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군기의 파벌 형성과 주도권의 변화

창군과 경비대 시기에 있어서의 군 주요지휘관의 충원과정에서 나타난 초기 한국 군부의 형성과 성격은, 그것이 창군 이후의 군 내부와 이후 한국 정치의 전개에 미치는 영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미 앞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미 군정은 조선경비대의 간부 충원을 미 군정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자들에 의존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의 군인들이었다. 초기 한국군의 출신계열과 그로 인한 파벌은 네개의 범주로 묶어 구분해 볼 수 있다. ① 중국군·광복군 출신, ② 일본군, ③ 만주군 출신, ④ 분단과정에서 월남한 북한(이북)출신 장교들이 그것이다.
우선 미 군정에 의한 한국군 창설의 초기 단계에서 주요 지휘관의 위치에 오른 것은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자들이었다.060060 許墇, 〈초기 군사제도와 軍部의 구조형성〉 pp. 388~389.닫기 이들은 중국 내의 각종 군벌 또는 국민당 國府軍이나, 김구가 주도한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소속하여 일본군·중공군과 싸운 장교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각 군벌의 군관학교와 蔣介石이 세운 黃埔軍官學校 및 洛陽分校 韓人 特別班 출신들이며061061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편, 《韓國戰爭史》 第1卷, p. 254와 陸軍本部, 《創軍前史》(陸軍本部, 1980) p. 266.닫기, 정규 군사지식보다는 일본군에 대항하는 소규모 게릴라식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광복군 출신자들은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맥을 잇는다는 점에서 남한에서는 유일한 정통성을 갖는 군 경력자들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의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으로 해방 후 주체적으로 군대를 창설하려는 의지가 좌절되었다. 광복군계는 일본군·만주군계가 주류인 경비대 창설에 대하여 친일파들과 같이 군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여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1946년 6월 말 귀국한 광복군의 주력은 경비대를 ‘미국의 용병’으로 보고 경비사관학교에의 입교를 거부하였으나, 유동열이 통위부장으로 취임(1946.9.12)한 후에는 경비사관학교 7기와 8기로 다수 입교062062 안진, 〈미군정기 국가기구의 형성과 성격〉(박현채 外, 《解放前後史의 認識》 3, 한길사, 1987) p. 191.닫기하게 된다. 1946년 12월 23일에는 광복군 3지대장 출신 宋虎聲이 경비대 총사령관에 등용됨으로써 유동열과 함께 광복군 출신이 군 수뇌진을 구성하게 되었다.063063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편, 《韓國戰爭史》 第1卷, p. 382.닫기 그러나 이들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에 연대장급 이상 진출한 중국군·광복군 출신은 아무도 없었으며, 국방사령부·경비대 총사령부의 실무진은 일본육사·만주군 그리고 영어 수준과 학력이 높은 학병 출신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표 3〉은 창군기의 주요 중국군·광복군 출신자 입대 상황이다.
〈표 3〉 창군기의 주요 중국군·광복군 출신 입대 상황
이 름해방전 계급한국군 경력해방전 군경력
기별계급중요 직위
李範奭중앙군 참장
광복군 정장
  국방장관雲南 講武堂, 光復軍 國內 挺進軍總司令官
柳東悅광복군 정장  통위 부장일본 육사 15기, 임시정부 초대 참모총장
金弘壹중앙군 참장
광복군 참장
특임중장군단장貴州 講武堂, 광복군 참모장
宋虎聲중앙군 대장
광복군 참장
2기준장경비대 총사령관河南 軍官講習所, 광복군 지대장
崔德新중앙군 중좌
광복군 대좌
3기중장군단장황포군관학교 10기
安椿生중앙군 소좌
광복군 대좌
8특중장군 부사령관낙양군관학교 분교 한인특별반
趙介玉중앙군 대좌
화북의용군 참장
4중령호국군 여단 참모장保定 軍官學校 4기
출처 : 韓鎔源, 《創軍》 pp. 64~66에서 정리.
