,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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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契丹과 [접하고 있다.] 城郭을 쌓고 사니, 高[句]麗의 망명자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註 039
渤海傳 : 『新唐書』渤海傳은 卷219의 「北狄列傳」에 契丹·奚·室韋·黑水靺鞨과 함께 실려 있다. 그 구성에서 渤海의 出自·建國過程·位置 및 唐과의 交涉記事로 이루어진 것은 『舊唐書』渤海靺鞨傳과 동일하지만, 『舊唐書』에 없는 渤海內部에서 행해진 歷代王國의 諡號와 年號·行政區劃·官制·地方의 名産 등이 附記되어 있다.
이에 그 記事의 정확성은 『舊唐書』보다 떨어지지만『舊唐書』에 보이지 않는 渤海國內의 事情에 관한 記事가 많기 때문에 그 史料的 價値는 『舊唐書』보다 높게 평가되고 있으며, 渤海史 硏究의 基本 史料로 이용되고 있다.
≪參考文獻≫
李龍範, 『古代의 滿洲關係』1976, 한국일보사.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洋學報』 36卷 4號, 1954(『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東洋文庫)
註 040
粟末靺鞨 : 北魏時代에 ‘勿吉’의 이름으로 孝文帝 延興 年間(471~477)에 使者 乙力支를 北魏에 보내어 高句麗의 膨脹主義를 呼訴하고 援兵을 요청하였던 이 部族은 隋·唐代에 ‘靺鞨’로 칭해지게 되었으며, 『隋書』靺鞨傳에 따르면 粟末部·伯咄部·安居骨部·拂涅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의 7部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松花江 上流인 伯都訥에서부터 松花江 下流를 거쳐 黑龍江 下流까지 그리고 東南은 長白山 一帶까지 散居하던 古代 滿洲族 集團을 總稱한 것이며, 7部가 統一된 政體를 이룩하였던 것은 아니다.
粟末靺鞨은 粟末水(『魏書』勿吉傳·『北史』勿吉傳에는 ‘速末水’로 『新唐書』「地理志」에는 ‘涑沫’로 되어 있다) 즉, 지금의 北流 松花江 流域에 居住하였기에 칭하게 된 部族名이다.
『隋書』 靺鞨傳에는 粟末靺鞨에 대하여 ‘ …… 與高麗相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中’이라고 하여 高句麗와 近接한 地域의 靺鞨로 되어 있다.
그 中心部에 대하여는 長順主撰의 『吉林通志』「沿革志」에서 北流 松花江岸인 吉林·烏喇로 推定한 바 있다. 『吉林通志』의 이 比定은 日本의 松井等(「渤海國の疆域」pp.427~431), 池內宏(「鐵利考」pp.21~24), 津田左右吉(「勿吉考」pp.18~24) 日野開三郞(「靺鞨七部考」)등에 의해서 추종된 바 있다. 그러나 高句麗 特有의 山城이 遼東半島에서 吉林 北의 龍潭山까지 列置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和田淸은 吉林·烏喇 一帶는 高句麗의 版圖인 것으로 斷定하고 粟末部는 그보다 北인 粟末水 下流인 것으로 推斷한 바 있다(「渤海國地理考」pp.89~90).
粟末靺鞨은 隋의 開皇 年間에 그 酋長 突地稽가 高句麗와의 戰爭에서 패하여 그 8部의 勝兵 千餘人을 이끌고 扶餘地 西北으로 빠져나와 隋에 保護를 요청하였던 바 있었다.
당시 隋는 이미 煬帝가 卽位하고 있어 그를 金紫光祿大夫 遼西太守로 册封하여 營州(現 朝陽)에 있도록 하였다. 그는 隋 煬帝의 高句麗 遠征에 언제나 從軍하여 큰 功을 세워 煬帝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唐 高祖 武德 初에 使臣을 보내서 朝貢을 바치자, 高祖는 그 部落을 燕州(現 義縣 附近)에 두게 하고 그를 總管으로 任命하였다. 劉黑闥의 叛에는 그 部下를 이끌고 定州에서 싸워서 功을 세워 太宗으로부터 蓍國公의 封을 받고 또 그 部落을 北京인 幽州의 昌平城에 옮겨 살도록 하였다.
때마침 高開道가 突厥을 이끌고 幽州에 來攻하자 突地稽는 다시 그 무리를 이끌고 이와 싸워서 크게 무찔러 貞觀 初에는 右衛將軍을 拜하고 國姓인 李氏를 받게 되었다.
