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57년 11월(음) )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163163 신라 제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석씨(昔氏)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탈해는 선진 철기문화를 가지고 신라에 들어와 호공으로 대표되는 박씨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알지로 대표되는 김씨 세력과의 제휴에도 힘썼다.닫기이 즉위했다.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당시 나이가 62세였다. 성(姓)은 석(昔)이고 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었다.164164 남해왕의 큰딸로서 서기 8년에 탈해와 혼인하였다.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아로부인(阿老夫人)’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는 ‘아니부인(阿尼夫人)’으로 나온다.닫기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165165 탈해의 출신지로는 《삼국유사》 권1, 왕력에 ‘완하국(琓夏國)’·‘화하국(花夏國)’이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는 ‘용성국(龍城國)’·‘정명국(正明國)’·‘완하국(琓夏國)’·‘화하국(花厦國)’이 나온다. 일부의 중복을 감안하더라도 그 출신지가 상당히 다양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출자 내지 이동 경로에 대한 학설이 분분하다. 자세한 연구사의 검토는 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4~46쪽 참조.닫기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처음에 그 나라 왕166166 다파나국의 왕인 含達婆 혹은 含達王을 말한다.닫기여국왕(女國王)167167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 따르면, 그 나라 왕은 함달파(含達婆)이고 여국(女國)은 적녀국(積女國)을 말한다. 적녀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에 나오는 ‘여인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평범한 지신족(地神族) 계통의 여가장국(女家長國)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두진, 「신라 탈해신화의 형성기반」,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제의》, 일조각, 1999, 296쪽).닫기의 딸을 맞이해 처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이를 버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함에 넣고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맡겼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168168 서기 42년에 수로왕이 현재의 경남 김해 지방에 건국하여 532년까지 존속했던 6가야 중의 하나인 金官加耶를 말한다. 초기에 금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국이었기 때문에 本加耶라고도 하고 또는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南加耶라고도 하였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의 弁辰狗邪國과 倭人傳의 狗邪韓國은 바로 금관가야를 지칭한다. 금관가야의 역사는 《삼국유사》 권2 紀異篇에 인용되어 있는 《駕洛國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닫기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169169 금관국은 지금의 경남 김해 지방에 있었던 금관가야(金官加耶)이다. 금관가야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자세히 남아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탈해왕 즉위년조《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탈해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에게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 제사탈해왕에는 환영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난다. 가락국기에 수로왕과 탈해의 왕위 다툼이 구체적인 설화로 남은 것이나,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23년(102)조에서 석씨 세력과 수로왕이 갈등하는 것으로 볼 때 전자의 기록이 역사적 진실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닫기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170170 아진포의 위치는 경북 영일 지방(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26쪽) 혹은 감포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정중환, 《가라사연구》, 혜안, 2000, 68쪽). 그러나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와 하서리 일대가 유력하다(이형우, 《신라초기국가형성사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2000, 58~62쪽).닫기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지 39년 되는 해였다.171171 박혁거세 39년은 서기전 19년[壬寅]이다. 그런데 탈해는 서기 57년에 62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탈해가 금관국에 도래한 시기는 혁거세 39년일 수가 없다. 한편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남해왕대 혹은 古本을 인용하여 壬寅年에 왔다고 하였다. 혁거세 후의 임인년은 유리왕 19년(42년)과 파사왕 23년(102)인데 이 해도 역시 탈해의 즉위시 나이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삼국유사》의 찬자 一然은 탈해가 도래한 干支는 임인년이 아니라 하였다. 그런데 서기 57년에 6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정확하다면, 탈해는 서기전 5년 경에 도래했다고 하겠다. 한편 탈해의 도래시기를 102년(壬寅年)으로 추측하기도 한다(이덕성, 《조선구대사회연구》, 1949, 64~66쪽).닫기 이때 해변의 노모172172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는 노모의 실명으로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전하는 데 혁거세왕의 해척(海尺) 모(母)라고 한다. 아진의선에 대해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2, 정사년조에서는 《수이전(殊異傳)》을 인용하면서 촌장(村長)이라고 하였다. 아진의선을 예지와 점복을 행하는 능력을 가진 무(巫)로 보는가 하면(최광식, 「삼국사기 소재 노구의 성격」, 《사총》 25, 1981, 8~9쪽), 한기부 지역의 토착 세력이면서 혁거세왕의 제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두진, 「신라 탈해신화의 형성기반」,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제의》, 일조각, 1999, 302~303쪽).닫기가 줄을 가지고 해안으로 당겨 함173173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서는 길이가 20척 넓이가 13척인 궤짝이라 하였다.닫기을 열어 살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할미가 거두어 길렀는데, 장성하자 신장은 9척이고 풍채가 훤하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했다.
