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

 신라의 軍鎭은 처음에는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내륙의 요지에 설치되었다. 武烈王 5년(658)에 삼척에 설치된 北鎭은 靺鞨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宣德王 3년(782)에 平山에 설치된 浿江鎭은 北邊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海賊의 퇴치나 해상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해안의 요지에 군진이 설치되었다. 興德王 3년(828)에 완도의 淸海鎭, 흥덕왕 4년에 남양의 唐城鎭, 文聖王 6년(844)에 강화의 穴口鎭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이들 군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패강진과 청해진이다.
 패강진은 이전의 북변 수비의 중심이었던 大谷城을 승격시키면서 民戶를 이주시켜 군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한 것이다.091091浿江鎭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李基東,<新羅下代의 浿江鎭>(≪韓國學報≫4, 1976 ; 앞의 책, 208∼231쪽).
木村誠,<統一新羅の郡縣制と浿江地方經營>(≪旗田巍古稀紀念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方東仁,<浿江鎭의 管轄範圍에 關하여>(≪盧道陽博士古稀記念文集≫,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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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은 聖德王 34년(735)이었다. 이후 예성강 이북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지역, 즉 패서지역의 개척이 시작되었다. 景德王 7년(748)에 예성강 일대에 4개 군현을 설치하고, 이어 경덕왕 21년에 그 북쪽 지방에 6개 군현을 증설하였다. 헌덕왕대에 다시 북방으로 진출하여 대동강의 남쪽 지역에 3개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浿西地域의 개척이 상당히 진행된 이후에 패강진이 설치되었다. 패강진은 예성강 이북으로 진출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북변 방어의 관문인 平山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은 예성강 이북 대동강 이남의 광범위한 지역의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였다. 패강진은 신라의 서북 변경지대의 방어를 담당하는 국경 수비의 本營이었다.
 패강진의 장관은 頭上大監으로 6두품의 관직이었다. 이 두상대감은 9세기 이후의 금석문에는 都護로 개칭되어 나타난다. 그 다음의 관직은 大監으로 7인이었는데, 그 관등은 太守와 동일하였다. 따라서 대감은 패강진 관할 아래 있는 郡의 太守로 믿어진다. 그 이외에도 頭上弟監·弟監·步監이 각각 1인, 少監 6인이 있었다.
 한편 패강진이 설치되면서 그 곳에 옮겨진 민호는 軍戶的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패강진에는 屯田兵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 지방에 토착하는 항구적인 地方軍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092092李基白,<高麗 太祖時의 鎭>(≪歷史學報≫10, 1958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232쪽).닫기 결국 패강진에 이주된 민호는 평화시에는 농경에 종사하는 개척농민이었고, 외적 침입시에는 무장하여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었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이 패강진은 변방 지역의 개척과 수비라는 이중의 임무를 수행하는 군진이었다. 패강진은 10停이나 5州誓와 같은 단순한 軍團이 아니라 州·小京 등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즉 패강진은 예성강 이북 대동강 이남의 광범위한 변방지역을 관장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다.093093李基東, 앞의 책, 221∼222쪽.닫기
 패강진의 軍官 조직은 민호를 둔전병적인 지방군으로 편제하여 지배·지휘하는 군사적 조직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조직을 중심으로 토착민 사이에 강력한 군사적 지배·지휘체계가 성립되었는데, 이 군사적 체계를 지배·지휘한 것은 물론 패강진의 여러 군관들이었다. 이들 군관들은 이러한 군사적 체계를 통하여 이 지역에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신흥 지방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094094金光洙,<高麗建國期의 浿西豪族과 對女眞關係>(≪史叢≫21·22, 1977), 137쪽.닫기
 신라 하대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때 패강진 지역은 경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이었으므로 맨먼저 중앙정부의 지배나 통제로부터 벗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만큼 이 지역에서는 중앙정부의 수탈이 비교적 적었을 것이다. 이에 당시의 많은 유민들이 이 곳으로 들어와 둔전병적 개척농민이 되어 농지를 개간하였을 것이다. 또한 패강진 지역은 당시 해상무역의 중요 거점인 예성강 하구 지대와 인접되어 있었으므로 해상세력과도 연결될 수 있는 곳이었다. 요컨대 이 지역은 경제적 활력이 넘치고, 신흥 지방세력이 대두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흥덕왕대의 일련의 개혁이 실패하고, 이어 왕위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가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9세기 후반에는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활발하게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패강진 지역에서 등장한 호족들은 대체로 패강진의 군사적 조직을 통하여 성장한 세력이었다고 추측된다. 이는 이 지역 출신의 禪師인 順之·道允·折中의 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가계는 각각 ‘家業雄豪’·‘豪族’·‘郡族’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의 호족세력임을 알 수 있다. 순지의 祖考는 ‘世爲邊將’하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패강진의 軍官職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하여 호족으로 대두하였던 것 같다. 도윤의 조고는 그 관직이 郡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절중의 아버지는 활쏘기·말타기 등 무예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으로 미루어 모두 패강진의 군관직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하여 호족으로 성장했다고 생각된다.