그의 아들 李謹行은 武力絶人하여 麟德 年間(664~665)에는 營州都督을 拜하였으며, 그 部落 家僮 數千人은 財力으로 변경을 휘잡아 다른 夷人들의 질시를 받았다 한다. 그 후 자주 戰功을 세워 官이 鎭軍大將軍·行右衛大將軍을 거듭하고 燕國公에 册封되었다. 永淳 元年(682)에 사망하였다(金毓黻, 『渤海國志長編』族姓考)
<참조>
『舊唐書』 渤海靺鞨傳 註 3)
靺鞨
古代에서 中世에 걸쳐 滿洲 東半部와 黑龍江 下流의 시베리아 地方에 살던 部族의 이름이다.
이 部族이 中國正史에 처음 보이는 것은 『魏書』勿吉傳에 ‘勿吉’이라는 이름으로 ‘高句麗’의 北에 있으며 옛 肅愼國’에 속하는 部族으로 적혀 있다.
특히 北魏 孝文帝의 延興 年間(471~477)에는 勿吉이 使者 乙力支를 北魏에 파견하게 되어 北魏에서 지금의 吉林 附近까지의 路順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勿吉은 『北史』勿吉傳에 ‘一曰靺鞨’이라고 적혀 있는 바와 같이 隋·唐時代에는 靺鞨로 表記되었다.
『隋書』靺鞨傳에 따르면 靺鞨은 ‘粟末部·伯咄部·安車骨部·拂涅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의 7部로 나뉘어져 松花江 上流인 伯都訥에서부터 松花江 下流 및 黑龍江 下流까지, 東南은 長白山一帶의 넓은 地域에 걸쳐 散居하면서도 統一을 이룩하지 못한 低文化族을 總稱한 것이다.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白山部와 粟末部가 高句麗에 倂合되어 粟末靺鞨의 酋長 突地稽는 그의 部衆을 이끌고 遼西로 逃走하여 隋의 保護를 받았으며, 黑水部를 제외한 나머지 靺鞨도 部로서의 존립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參考文獻≫
李龍範, 『古代의 滿洲關係』1976.
長 順, 『吉林通志』卷10「沿革志」上 吉林屬城及府廳州縣沿革全表.
松井等, 「渤海國 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參考文獻≫
『隋書』卷81 「東夷列傳」靺鞨條.
長 順, 『吉林通志』卷10 「沿革志」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6 「族姓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池內宏,「鐵利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3, 1916(『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日野開三郞, 「靺鞨七部考」『史淵』36·37合輯.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洋學報』 36卷 4號, 1954(『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註 041
大氏 : 渤海王國의 國姓인 大氏는 高句麗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姓이다. 일찍이 池內宏은 이를 乞乞仲象이 營州에서 東走하여 震國을 建國한 후 中國式 姓名으로 改名한 것이 大祚榮이었다고 推斷함으로서 ‘大’氏는 震國 以後부터 보이게 된 新姓같은 해석을 내린 바 있다(「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pp.1~13).
池內宏의 이 推斷에 대하여 學界一部에서 同調者도 있었으나(津田左右吉, 「渤海考」p.110), 곧 鳥山喜一의 反論에 부딪혀 定說이 되지 못하고 있다(『渤海史考』p.33).
그 후 이 문제는 稻葉岩吉에 의해 乞乞仲象의 ‘乞乞’은 그 音이 ‘女直’을 漢字로 表示한 것이며 그 姓 ‘大’는 梵語에서 ‘大’라는 뜻의 Makha와 관련되니, 그 出身이 ‘靺鞨’ 즉, Maha이기 때문에 그 姓을 中國式으로 ‘大’氏로 한 女眞의 巨酋가 ‘大祚榮’이었다는 奇論까지 나오고 있다)(「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續みて」)
한편 高麗 初에 來投한 大光顯 등 많은 渤海國 王族은 그 후 우리나라에서 永鹿太氏로서 번성을 누리고 있다.
<참조>
1.『舊唐書』渤海靺鞨傳 註 4)
大祚榮
『舊唐書』渤海靺鞨傳에서는 渤海王國의 建國者를 大祚榮으로 明記하고 있으나, 『新唐書』渤海傳에는 唐에 처음 叛旗를 들어 東走하여 渤海王國의 기틀을 잡았던 것을 大祚榮의 父인 乞乞仲象으로 기록하고 있다. 學界에서는 渤海王國의 建國者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적지않은 論爭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問題에 대하여 처음 池內宏은 乞乞仲像과 大祚榮은 同一人으로서 乞乞仲象은 建國前 營州住在時의 本名이며, 大祚榮은 建國後 中國式으로 改名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pp.1~13). 渤海國의 建國者에 대한 池內宏의 論旨는 『新唐書』·『舊唐書』 兩書의 서로 어긋나는 記事를 折衷·調和시키려는 데 있었으며, 津田左右吉도 이에 同調하였으나(「渤海考」p.110), 이 推斷은 곧 鳥山喜一에 의해 ‘too logical’이라는 理由로 否定되었다(『渤海史考』p.33). 이 問題는 그 후 1933年 10月에 있었던 白鳥庫吉의 學術講演에서 거론되어 乞乞仲象과 大祚榮의, 同一人說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乞乞仲像은 靺鞨人이었다는 說이 主張되었다(「渤海國に就いて」pp.92~98).