“이 아이의 성씨를 알 수 없는데 처음에 함이 도착했을 때 까치 한 마리174174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鵲集而鳴’이라 하여 까치가 떼지어 모여서 울었다고 한다.닫기가 날아 울면서 이를 따랐으니 마땅히 ‘작(鵲)’자에서 줄여 석(昔)으로 씨(氏)를 삼아야 한다.175175 昔氏를 칭하게 된 유래에 관하여,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탈해가 옛날[昔]에 남의 집을 빼앗아 자기의 집으로 삼았기 때문에 ‘昔’을 성으로 삼았다는 또다른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닫기 그리고 둘러싼 함을 열고 나왔으니 탈해(脫解)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176176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는 석씨(昔氏)로 성씨를 삼은 유래에 대해 이것 외에 ‘옛날[昔]의 내 집이라고 하면서 남[호공]의 집을 빼앗은 까닭’을 추가하였다.닫기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아 어미를 공양했는데 게으른 기색이 전혀 없었다. 어미가 말했다.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배움에 정진해 공명(功名)을 세워라.” 이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아울러 지리(地理)를 알았다. 양산(楊山) 아래 호공(瓠公)177177 호공은 혁거세에 의해 중용되어 탈해이사금 2년(58)에는 대보(大輔)의 자리까지 오르고 탈해왕대에 김알지(金閼智)를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탈해의 꾀임으로 살던 집을 빼앗긴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第四脫解王)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참조. 호공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호공이 혁거세와 같이 박씨족이었지만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天神族) 관념을 표방한데 반해 호공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곧 호공은 애초에 혁거세의 박씨 왕실과 계통이 달랐는데 박씨 왕실에 중용되면서 후대에 박씨족으로 관념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년대로라면 호공이 혁거세 38년(서기전 20)에 등장하여 탈해왕 9년(65)까지 존재하게 되어 인간의 수명으로서는 불합리한 점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호공을 개별 인물로 단정하기보다는 박씨 호공족을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할 여지도 있다(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9~50쪽).닫기의 집을 바라보고 길지라고 여겨 속임수를 내어 차지하고178178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은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탈해가 호공의 집터가 吉地임을 알고 그 집을 차지하기 위하여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몰래 묻어 두었다. 얼마 후 그 곳이 자신의 선조가 살던 곳이라 하여 돌려주기를 호공에게 청하였으나 호공이 이를 거부하자 전에 묻어 두었던 숫돌과 숯을 꺼내 보임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결과 호공의 집을 탈해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닫기 이곳에 살았다.179179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는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4탈해왕에 “其童子曳杖率二奴 登吐含山上 作石塚 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峰如三日月 勢可久之地 乃下尋之 卽瓠公宅也 乃設詭計 潛埋礪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否 爭訟不決 乃告于官 官曰 以何驗是汝家 童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而人取居之 請掘地看 從之 果得礪炭 乃取而居焉”라고 자세히 전한다.닫기 이곳은 뒤에 월성(月城)180180 신라 왕성(王城)으로서 성의 형태가 초생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월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주시 인왕동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다. 다만 파사왕대 건조된 월성은 경주시 북천(北川) 남안(南岸)의 성동동에 있었고, 인왕동의 반월성은 문무왕이 왕궁을 짓게 됨에 따라 탈해왕릉이 문무왕 20년(680)에 이장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천우, 「인왕동 왕궁의 건조시기에 대하여」, 《역사학보》 123, 1989《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1997, 72~75쪽). 월성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김낙중, 「신라 월성의 성격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27, 1998 참조.닫기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왕은]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7년에는 등용해 대보(大輔)181181 신라 초기에 관등이 생기기 이전에 국정을 총괄했던 직책이다. 탈해 이외에 탈해이사금대에 호공(瓠公)과 알지(閼智)가 대보에 임명된 사례가 있다. 고구려에서 유리왕 22년(3) 협보를 대보로 임명한 사례가 있다(《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2년조).닫기로 삼고 정사(政事)를 맡겼다. 유리(儒理)가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말했다.