 패강진 출신의 호족 중에서 그 구체적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는 사례는 平山朴氏이다. 평산 박씨는 지방관으로서 명주·竹州로 이동하여 다니다가 平州(통일신라시대의 명칭은 永豊郡)에 정착하여 패강진 지역의 군사적 조직을 통하여 호족으로 성장하였다.095095평산 박씨가 호족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鄭淸柱,<新羅末·高麗初 豪族의 形成과 變化에 대한 一考察―平山朴氏 一家門의 實例 檢討―>(≪歷史學報≫118, 1988 ;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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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直胤은 패강진 관내 평주의 군관직을 맡고 있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는 고구려의 장군직인 大毛達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신라정부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리하여 박직윤의 아들인 朴遲胤의 대에 이르러 평산 박씨는 패서지역의 유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평산 박씨는 궁예에게 귀부하고, 이어 왕건과 결합함으로써 고려초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박지윤과 朴守文·朴守卿 3父子는 각각 딸을 왕건에게 納妃할 정도로 고려초의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평산 박씨와 王建家와의 연결은 왕건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왕건의 祖母인 龍女는 평주의 호족인 豆恩坫 角干의 딸이었는데, 용녀는 평산 박씨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왕건의 祖母와 父는 평산 박씨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順之의 후원세력이었다.
 평산 박씨 이외에도 패강진 지역에서 성장한 호족 중에서 왕건과 결합하여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한 경우가 많다. 먼저 태조 왕건의 王后와 夫人을 배출한 가계를 들 수 있다. 黃州皇甫氏의 皇甫悌恭은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의 딸이 神靜王后 皇甫氏이다. 신정왕후의 딸이 광종의 왕비(大穆王后)가 된 이후로 황주 황보씨는 고려초에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하였다. 貞州柳氏는 패강진 지역의 호족은 아니지만 정주가 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패강진 지역과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패강진 지역의 호족과 함께 묶어 파악해도 무방할 것이다. 정주 유씨는 神惠王后 柳氏(柳天弓의 딸)와 貞德王后 柳氏(柳德英의 딸)를 배출하였다. 태조의 부인을 배출한 호족으로 평산 박씨 다음으로 유력한 가계는 平山庾氏이다. 평산 유씨의 유금필은 왕건 휘하에서 수많은 군사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딸이 東陽院夫人 庾氏이다. 洞州金氏는 大西院夫人 金氏·小西院夫人 金氏(모두 金行波의 딸)를 배출하였다. 信川康氏는 信州院夫人 康氏(康起珠의 딸)를 배출하였다. 小黃州院夫人은 성씨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황주 황보씨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평산 박씨를 비롯하여 황주 황보씨·정주 유씨·평산 유씨·동주 김씨·신천 강씨 등 패강진 지역의 호족은 태조의 6왕후·23부인 가운데 3왕후·8부인을 배출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크게 진출하였다. 이외에도 패강진 지역의 출신으로 고려초에 활동했던 인물로는 中和金氏의 金樂·金鐵 형제, 鹽州(연안)의 尹瑄·泰評, 土山(상원)의 崔凝 등이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순지·도윤·절중 등의 선사가 이 지역 출신이다.
