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 1~2 공화국 시기의 파벌 형성과 주도권의 변화

1946년 1월 한국군 창설 당시 5,453명에 불과하였던 병력은 1958년에는 72만명으로 증가하였다.070070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편, 《國防史》 2, p. 327, 330.닫기 이같이 한국군이 해방 이후 불과 10여 년만에 132배의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 기간 중의 전시 병력 수요 때문이었다. 국군은 창군 이후 한국전쟁 기간 중의 전시 동원체제를 통하여 비약적으로 팽창함으로써 군부 충원의 다양성과 양적 확대로 인하여 파벌이 형성되었고, 파벌 간의 갈등과 군의 정치화 현상을 포함한 군 위상의 변질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군부의 양적 성장 과정과 함께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군에 대한 분리 지배 방침으로 인하여 군부 내에서 파벌이 심화되었다.
미 군정이 종식되고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유동열·송호성 등 광복군 출신 군지도층은 모두 군수뇌진에서 밀려났다.071071 許墇, 〈초기 군사제도와 軍部의 구조형성〉 p. 405.닫기 이들은 짧은 기간 경비대를 주도하였지만 군 내부에서의 권력투쟁에서 제일 먼저 밀려난다. 그 이유를 김세진은 이들이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못하고 서구적 사고방식·영어 구사력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미국 군사고문단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072072 Se-Jin Kim, The Politics of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pp. 43~45.닫기 또다른 주요한 요인으로는 김구와 이승만 사이의 권력투쟁에 있었다. 정치에서의 군의 잠재적 역할을 중시한 이승만은 정부수립과 그의 대통령 당선 이후 김구 계열의 군 간부를 배제하고 군 요직에 젊고 다루기 쉬운 장교들을 임명함으로써 군부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광복군 출신 계열은 김구 몰락 이후 제일 먼저 군부 내에서의 주도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승만은 중국군·광복군 계열을 배제한 이후 일본 정규군의 정예분자였던 일본 육사 출신들의 군사 능력 활용과 이들을 통한 중국계의 제거를 기도하였다. 한국전쟁 기간 중의 군사적 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이들에게 의존하였다. 또한 이들이 군 요직에 있는 동안에는 부산 정 치파동 시기의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의 구직업주의적인 입장에서와 같이, 한국군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군부의 정치적 활용을 시도한 이승만은 이들을 오히려 장애물로 인식하고, 군 수뇌진을 만주군 출신 간부들로 대체시켰다.073073 Ibid., p. 49.닫기
만주군 출신은 일본군 계열 대신에 만주군 출신을 군 내부에서의 지탱점으로 삼으려던 이승만의 정치적 의도와 결부되어 1952~1959년의 기간 중 이승만의 신임과 총애를 받게 된다. 한편 이들은 만주사변을 전후한 만주 지역의 정치적 환경과 비정규전 중심의 군사훈련의 영향으로 민주주의 이념에 정반대되는 정치적 정향을 띠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한국 군부내의 분파주의나 정치음모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북한 출신 장교들은 1948년의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에 군부 내에서 부각된 분파였다. 이들은 군부 내에서 가장 전투적인 반공 우익세력이었으며, 이승만에 대한 적극적인 충성세력이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1948~1959년 기간 중 바로 이같은 북한 출신이나 만주군 출신을 기용하여 군부 내에 그의 정치기반을 조성하고자 하였다.074074 Ibid., pp. 56~57.닫기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창룡·정일권·白善燁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한국전쟁을 계기로 하여 파벌 대립이 일시 진정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분리 지배 방침과 군부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대립으로 전후에 파벌 갈등이 재연되었다. 부산 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종찬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자 4월혁명에 이르기까지 〈표 6〉과 같이, 백선엽·정일권·李亨根 등이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교대로 연임한다. 그리하여 군부는 백선엽을 중심으로 한 西北派(평안도파)·정일권을 중심으로 한 東北派(함경도파)·이형근을 중심으로 한 中南部派(이남파)로 분열·대립하였다.075075 한용원, 《한국의 軍部政治》 p. 171.닫기
이처럼 군부 내 주도권 장악을 둘러싼 세 분파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동북파가 김창룡의 이간질로 인하여 피해를 입게 되자 동북파의 許泰榮 대령이 1956년 1월 김창룡을 암살하게 된다.076076 위의 책 p. 172.닫기 이 같은 양상을 통하여 당시 군부 내 파벌 갈등의 심각상을 엿볼 수 있다. 김창룡사건을 계기로 자숙하던 군부는 일본군 지원병 출신 송요찬 장군이 1959년 2월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일본군 지원병 출신들이 득세하게 되자, 중남부파는 다시 만주군 출신 비주류파·일본 육사 출신파·일본군 지원병 출신파로 갈리게 되었다.077077 위의 책 pp. 172~173.닫기
〈표 6〉 1950~60년대 육군참모총장 및 합참의장(1952~1960)
육군 참모 총장합참 의장
육군 참모 총장합참 의장
역대성명재임 기간역대성명재임 기간
7대백선엽52.7.23~54.2.13.   