“선왕182182 남해왕을 가리킨다.닫기께서 유언해 ‘내가 죽은 뒤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 위(位)를 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과인이 먼저 즉위했다. 지금은 마땅히 [탈해에게] 위를 전해야 한다.”

註 163
신라 제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석씨(昔氏)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탈해는 선진 철기문화를 가지고 신라에 들어와 호공으로 대표되는 박씨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알지로 대표되는 김씨 세력과의 제휴에도 힘썼다.
註 164
남해왕의 큰딸로서 서기 8년에 탈해와 혼인하였다.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아로부인(阿老夫人)’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는 ‘아니부인(阿尼夫人)’으로 나온다.
註 165
탈해의 출신지로는 《삼국유사》 권1, 왕력에 ‘완하국(琓夏國)’·‘화하국(花夏國)’이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는 ‘용성국(龍城國)’·‘정명국(正明國)’·‘완하국(琓夏國)’·‘화하국(花厦國)’이 나온다. 일부의 중복을 감안하더라도 그 출신지가 상당히 다양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출자 내지 이동 경로에 대한 학설이 분분하다. 자세한 연구사의 검토는 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4~46쪽 참조.
註 166
다파나국의 왕인 含達婆 혹은 含達王을 말한다.
註 167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 따르면, 그 나라 왕은 함달파(含達婆)이고 여국(女國)은 적녀국(積女國)을 말한다. 적녀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에 나오는 ‘여인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평범한 지신족(地神族) 계통의 여가장국(女家長國)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두진, 「신라 탈해신화의 형성기반」,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제의》, 일조각, 1999, 296쪽).
註 168
서기 42년에 수로왕이 현재의 경남 김해 지방에 건국하여 532년까지 존속했던 6가야 중의 하나인 金官加耶를 말한다. 초기에 금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국이었기 때문에 本加耶라고도 하고 또는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南加耶라고도 하였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의 弁辰狗邪國과 倭人傳의 狗邪韓國은 바로 금관가야를 지칭한다. 금관가야의 역사는 《삼국유사》 권2 紀異篇에 인용되어 있는 《駕洛國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註 169
금관국은 지금의 경남 김해 지방에 있었던 금관가야(金官加耶)이다. 금관가야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자세히 남아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탈해왕 즉위년조《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탈해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에게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 제사탈해왕에는 환영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난다. 가락국기에 수로왕과 탈해의 왕위 다툼이 구체적인 설화로 남은 것이나,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 23년(102)조에서 석씨 세력과 수로왕이 갈등하는 것으로 볼 때 전자의 기록이 역사적 진실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註 170
아진포의 위치는 경북 영일 지방(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26쪽) 혹은 감포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정중환, 《가라사연구》, 혜안, 2000, 68쪽). 그러나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와 하서리 일대가 유력하다(이형우, 《신라초기국가형성사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2000, 58~62쪽).
註 171
박혁거세 39년은 서기전 19년[壬寅]이다. 그런데 탈해는 서기 57년에 62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탈해가 금관국에 도래한 시기는 혁거세 39년일 수가 없다. 한편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남해왕대 혹은 古本을 인용하여 壬寅年에 왔다고 하였다. 혁거세 후의 임인년은 유리왕 19년(42년)과 파사왕 23년(102)인데 이 해도 역시 탈해의 즉위시 나이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삼국유사》의 찬자 一然은 탈해가 도래한 干支는 임인년이 아니라 하였다. 그런데 서기 57년에 6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정확하다면, 탈해는 서기전 5년 경에 도래했다고 하겠다. 한편 탈해의 도래시기를 102년(壬寅年)으로 추측하기도 한다(이덕성, 《조선구대사회연구》, 1949, 64~66쪽).
