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 32년 (음) )

9년 봄에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하사했다.122122 6부(部)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논란이 분분하다. 먼저 유리이사금대의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 연구자가 있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222~225쪽). 일반적으로는 후대의 사실이 부회된 것으로 보는데 그것도 이사금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과(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1996, 27~37쪽) 마립간 시기로 보는 설로 크게 나누어진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599~602쪽 | 선석렬, 《신라 골품제의 성립기반과 그 구조》, 《부대사학》 11, 1987주보돈,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1992주보돈, 「신라 상고기의 통치체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한국고대사학회, 서경, 2007, 245~247쪽), 또한 성씨의 사용도 중고기 이후의 것을 상고기에 부회하여 생긴 결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1996, 10~27쪽).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참조.닫기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123123 及梁部 혹은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서는 喙部라 하였다. 6부 중에서 가장 우세한 部로서 현재의 경북 경주시 南川 이남의 남산 서북일대 혹은 皇南洞·皇吾洞 일대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中興部로 개명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이(李)였다.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124124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沙喙部로 표기되었다. 양부와 함께 6부를 주도했던 部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남천 이북 서천 이동 그리고 북천 이남 일대에 그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남천 이남의 남산 서북쪽일대로 비정되기도 한다. 사량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南山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최(崔)125125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사량부의 성을 鄭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였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126126 牟梁部 혹은 《蔚珍 鳳坪新羅碑》에는 岑喙部로도 표기되었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의 西川 지류인 毛良川 북쪽의 서형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長福部로 개칭되었다.닫기 모량(牟梁)이라고도 한다.가 되었으니 성은 손(孫)이었다.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127127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本波部로도 표기되었다. 6부 중에서 양부, 사량부 다음으로 우세했던 부로 추정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에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23년(940)에 通仙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정(鄭)128128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본피부의 성을 崔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이었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가 되었으니 성은 배(裴)였다.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129129 (940)에 臨川部로 개칭되었다.닫기가 되었으니 성은 설(薛)이었다.130130 6촌에서 6부로의 개편과정과 그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자세하다. 신라 6부의 위치와 그 시대별 변동에 대해서는 전덕재, 「신라 6부 명칭의 어의와 그 위치」,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닫기 아울러 관(官)을 설치하니 모두 17등이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湌)131131 17관등 중의 최고 관등. 伊罰干, 于伐干, 于伐湌, 角干, 角粲, 徐發翰, 舒弗邯이라고도 하였다.닫기13213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닫기, 둘째는 이척찬(伊尺湌)13313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찬(伊湌)이라고도 했다.닫기, 셋째는 잡찬(迊湌)13413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잡판(迊判), 소판(蘇判)이라고도 했다.닫기, 넷째는 파진찬(波珍湌)13513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해간(海干),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했다.닫기, 다섯째는 대아찬(大阿湌)13613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아찬에서 이벌찬까지는 오직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닫기, 여섯째는 아찬(阿湌)13713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아척간(阿尺干), 아찬(阿粲)이라고 했으며, 중아찬(重阿湌)~4중아찬(四重阿湌)까지 있었다.닫기, 일곱째는 일길찬(一吉湌)13813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닫기, 여덟째는 사찬(沙湌)13913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8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살찬(薩湌),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했다.닫기, 아홉째는 급벌찬(級伐湌)14014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9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급찬(級湌), 급복간(及伏干)이라고도 했다.닫기, 열째는 대나마(大奈麻)14114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0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나말(大奈末)이라고도 했으며, 중나마(重奈麻)~9중나마(九重奈麻)까지 있었다.닫기, 열한째는 나마(奈麻)14214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나말(奈末)이라고도 했으며, 중나마(重奈麻)~7중나마(七重奈麻)까지 있었다.닫기, 열두째는 대사(大舍)14314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한사(韓舍)라고도 했다.닫기, 열셋째는 소사(小舍)14414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사지(舍知)라고도 했다.닫기, 열네째는 길사(吉士)14514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계지(稽知), 길차(吉次)라고도 했다.닫기, 열다섯째는 대오(大烏)14614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오지(大烏지)라고도 했다.닫기, 열여섯째는 소오(小烏)14714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소오지(小烏知)라고도 했다.닫기, 열일곱째는 조위(造位)14814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선저지(先沮知)라고도 했다.닫기였다. 왕이 육부를 모두 정하고 이를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마포(麻布)를 짜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 사례했다. 이에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149149 지금 8월 보름 명절인 추석(秋夕)을 한가위라고 부른다. ‘가위’는 ‘가배’에서 전래된 것이다.닫기라 불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고 읊조려
“회소(會蘇) 회소”라 하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도 우아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소리로 노래를 만들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했다.


