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朝鮮義勇軍과의 關係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武漢에서 건립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조선혁명자연맹으로 구성된 統一戰線體인 朝鮮民族戰線聯盟의 무장력이었으나150150 〈朝鮮義勇隊 成立宣言〉(《特高月報》 1939년 1월호) p. 112.닫기 한편으로는 중국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 배속된 부대로서 그 지휘 감독을 받고 있었다.151151 〈昭和 17年度に 於ける 社會運動の 狀況〉 p. 964 및 〈朴英俊志士 證言〉 앞의 책 p. 146.닫기 중국국민당정부는 조선의용대의 선전효과를 노려 조선의용대를 華南戰線의 각지에 분산시켜 활동하게 하였으나, 이것은 의용대원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조선의용대는 중국항일전에의 참가를 목표로 하는 부대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싸우는 무장대오152152 조선의용대 창립당시의 3대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一. 動員所有華朝鮮革命力量 參加中國抗戰.
二. 爭取日本廣大的軍民 發動東方各弱小民族 共同打倒日本軍閥.
三. 推進朝鮮革命運動 爭取朝鮮民族的 自由解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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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는 ‘力量의 分散에서 集中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조선의 독립에 보다 직접적인 기여를 할 기회를 모색하게 되었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의 확대간부회의는 종래의 선전임무에서 벗어나 직접 전투에 참가할 것과 활동지역을 조선인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화북과 화중지역으로 옮기고 敵 後方事業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153153 樸孝三, 〈兩年來本隊工作的總結〉(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40) p. 820.
《항전별곡》 p. 304, p. 311.
葛赤峰, 앞의 글(秋憲樹 엮음, 앞의 책 1) P. 114.
義, 〈朝鮮革命史話〉(같은 책, 1946) p. 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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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정은 민족혁명당 시절부터 북상항일을 주장해 온 청년대원들이 국민당지구에서의 활동을 바라온 김원봉에게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이었을 뿐 아니라154154 당시 북상을 결행한 조선의용대원과 김원봉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당시 중공당원(후에 전향)이자 김원봉의 비서였던 司馬璐(《鬪爭十八年》)는 김원봉이 젊은 청년과 대립관계였으며, 중국공산당은 김원봉을 불신했고, 의용대원의 북상은 김원봉을 속여넘김으로써 가능했다고 주장했으며, 이같은 입장은 李庭植·森川展昭.鐸木昌之 등에 의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pp. 114∼115 및 《광활한 대지우에서》 pp. 238에서는 중경의 의용대 총부가 팔로군 중경판사처의 周恩來·陳家康 등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의용대 제 3지대의 북상을 협의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문정일은 필자와의 전화인터뷰(1990년 8월)에서 김원봉의 관련설을 완강히 부인했다.닫기 실질적으로 조선의용대가 중국국민당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분산되어 있는 병력을 이리저리 이동시키면서 중국국민당에 대해서는 병력소재에 관한 허위보고를 제출했고155155 司馬璐, 앞의 책 p. 179.닫기 결국 중국국민당 지역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조선의용대가 사라진 것을 알고 蔣介石은 조선의용대에 대한 수색을 명령156156 〈朝鮮義勇隊의 分裂〉(《特高月報》 1942년 3월호) p. 211.닫기했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김원봉과 중국국민당의 영향력을 벗어난 조선의용대원들은 1941년 7월경 太行山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에 가입했고, 자신들의 부대를 새로이 朝鮮義勇隊 華北支隊로 개편했다. 조선의용대의 북상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과 민족해방에 대한 목적’은 같았지만 서로 다른 조직에 속한 관계로 잘 단결되지 못했던 1·2·3지대의 성원들이 이런 결함을 극복하고 ‘통일되고 단합된 전투적 대오’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57157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p. 128.닫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구성은〈표 4〉와 같다.
〈표 4〉 朝鮮義勇隊 華北支隊의 편성상황
* 출전 : 《外事月報》 1944년 3월호 附表.
그러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아직도 명목상으로는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조선의용대본부의 지휘를 받는 부대였다. 이는 화북지대의 성원들이 김원봉의 영도를 거부하고 중국공산당 해방구로 넘어왔지만, 아직까지 김원봉 등 국민당 지역에 머물러 있는 조선의용대의 잔여세력을 통일전선의 중요한 대상으로 보고 있었고, 共同行動을 취하는데 유리한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는 조직적 관계를 구태여 깰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북지대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의용대의 잔여세력은 1942년 5월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韓國光復軍에 편입되어 그 第一支隊로 개편되고 말았다.158158 朴成壽, 《獨立運動史硏究》(1980) p. 362.닫기 이제 조선의용대란 명칭은 더 이상 통일전선의 의미를 담는데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에 조선의용대 화복지대 측은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될 때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하였고, 1944년 2월에는 華中支隊가 설치되었다. 조선의용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159159 《外事月報》 1944년 3월호 附表.닫기
〈표 5〉 朝鮮義勇軍의 편성상황
새로운 조선의용군은 화북조선독립동맹 중앙상무위원회 군사부에 배속되었고, 조선의용군의 司令은 독립동맹의 軍事部長인 朴孝三이 겸임하게 되었다.160160 〈武亭將軍 一代記〉 (《新天地》 1946년 3월호) p. 226.닫기