註 172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는 노모의 실명으로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전하는 데 혁거세왕의 해척(海尺) 모(母)라고 한다. 아진의선에 대해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2, 정사년조에서는 《수이전(殊異傳)》을 인용하면서 촌장(村長)이라고 하였다. 아진의선을 예지와 점복을 행하는 능력을 가진 무(巫)로 보는가 하면(최광식, 「삼국사기 소재 노구의 성격」, 《사총》 25, 1981, 8~9쪽), 한기부 지역의 토착 세력이면서 혁거세왕의 제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두진, 「신라 탈해신화의 형성기반」,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제의》, 일조각, 1999, 302~303쪽).
註 173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서는 길이가 20척 넓이가 13척인 궤짝이라 하였다.
註 174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鵲集而鳴’이라 하여 까치가 떼지어 모여서 울었다고 한다.
註 175
昔氏를 칭하게 된 유래에 관하여,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탈해가 옛날[昔]에 남의 집을 빼앗아 자기의 집으로 삼았기 때문에 ‘昔’을 성으로 삼았다는 또다른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註 176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에는 석씨(昔氏)로 성씨를 삼은 유래에 대해 이것 외에 ‘옛날[昔]의 내 집이라고 하면서 남[호공]의 집을 빼앗은 까닭’을 추가하였다.
註 177
호공은 혁거세에 의해 중용되어 탈해이사금 2년(58)에는 대보(大輔)의 자리까지 오르고 탈해왕대에 김알지(金閼智)를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탈해의 꾀임으로 살던 집을 빼앗긴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第四脫解王)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참조. 호공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호공이 혁거세와 같이 박씨족이었지만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天神族) 관념을 표방한데 반해 호공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곧 호공은 애초에 혁거세의 박씨 왕실과 계통이 달랐는데 박씨 왕실에 중용되면서 후대에 박씨족으로 관념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년대로라면 호공이 혁거세 38년(서기전 20)에 등장하여 탈해왕 9년(65)까지 존재하게 되어 인간의 수명으로서는 불합리한 점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호공을 개별 인물로 단정하기보다는 박씨 호공족을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할 여지도 있다(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9~50쪽).
註 178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은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탈해가 호공의 집터가 吉地임을 알고 그 집을 차지하기 위하여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몰래 묻어 두었다. 얼마 후 그 곳이 자신의 선조가 살던 곳이라 하여 돌려주기를 호공에게 청하였으나 호공이 이를 거부하자 전에 묻어 두었던 숫돌과 숯을 꺼내 보임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결과 호공의 집을 탈해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註 179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는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4탈해왕에 “其童子曳杖率二奴 登吐含山上 作石塚 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峰如三日月 勢可久之地 乃下尋之 卽瓠公宅也 乃設詭計 潛埋礪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否 爭訟不決 乃告于官 官曰 以何驗是汝家 童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而人取居之 請掘地看 從之 果得礪炭 乃取而居焉”라고 자세히 전한다.
註 180
신라 왕성(王城)으로서 성의 형태가 초생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월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주시 인왕동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다. 다만 파사왕대 건조된 월성은 경주시 북천(北川) 남안(南岸)의 성동동에 있었고, 인왕동의 반월성은 문무왕이 왕궁을 짓게 됨에 따라 탈해왕릉이 문무왕 20년(680)에 이장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천우, 「인왕동 왕궁의 건조시기에 대하여」, 《역사학보》 123, 1989《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1997, 72~75쪽). 월성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김낙중, 「신라 월성의 성격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27, 1998 참조.
註 181
신라 초기에 관등이 생기기 이전에 국정을 총괄했던 직책이다. 탈해 이외에 탈해이사금대에 호공(瓠公)과 알지(閼智)가 대보에 임명된 사례가 있다. 고구려에서 유리왕 22년(3) 협보를 대보로 임명한 사례가 있다(《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2년조).
註 182
남해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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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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