≪參考文獻≫
池內宏, 「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東洋學報』5卷 1號, 1914(『滿洲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東京奉公會.
白鳥庫吉, 「渤海國に就いて」『史學雜誌』 44編 12號, 1933
2.『舊唐書』渤海靺鞨傳 註 5)
高麗別種
渤海王國의 主體에 대하여 『舊唐書』에는 ‘高[句]麗別種’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渤海傳에는 ‘…本粟末靺鞨附高[句]麗者…’라 하여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高句麗領土로 倂合된 松花江 流域의 粟末靺鞨로 되어 있어 渤海史硏究에서도 가장 異說이 많은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問題에 대하여 津田左右吉은 大祚榮이 建國에 있어서 東牟山(太白山 東北인 敦化縣으로 推斷)을 根據로 하였다는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따라 渤海王室의 出自를 靺鞨 7部 中 長白山 附近에 居住하던 白山部出身으로 推斷한 바 있다(「渤海考」p.118).
津田左右吉에 이어 鳥山喜一은 『新·舊唐書』에 보이는 엇갈리는 記事를 절충하여 渤海王國의 開國者인 大祚榮은 高句麗別部出身이나, 그 王國을 形成한 主體는 靺鞨族이라는 主張을 내놓았다(『渤海史考』pp.33~34).
한편 池內宏은 治者階級은 소위 ‘渤海靺鞨’이며 이 王國은 기타의 靺鞨部도 참여한 靺鞨族國家인 것으로 推斷하였다(「鐵利考」p.84).
이와 같이 『新·舊唐書』의 記事만 가지고 渤海王國의 主體가 어느 族에 속하는지 穿鑿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臆斷의 境地를 벗어날 수 없었으나, 이 問題에 관하여 획기적인 見解를 發表한 것은 白鳥庫吉이다. 즉, 그는 1933年 渤海國 上京發掘物展覽會에 즈음한 學術講演에서 ① 『續日本紀』神龜 5年條에 渤海王國 大武藝가 日本에 보낸 國書에서 ‘復高[句]麗之舊居 有扶餘之遺谷’이라 하여 高句麗의 光復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天平寶宇 3年條에도 그 自身을 ‘高麗國王大欽茂 …… ’라 自稱하고 또 日本에서의 返書에도 ‘敬問高麗王 …… ’이라고 渤海王을 高句麗王으로 칭하였다는 점 ② 日本側記錄에 보이는 日本에 派遣된 渤海使臣 85名 中 12名이 옛 高句麗王姓인 高氏이고 기타의 副使를 합쳐 거의가 漢族名이며 滿洲名은 靺鞨隨行員 6名 뿐이었던 점 ③ 唐에서도 이 王國을 表面上으로는 渤海라고 稱하지만 一般人은 역시 高[句]麗라고 칭하였던 점 등을 들어 開國者 大祚榮은 『舊唐書』의 記事대로 高句麗人이며, 王과 上流階級을 形成한 中樞勢力은 高句麗遺民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으나, 被支配層은 靺鞨이었을 것이며, 渤海王國의 正體는 高句麗遺民이 靺鞨族을 利用하여 國家光復에 成功한 것이라고 하였다. 白鳥庫吉이 異論이 많았던 渤海의 五京制度까지도 高句麗 本來의 制度를 따랐으며 다만 上京을 北에 두었던 것은 中國의 影響이라고 부언한 것도 渤海가 高句麗王朝의 延長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려는 試圖에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渤海國に就いて」pp.92~98).
그러나 韓國史의 獨自的인 展開를 否定하는 植民地史觀의 體系化를 그 學的 生活의 信條로 삼고 있던 稻葉岩吉의 奇論이 잇달아 發表되었다. 즉, 그는 靺鞨을 種族名으로 보지 않고 梵語에서의 ‘大’의 뜻인 Maha로 우겨 ‘大人’의 뜻으로 새겨,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姓大氏’의 大氏를 그 譯字로 보았다. 따라서 種人의 名稱으로서는 肅愼에서 곧 女眞(直)으로 되는 것이며, 女眞의 名稱은 契丹 以後의 것이 아니고 渤海의 始祖 乞乞仲象의 乞乞이 즉 女直(『遼史』의 表記)의 初音이라는 것이다. 즉. 仲象·祚榮은 女眞人의 巨酋이며 그 巨酋가 中心이 되어 渤海王國을 建設하였던 것이다. 이 王國은 女眞人만의 힘이 아니고 高句麗遺民의 合力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舍利乞乞仲象’의 舍利가 女眞語의 ‘泉’의 뜻이며 高句麗大姓 泉氏(泉蓋蘇文의 家門)과 關係가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渤海王國의 主權者 및 支配階級은 松花·黑龍 兩江의 女眞人이었던 것 같으나, 그 文化는 거의 高句麗人에게 장악되고 있었다는 要旨이다.(「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讀みて」pp.108~113). 古代 滿洲族에 대한 號稱의 系列조차 無視하고 난데없이 梵語까지 이에 結付시킨 이 奇論은 渤海史와 高句麗史와의 關係를 認定하지 않으려는 底意에서 나온 것이 너무도 分明하기에 學界에서는 처음부터 疎外되고 있다.