중국군 및 광복군 출신 계열의 몰락 이후 군 요직을 장악한 것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학병 및 지원병 등 일본군 경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해방 직전까지 총 128명이 졸업 또는 재학중었던 일본 육사 출신 장교들은064064 최초로 일본 육사에 입교한 한국인은 1883년의 11기 사관생도 박유굉이었고, 26기 洪思翊과 29기의 李垠(英親王)이 임관후 중장까지 최고위로 승진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대좌(대령)급으로서 26기의 이응준·申泰英 등이 있었다(李基東, 《悲劇의 軍人들-日本 陸士 出身의 歷史》 pp. 277~288).닫기 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에서 중국군·연합군과의 실전을 통하여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체계적인 군사지식과 전술을 습득하고 있어서, 해방 후 미 군정에 의하여 가장 우수한 군자원으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초창기 군 수뇌진과 실무진에 다수 진출하여 미 군정의 창군 정책에 참여함으로써 한국군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계열이다. 일본 육사 출신의 대표자들로는 미 군정 국방사령부의 한국인 고문을 지낸 이응준을 비롯하여 金錫源·이종찬·채병덕 등이 있다.
학병 출신은 1941년의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인 1943년 10월 1일 ‘대학생 징집 연기 임시특례법’에 의하여 징집된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군 경력자들로 총 4,385명이 일본군에 복무하였다.065065 학병 또는 학도병이라고도 호칭되는데, 원래 명칭은 ‘학도 특별지원병’이다(張昌國, 《陸士卒業生》, 中央日報社, 1984, p. 38).닫기 학병 출신들은 강제 징집된 경우가 많았고 일본군에서 탈출, 연합군이나 광복군측에 귀환한 자들도 있었으므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에 비해서 친일이라는 비난의 소지가 덜 하였다. 또한 높은 학력에 영어 구사 능력으로 미 군정 실무자·고문관들의 인정을 받아 창군기의 군사영어학교와 정부 수립후 조선경비사관학교 7기 특별반으로 진출하였다.066066 위의 책 pp. 39~42.닫기 그러나 군사적 자질이 부족하고 종전 당시에 상위 계급자가 없어 미 군정기에는 하위 장교급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대표적인 학병 출신으로는 金桂元·張都暎·韓信 등을 들 수 있다.
지원병 출신은 1938년 2월 2일 일제의 ‘육군 특별지원병령’에 의하여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들이다. 일제에 의하여 동원된 지원병은 총 17,664 명이었는데, 이들이 해방 이후 대거 군에 참여하였다. 지원병 출신자들은 중국전선 등지에서의 실전경험은 있었으나 학병 출신자들에 비하여 학력이 낮았으며, 상명 하복의 수직적 명령계통을 엄수하는 등 군국주의적 기질이 강하였다. 이들은 창군 시기 하사관·사병으로 입대 후 장교로 승진한 자들이 많았다.067067 위의 책 pp. 44~47.닫기 대표적인 지원병 출신자로는 宋堯讚·崔慶錄·金載圭 등을 들 수 있다. 앞의 〈표 4〉는 창군기의 주요 일본군 계열 출신 인사이다.
〈표 4〉 창군기의 주요 일본군 출신 입대 상황
이름출신지해방전 군경력한국 군경력
출신 구분계급기별계급중요 직위
李應俊평남일본 육사 26기대좌군영중장육군참모총장(초대)
申泰英서울〃 〃특임육군참모총장(3대), 국방장관
金錫源〃 27기8특소장사단장
李鍾贊〃 49기중좌특임중장육군참모총장(6대), 국방장관
蔡秉德)평남〃 〃소좌군영육군참모총장(2, 4대)
李龍文〃 50기특임소장전남지구 경비사령관
金貞烈서울〃 54기대위공군중장공군참모총장(초대), 국방장관
劉載興충남〃 55기군영합참의장, 국방장관
李亨根〃 56기대장육군참모총장(9대), 합참의장
丁來赫전남〃 58기소위군영7특중장군사령관
金桂元경북학도병군영대장육군참모총장
張都暎평북
李厚洛경남소장주미 무관
崔泓熙서울군단장
徐鍾喆 1기대장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盧載鉉 3기〃 〃
崔慶錄충북지원병준위군영중장육군참모총장
宋堯讚충남
金載圭경북 2기군단장
李哲熙  소장방첩부대장
출처 : 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李基東, 《悲劇의 軍人들》 pp. 277~288 에서 정리.
② 학병 출신은 張昌國, 《陸士 卒業生》 pp. 38~44에서 정리.
③ 지원병 출신은 張昌國, 위의 책 pp. 44~47과 韓鎔源, 《創軍》 pp. 58~62에서 정리.