 이와 같이 패강진 지역의 호족은 송악의 호족인 왕건 집안과 결합하였다. 이 결합은 왕건 이전부터 시작되어 궁예치하를 거쳐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시기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패강진 지역의 호족은 왕건의 주요한 세력기반이 되었고,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요컨대 왕건과 패강진 지역의 호족세력은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주역인 동시에 고려 초기의 정치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강 이북으로부터 패강진 일대에 이르는 지역이 고려왕조의 모태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청해진은 흥덕왕 3년에 장보고에 의하여 설치되었다.096096淸海鎭과 張保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就하여―淸海鎭大使 張保皐를 主로 하여―>(1)·(2)(≪震檀學報≫1·2, 1934·1935).
李永澤,<張保皐 海上勢力에 關한 考察>(≪韓國海洋大學論文集≫14, 1979).
蒲生京子,<新羅末期 張保皐의 擡頭와 反亂>(≪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1979).
金光洙,<張保皐의 政治史的 位置>(≪張保皐의 新硏究≫, 莞島文化院, 1985).
李基東,<張保皐와 그의 海上王國>(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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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당에 가서 徐州의 武寧軍에서 30세에 小將이 되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신라인을 잡아다가 노비로 매매하는 해적들이 활동하였다. 이에 장보고는 해적을 퇴치하여 해안지역의 주민들을 보호하고 해상무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 그는 흥덕왕에게 요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그는 1만 명의 士卒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사졸은 私兵의 성격이 강하였고 실제로 왕위쟁탈전에서 祐徵(신무왕)을 지원하는 사병으로서 역할하였다.
 청해진이 설치된 이후에 장보고는 황해·남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서남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해적선의 노예무역을 퇴치하였다. 아울러 그는 신라·당·일본 3국간의 교통과 무역을 독점하여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왕자가 되었다.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당시에는 대단한 것이었고 상당히 독자적인 성격을 갖는 지방세력이었다.
 이러한 독자적인 지방세력을 배경으로 장보고는 중앙귀족과 연결하여 중앙정치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는 신라정부를 부정하고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기에는 일개 군진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라말에 지방사회에서 대두하는 호족세력의 단서를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 북진이나 당성진·혈구진을 기반으로 한 군진세력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군진들도 패강진이나 청해진과 마찬가지로 지방세력가들에게 군사력을 제공하여 주는 근거지가 되었을 것이다. 북진은 궁예가 명주로 가서 모집하여 거느렸다는 3,500명의 군사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097097李基白,<高麗京軍考>(≪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47쪽).닫기 당성진은 900년에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에 의하여 평정되어 泰封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성진의 군사력은 태봉에 흡수되어 왕건의 수군활동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혈구진의 군진세력은 일찍부터 왕건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왕건이 여러 차례에 걸쳐 羅州 방면의 정벌에 종사하여 공을 세운 것은 혈구진의 수군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098098李基白, 위의 책, 48쪽.닫기

註 091
浿江鎭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李基東,<新羅下代의 浿江鎭>(≪韓國學報≫4, 1976 ; 앞의 책, 208∼231쪽).
木村誠,<統一新羅の郡縣制と浿江地方經營>(≪旗田巍古稀紀念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方東仁,<浿江鎭의 管轄範圍에 關하여>(≪盧道陽博士古稀記念文集≫, 1979).
註 092
李基白,<高麗 太祖時의 鎭>(≪歷史學報≫10, 1958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232쪽).
註 093
李基東, 앞의 책, 221∼222쪽.
註 094
金光洙,<高麗建國期의 浿西豪族과 對女眞關係>(≪史叢≫21·22, 1977), 137쪽.
註 095
평산 박씨가 호족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鄭淸柱,<新羅末·高麗初 豪族의 形成과 變化에 대한 一考察―平山朴氏 一家門의 實例 檢討―>(≪歷史學報≫118, 1988 ; 앞의 책).
註 096
淸海鎭과 張保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就하여―淸海鎭大使 張保皐를 主로 하여―>(1)·(2)(≪震檀學報≫1·2, 1934·1935).
李永澤,<張保皐 海上勢力에 關한 考察>(≪韓國海洋大學論文集≫14, 1979).
蒲生京子,<新羅末期 張保皐의 擡頭와 反亂>(≪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1979).
金光洙,<張保皐의 政治史的 位置>(≪張保皐의 新硏究≫, 莞島文化院, 1985).
李基東,<張保皐와 그의 海上王國>(위의 책).
註 097
李基白,<高麗京軍考>(≪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47쪽).
註 098
李基白, 위의 책,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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