渤海王室과 그 中樞勢力을 高句麗로 보지 않으려는 日本學界의 경향은 第2次世界大戰後에도 이어져 和田淸은 『舊唐書』渤海靺鞨傳에서 大祚榮의 出自를 ‘高麗別種’이라는 ‘別’字가 붙는 것으로 보아 高句麗의 同族이 아니고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粟末靺鞨’을 ‘高麗別種’으로 表現한 것이라고 推斷하였다(「渤海國地理考」p.59).
한편 韓國學界에서는 李承休의 『帝王韻記』를 비롯하여 柳得恭의 『渤海考』 등에서 大祚榮의 出身이 ‘本高麗別種也’라는 이 記事에만 依據하여, 渤海史를 韓國史의 體系에 넣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 내려 왔으나, 日本學界의 이와 같은 異說에 자극받아 大祚榮과 渤海王國의 主體勢力을 이루었던 種族의 究明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또 朴時亨은 『三國史記』「新羅本紀」元聖王 6年 3月條의 ‘以一吉凔伯魚 使北國’ 또는 憲德王 4年 秋9月條에 보이는 ‘遣級滄崇正 使北國’이라는 ‘北國’은 渤海國을 가리킨 것이며, 新羅에서 韓國史를 新羅를 南國으로 한 南北朝史로 보아 同族意識에서의 一時的인 領主임을 認識하고서의 號稱이었다는 等의 推斷過程을 거쳐 渤海王室이 高句麗係임을 力說하고 있다(「渤海史硏究のために」pp.169~211).
그리고 朱榮憲은 渤海王國의 古墳·都市와 建築·瓦當 등 遺物을 高句麗의 그것과 比較하여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高句麗의 繼承者로서의 渤海國文化를 說明하려고 試圖한 바 있다(『渤海文化』pp.138~167).
한편 李龍範은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大祚榮의 出自를 否定하고 ‘ ……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 ’라고 한 것이라던가, 最初의 建國地인 『舊唐書』의 ‘桂婁之故地’를 ‘挹婁之故地’로 바꾸고 있는 『新唐書』渤海傳의 記事는 당시의 東北亞細亞史의 硏究로서는 無理가 많다는 점,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階層 및 文化의 內容 등을 들어 渤海王國의 主體는 高句麗遺民이었음을 主張하였다(「渤海王國의 形成과 高句麗遺族」).
이 問題에 관한 硏究의 視角을 中國과 蘇聯으로 돌려보면 먼저 中國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意味에서 問題가 많은 『滿洲源流考』「部族」渤海條를 비롯하여 長順의 『吉林通志』·王世遵의 『寧安縣志』에서의 古典的 硏究와, 1919年에 唐晏이 엮은 『渤海國志』나 1931年에 黃維翰이 엮은 『渤海國記』 등에는 大祚榮의 出自가 깊이 究明된 자취가 없다.
이 問題의 해명에 本格的으로 努力을 기울인 것은 1934年에 金毓黻이 엮은 『渤海國志長編』부터이다.
즉, 金毓黻은 『渤海國志長編』의 여러 項目에서 渤海王國이 靺鞨族의 國家인 것을 堅持하다가 叢考의 一項에서만은 日本側史料에 依據하여 渤海王國이 高句麗의 後繼者인 것을 認定한 바 있다.
中國政權이 수립된 후 渤海王國의 上京龍泉府를 비롯하여 豆滿江 流域의 渤海遺跡發掘 및 貞惠公主墓·貞孝公主墓의 調査에서 많은 成果를 올렸으나, 中國學界가 보여준 이와 같은 硏究熱의 거의 대부분이 ‘渤海史是我們偉大祖國 以漢族主體的多民族史州中的 重要篇章’이라는 즉, 中國史속의 少數民族史의 一分野로 하려는 데 있었기에 渤海文化 中에 高句麗的 要素를 충분히 認定하면서도 그 主體를 高句麗 遺民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있다(王承禮, 「敦化六頂化渤海墓淸理發掘記」p.200).