註 122
6부(部)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논란이 분분하다. 먼저 유리이사금대의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 연구자가 있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222~225쪽). 일반적으로는 후대의 사실이 부회된 것으로 보는데 그것도 이사금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과(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1996, 27~37쪽) 마립간 시기로 보는 설로 크게 나누어진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599~602쪽 | 선석렬, 《신라 골품제의 성립기반과 그 구조》, 《부대사학》 11, 1987주보돈,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1992주보돈, 「신라 상고기의 통치체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한국고대사학회, 서경, 2007, 245~247쪽), 또한 성씨의 사용도 중고기 이후의 것을 상고기에 부회하여 생긴 결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1996, 10~27쪽).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참조.
註 123
及梁部 혹은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서는 喙部라 하였다. 6부 중에서 가장 우세한 部로서 현재의 경북 경주시 南川 이남의 남산 서북일대 혹은 皇南洞·皇吾洞 일대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中興部로 개명되었다.
註 124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沙喙部로 표기되었다. 양부와 함께 6부를 주도했던 部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남천 이북 서천 이동 그리고 북천 이남 일대에 그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남천 이남의 남산 서북쪽일대로 비정되기도 한다. 사량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南山部로 개칭되었다.
註 125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사량부의 성을 鄭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註 126
牟梁部 혹은 《蔚珍 鳳坪新羅碑》에는 岑喙部로도 표기되었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의 西川 지류인 毛良川 북쪽의 서형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長福部로 개칭되었다.
註 127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本波部로도 표기되었다. 6부 중에서 양부, 사량부 다음으로 우세했던 부로 추정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에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23년(940)에 通仙部로 개칭되었다.
註 128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본피부의 성을 崔氏로 삼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註 129
(940)에 臨川部로 개칭되었다.
註 130
6촌에서 6부로의 개편과정과 그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자세하다. 신라 6부의 위치와 그 시대별 변동에 대해서는 전덕재, 「신라 6부 명칭의 어의와 그 위치」,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註 131
17관등 중의 최고 관등. 伊罰干, 于伐干, 于伐湌, 角干, 角粲, 徐發翰, 舒弗邯이라고도 하였다.
註 13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했다.
註 13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이찬(伊湌)이라고도 했다.
註 13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잡판(迊判), 소판(蘇判)이라고도 했다.
註 13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해간(海干),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했다.
註 13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아찬에서 이벌찬까지는 오직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註 13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아척간(阿尺干), 아찬(阿粲)이라고 했으며, 중아찬(重阿湌)~4중아찬(四重阿湌)까지 있었다.
註 13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했다.
註 13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8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살찬(薩湌),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했다.
註 140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9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급찬(級湌), 급복간(及伏干)이라고도 했다.
註 14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0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나말(大奈末)이라고도 했으며, 중나마(重奈麻)~9중나마(九重奈麻)까지 있었다.
註 142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1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나말(奈末)이라고도 했으며, 중나마(重奈麻)~7중나마(七重奈麻)까지 있었다.
註 143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2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한사(韓舍)라고도 했다.
註 144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3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사지(舍知)라고도 했다.
註 145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4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계지(稽知), 길차(吉次)라고도 했다.
註 146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5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대오지(大烏지)라고도 했다.
註 14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6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소오지(小烏知)라고도 했다.
註 148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17위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職官) 상에 따르면, 선저지(先沮知)라고도 했다.
註 149
지금 8월 보름 명절인 추석(秋夕)을 한가위라고 부른다. ‘가위’는 ‘가배’에서 전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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