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사군의 설치와 구성

 한의 고조선 공략에 따라 나타난 결과는 한의 직접통제를 전제로 한 漢四郡의 설치였다. 종래 한사군 관련 연구는 대부분 위치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을 뿐 그 성격과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심도있게 검토되지 못하였다. 이는 위만조선의 붕괴를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여타의 모든 정치체의 소멸로 이해하는 선입관과, 이를 대신하여 설치된 樂浪郡으로 대표되는 한군현의 실체가 보다 과장된 데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붕괴는 중국세력과의 갈등해소 방식에 대한 위만조선 지도부의 의견차이에 따른 정권재편이라는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비록 기존의 정치형태가 중국의 직접 지배형태인 군현체제로 재편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존 토착세력에 의해 유지되었고, 또한 토착세력의 반발에 의해 낙랑군을 제외한 나머지 3군은 곧 폐지되거나 중국내로 이동함으로서 결국 축출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한편 고조선의 중심지문제와 관련된 논의의 연장으로서 이들 한군현의 위치문제에 관해서도 요동설과 한반도설 등 많은 의견이 제기되었다.
 한은 위만조선을 멸한 후 그 영역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던 지역에 臨屯郡·眞番郡을 설치하였으며 다음해에는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이에 대해≪史記≫朝鮮傳에는 한 무제가 元封 3년(기원전 108)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군이름은 보이지 않는다.280280≪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닫기 그런데≪漢書≫武帝本紀에는 4군의 명칭이 낙랑·임둔·현도·진번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른바 한사군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 있는 셈이다. 한편≪한서≫지리지에는 낙랑·현도의 2군만 나타나 있고,≪한서≫五行志에서는 원봉 6년조에 “전에 두 將軍이 조선을 평정하여 3郡을 두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당대 자료에 나타나 있는 군현 개설내용이 서로 상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사기≫의 다른 기록에 한군현 관련 명칭이나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위만조선 공략과정과 투항한 위만조선 지배층의 전후 처리내용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차이가 있다. 즉 이같은 기록상의 차이는 과연 한군현이 후속사료에 나타나는 것처럼 실제로 설치되었고 직접 통제방식에 의한 편제가 이루어졌는가에 의문을 갖게 한다. 다시 말하면≪한서≫등에 나타난 내용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기 보다는 후대에 중국적 天下支配 관념을 바탕으로 위만조선의 지역명칭을 그대로 한군현으로 연결시켜 재구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해된다.281281서영수, 앞의 글, 267쪽.닫기
 실제로 한사군은 사료상에 약 26년 동안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진번의 경우≪한서≫昭帝本紀에 始元 5년(기원전 82)에 詹耳郡과 함께 폐지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임둔도 이 때에 함께 파해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282282≪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濊.닫기 그리고 현도군의 경우도 소제 元鳳 6년(기원전 75)에 그 위치를 이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짧은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군현을 설치하여 해당지역을 통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진번·임둔군의 경우 앞서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던 주변의 정치세력인 임둔·진번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려고 했던 계획이 마치 설치된 것처럼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기왕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들 군현의 설치는 하나의 圖上作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83283申采浩,≪朝鮮上古史≫上.닫기 또한 현도군은 고구려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고구려세력의 지속적인 반발에 의해 결국 축출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한사군을 중국의 직접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고조선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가 오히려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 한사군으로 통칭되는 고조선지역의 중국군현 가운데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위만조선 중심지의 군현 이외에는 실질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현도군의 경우 고조선과의 관계보다는 중국내의 군현으로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군현의 통치구조는 郡의 長으로 太守가 존재하였으며 그 밑에 丞을 두고, 변두리 군에는 長史를 두었다. 규모가 큰 군의 경우 몇 개의 속현을 다스리는 都尉를 두고 縣에는 만 호 이상의 경우 縣令, 그 이하의 경우 縣長을 두었고 그 밑에는 丞과 尉를 두었다. 사료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들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임명된 이후에도 현지에 부임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군현민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구려가 요동군을 침공하여 帶方令을 죽이고 樂浪太守의 妻子를 사로잡았다고 하는 사실은284284≪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닫기 낙랑과 대방의 최고 책임자들이 자신들의 부임지가 아닌 요동지역에 머물고 있었으며, 따라서 군현통제의 내용 또한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초기에는 요동군으로부터 관리의 파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기에는 중국계 주민들이 군의 속리직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85285權五重,≪樂浪郡硏究≫(一潮閣, 1992), 72쪽.닫기 또한 낙랑군 내부의 사정도 복잡하여 土人인 王調가 난을 일으켜 낙랑태수를 자처한 사건이 있었는데,286286≪後漢書≫권 76, 列傳 66, 循吏 王景.닫기 후한 때 公孫氏가 요동을 장악하였던 시기(189∼238)에는 별도세력에 의해 이 지역이 통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한사군의 위치문제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였는가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어 이에 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특히 진번의 위치에 관해서는 한사군의 명칭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진번 위치와 관련하여 다기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在北說과 在南說로 크게 나뉘어져 전통사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287287韓百謙은≪東國地理誌≫에서 이를 貊國舊地 즉 강원도 춘천부로 이해하였고, 李瀷은≪星湖僿說類選≫에서 眞番을 요하 이서 지역으로 보았다. 한편 洪萬鍾은≪筍五俧≫에서 진번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丁若鏞은≪我邦疆域考≫에서 재북설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柳得恭의≪四郡誌≫에 계승되었고,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일인학자 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압록강 이북지역에서 찾았으며, 稻葉岩吉은 충청도지역에서, 今西龍은 충청·전북 등지에서 진번의 위치를 찾았다. 이병도는 대방군 영토에서 이를 찾아 재남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도유호는 진번이 현재의 함경도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가 예군 남려의 반란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창해군 영토의 임둔군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같이 진번군의 위치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한사군 설치 이전에 연의 침입을 받았던 진번, 조선과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던 소읍으로서의 진번, 임둔 및 한과 직접 교역코자 하였던 ‘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다. 따라서 진번의 위치가 어디였느냐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는 여러 가지로 비정될 수 있는데,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현재의 평양인가 요동지역인가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國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44쪽).닫기

註 280
≪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註 281
서영수, 앞의 글, 267쪽.
註 282
≪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濊.
註 283
申采浩,≪朝鮮上古史≫上.
註 284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註 285
權五重,≪樂浪郡硏究≫(一潮閣, 1992), 72쪽.
註 286
≪後漢書≫권 76, 列傳 66, 循吏 王景.
註 287
韓百謙은≪東國地理誌≫에서 이를 貊國舊地 즉 강원도 춘천부로 이해하였고, 李瀷은≪星湖僿說類選≫에서 眞番을 요하 이서 지역으로 보았다. 한편 洪萬鍾은≪筍五俧≫에서 진번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丁若鏞은≪我邦疆域考≫에서 재북설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柳得恭의≪四郡誌≫에 계승되었고,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일인학자 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압록강 이북지역에서 찾았으며, 稻葉岩吉은 충청도지역에서, 今西龍은 충청·전북 등지에서 진번의 위치를 찾았다. 이병도는 대방군 영토에서 이를 찾아 재남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도유호는 진번이 현재의 함경도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가 예군 남려의 반란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창해군 영토의 임둔군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같이 진번군의 위치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한사군 설치 이전에 연의 침입을 받았던 진번, 조선과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던 소읍으로서의 진번, 임둔 및 한과 직접 교역코자 하였던 ‘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다. 따라서 진번의 위치가 어디였느냐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는 여러 가지로 비정될 수 있는데,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현재의 평양인가 요동지역인가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國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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