王承禮는 唐代의 渤海王國을 『新唐書』渤海傳의 서술대로 ‘是粟末靺鞨’이라 斷定하고서 遺蹟을 發掘하였던 것이며, 그는 다시 1982年의 發掘報告書에서는 ‘總之渤海文化可以說就是唐文化 渤海文學就是唐代各民族學的組成部分 …… ’이라고까지 極言하여(「唐代渤海貞惠公主墓誌和貞孝公主墓的比較硏究」p.185), 渤海王國에 미친 高句麗의 文化要素까지도 말살하려는 傾向조차 보이고 있다.
中國學者의 이와 같은 경향은 陳顯昌에게도 보이고 있다(「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pp.85~89; 「渤海貞惠公主墓碑的硏究」pp.69~70).
한편 1860년의 露·淸北京條約으로 渤海王國의 定理府·率賓府를 포함한 지금의 沿海州를 차지하게 된 帝政 러시아의 渤海史硏究의 傳統을 이어받은 蘇聯에서의 渤海建國者에 관한 見解는 또 日本이나 中國과는 다른 것이 있다.
즉, 1852年에 發表된 V. Gorskii의 『滿洲家屬의 始期』 以後 P. Katalov·M.G. Shevelev·F.F. Busse·D.M. Pozdnev 등의 渤海史硏究를 이어받은 소련 學界의 경향은 最近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A.P. Okladnikov에게서 그 一面을 엿볼 수 있다. 소련의 極東考古學調査隊를 이끌고 沿海州 一帶의 調査發掘成果를 바탕으로 내린 渤海王國의 主體種族에 대한 Okladnikov의 結論은 渤海王國의 文化가 高句麗·新羅와 가장 共通性이 많은 것은 認定되나, 그 王國의 主體種族만은 高句麗가 아니고 『新唐書』渤海傳의 記事대로 粟末靺鞨이었다고 主張하고 있다(「The Mo-Ho Tribes and the P'o-Hai State」pp.170~200; 『Советского Папьнего Бостока』pp.194~205).
渤海王國의 主體種族에 관한 소련학자들의 이와 같은 主張은 渤海王國의 率賓府, 定理府 등 沿海州를 領土로 占有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渤海史의 一部가 그들의 地方史 또는 少數民族史의 一部라고 하는 政策的인 意圖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그들의 정치적인 의도에서는 渤海國史를 高句麗史와 連結지어 韓國史의 體系에 넣어 說明하는 것보다 이미 歷史에서 그 자취가 없어진 靺鞨族과 連結짓는 것이 有利한 까닭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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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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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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稻葉岩吉, 「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讀みて」『靑丘學叢』 23號, 1936.
註 042
挹婁 : 後漢時代로부터 알려진 滿洲에서 沿海州 附近에 걸쳐 居住하던 種族名이다.
이 種族의 住地와 生活·習俗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한 『三國志』挹婁傳에는 그 住地에 대하여 ‘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이라 하고 있다.
『三國志』보다 100여년 후에야 엮어진 『後漢書』挹婁傳은 그 種族을 肅愼國의 後裔인 것으로 看做하고,『三國志』의 ‘濱大海’를 ‘東濱大海’로 하여 ‘東’字를 加하였을 뿐 대체로 『三國志』挹婁傳의 記事를 옮긴 데 지나지 않는다.
『三國志』挹婁傳에 長春·農安 附近인 ‘東北千餘里’라 하고 大海에 濱하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어, 이 種族의 中心勢力은 지금은 烏蘇里 流域에서 沿海州 一帶의 住民이며, 『後漢書』以後의 中國史書들이 斷定하고 있는 肅愼族에 비하면 그 一部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古代의 肅愼族과 挹婁의 그 內包外延이 일치되지 않은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挹婁가 그 以前에 中國에 알려져 있던 肅愼族의 槪念에 포함되어 있었던 一部 地域의 住民을 가리키고 있다는 點까지는 의심할 수 없다.
挹婁에는 王이 없고 다만 部落에 各 酋長이 있을 뿐이며 그 酋長은 夫餘에 稅賦를 바쳤다 한다. ‘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이었다는 記事를 보면 이 種族은 東北亞細亞族으로서 滿洲의 古代語와 다른 特殊한 言語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한편 이 地域의 土着民들을 古代 漢民族이 ‘挹婁’ 즉, ‘I-Iou’로 부르게 된 것은 보통 沿海州의 퉁구스族을 漢民族이 ‘오룬춘(鄂倫春, Oron-Chun)’이라 하고, 黑龍江 中流의 고르디(Goldi)族을 ‘오로치(Orochi)’로 부르는 데에서 그 語源을 찾는 學者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참조>
1.『三國志』挹婁傳 註 2)
挹婁
挹婁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滿洲源流考』에는 만주어에서 岩穴의 穴을 뜻하는 葉嚕·伊魯와 音이 비슷함을 들어 그 語源을 설명한 ‘又有站名㦤路 亦作伊魯 當即遼金挹婁縣之遺 今滿洲語 謂巖穴之穴爲葉嚕與伊魯 音相近 可知當時命名之義'란 기록이 있다.
