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駐華代表團 團長

전민족이 애타게 기다리는 해방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日本이 항복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國內進入作戰을 위해 수 년간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그 결실을 보기 바로 직전에 일본이 급작스럽게 항복한 것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임시정부가 일제의 항복을 알게 된 것은 사실 8월 10일이었다. 임시정부는 8월 13일 광복군 제 2지대장 李範奭을 光復軍 國內挺進軍 總司令官으로 임명, 8월 18일 국내로 출발시키는044044 李範奭, 〈光復軍〉( 《新東亞》, 1969. 4) pp. 188∼202.
金俊燁, 《長征―나의 光復軍 시절―》(나남, 1987) pp. 41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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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8월 17일부터 제 39차 臨時議政院 會議를 소집하여 入國問題를 토의했다. 여기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金九 주석이,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 앞에 정부를 내어 바칠 때까지 현상태로 가는 것이 옳다”는 강경한 주장에 의해 臨時議政院과 臨時政府는 모두 현 진영 그대로 환국한 후 국민의 총의에 의해 재조직하기로 하고 중국에서의 현실수습, 환국준비 등을 모두 國務委員會에 위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8월 22일에는 김구 주석이 中國國民黨 吳鐵城 비서장을 방문하여 共產黨 세력의 신장 방지, 臨時政府의 즉시 正式承認을 요청했다.045045 《資料韓國獨立運動》I, p. 460.
崔鍾健 譯, 《大韓民國臨時政府文書輯覽》 (知人社, 1976) 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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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 24일에는 蔣介石 總統에게 공한을 보내,

① 同盟各國에 재차 臨時政府를 승인토록 제의하고 최단시간 내 실현시켜 달라.
② 국내 질서가 혼란하니 신속히 美軍 當國과 협상하여 臨政要人이 入國할 수 있게 해 달라.
③ 中國 함락지구의 韓僑를 위무하고 國內同志와 상호 연락하기 위하여 中國 沿海 各地에 機構를 설치함이 필요하다. 그 연락망을 조직하는데 협조해 달라.
④ 敵軍 중 韓籍士兵을 무장과 함께 光復軍에 보내 달라.
⑤ 수복지구 軍政長官에게 韓僑 중 敵에 붙어 惡行을 한 자가 없지 않으니 잘 구별하여 선한 僑民을 보호해 달라.
⑥ 重慶 居住 韓僑를 우선 歸國시켜 달라.
⑦ 이상의 것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華幣 3億元을 撥借해 달라046046 《資料韓國獨立運動》I, pp. 460∼462.닫기

는 요청을 했다. 위의 ③項이 바로 駐華代表團을 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蔣介石은 대체로 이에 동의했고, 그에 따라 광복군을 확대하는 작업은 李靑天·金學奎 등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중국에서는 미국 정부의 의사라며 중경에 있는 臨時政府와 光復軍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는 통첩이 왔다. 그리고 중국 각 戰區 사령관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발하여 우리 光復軍의 무장을 회수해 갔다.
개인 자격의 귀국이라는 소식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매우 분노하여 걸어서라도 임시정부의 간판을 메고 가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임시정부의 환국만큼 또 중요한 것이 당시 400만으로 추정되는 在中僑胞들의 보호·구제문제와 日本軍으로 징용되었다가 중국에서 포로가 된 10여 만의 동포 청년들을 중국 측으로부터 받아들여 광복군으로 편성하는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와 계속하여 외교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특히 심각한 것은 만주의 상황이었으니 중국 땅에서 벌어진 오랫동안의 반일독립운동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韓僑들이 일본 난민과 동등하게 취급당하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33년 이후로 臨時政府와 滿洲와의 직접적인 연락은 거의 끊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직접 만주로 가서 한교들을 보호해 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韓國光復軍 총사령부 설립 제 5주년을 맞이하는 9월 17일에는 臨時政府 주최로 중국 정부의 동북 지방 행정책임자들 20여 명에 대한 환송회를 개최하면서, 金九와 朴賛翊은 번갈아 東北韓僑의 보호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047047 위의 책 pp. 487∼488.닫기
그리고 9월 26일 金九와 朴賛翊은 蔣介石을 방문하여 전후수습책 7개 항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①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
② 民選의 정식 民主政府를 수립토록 지원.
③ 400만 僑胞 중 악질친일분자를 제외하고는 관용을 베풀어 달라.
④ 中國國民黨과 韓國獨立黨 간의 대표 파견.
⑤ 韓籍 士兵은 무장해제 후 光復軍에 편입.
⑥ 重慶 僑民의 귀국 조치.
⑦ 中國 화폐 3억원 차관.