8대정일권54.2.14~56.6.26.초대이형근54.2.17~56.6.26.
9대이형근56.6.27~57.5.17.2대정일권56.6.27~57.5.17.
10대백선엽57.5.18~59.2.22.3대유재흥57.5.18~59.2.22.
11대송요찬59.2.23~60.5.22.4대백선엽59.2.23~60.5.31.
출처 : 육군본부, 《육군발전사》 제2권(육군본부, 1970), 〈부록 2 연대표〉의 통수계통과 韓鎔源, 《創軍》 p. 209 에서 정리.
2 공화국 하에서의 군부의 파벌 구조는 4월혁명을 전후한 整軍派의 출현으로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정부 수립과 함께 경비대 체제로부터 국군 체제로 전환되면서 장교단의 숫자가 1년여 사이에 3배로 증가하여 군 人事분야의 적체현상078078 한용원, 〈군부의 정치개입과 그 내부의 파벌〉(《廣場》, 1991 여름) p. 128.닫기이 일어났다. 張昌國에 의하면 경비사 5기생은 대령을 7~8년간 달게 되었고, 육사 8기생은 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하는 데 4년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는 8년간이 소요되었다079079 張昌國, 《陸士 卒業生》 pp. 133~150.닫기고 한다.
이러한 군부의 인사 적체 현상에 대하여 무지했던 장면 정부가 ‘20만명의 감군’ 선거 공약에 따라 1960년 10만명을 감군080080 민주당 정부 하에서의 감군은 1960년 12월부로 29,100명의 2개 사단 해체로 종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2천명의 장교가 전역 조치되었다(육군본부, 《육군발전사》 제2권, 육군본부, 1970, p. 321, pp. 341~342).닫기시키려 하자 장교들은 군부의 제도적 이익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을 뿐 아니라 생계에 대한 불안의식이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자유당 시기부터 군부의 정치적 도구화 현상과 장면 정권에 의한 군부의 집단이익(corporate interest)이 위협받는 상황 하에서 정군파에 의한 정군운동이 전개된다. 4월혁명의 충격이 군부에 파급되어 3.15부정선거에 관련된 군 고위층을 숙청하려는 육사 8기생(영관급) 중심의 정군파가 형성081081 姜昌成, 《일본/한국 軍閥政治》(해동문화사, 1991) pp. 347~356.닫기됨으로써 또다른 군부 내의 파벌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박정희 소장은 1960년 5월 2일 군에 부정선거를 지령한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의 퇴진을 요구함으로써 소장층의 정군운동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金炯旭에 의하면, 정군운동이 군부에 확산되어 가자 박정희는 金東河·李周一·金潤根 등 만주군 출신 비주류파와 蔡命新 등 민간인 출신 경비사 5기 및 金鍾泌 중심의 육사 8기 정군운동 세력을 쿠데타 주도세력으로 전환시켜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082082 金炯旭. 朴思越, 《金炯旭 회고록》 제1부: 5·16 秘史(아침, 1985) pp. 28~43.닫기고 한다.