또한 퉁구스語의 一方言에 馴鹿를 뜻하는 Oro, Iru의 對音으로 보는 說도 있으나, 이에 대해선 挹婁人이 순록을 기른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挹婁族의 거주지는 부여의 동쪽, 北沃沮의 북쪽으로서 대략 우수리강 유역과 沿海州, 송화강 및 흑룡강 하류 일대의 지역으로 여겨진다.
『三國志』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거할 때, 挹婁族은 비록 體形은 당시 인근에 있던 夫餘·高句麗·沃沮·東濊 등의 濊貊族과 비슷하지만, 그 言語·住居·衣服·習俗 및 활과 같은 도구 등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반면에 후대의 勿吉·靺鞨 등의 존재 양태와 동일한 면모를 많이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의 계승관계에 있는 족속임을 알 수 있다. 이 挹婁의 종족적인 계통을 古아시아族으로 규정한 說이 있다. (三上次男, 「挹婁人の民族的性格とその社會」pp.311~330) 이는 읍루족의 習俗이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脂肪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石鏃과 毒矢를 사용하는 점 등이 Aleuts, Chuckchee, Korvak, Giliyak 등의 이른바 古아시아族으로 분류되는 족속들의 풍속과 相似한 반면에, 濊貊族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을 주된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東北아시아의 住民을 퉁구스族인, 또는 퉁구스族에 蒙古種이 일부 混血된 족속인 濊貊族과 古아시아族으로 크게 양분하였다. 이 說은 言語學的인 면에서 가령 Primore와 Amur지역 주민의 언어가 처음에는 古아시아語였다가 뒤에는 퉁구스-만주어를 사용하였다는 견해에 의해 뒷받침되어지고 있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읍루족의 종족적 계통에 관한 이러한 說들은, 한반도의 有文土器 文化人의 종족적 계통과 韓國語의 기원 및 계통에서의 古아시아적 要素에 대한 일부의 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편 읍루족을 古아시아族으로 보는 說에 대해 原論的인 입장에서 穴居는 極寒地帶에 사는 족속들의 住居方式으로 널리 보이며, 毒矢의 사용도 軟弓弱矢를 가진 미개인이 사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方式으로 많이 행해졌으며, 石鏃은 철기문화가 수용되지 못한 단계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여, 이런 習俗이 읍루족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어 왔다. (和田淸, 「唐代の東北アジア諸國」pp.134~137) 즉, 3세기 당시 읍루족의 문화적 낙후성과 생활환경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서, 반드시 읍루족의 종족적 계통을 나타내는 고유한 특성으로 볼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挹婁·勿吉·靺鞨·女眞·滿洲族으로 이어지면서 뚜렷한 계승관계를 보이는 半農·半狩獵의 이 大族屬을 일괄해 古아시아족으로 단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바이다. 읍루족의 習俗이 현존하는 소위 古아시아족계 족속들의 그것과 相似한 면이 있음이 분명하고 만주지역에 古아시아族系의 주민들이 존재하였음도 인정되고 있지만, 읍루의 후예인 女眞·滿洲族의 言語와 古아시아族의 언어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前者가 Altai語에 속함은 명백한 바이다. 古아시아族인 挹婁의 要素가 퉁구스系인 靺鞨-女眞에 약간 흡수되어졌다고 하기에는 史書에서 전하는 양자의 계승관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한편 읍루족을 순수 퉁구스族으로 보고 濊貊族을 퉁구스族과 몽고族의 混血로 보는 견해도 일찍이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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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晋書』肅愼傳 註 2)
肅愼
肅愼이란 用語는 周代에 中國의 東北 지방에 살던 東夷族을 일컫던 말이다. 肅愼에 관한 가장 오래된 記錄은 孔子가 편찬한 『春秋』이다. 『春秋左傳』昭公 9年條에 보면 ‘肅愼·燕·毫 吾北土也’라고 하여 肅愼은 燕·毫과 아울러 中國의 北方에 있다고 하였다.