등이었다.048048 위의 책 pp. 467∼468.닫기 이와 같이 韓僑問題는 여러차례에 걸친 臨時政府의 외교적 노력에 의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어서 김구는 10월 7일 중국의 吳鐵城 비서장에게 ‘韓國臨時政府의 還國에 즈음하여 중국측에 諸般支援을 요청하는 公凾’을 보내면서, 그 중 넷째 항에서 ‘重慶에 남아있는 우리 臨時政府의 人員과 僑民들의 뒷일을 잘 처리하기 위하여 朴賛翊과 閔石麟 두 同志를 파견하여 貴黨 및 貴政府와 긴밀히 연락하고 상의하여 僑民의 還國問題와 각종 業務를 처리하도록 하겠아오니 이를 支援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049049 《大韓民國臨時政府文書輯覽》p. 167.닫기 이에 따라 10월 19일에 임시정부는 韓國駐華代表團을 별도로 설치하고 朴賛翊을 團長, 閔石麟을 대표로 임명하였다050050 《資料韓國獨立運動》I, p. 476.닫기
임시정부의 요인들 가운데 金九·金奎植·李始榮·金尙德·柳東說·嚴恒燮 등 제 1진이 11월 23일, 제 2진은 12월 1일에 각기 上海를 떠나 환국했다. 그러나 朴賛翊은 1945년 11월 1일부터 정식으로 駐華代表團의 사무를 시작하면서 還國의 대열에 낄 수가 없었다. 朴賛翊이 駐華代表團의 團長을 맡게 된 것은 前述했듯이 중국 외교부와의 공식적인 접촉은 趙素昂이 外務部長으로서 담당했지만, 實權을 장악하고 있는 국민당 요인들과의 교섭은 모두 박찬익에 의해 실무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찬익 만큼 국민당 요인들과 오랜 교분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며, 그는 또 청년 시절 申圭植을 따라 손문의 北伐에 참여했었기에 국민당 요인들로부터 北伐同志로서의 예우를 받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박찬익은 임시정부 귀국 후에 중국과의 연락, 교포들의 귀국문제를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10월부터 僑胞에 대한 宣撫工作을 시작했다.051051 拙稿, 〈大轉民國臨時政府 驻華代表團에 대하여―資料紹介를 겸하여―〉( 《慶熙史學》14, 1987) pp. 817∼820.닫기 즉 중국을 華北·華中·華南 3지역으로 나누어 韓僑宣撫團을 조직하여 각지의 韓僑를 조사·구호했다. 그리고 그 3지역의 韓僑宣撫團 단장으로는 각각 李光·李象萬·李靑天을 임명하였다. 韓僑宣撫團은 처음에는 臨時政府 國務委員會 직속으로 설치되었지만 임시정부의 귀국 후에는 박찬익이 단장으로 있는 駐華代表團의 지도 감독을 받도록 하였다.
주화대표단에 소속되었던 宣撫團과 그 分團 및 僑民會를 보면 다음과 같다(1946. 4. 1 現 在).052052 위의 논문 p. 823.닫기
〈표 1〉 韓國臨時政府 駐華代表團及 宣撫團暨分團及 僑民會一覽
名稱負責人地址備考
駐華代表團朴賛翊重慶蓮花池前街四號 
華南區宣撫團李靑天南京市太平路一四四號趙時元代
華中區宣撫團李象萬開封新興街三號 
華北區宣撫團李光北平東單樓鳳樓九號 
華北區韓僑宣撫團天津分團李忠模天津秋山街十六號團長尹柱福
華北區韓僑宣撫團靑島分團趙敬淵靑島台東八號德合鐵尺敞 
華北區韓僑宣撫團太原分團智一萬太原新城街十一號 
華北區韓僑宣撫團平綏路分團李慈海◯◯◯◯市舊城雲華池後 
華北區韓僑宣撫團大同分團李同植  
華北區韓僑宣撫團石家莊分團池成沃  
華南區韓僑宣撫團上海分團鮮于赫上海北四川路新鄕街路一號 
華南區韓僑宣撫團武漢分團權楊武漢陽樓賢寺 
天津韓僑會金賛亨天津秋山街十六號 
上海僑民團鮮于赫上海北四川路新鄕街路一號 
河內僑民團田成和河內市朝陳街七一號 
廣州韓僑協會崔宗昊廣州沙面中興路三號 
開封韓僑協會朴泰禮開封新興路街三號 
東北大韓民團羅金湧長春東北行營收轉 
大同韓人會申大吉大東縣城內 
海南島韓人民聯合會金元植海南島海上 
爪哇朝鮮人民會崔浩善吧城之經荷令一號 
北平韓僑會金恩遠北平東單樓鳳樓九號 
臨時政府東北代表部崔明植長春東北行營轉 
塘沽韓僑會文武弘河北塘沽 
太原韓僑會李元吉太原城內 
色頭韓僑會 色頭城內 
그리고 1945년 11월 1일부터 정식으로 創設된 大韓民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의 組織系統을 보면 다음 〈표 2〉와 같다.053053 위의 논문 p. 826.닫기