그러므로 5·16쿠데타 주도 세력083083 이 부분은 한용원, 〈韓國軍의 派閥構造와 民軍關係〉(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주최 제3회 민군관계 웍샵 발표논문, 1992. 5.1) pp. 4~6 참조.닫기은 권력 핵심부의 주변에 있으면서도 정치권력 지향의 성격을 가졌던 분파를 기본으로 하여 ① 만주군 출신 중 서북파나 동북파에 가담하지 못한 중남부 출신 비주류파와, ② 인사에 불만이 컸던 경비사 5기 중 박정희와 개인적 친분이 두터웠던 자들, ③ 그리고 육사 8기 정군파 세력이었다. 동시에 ① 정군파와 만주군 출신 비주류파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파벌주의, ② 진급적체 현상의 심화에 따른 경비사 5기 및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한 불만의 증대, ③ 장면 정권의 10만 감군계획과 관련하여 장교단의 제도적 이익 손상 우려, ④ 박정희를 비롯한 ‘말썽장교’ 예편계획을 위요한 정군파 장교들의 위기의식 고조 등의 추진요인(push out factor)이 군부의 정치권력 추구와 정치 개입에의 의지를 촉발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국가권력의 장악을 위하여 5.16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이 군부 내에서 권력 핵심부의 주변에 있던 정치권력 지향의 파벌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창군기 및 1·2공화국 군부의 파벌구조가 갖는 특성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군부 외적구조의 측면에서는, 남한을 친미 반공체제로 수립하려는 차원에서의 미 군정의 한국군 창설 방침에 따라 이에 부합되는 다양한 출신의 군 간부를 충원하였던 데에서 군부 내의 파벌 형성에 원인을 제공하였다. 정부수립 후 1공화국 시기에는, 이승만과 자유당에 의한 군의 정치적 활용을 목적으로한 주관적 통제가 군부 내의 파벌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공화국 시기에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비대화된 군을 감군하려는 민주당의 시도가, 당시의 사회적 혼란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집단이익의 위기의식이 커진 군부 내의 공감대 속에서 정군파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 기도를 촉진시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군부 내적구조의 측면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군의 외적요인과 더불어 군부 내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싼 분파 대립이 파벌구조를 가중시켰다고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구직업주의 성향의 군인들도 있었지만, 자유당 시기의 정치 군인들이나 5·16쿠데타 주도세력들과 같이 구직업주의가 아니라 신직업주의의 입장에 선 권력 지향의 파벌 세력이 군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거나 장악하고자 기도하였던 것이다.

註 070
: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편, 《國防史》 2, p. 327, 330.
註 071
: 許墇, 〈초기 군사제도와 軍部의 구조형성〉 p. 405.
註 072
: Se-Jin Kim, The Politics of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pp. 43~45.
註 073
: Ibid., p. 49.
註 074
: Ibid., pp. 56~57.
註 075
: 한용원, 《한국의 軍部政治》 p. 171.
註 076
: 위의 책 p. 172.
註 077
: 위의 책 pp. 172~173.
註 078
: 한용원, 〈군부의 정치개입과 그 내부의 파벌〉(《廣場》, 1991 여름) p. 128.
註 079
: 張昌國, 《陸士 卒業生》 pp. 133~150.
註 080
: 민주당 정부 하에서의 감군은 1960년 12월부로 29,100명의 2개 사단 해체로 종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2천명의 장교가 전역 조치되었다(육군본부, 《육군발전사》 제2권, 육군본부, 1970, p. 321, pp. 341~342).
註 081
: 姜昌成, 《일본/한국 軍閥政治》(해동문화사, 1991) pp. 347~356.
註 082
: 金炯旭. 朴思越, 《金炯旭 회고록》 제1부: 5·16 秘史(아침, 1985) pp. 28~43.
註 083
: 이 부분은 한용원, 〈韓國軍의 派閥構造와 民軍關係〉(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주최 제3회 민군관계 웍샵 발표논문, 1992. 5.1) pp. 4~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