『史記』「五帝本紀」의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渠廋·氐·羌·北山戎·發·息肅·東長·鳥夷’라고 하였는데, 後漢 鄭玄의 註를 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 하였다. 따라서 肅愼·息愼은 古代 中國人들이 滿洲 지방에 살던 東北夷를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方向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 아닌가 추측된다.(保井克己, 『滿洲の民族と言語』p.63)
周代에는 이처럼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三國時代에 魏나라가 비로소 滿洲 지방을 征伐하자, 구체적으로 이 지방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며, 이때에는 滿洲 지방에 살던 東北夷를 肅愼이라고 부르지 않고 挹婁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池內宏은 「肅愼考」에서 中國 古典上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正體를 歷史的으로 考證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中國人의 地理的 知識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同一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周代의 肅愼 이래 歷史에 쓰이던 명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肅愼(Suk-chin)-周代
朱申(Su-shin)-前漢代
挹婁(Dyūr)-後漢·三國時代
徹兒赤(Dzur-chi)-唐代
朱里眞(Jur-chin)-宋代·元代
女眞(Jur-chin)-明代
女直(Jur-chi)-明代
奴兒眞(Nyur-chin)-淸代
朝鮮이란 말도 肅愼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오늘날 Tungus語에서 Sokze(n), Sokcen이나 蒙古語에서 Juksen은 ‘禮’를 가리키는 말이다. 言語學的으로는 이러한 말들을 肅愼의 對應語로 들 수 있으나, 그 직접적인 관계는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滿洲 지역에는 일찍부터 여러 계통의 民族이 들어와 살다가 移動하였기 때문에 古代의 肅愼 이래 女眞族이 출현하기까지 적어도 몇 차례의 民族移動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S. M.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147~169) 古肅愼氏와 淸王朝를 세운 女眞族을 同一한 種族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參考文獻≫
『春秋左傳』卷12 昭公 9年條.
『史記』卷1「五帝本紀」帝舜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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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井克己, 『滿洲の民族と言語』1982, 第一書房.
S. M.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註 043
東牟山 : 學界에서 異說이 많았던 東牟山의 位置는 1949年 8月 以後 中國學者들이 展開한 敦化縣 一帶의 發掘 결과 敦化縣治의 敖東城인 것으로 밝혀졌다.
<참조>
『舊唐書』渤海靺鞨傳 註 14)
東牟山
東牟山의 位置에 대하여는 『資治通鑑』玄宗 開元 元年條 胡三省注에는 『新唐書』「地理志」(실은 「安祿山傳」)을 引用하여 ‘天門嶺在土護眞河北三百里’라 하고 있다. 土護眞河는 熱河省 老哈河인 바 唐軍에 쫓긴 高句麗餘類가 이와 같은 地方으로 遁走할 수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同名異地로 볼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松井等은 輝發河와 渾河의 分水嶺에 長嶺子라는 것이 있는 바, 이것을 곧 天門嶺이라고 比定한 바 있다(「渤海國の疆域」p.411). 그러나 그 위치비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津田左右吉의 敦化縣說(「渤海考」pp.123~124), 和田淸이 비정한 지금의 老爺山脈 中의 北甑說(「渤海國地理考」p.62 및 p.74) 등으로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1949年 8月 이후 中國學者들의 渤海國 古蹟發掘이 적극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이 東牟山은 현재의 敦化縣治의 敖東城 一帶인 것으로 比定되어 거의 定說化되고 있다. 이것은 敦化城에서 南으로 5km 地點인 六頂山에서 渤海王國 第3代 文王 大欽茂의 第2女 貞惠公主의 墓와 그 墓에서 出土한 墓碑 등에 비추어 보아, 이 地域이 『新唐書』渤海傳에 上京龍泉府로 遷都하기 이전 渤海王國 初期의 首都로 되어 있는 이른바 ‘舊國’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 中國學者들의 일치된 見解인 것이다(金毓黻,「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pp.75~78;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p.298; 王承禮,「吉林敦化牧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pp.575~580 및 p.584;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pp.208~209).
≪參考文獻≫
『資治通鑑』卷210「唐紀」26 玄宗 開元 元年條.
金毓黻, 「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考古學報』1956年 2期.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考古』1961年 6期.
王承禮, 「吉林敦化牡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考古』1962年 11期;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社會科學戰線』1979年 3號.
松井等,「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註 044
泥河 : 泥河의 位置에 대하여는
①『三國史記』「新羅本紀」祇摩尼師今 14年條:秋七月〔靺鞨〕又襲大嶺柵 過於泥河
②『三國史記』「新羅本紀」慈悲麻立干 11年條:春 高句麗與靺鞨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
③『三國史記』「新羅本紀」照知麻立干 3年條: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爾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斬首千餘級
④『三國史記』「新羅本紀」照知麻立干 18年條:秋七月 高句麗來攻牛山城 將軍實竹出擊泥河上 破之
라는 記事가 있다.