또한 駐華代表團의 인원일람표를 보면 다음 〈표 3〉과 같다.054054 위의 논문 pp. 825∼826.닫기
〈표 2〉大韓民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系統
駐華代表團은 1946년 4·5월 경 重慶으로부터 그 위치를 南京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이어 1947년 1월 1일부터는 그 명칭을 韓國駐華代表團으로 변경하고 1948년 8월 10일까지 그 임무를 계속했다. 2년 10개월에 걸친 駐華代表團의 활동은 400만에 달하는 韓僑의 현황파악에서부터 保護·處遇改善·農資金의 賃貸·送還·進學·財產處理·犯法韓人問題 그리고 광복군의 훈련 및 귀국문제, 信託統治反對運動에 이르기까지 그 노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055055 위의 논문 p. 824.닫기 이것은 代表團의 초기 활동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1946년 4월 1일자로 박찬익이 김구에게 보고한 〈大韓民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報告書〉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였는지 대강은 짐작이 되고 있다.056056 위의 논문 참조.닫기
박찬익은 임시정부가 쓰던 蓮花池 청사에 駐華代表團을 설치하고 임시정부의 서무국장 林義鐸을 위원장으로 하여 귀국 위원회를 조직하고 韓僑들의 재산 보호와 귀국 문제에 주력했다. 그리고 백방으로 노력해 6억 元의 자금을 마련해 그 경비로 조달했는 바 그 결과 重慶에 남은 임시정부의 가족들 100여 명을 1946년 1월에 귀국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박찬익은 김구가 떠나면서 韓國獨立黨 중국 총지부가 성립되고 그 집행위원장이 되었지만 많은 간부들이 귀국하게 되어 동년 3월 다시 임원진을 개편하여 黨의 조직을 정비했다.057057 崔鍾健, 《臨時政府文書輯覽》p. 206.닫기
〈표 3〉 韓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 人員一覽
職務姓名備考
團長朴賛翊政府任命
代表李靑天政府任命
 閔石麟政府任命
顧問鄭逸庵本團任命
參議申桓 
秘書處長金恩忠政府任命
英文秘書黃舜同本團任命
韓文秘書金貞淑本團任命
華文秘書唐乃◯本團任命
文書科長  
科員金東傑本團任命
 胡俊卿本團任命
宣傳科長  
科員閔泳淑本團任命
科員  
外事科長  
科員  
科員  
軍務處長李靑天 
交際科長  
科員  
科員  
經理科長  
科員  
科員  
僑務處長閔石麟暫兼
調查科長  
科員  
運輸科長  
科員  
科員  
總務處長閔泳珠政府任命
會計科長  
科員黃永植本團任命
科員  
庶務科長  
科員李鐸本團任命
 許志秀本團任命
 羅晟憲本團任命
專員申松植政府任命
警衛分隊長金◯◯本團任命
大韓民國 二十八年四月一日 韓國 臨時政府駐華代表團製
또한 박찬익은 駐華代表團 직속으로 光復軍을 소속시키고 그 훈련 및 배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당시 光復軍 總司令部의 조직은 다음 〈표 4〉와 같다.058058 拙稿, 〈大韓民國臨時政府 駐華代團表에 대하여 ―資料紹介를 겸하여―〉p. 824.닫기
한편 朴賛翊은 李靑天과 협의하여 한국 출신의 日本軍兵土의 광복군 편성과 귀국 문제를 논의하는가 하면 各地의 僑民團으로 하여금 우리 동포의 명부록을 작성하여 현황을 파악하게 하고, 구호가 필요한 자를 조사해서 중국 행정원의 善後救濟總署를 통해 구호토록 하였던 것이다.
또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韓奸의 실태도 파악했으며, 특히 中國 하급 관헌의 횡포로부터 동포를 보호하기 위해 집단 마을을 형성하여 집중 관리케 하는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駐華代表團은 그러는 동안 중국정부가 重慶에서 南京으로 천도하자 1946년 4·5월 경 대표단도 남경으로 이전했다. 동 6월에는 각 지의 韓僑宣撫團을 駐華代表團의 각지 辦事處로 개편하여 교포의 보호 및 본국 송환에 박차를 가하였다.
