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하다 ( 660년 07월09일(음) )

가을 7월 9일에 [김(金)]유신(庾信) 등이 황산(黃山)의 벌판275275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천호산(天護山)의 개태사(開泰寺) 주변의 들판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35, 잡지(雜志)3 지리(地理)3 웅주(熊州) 황산군(黃山郡)조에는 본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대에 개칭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6, 제명기(齊明紀) 6년 7월조의 주(注)에는 신라군이 ‘노수리산(怒受利山)’에 진을 친 것으로 기록되었다.닫기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장군 계백(堦伯)276276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계백전(階伯傳)관창전(官昌傳)에는 ‘계백(階伯)’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계백(偕伯)’으로 기록되었다. 관등은 달솔(達率)이었다. 660년(의자왕 20)에 나당연합군이 침입하였을 때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0,000명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열전7 계백전 참조.닫기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士卒)들은 힘이 다 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欽純)이 아들 반굴(盤屈)277277 신라의 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김흠춘(金欽春) 또는 김흠순(金欽純)의 아들이고, 김영윤(金令胤)의 아버지이다.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아버지를 따라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이 백제의 계백(堦伯)의 결사대에게 4차례나 패배하자 아버지인 김흠춘 또는 김흠순이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목숨을 바쳐서 충효(忠孝)를 다하라고 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김영윤전(金令胤傳) 부(附) 반굴전(盤屈傳) 참조.닫기에게 말하기를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라고 하였다. 반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라 하고 곧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이 아들 관장(官狀)278278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관창전(官昌傳)에는 ‘관창(官昌)’으로 기록되었다. 품일(品日)의 아들로,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16세의 나이에 화랑으로서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이 백제의 계백(堦伯)의 결사대에게 4차례나 패배하자 아버지인 품일이 용기를 보일 것을 권유하여 두 번이나 적진에 돌진하다가 전사하였다. 후에 무열왕(武烈王)이 급찬(級湌)의 관등을 추증하고, 그 집에 견포(絹布)와 양곡 등을 보냈다. 《삼국사기》 권47, 열전7 관창전 참조.닫기 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고 하였다. 관장
“예!”라 하고는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달려 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야!”라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제가 적진 속으로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기를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삼군이 [이것을] 보고 분에 받쳐서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佐平)279279 백제 16관등 중의 최고 관등으로 품계는 1품이고, 복색(服色)은 자주색이었으며, 은화(銀花)로써 관(冠)을 장식하였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고이왕(古爾王)조는 260년(고이왕 27)에 처음으로 좌평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었다.닫기충상(忠常)280280 648년(의자왕 7)에 백제 장군 8명과 대야성(大耶城) 도독(都督)인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유해를 교환하자는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의자왕(義慈王)에게 건의하였다. 660년(의자왕 20)에는 좌평(佐平)으로서 황산벌 전투에 참전하여 신라군에게 패배한 후에 상영(常英) 등과 사로잡혀서 신라의 일길찬(一吉湌)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이 되었다. 661년(무열왕 8) 2월에는 아찬(阿湌)으로서 대당장군(大幢將軍) 품일(品日)을 도와서 사비성(泗沘城)의 구원에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인 문무왕(文武王) 원년 7월에는 상주총관(上州摠管)이 되었다.닫기상영(常英)281281 660년(의자왕 20)에 달솔(達率)로서 나당연합군 중에서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기를 의자왕(義慈王)에게 건의하였다. 같은 해에 좌평(佐平)으로서 황산벌 전투에 참전하여 신라군에게 패배한 후에 충상(忠常) 등과 사로잡혀서 신라의 일길찬(一吉湌)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이 되었다.닫기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註 275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천호산(天護山)의 개태사(開泰寺) 주변의 들판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35, 잡지(雜志)3 지리(地理)3 웅주(熊州) 황산군(黃山郡)조에는 본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대에 개칭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6, 제명기(齊明紀) 6년 7월조의 주(注)에는 신라군이 ‘노수리산(怒受利山)’에 진을 친 것으로 기록되었다.
註 276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계백전(階伯傳)관창전(官昌傳)에는 ‘계백(階伯)’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계백(偕伯)’으로 기록되었다. 관등은 달솔(達率)이었다. 660년(의자왕 20)에 나당연합군이 침입하였을 때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0,000명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열전7 계백전 참조.
註 277
신라의 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김흠춘(金欽春) 또는 김흠순(金欽純)의 아들이고, 김영윤(金令胤)의 아버지이다.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아버지를 따라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이 백제의 계백(堦伯)의 결사대에게 4차례나 패배하자 아버지인 김흠춘 또는 김흠순이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목숨을 바쳐서 충효(忠孝)를 다하라고 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김영윤전(金令胤傳) 부(附) 반굴전(盤屈傳) 참조.
註 278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관창전(官昌傳)에는 ‘관창(官昌)’으로 기록되었다. 품일(品日)의 아들로,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16세의 나이에 화랑으로서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이 백제의 계백(堦伯)의 결사대에게 4차례나 패배하자 아버지인 품일이 용기를 보일 것을 권유하여 두 번이나 적진에 돌진하다가 전사하였다. 후에 무열왕(武烈王)이 급찬(級湌)의 관등을 추증하고, 그 집에 견포(絹布)와 양곡 등을 보냈다. 《삼국사기》 권47, 열전7 관창전 참조.
註 279
백제 16관등 중의 최고 관등으로 품계는 1품이고, 복색(服色)은 자주색이었으며, 은화(銀花)로써 관(冠)을 장식하였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고이왕(古爾王)조는 260년(고이왕 27)에 처음으로 좌평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註 280
648년(의자왕 7)에 백제 장군 8명과 대야성(大耶城) 도독(都督)인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유해를 교환하자는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의자왕(義慈王)에게 건의하였다. 660년(의자왕 20)에는 좌평(佐平)으로서 황산벌 전투에 참전하여 신라군에게 패배한 후에 상영(常英) 등과 사로잡혀서 신라의 일길찬(一吉湌)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이 되었다. 661년(무열왕 8) 2월에는 아찬(阿湌)으로서 대당장군(大幢將軍) 품일(品日)을 도와서 사비성(泗沘城)의 구원에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인 문무왕(文武王) 원년 7월에는 상주총관(上州摠管)이 되었다.
註 281
660년(의자왕 20)에 달솔(達率)로서 나당연합군 중에서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기를 의자왕(義慈王)에게 건의하였다. 같은 해에 좌평(佐平)으로서 황산벌 전투에 참전하여 신라군에게 패배한 후에 충상(忠常) 등과 사로잡혀서 신라의 일길찬(一吉湌)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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