이상의 泥河에 관한 記事 중 ①項과 ②·③項에 보이는 靺鞨은 東濊를 지칭한 것이며, ①項의 습격받았다는 大嶺柵은 ‘大嶺’이 『東國輿地勝覽』江原道 江陵大都護府 大關嶺條에 ‘俗號大嶺’으로 되어 있어 大關嶺에 設置된 新羅의 防禦構造物로 추측된다.
그리고 ②項의 高句麗와 靺鞨(東濊)의 습격을 받았다는 悉直城은 三陟이며, 何瑟羅는 江陵인 것이 定說로 되어 있다.
즉, ①項에서 東濊가 大嶺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지났다 하고, ②項에서는 悉直城 즉, 三陟을 습격받았기에 江陵民을 징발하여 泥河에 築城하였다고 하면 泥河는 江陵附近인 것이 분명하나 그 구체적인 江名은 알 수 없다. 이에 北漢江의 支流인 昭陽江으로 比定하는 見解도 있다(松井等, 「渤海國の疆域」 p.424).
한편 津田左右吉은 泥河에 관한 記事 중 ②項에 보이는 牛山城을 忠州·報恩 方面으로 比定하여 泥河를 지금의 永春·丹陽 附近을 흐르는 漢江의 上流로 比定하는 見解를 피력하였다(「長壽王征服地域考」pp.77~79).
그러나 津田左右吉의 이 比定은 먼저 新羅의 牛山城을 忠州·報恩으로 比定한 論據가 분명치 않을 뿐 아니라 泥河를 丹陽 附近의 漢江 上流로 比定할 경우 上揭泥河에 관한 『三國史記』의 記事 중 ①·②項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상은 『三國史記』에 보이는 泥河에 관한 記事인 것이나, 『新唐書』渤海傳의 渤海國과 新羅의 國境으로서의 泥河에 대하여 丁若鏞은 『我邦疆域考』 「渤海考」에서 ‘我江陵之北 泥川水也’라 하고, 이것이 곧 『三國史記』「新羅本紀」에 보이는 慈悲王이 何瑟羅(江陵)人을 징발하여 泥河城을 構築하고, 炤知王時에 高句麗·靺鞨兵을 泥河 서쪽에서 격파한 그 泥河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渤海와 新羅가 이곳을 境界로 하고 있다고 하면 襄陽 以北은 모두 渤海의 領土가 되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襄陽 以北은 則天武后의 末年에 渤海領土에 들어갔다가 玄宗의 天寶以後에 鐵關 以南을 다시 新羅에서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景德王 16年에 朔庭郡(今安邊)·泉井郡(今德源) 및 屬縣의 이름도 고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鐵關이라고 하는 地名은 『東國輿地勝覽』咸境道 德源都護府 古蹟條에 ‘在府北十五里 石築 周一千四百三尺’이라는 防禦構築物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松井等은 『三國史記』「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 『古今郡國志』의 ‘自新羅泉井郡 至柵城府 凡三十九驛’이라는 記事에 의거하여 渤海와 新羅의 境界를 新羅의 泉井郡인 현재의 德源으로 단정하고, 『新唐書』渤海傳에 兩國의 國境으로 되어 있는 泥河는 德源 附近의 河川으로 보아, 德源과 그 北인 永興間의 2~3河川 中 가장 큰 永興傍의 龍興江으로 推定한 바 있다(앞의 논문, pp.422~423).
泥河에 대하여 丁若鏞은 『三國史記』「新羅本紀」에 보이는 記事를 검토하여 이를 江陵 북쪽의 泥川水로 比定하고, 『新羅書』渤海傳의 泥河도 同一地點으로 보아 그 變遷을 설명하였던 것이나, 松井等은 『三國史記』「新羅本紀」에 보이는 泥河와『新唐書』 渤海傳에 보이는 兩國의 境界地로서 泥河를 다른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泥河가 德源 附近의 河川이라는 松井設에 대하여 津田左右吉은 『三國史記』聖德 20年의 ‘徵何瑟羅道丁夫二千 築長城於北境’이라는 記事를 引用하면서도 그 地點을 밝히기 어려운 점을 설명하고, 東海岸에서 安邊 附近의 南大川과 그 北의 高原 및 永興 附近의 德之灘·龍興江·咸興의 城川江 中에서 新羅의 朔庭郡인 安邊 附近의 南大川이 그 거리로 보아 가장 무난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新羅北境考」pp.326~329).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 「新羅本紀」1 祇摩尼師今 14年條; 卷3「新羅本紀」3 慈悲麻立干 11年條·照知麻立干 3年·18年條; 卷37 「地理志」所引 『古今郡國志』 『東國輿地勝覽』卷44 江原道 江陵大都護府 山川 大關嶺條; 卷49 咸境道 德源都護府 古蹟條.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長壽王征服地域考」·「新羅北境考」『朝鮮歷史地理』1卷,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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