〈표 4〉 韓國光復軍總司令部暨各部屬官佐一覽
區 別階 級職 別姓 名通訊處備 考
總司令部正將總司令李靑天南京太平路一四四號 
副將參謀長李範奭上海 
 顧問閔石麟重慶蓮花池前街四號 
參將參議金恩忠同上 
參將參議汪祖繼上海 
參將參議宋壽昌重慶南岸 
參將參議李集中同上 
參將參議張興上海 
正領參議金紫東上海正待船返國
參將參謀處長李俊植南京太平路一四四號 
參將政訓處長   
正領副官處長李錫華南京太平路一四四號 
正領經理處長陳作楷同上 
正領軍醫處長張運漢同上 
正領軍法室長   
副領警衛隊長韓聖◯重慶土橋正待船返國
國內支隊副將支隊長吳光心漢城 
第一支隊參將支隊長蔡允凱重慶南岸正待船赴京
第二支隊參將支隊長盧泰俊開封卽赴京
第三支隊參將支隊長金學奎徐州卽赴京
北平辦事處參將處長崔用德北平 
駐渝辦事處參將處長金恩忠重慶蓮花池前街四號
1946년 가을 박찬익은 李光과 함께 만주 奉天으로 갔다. 이어서 박찬익의 요청으로 金學奎도 갔는데,059059 金學奎, 〈白波自叙傳〉( 《韓國獨立運動史硏究》2, 韓國獨立運動史硏究所, 1988) p. 606.닫기 金學奎는 만주에서 성장하여 연고자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었다. 만주는 해방이 되자 독립지도자들이 속속 귀국해 버리고, 일본군이 물러나자 소련군·중앙군(國民黨 소속)·중공군이 차례로 닥치면서 지배자가 바뀌게 되는 대혼란의 상태였다. 그리고 그 이전 일본인들의 이간책으로 만주족과 漢族들은 韓僑들을 일본인 이상으로 적대시하고 있어, 한인들은 지도자도 없이 생명과 재산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박찬익이 奉天에 도착하자 韓僑들은 수 없이 몰려나와 태극기를 들고 그의 도착을 환영했다. 이제는 그들의 지도자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가 奉天에서 활약한 것 중의 하나는 중국으로부터 교포들에게 營農資金을 받아 준 것이다. 그 당시 박찬익과 절친한 陳果夫가 南京에서 中國農民銀行의 總裁로 있었는데 이 은행은 중국의 中央銀行과 마찬가지로 農民銀行券이라는 화폐를 발행하는 대은행이었다. 박찬익은 이 陳果夫에게 연락하여 營農資金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를 보고, 그 세부의 실무는 朴賛翊의 3남인 朴英俊에게 맡아보게 했다. 박영준은 당시 駐華代表團 東北總辦事處의 涉外主任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박영준은 農民銀行 長春支店과 절충하여 代表團東北總辦事處에서 추천 보증하는 韓僑農民에 한해서 종자값과 추곡이 날 때까지의 식량을 대어주며 그들이 생산한 쌀은 중앙군의 군량미로 바칠 것을 합의하여 그러한 조건으로 6억 元의 융자를 받아낸 것이다.
朴賛翊 父子는 또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동포들이 中國의 國·共內戰으로 길이 막히고 노자가 없어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고는, 李光·金學奎·李白建 등과 함께 중국 당국자에게 강권하다시피하여 1,000여 명의 동포들을 天津까지 군용비행기로 수송하여 다시 배로 본국까지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朴賛翊이 단장으로 활약한 이 駐華代表團은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고 1948년 8월 10일 해체되었다.

註 044
: 李範奭, 〈光復軍〉( 《新東亞》, 1969. 4) pp. 188∼202.
金俊燁, 《長征―나의 光復軍 시절―》(나남, 1987) pp. 411∼441
註 045
: 《資料韓國獨立運動》I, p. 460.
崔鍾健 譯, 《大韓民國臨時政府文書輯覽》 (知人社, 1976) p. 159.
註 046
: 《資料韓國獨立運動》I, pp. 460∼462.
註 047
: 위의 책 pp. 487∼488.
註 048
: 위의 책 pp. 467∼468.
註 049
: 《大韓民國臨時政府文書輯覽》p. 167.
註 050
: 《資料韓國獨立運動》I, p. 476.
註 051
: 拙稿, 〈大轉民國臨時政府 驻華代表團에 대하여―資料紹介를 겸하여―〉( 《慶熙史學》14, 1987) pp. 817∼820.
註 052
: 위의 논문 p. 823.
註 053
: 위의 논문 p. 826.
註 054
: 위의 논문 pp. 825∼826.
註 055
: 위의 논문 p. 824.
註 056
: 위의 논문 참조.
註 057
: 崔鍾健, 《臨時政府文書輯覽》p. 206.
註 058
: 拙稿, 〈大韓民國臨時政府 駐華代團表에 대하여 ―資料紹介를 겸하여―〉p. 824.
註 059
: 金學奎, 〈白波自叙傳〉( 《韓國獨立運動史硏究》2, 韓國獨立運動史硏究所, 1988) p. 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