만주군 출신들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청의 마지막 황제인 溥儀를 옹립하여 세운 만주국에서 복무한 군인들을 말하는데, 이들 중 장교는 대개 2년제 봉천 군관학교와 4년제 신경 군관학교 등을 졸업한 사람들이다. 특히 봉천·신경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자들은 東京의 일본 육사에 유학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 받았다. 이들은 해방당시 최고 중좌까지 승진했으나, 대부분은 위관급이었다. 만주군 출신의 대표자들로는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고문으로 발탁되었던 원용덕과 丁一權·박정희 등이 있다.068068 이 부분은 위의 책 pp. 18~19 와 Se-Jin Kim, op. cit., pp. 52~54 참조.닫기
만주군 출신자들은 대개 북한(이북)이 고향이었으나 북한이 공산화됨에 따라 이남으로 월남하여 입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의 특성으로는 일반적으로 당시 만주군 속에 혼재되어 있던 5족(韓·日·滿·蒙·漢族) 간의 경쟁 속에서 생존능력이 배양되었고 만주군 복무시 일본군 고문관 제도에 숙달되어 있었으므로 미군정의 고문관 제도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정 시기에 일본군 출신들과 함께 군내 고위직에 두드러지게 진출하고 있었다.069069 張昌國, 위의 책 pp. 18~20.닫기 〈표 5〉는 창군기의 주요 만주군 출신자 입대 상황이다.
〈표 5〉 창군기의 주요 만주군 출신 입대 상황
이 름출신지해 방 전 경 력해방후 한국군 경력
출신구분계 급입대기별계 급중 요 직 위
元容德서 울만군 군의병과중 좌군 영중 장헌병사령관
丁一權함 북봉천군관학교 5기대 위대 장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白善燁평 남〃9기중 위대 장
李周一함 북신경군관학교1기대 위7 특 군사위원회 의장
朴林恒함 남8 특중 장군사령관
朴正熙경 북〃2기중 위2 기대 장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李翰林함 북군 영중 장군 사령관
姜文奉만 주〃5기소 위 
李圭東경 북군무원 2 기준 장경리감
金昌龍함 남관동군 헌병대伍 長3 기중 장육군 특무부대장
출처 : 張昌國, 《陸士 卒業生》 pp. 18~23과 徐炳旭, 〈朴正熙의 滿軍人脈〉(《月刊 朝鮮》, 1986.8) p. 405에서 정리.
네번째로 중요한 분파는, 1948년의 14연대 반란사건 이후에 군부 내에서 부각된 북한 출신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군부 내에서 가장 전투적인 반공 우익세력이었으며, 후일 이승만에 대한 적극적인 충성세력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창룡을 들 수 있다.
미 군정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 계열의 군 출신자들 가운데에서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들을 경비대 간부로 충원함으로써 친미·반공적인 한국군의 모체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창군 시기에 있어서 미군정이 다양한 전력의 소유자들을 군 간부로 충원함으로써 군부 내 파벌 형성의 외적요인을 조성하였다. 동시에 창군 과정에서의 군 간부 출신의 다양성은 군부 내에서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군부 내적 파벌구조가 형성되는 요인이 되었다.

註 060
: 許墇, 〈초기 군사제도와 軍部의 구조형성〉 pp. 388~389.
註 061
: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편, 《韓國戰爭史》 第1卷, p. 254와 陸軍本部, 《創軍前史》(陸軍本部, 1980) p. 266.
註 062
: 안진, 〈미군정기 국가기구의 형성과 성격〉(박현채 外, 《解放前後史의 認識》 3, 한길사, 1987) p. 191.
註 063
: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편, 《韓國戰爭史》 第1卷, p. 382.
註 064
: 최초로 일본 육사에 입교한 한국인은 1883년의 11기 사관생도 박유굉이었고, 26기 洪思翊과 29기의 李垠(英親王)이 임관후 중장까지 최고위로 승진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대좌(대령)급으로서 26기의 이응준·申泰英 등이 있었다(李基東, 《悲劇의 軍人들-日本 陸士 出身의 歷史》 pp. 277~288).
註 065
: 학병 또는 학도병이라고도 호칭되는데, 원래 명칭은 ‘학도 특별지원병’이다(張昌國, 《陸士卒業生》, 中央日報社, 1984, p. 38).
註 066
: 위의 책 pp. 39~42.
註 067
: 위의 책 pp. 44~47.
註 068
: 이 부분은 위의 책 pp. 18~19 와 Se-Jin Kim, op. cit., pp. 52~54 참조.
註 069
: 張昌國, 위의 책 pp.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