華北朝鮮靑年聯合會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간에는 공개적인 조직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양자는 실질적으로 일체관계였다. 조선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두 단체의 청년들은 “共通目的 達成에 매진한다”는 데 쉽게 의견일치를 보았고, “義勇隊는 그대로 聯合會에 가입하고 연합회 역시 의용대에 참가하여 이를 강화”하기로 하였다.161161 〈洪性杰에 대한 抗敵 및 治安維持法違反事件 判決〉(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별집 2) p. 363.닫기 이들은 조선의용대의 조직체계와 병행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 晋冀豫邊區支會를 결성하고 화북지대의 1·2·3隊와 병행하여 각각 1·2·3分會를, 各 分隊에는 支會의 小組를 구성했다. 한편 독립동맹이 결성된 뒤 華中分盟의 성립은 조선의용군 화중지대의 건립과 동시에 이루어졌다.162162 〈解放日報〉 1944년 1월 28일 ‘朝鮮獨立同盟華中分盟 首次大會 成立義勇隊華中支隊’.닫기
이 밖에 山東分盟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第 1隊와, 晋察冀分盟은 第 2隊와 晋冀豫分盟은 第3隊와 각각 조응하여 결성되었다.163163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조직상의 내용관계를 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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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은 독립동맹 군사부에 소속되어 왔으나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조선의용군이 “一黨所屬의 軍隊라는 口實”을 없애고 “보다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하여”164164 民主主義民族戰線 編, 《朝鮮解放年報》(1946) p. 146.닫기 독립동맹 군사부와 분리하여 조선의용군 사령부를 별도로 설치했다. 이때의 總司令에는 武亭이 副司令에는 朴孝三과 朴一禹가 취임했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관계는 그들 자신의 설명대로 “두 단체는 하나라고 보아도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둘이 우연히 합쳐진 것이 아니라, 하나가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즉 “실천의 역할상의 필요”에 의해서 나누어 진 것으로서 “독립동맹은 정치단체이고 조선의용군은 그의 武裝實戰勢力”이었다. 실제로 “동맹원은 동시에 의용군이었고, 의용군인은 동시에 동맹원”165165 尹逸模, 앞의 논문 p. 196.닫기이었으며, 의용군에 “參軍하고서 入盟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166166 金枓奉, ‘獨同과 義勇軍’ (〈現代日報〉 1946년 3월 25일).닫기 또한 독립동맹의 參謀組織이라 할 수 있는 조직부나 선전부에 배속된 사람들도 조선의용군의 일반대원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167167 金學鐵, 《激情時代》 下, p. 418.닫기 이와 같이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하나의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양자의 관계는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하는 독립동맹이 자신의 정치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한 무장력으로 조선의용군을 육성·발전시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168168 《朝鮮民族解放鬪爭史》 p.328.닫기 그러나 조선의용군은 그 명칭에서 보듯이 中國抗日戰에 참가하는 國際義勇部隊였다. 독립동맹이 조선의용군이란 무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통일된 民族解放軍의 급속한 건립”을 강령의 한 항목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日帝의 패망은 독립동맹이 이 강령의 실현을 추진하기에는 너무나 빨리 왔다.

註 150
: 〈朝鮮義勇隊 成立宣言〉(《特高月報》 1939년 1월호) p. 112.
註 151
: 〈昭和 17年度に 於ける 社會運動の 狀況〉 p. 964 및 〈朴英俊志士 證言〉 앞의 책 p. 146.
註 152
: 조선의용대 창립당시의 3대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一. 動員所有華朝鮮革命力量 參加中國抗戰.
二. 爭取日本廣大的軍民 發動東方各弱小民族 共同打倒日本軍閥.
三. 推進朝鮮革命運動 爭取朝鮮民族的 自由解放.
註 153
: 樸孝三, 〈兩年來本隊工作的總結〉(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40) p. 820.
《항전별곡》 p. 304, p. 311.
葛赤峰, 앞의 글(秋憲樹 엮음, 앞의 책 1) P. 114.
義, 〈朝鮮革命史話〉(같은 책, 1946) p. 164∼165.
註 154
: 당시 북상을 결행한 조선의용대원과 김원봉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당시 중공당원(후에 전향)이자 김원봉의 비서였던 司馬璐(《鬪爭十八年》)는 김원봉이 젊은 청년과 대립관계였으며, 중국공산당은 김원봉을 불신했고, 의용대원의 북상은 김원봉을 속여넘김으로써 가능했다고 주장했으며, 이같은 입장은 李庭植·森川展昭.鐸木昌之 등에 의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pp. 114∼115 및 《광활한 대지우에서》 pp. 238에서는 중경의 의용대 총부가 팔로군 중경판사처의 周恩來·陳家康 등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의용대 제 3지대의 북상을 협의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문정일은 필자와의 전화인터뷰(1990년 8월)에서 김원봉의 관련설을 완강히 부인했다.
註 155
: 司馬璐, 앞의 책 p. 179.
註 156
: 〈朝鮮義勇隊의 分裂〉(《特高月報》 1942년 3월호) p. 211.
註 157
: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p. 128.
註 158
: 朴成壽, 《獨立運動史硏究》(1980) p. 362.
註 159
: 《外事月報》 1944년 3월호 附表.
註 160
: 〈武亭將軍 一代記〉 (《新天地》 1946년 3월호) p. 226.
註 161
: 〈洪性杰에 대한 抗敵 및 治安維持法違反事件 判決〉(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별집 2) p. 363.
註 162
: 〈解放日報〉 1944년 1월 28일 ‘朝鮮獨立同盟華中分盟 首次大會 成立義勇隊華中支隊’.
註 163
: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조직상의 내용관계를 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註 164
: 民主主義民族戰線 編, 《朝鮮解放年報》(1946) p. 146.
註 165
: 尹逸模, 앞의 논문 p. 196.
註 166
: 金枓奉, ‘獨同과 義勇軍’ (〈現代日報〉 1946년 3월 25일).
註 167
: 金學鐵, 《激情時代》 下, p. 418.
註 168
: 《朝鮮民族解放鬪爭史》 p.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